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CU:CA STUCKY 스팁버키 소설 개인지
◈ A5/136p/컬러표지/전연령가
◈ 12,000원
◈ 2017.12.10. 동네 <히어로 온리전>

◈ 표지 디자인 파자(@PazaJJ)
◈ 통판 폼 : http://naver.me/5FuC8jRh



고양이 집사의 조건 표지


SAMPLE

1



스티브 로저스는 와칸다 왕궁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 그 바깥에 있었다. 딱히 푸대접은 아니었다. 그가 왔다 갔다 하는 프라이빗 섹션 옆이 라몬다 병원이었고, 거기에 버키 반즈가 입원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티브는 초조하게 시간을 체크하며 트찰라의 도착을 기다렸다.

버키 반즈가 느리게 해동되는 과정 동안 안정을 찾기까지 가능하면 사람의 접촉을 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의사가 권유했다. 스티브 로저스는 당연히 의사의 말을 따랐다. 사실 의사의 말보다는 얼어붙기 전에 한 버키의 농담 때문이었다. “하도 급해서 우악스럽게 끌어내고 도망가자면서 깨우는 건 아니겠지?” 하이드라에서 어떤 식으로 그가 냉동에서 일으켜 세워졌는지, 어떻게 정신을 차릴 시간조차 없이 고문을 했는지 알게 된 후 스티브는 곧 죽어도 최우선으로 안정을 생각했다. 자신의 그리움 따위가 끼어들 일이 아니었다. 얼어붙은 장기가 천천히 생체 활동을 다시금 시작하며 정신을 차리고 고요하게 생각할 시간이 버키 반즈에게는 필요했다. 스티브는 적어도 그 점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았다.

해동 후 안정된 다음에도 버키 반즈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메탈암을 다시 달기 위해 병실과 대학을 왔다 갔다 했다. 중간중간 세뇌 코드 해제에 대한 연구도 하며. 어떤 면에서는 만족스러웠고, 어떤 면에서는 불만족스러웠다. 만족스러운 부분이라면 버키가 더 이상 도망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점(스티브의 상상 속에서 일어난 불길한 모든 일이 없다는 것 포함)이었고 불만족스러운 부분이라면…… 이를테면 스티브는 버키와 적어도 아침에 일어나서 굿모닝 인사를, 그리고 또 땀에 절어 밤늦게 돌아온 버키에게 굿나잇 인사를 하는 외의 대화를 하고 싶었다. 지금으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스티브에게는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쌓여 있었고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볼 시간이 필요했다. 짧은 행동, 스치는 듯한 말 한 마디 속에도 그가 버키 반즈이며 누구보다 가장 스티브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뚜렷했고 스티브는 잔잔한 기쁨을 느꼈지만, 그 기쁨이 잦아들고 기쁨이 일으킨 파동을 혼자 느낄 때엔 함께 찬찬히 보낼 시간 역시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한 번은 단순히 잠든 버키의 얼굴이라도 보기 위해 버키가 입원해 있는 병실에서 보호자 침대를 놓고 함께 있으려고 했다. 잠든 얼굴이라도 보고 싶다는 마음이야 어쨌든 계획은 좋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장렬한 실패로 끝났다. 세뇌 치료와 동시에 팔을 다는 일로 보통 사람보다 체력이 좋은 버키도 체력 바가 너덜너덜해져서 돌아왔는데, 그렇게 피곤해하면서도 같은 공간에 누군가 있자 제대로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밤새도록 뒤척이고 피곤으로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가 곧바로 팽팽하게 잡아당겨 일어나고 옆의 숨소리가 스티브 로저스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버키를 보고 스티브는 단념하고 원래 머물던 숙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시작이었다. “안녕, 좋은 아침이야.” “잘 자.”

오늘에서야 겨우 메탈암이 제대로 작동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와 트찰라와의 면회가 끝난 후에 이제 드디어 버키 반즈와 넉넉하게 대면할 시간이 생기는 것이다. 도라 밀라제를 호위로 뒤에 세운 트찰라가 약속시간에 어긋남 없이 도착했을 때 스티브가 벌떡 일어나며 더할 나위 없이 기쁜 목소리로 그를 맞이했다.

