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하얀 턱시도를 입은 장성한 시조카를 눈에 담고 끝내 눈물이 맺히자 피터는 슬며시 미소지었다. 아마도 훌쩍 자라나 어느새 결혼하는 자신이 자랑스러우면서도 섭섭하고 또 안타까우시겠지.


“기분은 어떠니?”

<조금 긴장되지만 괜찮아요.>

“아가. 지금이라도 네가 싫다면….”


피터가 메이의 어깨를 단단히 잡더니 다시 손을 끌어와 천천히 움직였다.


<제가 선택한 거에요. 그도 좋은 사람이고요.>

“....”

<꼭 행복하게 살게요. 메이.>


그리고는 그만 걱정하라는 듯 고생으로 나이보다 빨리 주름진 손을 감싸 잡았다. 메이는 흔들리지 않는 피터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다 이내 안심이 된 듯 끄덕였다.


“피터 파커님! 지금 입장하실게요!”


문 밖의 안내자의 음성에 일어났다. 그래. 이건 누군가의 억지도 아닌 자신이 선택한 길이었다. 문이 열리고, 발 끝에 힘을 꽉 주어 바닥을 누르며 스러지는 꽃잎 사이로 걸어나갔다.


*


눈 앞에서 큰아버지 벤이 죽어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아이는 충격에 오랜 고열을 앓고는 목소리를 잃었다. 활달하고 밝았던 아이의 안타까운 소식에 그 아이를 좋아했던 동네 사람들은 상당히 안타까워 했지만 큰어머니의 애정과 응원으로 시작된 아이의 끈기와 노력, 그리고 타고난 재능은 고작 목소리가 없다고 해서 꺼질 빛이 아니었다. 

피터는 그 후로 큰 사고 없이 미드타운 과학고등학교를 월반까지 해서 조기졸업하고, 곧바로 MIT의 장학생으로 입학해 다음 해 재학 중에 오스코프에 스카웃으로 취직해버려서 주변인을 경악시켰으며, 그도 모자라 취업자 전형으로 학업을 병행하면서 중소 프로젝트를 3개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큰 성적을 거두면서 팀원과 부서 모두에게 인정받는 기함할 일을 해냈다. 그런 그가 회사 임원들의 주목을 받는 인재가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오스코프의 주요 임원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식사자리. 불편하고 긴장되어 얼어붙은 피터에게 임원은 자신의 막내아들이라며 LA지부 소속인 빌리를 소개해주었다. 피터는 이미 자신의 성향까지 조사해 뻔하디 뻔한 제안을 하는 구렁이 같은 이를 보며 테이블 밑으로 주먹을 꽉 쥐었지만 어깨에 힘을 풀며 눈가를 접고 입꼬리를 올렸다. 피터는 벤의 무덤 앞에서 다짐 했듯 더 높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약혼은 신속하게 치뤄졌고 결혼은 피터의 설득으로 MIT를 졸업하고 이루어졌다. 한 쪽에 모여 앉은 메이와 네드, 미셸, 플래시 등 지인 몇 외에는 오스코프사의 직원들로 채워진 웃픈 결혼식에서 반지를 나누어 낀 피터는 제 하얀 장갑 위에 끼워진 화려하기 짝이 없는 반지를 쳐다보다 주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찾아온 이들에게 하는 인사만으로도 시간이 훌쩍 가버리고, 의견 충돌 한 번 없이 정한 신혼여행지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땐 둘 다 녹초가 되어 가는 내내 잠들어버렸다. 덕분에 피터는 생에 최장거리로 떠나는 7시간의 비행도, 퍼스트 클래스라는 또 다시 시도 못할 사치도 느껴보지 못한 채 하와이 호놀룰루 공항에 도착했고, 또 배를 타고 몰로카이 고급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침대 위로 쓰러졌다. 멀미로 인해 옷을 갈아입을 힘조차 없었다.


“괜찮아, 피터? 여기 직원에게 부탁해서 약을 받아왔어.”

