텁텁한 먼지 냄새와 새벽 공기의 알싸한 냄새가 배너를 깨웠다. 굳이 시계를 확인하지 않아도 몇 시인지 알 수 있었다. 새벽 네시 반, 아니면 다섯 시. 서두르면 집으로 돌아가서 씻고 간단한 아침식사와 커피를 챙겨 수업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옆자리에 누워 있는 금발머리가 일어나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이름이 뭐더라.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무용한 짓이라는 걸 깨닫고 생각하길 그만두었다. 몸매는 나쁘지 않았지만 싸구려 염색약을 썼는지는 몰라도 머릿결이 형편없었고 지나치게 조급하게 구는 게 별로였다. 두 번 다시는 연락하지 맙시다. 배너는 작은 테이블에 숙박비 절반을 놔두었다.

말초적인 즐거움을 줄 뿐인 하룻밤 관계. 싸구려 금발, 천박한 말투, 값싼 모텔. 너무나도 익숙한 세계의 일부였다. 이것보다 더 좋고 비싸고 심지어 건강에도 좋은 것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건 단편적인 지식에 지나지 않았다. 노상 뉴스에서 마주치는 비극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새벽녘 싸늘한 공기에 재킷을 여미고 그는 종종걸음을 옮겼다. 코를 훌쩍이며 토니 스타크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 애썼다. 사실 이미 ‘토니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는 지점에서 글러먹었다. 배너는 피할 길 없이 더러운 거리를 걸으며, 인생에서 마주쳤던 모든 것들 중에 가장 값비싼 남자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일은 문자 한 통으로 시작되었다. 「5시면 끝나지? 정문에서 만나」나타샤였다. 수업이 4시에 끝난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도망갈까 말까. 그 때 두 번째 문자가 왔다. 「도망치면 죽어」 어차피 나타샤 혼자 와 있을 리가 없지. 분명히 바튼도 함께 왔을 테니 도망갈 구석은 없었다. 

배너는 정직하게 정문으로 곧장 향했다. 맹세코 그는 두 사람을 마음 깊이 사랑한다. 그들은 배너에게 가족 비슷한 무엇이었다. 가족도 친척도 없었으니, 조금 더 용기를 내서 말해보자면 가족과도 같았다. 실제로 배너는 그보다 나이가 대여섯살은 많은 나타샤와 바튼을 친형제처럼 따랐다. 그쪽에서도 배너를 친동생처럼 귀여워 해 주었다. 

귀여워하는 정도가 지나쳐 약간 건강치 못한 과보호가 아닐까. 일교차를 걱정해 챙겨 입은 두꺼운 외투 탓이리라. 배너는 송골송골 맺히는 땀을 닦아내며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일부러 발을 질질 끌며 걸었는데도 어느새 정문 앞이었다. 

“오.”

사람들의 시선을 구태여 따라갈 필요도 없었다. 곁을 스쳐 걷는 것조차 무서울 만치 번쩍거리는 수퍼카가 있었다. 그리고 차체에 기대어 서 있는 아찔한 미인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배너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안녕, 냇.”

“안녕.”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던 바튼이 꽁초를 버리고 다가왔다. 그는 단순히 차문을 여는 데 쓰기에는 송구할 정도로 발달한 팔근육을 꿈틀대며 배너를 모셨다. 

“밥 먹으러 가자.”

“배 안 고픈데…….”

“냇이 산대.”

“다음엔 네가 좀 사.”

“이번에도 내가 산다고 했는데 싫다며.”

“오늘은 내가 사고 싶으니까.”

아마도 나타샤는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바튼은 나타샤가 하는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안전벨트를 맸다. 물론 어느 누구도 배가 고프지 않다는 배너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저녁식사 제안부터 메인코스, 디저트까지 배너의 의견은 무시되었다. 조금 과장되고, 심지어 약간의 애정이 느껴지는 상냥한 무시였다. (그는 그들의 태도를 상냥하다고 느끼는 것이 자신의 불행한 가정사 탓인지 잠깐 고민했다.)

“브루스.”

