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은 머리를 쥐어 싸매며 잇새로 끙끙거렸다. 눈앞에 열 살짜리 꼬마가 맹랑하게 눈을 치 들고 버티고 서있었다. 저녁나절 다짜고짜 현관문을 박차고 집에 들어온 제이시는 무언가 굉장히 화난 얼굴을 하고 팔짱을 낀 채 소파에 앉아 소리를 최대한 줄여놓고 TV를 보고 있던 제이슨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다. 말 그대로 노려보고 있었다. 피도 안 마른 꼬맹이의 머릿속에 무엇이 불만이 되고 화로 번졌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나이대의 꼬마라고 할 수 없을 흉흉한 눈빛이 직격으로 제이슨에게 꽂히고 있었다.


“뭐 인마.”

“궁금한 게 있어서 그래.”


아이의 나이 어느덧 열 살, 궁금한 것 많고 말도 많아지는 시기를 훌쩍 넘어서, 사실 제이시는 좋게 말하면 어른스러운 편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지나치게 어른스럽기에 그 나이답지 않은 것이 많았다. 남이 던진 말 한마디에 무엇 하나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잡아 물고 놓치지 않는 집요함도 있다. 딕은 그것을 ‘궁금증’이라고 표현하지만, 제이슨의 눈으로 보기엔 꼬맹이의 마음속에 무언가 필시 거슬렸기에 남들을 괴롭히는 질문 따위를 던지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 공격태세가 자신을 향해 날이 서 있다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다. ‘젠장. 이건 누굴 닮아서…….’ 이마를 쥐어짜는 손가락 사이로 슬쩍 제이시의 얼굴을 살폈다. 치켜뜨고 인상 쓴 눈썹은 아무리 둘러말해도 딕을 닮았다고 말할 순 없었다. 저절로 한숨이 왔다.


“뭐가 궁금한데?”


설마 너 ‘사랑하는 부모님, 아이는 어떻게 생겨요?’ 따위의 질문을 하는 건 아니겠지……. 앞서 상기했듯이 제이시는 어른스러웠다. 팔짱을 끼던 손을 풀고 허리에 얹은 채 턱을 좀 더 높게 들며 제이시가 말했다.


“난 어떻게 태어났어?”


진짜냐! 제이슨은 또 다시 끙끙거렸다. 미운 일곱 살 때도 물어보지 않았던 자연의 섭리를 왜 지금 와서야 물어보는데? 이런 고리타분한 고정적 질문들은 부모가 거쳐야 하는 당연한 수순이라도 되는 거냐…….


“너 들을 때까지 거기 서 있을 거지?”

“응.”


고집은 또 딕을 닮아 있었다. 이런 씨발. 제이슨은 아이 앞에서 차마 내던질 수 없는 욕을 또 다시 넘어오려는 한숨과 함께 삼키며 머리를 굴렸다. 그래, 사실만 이야기 하자. 사실만. 애가 뭘 알아?


“당연히 딕 뱃속에 있다가 나왔지.”


제이슨은 엄지손가락을 들며 닫힌 방문을 가리켰다. 딕은 늦은 오후 까무룩 낮잠에 빠져 아직 일어나지 않은 채였다. 그리고 다시 제이시를 바라보았을 때, 제이시의 얼굴엔 이루 형용할 수 없을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어쩐지 누굴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이야 그 시절 모습이 모두 사라진 어엿한 청년이었으나, 천방지축 날 뛰며 제 잘난 척은 다 하고 다녔던 웨인 저택의 막내아들의 열 살 때를. 저 표정은 필시…….


“지금 내가 고작 그런 답 따위를 들으려고 물어 본거라 생각한 거야?”


그럼 그렇지. 젠장 맞을 데미안 애한테 뭘 가르쳐 준거냐.


“차라리 이런 질문은 딕에게나 하지 그러냐? 대답 잘해줄 텐데.”

“안 돼!”

“왜.”

“디키는 자고 있잖아.”


제 부모를 아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영특한 아이. 참으로 기특한 딸이었다. 약간의 감동을 받으며 제이슨이 받아쳤다.


“네 또 다른 아버지는 TV를 시청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단다.”

“제이는 됐어.”