<곰.ㅏㅇㅝ>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겨우 휴대폰으로 타자를 쳐서 빌리에게 보인 피터는 일어날 수 있을 때 먹으라며 침대 사이드 테이블에 약과 생수병을 올리고 방을 나서는 그의 발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환기를 위해 직원이 열어놓고 간 창에서 신선한 바다내음과 함께 살랑이는 바람이 머리칼을 살살 흔들어 피터는 침잠하는 의식을 굳이 억지로 붙잡지 않고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뜬건 해가 진 후였다. 세상에! 신혼여행 첫 날에 잠으로 하루를 날려버리다니! 적어도 저녁은 함께 먹었어야 했지 않나. 피터는 싸아-하게 핏기가 사라진 안색으로 시계를 보려 휴대폰을 켰다. 배터리가 18%도 남지 않은 휴대폰엔 메세지 하나가 떠 있었다.


[편히 쉬는게 좋을 것 같아서 안깨웠어. 룸서비스로 스프 같은걸 시켜 놨으니 먹으면 좀 나을거야. 난 하와이에 사는 친구 얼굴 좀 잠깐 보고 올게. 편히 쉬어.]


메세지가 온 지 3시간이 훨씬 지나 있었다. 피터는 천천히 침대 아래로 발을 내리고 짐가방을 뒤적여 꺼낸 충전기로 휴대폰을 충전한 뒤 불도 켜지 않은 채 스프와 부드러운 빵이 올려진 테이블에 천천히 앉았다. 열린 창에서 불어온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가 이마 위에서 살랑였다. 


한술 떠 먹어본 스프는 당연하게도 차고 퍽퍽했다.


*


푹 자고 개운해진 몸으로 나와보니 빌리는 없었다. 그의 방을 두드리고 열어보아도 다른 흔적이 없는 걸 보니 친구와 밤새 술 같은 걸 마시고 근처에서 잠든 모양이었다. 배터리가 빵빵하게 채워진 휴대폰에는 아무 연락도 없었지만.

피터는 샤워를 하고 가운만 입은 채 거실 소파에 털썩 앉았다. 예쁘게 펼쳐놓은 책자 중 호텔 책자를 차르르 훑으니 호텔 내에 수영장과 작은 식물원 등 여러 볼거리가 있어 보였으나 피터는 흥미를 잃고 책을 덮었다. 그리고는 TV를 틀었다. 억양이 낯선 말이 흘러나오는 채널들을 뒤적여보다 대충 틀어놓고 휴대폰을 들었다. 어제 온 메이의 메세지가1통. 네드의 메세지가 5통. 피터는 메이에게 잘 도착했고 재밌게 놀고 있다고 답장을 보낸 뒤 네드의 메세지 창을 켜고 머뭇거렸다. Dude를 썼다가 한숨을 쉰 뒤 결국 지우고 폰을 내려놓고는 다시 리모컨을 들어 넷플릭스 버튼을 눌러 상단의 아무 영화나 틀었다.


“피터…. 피터. 피터?”


누군가 흔드는 느낌에 피터는 뻑뻑한 눈을 껌벅이며 일어났다. 소파 위에서 그대로 잠든 모양이었다. 


“이제 보니 잠이 많구나?”


피식 웃는 그에게선 선명한 술냄새가 풍겼다. 피터는 빠르게 휴대폰을 잡았다.


<술 마셨어?>

“아, 냄새 많이 나??”

<그냥, 조금.>

“하와이에 친구들이 몇 명 있거든. 결혼 축하한다고 술잔을 내밀어서 거절 못하겠더라. 하하.”


피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을 잘 못하는 것 같은 그의 성격 상 주는대로 받아 마셨을 것 같았다. 빌리는 피터의 옆에 앉아 몸을 기울였다. 갸름한 얼굴이 가까워져 피터가 두 눈을 깜박였다.


“이제 속은 괜찮아?”


끄덕끄덕.


“그럼 이건, 괜찮아?”


