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아침은 셔터를 올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무늬가 없는 짙은 갈색 앞치마를 두른 후, 원두를 볶고 디저트 메뉴에 들어갈 재료를 손질한다. 그 다음 카페 한 구석에 마련한 작은 정원을 돌보고 있자면 으레 첫 손님이 찾아오곤 했다. 그 때가 오전 8시 무렵이었다.

도시의 중심지에 위치했다고는 해도 기껏해야 테이블 서너 개만을 둔 작은 개인 카페가 대단히 잘 될 리는 없었다. 그저 팬텀의 새로운 취미에 불과했다. 요리에 흥미를 붙였고 마침 생각난 것이 조그만 카페였다. 머물던 곳을 떠나 타국까지 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흥미를 잃고 본국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팬텀은 사거리 옆 골목 어귀에 카페를 차렸다. 연인을 잃고 제 나름대로 도움을 주었던 프리드마저 세상을 떠난 다음의 일이었다. 금전적인 문제는 없었으므로 별다른 홍보조차 하지 않은 카페는 그럼에도 제법 성행했다. 근방 대학교의 여대생들이 주요한 고객층인 이유가 그와 관련 있다는 것쯤은 알았다. 이유야 어쨌든 그 덕에 유지비과 생활비에도 약간이나마 보탬이 되니 다행이었다. 그리고 사람을 만나는 일도 제법 즐거웠기 때문에, 팬텀은 이 생활에 만족했다.

잊은 듯 살아도 은월은 여전히 가슴 속에 아프게 자리하고 있었다. 스무 번째 생일날에 세상을 떠난 것이 벌써 백 년이 다 되어갔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사람 사는 모양은 그다지 바뀌지 않았고 은월의 종족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여전히 스무 살에 죽었다. 허나 해가 갈수록 개체수는 급격하게 줄어드는 것은 과거와 조금 다른 점이었다. 십대의 나이에 아이를 낳던 과거의 사상이 바뀐 것이 가장 큰 요인이었고, 개체수가 감소함에 따라 동족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줄어든 것도 한몫했다. 아마 멸종위기에 가깝지 않을까.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그들은 머지않아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열렬히 사랑했던 연인의 존재도 그러하겠지.

살면서 몇 번이나 환생을 보아온 탓에 팬텀은 언젠가는 그의 환생이라도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채였다. 인간 이외의 존재라도, 억겁의 시간이 흘러도 좋았다.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아메리카노 미디움 하나요.”

고무나무의 넓적한 이파리에 앉은 먼지를 닦던 중이었다. 팬텀은 첫 손님을 기껍게 맞이하지 못했다. 물수건을 쥔 손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그간 수없이 연습하고 생각했던 것들이 죄 허사가 되는 순간이었다. 팬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피로에 절여진 목소리가 나지막이 팬텀을 불렀다. 조금 잠긴 나지막한 목소리는 분명 은월이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꿈에서 종종 듣곤 하는 목소리를 모를 리 없었다.

팬텀은 겨우 뒤를 돌았다. 갈색 머리는 여느 남자들만큼 짧았다. 그러나 그는 틀림없이 제 연인이었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저를 흘긋대는 시선이 건조했다. 처음 거두어들였던 때의 그것과 같이, 완벽한 타인을 향한 시선이었다.

“네, 아메리카노……. 미디움 하나.”

그리고는 한동안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울렸다. 애초에 카페 주인과 손님 사이에 친근한 대화가 오갈 일도 없거니와, 은월은 며칠을 내리 밤을 샌 까닭에 몹시 지친 상태였다. 성격이 바뀌지 않았다면 여전히 낯가림이 심할 것이다. 낭만적이어야 할 재회치고는 여러 모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팬텀은 떨리는 손을 다잡고 애써 커피를 내리는 데에 온 정신을 쏟았다. 모래먼지를 삼킨 것처럼 목구멍이 까슬까슬했다.

그렇게 내린 시커먼 물을 종이컵에 담고 컵홀더로 감싸 건네는 일련의 과정이 한없이 길었다. 은월은 눈을 감고 선 채로 졸고 있었다. 팬텀은 카운터 아래로 손을 내려 더듬어 쿠키 한 봉지를 찾았다. 어제 아침에 구웠지만 마지막까지 팔리지 못한 쿠키였다. 비닐봉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은월이 눈을 떴다. 그는 아메리카노를 받아들면서도 쿠키는 선뜻 받아들지 않았다.

