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한 물을 마신 덕분인지 아까 전 놀란 마음이 진정이 되지 않았는지 잠은 그에게로 와주지 않았다. 몇 번을 뒤척이던 반죠는 얼마 전의 일을 떠올렸다.



*



센토는 반죠가 온 줄도 모르고 무엇인가 쓰는 건에 열중하고 있었다. 엄청 진지한 표정. 그의 옆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던 그는 이런 장면은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였다. 본인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그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센토?”

“응?”


센토는 그의 파트너의 부름에 고개를 돌아보았다. 이내 깜짝 놀라며 온몸으로 쓰고 있던 종이를 가렸다.


“바보야. 가까이 오기 전에 미리 말하라고.”


반죠는 그의 파트너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툴툴대며 뭔가 적은 종이 위에 책을 올리는 센토의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그제야 반죠는 센토가 불규칙적으로 거친 숨을 내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센토의 볼은 감기에 걸린 것처럼 좀 붉은 것 같기도 했고. 아니, 그보다 그의 눈에는 센토의 얼굴색이 평소보다 창백하게 보였다. 햇빛을 못 받아서 그런 건가.

센토는 그의 파트너의 시선을 피하며 손으로 땀방울을 쓱쓱 문질러 닦으며 되물었다.


“뭐가?”

“혹시 아파?”


반죠는 걱정스럽다는 목소리로 말하며 센토의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손으로 짚으려다 센토의 손에 제지당해 버렸다.


“뭐해, 바보.”


기분 나쁘거든. 툴툴거리는 목소리였다.


“바보 아니거든? 적어도 근육 붙이라고!”

“하하. 근육도 없는...”


센토가 평소처럼 받아치려고 말을 하던 도중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그는 입을 가리고 잔기침을 몇 번 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어이, 센토!”


그는 대답 없이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몇 번을 더 부르자 그제야 대답을 해주었다.


“왜.”

“진짜 무슨 일 없는 거지?”

“당연하지.”

“걱정된다고..”

“응.”

“너도 카스미처럼 그냥 떠나버릴 것만 같아서...”

“응.”

“......”

“괜찮아, 반죠. 말도 안 하고 가지 않을 거니까.”

“그럼 아까부터 뭘 하고 있었어? 센토.”

“최악의 상황은 막아야지. 이럴 때 천재 물리학자인 내가 필요할 거야.”


센토는 반죠를 돌아보며 해맑게 웃어보였다.


“아까 ㅁ...”

“천재가 이럴 때 나서 줘야지?”

“아까 뭘 하고 있었는데.”

“일기를 쓰고 있었어.”


내가 그런 거짓말에 넘어갈 것 같아? 반죠는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책상 쪽으로 걸어가려고 했다. 그런 그를 센토가 손으로 막았다.


“가지 말아줘.”

“그럼, 센토. 말해줘.”


반죠의 진지한 표정에 센토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대답했다.


“비밀. 때가 되면 다 알게 될 거야, 반죠.”


센토는 반죠의 등을 두세 번 치며 먼저 방문을 나갔다. 센토의 뒷모습을 보던 반죠는 아까 전에 센토가 앉아있던 책상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라벨이 4분의 3정도 벗겨진 약통에는 ‘제’ 라는 단어만이 남아있었다.



*



반죠는 몇 번이고 제 몸을 뒤척였다. 물기를 닦은 옷자락을 만져보니 마른 페인트 자국 같은 것이 만져졌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두운 빛이었다.


‘뭐가 묻은 거지..’


주변이 어두워서 어떤 색인지 보이지 않았다. 얼마간 바라보던 그는 침대에 다시 벌러덩 누워버렸다. 아무리 익숙해지려고 해도 침대가 아닌, 얇은 매트리스 위에 누워 자는 것이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내일은 운동이나 해야지….”



*



모두가 잠든 시간이 아니라 센토만 빼고 모두가 잠든 시간, 그는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아서 암흑으로 물든 주변과 달리 빛나는 화면에 열중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구해온 컴퓨터의 선이었다. 가장 큰 단점이라고 한다면 길이가 짧다는 점이랄까. 결국에 컴퓨터의 위치는 방 안이 아닌, 반죠와 미소라의 잠자리를 마련해놓은 공간의 정중앙이었다.