빌리의 손이 가운이 벌어진 사이 허벅지에 닿았다. 피터의 동공이 세차게 떨렸지만 밀어내진 않았다. 마음이 있든 없든 이제 부부가 아닌가. 느슨해진 가운의 매듭을 푸는 섬세하게 생긴 손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고개를 빌리에게 올렸다. 기다리고 있었던 듯 입맛춤이 이어졌다. 피터는 그가 미는대로 밀려 소파에 등을 대고 누웠다. 가운 안으로 파고 드는 손이 차갑게 느껴지는건 그가 외출에서 돌아왔기 때문일까. 입술에서 떨어져 목으로 내려가는 입술에 피터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며 품이 큰 소매를 움켜쥐었다. 잠시 뒤, 쇄골 언저리에서 머물던 입술과 허리를 쓸던 손이 떨어져나가고, 잠시간의 고요함에 피터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빌리가 후-. 하고 숨을 뱉더니 미소지었다.


“원하지 않으면 그렇다고 말해도 괜찮아. 피터.”


피터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뻐끔거렸다.


‘아니야. 난….’

“우리는 연인에서 부부가 된게 아니니까. 시간이 더 필요한 건 알고 있어. 앞으로 시간은 많잖아?”


피터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은 그는 몸을 일으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피터는 밀려오는 자책과 우울에 고개를 숙이고 세게 쥐어서 뜯어진 소매를 내려보다 천천히 일어나 그와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이틀을 실컷 잠들었기 때문일까.

잠이 오지 않았다.


새벽녘 문을 나서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휴대폰이 작게 진동했다. 피터는 굳이 메세지를 바로 확인하지 않았다. 피터는 바다가 바로 보이는 테라스 바닥에 앉아 있었다. 난간 창살 사이로 갈라진 바람이 소금기에 숨쉬기가 답답했다. 피터는 하얗게 넘실대는 검은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다 그제야 살며시 다가오는 졸음에 침대로 가서 이불을 돌돌 말아 다시 잠이 들었다.


*


해가 중천에 뜨고서야 일어난 피터는 기지개를 펴고 잠시 침대가에 앉아있다가 뺨을 짝! 때렸다. 신혼여행 중에 3일이나 허비했다. 이게 바로 메리지 블루인가? 뭐가 되었든 계속 쳐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산책으로 기분전환을 하고, 빌리가 돌아오면 어제 일을 사과하고 같이 저녁을 먹자. 새벽에 그가 나가며 보낸 메세지는 친구를 만나 저녁 전에 돌아오겠다는 연락이었다. 피터는 잘 다녀오라고, 저녁은 같이 먹자고 답장한 뒤 샤워 후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시계를 찬 뒤 슬리퍼를 신고 나섰다.

휴향지로 손꼽히는 하와이의 바다는 그 명성에 맞게 아름다웠다. 그가 가자는대로 정한 곳이지만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혼자서 웃었다. 근처 푸드트럭에서 샌드위치로 배를 채운 피터는 해질녘까지 바다를 걸으며 점점 붉어지는 하늘과 바다, 그 주변을 둘러보다 해변의 끝 지점으로 보이는 곳에 우뚝선 절벽이 눈에 들어왔다. 전망대로 만들어진건지 절벽엔 난간이 있었고 옆에 돌로 다듬어진 계단도 있었다.


노을을 찍어 메이에게 보낼까?


피터는 금방이라도 해가 질세라 서둘러 모래사장을 뛰어 건너 절벽을 올랐다. 피터에겐 그리 높지 않은 절벽에 금새 올라 서본 전망대의 풍경은 피터의 입이 절로 벌어지게 했다. 바람에 꼬리가 길어진 구름이 오렌지와 보랏빛으로 어우러지고, 바다는 태양속으로 타들어가는 것 같은 절경. 피터는 아차, 하고 잊을 뻔했던 사진을 찍어 메이에게 보내고는 난간에 팔을 겹쳐 얹어 바람을 맞으며 풍경을 감상했다. 


메이와 꼭 다시 와야지.


“혼자 보기엔 아까운 광경이지 않아?”


네, 그렇네…에?