“폐하.”

“아주 기뻐 보이는군.”

트찰라가 점잖게 웃으며 말했다. 트찰라 쪽으로도 버키 반즈의 소식은 정확하게 전달되고 있었고, 그는 또한 이 면담 이후에 스티브의 스케줄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스티브 로저스가 이토록 열렬하게 트찰라를 맞이하는지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라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스티브는 속내를 환하게 읽힌 기분이 들어 멋쩍게 미소 지었다.

트찰라가 서류를 건네받으며 다시 입을 떼는 순간이었다. 고요한 프라이빗 섹션에 비상 알람이 울렸다. 알람 소리에 트찰라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가 한순간에 다시 차분해졌다.

“무슨 일이죠?”

이상을 감지하고 반사적으로 트찰라를 향하는 스티브의 얼굴에서는 이미 웃음기가 순식간에 걷혀나간 후였다. 트찰라는 잠시 스티브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가 그 안에서 대꾸했다.

“절도범이 침입해 들어왔다는 알람이다.”

트찰라는 그리고 오코예에게 고개를 돌려 그들의 공용어인 코사어로 빠르게 무어라 지시했다. 뿌리가 같은 프랑스어는 금방 귀에 익었었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언어는 귀를 쫑긋 세워 주의 깊게 들어도 단어의 캐치조차 힘들었다. 호위 한 명이 들어와서 짧게 상황 보고를 했다. 보고를 받는 도중에 트찰라의 표정은 단지 돌처럼 완고하고 감정의 흔적이 없었기 때문에 말이 들리지 않는 이상 어떤 정보인지 스티브는 추측이 어려웠다. 그러나 좋은 소식일 리는 없다. 그의 인생에서 이러한 순간에 ‘무사히 잘 끝났답니다’로 끝나는 경우는 없었다.

보고를 받은 트찰라가 다음 지시를 내리자 도라 밀라제 중 두 명이 나갔다. 난감해하며 귀를 기울이고 있는 스티브를 눈치챈 트찰라가 다시 영어로 바꿔 그에게 말했다.

“셔터 중 일부가 해킹당해서 닫히지 않았다고 하는군. 걱정할 필요 없소, 버키 반즈가 아니라 와칸다 비보에 관련된 일이니.”

“버키의 일이 아니더라도 물론 도움을 드릴 수 있다면 기쁠 겁니다.”

트찰라는 이를 드러내며 조금 흉포하게 미소를 지었다.

“물론 당신에게 쫓긴다면 절도범도 끔찍해하겠지.”

스티브 역시 씩 웃었다. 트찰라는 등을 소파에 기대고 손깍지를 끼었다.

“그것은 전사들에게 주어지는 상이오.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힘을 주지. 와칸다에서만 나는 약초에 특별한 가공을 한 것이고, 정제되어 지금은 다음 블랙 팬서를 위해 금고에 보관되어 있었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스티브는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그 소리는 반대편인 창문에서 나는 소리였다. 곧 버키의 고개가 쏙 창문에서 올라오더니 물었다.

“Dead or alive?”

단순명료하고 평탄한 말투였다. 그는 아직 버키의 이러한 기계적인 말투에 적응하지 못했다. 스티브가 알던 버키에게는 없는 버릇이었고, 스티브가 알던 버키는 조금 점잔빼는 투가 있긴 했어도 늘 감정에 풍부했다. 스티브는 버키의 새로운 버릇에도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어쨌든 이러한 적응 역시도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들에겐 아직 주어지지 않은 시간이.

트찰라는 손가락에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대며 대답했다.

“무엇보다 탈취된 약병을 빼앗거나 부수는 것을 우선으로.”

“알겠어.”

버키의 고개가 짧게 끄덕이더니 휙 사라졌다.

“버키!”

스티브가 당황해서 소리치고는 자신도 벌떡 일어났다.

“7층 정도로 굳이 놀랄 일은 아니지.”

