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캔이 나뒹구는 소리가 요란했다. 알루미늄으로 된 캔 바디가 바닥에 부딪히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뒤이어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쿵! 태형이 신음했다.


"으악! 괘, 괜찮아요?"

"피, 피? 저 코피가…."

"그니까 혀를, 아, 아, 아니, 왜! 아니, 갑자기 키스를 왜 해요!"

"그게 아니고…."


저돌적인 자세 하나는 견줄 곳이 없었다. 기세에 눌린 지민의 심장이 거세게 쿵쾅거린 탓에 층간소음 신고를 받은 경찰이 금방 들이닥칠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자연스럽게 호흡을 맞추기에는 너무 오랜만에 나누는 체온이었다. 입술 위를 살살 쓸던 혀가 안으로 대뜸 파고들자 너무 깜짝 놀란 나머지, 지민은 자신도 모르게 야무진 주먹을 휘둘렀다. 태형을 한 방에 K.O 시켜버린 것이었다.

혹시 이 잘생긴 얼굴에 자그마한 흠집이라도 났을까, 지민은 태형의 얼굴을 잡고 이쪽저쪽 돌려보며 연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태형 씨, 괜찮아요? 코피가 크게 터진 것과 콧잔등이 살짝 부은 것을 제외하면 그래도 말짱해 보이는 것이, 흉이 지거나 멍이 들 기미는 없어 보였다. 태형은 취기 반, 걱정스러운 목소리 덕분에 얻은 행복 반을 더해 극락까지 몇 걸음 남지 않은 상태였다. 쌍코피가 흐르는 코를 지민의 손에 맡기고서도 그저 좋다고 웃었다. 저 완전 멀쩡해요, 지민 씨!


한참 고개를 들고 있어라, 여기를 쥐라고 하며 동동거리던 지민은 태형의 얼굴부터 상체까지 묻은 사고의 흔적을 겨우겨우 닦아냈다. 얼굴은 반질반질하니 깔끔해졌지만, 새것처럼 하얀 셔츠에 제대로 든 핏물은 잘 빠지지 않았다. 찬물로 한참 벅벅 문질렀지만 말끔하게 닦이지 않아 주홍빛 얼룩덜룩한 자국이 여전했다. 이 상태로 집에 보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멀뚱멀뚱 앉아서 별천지를 헤매고 있는 이 남자를 어쩌지. 결국, 오늘도 동침이었다. 좋지만 암울했고, 암울하지만 또 나쁘지 않은.


넉넉한 사이즈의 옷을 찾느라 서랍을 한참 뒤졌다. 몸에 착 붙는 옷을 자주 입는 터라 태형에게 맞을 법한 것을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고르다 옷장 한구석에 굴러다니던, 지난번 사이즈 문제로 교환을 문의했으나 끝내 거절당한(그 쇼핑몰과는 바로 절연했다.) 후드와 트레이닝복 바지를 건넸다.


"자요."

"네?"

"이거요. 입으라고요. 오늘 여기서 자야죠."

"아. 네, 네. 입어야죠. 그러면 먼저 벗고…."

"악! 진짜!"


태형이 입고 있던 옷을 아무렇게나 벗어 풀썩 내던졌다. 지민은 기겁하며 눈을 가렸다. 물론 조금 허술하게. 몰래 틈을 벌린 손가락 사이로 비친 몸이 탄탄했다. 하마터면 마룻바닥에 침을 한 바가지 흘릴 뻔했다. 목부터 등까지 떨어지는 라인이며, 허벅지에서 아래로 타고 흐르는 선까지… 이야. 남자다, 남자. 지민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아, 미친… 나 새끼 뭐 해, 진짜. 지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등신 데리고 뭘 하냐. 하고 싶은 것을 적으라면 밤하늘 가득 빽빽하게 쓸 수도 있었으나, 지민에게 마법을 선사해 줄 맥주는 이제 동이 난 상태였다. 다행스럽게도 속옷은 안 벗었고, 나름 섹시했다. 환상 지켜 줘서 고맙다. 지민은 속으로 생각했다.


