-그 분과의 인연은 행복했나요.

“음...잘 모르겠네요. 그땐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우시지마 씨와 사귄 지 1년이 어느덧 훌쩍 지나버렸다. 그동안 나는 어렸을 적부터 꿈꿔왔던 소설가로 직업을 전환했고 우시지마 씨는 여전히 내가 다녔던 회사의 본부장으로 있다. 지금은 같은 회사를 다녔었을 때처럼 많이 만나진 못 하지만 우시지마 씨의 회사가 국내에서 내로라 하는 서점이었기 때문에 내 책을 출판할 때 본사로 가서 그를 보았다. 나는 운 좋게도 담백한 내용의 사랑 서사와 신비한 감성을 주목받으며 베스트 셀러 작가에 이름을 올렸다. 


“우시지마 씨, 저 왔어요.”

“어, 왔어? 미안하지만 오늘 같이 있을 시간은 없겠군.”


요즘 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많이 바쁜지 오는 매번 이렇게 퇴짜를 맞곤 한다. 매번.


“아..네. 그럼 먼저 가볼게요.”

“아, 히나타. 이따가 퇴근할 때 집 들릴게.”

“네? 아...네...”


이 곳에 올 때마다 들었던 말이다. 예의 상인지 진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말을 들으면서 항상 기대하는 나도 멍청하다. 기대가 충족된 경험은 손에 꼽을 정도기 때문이다. 우시지마 씨가 올 때를 기대해서 몇 시간 전 부터 맛있는 밥을 하고 영화표를 예매해도 집에 혼자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보는 일이 부지기수했다. 기대와 실망감은 비례했다. 어쩌면 실망감이 훨씬 컸을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역시 우지시마 씨가 올거라고 믿지는 않았으나 머릿속에서는 나 혼자 일정을 짜고 있었다. 비참하게도.



‘띵동’

누군가 온 듯 했다. 오늘은 우시지마 씨가 연락도 없이 오지 않아 일찍이 준비했던 저녁을 먹고는 일찍 잠이 들었건만. 3시간 정도 잤을까. 초인종 소리가 나를 깨웠다. 쌀쌀한 방 안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었다. 혹시나 밖에 온 사람이 우시지마 씨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싶었다. 서운한 마음에 잠에 드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요즘들어 바쁜 건 알겠지만 그에게 실망하기를 반복하다보니 그와 사귀는 게 맞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가끔, 아주 가끔 만날 때도 같이 있지만 외롭고 잔잔하다. 같이 있어도 외롭다. 이런 건 이상하다. 이상적이지 않다. 더 이상 우지시마 씨는 나를 원하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나는 아직 당신한테 실망할 정도로 당신을 사랑하는데.


‘띵동’


이불에 잠겨 매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내게 초인종이 생각의 문을 똑똑하고 두드렸다. 초인종 소리는 초인종을 누르는 본인이 누군지 너무나도 궁금하게 만들었다. 사실 다 변명이다. 매일 실망하고 또 실망해도 나는 기다리게 된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자꾸만 제멋대로 행동한다. 나도 안다. 이거 참 이상한 상태인 거. 나 혼자 기대하고 또 나 혼자 실망하고. 괴롭기도 괴롭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걸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괴로운 마음을 가지고도 내 눈은 그를 쫒고 있다는 사실은 나를 더 깊은 바다속으로 빠지게 만들었다.


“히나타.”


그가 왔다. 그저 좋게만 바라볼 수 없는 그가 왔다. 행복했었던, 모든 걸 함께 하고팠던, 사랑의 감정으로 마주 봤던 그를 나는 지금 알 수 없는 복잡한 심정으로 그를 마주보고 있다. 한때는 좋아서 미쳤고, 서로 사랑했었고, 혼자 있는 시간이 1초라도 아까웠었다. 그땐 정말 그랬다. 서로를 열렬히도 사랑했다. 하지만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라는 걸 이제와서 깨닫는다. 나 혼자 아무리 휘둘러도 소리는 나질 않는다. 우리의 손뼉이 마주치지 않았던 시간은 사실 좀 오래된 듯 싶다. 그걸 깨닫고 나는 어쩌면 그를 아주 천천히 놓기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 혼자 기대하다가 나 혼자 실망하고 또 나 혼자 이 관계를 끝내려고 노력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를 지키기 위해. 이 위험천만한 관계 속에서 너무나도 아파할 내가 선명하게 그려졌기 때문에. 