나타샤가 다정하게 그를 불렀다. 반짝이는 붉은 머리카락은 생기 넘쳤고 당당하고 꼿꼿한 자세와 우아한 손동작은 저절로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챘다. 그렇게 건네진 부름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배너는 그 아름다움에 충분한 면역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대답 없이 작은 숟가락으로 크림브륄레의 얄팍한 표면을 잠자코 박살내고 있었던 것이다. “브루스,” 나타샤는 디저트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저번 주에 클럽 갔었지?”

질문이되 질문이 아니었다. 배너는 화를 참으려고 했지만 저도 모르게 포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래서.”

“넌 어쩜 그렇게 매번 나쁜 남자만 만나니.”

“난 어른이라고.”

“나이만 먹었다고 어른이 아냐. 누굴 만나는 거, 좋아. 근데 넌 기준이 없잖아. 무분별해. 제대로 된 연애를 해 보라는 얘기야.”

배너는 도발적으로 대꾸했다.

“제대로 된 연애가 뭔데?”

“나야 모르지.”

물론 나타샤는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데이트를 해 봐. 섹스 말고.”

섹스 없이 데이트가 가능하던가? 바튼은 입술을 실룩댔지만 나타샤에게 정강이를 걷어차이곤 말없이 디저트에 집중했다.

지나친 참견이었다. 배너는 이 자리에서 당장 화를 내며 절교를 선언할 수도 있었다. 사생활 침해라며 성을 내 보았자 심통 부리는 어린애 다루듯 할 게 뻔했다. 게다가 그들은 이전에 한 번 배너가 막 팬티를 벗기 직전에 침실에 난입한 적도 있었다. 말하자면 긴 이야기니 더 설명은 않겠지만 아무튼 ‘사생활 침해’란 씨알도 먹히지 않을 변명이란 소리다.

“냇이 골라주는 옷만 입고 사주는 밥만 먹고, 소개해 주는 사람만 만나라는 거야?”

그래놓고 그는 얼굴을 붉혔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그는 나타샤가 선물해 준 스웨터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만나봐.”

그래서 일단 만났다.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 나간 자리에, 최선을 다해 무례하게 행동하리라 결심한 그 자리에, 토니 스타크가 있었다.

“오.”

다리를 꼰 자신만만한 자세와 도대체 브랜드가 짐작가지 않는 선글라스, 잘난 낯짝, 멋들어지게 다듬은 턱수염. 부정의 여지없는 토니 스타크였다.

하지만 배너는 이렇게 말했다.

“어……. 라이언, 맥도널……씨?”

이름은 라이언 맥도널이고 나이는 스물여덟이야. 너만큼 짜증날 정도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머리도 좋고. 멍청해서 열 받지는 않을걸? 생긴 것도 이만하면 통과, 너 내가 얼마나 눈 높은지 알지…….

분명히 나타샤는 그렇게 말했는데.

“아닌데.”

토니의 얼굴에 특유의 거만하고 조롱하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제법 신사다운 태도로 선글라스를 벗고 재킷을 여민 다음 손을 내밀었다.

“브루스 배너? 생각보다 어려 보이네.”

그 무례함을 지적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배너는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착석했다.

상대방 의견은 듣지도 않고 제멋대로 주문하는 모습을 보면서 확신할 수 있었다.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다. 나타샤가 소개팅이라고 겁 줘놓곤, 사실은 토니 스타크를 소개시켜주려고 했나보다.

눈앞에 눈부신 미래가 펼쳐졌다. 프로젝트 지원, 생활비 지원, 커리어 완벽 보장!

“로마노프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 그냥 평범한 데이트라고 생각해. 부담가지지 말고. 요즘 젊은이들은 이런 게 익숙한가? 틴더, 뭐 그런 거?”

배너는 그 말을 듣자마자 퍽 실망했다.

“어, 저는 다른 분이 나오실 거라고 들었는데요.”

“내가 대신 나왔지.”

“냇은 알고 있나요?”

“물론 모르지. 알면 날 죽이려고 들걸?”

“좀 당황스럽네요.”

토니는 관자구이를 포크로 쿡 찍었다.