태형이 먼저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트레이닝복 바지를 한 차례 거꾸로 입었던 것만 제외하면 취한 사람치고는 말짱했다. 곧이어 지민도 빠르게 샤워를 마쳤다. 슈퍼 싱글 사이즈 침대에 성인 남성 두 명이서 어떻게 낑겨 자야 할지 조금 머리가 아팠지만, 손님을 불편한 곳에서 재울 수는 없었다. 물론 평생 침대에서 잤던 지민은 더 안 되고. 소파에서 자겠다는 태형을 극구 말려 그냥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태형은 설렌다느니, 지민 씨 냄새가 짙게 나서 좋다느니 별 싱거운 소리를 늘어놓다 점점 조용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형이 잠에 빠져들었다. 지민은 턱을 괴고 누워 평온한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웃기는 사람이야, 진짜."


안 그렇게 생겨서 연애에 관해서는 쑥맥이다. 남자고 여자고 한 번도 사귀어 보지 않은 사람처럼. 근데 또 감정에 관한 문제에서는 지나치게 솔직하다. 사람 기분 들뜨게 하다가 바닥으로 막 떨어뜨리고. 그런 생각이 들자 조금 괘씸한 마음에 태형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김태형 씨, 당신 진짜 이상해요. 근데 이상하게 자꾸자꾸 좋아져. 나 어떻게 해야 할까.

지민이 태형 옆에 편히 몸을 누였다. 오래 앓았던 불면증이 언제 그랬냐는 듯 사그라들었다. 졸음이 꾸준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오늘은 유난히 마음이 편해서 그런가. 기분 좋은 포근함에 잠든 태형의 품으로 조금 더 파고들었다. 지민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깊은 잠에 빠졌다.




*




간만에 기분 좋은 아침이다, 라고 태형은 생각했다. 아침에 보고 나왔던, 잠이 덕지덕지 묻어 있던 지민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눈에 보이는 진전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민의 냄새가 은은하게 배어 있는 옷을 입고 깨어난 것부터 분에 넘치게 행복했다. 지민의 잠을 완전히 깨울세라, 조심조심 씻고 한쪽 구석에 옷을 개어 놓은 태형은 신혼살림이라도 차린 것 같은 기분으로 출근했다.

여유가 넘치는 표정으로 사무실에 도착했는데, 무언가 수상했다. 입구에서부터 휴대폰을 걷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다른 동료들은 모두 태연하게 전원을 꺼서 제출했다. 갑자기 분위기 배틀 로얄? 태형이 급하게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사내 메일함에 아직 확인하지 않은 메일이 두 건 있었다. 하나는 다른 부서에서 온 광고성 메일이었고, 하나는 <보안교육 입소 안내>라고 쓰인 메일이었다. 태형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렀다. 천천히 메일을 클릭했다. 보안교육으로 인한 수련원 입소 내용이 안내되어 있었다. 시작일이 오늘 날짜로 되어 있었다. 왜…. 왜 몰랐지? 태형은 자괴감에 빠졌다. 그동안 지민에게만 신경을 쏟은 탓에, 다른 쪽에는 관심을 하나도 두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정호석 대리가 선글라스를 쓰고 옆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김 주임, 난 짐 캐리어에 가져왔는데. 김 주임은 짐도 없어? 그 뭐시기냐, 미니멀 라이프?"


심장이 쿵 떨어졌다. 다시 사무실 주변을 돌아보았다. 모두 작은 캐리어나 큰 배낭 가방을 가지고 있었다. 합숙 훈련은 무려 이 주 동안 이루어진다.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보안 합숙에는 휴대폰과 인터넷 사용이 전면 금지되어 있었다. 태형은 날짜를 미루는 등의 다른 방도를 찾아보려 했지만, 그 사이 집합이 속전속결로 이루어졌다. 결국 두 손을 놓고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옷가지나 생필품은 수련원에서 사면 된다지만 지민에게 전화 한 통, 문자 한 통은 돈을 주고도 할 수 없었다. 전화번호라도 외웠어야 했는데, 아니면 샵 번호라도….