반사적으로 입을 움직여 대답하려다 휙 뒤돌아본 곳엔 타오르는 빛에 붉게 물든 반쯤 풀린 흰셔츠에 까만 정장바지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고 피터는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있을까 싶을만큼 커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천천히 다가왔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가 단지 끝내주게 잘생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세계에서 가장 잘난 남자로 늘 손꼽히는, 미국 최고의 히어로 아이언맨이자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전 회장이자 현 실소유주. 내딛는 한걸음에 세계 경제와 군사력이 긴장을 한다는 단 한사람. 그리고 피터의 오랜 우상.

대뜸 마주친 남자는 바로 ‘그’ 토니 스타크였다.


”힘들게 올라온 보람은 있었어? 무단 침입자씨?“


피터가 멍하니 고개를 기울였다. 무단침입자?


”밑에 팻말과 내 뒤를 봤는지는 모르겠는데. 여기 사유지거든.“


그제서야 피터는 그의 뒤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절벽의 뒷편을 보았다. 눈에 뭐가 씌였었나 싶을만큼 존재감을 과시하는 세련된 디자인의 대저택이 자신의 앞에 떡하니 있었다. 

내가 이걸 못봤다고?!

피터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당황한 낯을 숨기지 못했다. 절벽 밑에서는 저택 옆에 빽빽히 둘러 서있는 나무들 때문에 그저 숲이라고 생각했다. 절벽을 올라온 직후 바로 바다로 눈을 돌린 탓도 있었다. 피터는 재빨리 수어를 하려다 멈칫하고는 휴대폰으로 놀라운 속도로 타자를 쳐서 화면이 보이도록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정말 사유지인지 몰랐어요.>

“뭐, 몰랐을 수도 있지. 프라이빗용으로 두른 나무들 때문에 착각하는 이들이 간혹 있거든.”


역시나 프로 사업가라는 걸까. 그는 말을 못하는 저에게 놀란 티나 동정어린 표정 하나 없이 무던하게 대답하며 말을 이었다.


“미국인?”


끄덕끄덕끄덕


“이름은?”


피터는 타자를 치고 멈칫하더니 곧 그대로 화면을 내밀었다.


<피터 파커에요.>

“그래. 파커군. 지금 시간 있나?”


피터가 눈을 살짝 크게 뜨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토니가 말을 하며 내밀어진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


“식사 하고 갈 수 있지? 마침 약속이 깨진 것 같은데.”


피터는 영문 모를 소리에 제 폰을 들여다 보았다.


[피터. 미안. 친구가 다른 친구들을 불러버려서. 저녁은 내일 먹자.]


빌리의 문자가 메모장 위로 떠 있었다.


“마침 나도거든. 1인분이 남는데, 이것도 인연인 것 같으니 먹고 가는게 어때?“


피터는 습관적으로 고개를 저으려다 멈췄다. 무려 그 토니 스타크의 식사 초대이다. 이런 행운이 일생에 또 있을리가! 아이언맨에 대해 인터뷰 이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피터는 냅다 고개를 끄덕였다. 토니가 설핏 웃는 것 같았다.


“따라와.”

가까이서 본 저택은 턱을 180도로 둘러봐도 한 눈에 안들어올만큼 컸다. 


-다녀오셨어요. Boss.-

‘히익?!’


그리고 AI가 모든걸 해결하는 집의 시스템에 눈을 빛냈다. 피터는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지만 그 모든걸 휴대폰 메모장에 적었다간 토니가 다 읽지도 못할 것이므로 꾹꾹 눌러 참았다. 자신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면…. 피터는 한동안 느끼지 못했던 목소리에 대한 아쉬움이 크게 느껴졌다. 

이런 으리으리한 집이면 영화에서 보던 끝에 않으면 맞은편 얼굴이 제대로 보일까 싶은 긴 식탁이 있을까 했지만 다행히도(?) 평범하게 조금 큰 6인식탁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스테이크와 스튜 등 몇 가지의 요리가 식지 않은 채 올려져 있었다.


“편히 앉아.”


설마 했는데 진짜 단 둘이 먹는걸까? 피터는 아직도 이 상황이 얼떨떨 했다. 의자에 조심스레 앉았지만 포크와 나이프는 손도 못대고 이미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토니를 힐끔 쳐다보았다. 토니는 한차례 눈이 마주치더니 눈썹을 들썩였다.