“맥도널은, 훌륭한 직원이긴 하지만, 시시하지. 나하고 노는 게 훨씬 재밌을걸.”

도저히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잖아도 어떻게 하면 이 자리를 파투낼 수 있을까 고민하지 않았던가.

배너는 토니처럼 관자구이를 한 입 먹었다. 토니 스타크라니. 그의 입장에서는 락스타를 만난 것과 다름없었다. 상대방이 토니 스타크라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그는 전혀 진지해 보이지 않았다. 단순한 심심풀이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이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배너는 토니와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데 만족하기로 했다. 혹시 모르잖은가. 정말로 배너에게 탄탄대로 출셋길을 열어줄지.

“불쾌했다면 미안해. 내가 가장 신뢰하는 부하직원들이 싸고 도는……아니, 아끼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거든. 그리고 작년에 투고한 글도 봤어. 흥미롭던데.”

“그걸 읽으셨어요?”

“단숨에 읽었지. 할 일이 잔뜩 있었는데도 말이야. 물론 페퍼를 화나게 했지만(페퍼는 내 비서야!), 아주 재미있었어. 직접 얘기를 나누고 싶을 정도였다고.”

토니는 아주 열렬한 태도로 상체를 바짝 기울였다. 그래서 배너는 학생다운 수줍은 태도를 미처 숨기지 못했다.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에 둥근 눈동자와 제법 강단 있어보이는 입매가 귀여웠다. 도톰한 아랫입술이 미소를 짓느라 납작하게 눌리는 모양새를 보곤, 토니는 무심코 생각했던 것이다. 귀엽네.

게다가 배너는 영어를 할 줄 알았다. 세상에, 그는 영어를 할 줄 알았다! 토니는 두 번이나 거듭 외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속절없이 대화에 심취했다. 쭉쭉 넘어가는 와인이나 위스키가 아니라 정말 이야기에 취했다.

그들은 레스토랑과 여러 차례 바를 전전하면서 밤새도록 이야기했다. 토니는 동 틀 무렵에 배너를 집에 데려다 주었다. “즐거웠어요. 안녕히 가세요.” 말하며, 배너는 흐리게 웃었지만 진심어린 미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하면 연락하라고 했는데 왜 소식이 없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잖아.”

바튼은 해묵은 표현을 가져다 썼다. 물론 그런 싸구려 위로는 나타샤의 불안을 잠재우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설마 또 클럽 같은 데 가지는 않았겠지. 걱정이 되어 한숨이 끊이질 않는다. 깔끔하게 다듬은 손톱과 테이블이 부딪쳐 딱딱거렸다.

그때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마음은 정말 고마운데 냇... 너무 부담스러워서 안되겠어 미안;」

“부담?”

“라이언이 부담스럽대? 아니, 그 자식이 부담스럽게 들이댄거 아니야?”

“말도 안 돼. 부담은 걔가 느껴야지. 우리 브루스가 모자라는 데가 어딨어.”

나타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폭풍 같은 손놀림으로 재빨리 답장을 보냈다. 온갖 종류의 상냥한 위로를 건네며 그는 말했다. “내일 그 새끼를 조져야겠어.”

나타샤 로마노프는 허투루 말 한 마디 내뱉는 법이 없다. 다음날 라이언 맥도널이 모든 사실을 고백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3분이었다.

나타샤의 곧은 발걸음이 토니의 사무실로 향한 것은 당연지사라 할 수 있겠다. 바튼은 뭘 하고 있었냐면, 나타샤의 주먹이 토니의 얼굴을 후려칠 때 말리는 척 하면서 같이 몇 대 때려줄 음흉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분노와 투쟁심은 토니 스타크의 한심한 꼬락서니 앞에서 갑작스레 증발했다. 토니는 사무실 소파에 드러누워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는데―작게 흐느끼고 있었다―페퍼는 그 옆에서 허리를 꺾어가며 웃고 있었다.

“나 차였어.”

으하하! 그 말을 듣자마자 나타샤와 바튼은 곧장 바닥을 굴렀다.