“쿠키는 안 시켰는데요.”

“첫 손님한테 서비스로 드리는 거예요. 맛있게 드세요.”

“네에…. 감사합니다.”

당분이 많이 들어가지 않은 아몬드 쿠키는 담백하니 그 입맛에 맞을 것이다. 입맛이 변하지 않았더라면.

축 처진 어깨가 문을 밀고 나가자 써늘한 공기가 훅 발을 굴러 들어온다. 은월은 그 사이로 발을 내디뎌 카페를 나갔다. 팬텀은 가만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문이 닫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단골처럼 들르는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이들의 등장이었다. 팬텀은 와이셔츠 위로 도톰한 카디건을 걸쳤다. 그리고는 으레 짓곤 하던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어서 오세요.


* * *


그 이후에도 은월은 거의 하루에 한 번 꼴로 팬텀의 카페에 들렀다. 작은 개인 카페라도 알 만한 사람들은 아는, 입소문깨나 타는 곳이었기에 그의 입에도 제법 맞은 덕분이었다. 다행히도 입맛은 그대로인 모양이었다. 주로 아메리카노, 가끔은 에스프레소나 더치커피. 이따금 아몬드 쿠키나 치아바타 샌드위치를 추가한다. 케이크도 몇 가지 있지만 그 쪽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나름대로 기념일이랍시고 마지막으로 먹인 것이 케이크였다는 것을 회고하자면 아쉽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얼굴을 익히고 다정하게 인사를 건넬 정도는 되었다. 나름대로 살갑게 말을 붙이고 서비스로 작은 쿠키 하나 정도를 더 얹어주는 식으로 얻어낸 친분이었다. 그나마 이전의 생보다는 사회성이 함양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어쨌든 약 한 달 반에 걸친 끝에 팬텀은 은월에 관한 정보를 조금이나마 알아낼 수 있었다.

나이는 스물셋―무사히 스물을 넘겼다는 사실에 팬텀은 안도했다―, 주변의 C대학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다. 언제나 혼자 다니지만 아주 드물게 서너 명의 친구들과 함께 들르곤 한다. 그들 중에 프리드도 있지만 그리 중요한 정보는 아니다. 몇 번을 환생해도 한결같이 엮이는 인물은 늘 있기 마련이므로. 은월의 생애에서는 그 인물이 자신과 프리드가 될 것이었다.

보잘 것 없는 정보는 이 정도였다. 만난 지 한 달 즈음밖에 되지 않은, 그마저도 은월이 스스로 오지 않으면 끊길 관계였다. 타고난 성격도 성격이었기 때문에 은월은 내밀한 사정을 쉬이 털어놓지 않았다. 그러나 팬텀은 그런 상황마저도 즐기고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머지않아 다시 사랑하게 될 테니까.

그래도 이런 건 좀 싫다. 팬텀은 카운터 너머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각자 카드를 꺼내든 채로 누가 계산을 할 것인지 다투는 중이었다.

“내가 계산한다니까.”

“됐어. 너 얼마 전까지 팀플 때문에 제대로 못 잔 거 다 알아. 수고했으니까 사주는 거야.”

“뭐, 그렇다면 감사히 먹지.”

좋은 우정이구나. 공연한 질투심에 팬텀은 입술을 비죽였다. 마냥 우호적이지는 않았던 전생에서의 관계를 생각하면 기분이 묘했다. 되풀이되는 운명의 만남이 얕을 수도, 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환생이란 일정한 규칙을 갖춘 체계적인 시스템이 못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부분에서 변수가 생기곤 했다. 안면을 유지하고 이름을 아는 것으로 끝나는 생도 있고 한시도 떨어지지 못하는 형제 같은 관계를 유지하는 생도 있다. 수백 년 동안 무수히 많은 환생을 보아오면서도 거기에 제 연인이 말려드니 그런 당연한 인과조차도 순순히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머지않아 제 품에 들어올 테지만 일말의 여지조차 갖지 못한 현재의 관계에서는 신경이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프리드가 카드를 내밀었다. 세로금을 그리며 카드를 긁고, 커피 두 잔과 닭가슴살 토스트를 준비하는 동안 팬텀은 카운터 너머로 그들을 면밀히 관찰했다. 창가에 앉은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학교에서의 일들이나 주변인들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대화는 흐름이 끊기지 않았다. 언제든 웃는 얼굴이 드물던 은월은 간간히 미소를 보이며 대화에 응했다. 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은 프리드였고 은월은 그에 맞장구를 치는 정도였다. 화자의 비율이 공정하지 않은 대화임에도 은월은 즐거워 보였다.