“뭐야? 썰어달라고?”


파닥파닥. 피터는 다리가 떨릴만큼 팔을 내저어 보이고서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미디엄 스테이크가 혀에서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어려보이는데. 학생?”

<올해 졸업했어요.>

“그럼 대학교로 가나? 아니면 취업?”

<저 대학을 졸업한건데요. MIT.>

“어려보이는데 제법이야.”


토니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드는 표정이었다. 피터는 동문이라 그럴 것이라 짐작하고 재빨리 휴대폰을 회수해 타다다닥 말을 이어 내밀었다.


<학교도 물론 좋지만 스타크씨 때문에 간 거였어요.>

“알아.”


피터는 또 고개를 기울였다.


“네가 내 팬보이라는 것 쯤이야 그 열렬한 시선만 보면 누구나 알 것 같은데.”


피터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고개를 푹 숙인 채 고기를 씹었다. 그래봤자 이미 새빨간 귀가 적나라하게 보였지만.


“궁금한게 많아 보이는데, 대답해 줄테니 물어봐. Kid.”

<Man이에요. 정말 그래도 돼요?>

“그래. Kid. 왠지 오늘 기분이 좋아서 말이야.”


피터는 그가 자신을 뭐라 칭하던 뭐가 대수랴 싶었다. 수많은 언론에서 그는 변덕쟁이 제멋대로에 말은 독사과보다 쓰다 했는데 역시 전부 믿을게 못되는 모양이었다. 피터는 눈앞의 진수성찬도 잊고 수없이 타자를 쳐댔다. 잠시 뒤엔 토니가 태블릿을 가져와 피터의 휴대폰과 연결해서 홀로그램을 띄우고 피터가 계속해서 타자를 칠 수 있도록 냅두며 알려줄 수 있는것에 한해 대답해주었다.

피터는 신이나서 제 졸업논문까지 클라우드에서 꺼내 보여주었다가 토니에게 역질문을 당해서 쩔쩔 맸고, 자기가 교수였으면 졸업은 커녕 2년 더 공부시켰을거라는 말에 깨갱 작아졌지만 금새 회복해 타자로 재잘재잘 떠들어댔다. 토니와는 큰 패드로 여러 프로세스와 설계도를 띄우며 피터의 질문 이상으로 여러가지를 대화했다. 

오스코프 취업 전에 학교 연구실에서 놀던 때 이후로는 처음으로 자신의 분야로 실컷 떠들 수 있게 된 피터는 허공을 떠다니는 황홀한 푸른빛들을 건드려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토니를 돌아보았는데 그가 자신의 바로 대각선 뒤에 서서 홀로그램을 만지고 있었음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그에 토니가 흠? 하고 아래를 내려다 보자 바로 앞에서 눈이 마주쳤다. 피할 생각도 못한 채 까맣고 커다란 동공에 푸른빛이 일렁이는 것에 홀려있던 피터는 입술에 닿는 감촉을 느끼고 확장된 눈을 질끈 감았다. 놀라서 벌어진 입안을 토니는 순식간에 점령해버렸다. 

입술 사이로 작은 신음이 새어나올만큼 진득한 키스가 이어지다 피터는 제 옷을 파고들어 옆구리에서부터 쓸어 올라오는 까슬한 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뒤로 크게 물러섰다. 


“이런, 너무 갑작스러웠나?”


나른하게 웃으며 천천히 다가오는 모습이 야릇한 분위기를 풍겨서 뭔가 두근거리는…. 아니, 이럼 안되는데 다급하게 휴대폰을 토도독 친 피터가 폰을 내밀었다.


<전 바람 필 생각 없어요!>

“허? 어디서 3류 기사를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결혼이력은 깨끗해.”

<스타크씨 말고 저요! 전 유부남인데!>

“...잠깐, 너 유부남이라고?”


피터는 그제야 생각난 듯 제 왼손을 들었다. 있어야 할 결혼반지가 없었다.


‘헉!!’


아직은 무겁고 거추장스러운지라 샤워 후 깜박하고 그냥 나온 모양이었다. 피터의 행동으로 알아챈 토니가 한숨을 쉬었다.