 

그랬다. 토니는 배너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두어 시간 뒤에 문자를 보냈다. 문자를 보낼까 말까 고민했던 게 아니라 너무 곧바로 보내자니 자존심이 상해서 뜸을 들인 것이다.

「연구실에 놀러올래?」 대놓고 식사를 하자고 하면 부담스러워 할 것 같아서 던진 변화구였다. 문자를 보내고 5분, 10분, 1시간이 지나도록 토니는 눈이 벌게질 때까지 핸드폰 화면을 노려봤다. 「그건 좀 힘들 것 같아요. 죄송해요. 냇한테는 잘 말해둘게요」 그게 끝이었다. 만나서 즐거웠다거나 또 만났으면 좋겠다거나 기꺼이 초대에 응하는 설렘 가득한 답장이 아니라 아주 냉정하고 단호한 거절이었다.

 

“난 진심이었다고. 정말 마음에 들었단 말야.”

저녁식사, 샴페인, 때로는 곧장 섹스로 이어지는 하룻밤뿐인 관계에 익숙한 토니가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벅찬 감정이었다. 게다가 배너는 너무 어렸다. 물론 성인이었지만 토니가 스스로의 양심을 돌아봐야 할 만큼 충분히 어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그렇게 없는 용기를 쥐어짠 데이트 신청이었는데 만회의 여지없이 한칼에 거절당하고 만 것이다.

나타샤는 시무룩해 하는 토니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가서 사과해. 아무리 너라지만 정도가 지나친 장난이었어, 토니.”

“하지만 난 차였다고, 나타샤. 동정심도 없어? 차인 마당에 가서 사과를 하란 말이야?”

나타샤는 토니가 그놈의 지긋지긋한 토니 스타크식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다.

“예의 좀 지켜. 페퍼, 토니 좀 데려갈게요.”

“네, 네. 마음대로 쓰세요.”

여기 내 편은 하나도 없어! 듣는 이 없는 공허한 절규였다.

 

배너는 후문으로 도망쳤지만 이미 그곳에서 잠복하고 있던 바튼에게 붙잡혀 연행되었다.

그들 네 명, 나타샤, 바튼, 토니, 그리고 배너는 어색한 침묵 속에 네모진 테이블을 두고 마주앉았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여유를 잃는 법 없는 토니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다리를 떨거나 잘 정돈된 머리카락을 손으로 헝클었다가도 다시 빗어 넘겼고 시선은 주변을 배회했다.

얼굴은 멀끔하다. 냇이 때리지는 않았나보네. 배너는 몰래 안도했다.

“브루스. 토니가 할 말이 있대.”

물론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하고 싶다기보다 묻고 싶은 말이었다. 내 어디가 부족한지, 뭐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나이? 그들 정도의 나이 차이는 요즘 세상에는 흔했다―, 연애가 싫다면 친구로 시작해 볼 수는 없는지 기타 등등.

그러나 나타샤의 서슬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대신 그는,

“미안. 내가 가끔 지나칠 때가 있어. 절대로 널 놀려먹으려는 생각은 아니었어. 그리고, 음, 네가 꽤 마음에 들었거든. 아니, 그렇고 그런 의미가 아니라……. 혹시 졸업하면 우리 회사에 들어올 생각 없어? 공부를 더 하고 싶다면 학비는 전부 지원해 줄게.”

하며 횡설수설했다. 결국 토니가 하고 싶었던 말은 “우리 친구할래?”였다.

배너는 잠시 토니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토니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토니의 초대를 오해했던 걸까. 생각하면 할수록 확신이 섰다. 오해였나보다. 자기가 보냈던 단호한 거절이 떠올라 슬그머니 뺨이 달아올랐다.

배너는 창피함을 떨쳐버리기 위해 그러자며 흔쾌히 대답했고 그때서야 토니는 비죽이 웃었다. 나타샤는 거울을 보느라 미처 못 봤지만 그 꼴을 정면으로 본 바튼은 마시던 커피를 도로 뱉을 뻔 했다. 토니 스타크답지 않은 기괴하고도 끔찍한 미소였다.