“왜 이리 늦게 오셨어요. 저녁도 했었는데.”

“히나타. 미안해.”

“뭐가 미안해요.”

“너무 늦게 와서. 오늘은 정말로 오려고 했는데 말이지. 갑자기 회식이 잡히는 바람에.”

“괜찮아요.”


괜찮지 않다고, 오늘도 혼자 앉아 혼자 밥 먹으며 적적한 방 안을 당신의 생각으로 채웠다고 말하고 싶었다. 나 오만가지 생각 다 하지만 그래도 결론은 당신을 사랑하는 거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고. 당신이 없으면 안 되는데 왜 그리 나에게는 무심하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싸움은 나에게 독이다. 알고 싶지 않았던,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들이 내 속으로 들어와 내상을 입힌다. 


아직 난 그를 사랑한다.


“술 많이 드셨나보네요. 비틀거려요.”

“아, 오늘 좀 많이 먹었어. 네가 보고 싶어서.”


아직 당신의 말에 흔들리는 나는 어쩔 수 없나봐.


“여기 앉으세요.”


우시지마 씨를 쇼파에 앉히고는 물을 따르러 냉장고로 향했다. 평소 시원한 물을 좋아하는 우시지마 씨를 위해 냉장고에 물을 넣어놓았다. 그게 습관이 되어 나도 모르게 겨울에도 차가운 물을 먹게 되었다. 이렇게 나는 점점 그를 닮아가는데. 점점 멀어져만 가는 이 비참한 현실에 눈물이 날 것만 같다.


“히나타 안 지쳐?”

“네?”


그의 질문은 나를 황당하게 만들었다. 그 질문은 우리 사이에서 도화선이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은 정해져 있었고 안 지친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나는 그를 기다리는 일상에 지쳤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를 자주 볼수도, 그의 뒤에서 기다리는 것도, 나만 손 내미는 것도,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다 지쳤다. 머릿속으론 우시지마 씨가 바쁜 거 다 이해해 줄 수 있는데 마음 속으론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이건 내가 수백 번을 곱씹었던 생각들이었다. 그랬기에 그의 질문에 아니라는 말도 못했다. 아니라고 해야만 했다. 맞다는 대답을 하는 순간 이 관계까지 전부 다 고장이 날 것 같았다.


“아니에요. 제가 왜 지쳐요.”


지쳤다고 소리치는 가슴을 무시하듯, 입꼬리를 올리며 그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를 등지고 웃음을 보였다.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머릿속에서는 나를 계속 타박하고 있는데. 가슴은 답답한데. 


“저 안 지쳤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그대로 우린 정적에 잠겼다. 그런 정적을 깨고자 눈물을 슥슥 닦고는 말을 걸기 위해  뒤돌았다. 우시지마 씨는 서있었다. 쇼파 앞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곤 내 볼을 잡고 내 입에 우시지마 씨의 입을 포갰다. 많이 차이나는 키 때문에 허리를 많이 숙인 우시지마 씨다. 잠시 만났던 입술이 떨어지고 그 입술은 내게 전언을 보냈다.


“난 이런 것도 할 수 없이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에지쳤는데.”


다시 한 번 두 입술이 맞닿았다. 점점 더 격해지는 입맞춤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해왔는지, 서로가 서로를 갈망하고 갈구했다. 계속 사랑한다고 말해도 끊임없이 깊어져가는 밤의 별은 까만 밤 하늘 속에서 두 사람을 위해 반짝였다. 


감정이 뒤섞였다.




며칠 전 우시지마 씨를 우연히 본 적이 있었다. 그것도 호텔 로비 앞에서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 나를 사랑한다며 속삭인 게 3일 전인데. 심장이 쿵하고 떨어져 버렸다. 마음이 무거운 만큼 땅에서는 진동이 더 크게 울리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몇 시간을 쇼파에 앉아서 생각을 했다. 남자인 나와 남자인 우시지마 씨와 다른 여자와 우시지마 씨. 현실적으로 나와 우시지마 씨는 떳떳하지도, 평생을 가약하기도 힘들다. 더군다나 우시지마 씨는 한 회사를 이끌 사람이다. 혹여나 그 결혼이 사랑이 없는 결혼이라고 해도, 사랑이 없는 연애라고 해도 나는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만 바라봐야 하는 눈동자가 다른 사람을 향하는 걸 보면 나는 견딜 수 없겠지 아마. 내 속은 타들어만 갈거야. 아마. 많이 눈물을 흘리겠지. 아마.