한편 지민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근무 중이었다. 다만 한 가지는 조금 달랐다. 평소 같았으면 아침 일찍부터 전화기에 불이 나도록 연락을 해 왔을 태형이 유독 조용했다. 본의 아니게 오 분에 한 번씩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많이 바쁜가? 그래도 점심때는 맨날 먼저 연락했으면서. 내심 조금은 서운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심지어 저녁 시간이 될 때까지도 연락은 없었다. 점점 걱정이 늘었다. 퇴근 후 들어가는 길에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 대신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지민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뭐 바빠서 그런 거겠지. 지민은 태평스럽게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려 노력했다.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최대의 목표였다. 지민 쪽이 갑의 입장이었고, 늘 초조하게 매달리는 건 태형의 몫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노력이 무색하도록 지민은 겨우 삼 일을 넘기지 못하고 폭발했다.


"아니. 뭔데, 진짜."

"네?"

"아, 아니에요. 파츠 몇 번째 손가락에 하신댔죠?"


사흘째 되던 날, 첫 타임 네일 시술 중 지민은 화가 머리끝까지 뻗쳤다. 아니, 지가 뭔데 먼저 연락을 두절해? 그렇게 매달릴 땐 언제고? 괘씸했다. 넘치는 쏟아지던 사랑이 뚝 끊기니, 늘 호령하던 갑의 위치에서 뚝 떨어져 하찮은 을이 된 기분이 들어 별로 유쾌하지 못했다. 오늘 손님들 얼굴을 무슨 기분으로 보지. 출근 전 잠시 걱정했으나 오늘의 첫 시술은 마침 무뚝뚝한 손님이 그저께 저녁 급하게 잡은 건이었다. 오가는 대화가 별로 없었던 덕분에 지민은 조금 더 분노했고, 조금 더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시술은 예상보다 이십 분 정도 빨리 끝났다. 다음 타임까지는 한참 남아 여유로웠다. 지민은 주변을 정리하고, 아직도 잠잠한 휴대폰을 들었다.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지만, 돌아오는 멘트는 같았다. 전원이 꺼져 있어…. 지민은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귀에서 떼어냈다.

바로 그때였다. 카카오톡 알림이 울렸다. 다음 타임에 오기로 되어 있던 손님이었다.


 

[쌤 죄송한데 저 오늘 넘 추워가지구 ㅠㅠㅠㅠ 못 가게써여] am 11:20

[저 담주 될까여 ㅎㅎ 미뤄서 죄송한데 진짜 너무 추워가꼬 ㅠㅠ] am 11:21



평소 같았으면 십 분 남기고 노쇼가 웬 말이냐며 불을 뿜고도 남을 일이었으나, 지금 당장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태형의 회사로 찾아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지민은 지체 않고 부랴부랴 겉옷을 챙겨 거리로 나섰다. 가로수도 뒤흔드는 바람에 지민의 뺨이 금방 발갛게 홍조를 띠었다.




*




날씨가 무려 영하 5도 근처를 맴돌았다. 아침저녁으로 살을 에일 듯한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지민은 벌써 십오 분째 태형의 회사 정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코트 차림의 회사원들이 앳되어 보이는 지민을 흘끗 보고 지나쳤다. 이렇게까지 창피하게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은근히 남들 시선에 약한 지민에게는 조금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오늘은 꼭 만나고 싶었다. 아니, 꼭 만나야만 했다. 태형이 몇 층에서 근무하는지도 몰랐고, 예전에 대충 들었던 이야기로 헤아려 보았을 때 영업점에서 근무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으니 이 방법 외에는 어떻게 얼굴 한번 쉽게 마주칠 방도가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한 사십오 명쯤 세었다. 시간은 벌써 열두 시 오십오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너무 오래 기다렸다. 날씨를 모르고 신은 컨버스 안에 담긴 작은 두 발이 꽁꽁 얼어 있었다. 회사원 한 무리가 방금 점심을 먹고 온 듯 음료를 한 잔씩 들고 우르르 지민의 앞을 지나쳤다. 지민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내일 다시 와야겠다고 막 마음을 먹은 참이었다.