젠장. 제이슨은 곧바로 포기하고 TV를 껐다. 그제야 마음에 든다는 듯 제이시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아기는 부모가 만나서 사랑을 나누면 열 달 동안 뱃속에서 만들어진다고 내가 여섯 살 때 팀이 이야기 해줬어.”


아하. 그래서 정작 그 때엔 부모님에게 묻지 않았단 소리군. 거기다 적절한 설명과 적정한 정서와 진실까지 담아서. 고맙다, 티모시 드레이크 웨인. 적어도 데미안 보다는 진실성 가득한 답변을 해주는 구나. 제이슨은 오늘도 사무실에서 산처럼 쌓인 서류들과 씨름하고 있을 팀을 떠올리며 들을 수 있을 리 없는 뒤늦은 감사인사를 남몰래 가슴속에서 속삭였다.


“그럼 또 뭐가 궁금한 건데. 그거면 된 거잖아?”

“오늘 데미안이 그러는데 아기를 가진 사람이 남자인 경우는 굉장히 드물고 힘들다고 그랬어. 디키 아빠가 같이 ‘일’을 안하게 된 것도 그거 때문이래.”

“뭐……. 그건 그렇지.”


제이시의 눈망울에 순간 어린 아이다운 표정으로 걱정이 묻어나왔기에 제이슨은 저도 모르게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딕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는 유독 제 딕을 따랐다. 따른다는 것이 철거머리처럼 찰싹 붙어 성가시게 하거나 땡깡을 부리는 그런 것과는 달랐다. 부모 스스로 인정하기엔 뭣하지만 정말로 제이시는 어른스러웠다. 아이는 아이다운 모습을 그대로 옮겨 부모를 배려할 줄 알았다. 아직 어린 아이에겐 너무 이르게 찾아온 설익은 걱정이었으나, 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가 슬슬 눈에 담은 것들을 기억할 수 있을 무렵이 되었을 때 딕은 자주 아팠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했던 초창기의 버릇이 원인이라면 원인이었다. 피곤함, 불면증과 같은 것들은 잘 걸리지도 않는 감기 따위를 쉬이 물리치지도 못할 정도로 몸을 피로하게 했다. 임신을 하기엔 최적화 되어있지 않은 남자의 몸은, 사실 임신 기간 보다 그 이후가 더 힘든 법이었다. 아주 나중에야 딕의 출산 과정에 대해 팀은 아주 간단명료하게 이야기 한 적이 있다.


― 출혈 다량, 호흡 곤란, 경련에 정신까지 놓고 응급 수술. 안 죽은 게 신기했어. 그러니까 당장에라도 좀 뜯어 말려줄래?


나이트윙의 밤 일 좀 말려봐. 그리고 기왕 붙어살기로 한 거 잘해. 새로 나온 신상 아기 옷을 억지로 잔뜩 안긴 채 값은 잔소리로 치룬 날이었다.

임신 후유증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한번 틀어진 신체의 이곳저곳은 어지간해서 예전처럼 돌아가지 못했다. 출산한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아 재개했던 패트롤은 1년도 채우지 못하고 곧 관둬야했다. 어디라도 다쳤다 싶으면 회복하는 것도 더뎌지던 것이 이유였다. 원래대로라면 그래도 상관치 않고 계속했을 일이었지만, 결국 딕은 제이시와 함께 집에 남는 것을 선택했다. 설득하는 것은 어렵지도 않았다. 다짐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 딸 놔두고 비명횡사 하지 말고 집에나 붙어 있어라.

― 그럼 제이. 하나만 약속해 줘. 적어도 후방지원은 해 줄 수 있으니까 큰 일이 생기면 반드시 연락하고, 급하면 웨인 저택에 연락해도 괜찮고, 그리고 그럴 때에 로빈과는 싸우지 말고, 아. 브루스랑도 마찬가지야. 같이 일할 때 그냥 배트맨 말 좀 잘 듣고, 그리고,

― 씨발, 하나만이라며…….

