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이드x수호자(OC)입니다.

* 개인적 해석 및 설정 날조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수호자 OC의 이름은 팬서. 자세한 이야기는 OC 이야기 <Panther> 포스트를 참조해주세요~





눈을 뜨고 낯선 천장을 보았을 때, 케이드-6의 첫 감상은 '와, 이런 고전 소설 도입부 같은 상황이 다 있냐'였다. 어쩌다 이런, 케이드가 보는 연애 소설에서도 요새는 진부해서 쓰지도 않을 것 같은 상황이 되어버린 거지?

케이드는 벌떡 일어나 앉아서 가장 먼저 주위를 살폈다. 어제 (정확히 말하면 오늘 새벽이지만 잠들기 전은 다 어제인 법이다.) 들어와서 보았던 풍경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다만 햇빛이 들어와 조금 더 환해진 것만 제외하면 아주 똑같은 장소였다. 그리고 이 방의 주인은… 없다. 어제 말했던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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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망했어."

케이드가 카운터에 엎드린 채 술잔을 흔들며 말했다. 한껏 애처로움을 가득 담은 목소리가 무색하게 응답하는 이는 없었고, 아무리 기다려도 답이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케이드는 삐죽 고개를 들어 옆을 살폈다. 시야에 비치는 사람은 한 명의 사람뿐이었다. 두고 간 건 아니네. 그것을 확인한 케이드는 이번엔 조금 더 큰 소리로 말했다. 조금 더 애처로움을 담아.

"완전, 완전, 완전 망했다니까."

애처로움보다는 어린애의 칭얼거림 같다. 씨, 이게 아닌데. 슬쩍 후회가 밀려올 무렵 한숨 섞인 기계음이 들렸다.

"네, 이번엔 뭐예요? 선봉대 서류 작업을 미루다 미루다 못해 자발라와 아이코라한테 최후 통첩 받은 거? 외상이 쌓일 데까지 쌓여서 감당 못할 지경이 된 거? 아님 포커 치다 져서 재산을 날리기라도 했나요?"

묵묵히 술잔만 입으로 옮기고 있던 이의 머리 옆에서 고스트 하나가 슥 나타나 고개를 흔들듯 의체를 움직였다.

늦은 밤, 탑에서 유일하게 심야까지 영업하는 술집에서 단 둘(그들의 고스트까지 포함하면 넷)의 손님이 카운터에 앉아있었다. 주인 겸 바텐더는 설거지, 매장 청소, 매대 정리 등 마감 준비를 다 끝내놓고도 도통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는 손님들 때문에 구석 자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손님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오늘따라 잔뜩 취한 기분이라도 느끼고 싶은 건지 웬일로 먼저 수호자에게 한잔 하러 가자고 제의하고는 정말 많이, 많이 마셔댔던 케이드 때문에.

"야, 그건 망한 거 아니거든?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라고. 그 정도로 망했다는 표현은 안 쓰지. 그리고 난 포커에 진 적 없어. 미광체는 좀 날려도."

고스트의 코어가 살짝 오므라들듯이 작아졌다. 사람으로 치면 눈을 가늘게 뜨는 것처럼.

"사기 치다 걸려서 탈탈 털린 걸 진 게 아니라고 한다면, 뭐 그럴지도요."

케이드는 거기에는 별다른 반박 없이 쩝, 하고 혀를 차는 듯한 소리를 흉내 냈다. 

"그럼, 뭐 때문인데요? 내기에 걸 담보가 마땅치 않아 선봉대 자리라도 걸어버리셨나?"

딸꾹.

잠시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진짜예요???!!"

고스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야, 잠깐만, 아니야, 아니야! 악, 사레가, 쿨럭." 

케이드가 어색하게 목을 탁탁 쳤다. 엑소도 사레가 걸리던가, 싶은 의문이 고스트에게 스쳐지나갈 때쯤, 케이드가 말을 이었다.

"비슷한데, (비슷하다고요?!) 아 쫌! 말 좀 하자. 내가 진짜 완전 괜찮은 건수를 하나 잡았거든? 잘만 하면 내 앞으로 달린 빚 절반 정도는 한꺼번에 갚을 수 있을 만한 정도의. 그게 뭐냐고? 알려고 하지 마. 다쳐. 근데 아주 약~~간의 변수가 생겨서 말이야. 뭐 그건 금방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문제는… 내 집이 날아갔어."

"…네?"

"내 사무실도."

"네?"

"절차에 약간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야. 계약서 조항 해석에 대한 사소한 오해, 그런 건 자주 있는 일이잖아? 내 개인 숙소랑 사무 공간에 대해 무기한 이용 정지가 걸렸어. 잘못하면 한줌의 미광체가 될지도 모르…지만 그럴 일은 없어! 아무렴! 다 오해니까!"

"…자발라랑 아이코라는 알아요?"

"그것도 문제지."

케이드가 땅이 푹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두 사람이 알기 전에 해결하려 했는데, 생각대로 안 됐어. 너희도 그 둘 표정을 봤어야 했는데. 특히 아이코라가 무슨 아메바를 상대하는 양 날 보는데… 아, 아니다. 못 본 게 다행이다. 하여간 당분간 노숙 신세야. 그러니까 좀 봐줘. 한동안은 늦게까지 놀아달라 할 것 같으니까."