"…김태형?"


무리 가운데 태형이 끼어 있었다. 놀란 지민이 나지막이 내뱉었다. 그래도 가까우니까 듣지 않았을까? 기대했으나 태형은 듣지 못한 듯했다. 떠드는 사람들 가운데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태형이 음료를 마시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바로 그 순간, 둘의 눈이 마주쳤다.

지민이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말을 할까. 변명부터 할까? 아니면….


"왜 연락이 안…."


오늘 처음 본 사람 같았다. 태형은 그대로 지민을 지나쳤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일에 지민은 다시 부르던 이름조차 맺지 못했다. 태형과 동료 무리가 사원증을 찍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할 때까지도, 지민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지금, 김태형이 나 두고 그냥 지나친 거야? 나랑 눈이 마주쳤는데…? 그럼 김태형이 내 연락 일부러 씹은 게 맞다는 거야?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렀을 때, 단전부터 끓어오르는 화 때문에 얼굴이 새빨개졌다는 것을 겨우 자각했다. 한겨울 바람이 얼굴을 스치자 따가웠다. 지민은 추위도 잊은 채 가게를 향해 걸었다. 바닥이 꺼져라 쿵쿵 걷는 탓에 발바닥이며 무릎이 아팠지만 상한 자존심보다는 아플 리 없었다.


유난히 말 많은 손님이 많은 날이었다. 웃고 싶지 않았지만 유난스럽게 웃었고, 알고 싶지 않았지만 궁금한 척했다. 평소보다 세 배는 더 피곤했다. 도무지 어떻게 일을 마쳤는지도 모르게 하루가 빨리 저물었다. 지민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도 벗지 않은 채로 침대 위에 털썩 쓰러졌다. 세상이 기울어져 보였다. 지민은 가만히 누워 휴대폰을 켜고 즐겨찾기에 추가되어 있던 태형의 카카오톡 프로필을 눌렀다. 어색한 구석은 있었으나 근사한 미소가 제법 돋보이는 사진이었다.

잘생겼다. 나쁜 놈

프로필을 옆으로 드래그하자 메뉴가 두 개 떴다. 숨김, 그리고 차단. 망설이지 않고 운명의 버튼을 눌렀다. 순식간에 체크 표시와 함께 프로필이 사라졌다. 동시에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지민은 한쪽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서럽게 엉엉 울었다. 손바닥이 금방 축축해졌다. 나쁜 놈, 개새끼, 좋다고 쫓아다닐 땐 언제고 나를 무시해. 감히 김태형 니가 나를 무시해…? 귓가도 머리카락도 눈물로 잔뜩 엉망이었다. 억울함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같은 시각 그 어딘가에서 지민이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있을 때, 태형은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다.


"김태형, 안 자? 내일 교육 새벽 일곱 시부터야."

"…잠이 안 와서요."


태형이 들리지 않는 한숨을 내쉬었다. 교육이 있는 줄 꿈에도 모르고 있던 것이 근본적인 문제였고, 미처 안경을 가져오지 못한 것이 2차 문제였다.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건조한 대기 탓에 렌즈 한쪽이 찢어졌다. 달걀귀신 틈바구니에서 지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안경 없으면 부모도 못 알아본다는 마이너스 시력의 소유자에게는 심각한 위기였다. 바로 앞에 부장과 동기 주임을 나란히 두고도 분간하지 못해 그만 이 부장의 어깨에 친근하게 팔꿈치를 올려 해고당할 뻔한 것이 한 시간 전 일이었다.

그래서였다. 지민을 바로 앞에 두고도 전혀 알지 못했다. 어쩐지 익숙한 향기가 근처에서 불어오는 것 같다 싶었지만, 그냥 거기서 끝이었다. 그리움만 짙어졌을 뿐이었다. 식당에 다녀올 때는 동기의 팔꿈치를 꼭 붙들고 다니는 가여운 영혼에게 무어라 더 나무랄 말이 있을까.