‘역시 불편해.’


센토는 조용히 키보드의 자판을 두드렸다. 타다닥. 규칙적인 소리가 조용히 넓은 공간을 맴돌았다. 그의 뒤쪽의 공간에서는 미소라와 반죠가 꿈나라로 간 상태였다.


“하아….”


그는 짧게 한숨을 쉬고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꽤나 심각한 표정이었다. 조심스럽게 마우스로 딸깍 소리를 내던 그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이 곳에 들어온 이후부터 계속 이래왔다. 그의 청각은 한껏 곤두서있었다.


“흠냐.. 프로티이인.. 으음...”


반죠의 목소리였다. 다행히도 깨어난 것 같지는 않았다. 마음속으로만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는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빨리 이걸 끝내지 않으면 안 돼...”


미소라나 반죠가 못 하는 일도 있으니까 말이지. 몇 초간 화면을 응시하던 그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얼마 전에도 말썽이었던 두통이었다. 무시하고 타이핑을 이어나가던 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반투명한 푸른빛 통이 나왔다. 전에 정리를 할 때 찾아두었던 진통제였다.

뚜껑을 열어 통을 손바닥에 대고 거꾸로 하니, 흰색 둥근 알약이 세 개 나왔다.


“얼마 안 남았네...”


다른 두 개는 다시 집어넣고, 남은 하나를 물병의 물과 삼켰다.


‘휴우, 여기서 무너지면 안 돼.’


타이핑 소리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밤은 깊어만 갔다.



*



어느 한 방에 반죠를 위해 운동실 비슷하게 만들어 주었다. 비록 아무런 운동기구도 없었지만, 그런 건 반죠가 알아서 했다. 기구를 쓰는 것만이 운동은 아니니깐. 평소에 나시타의 지하실에서 운동을 하면서 땀 냄새를 풍기는 반죠를 보면 항상 잔소리를 날렸던 센토(미소라는 덤)가 없기에 그는 열심히 몸을 움직였다. ‘몸을 쓰면 머리도 굴러가고 건강해지잖아,’ 가 그의 생각이었다.

반죠는 목에 두른 수건으로 맺힌 땀방울들을 닦았다. 미소라는 그에게 물병을 건네주었다. 땡큐, 라면서 그는 반갑게 받아 한 모금을 마셨다. 목이 마른 모양이었다.


“센토는?”

“자고 있어. 어제 늦게까지 뭔가 하더라.”

“아, 그런가.”


반죠는 납득했다는 듯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냉장고에서 전에 마시던 물병을 꺼내왔다. 그는 크게 한숨을 쉬며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미소라도 그와 대각선으로 마주보도록 의자에 앉아있었다.


“센토는 여전하네. 여전히 자의식 자칭 천재 물리학자에다… 다른 사람들의 미래를 구하는 히어로야.”


미소라는 말을 마치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커피의 진한 향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시선은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리고?”


반죠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아무것도.”

“아, 그치. 그리고 반죠. 뭔 짓을 한 거야?”


살짝 투덜대는 목소리였다.


“뭐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의 반죠.


“모르는 척 하지 말래? 옷에 피가 묻어 있었잖아.”


아아. 반죠는 애써 알았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으로는 전혀 모르겠다는 눈치였으나, 미소라는 그에 대해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잠만, 피?


“나는 한 번도 다친 적 없는데??”


잘못 본 건 아니냐는 반죠의 말에 그녀는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내가 그런 걸 가지고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잖아?”


이제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보는 그녀를 애써 외면하며 반죠는 입을 열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자 드래곤 보틀이 잡혔다. 전에 넣어두었다가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아무튼 왜 그게 문제인건데?”

“당연하지. 피가 묻었을 때는 차가운 물로 빠르게 헹궈야 나중에 남지 않으니까.”

“아, 그런가. 미안.”


반죠는 사과의 의미로 그녀 대신 빨래를 하겠다는 약속을 해버렸다. 항상 요 입이 방정이야, 라면서 그는 냉장고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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