그래도 난 이해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내 마음이 그를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날 호텔 로비에서 그를 보고 난 후 나는 그에게는 한동안 찾아 가지 않았다. 그에게서 어떤 이유도 바라지도 않았다. 하물며 그도 바빴는지 나를 찾아오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그에게 자꾸 실망을 하는 내가 너무 바보같았다. 차라리 일을 해서 다른 생각을 하지 못 하도록 해야만 했었다. 그래서 나 또한 새로운 책 출판을 위해 바쁜 나날을 보냈다. 


‘띵동’


쌀쌀한 기운이 감도는 집안에 초인종 소리와 타자키 소리만으로 가득 채워졌다. 초인종이 남긴 여운은 길었다. 잊을만 하면 찾아오는 소리였다.


“아 밖에 춥다.”


아무렇지 않게 들어오는 그였다. 어차피 나만 모른 척 하면 될 일이었다. 소설을 쓰느라 곤두세워져 있던 아니, 우시지마 씨에게 곤두세워져 있는 신경은 억지 미소 또한 내보내주지 않았다. 그를 쌀쌀한 공기로 맞이 하였다.


“저 글 쓰는 중인데. 갑자기 왜 오셨어요.”

“우리가 연락 안 하면 못보는 사이였나. 언제 그렇게 삭막한 사이가 되버린거지.”

“아무튼 저 글 써야하니 밥은 알아서 드세요.”

“쌀쌀맞긴. 밥은 먹고 왔으니 됐어.”


그런 그를 한번 바라보고는 책상에 앉아 다시 노트북을 응시했다. 그렇게 글 쓰는 것을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왜 그렇게 보고 있어요.”

“일 하는 거 섹시해.”


그렇게 말해오는 우시지마 씨 때문에 얼굴이 붉혀졌다.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에 곤두세워진 신경은 꼬리를 내리고 심장의 운동을 더욱 빨리 진행시켰다. 


“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의자에 앉아있는 나에게 그는 천천히 다가왔다. 나의 눈을 몇 초 응시하더니 나를 덥썩 잡더니 공주님 안기 자세로 나를 들어올렸다. 그리곤 침대에 눕혔다.


“안경, 좋은데 지금은 벗자.”


그렇게 우린 한 번 더 사랑을 나눴다. 어차피 나를 아프게 할 거면서 왜 자꾸 착각하게 만드냐며 따져야 했어야 했는데. 그의 손길을, 그의 입술을 나는 거절 할 수 없었다. 사랑을 나누면서도 이제 그에게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그를 지독히도 사랑한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나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내가 아닌 누군가와 결혼을 해야하고 나보다는 다른 것을 지켜야하고 소중히 여겨야 했었다. 그때 호텔 로비에서 봤었던 것도 나는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었다. 앞으로 이 사람의 앞날은 창창했고 나에게 그런 앞날을 망칠 계획 따위 없었다. 결국 그는 내가 아닌 다른 것들을 선택 할 것이고 그의 뒤에서 바라보기만 한다는 건 이미 지쳐버렸다. 그럼에도 나는 그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이미 우시지마 씨로 가득 차버린 내 머리가 더 나빠지기 전에 어떻게든 이 실을 끊어야 하지 않을까. 

그를 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이성적인 선택인 것을 알지만서도 내 뜻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 모든 상황들이 엮이고 엮어 나를 옭아매고 있는데 그의 유혹 하나로 다 무너진다는 게 참. 그냥 이번이 마지막이다 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서로 잡아먹을 듯 사랑을 나누는 것도 딱 이번이 마지막인거다. 그런 거야.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오늘 꺼낸 기억은 어떠셨는지요. 

“...한심하네요, 바보 같고.”

-그렇군요. 


“수많은 이별 속에서도 그를 사랑했었네요.바보같이...”





뺭삐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