 

……어쨌든 그랬단 거다. 오늘 애매한 시간대에 잠든 딕은 아직 깨어나지도 못했다. 전날 웨인 저택에 들러 알프레드를 도와 정원 손질을 도왔다더니 저 모양이었다. 물론 지금도 웬만한 장정 몇은 가뿐하게 상대할 수 있는 만만찮은 상대였지만 적어도 제이슨과, 주변에서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저 쉬는 것이 더 좋아 보인다고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적어도 자신들의 자식에게는 최대한 보여주지 않았을 모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어른스런 아이는 모두 다 이해는 못하더라도 알고는 있었던 모양인가 보다.


“데미안이 또 뭐 라든?”


혹시나 애한테 쓸데없이 걱정을 만들 말을 던졌을까 싶어 떠본 말에 제이시는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데미안에게 디키 아빠가 자주 아팠던 건 나 때문이냐고 물어봤더니, 갑자기 화내면서 그건 아니라고 했어. 그럼 왜 그런 거냐고 물어봤더니, 그런 문제는 혼자 생각해봐야 어른이 되는 거라고 말해주고는 날 태워다주고 바로 돌아가 버렸어.”


음. 데미안 자식. 대답을 회피했군.


“그래서. 디키버드가 아픈 이유가 뭔지 궁금한 거야? 저 녀석은 전엔 어땠을 진 몰라도 이젠 아픈 게 아냐. 그냥 예전 보다는, 조금 약해진 거지. 자주 피곤하고. 뭐 그런 것뿐이야. 이젠 괜찮아.”


나름 안심시키기 위해 해준 말들이었고, 거짓말도 아니었다. 그러나 제이시는 무언가 답답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가 보다. 집요한 그 표정이 또 스멀스멀 아이의 얼굴에 퍼지기 시작했다.


“아 또 왜.”

“데미안이 차 태워주는 동안 혼자서 디키랑 제이에 대해 열심히 생각했어.”

“그래서. 답은 나왔냐?”

“응.”


허리에 얹었던 아이의 작고 동그란 손가락이 척, 하니 뻗어서 제이슨을 향했다. 위풍당당한 모습이 꼭 꼬박꼬박 챙겨보던 어느 아동 애니메이션의 미소녀 전사들의 포즈들과 닮아 있다……. 라고 잠시 딴 생각을 해 본들 아이의 손가락이 자신을 향한 직후에 수 십 가지의 생각이 머릿속에 황야의 먼지처럼 부산스럽게 굴러갔다.


“나 때문이라고?”

“응. 제이버드 때문일 거라고 가능성 높은 심증을 내세우기로 했어.”


가능성에 심증이라고……. 열 살짜리 애 입에서 나올 소리냐. 안되겠어. 웨인 저택엔 당분간 못 놀러 가게 하던지.

변명을 해봐라 이 악당! 아이의 표정이 콕콕 찌르고 있었다. 이 무슨 우습지도 않은, 아니 웃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자길 품어준 한 쪽 부모를 걱정하는 아이의 진심어린 고민에서 튀어나온 해답이 제이슨 토드라면, 이게 꼭 다 거짓말은 아니라는 게 제이슨의 양심을 찔러대고 있었다. 제이슨은 이 순간 방 문 너머에서 곤히 잠들어 있을 딕을 깨우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래도 첫 시작이 조금 삐걱거려서 그렇지 나름 잘 한 것 같은데. 물론 그 잘 한 것 같다는 것에 조금 자신은 없지만 다짜고짜 제 반쪽 유전자를 물려받은 아이에게서 몰매를 맞는 건 조금 억울하다.

그래도 아이의 눈이란 것은 때때로 어른들이 쉽게 지나치는 것을 너무도 확실하게 밝혀주는 현미경 같기도 했다. 그냥은 지나칠 수 없을 제이시의 단호한 결론에 제이슨은 순간 마음속에 밀려들어온 묵직한 지난 과거의 기억을 쉬이 물리칠 수 없었다. 십 년이나 지났고, 알고 지낸 시간의 배에 배수를 더해 서로 함께한지 오래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시간이었지만, 제이슨에겐 그 과거의 1년은 평생 지울 수 없을 부끄러움이자 후회였다. 차마 이제와 언급하기엔 너무 오래되었고, 그렇기에 말로 언급하지 않을 노력을 다해도 잊혀지지는 않는.