때맞춰 주문 받은 음식이 완성되었다. 팬텀은 빠르게 걸어 나가 그들 사이에 트레이를 내려놓았다. 대화가 멈추고, 두 사람의 시선이 팬텀을 향했다. 속내를 들킬 리는 없지만 지레 긴장한 탓에 온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요즘 자주 오시네요?”

“네, 시험 기간이었고 얘는 팀플도 있었거든요.”

은월을 겨냥한 질문이었으나 대답을 한 건 프리드였다. 악의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대답이었지만 그런 순수함이 더 화를 부를 때도 있는 법이다.

“하하, 경영학과면 이래저래 바쁘죠. 요즘 학생들이 많이 피곤해하는 것 같더라니, 시험 기간이었구나.”

“어, 경영학과라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은월이 직접 말해줬거든요. 얼마 전에.”

신경을 쓴다면 누구라도 알 만큼 명백한 견제였다. 그러나 은월은 말없이 커피를 마셨고 프리드는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 눈치 챈 것이 없는 기색이었다. 말을 뱉고서야 팬텀은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조급하게 마음만 앞선 탓이다. 맛있게 드시라는 인사를 끝으로, 팬텀은 그들에게서 발을 물렸다.


* * *


“그 사람 조금 이상하지 않아?”

한 시간 반 남짓한 공강 시간을 죽이던 카페에서 나온 직후에 프리드가 꺼낸 말이었다. 은월은 그 카페에 누가 있었는지를 생각했다. 자신과 프리드를 비롯하여 자신과 어느 정도 말을 튼 사장이 전부였다. 흔한 알바생조차 고용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구? 점장?”

“알바생이 아니었구나. 그래, 그 사람.”

“왜?”

“그냥…. 좀 이상해. 콕 집어서 말하긴 어렵지만.”

은월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가 카운터에서 걸어나와 주문한 것을 전달하는 건 처음이었지만 그걸 이상하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달리 손님도 없고 나름 친해졌으니 그런 것이려니 싶었다. 저 혼자 카페에 있자니 심심해서 그랬을 것이다. 그 점을 제외하자면 팬텀이 평소와 다른 언행을 보인 것은 없었다. 은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꽤 좋은 사람이야.”



02.

카페를 나서기 전에 팬텀은 잊은 것이 없는지 재차 확인했다. 영생을 살기 때문에 아쉬운 건 없더라도 늘 소지하는 것들을 빠뜨리면 허전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모든 소지품을 챙긴 것을 확인하고, 그는 바깥으로 나와 셔터를 내렸다. 그물 모양으로 뚫린 철제 셔터가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닿았다. 그 안쪽, 유리문 너머에는 쪽지가 붙어 있었다. 여행을 가게 되어 사흘 동안 영업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본 목적은 결코 여행이 아니었으나 어쨌든 타지로 나가야 한다는 점만큼은 확실했다. 사흘이라는 기간을 잡아두긴 했지만 그보다 짧아질 수도, 길어질 수도 있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싶었다.

미리 꾸려둔 짐을 들고 팬텀은 기차에 올랐다. 비수기인 평일 오전의 기차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기차는 금방 출발했다. 아마도 족히 서너 시간은 가야 할 것이다. 기차 바깥의 풍경은 특별한 것이 없었다. 마천루가 그득한 도심지를 벗어나자 조금씩 층이 낮은 건물들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땅바닥에 납작 붙은 듯 작은 주택들이 드문드문 들어선 외곽마저 벗어나자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기분 좋게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팬텀은 저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꿈을 꾸었다. 종종 꾸곤 하던 꿈이었기에 별다른 느낌은 들지 않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그리운 얼굴에 눈시울이 시큰해질 뿐이다. 꿈속에서 은월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처음 만난 날처럼 아주 어린 모습이기도 했고, 마지막 날처럼 성인에 가까운 모습이기도 했다. 팬텀과 함께하던 모든 시간들, 그 흐름에 기인하여 시시각각 변화하는 모습이 불규칙하게 등장하는 것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아주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익숙한 고요 속에서 서로를 마주보는 것으로 끝나는 꿈도 좋다. 그저 나타나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러다 눈을 뜨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은월을 곱씹으며 하루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런 날은 온종일 처참한 기분이었다.