재미있다는 듯이 트찰라가 웃었지만, 스티브는 웃을 수 없었다. 그는 당장 버키가 떨어져 내린 창문으로 달려갔다. 아래를 확인한 스티브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버키 때문에 애타는 한숨을 푹 쉬고, “저도 가보겠습니다, 폐하.”라고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하며 자신 역시도 그 아래로 뛰어내렸다.

“슈퍼 솔져들이란……. 급하기도 하군.”

오코예가 긍정적인 미소를 지었다.

“물론 폐하를 포함해서도 그렇죠.”


*


한편, 7층에서 뛰어내려온 버키는 곧바로 자신이 선택할 만한 통로로 향했다. 첨단 방비가 되어 있지 않은 지하.

와칸다엔 함부로 반출할 수 없는 귀중한 것들이 많았고 지키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등록 시스템을 철저하게 준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스위치 하나로 블록으로 구분된 모든 복도를 완전히 닫고 수면 가스를 분사할 수 있었으며 해지는 국왕과 블랙 팬서, 그리고 그에 준하는 몇 명만이 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버키가 침입자이지 않은 이상 알 수 없는 또 수많은 함정과 방책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와칸다는 어떠한 방비도 완벽하지 못하며 침입자는 항상 교묘하게 방비를 뛰어넘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 역시도 주지하고 있었다. 와칸다는 그래서 튼튼한 벽으로 절도범의 선택지를 하나하나 줄여나가며 좁은 틈을 몇 개 의도적으로 만들어 그곳으로 빠져나오도록 유도했다. 그 틈을 블랙 팬서나 도라 밀라제와 같은 뛰어난 전사가 막는 것이다.

트찰라가 비상사태를 대비한 몇 가지 길을 넌지시 알려준 후에는 버키 반즈의 눈에도 역시 그 틈은 보였고, 그는 이곳으로 절도범이 올 것을 거의 확신했다. 지하의 복도였다. 오히려 와칸다 더 깊숙한 심층으로 향하는 꺾어지는 복도에서 버키는 몸을 감추고 기다렸다. 이곳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통하는 길이었고, 버키 자신도 왕궁 뒤의 사원에서 무언가를 훔쳐낸 후 도주하려면 이 통로를 먼저 고려해봤을 것이다.

와칸다의 전사 한 명이 조용히 그 근처에 왔고 버키는 보일 듯 말 듯 천장 통로 쪽을 향해 턱짓했다. 에어컨디셔너의 소리처럼 일상적인 소음에 섞여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법한 아주 부드러운 소리가 났다. 누군가 아주 조심스럽고 느리게 기어오고 있는 소리였다. 전사는 귀를 기울였고 그도 곧 무언가의 소리를 구분해서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나 계속 집중하지 않으면 확신할 수는 없었다. 작게 삐걱거리는 소리는 다시금 뒤돌아 가는 것 같기도 하고 앞으로 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그 자리에 멈춰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전사는 자신의 귀를 지나치게 신뢰하기보다 차라리 눈앞의 낯선 이방인, 버키 반즈의 시선을 따라가는 게 낫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버키의 눈은 확신을 가지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천장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빤히 복도의 천장을 올려다보던 버키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전사를 돌아보며 수신호를 보냈다. ‘동료?’ 전사는 콧방귀를 뀌는 시늉을 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짧게 미소지은 버키가 발자국 소리 없이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단숨에 벽을 박차고 천장으로 뛰어올라 두터운 시멘트를 부쉈다. 천장 위에서 놀란 비명이 바닥으로 꼬리를 물고 떨어졌다. 버키가 시멘트를 뚫은 왼손으로 그를 잡아 바닥으로 내리꽂았기 때문이었다. 부서진 시멘트 더미, 그리고 자욱한 먼지와 함께 바닥에 내리꽂힌 절도범은 바닥에 개구리처럼 뻗어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도 하지 못한 채 고통에 신음했다. 버키는 그 옆에 쾅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이젠 소리를 죽일 필요도 없으니 그를 위협하려고 했던 것뿐이었다. 버키는 당연히 그를 죽일 마음은 없었다. 첫 번째 공격에서 그를 살려두고 단지 바닥으로 끌어내린 순간부터 그러한 사실은 자명했다. 물론 몇 군데 뼈가 부러지거나 기절해서 한동안 일어나지도 못하게 만든다거나 하는 도망치지 못하게 할 수단은 몇 가지 생각했지만 그뿐이었다. 버키는 그저 와칸다를 위해 빨리 일을 처리하고 싶은 마음이었고, 트찰라가 말한 약병을 가능하면 깨지지 않은 채로 되돌려 주고 싶었다.

