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문의 기억은 모두 버키 반즈의 것이었다. 윈터 솔져는 그러한 인간적인 일에는 맞지 않았다. 그러므로 버키는 등받이가 없는 작은 의자에 앉아 왼손은 파이프에, 오른손은 의자에 단단히 묶이고 두 눈을 천으로 가려진 채로 그 어느 때보다 수없이 많은 버키 반즈의 기억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처음에는 어깨가 빠개질 것처럼 아팠고, 몇 시간이 지나자 등과 어깨, 무릎, 발목은 통증이 지속되다 못해 나무토막을 가져다 놓은 것처럼 뻣뻣해졌다.


‘왜 아무도 오지 않지?’


버키는 빨리 끝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어서 머릿속에 있는 하이드라의 모든 것들을 털어내고, 그들이 휘저어 일어난 흙탕물을 맑게 가라앉히고 싶었다. CIA에서 제공하는 일종의 새 신분을 보장하는 서비스는 그렇게 가라앉을 기회를 선사했다. 갑자기 뿌리를 뚝 파내어져 시작되는 새로운 삶. 듣도 보도 못한 이름으로 사는 삶은 낯설겠지만, 이름도 없이 이용당한 적도 있는데 그쯤이야.
심문은 시작되지 않았다. 그들은(아마) 교대로 버키를 잠들지 못하게 괴롭히기만 했다. 때때로 자세를 바꾸고, 걷어차고, 식사를 가져다주며. 한잠도 못 자고 닷새가 지나자 환각이 보이기 시작했다. 제임스가 죽었어. 내 동생이 죽었어. 어머니가 옆에 앉아있다. 어머니,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예? 하워드 스타크를 시작으로 윈터 솔져의 타겟들이 꾸역꾸역 불어났다. 모두 실려 간다. 버키는 고개를 돌렸지만 환각은 끊어지지 않았다. 사라 로저스가 지켜보고 있다. 그 앞에서 목이 한 줌에 쥐일 것 같은 작고 마른 스티브 로저스의 숨이 멈췄다. 버키는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다 의자에서 넘어졌다. 단단한 손이 그를 억지로 일으켜 다시 의자에 앉혔다. 스티브, 스티브…….


“그래, 버키.”


그 손의 주인이 대답하며 안대를 풀었다. 스티브 로저스였다. 버키는 뭍에 내팽개쳐진 물고기처럼 헐떡이며 숨을 들이마시고 스티브의 얼굴을 응시했다.
버키를 의자에 앉힌 스티브는 다정한 얼굴로 접시를 버키의 무릎 위에 올려주었다. 양상추와 미트볼, 약간의 요깃거리가 놓여 있었다. 그동안 뭘 먹는지도 모르고 머리채를 잡혀 코를 접시에 박고 먹었던 것보다는 훨씬 나은 대접이었다.
그러나 버키는 약간 절망했다. 자신의 눈앞에 스티브가 나타났고, 그는 심문하지 않을 걸 알아서였다.
왜냐하면 스티브는 빌어먹게 심문을 못했으니까. 그는 비꼴 줄도 모르고, 상대가 숨기려는 부분을 캐치하지 못하고, 모호한 대답이 돌아오면 저절로 인상을 찡그렸다. 스티브는 패를 숨기고 상대하는 것에는 약했다. 그래서 심문은 제임스 몽고메리 폴스워스에게 맡겼다. 그는 신사적이지만 잉글랜드 사람이니까. 잉글랜드 사람이라는 게 왜 대답이 되는지 버키는 잘 몰랐다. 하지만 예전의 버키 반즈는 그 대답에 납득한 기억이 있었다.


“심문은 언제야? 언제까지 이 짓만 반복하지?”


스티브가 안쓰럽다는 듯이 대답했다.


“심문은 없어, 버키.”


고개를 숙이며 버키가 몇 마디 욕을 내뱉었다. 스티브는 한쪽 무릎을 꿇고 버키와 눈높이를 맞췄다.


“대신 말할 건 있지. 기억하고 있어? 딱 한 단어야. 도망치지 않겠다고 말하면 돼. 떠나지 않겠다고 말하면 돼.”


아, 버키는 뒤죽박죽인 뇌에서 묶이기 전의 기억을 더듬어 찾았다. 그를 잡아 눈에 안대를 씌우고 손을 묶어 의자에 고정한 것은 CIA도, FBI도, 혹은 S.H.I.E.L.D도 아니었다. 스티브 로저스였다. 감금하기 전 그는 하이드라의 정보가 아닌, 전혀 다르지만 아주 명확한 요구를 했다. 새 신분을 포기해. 내 옆에 있어. 거부하자 스티브는 말없이 버키에게 안대를 씌웠다.
버키가 고개를 젓고 쉰 목소리로 대꾸했다.


“안 해.”


한동안 말이 없었다. 버키는 감았던 눈을 떠 스티브를 곁눈질했다. 스티브는, 늘 그렇듯이, 서글픈 확신이 어린 표정으로 버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하겠구나, 버키.”


안대가 눈을 가렸다. 버키는 다시 어둠 속에 혼자 남았다. 무릎 위의 접시가 바닥에 떨어지며 높은 소리를 냈다. 마치 그것이 방아쇠가 된 것처럼 환각이 거듭해 찾아오고 기억은 와르르 흩어져 엉망으로 조립되기 시작했다.
버키는 오랫동안 불편한 자세로 묶여 피가 통하지 않아 가슴이 저리고 아파오는 것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괴로웠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혼탁한 목소리가 ‘아까 들었잖아. 스티브 로저스가 널 잡기 위해서야.’ 라고 속삭였지만 버키는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스티브가 날 묶은 것도 환각이 아닐까. 스티브가 나를 이렇게 붙잡을 리 없는데.