 

나타샤와 바튼은 할 일이 남았다며 회사로 복귀했고, 시동을 걸기 전에 나타샤는 토니에게 배너를 잘 데려다주라며 신신당부했다. “쓸데없는 짓 하지마.” 당연히 토니는 걱정 말라고 했고, 배너는 집보다 비싼 자동차에 몸을 웅크리고 탑승했다. 왠지 다리를 쭉 폈다간 큰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나타샤와 바튼의 자가용도 상당히 비싼 축에 속했지만 이 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토니는 조수석에 앉아 가방을 끌어안고 있는 배너를 계속 훔쳐보았다. 어깨가 경직되어 있었다. 어쩌면 배너도 그만큼 긴장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긍정적인 긴장상태 말이다.

이윽고 그들은 작은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토니는 브레이크 페달을 밟고 기어를 바꿨다. “감사합니다.” 배너는 예의바르게 인사를 건네곤 내렸다……. 아니, 하차를 시도했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물론 잠금장치를 풀었지만 계속해서 다시 잠겼다.

배너는 당혹하며 문고리를 계속 잡아당겼다. 덜걱거릴 뿐 열리지 않았다.

“토니?”

“저기, 미안.”

사과를 받자는 게 아니었다.

“내리고 싶은데요. 문 좀 열어주세요.”

“미안.”

덜컥 문이 열렸다. 드디어. 곧장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토니의 목소리가 발목을 잡아챘다. “브루스.”

슬슬 짜증이 치솟은 배너는 가방끈을 콱 움켜쥐고 뒤로 돌아섰다.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이 토니를 향했다.

“하고 싶은 말씀 있으면 빨리 하세요.”

“내가 친구하고 싶다고 했잖아.”

“그러셨죠.”

“사실 그거 거짓말이야.”

“네?”

이 아저씨가 지금 뭐래. 토니가 뭐라고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토니는 핸들에 머리를 처박았다가(“미치겠네.”라고 중얼거리면서) 다시 자세를 고쳤다.

“나타샤가 너무 무서웠어. 그 상황에서 진심이었다고 말하면 나타샤는 날 죽였을 거고, 아마도 콘크리트에 묻혔겠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난, 그러니까, 데이트를 하고 싶어. 진지하게. 물론 친구 관계가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가능하다면 말야. 진심이야. 농담도 아니고 장난도 아니야. 부담스럽다는 거 알아. 그래도 한 번만 기회를 주면 안 될까?”

“우리가 만난 지 얼마 안 됐다는 것도 알고 있어. 하지만 분명히 뭔가 통하는 게 있었고, 그걸 확인해 보고 싶어.”

토니는 속사포처럼 하고 싶은 말을 쏟아냈다. 배너는 어쩐지 자기가 숨이 차는 것만 같아 저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헐떡이고 있었다. 데이트 신청을 받은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이런 걸 데이트 신청이라고 할 수 있다면―허름한 자기 아파트 앞에서, 바퀴 달고 굴러다니는 맨션 운전대를 잡고 있는 토니 스타크에게 고백을 받은 건 맹세코 처음이었다.

“죄송해요.”

꽉 막힌 목구멍 틈새로 가냘프게 소리가 새어나왔다. 덜컥, 현관문이 열렸고, 그는 도망쳤다.

배너는 한동안 현관문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그때 조용하고 부드러운 엔진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타이어가 노면을 박차는 소리가 났고, 비로소 그는 안도할 수 있었다.

 

행운과 브루스 배너는 거리가 멀었다. 배너의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인생 속에서 그나마 행운의 친척뻘 되는 것이라면 나타샤와 바튼을 만났던 일이었다.

타인의 온기를 그리워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배너도 지독하게 사람 보는 눈이 없었다. 단순히 운이 나쁜 것일 수도 있겠다. 우연과 필연을 구분하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에 배너는 그 모든 일들을 우연 취급했다.

태어날 때부터 운이 없었으므로 형편없는 연애사를 어쩔 수 없는 불행으로 여기는 것은 쉬웠다. 배너는 그날도 밤거리를 헤매며 동전의 앞뒷면을 가늠하듯 자신의 운을 시험했고 그 결과는 언제나 그런 것처럼 썩 좋지 못했다.