오늘의 선잠 속에서 나타난 은월은 대학생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커피를 한 손에 들고 지친 얼굴을 한 그는 말없이 팬텀에게 다가왔다. 잘 자라주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팬텀은 무심코 은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은월은 순순히 머리를 내어주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동 없던 얼굴에 흐릿하게나마 미소가 띄워진 것 같기도 했다. 팬텀은 나지막이 웃었다. 눈을 떠도 그가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었다.

“아주 얼빠진 얼굴이군. 정신 차려.”

플랫폼에 내려오자마자 팬텀을 반긴 것은 불퉁한 얼굴로 서 있는 루미너스였다. 약 십 년 만에 만난 동족이라도 그다지 좋은 사이는 못 되었기 때문에 반갑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인사도 무엇도 아닌 짜증 섞인 말에도 팬텀은 토를 달지 않았다. 도리어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에 루미너스는 혀를 차며 눈을 흘겼다.

“멍청하긴. 부탁한 건 가져왔으니까 바로 가져갈 수 있을 거다.”

“아, 그거.”

“그거라니?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루미너스의 말에 팬텀은 자신이 여기에 온 목적을 다시금 상기했다. 주재료인 약초 하나를 구하는 데에만 십여 년이 걸리는 약을 주문했고, 얼마 전 제조에 성공했다는 연락을 받고 부리나케 달려온 참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쯤에 주문했던 약이다. 약초를 재배하는 것부터 약을 제조하는 과정까지, 무엇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어렵다고 정평이 난 그것을 만들 수 있는 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루미너스는 흡혈귀와 인간의 피가 섞인 혼혈이었다. 이어받은 흡혈귀로서의 힘은 강력했으나 인간의 피가 섞인 이상 어느 정도의 핸디캡은 자연히 그의 힘을 구현하는 데에 걸림돌이 되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제약 등을 공부하는 데에 힘을 썼다고. 일반적인 흡혈귀들보다 현저히 짧은 수명을 온전히 거기에 바치겠노라고 그는 선언했다. 합당한 보수는 반드시 받아내지만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 라는 속물적인 목적보다도 더 많은 이들을 돕고자 하는 선행에 가까웠다. 타인과의 교류보다는 제 공부에 몰두하는 루미너스와 팬텀의 상성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가장 깔끔한 거래 상대로서는 적격이었다. 성질은 더러워도 실력이나 정직함은 믿을 만 한 상대다. 그렇기 때문에 팬텀은 다른 누구도 아닌 루미너스에게 약을 주문한 것이다.

팬텀은 그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두 사람은 플랫폼을 따라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남부에 있다 북부로 올라오니 적응되지 않는 찬바람이 길게 뚫린 플랫폼을 관통했다. 사정없이 나부끼는 코트 자락을 여미고, 팬텀은 더욱 몸을 움츠렸다. 흡혈귀는 인간에 비해 더위나 추위를 둔감한 편이다. 아주 인간이 다 되셨군. 루미너스는 코웃음을 쳤다.

“약 같은 건 잘 안 사지 않았나? 별일이군.”

“기분 나쁘긴 하지만 너라면 실력만큼은 믿고 맡길 수 있으니까. 그리고 검증된 약이잖아?”

“그렇긴 하다만…….”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은 듯, 루미너스는 무어라 더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팬텀이 주문한 것은 기억을 되살리는 약이었다. 보통은 불멸자나 수백, 수천 년의 생을 사는 마물들이 저보다 생이 짧은 이가 숨을 거두고 후에 환생했을 때 함께하고자 사용한다. 전생의 기억이 전무한 이의 곁을 맴도는 것은 생각보다 괴로운 일이었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사는 마물들 사이에서 인기가 제법이었다. 다만 만들기도 어려울 뿐더러 그만큼 가격대도 만만치 않은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조금 더 먼 과거에 장사로 어마어마한 거금을 벌어둔 팬텀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 사항이었다. 정확한 환생 주기는 알 수 없었지만 마침 운이 좋았다. 이제 돌아가서 어디든 약을 타서 주면 되면 그걸로 끝이었다. 다시 사랑할 수 있다.

