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소람은 그 날 이후 몇 주일 동안 식당에 나타나지 않았다. 겁을 먹어서 안 오는 건지 상대하기 귀찮아서 안 오는 건진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이제 확실해졌다는 거다. 유소람이 소장 애인인 것이. 그 날 유소람이 피 떡으로 만들어 논 그 애를 추궁했다. 아직 아물지 못한 상처들이 아프게 피로 물들었다. 사실 추궁이랄 것도 없었다. 눈만 몇 번 찡그려도 벌벌 떨면서 다 뱉어냈다. 자존심이 상했다. 그 애는 나를 보고 떤 게 아니라 유소람의 그 얼굴, 그 눈을 보고 겁을 먹은 거다. 나보고 다신 그 애와 마주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귀찮다. 발로 몇 번 걷어차니 금방 조용해졌다. 여옥이의 등을 두 번 두드리고 나왔다. 여옥이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 소원대로 다신 못 보게 해줄게.


삐걱거리는 침대 위에서 연필 깎기에 집중하려고 해보지만 잘 되지 않는다. 이미 끝이 뾰족하게 선 연필심이 무심하게 칼끝을 더 새우고 연필을 깎아보지만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한 것이 이유다. 유소람에게 겁먹은 애를 죽였다. 나한테 무슨 이익이 있어서? 결과 없는 피를 흘렸다. 내가 초록머리한테 신경 쓰이는 이유가 필요하다. 확실하고 간단하고 깨끗한 이유가. 유소람을 직접 봐야겠다.

“여옥아, 유소람 방 번호가 뭐냐.”


한 개비, 두 개비, 세 개비 쯤 이었다. 이미 방을 가득 채워서 뿌옇게 변한 방 안에서 드디어 유소람이 몸을 뒤척였다. 쟤가 자는 척을 자는 건지 지금 정말로 잠에서 깼는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렇게 바라던 목소리가 곧 들릴 거다.

유소람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의도한건 아니지만 묶은 초록색 머리가 풀려지면서 긴 머리가 가슴 깨까지 흘러내렸다. 잠에서 덜 깬 눈과 목소리가 더 듣기 좋았다. 나른한 눈동자가 보였다. 꽤 깊게 잠든 모양인데 내가 깨웠나보다 좀 미안해진다. 반쯤 피운 담배를 땅에 밟아 껐다. 천천히 유소람 옆에 앉아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에 꽂아주었다. 유소람은 앙칼지게 내 손을 쳐냈지만 상관없었다. 밍기적 거리는 건 싫다.

“뭐에요.”

메케한 담배연기에 눈을 찌푸린 채로 말하는 유소람에 삐걱거리던 심장이 요동쳤다. 톡 쏘게도 대답하네. 손을 뻗어 초록빛 머리카락을 한줌 잡았다. 손이 갔다. 억지로 라도 덧붙이면 반응을 보고 싶었다. 사람 손을 잘 타는 강아지인지 그냥 개새끼인지. 손가락으로 살살 꼬면서 꽤 상한 머릿결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유소람은 그런 나를 한번 보곤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내 손을 쳐내진 않았다. 어리지만 살기가 있었던 그 눈에서 나는 웅크리고 있는 어린아이를 본 것 같았다. 아무 말도 없이 머리카락만 만져대자 유소람이 내 손을 잡아 제지시켰다. 언제 잡아주나 했더니 드디어 붙잡아준다. 그제 서야 눈이 마주쳤다. 와, 진짜 예쁘네. 숨을 들이마셨다. 하마터면 입 밖으로 나올 뻔 했다.

“내 머리카락 만지러 왔어요? 이 밤중에?”

내가 지금 이 늦은 시간에 심심해서 여길 찾아온 건 아니다. 용건은 하나였고 부드럽게 가고 싶었다. 처음부터 거칠게 할 생각도 없었지만.

“지낼 만하니?”

“네..뭐 좀 재미있어요.“

고민 없이 바로 들려오는 대답에 크게 웃음을 지었다. 재미있다고? 여기가? 평온한 표정과 태연한 말투가 밖에 있는 누구랑 너무 닮았다. 바로바로 대답이 나오는 것도, 똑바로 눈을 마주치는 것도, 가끔 입 꼬리를 올려서 웃는 것도. 지낼 만하다니까 내가 괜히 건들 구석은 없다. 하필 소장새끼 애인인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계속 쭉 잘 지낼 수 있는 팁을 줄까하는데.”