그러나 절도범의 입장에서는 전혀 달랐다. 갑자기 불쑥 바닥을 부수며 나타난 메탈암에 위아래가 바뀌고 내동댕이쳐져 패닉한 상태에서 묵중하게 자신의 옆을 내리찍는 진동과 밟혀 날카롭게 박혀오는 시멘트 조각을 느끼자, 즉각적인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그는 앞뒤 구분하지 못하고 대인용으로 준비한 섬광탄을 던져 터트렸다. 복도의 벽에 부딪쳐 떨어진 섬광탄이 폭발하며 강력한 섬광과 폭음이 명치를 후려쳤다. 아주 가까이에서 터졌지만 미리 눈을 감고 소리에도 대비하고 있던 절도범은 그 충격에서 즉시 회복하고 자신을 이곳에서 탈출시켜 줄 것에 매달렸다. 블랙 팬서를 위한, 즉 최강의 전사를 수호자로 끌어올리는 와칸다의 비보에. 절도범은 움츠린 채 약병의 뚜껑을 열었다. 병 속 밀봉되어 있던 액체는 공기에 닿자 기화되어 안개처럼 뿌연 연기가 되어 빠져나왔다.

은은하고 매캐한 냄새와 함께 영약을 들이마시려던 절도범은, 예상보다 더 빠르게 손을 걷어차는 발에 놀라 움츠리고 기를 쓰며 품안으로 팔을 끌어당겼다. 연이어서 묵직한 잽이 파고들어와 약병을 빼앗아 가려 했다. 깊이 들이마셔야 했지만 버키의 공격에 맞으며 폐에서 숨이 쥐어 짜여 뱉어지기만 하고 크게 들이마실 수 없었다. 그래도 절도범은 허겁지겁 코를 더 가까이 댔다. 조금도 낭비되는 일 없이 들이마셔야 했다. 깊이, 이 뿌연 연기가 폐에 들어가 산소와 함께 실려 몸의 전체로 퍼져 나가야 했다. 그러면 그 역시도 신의 힘을 가진 인간이 되는 것이다.

급한 것은 버키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도 아예 섬광탄의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섬광탄의 폭발한 열기에 닿은 왼쪽 허벅지와 종아리에는 화끈하게 살이 타는 자글자글한 느낌이 있었고, 강렬한 빛과 소리는 방향 감각을 완전히 흩뜨려놓았으며 눈앞은 계속해서 깜빡거렸다. 그러나 그는 윈터 솔져였다. 어떤 상황에 내던져진다고 해도 빠르게 적응할 수 있게 고문과 훈련이 수없이 반복되어 몸에 배어 있었다. 그는 곧 완전히 엉뚱하게 팔다리를 휘두르지 않을 정도의 자제력을 되찾았다. 그러나 절도범이 또 독이나 생화학 테러를 하리라는 불안감이 버키를 조급하게 했다.

버키는 자신이 아직 완전히 정상이 아니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강하게 절도범의 한쪽 팔을 잡아 비틀고 팔꿈치로 등을 내리쳤다. 절도범의 몸이 반사적으로 앞으로 고꾸라지며 아귀힘이 풀어졌다. 절도범은 뼈가 부러지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발길질을 하려고 했고, 버키는 더 세게 팔을 비틀며 절도범의 손에서 약병을 떨어뜨렸다. 약병이 바닥을 구르며 희고 뿌연 연기가 되어 확 퍼져 나왔다. 버키는 설마 비보를 여기에서 쓸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것을 독약이라고 생각했다. 절도범이 바닥에 흩어지는 연기를 보며 끓는 목소리로 “안 돼, 안 돼!”라고 외쳤기 때문에 더욱 더.