“…전에 말했지만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어. 오래가진 않겠지만 오한, 두통, 고열. 뭐, 쉽게 말하자면 심한 몸살 같은 게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역 바깥의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차 트렁크를 열며 루미너스는 이미 몇 번이고 말했던 사항을 줄줄 읊었다. 보관 시의 주의사항이나 혹시 모를 부작용에 대한 것들이었다. 부작용이래도 그리 대단치 않았다. 정신적으로 타격을 입어 정신이 나가버리는 자도 있다지만 아주 극소수에 불과했다. 거의 전무하다고 봐도 좋을 만큼의 비율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았다.

루미너스가 두꺼운 담요를 들추고 그 아래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냈다. 단단한 가죽으로 덮인 그것은 내부에 충격이 가지 않도록 푹신한 재질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겹겹이 싸인 포장재 중심에 놓인 작은 병을 확인하고, 팬텀은 케이스를 닫았다.

“다 그렇다는 건 아니잖아?”

“내 말은 뭘로 들은 거냐? 혹시 모르니까 말해주는 거잖아.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기면 그 땐 나라도 어떻게 하지 못해.”

“네, 네. 돈은 선금 빼고 보내면 되지? 돌아가면 바로 보낼게.”

케이스를 가방 깊숙이 넣고 팬텀은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타이밍도 좋고, 예정되었던 일은 때에 맞춰 완료되었다. 더없이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본래는 휴식을 겸하여 느긋하게 관광이라도 할 참이었으나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어졌다. 루미너스가 마음에 들어 하는 만큼 상상 이상으로 심심한 동네인 것도 한 몫 했다. 예약해둔 숙소에는 위약금을 물면 되고 기차 티켓이라면 얼마든 구할 수 있을 만큼 여유로운 시기였다. 팬텀은 이른 귀가 계획을 세우며 정리해야 할 일들을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루미너스는 마뜩찮은 얼굴로 팬텀을 지켜보고 있었다. 휴대폰으로 티켓을 예매하던 팬텀이 그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 때까지, 루미너스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너, 그거 진짜로 먹일 셈이냐.”

그 한 마디가 꽤 묵직하게 다가왔다. 팬텀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미리 말해둔 거지만…. 좋은 기억만 떠오르는 건 아냐. 기억할 수 있는 나이부터의 기억이 모조리 떠오르는 거니까. 전생을 떠올린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충격이 된다. 네 말을 들어보니 어릴 땐 좋지 않은 환경에서 자라온 것 같던데 그런 기억까지 떠올리게 하면 그 이상으로 충격이 될 수도 있어.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먹일 만한 게 아니라는 소리다.”

“…….”

“그런 것까지 감안했다면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알아서 판단하도록 해.”

무엇이든 쓸데없는 사족은 붙이지 않는 그였다. 가볍게 주의를 주는 정도로 끝내도 될 말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걸 보니 일면식이 없는 이라도 걱정은 되는 모양이었다. 팬텀을 만나기 전부터 만난 뒤에도 얼마간은 은월에게 있어 그리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을 터였다. 애초에 피주머니 용도로 거둔 것이었으니 의식주에 관해서는 최선을 다해 돌보았으나 감정적 교류는 전혀 없었다. 아마도, 외로웠을 것이다.

루미너스는 차를 타고 떠났다. 역 앞에 홀로 오도카니 남은 팬텀은 문득 손에 느껴지는 묵직한 감각을 깨달았다. 이박 삼일분의 여행 준비물들이 들어 있는 가방은 하등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그는 숙소를 취소하고 티켓을 예매했다. 앞으로 한 시간이 조금 남지 않은 기차 시간을 확인하자 긴장이 풀렸다. 아침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나왔는데 들뜬 기분에 공복감조차 느끼지 못했던 것이 순식간에 밀려들었다. 인간의 음식으로는 완전히 해소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견딜 정도는 되었다. 역내 식당이라면 플랫폼에 들어가기 직전에 조그맣게 푸드 코트 형식으로 마련되어 있던 것을 기억한다. 팬텀은 그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 *


결국 사흘을 쉰다던 카페는 하루의 휴가를 끝으로 영업을 재개했다. 꽤 오랫동안 이곳을 찾은 단골들이 반갑게 인사하며 카페로 들어섰다. 일찍 오셨네요, 하는 말에 팬텀은 소탈하게 웃었다. 여행이 취소되었다고 말하자 그들은 제 일처럼 안타까워해 주었다. 짧고 정다운 대화를 끝으로 그들은 카페를 나섰고, 그러고 나면 새로운 손님들이 들어온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나날의 시작이었다.

