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금 주의

*욕설 주의

*폭력행위 묘사 주의








아직 깊은 잠에 들지 못한 시각이었다.
진은 눈을 감은 채 쥐 죽은 듯 고요한 밤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어두 컴컴한 방안은 밤이 무르익어 가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그때였다. 조용히 누군가가 진의 방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는 조심스럽게 방안으로 들어와 진의 옆에 누웠다. 제 코를 찌르듯 풍겨오는 알코올 냄새에 진은 얼굴을 구겼다. 누군가는 몸을 돌린 채 있는 진의 등 뒤로 자신의 몸을 밀착하였다. 그러곤 제 더럽고 추악한 손으로 진의 몸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진은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럼에도 누군가 아니, 그 남자는 신경도 안 쓰는지 진의 옷안으로 제 손을 넣었다. 마치 수천 마리의 개미들이 제 몸을 기어 다니는 것만 같았다. 남자는 진의 유두를 지분거리더니 이내 자신의 것을 진의 엉덩이에 비비기 시작했다. 진은 조용히 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조용한 진의 태도에 깊은 잠에 들었다고 생각한 남자는 더욱 대담하게 진의 바지와 드로즈마저 벗겼다. 남자의 손보다 더욱 더러운 구역질이 날 것 같은 것이 제 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남자의 거친 신음 소리가 진의 귀에 들려왔다. 당장이라도 가능만 한다면 제 귀를 뜯어버리고 싶었다. 몇 분 후 남자의 떨림과 함께 입을 막은 진의 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오늘은 하루 종일 모든 것이 불쾌했다. 엄마가 차려준 아침도 몇 숟갈만 먹고 내려놓았다. 등굣길에 그늘이 져 있는 제 얼굴을 펴주겠다며 던지던 야스오의 농담도 전혀 유쾌하지 못했다. 오늘도 저를 빤히 보며 말을 거는 케인에게 이러다가 주먹이라도 꽂을 것 같아 케인이 나를 보는 것 같으면 그냥 엎드렸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는 시간이었다. 점심시간을 앞둔 4교시 수업임에도, 생윤 수업이 수면제인 건 여전했다. 진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잠깐 눈을 감는다는게 아예 엎드려 자버렸나 보다.

"일어났어?"



"뭐야.. 이건"

진은 제 눈 위에 있는 커다란 케인의 손을 바라보았다.




"아, 햇빛이 너 얼굴을 비추길래, 뜨거울 까봐"

케인은 싱긋 웃으며 제 손을 거두었다.




"밥 먹으러 갈까?"



"...너랑?"



"응"


"나 친구 있는ㄷ..."



"진!"

교실 뒷문이 열리고 진을 부르는 야스오가 서 있었다.
케인은 표정을 굳힌채 조용히 야스오를 바라보았다.




"밥 먹으러 가자, 배고파"

야스오는 진 옆에 앉은 케인을 무시한채 진의 손을 잡고 진을 일으켜 세웠다.




"저기, 나도 같이 가면 안될까?"

케인이 진의 손을 잡은 스오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케인은 굳었던 표정은 온데간데 없는 밝은 미소를 보였다.



"싫은데?"

꽤나 거절하기 힘든 케인의 표정에도 야스오는 일말에 망설임도 없이 거절하였다. 그럼에도 케인은 미소를 유지하였다.



"나 밥먹을 친구가 없어서 그래 오늘만 같이 먹자, 진 너는 괜찮지?"



"응..? 어.. 그럼"

갑자기 저를 부르는 케인에 진은 얼떨결에 좋다고 대답을 하고 말았다. 진의 대답에 야스오는 인상을 구기더니 이내 제 팔을 잡고 있는 케인의 손을 뿌리쳤다.



"빨리 나오기나 해"

야스오는 성큼성큼 교실 밖으로 나갔다. 야스오의 화난 듯한 뒷 모습과 저를 번갈아 보는 진과 눈을 마주친 케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 점심은 야스오가 지금까지 먹어 온 점심 중에서 최악에 점심이었다. 고기 없이 생선과 푸른나물만 나온 점심도 이것보단 좋은 점심일 것이다. 점심 메뉴가 별로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오늘 나온 돈가스와 김치볶음밥은 잘 나온 편이었다. 야스오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은 점심 메뉴가 아니었다. 바로 저 앞에 재수 없는 얼굴을 한 채 능구렁이처럼 진 옆에 붙어 있는 케인이었다. 케인은 뭐가 할 말이 많은지 시도 때도 없이 진에게 말을 걸었고 진은 그저 순순히 다 받아주고 있었다. 별 유쾌한 내용도 없는 것 같은데 뭐가 재밌는지 진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져있었다.