“왜 없어.”


화난 목소리가 대꾸했다. 언제부터 생각한 게 말로 흘러나갔는지 확신할 수 없어서 버키는 이것 역시 자신에게 편리하게 들리는 환청이라고 생각했다. 버키가 그 이상 말하지 않자 화난 목소리의 손이 다시 한 번 버키의 어깨를 흔들었다. 버키가 맥없이 흔들리며 신음했다.


“왜 내가 널 떠나보내는 게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해.”


서두르는 손길로 안대가 벗겨져 나갔다. 기억을 혼란시키던 어둠이 걷히고 버키는 자신 앞에 있는 사람을 확인했다. 스티브 로저스였다. 내가 무슨 말을 했지? 어디까지 말했지? 이마를 찡그리며 숙인 버키의 턱을 스티브가 두 손가락으로 강제로 들어올렸다.
눈이 마주쳤다. 스티브는 묶여있던 버키만큼이나 괴로워하는 안색으로 뚫어져라 버키를 노려보았다.


“내가 널 포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할 수 있어.” 버키가 그르렁거리는 숨소리를 감추려고 애쓰며 말했다. “노력해 봐, 스티브.”


“그래, 노력했어. 네가 CIA에 제일 먼저 찾아갔어도, 감옥에 몇 년을 수감된다고 해도 참았어. 네 결정이니까.”


스티브의 손이 버키의 턱을 강하게 쥐었다.


“거기까지 포기했잖아. 그런데 넌 너 혼자 빌어먹을 존 클락이 되어서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이름까지 다 알고 있잖아. 젠장할 캡틴 아메리카와 유능한 스파이 친구들 짓이군. 버키는 일부러 비웃음을 지었다.


“CIA에서는 대통령도 모를 극비라고 했는데 극비라는 말의 뜻이 바뀌었나봐? 아니면 하이드라를 상대하던 기술이 녹슬지 않은 건가?” 


스티브의 턱에 힘이 들어가 꿈틀댔다. 버키는 더 비웃을 기력조차 없었기 때문에 입술을 찡그렸다가 냉소적으로 솔직하게 내뱉었다.


“난 아직도 엉망이야. 모든 게 엉망이야. 기억을 순서대로 쌓을 수도 없고, 매번 눈 뜰 때마다 망가진 기계에 억지로 전원을 올린 기분이야. 덜컹거리고, 삐걱거리고, 시동이 걸린 듯 하다가 그냥 멈춰버리지. 네가 원하는 버키 반즈가 이래?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윈터 솔져보다 그냥 좀 멍청한 외팔이 존 클락이 낫지 않겠어?”
“왜 물어보는 거야. 내가 존 클락을 선택하라고 할 것 같아? 날 버리고, 네 삶에서 날 지워버리는 선택을 하라고 할 것 같아? 내가 널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그래서 나를 가두는 거야? 이렇게라도 영원히 네 곁에 있길 바라?”


한순간 스티브의 입술이 가늘게 떨리고 눈에서 번쩍하는 빛의 줄기가 번졌다 사그라졌다. 그 빛을 버키는 단지 죄책감이라고 이해했다.
스티브는 조용히 말했다.


“……너와 나, 끝까지 함께 하자고 했잖아.”


그 익숙한 말에 서글픈 미소가 버키의 입가에 떠올랐다.


“끝을 봤잖아.”
“아니……”


스티브가 반박하려고 했지만 버키가 빨랐다.


“끝났어. 모든 게 다 끝났어.”
“입 다물어, 버키.”
“버키 반즈는 그 때 기차에서 떨어져 죽었어.”
“입 다물어!”


참지 못하고 스티브가 버키의 뺨을 후려쳤다. 살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고개가 휙 꺾였다. 창백하게 질려있던 뺨이 붉게 부어오르고 찢어진 입가에서 피가 비쳤다. 스티브가 버키의 어깨를 세게 움켜쥐고 억지로 눈을 맞췄다.


“너는 이렇게 살아 있잖아! 그런 일로 포기할 거라면 끝까지 함께라는 약속을 하지 말았어야지. 네 약속을 내가 믿게 하지 말았어야지!”


스티브의 푸른 눈과 마주하며, 버키의 눈동자가 천천히 부풀어 오르고 속눈썹이 젖어들었다. 입술을 잘근거리며 가슴을 들썩이던 버키가 고개를 숙이고 속삭였다.


“나는, 난 버키로 너무 오래 살았어. 버키를 죽여줘, 스티브.”
“나는? 버키, 네가 없으면 나는?”
“너한텐 다른 친구들이 있잖아. 나 같은 빌런 하나한테 이렇게 집착할 필요 없어.”


스티브의 손에 힘이 들어가 버키의 어깨를 으스러질 듯 쥐었다.


“너 말곤 안 돼.”


버키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어깨를 잡은 스티브의 손이 놀랄 정도로 뜨겁게 느껴졌다. 자신의 몸은 이미 체온이 빠져나간 시체고, 스티브만이 살아있는 것처럼.
뇌가 고장 난 오르골처럼 덜컥거리며 버키에게는 옛날의, 너무나 옛날의, 낡은 추억을 재생했다. 그러나 그 때처럼 스티브에게 버키는 필요하지 않았고, 이제 버키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지도 않았다. 그것은 이미 지나가고 다시는 오지 않을 일이었다. 버키는 아직도 그 낡은 추억을 소중하게 재생하려고 이렇게까지 하는 스티브가 안쓰러워 울었다.
안쓰러운 스티브는 버키의 축축한 뺨을 쓰다듬고 눈물을 닦아내며 다시 한 마디 한 마디 성실하고 정중하게 발음해 똑똑히 속삭였다.


“너 말곤 안 돼, 버키.”




END



MCU:CA STUC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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