그날 나타샤와 바튼은 월급날 맞이한 노동자들이 으레 그러는 것처럼 부자 된 기분을 마음껏 맛보고자 클럽과 바를 전전하고 있었다. 생판 본적도 없는 사람들과 땀으로 끈적거리는 피부를 맞대고 실컷 춤을 춘 다음, 간단한 야식이라도 먹을까 싶어 거리로 나선 참이었다.

그때 가로등 불빛이 미처 닿지 못하는 어두컴컴한 골목에서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그러니까 살과 뼈, 뼈와 살이 부딪치는 강렬한 소리였다.

그것이 그저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주정뱅이들 사이의 한심한 격투였다면 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돼”, “도와주세요” 따위의 가냘픈 음성이 그들의 발부리를 잡아챘다.

나타샤는 호랑이처럼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굽 놈은 하이힐을 신고도 흠결 하나 없는 완벽한 자세였다. 바튼은 상대가 무기를 소지하고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배너는 팔로 얼굴을 감싼 방어 자세를 취한 채 바닥에 나동그라져있었다. 무자비한 발길질을 피하기 위해 웅크린 작은 몸뚱이를 걷어차는 것(나타샤의 기준에 따르자면 인간 축에도 들지 못하기 때문에)의 얼굴을 노리고 나타샤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한 대, 두 대, 그리고 연이어 세 네대의 연타가 그것을 가격했고, 그것이 하루 종일 먹은 음식을 재확인하는 동안 바튼은 배너를 부축했다.

“감사합니다.”

혀를 씹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입안이 부어서 그랬는지 목소리가 가냘프기 그지없었다. 갈색 곱슬머리는 땀과 피에 젖어 이마에 들러붙었는데, 나타샤와 바튼 모두 빅토리아 시대 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병약하고 신경질적인 주인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고, 부어터진 눈꺼풀을 밑으로 힘겹게 드러난 둥근 눈동자를 보자마자 직관적인 사랑에 빠져버릴 수밖에 없었다! 비에 젖은 강아지나 아기 고양이와 마주쳤을 때 응당 인간이라면 빠져버릴 수밖에 없는 본능적인 사랑 말이다.

그들은 그렇게 배너를 구했다―주웠다.

아무튼 첫 만남이 그러했으므로 나타샤는 배너의 남성편력에 대해서 무척 예민했다. 앞으로 인생에 아이는커녕 결혼계획도 없는 그가 모성애 넘치는 어미 호랑이가 할 법한 행동을 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바튼은 그게 꽤 재미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본인도 나타샤를 비난할 처지는 못 되었다. 바튼은 누가 배너에게 눈을 흘기기라도 할라치면 곧장 그 위협적인 팔뚝을 꿈틀댔던 것이다.

 

“……그래서 그게 지금 고용주 얼굴을 후려친 이유라고.”

“미안, 토니. 나도 모르게 그만.”

나타샤는 무표정한 얼굴도 딱딱거렸다. 미안하다는 말은 차라리 살해협박으로 들렸다.

“병원비 물어줄게.”

드디어 토니가 폭발했다.

“필요 없어!”

토니는 뺨에 대고 있던 얼음주머니를 내팽개쳤다.

“내가 그런 한심한 놈들하고 똑같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다를 건 뭔데? 겁먹게 했다며.”

“난, 그냥―데이트 신청을 했을 뿐이라고.”

“네가 누군지 생각 좀 해. 브루스가 얼마나 부담스러웠겠어? 귀여운 여인 놀이를 하고 싶다면 다른 상대를 찾아봐, 토니.”

“그런 게 아니야.”

토니는 소파에 턱을 괴고 앉았다. 침잠하게 가라앉은 눈동자에는 장난기라곤 보이지 않았다. “맙소사.”

나타샤는 토니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토니가 하는 말은 정말로 진심이었다.

그는 친구의 순정을 응원해야할지 아니면 비난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태에 놓였다. 차라리 순전히 장난삼아 배너를 대하는 편이 나았을 텐데. 그런 경우에는 토니를 몇 대 때려주고 엄중한 경고를 해 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이윽고 나타샤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브루스가 싫다고 그랬다면서.”