“도망가!”

버키는 전사가 있던 자리를 어림해서 절도범을 내던졌다. 섬광탄의 화약 연기 냄새에 섞여 풀 냄새 비슷한 냄새가 진하게 나기 시작했다. 버키는 숨을 참으며 왼손으로 약병의 입구를 찾았다. 딱딱한 왼손과 약병이 따각따각 하는 소리를 내며 맞부딪쳤다. 조급한 손가락이 곧 입구를 더듬어 틀어막았다. 안심하는 것도 잠시 그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버키는 현기증에 무릎을 꿇었다.

“괜찮아?”

귀가 먹먹하고 울려서 아주 멀리서 전사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울부짖는 절도범의 목소리도 어렴풋이 한쪽 귀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버키는 눈을 치뜨려 애쓰며 입을 벌렸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


“그래서 그가 고양이가 되어버렸단 말이지.”

“예, 폐하. 섬광탄 때문에 잠시 주의가 흐트러진 틈을 타 절도범이 영약을 마시려고 했고 반즈는 그것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도망가라고 하며 절도범을 제게 던졌습니다. 그 뒤로 갑자기 비명을 지르고 작아지더니…….”

스티브는 황망한 채로 전사의 설명을 들었다. 둘 모두 스티브를 배려해 영어로 대화하고 있었지만, 글쎄, 영어라고 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옷가지와 양말, 하다못해 허벅지에 숨기고 다니던 작은 나이프 등도 마치 그 안의 버키 반즈만 사라진 것처럼 고스란히 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전사의 말대로라면 그 안에 들어있던 육체가 갑작스레 졸아붙듯이 작아져 허물처럼 떨어져 내린 것이다.

스티브는 속으로 열 번쯤 ‘인터넷이 존재하고, 거대한 배가 하늘을 떠다니고, 묠니르를 가진 토르나 로키도 있고, 아홉 세계가 있고, 외계인도 있는데 와칸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할 말 없음.’을 되뇌고 ‘대체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하고 외치고 싶은 것을 꾹꾹 누른 다음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래서 버키는 어디에 있죠?”

전사는 손가락으로 복도의 뚫린 천장을 가리켰다.

“어떻게든 저 위로 올라가서 숨었습니다.”

스티브는 고개를 들었다. 뚫린 천장은 어두운 구멍과 같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나중에 알아도 상관없었다. 적어도 저런 어두운 곳으로 계속해서 도망가게 둘 수는 없었다. 그러한 경험은 이미 충분했고, 당연히 지금 버키 반즈는 도망갈 필요도 없었다.

“버키! 괜찮아?”

한참만에 작게 미야옹, 하고 우는 소리가 들렸다. 버키의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스티브는 이 목소리 역시도 버키의 목소리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천장 위에서 작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뚫린 구멍 쪽으로 고양이가 빼꼼하게 고개를 내밀었다. 검은 모피에 가슴털이 하얀 턱시도 고양이였다. 한쪽 팔은 얼핏 보았을 때 흰 털인 줄 알았으나 의수로 보였고(‘세상에, 의수는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아냐, 됐어. 인터넷이 존재하고, 거대한 배가 하늘을 떠다니고, 묠니르를 가진 토르나 로키도 있고, 아홉 세계가 있고, 외계인도 있는데 와칸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할 말 없음.’) 나머지 세 발은 솜방망이 부분만이 하얬다.

“버키.”

고양이의 눈은 겁에 질려 동공이 세로로 아주 좁게 움츠려 있었고, 그래서 검은 모피 위에서 선명한 눈동자의 색을 아주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회색, 혹은 녹색이 섞인 부드럽고 깨끗한 푸른색이었다. 스티브는 이러한 색의 눈동자를 잘 알았다. 전사가 다시 한 번 확인해줄 필요도 없었다. 이 고양이가 버키 반즈였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몰라도 스티브 로저스는 그 사실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야옹.”