은월이 들어온 것은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뒤였다. 조금 여유로운 시기라고 말했던 게 무색하지 않을 만큼 안색이 한결 나아 보였다. 유리문에 OPEN이라고 적힌 팻말이 걸린 것을 확인하고 들어온 그는 언제나처럼 아메리카노 한 잔과 아몬드 쿠키를 주문했다. 그러나 은월은 영수증까지 받고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꼭 할 말이 있는 것처럼 팬텀의 눈치를 볼 뿐이었다. 팬텀은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었다.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은월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사흘 동안 쉰다고 되어 있었는데 오늘 여셨네요.”

“네, 여행이 취소돼서요. 그냥 온 김에 오늘부터 열기로 했죠.”

그렇구나…. 팬텀의 대답을 듣고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은월은 곧 도망치듯 빈 테이블을 찾아 앉았다. 휴대폰을 켜고 무언가를 열심히 입력하는 모습에서 당혹감이 묻어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렇게 허둥대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하여간 귀엽다니까. 팬텀은 흐뭇하게 웃으며 트레이 위에 쿠키를 올렸다.

그리고 커피를 내려야 했다. 커피 머신 아래에 잔을 받쳐 두고 팬텀은 주머니에서 가죽 케이스를 꺼냈다. 조그만 병에 들어찬 약은 얼핏 보면 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 잔에 다 털어 넣어도 티도 나지 않을 만큼 적은 양이었다. 넣을까. 팬텀은 고개를 꺾어 은월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은월은 여전히 고개를 수그린 채로 휴대폰을 만지는 중이었다. 다른 테이블 하나를 차지한 커플은 함께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나누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다. 아주 잠깐이면 된다. 내용물을 쏟아내고 빈껍데기는 아무렇게나 던져 놓아도 되었다. 굳이 카운터 너머를 들여다볼 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손이 가늘게 떨렸다. 조금이라도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제 욕심을 위해 은월을 혼란케 하는 게 옳은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조금만 참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루미너스의 마지막 말이 양심을 자극했다. 이래도 되는 걸까…. 짧은 시간 동안 오만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망설이는 동안 커피는 완성되었다. 결국 팬텀은 주머니에 도로 약을 집어넣었다. 아메리카노 한 잔, 아몬드 쿠키 나왔습니다. 그 말에 은월이 고개를 들었다.

“저기, 은월?”

트레이를 받아서 제 자리로 돌아가려던 은월이 걸음을 멈췄다. 왜 불렀냐고 말하는 듯한 얼굴에 팬텀은 당황하여 시선을 피했다. 저도 모르게 불러 세운 탓에 무어라 말을 붙여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커플들은 저들만의 세상에 빠져 헤어나올 줄을 몰랐다. 그들의 웃음소리를 제외하면 적막뿐이다. 앞치마 주머니에서 제법 묵직하게 늘어지는 케이스가 새삼 무겁게 느껴졌다. 문득, 약 따위로 모든 것을 되돌리려던 자신이 미련해졌다. 팬텀은 힘주어 목소리를 내었다.

“번호, 알려줄래요?”






넣어주신 분이 기억하고 계실지, 아직까지 메이플을 파고 계실지 아무 것도 모르지만 그 때 피드백과 함께 써주셨던 것이 너무 기억에 남아서 꼭 쓰자고 생각했습니다. 게으르기도 하고 입시를 하면서 손이 많이 느려진 덕분에 이렇게 미루다가 책을 낸 지 1년이 지나서야 올리게 되었네요...당시에 좋은 말씀도 적어주시고 리퀘도 넣어주셨던 분께는 정말이지 너무너무 죄송하고 감사하다는 말씀밖에 드릴 수가 없네요ㅜ.ㅜ늦어서 죄송하고, 정말 감사했습니다!

깨어 있는 시간의 9할은 남자랑 남자 사이의 곱하기 계산식의 답을 찾기 위해 소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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