“친구나 가족과 온게 아니라 신혼여행이었나보군.”


대답으로 격하게 끄덕이는 고개를 보며 말을 이었다.


“쯧. 오해로 빚어진 일이니 내가 사과하지. 너무 어려보여서 생각도 못했어.”

<아니에요.>


둘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흐르자 토니가 뒷머리를 쓸며 헛기침을 했다. 


“늦었는데, 숙소는? 태워줄게.”

<감사하지만, 10분도 안되는 거리에요. 걸어서 갈게요.”

“그래, 그럼.”


마무리가 분명한 대화에 잠시 쭈뼛거리던 피터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현관으로 걸어갔다. 꿈 같던 만남의 끝이 뻘쭘하게 끝나는 것이 아쉬웠다. 피터는 몇걸음 앞두고는 슬쩍 뒤돌아보았다. 다행히 토니는 자신을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다.


<또 와도 될까요?>

“...앞으로 바빠질거라서.”

<...아쉽네요. 안녕히계세요.>


그 인사를 끝으로 토니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물끄럼히 그를 바라보던 피터는 프라이데이라 소개했던 AI의 안내를 따라 밖으로 향했다.

밖은 이미 밝은 별이 촘촘히 박힌 밤이었다. 피터는 통통 튀어 계단을 빠르게 내려간 뒤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빽빽한 숲 사이로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이 빤히 바라보다 호텔로 향해 천천히 뛰었다.


-많이 아쉬우신가봐요.

“허. 내가? 천만에. 뭐가 아쉬워서?”

-하지만, 이미 보내버린 사람의 프로필을 굳이 찾아 보고 계시잖아요.

“인재를 알아봤기 때문이지 별다른 의미는 없어. 이것 봐. 망할 오스코프의 작년 신기술의 초석을 만든 팀에 저 녀석 이름이 들어가있잖아. 고작 18살이!”

-Boss. 보라 하신곳과 말씀하신 내용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손가락은 피터 언더우드씨의 가족력을 가리키고 계십니다만.

“그러니까. 언더우드(Underwood)라니. 이름과 영 안어울리잖아? 파커도 흔해빠진 성이긴 하지만.”


프라이데이가 침묵하거나 말거나 토니는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기대 앉아 허공에 뜬 피터의 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MIT를 졸업할때 찍은 앳된 증명사진이 토니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저 꽉 다문 입술이 호선을 그릴 때 토니는 아주 오랜만에 심장이 떨림을 느꼈더랬다. 그저 사업차 찾은 하와이에서 일을 끝내고 쉬러 온 별장. 따라온 해피와 저녁을 함께 하려 했지만 회사에 일이 생겨 별장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미국으로 돌아 갔고, 토니는 대충 아머를 타고 날아왔었다. 

바다가 펼쳐지는 방에서 답답한 넥타이를 풀고 셔츠를 벗으려는데 그 때 제 집 마당(?) 절벽을 태연히 걸어 올라온 이가 눈에 띈 것이었다. 가파름이 덜하고 층이 약간 있었다고는 하나 엄연한 절벽인데 그걸 슬리퍼 하나 신고 올라와? 어이가 없어 창가로 다가가니 토니에겐 지루하기 짝이없는 풍경에 시선을 뺏긴채 웃고 있는 얼굴의 옆모습이 얼핏 보였다. 토니는 무심코 저 얼굴을 가까이서 보고싶다고 생각했고, 주저없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프라이데이와 더미에게 예정되어 있던 식사를 빠르게 준비하라 이른 뒤 태연자약하게 피터에게 말을 걸고 집으로 끌어들인 것이었다. 거기다 그는 자신과 같은 계열의 공학 오타쿠이기까지 했으니 토니는 되도 않는 운명론을 믿을뻔 했다. 운명은 개뿔.


“...쯧, 됐어.”


괜히 부산스럽게 손을 휘저어 화면을 끄고는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망나니처럼 놀고 다녔다 해도 자신의 사전에 불륜은 없었다.


“골치 아픈건 질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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