태형에게 지난 이 주는 고난과 역경을 넘어 지옥과도 같았다. 시간이 어찌나 안 가는지, 길고 긴 소림사 수련의 시간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회사에 반항한답시고 산 2G 휴대폰을 가지고 해외여행을 갔을 때도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연락이 안 닿으니 답답하고, 밖에 나갈 방법도 없고, 와중에 눈도 보이지 않으니 정말 답답해 미치다 못해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특히나 마지막 이틀은 시간이 별스럽게도 느리게 흘렀다. 혼자 인셉션이라도 찍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손목에 찬 시계를 너무 많이 들여다본 탓에 이제는 모서리에 난 흠집의 개수를 정확히 헤아릴 수 있었다. 막 그, 닥터 스트레인지가 에인션트 원 찾아갔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매정한 동기들은 태형의 힘없는 중얼거림을 가볍게 무시했다.

드디어 퇴소식이 거행되었다. 태형은 연단에 선 금융 지주 부사장의 느릿느릿한 말투에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미리 써서 온 몇 문단 읽는 게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인가. 남의 속이 새까맣게 타고 있는 줄도 모르고, 부사장은 어… 그… 에… 를 연발했다. 태형을 비롯한 몇몇 직원들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부사장의 연설이 한바탕 지난 후에도 지루한 식순이 이어졌다. 고작 보안교육에 같잖은 순서도 많다. 삐뚤어진 생각이 앞다투어 치솟았다. 애써 분노를 누르며 자리에 고이 앉아 있던 태형은 어쩌고저쩌고, 마칩니다! 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문을 향해 내달렸다. 탁탁탁, 하는 달음질 소리가 온 사방에 울려 퍼졌다.

어머머, 화장실이 급한가? 태형 씨! 놀란 팀원들의 목소리를 비롯한 온갖 소리와 함께 시선이 쏟아졌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며칠 내내 걱정으로 밤을 지새운 탓에 다크써클이 짙어진 초라한 꼴도 잊은 채 서둘러 지민의 가게로 달렸다. 무단횡단을 자행하느라 클락션 소리며 귀 따가운 욕설을 몇 번이고 들었다. 그러나 빨간색 보행자 신호를 마주할 때마다 안달이 나서 어쩔 수가 없었다.


"이렇게… 헉, 헉, 멀었나…."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곧 쓰러질 것만 같았지만, 점점 힘이 풀리는 다리를 열심히 재촉했다. 목마른 것보다 다른 갈증 해소가 더 시급했다. 마라톤 두 번 뛴 사람의 몰골이 되었으나 쉬지 않고 달린 덕분에 소요 시간을 절반이나 단축했다. 샵 앞에 다다른 태형은 숨을 몰아쉬며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지민…!


"어서 오세요."

"어… 여기…."

"네?"

"박지민 선생님… 안 계세요?"

"아, 지민 쌤 그만두셨는데. 본가 가신다구."


네? 태형이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앳된 얼굴의 직원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하고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며칠 전 갑작스레 일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고 했다. 안 돼. 이럴 수가. 맑은 하늘이 몽땅 잿더미가 되어 폭삭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당장 전화를 걸어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화를 내고 욕을 해도 반가울 것만 같았다. 너 없는 곳에 가지 않았다고, 빨리 와서 화 풀어 줄 준비나 하라고 마구 짜증을 부리더라도 다 안아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바라는 마음을 모아 서둘러 전원 버튼을 꾹 눌렀지만 오래 방치된 휴대폰은 방전이 되어 켜지지 않았다. 태형은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단 집으로 달렸다. 바람을 가르는 실루엣 양쪽으로 눈물방울이 뚝뚝 흩날렸다.




한편 지민은 본가 근처 복싱장 몇 군데를 골라 상담을 받으러 다니며 거대한 복수를 꿈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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