제이슨은 문득 찾아온 울적함을 숨기며 제이시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손을 들어 제이시의 작은 머리에 툭 손을 올리고 그대로 쓱쓱 쓰다듬었다.


“야, 딸내미.”

“응?”

“너 보기엔 내가 딕을 괴롭히는 것 같냐?”


솔직하게 말해라. 어차피 솔직하겠지만. 제이슨의 말에 제이시의 커다란 눈이 잠시간 한쪽으로 도르륵 굴러가며 생각에 잠겼다. 하얀 볼이 불만에 가득 차 다람쥐처럼 뾰로통하게 불룩해진다.


“그건 아니야.”

“그럼 왜 그런 생각을 하는데?”

“제이는 디키를 좋아하잖아. 여보라고 부르진 않지만 둘은 부부니까.”


여보라고……? 잠시 소름이 오소소 돋는 기분을 억누르며 제이슨은 눈짓으로 아이의 말을 재촉했다.


“그리고 디키버드도  제이버드를 좋아해. 내 말이 맞지?”

“그거야 뭐…….”


싫었으면 십 년이나 붙어있진 않았을 텐데. 아니지. 그 녀석은 붙잡지도 않았는데 내가 짱 짱 박힌 건가. 이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뜻 모르게 억울해진다. 생각해보니 딕이 저 좋다고 생각할 만큼 훌륭한 행동거지나 만족스런 모습들을 보여줬다는 확신을 가지기엔 어쩐지 자신이 없었다. 그나마 서로 좋아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저만의 확신을 가지며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제이시의 말 한마디가 조금은 위안이 되는 것에 쓴웃음을 감출 뿐이었다.


“그리고 나도 디키를 좋아해.”

“거야 당연하겠지, 파파걸.”

“파파걸이라 부르지 맛!!”

“뭐 그렇다고 해서 굳이 러브제이버드 뭐 그런 건 아니잖아?”

“응.”


젠장, 이 맹랑한 딸 같으니.


“그래서 나도 나중에 성인이 되면 디키 아빠랑 단 둘이 살면서 행복하게 해주려고 했는데, 디키버드랑 제이버드는 이미 부부고 내가 디키버드와 같이 살면 제이버드가 아주 불쌍해지니까 관두기로 했어.”

“얘기가 왜 그렇게 되냐?”

“나는 자신 있거드은?!”


말 하지 않아도 안다. 제이슨은 순간 눈앞의 열살 소녀가 한보따리에 쏙 들어가던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를 생각하며 침묵의 긍정을 더 했다. 꽃에다 물을 주듯 내려주는 사랑을 받고 자라난 아이는 조금은 달랐지만 그 만큼의 행복을 딕에게 가져다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이슨에게 어려웠던 것들이 아이에겐 타고난 재능과도 같았다. 오직 딕을 향해서, 딕을 위한. 그리고 사실, 제이슨 자신에게도 그랬다. 말로는 툴툴거리고 툭하면 삐죽거리는 어린 아이는 확실히 이 울타리를 사랑하고 있었다. 딕이 힘겹게 지켜왔던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제이한텐 문제점이 있어!”


그래. 내가 죄인이다. 제이슨은 한숨을 쉬며 자세를 바로 하고 딸의 말을 경청하기로 했다. 제이시의 파란 눈동자가 똑바로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하루에 몇 번이나 사랑한다고 말해?”

“―그걸 왜 꼭 말해야 돼?”

“사랑하는 사람끼린 믿어야 한단 말야!”


그게 꼭 말을 해야 믿는 거냐. 차마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제이시의 번뜩이는 눈은 알프레드가 웃으며 이야기 좀 해보자라는 말 만큼이나 무서웠다.


“……처음부터 안했는데.”

“에휴. 괜찮아. 어차피 제이버드는 그럴 줄 알았어.”

“그럼 그냥 물어보지를 말아라.”


딸만 아니었어도 쥐어박고 싶다. 제이슨은 한숨을 푹 삼키며 마른세수를 했다. 굉장히, 엄청나게 이상스럽고도 신비한 일이라는 듯, 그리고 또 침울한 일처럼 제이시가 중얼거렸다.


“난 어떻게 태어났지…….”