"아 맞아, 야스오라고 했나?"

한참을 진과 얘기를 나누던 케인이 저 앞에 앉아있는 야스오에게 말을 걸었다.



"어 너는, 케인?"



"응, 맞아 어떻게 알았어?"



"진이 얘기해 줬거든"



"그래? 근데 너희 둘은 언제부터 친해진 거야?"



"초등학교 때부터"



"응, 야스오가 우리 동네에 이사 오고 전학 온 날부터 친해졌어"



"그때부터 항상 같이 다녀"

야스오의 말에 케인은 급식판에 담아진 돈가스를 젓가락으로 자르며 말했다.



"그럼 등하교도 매일 단둘이 하는 거야?"



"응 맞아"

진의 대답에 케인은 놀랍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뭐, 점심도 매일 같이 먹어 오늘은.. 아니지만"



"가만 보니까, 야스오는 진을 엄청 아끼는 것 같아"



"맞아, 엄청 아끼지. 진 주변에 워낙 이상한 놈들이 꼬여서 말이야"

야스오는 보란 듯이 케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케인은 그런 야스오의 시선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싱긋 웃으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래? 진 너도 동의해?"

옆에서 조용히 볶음밥을 오물거리던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워낙 진이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말이야"



"그럼 야스오, 너는 있고?"



"진보다는 있지"

야스오의 대답에 케인은 웃긴 듯 피식거렸다.



"야스오 네가 말하는 거 들어보면, 진을 아무 판단 못하는 어린애로 생각하는 것 같아"



"뭐?"



"이제 2년 후면 성인이 되는 나이인데, 곁에 있는 사람이 좋은 애인지 나쁜 애 인지는 충분히 판단할 수 있지 않나 싶은 거지"



케인의 말에 진은 숟가락질을 멈췄다.



"무슨 부모님도 아니고 아니, 부모님도 이렇게까지 하면 문제지 안 그래?"




진은 마치 머리를 한대 맞은 것 같았다. 케인의 말은 틀린 것 하나 없이 너무나도 정확했다. 진은 어린애가 아니었고, 충분히 사람을 분별할 수 있는 나이였다. 그걸 잘 알고 있음에도 진은 계속 야스오에게 맡겨왔다. 아니 야스오가 제멋대로 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야스오는 항상 진의 곁에는 자신만 있게 만들었다. 진의 옆은 무조건 자신이 있어야 했고 자신만 있어야 했기에 진을 철저히 다른 사람들과 고립시켰다. 진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외면할 뿐이었다. 이를 당당히 직면하게 될 경우 더 이상 야스오와의 관계는 이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케인의 말은 그동안 외면해 왔던 것을 진의 눈앞에 들이대는 것이었다. 아침의 불쾌한 기분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뭐, 진이 괜찮다면 문제 될 건 없지"


케인의 말 이후 조용해진 분위기에 케인은 해맑게 웃으며 상황을 환기 시켰다. 곧이어 케인은 주제를 바꿔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화에 참여했지만 밥은 제대로 먹지 못했다. 진은 토기가 올라올 것 같은 느낌에 둘이 식사를 마칠 동안 밥알만 세고 있었다.














"우욱- , 커억!"

결국 불편한 분위기 속 점심이 속에 얹히고 말았다. 진은 급히 수업 시간에 빠져나와 화장실에서 먹은 것들을 게워냈다. 먹은 것도 없어, 의미 없는 헛구역질만 반복했다. 진은 비틀거리며 변기물을 내리고 화장실 칸에서 나왔다.  진 앞에는 언제 온 건지 걱정스러운 표정의 케인이 서 있었다.




"괜찮아?"



대답을 하려 입을 열면 다시 토기가 올라올 것 같아 진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것 같은데, 보건실 데려다줄까?"


진은 고개를 절로 흔들며 케인을 지나쳐 화장실 세면대에 제 손을 씻었다. 물소리가 화장실 전체에 울려 퍼졌다. 순간 눈앞이 뿌예지며 밀려오는 어지러움에 진은 손을 다 씻고서도 한참을 세면대를 잡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어지러운 속만큼이나 머리도 어지러웠다. 누가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닌 것처럼 멍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진의 상태를 알아본 케인이 진의 팔을 제 어깨에 올려 부축하는 자세를 취했다.