유소람이 한 쪽 눈썹을 올리면서 웃는다. 내 앞에서 웃는다. 다들 내 표정을 읽어내느라 항상 눈치만 보는데 그렇게 무방비 상태로 웃는 아이는 유소람이 처음이다. 내가 국도 아니고 자꾸 간을 본다. 저 웃음을 괜히 흘리는 건 아닐 텐데. 날 꼬시려고 하는 건지, 꼬시라고 하는 건지.

“뭔데요.”

까탈스럽게 대답하는 구석이 퍽 웃겼다. 주먹을 꾹 말아 쥐고 허벅지를 두 번 처 내렸다. 유소람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놀랄 만도 한데 차갑게 식은 눈으로 그저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입안 살점을 몇 번 질겅질겅 씹곤 입을 뗐다. 알싸하게 퍼지는 피 맛이 오늘따라 기분이 나쁘다.

“내 눈에 띄지 마라. 그럼 저 나부랭이들도 너 안 건들고, 1년 5개월 잘 자고 갈 수 있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입 꼬리를 씩 올리면서 허공을 돌던 시선을 정확히 맞췄다. 투명하고 맑은데 저 안이 안 보인다. 저 눈알 안에 뭔가 있을 거 같은데. 드럽게 안 보여. 아무 말도 없이 날 보는 눈동자에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알아먹은 줄로 알고, 난 가볼게. 아가씨.”

이렇게 가까이서 얼굴을 마주본 건 처음인데 얼굴에 꽤 자잘한 상처들이 보인다. 이전에 괴롭히던 애새끼들 소행인지, 자해인지. 물어볼까 했다가 너무 오지랖인거 같아서 말았다. 그래 너도 네 인생 살아야지. 내가 참견하는 것도 여기까지다. 왜 하필이면 재수 없는 소장 애인인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유소람이 아까웠다. 할 말이 다 끝났으니 여기 더 있을 이윤 없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갈려다가 걸음을 무르고 다시 들어와 너를 빤히 봤다.

“아가씨 손은 괜찮지?”

유소람은 내 눈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긴 속눈썹이 달빛에 비치면서 눈이 달빛과 같은 색이 되었다. 참 아름답다. 시선 따위가 아니라 온 마음을 다 뺐길 만큼. 아이는 손을 들어서 내 면전에 대고 흔들었다. 붕대가 어설프게 감겨져있다. 손을 뻗어서 그 상처를 만지고 싶었지만, 간신히 손을 고정시켰다. 아이 앞에선 없었던 인내심이 생긴다. 그러면 안 돼, 만지면 안 돼, 다가가면 안 돼. 흰 꽃잎이 내게 자꾸 말을 건다. 하얀 얼굴을 빤히 보았다. 피부는 피부대로 하얗고 볼은 볼대로 붉다. 백설 공주란 동화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별로 좋아하는 동화는 아니다. 난 백설 공주보단 인어공주 파였지. 왕자님을 위해서 물거품도 마나않는 그런 무모함이 좋았는데. 다 옛날 얘기다. 지금 내 눈 앞의 백설 공주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 하겠다.

“걱정해주는 거예요?”

바람 빠진 웃음이 내 입가를 지나쳐 나왔다. 멀리서 봤을 때도 짐작했는데, 이 아가씨는 참 예쁜 거 같아. 여옥이 이 새끼. 이렇게 예쁘면 예쁘다고 미리 말을 해줘야 될 거 아니야. 애꿎은 여옥이만 속으로 씹는다. 다음에 또 보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가 먼저 잘라냈으니 이젠 정말 마주칠 일도 없다. 굳은 표정으로 유소람의 방에서 빠져나와 다시 시궁창으로 돌아간다. 그 방에 가득 차있던 건 내 담배연기 뿐이었는데, 손바닥엔 그 애 향기가 났다. 이 거지같은 지하에서 향기라는 단어가 어울리기라도 할까. 내 물음에 비웃기라도 하는지 유소람한텐 빌어먹게 어울렸다. 손바닥에 그 애의 체취가 떠나지 않는다. 물을 틀어놓고 씻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수도꼭지를 꺼버리고 침대에 누웠다. 침대가 삐걱거린다. 그 소리가 담벼락을 타고 넘어갈 때까지 눈을 감지 못했다.

세계를 만들기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제가 만들어 낸 인물들을 사랑합니다. 현재 권총을들고 연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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