“원인 제공자를 눈앞에 두고 잘도 그런 소릴 하는구나, 너.”

“하지만 결혼도 안했다며.”


이건 또 무슨 소리래. 삽시간에 우울한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제이시의 말에 제이슨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눈앞의 꼬마가 가지고 있었을 생각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휘저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연애를 했습니다. 마침내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가졌어요.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제이시 토드랍니다……?


“결혼?”

“응. 부부니까 당연히 결혼한 줄 알았단 말야.”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누가 그래?”

“팀이.”


팀……. 아까 고맙다고 한 건 취소다. 제이슨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렇지, 아무리 똑똑하고 어른스럽다고 해도 사고방식이란건 아이일 수밖에 없었다. 어린아이가 동화처럼 읽고 생각했을 상상의 범위에서 무언가가 벗어났을 때, 어른들은 도대체 뭐라고 이야기 해줘야 하는 거지? 제이슨은 그 방도를 몰랐다.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는 편이 맞다. 거기다 상대는 세상에서 두 번째로 말싸움에서 지곤 하는 사람이었다. (첫 번째는 딕이다.) 씁. 제이슨은 바싹 마른 입안을 훑으며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아직 너한텐 말해주기 이르기도 한데. 너 내 나이가 몇인지는 알지?”

“서른하나.”

“그러니까 너랑 스물 하나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하지만 브루스는?”


이런. 예시가 잘못 되었다. 제 할아버지를 아무렇지 않게 거리낌 없이 불러댈 줄 아는 명랑함이 오히려 껄그럽게 다가왔다. 또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까. 제이슨은 자신이 현재 열 몇 번째의 끙끙거림을 되풀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차라리 조커가 나타나서 눈앞에서 농담을 던진다고 해라. 진짜 죽을 것 같아…….


“음……. 그러니까 말이야, 나랑 딕이 아직 진짜 젊었을 때 말인데. 사람이 사실 계획대로 굴러가는 법은 없거든? 알지 꼬맹이?”

“응. 인생사 굴곡은 다 있는 법이라고 데미안이 그랬어.”

“그러니까 디키버드랑 나의 그 굴곡이란 게 말인데……. 처음에 아침에 일어났더니,”


그때,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벌컥 열렸다.


“잠깐, 제이.”

“디키버드!”


부드러운 목소리에 제이슨의 말이 뚝 끊겼다. 동시에 꺅 거리며 거실 한편으로 다다다닥 뛰어가는 제이시가 반갑게 외쳤다. 어느 샌가 슬그머니 방문을 열고 선 딕은 졸음기가 가득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품에 안겨드는 제이시를 마주 안았다.


“뭐야. 일어났냐.”

“제이슨. 딸의 고민상담에 진지하게 응해주는 것도 좋지만 가릴 것 가려야 하는 거예요.”


저게 무슨 고민이야. 일방적인 고문이지. 투덜거리는 제이슨의 말을 말끔히 무시하며 딕은 제이시의 손을 잡아끌고 제이슨의 옆에 앉았다. 그 무릎 위에 제이시가 냉큼 올라탄다. 행복에 겨운 얼굴로 딕의 어깨에 매달린 제이시가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일순 제이시의 표정이 빼죽 얄밉게 변하며 입술 사이로 조그만 혀를 쏙 내밀었다. 메롱.


“…….”

“애한테 샘 부리면 안 돼, 제이슨.”

“야, 나 아무 말도 안했거든?”

“제이 아빠는 어린애 같아.”

“야.”


딕이 웃었다. 그는 품에 안긴 제이시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제이시. 결혼식을 굳이 안 해도 가족은 될 수 있어.”

“하지만 부부는 다들 결혼식을 한다고 들었는걸.”

“음……. 그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행사 같은 거야. 좀 더 의미 있게 남겨지기 위한 거.”

“그럼 디키버드랑 제이버드는 의미 없게 부부가 된 거야?”