“줄곧 혼자였다며. 학비며 생활비는 괜찮은 거야?”

그들은 동시에 말해놓곤 서로를 쳐다봤다.

나타샤는 잠시 어이가 없어 머리 한 구석이 멍해졌다.

“그야말로 네 알 바 아니지, 토니. 바로 그게 문제라고.”

“아니, 내 말은 그런 인재가 우리 재단 장학금을 놓치고 있다면 말도 안 된다는 거지.”

나타샤는 토니에게 한 방 먹일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브루스는 오딘슨 재단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있어. 물론 생활비 포함이지.”

“말도 안 돼!”

“여기도 신청했지만 떨어졌다던데?”

“내일 담당자 해고해.”

토니의 입술이 비틀렸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내뱉곤 하는 해고 선고는 대개 빈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유례없이 진지해보였고 나타샤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토니. 이미 끝난 얘기잖아. 브루스가 미안하다고 했으면 끝난거야.”

“내가 너무 서둘렀어. 다음에는 안 그럴 거야. 어른답게, 침착하게 얘기할 거라고.”

“도대체 왜 이래?”

“뭔가 통하는 게 있었다니까. 그게 뭔지 확인해 봐야겠어.”

토니 스타크가 한 번 고집 부리기 시작하면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다.

“그래도 브루스가 싫다고 하면?”

토니는 잠시 주저했다. 그러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뻔히 정해진 해답인데 어쩐지 말할 수가 없었다.

 

배너는 모텔을 나서 곧장 집으로 향했다. 계단에서 늘 삐걱대는 소리가 나고 가끔 바퀴벌레가 나오는 낡아빠진 아파트였지만 그에게는 소중한 보금자리였다.

입맛이 없어 물 한 잔만 마시고 필요한 책이며 노트북을 급히 챙겼다. 자전거를 타고 갈까 고민하다 결국 오늘만 택시를 타기로 결심했다. 그는 무척 피곤했다. 토니는 그의 머릿속에서 나갈 생각이 없어보였다.

인생에서 배운 가장 값진 교훈이 있다면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탐내면 안 된다는 것이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그 대상은 중요하지 않았다. 배너는 지금껏 그 원칙을 지켜가며 살아왔다. 가진 것은 없었지만 자존심은 지킬 수 있었다.

‘피곤해.’

잠시 문고리를 잡고 망설였다. 그는 다시 현관문을 닫고 애써 챙긴 가방은 소파에 던져버렸다.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침대에 몸을 던졌다.

배너는 잠드는 체 하며 그날 만남을 떠올렸다. 내가 무슨 말을 했더라. 토니는 언뜻 조잡해 보이는 캐릭터 티셔츠에 검은색 재킷을 입고 있었다. 청바지를 입었는지 아니면 면바지를 입었는지는 조금 헷갈린다. 아무튼 중요한 점은, 그날 토니는 정말 토니 스타크답게 아주 멋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어쩌면 그렇게 재미나게 하는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함께 떠들었다. 토니는 그를 집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얼음길 위를 미끄러지듯 자동차는 부드럽게 지면을 달렸다.

무척 안타까운 일이지만 배너는 머리가 좋았다. 모르는 척 넘어가기에 그는 지나치게 명석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토니 스타크와 연애 따위를 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는 토니 스타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단 하나, 배너가 까맣게 모르는 것이 있었다.

「이따 시간 되면 커피 한 잔 할래?」

토니 스타크가 얼마나 집요한지, 그는 상상도 못했다.

배너는 아예 핸드폰을 뒤집어버렸다. 한 번, 두 번 연이어 진동이 울렸다. 「괜찮은 데를 아는데」 「혹시 커피 안 마셔? 그럼 차는 어때」

그는 펜대를 움켜쥐고 고민했다. 이렇게 무시해 봤자 토니가 쉽게 포기할 것 같지는 않았다.