기어들어가는 듯한 작은 소리였다. 고양이는, 그러니까 버키는 스스로 낸 소리에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트찰라가 옆에서 턱을 문지르며 “성대가 달라져서 사람의 말은 하지 못하나보군.” 하고 중얼거렸고, 전사 역시 자신의 눈으로 봤어도 믿지 못하고 놀란 얼굴인 채 버키를 올려다보았다.

“내려 와. 같이 가자.”

스티브는 딱 버키가 뛰어내릴 만한 장소에 자리 잡고 두 팔을 벌렸다.

“내가 잡아줄게.”

버키는 아래를 가늠하듯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웅얼대는 듯한 소리가 버키의 목에서 빠져나왔다. 특유의 체념하는 표정이 고양이의 얼굴에서도 또렷하게 보였다. 버키가 비틀거리며 자세를 잡고는 마침내 폴짝 스티브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스티브는 이제야 안도하고 품 안에 뛰어든 버키를 살짝 껴안았다. 고양이가 된 버키는 털을 부풀리고 있었지만 아주 작았고 부드럽고 뜨거웠다. 아직 공포의 냄새가 그 털 주변에 올올하게 감겨 있어서 스티브는 서투른 손놀림으로 털을 가라앉히며 쓰다듬었다.

스티브는 버키를 끌어안은 채 트찰라와 천천히 병원으로 다시 향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검사를 해야 했고, 또 버키의 다리가 섬광탄에 약간 타버려 진물이 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여든 의사와 간호사는 다들 호기심과 경악으로 가득 찬 얼굴이었다.

“이 고양이가 버키라고요?”

버키가 고개를 홱 돌렸지만 버키 반즈를 담당했던 주치의는 여전히 믿기 힘든 광경을 보는 얼굴로 의수를 응시했다. 주치의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버키는 송곳니를 벗기고 기분 나쁜 기색을 드러냈지만 다행히 도망치지는 않았다. 아마 스티브가 울망울망한 눈을 마주치며 입모양으로 도망가지 마, 하고 속삭였기 때문일 것이다.

“맞네요, 바로 오전에 제대로 작동되는 걸 확인한 그거예요…….”

사람이 고양이로 변해 돌아온 이 초유의 사태에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경악을 감추고 침착하게 있으려 할 뿐이었다. 다들 어쩔 줄 모르고 있는 가운데 트찰라가 말했다.

“와칸다의 영약을 반즈가 마셔서 일어난 일일 지도 모르겠소. 자격이 없는 자가 마시면 그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저주를 받아 짐승이 되어버린다고 했으니.”

“과거에도 있었던 일이군요.”

스티브가 저주 부분을 못 들은 척 하고 약간 안도해서 트찰라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포함해서 다들 놀란 얼굴인데 트찰라 혼자서 침착한 얼굴이었던 것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와칸다의 비보라고 하더니 모든 사람이 그 정보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어떻게 해야 원래대로 돌아옵니까?”

주치의가 트찰라에게 물었다. 그도 경악에서 벗어나 원래대로의 태연함을 찾고 있었다.

“하는 김에 화상을 입은 다리도 고쳐야 되니까 갈 길이 머네요. 퇴원시키는 줄 알았는데. 그 방법, 오래 걸립니까?”

주치의가 다리를 살피며 말했고 트찰라는 침착하게 턱을 문질렀다.

“글쎄, 저주 받은 자는 그대로 죽여 버려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겁을 한 스티브가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버키를 재빨리 안아들고 입원실 밖으로 튀어나갔다. 닫혀있던 문의 경첩이 뜯어져 나가고 구르고, 스티브는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며 구경하려던 사람들을 밀치며 눈 깜빡할 사이 복도 끝까지 달려가서 사라졌다. 트찰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옛날 얘기인데.”

주치의가 당혹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그 말씀을 먼저 하셨어야죠, 폐하.”







MCU:CA STUC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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