거 봐라. 저 꼬맹이가 얼마나 맹랑한지 사람 말문 먹히게 하는 데는 선수라니까. 제이슨이 눈빛으로 호소하며 딕을 바라보았다. 아니, 사실, 의미를 두기에도 뭐하긴 하지만. 호소하던 눈빛이 도대체 무엇을 호소했던 것인지 모호해져갔다. 잠시 딕의 푸른 눈동자가 제이슨과 마주했다. 제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은 채로 딕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몰랐던 제이슨이 퍼뜩 알아차린 뒤로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딕은 이윽고 곧 웃어 보이며, 아직 자신보다 한참 작은 제이시의 손을 맞잡았다.


“아니지, 제이시. 그런 게 없어도 괜찮았던 거야.”


그런 게 없어도 더 기억에 남을 것들이 많았거든. 이마에 가벼운 키스를 남겨주며 속삭이는 딕의 말에 제이시의 표정이 서서히 환해졌다. 그저 안아주고 있는 딕이 좋아 죽겠다는 듯 목을 끌어안은 제이시를 쓰다듬으며 딕은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딕이 제이시를 상대하는 순간부터 아무 말도 없던 제이슨의 얼굴은 온통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못들을 것을 주워 담았다는 듯 황급히 시선을 피하는 제이슨의 모습에 딕이 웃는다. 제이슨의 얼굴은 터질 듯 더 새빨갛게 붉어졌다.


“오, 마스크를 안 쓰고 다녀도 되겠는 걸? 레드후드씨.”

“시끄러워…….”


딕이 몸을 일으켰다. 그를 따라 제이시도 냉큼 일어섰다. 이제 씻어야지, 제이시. 불만스럽게 입이 댓발로 튀어나온 자그마한 볼 살이 보였지만, 역시 딕의 말이라고 군말 없이 따르고 있었다. 자그마한 딸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딕이 뒤돌아보았다. ‘기다리고 있어.’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서 제이슨은 순간 굳었다. 딕이고 딸이고 하여간 저런 눈빛에 무어라 말한들 이길 재간은 없었다.

 



***

 



씻고, 씻는 동안 무슨 이야기를 한 것인지 그레이 고스트 시리즈 한편을 보고(제이슨은 아직도 어린 아이가 왜 그런 고전 영상물에 심취해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짧은 이야기책까지 한권 읽어주고 나서야 침실로 돌아온 딕이 조용히 이불을 들추는 소리가 들렸다. 제이슨은 감았던 눈을 슬며시 뜨고 돌아누워 바로 옆에 눕는 딕을 바라보았다. 미등이 은은하게 밝히는 침대 머리맡 위로 딸기 샴푸 향기가 났다. 제이시가 좋아하는 향이었다. 흠, 기척인지 숨소린지 모를 애매한 것을 내보내자 딕이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바로 잘 거냐? 기다리라더니.”

“음. 딸아이에게 부모의 조금 다른 신혼기를 고스란히 내다 바치려는 것 같아서 일단 두고 보잔 말이었는데, 그냥 눈 감아 줄게.”


조금 다른 신혼기라. 뭔가 켕기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다르게 받아칠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 중 절반은 제 탓도 가장 크려니 싶어 제이슨은 애꿎은 이맛살만 구기며 다시 툴툴거렸다. 거 그 문제 때문에, 꼬맹이가 이 사람 저 사람 붙들고 고민하는 거잖아…….


“걱정 마, 제이슨. 아마 제이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야. 제이시가 궁금한 것도 그런 건 아닐 거고.”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그거야 제이시는 제이슨을 닮았으니까.”

“이런 젠장, 난 그 말이 제일 짜증나.”


제이슨이 그렇게 중얼거렸고, 딕은 빙긋 웃으며 몸을 돌려 제이슨의 등허리에 손을 얹고 파고들었다. 목덜미와 가슴팍을 비비고 들어오는 온기에 제이슨도 마지못해 손을 들어 딕의 어깨를 끌어당겨 제 팔위에 편히 기대게 했다. 딕은 반나절동안 그렇게 잠들어 있다가도 또 자리에 눕자마자 가물가물 수마에 몸을 맡기려는 듯싶었다. 느긋해지는 숨소리가 흐트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제이슨은 손을 들어 딕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문득 웃음소리가 들렸다. 딕은 잦아드는 숨소리와 함께 웅얼거리면서도 제이슨에게 속삭였다.


“그래……. 제이시도 똑같이 이야기 하더라.”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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