"진, 보건실 가자"


".. 그래"


진은 힘겹게 대답을 했다. 빈혈과 함께 온몸에 힘이 다 빠진 기분에 진은 거의 케인에게 기대다시피 화장실을 나와 복도를 걸어갔다. 비록 얄팍한 몸을 가졌지만 반에서 키가 제일 큰 남학생이 몸에 힘을 다 뻰채 기대어 있어 꽤나 무거울 법도 한데 케인은 전혀 그런 기색 없이 진의 허리를 잡은 채 계단을 내려갔다. 내려가던 도중 진이 몇 번이나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하면 케인은 다정한 목소리로 '이제 다 왔어, 조금만 더 가자'라고 하며 진을 꼬옥 잡아주었다. 진은 어느샌가 케인에게 온몸을  의지하고 있었고 계단을 다 내려온 후에는 완전히 케인에게 안긴 꼴이 되어버렸다.



사실 케인이 저를 안은 채 보건실 문을 연 이후부터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선생님의 걱정 어린 목소리와 케인의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무수히 나를 부르는 소리를 끝으로 나는 정신을 완전히 잃었다.


진이 정신을 다시 차린 건 보건실로 들어온 지 10분이 지난 후였다. 진은 힘겹게 눈을 떴다. 진의 옆에는 케인이 앉아 있었다. 케인은 보건실 벽에 기대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진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자고 있는 모습이 굴욕이 없는 사람은 처음이다. 인정하긴 싫지만 케인은 역시나 잘생긴 애였다. 저를 지그시 바라보는 눈빛과 마치 나와 야스오의 관계를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태도는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수업 시간도 빼면서 나를 이곳에 데려다준 건 어쩌면 야스오의 말과 달리 나쁜 애는 아닌 것 같았다. 진은 멍하니 잠에 든 케인을 바라보았다. 케인은 보건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빛에 인상을 찌푸렸다. 진은 일어나 걷어진 커튼을 다시 쳤다. 봉 한쪽 구석에옹기종기 모여 있던 고리들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일렬로 매달렸다. 고리들이 부딪히는 소리에 케인은 눈을 떴다.



"진, 일어났어?"

잠에서 방금 깨 잠긴 목소리의 케인이 진을 불렀다.



"응, 방금"



"속은 괜찮아? 어지러운 건?"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의 나아진 상태에 케인은 다행이라는 듯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그래도, 혹시나 모르니까 조퇴해. 담임선생님이 허락해 주실걸"



"아니야, 괜찮아"



"일단 물 마실래?"



"응"

케인은 보건실 한쪽에 있던 컵을 꺼내 물을 담아 진에게 건네 주었다.



"고마워"

진은 케인이 건네 준 컵을 받아 물을 마셨다.


"아, 수업 들어가야 하는데.."

케인이 보건실 벽에 달린 시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쉬는 시간이 지나 막 수업이 시작한 시간이었다.



"얼른 들어가자"

진은 물컵에 담긴 물을 다 마신 후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우리 이번 시간만 땡땡이칠까?"



"안 돼"



"보건 선생님이 너 괜찮아질 때까지 있어도 된다 하셨어"



"나 이제 괜찮으니까 됐네, 가자 어서"



"윽, 나 갑자기 배가 아픈 것 같은데.."



"꾀병인 거 너무 티 나"

단호한 진의 태도에 케인은 입을 삐죽거렸다.



"아~ 진 어차피 가정 시간이잖아 별로 안 중요할 거 아니야"



"아니거든?"



"거짓말, 너 가정 시간마다 수학 문제집 풀고 있었으면서"



"...."



"이제 할 말 없지? 우리 한 시간 푹 쉬는 거다~"

케인은 보건실 침대에 누웠다. 진은 짧은 한숨을 쉬더니 이내 케인을 따라 옆 침대에 누웠다.



"진"


"왜"

나란히 누워 보건실 천장을 바라보던 케인이 진을 불렀다.



"너 아까 보니까 너무 말랐더라, 밥 좀 먹고 다녀"



"밥 열심히 먹고 다니거든?"



"거짓말 아까 부축할 때 보니까 정말 가볍던데"



"네가 힘이 무식하게 센 거 아닐까?"



"무식하게 세다니.. 이거 다 중량 계산해서.."

자기가 중학생 때부터 열심히 운동을 어떻게 해서 만든 몸이라는 둥 지루한 얘기를 늘어놓는 케인에 진은 하품을 하며 귀만 열려놓은 채 보건실 천장을 바라보았다.