좋아. 차라리 한 번 만나서 내 의사를 아주 단호하고 확실하게 전달하자. 배너는 의지를 담아 아이폰 화면을 두드렸다. 「6시에 만나죠」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한 번 더 보냈다. 「학교에 찾아오지는 마시구요. 장소 알려주시면 제가 갈게요」

그래서 그들은 만났다. 배너는 다분히 방어적인 자세였다. 단단히 팔짱을 끼고 다리는 꼬았다.

“저번에 있었던 일은 사과할게.”

“네.”

“그리고……. 혹시 말이야, 졸업하면 오딘슨네서 일 할 계획이야?”

“네?”

갑자기 맥이 탁 풀렸다. 또 어쭙잖은 데이트 신청을 할라치면 정말 화를 낼 작정이었다.

토니는 얇은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스타크 인더스트리 직인이 찍힌 진짜배기 계약서였다.

“천천히 읽어봐. 별 건 아니고 저번에 얘기했던 네 프로젝트 말이야. 우리 회사에서 정식으로 지원하고 싶었거든. 물론 협업 조건으로.”

“어……. 정말로요? 이건 조건이 너무,”

너무 좋았다.

“물론 정말이지. 그래서 오딘슨네서 일하기로 되어 있는 거야?”

“아니요. 그냥 장학금만 받고 있는 거예요.”

“그럼 정식으로 스카웃 제의를 하고 싶은데.”

“왜요?”

배너는 종이를 도로 토니를 향해 밀었다. 달리 원하는 게 있지 않으냐는 질문이었고 그건 정당한 의심이었다.

토니는 신중하게 할 말을 선별했다.

“네 프로젝트가 아주 마음에 들었거든. 회사 차원에서 충분히 지원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음, 네가 궁금하다면 말이야, 데이트 제안은 유효해.”

그러면 그렇지. 배너는 대놓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토니가 생각해도 지금 얘기가 좀 이상하지 않아요? 그 두 가지는 같이 가면 안 된다고요. 네 아이디어가 마음에 든다, 그러니까 데이트하자는 제안이 어떻게 들리는지 생각 좀 해 보세요.”

차가운 얼음물 한 잔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마시거나 아니면 저 빤빤한 얼굴에 끼얹거나.

“스카웃 제의는 정말 감사해요. 하지만 그게 제가 마음에 들어서라면, 거절할게요. 그리고 저는 스타크씨하고 데이트하고 싶지 않아요. 부담스러워서 싫어요.”

“맞아. 이상하게 들린다는 건 인정해. 둘 다 진심인 걸 어쩌겠어? 널 다른 회사에 놓치기도 싫고 데이트도 하고 싶어.”

배너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지만,” 토니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가 싫다면 더는 묻지 않을게. 대신 친구 정도는,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은 거절하려고 했다. 토니가 하는 모든 말이 의심스러웠기 때문에. 안쓰럽게 울렁거리는 헤이즐넛 눈동자가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제기랄. 토니의 눈은 정말 빌어먹게 아름다웠다.

“좋아요. 대신 약속해 주세요.”

“네가 원한다면.”

토니는 약속했다. 적어도 서로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은 확보된 셈이었다.

그래도 그때는, 계약서에 엄숙히 친필 사인을 할 때만큼은 친구 관계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      *      *

 

“토니. 이게 다 뭐야? 오늘 무슨 날이었어?”

“오, 자기. 나보다 몇 배는 무심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1주년 기념일까지 잊어버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자, 여기.”

“무슨 소리야. 기념일은 앞으로 6개월은 더 있어야 하는데.”

그들은 어리둥절 서로를 쳐다봤다.

“설마, 토니, 제발 그 날이라고 말하지 마.”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맙소사, 6개월 전이라면―우리가 처음 한 날은 그보다 더 전이잖아. 그때도 내가 남자친구가 아녔다고?”

“뭐…….”

“이럴 수가.”

“샴페인?”

“완전 상처받았어!”

“그래, 그래.”

“이봐, 브루스. 키스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라면,”

“으응?”

“그러니까, 키스가 모든 문제를―”

“오, 그래.”

“키스를…….”

“그래.”

“이런 젠장. 이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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