"너 안 듣고 있지?"



"응"



"그렇게 안 봤는데 못됐네, 진"



"나 원래 못됐어"

진은 몸을 돌려 한숨 잘 준비를 했다. 그때 케인이 일어나 진의 옆자리에 누웠다.


"야! 너 뭐해?!"


"저기 침대에 누워있으면 보건 선생님한테 들켜"



"아니 같이 누워있는 게 더 들킬 거 같은데?"



"아냐 여기 침대는 보건 선생님 자리에서 안 보여서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저리 가"



"아 같이 땡땡이 치기로 했잖아~ 협조 좀 해주라"



"누가 너랑 같이 땡땡이친데? 밀기 전에 얼른 가라"



"너무해 진.. 근데 밀수는 있어?"

케인의 도발에 넘어간 진이 몸을 돌려 팔로 케인을 밀어냈지만 무슨 바위가 옆에 누워있는지 케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 너 진짜 운동 열심히 했구나"

진의 감탄에 케인은 바보 같은 웃음을 내보였다. 그걸 본 진이 피식하고 웃었다.



"넌 웃고 다녀라"



"갑자기 왜?"



"웃는 게 훨씬 낫다."



"웃을 일이 있어야 웃고 다니지"



"왜 없어?  오랜 절친이랑 같이 학교 다니고 그리고 잘난 짝꿍도 있으면서"



"맞는 말로 시작하다가 왜 마무리가 헛소리로 끝나는 거야?"



"야 헛소리라니, 나 정도면 잘난 짝꿍이지"



"얼굴 잘생겼지, 몸 좋지, 성격 좋지 완벽하잖아"



"너랑 뭔 말을 하냐.."

진이 다시 몸을 벽 쪽으로 돌렸다.



"그래도 오늘은 웃을 일 만들어 줬잖아"



"..."



"시끄럽고 나 이제 건들지 마 잘 거야"

진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눈을 감았다. 하루 종일 속에 얹혀 있었던 불쾌한 기분이 싹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어젯밤, 잠을 설친 탓에 쌓였던 졸음들이 물 밀려왔다. 진은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다.












"진!"

일찍 종례가 끝난 야스오가 진의 교실 앞 복도에 서있었다. 진은 반 아이들과 짧게 인사를 한 뒤 기다리고 있던 야스오에게 갔다.


"많이 기다렸지?"



"아냐 별로 안 기다렸어, 얼른 가자"




"우리 반 종례가 너무 늦게 끝나는 것 같으면 먼저 가도 돼"



"알겠어 그래도,"


팡 하는 소리와 야스오가 들고 있던 긴 우산이 펼쳐졌다.

"오늘은 비 많이 와서, 너 우산 없잖아"



"고마워"

진은 야스오 옆에 나란히 섰다. 아무리 큰 우산이어도 건장한 남학생 두 명이 쓰기에는 작았다. 야스오는 제 왼쪽 어깨가 젖는 것이 별 신경이 쓰이지 않는지 우산을 진 쪽으로 들었다.



"근데 너 쉬는 시간에 어디 있었어? 안 보이던데"



"아.."

진은 케인과 보건실에 한 침대에서 누워 있던 일이 생각이 났다. 진이 잠이 들고 몇 분 안가 케인도 잠에 들었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살짝 화가 나 보이는 보건 선생님이 서 계셨다. 절대 안 들킬 거라고 말했던 케인의 말과달리 진과 케인은 나란히 꾸중을 듣고 서로 푹 잔 탓에 퉁퉁 부은 눈으로 어기적 교실로 올라갔다. 내려올 땐 분명 진이 케인에 부축을 받았지만 올라올 때는 잠에서 덜 빠져나와 반 좀비 상태에 케인을 진이 끌고 올라가야 했다. 몇 번이나 버리고 갈까 했지만 제 교복 소매를 꽉 잡은 케인 때문에 진은 이를 악물고 교실 앞까지 끌고 갔다.



"진?"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진을 야스오가 불렀다.


"응? 아.. 나 속이 안 좋아서 보건실 가 있었어"



"뭐? 지금은 괜찮아?"



"응, 보건실에서 좀 쉬더니 괜찮아졌어"



"다행이네, 점심 먹은 게 얹힌 거야?"



"어, 그런 것 같아"



"뭐 먹은 것도 없으면서.. 진짜 너도 은근 몸 약하다"



"아냐 오늘 점심 많이 먹었는데?"



"거짓말, 나중에 보니까 밥알 세고 있던데"


"그걸 봤어?"



"내가 그렇다고 케인 그 자식을 볼 순 없잖아"



"..."


"그 케인이라는 애랑은 별일 없었지?"

여기서 야스오가 말하는 별일은 오늘 보건실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본인의 뜻대로, 원하던 대로 진이 말을 잘 들었는지 확인을 하기 위한 질문 일뿐이다. 진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여러 번 고민을 하였다. 평소 같으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다 말할 텐데 이상하게도 망설여졌다.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해도 되는 것일까? 계속해서 저에게 다정하게 대해주던 케인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와 동시에 저에게 케인을 좋지 못하게 보는 야스오의 얼굴이 그려졌다. 왜 야스오는 케인을 싫어할까? 진은 순간 의문이 들었다. 제가 한말만 듣고 이상한 애라 생각해서 그런 것인가? 처음엔 자신 또한 케인을 멀리해야겠다 생각하였다. 하지만 오늘 케인은 그렇지 않았다. 케인은 야스오가 검열해 왔던 '질 나쁜 놈' 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해주면 야스오도 케인을 좋게 보지 않을까?

근데, 야스오가 이거 듣고 화내면 어떡해

야스오의 말을 안 들은 건 맞잖아,
야스오가 그렇게 당부했는데

내가 나빴어, 야스오가 그렇게 말하는 건 다 이유가 있던 거였는데

바보, 멍청하고 오만해
나 스스로 사람을 좋다 아니다 판단할 수 있다고 믿었어

야스오가 나 또한 질 나쁜 놈으로 보면 어떡하지?

나를 더 이상 전처럼 다정하게 대해주지 않을 거야
그저 다른 애들처럼
아니 다른 애들보다 못하게 나를 대하겠지

그럼, 나는...









마침내 진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응, 별일 없었어"












야스오의 집에서 공부를 한 뒤 데려다주겠다는 야스오를 겨우 말리고 진은 집으로 혼자 걸어가고 있었다. 예상대로 골목길에는 사람이 없었다. 대신 골목길 사이 집안에서 비치는 형광등 불빛 덕분에 무섭지는 않았다. 제법 쌀쌀한 밤공기를 느끼며 진을 한걸음 한 걸음씩 언덕을 올랐다. 무수히도 많은 집들을 빼곡하게 모여있었다. 땅도 좁은데 어떻게 저 많은 집들이 세워져있는지 신기하면서도,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좁은 방에 죄수를 밀어 넣듯 집이란 집은 그냥 쑤셔 넣은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튼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동네였다. 그래도 가장 하늘과 가까운 점은 마음에 들었다. 보름달이 훤하게 뜨는 밤이면 진의 엄마는 진을 데리고 우리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집 앞으로 갔다. 다리 아프다며 찡찡거리던 진을 안고서라도 꼭 올라가셨다. 아픈 다리를 얻고 보는 달의 모습은 정말로 장관이었다. 멀리서도 어여쁘던 달을 가까이서도 정말 아름다웠다. 늘 부러움에 대상이었던 저 아래 동네 사람들도 갖지 못한 것을 가진 기분이었다.



진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조용한 골목길을 걸었다. 어느샌가 저 앞에 제 집이 보였다. 진은 지금쯤이면 엄마께서 주무시고 있을 때니 조용히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진의 집을 불이 켜져 있었다.

아직 안 주무시나?

진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진의 집 주변에는 이 시간이면 항상 조용했다. 옆집에 사시는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꼬맹이들과 그들의 엄마 가족은 늘 일찍 잠에 들었기에, 누구보다 고요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소음이 들려왔다.

설마, 설마,

진이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그 남자는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어디서 무얼 하며 지내는지 모르지만, 집에 들어오는 날은 그리 많진 않았다. 그러나 집에 들어온 날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기에, 그 남자가 집을 나와 오랫동안 들어오지 않아도 남자가 저질른 악행들을 치료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시간이었다. 상처가 다 치료되기도 전에 그 남자는 집으로 찾아와 더 큰 상처를 남기고 떠났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진은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오래되어 녹슬어버린 현관문이 가까워질수록 소음은 커졌다. 그 남자의 고함치는 소음과 엄마의 비명소리 그리고 무엇인가 부서지는 소리. 진은 두려웠다. 당장이라도 도망칠 수 있다면 발걸음을 돌려 야스오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순 없었다. 아직 저 집에는 엄마가 있었다. 진은 들뜬 숨을 몰아쉬며 현관문을 열었다. 뻣뻣한 철문 마찰에 시끄러운 소음과 함께 그 남자의 고함도 엄마의 비명도 멈췄다. 집안은 난리였다. 화분이며 액자며 모두 박살이나 거실 바닥을 뒹굴었고 엄마는 머리가 뜯겨 엉망이 된 채로 거실 한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으셨다. 그 남자는 한 손에 빈 술병을 든 채 엄마에게 위협을 가하고 있었고 엄마의 주변에는 깨진 빈 술병 조각들이 떨어져 있었다.



"야 이 새끼야, 지금 몇 시인데 이제 들어와?!"


남자는 빈 술병을 든 채 진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진의 심장이 마구 요동쳤다. 두 다리가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가 얼른!"


엄마가 소리쳤다. 그러자 남자는 이내 엄마에게 다가가 미친 듯이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이 미친년이 소리를 질러!! 돌았어?!"



엄마는 몸을 한껏 웅크린 채 힘없이 발길질을 받아냈다. 엄마의 눈이 멍하니 현관문 앞에 서있는 진을 바라보며 '어서 도망쳐'라며 소리쳤다. 그러나 이내 엄마의 복부를 가격한 남자의 발에 진은 매고 있던 가방을 남자의 뒤통수에 던졌다.



"그만... 그만해"


"이쯤 하면 됐잖아!!.. 언제까지 이럴 건데?"


가방에 맞아 붉어진 뒤 목을 잡던 남자가 뒤를 돌아 진을 노려봤다. 진은 순간 온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남자는 진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곤 진을 내려다보았다. 진은 떨리는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이야, 우리 아들놈이 많이 컸네, 아빠에게 대들 줄도 알고"


남자는 바닥에 떨어진 진의 가방을 주웠다.


"오랜만에 훈육 좀 해야겠는걸? 요즘에 안 맞았지 그치?"



남자는 이내 가방으로 진의 머리를 가격했다. 진은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럼에도 남자는 사정 없이 진의 복부, 다리, 등을 마구 때렸다. 진은 이를 악 문채 고통을 참아냈다. 최대한 팔로 머리를 감싸 제 생명만을 지켰다. 여기서 유일하게 진이 지킬 수 있는 것이었다. 남자의 발길질 사이로 겁에 질린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진은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 '어서 도망치세요'라고 말했다. 엄마는 남자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덜덜 떨리는 다리를 붙들고 현관문으로 뛰쳐나갔다. 엄마가 나가는 소리에 남자는 발길질을 멈추고 엄마를 쫓아가려 했지만 진은 남자의 발목을 꽉 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몇 번이나 남자가 발로 진을 걷어찼지만 진은 젖 먹던 힘까지 써서 남자의 발목을 잡았다.


"이 씨발년아!!!!!!"



남자는 결국 제 분에 못 이겨 이미 엄마가 사라진 현관문에 대고 소리를 쳤다. 진은 그제서야 발목을 잡던 손을 놓았다.



"허억.. 흐윽..."

진은 숨을 겨우 몰아쉬었다 그 순간 남자가 진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씨발, 년이나 놈이나 둘 다 사람 기분 좆같게 하는 데는 재주 있어, 응?"


남자의 시선은 진의 얼굴에서 위 단추가 풀려 맨살이 드러난 진의 가슴골로 내려갔다. 이내 남자는 소름 끼치는 미소를 내보이며 말했다.

"아들, 아빠가 기분이 엿 같아서 그러는데 협조 좀 해줘"


남자의 말에 진은 놀란 눈을 한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곤 남자에 손에 벗어날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남자의 커다란 손이 진의 뺨을 가격했고 진은 힘없이 고개가 돌려졌다.



짝-


"더 좆같게 하지 말고, 진짜 죽여버리기 전에"

남자는 진을 소파 위에 던졌다. 진에게는 이제 더 이상 남아있는 힘이 없었다.


"다리 벌려, 쌍년아"



남자는 힘 없이 벌어진 진의 두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진은 고개를 젖혔다. 거실 한쪽 오래된 창문이 진에 눈에 들어왔다. 뿌옇게 변한 창문에는 달이 그려져 있었다. 어렸을 때 엄마와 손을 잡고 올라가 봤던 달만큼이나 이쁜 달이 떠 있었다. 가진 게 없었던 삶에서도 유일하게 가질 수 있었던 달의 모습이 하늘을 은은히 비추고 있었다.



@Jhinsexy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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