케이드는 다시 카운터에 엎드려 버렸다. 엎드린 자세에서 고개를 약간 옆으로 돌리니 수호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술을 마시거나, 안주를 먹거나, 그도 아니면 가만히 앉아 있을 뿐 다른 행동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같이 술집에 온 이후 내내 그랬다. 말을 하는 건 거의 케이드 아니면 그의 고스트 선댄스, 그리고 수호자의 고스트뿐이었다. 수호자는 가끔 질문에 대답하거나,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젓거나, 약간의 제스처 정도를 하는 게 다였다. 케이드는 그런 모습을 싫어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수호자에게 술 상대를 해 달라 청한 것이었다. 쾌활하고 떠들썩한 상대를 바랐다면 다른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수호자의 이런 반응은 케이드가 결코 예상했던 바가 아니었다.

"그럼 우리 집 와."

"엥?"

내내 조용히 듣기만 하던 사람이 겨우 입을 열었나 했더니만 튀어나온 말이 너무나 상상초월이라, 쉴 새 없이 떠들던 케이드도 제 수호자 대신 대꾸해주던 고스트도 입을 딱 다물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오라고. 우리 집."

딸꾹.

케이드의 목 안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어차피 나는 잘 들어가지도 않거든."

수호자는 안주로 나온 볶은 콩을 집어 먹었다. 음식이 마음에 들었는지 열심히 입을 오물거리다 삼키고 나서야 케이드 쪽을 쳐다보았다.

"요즘엔 집에서보다 우주선 아니면 임무 행성에서 숙식을 해결하니까. 탑엔 보고 아니면 무기 정비하러 올 때 말고는 그리 오래 머무르지도 않고."

"아, 그건 그렇네요." 고스트가 묘안이라는 듯이 의체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우리 수호자가 괜찮다면야 상관없어요. 제 생각 같아서는 숙박비를 받고 싶지만요?"

농담조로 그렇게 덧붙이는 고스트를 보면서 케이드는 아까 저 작은 빛이 수호자 말을 듣고 조용해졌던 이유는 당황하거나 놀라서가 아니라 단지 경청하는 태도에 불과했다는 걸 깨달았다. 

케이드가 너무 오랫동안 말이 없자 수호자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당장 머물 데 없다며? 괜한 오지랖이었나?"

"어? 아, 그게 아니고…" 

그럴 리가 없는데도 케이드는 목이 마른 기분이 들었다. 

"그… 나야 정말 고맙긴 한데… 네 입장에서는 과하지 않아? 그렇게까지 해줄 이유가 없지 않나?"

수호자가 등을 의자에 기댔다.

"신세를 졌으니까."

신세? 언제? 하고 묻는 케이드에게 수호자는 작게 웃어보였다. 케이드는 이 친구가 그렇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본다고 생각했다. 

"이거, 줄게."

수호자는 키 스캐너를 케이드에게 내밀었다. 아마도 그의 집 열쇠일 터였다. 와, 진심인가보네. 얼떨결에 받아들면서 케이드는 키 스캐너에 서명된 이름을 보았다.

Pan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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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서는 정말로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물론 케이드도 나름 선봉대장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기 때문에 업무에 시달리느라 팬서의 키 스캐너를 이용하는 시간은 극히 드물었다. 수면 같은 사적인 휴식 시간이 필요할 때나 가끔 들르는 정도였는데, 그나마도 팬서와 동선이 겹치는 시간대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혹시라도 자기를 신경 써서 일부러 안 들어오는 거라면 절대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해주려 했지만, 팬서는 정말로 집을 이용하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제가 다 아까워요, 하고 팬서의 고스트가 몹시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한집에 살지만, 집에서 서로를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는 기묘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명백히 서로가 있었던 흔적을 발견하게 되지만, 막상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식기나 생활용품을 쓴 흔적이라든가, 모르는 물건이 새로 놓여 있다든가, 절대 취향이 아닌 스티커 같은 게 뜻밖의 장소에 붙어있다든가 하는 것들.

케이드는 집안에 유령이 사는 기분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여기는 내 집이 아니니 유령은 나인 셈인가. 신세지는 건 자기 쪽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치고는 상당히 뻔뻔한 편이었던 케이드는 딱 그 정도에 그쳤다. 남의 집이라 해서 눈치를 본다든가 하는 상식적인 관념과는 거리가 먼 족속이었던 것이다.

케이드는 새로운 '집'을 아주 편히 여겼다. 우선 이곳이 그 수호자, 팬서의 집이라는 이유가 컸다.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공연히 먼저 말을 걸지도 않고, 자세히 파고들려 하지도 않는다. 그는 말이 없는 만큼 감정 표현도 적었으며, 자연히 혼자 있는 시간이 길었다. 케이드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람이 이곳에 지낸다는 사실이 마음을 편하게 했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잠을 자고 나간 흔적, 음식을 꺼내 먹은 흔적, 욕실이나 세탁실을 사용한 흔적 같은 것을 발견하면 안도감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이 타인의 생활감이라는 것에 이렇게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이었구나 생각하면 놀랍기까지 했다.

그 친구도 비슷한 기분일까? 케이드는 잠시 시각 파츠를 닫고 팬서를 생각했지만 이내 뭐, 상관없지. 라는 쪽으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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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서는 며칠 만에 집에 돌아와 침대에서 쪽잠을 잤다. 베개 위치가 평소와 반대로 되어 있는 것 같았지만 우선 잠드는 것이 필요했던 팬서는 그런 사소한 일은 곧 잊어버렸다. 잠시 후 잠에서 깬 팬서는 곧바로 다음 외출을 준비했다. 그러다 거울 한가운데에 접착 메모지가 붙어있는 게 눈에 띄었다.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샴푸 옆에 엑소용 윤활제 좀 둘게. 헷갈려서 잘못 쓰지 마. 나는 상관없는데, 넌 부활이 필요할지도 몰라. 말이 나와서 말인데, 시간 되면 격납고 정비소에서 윤활제 두 통만 더 사다 줄래?

- 냉장고에 라멘 정식 두 세트 있어. 하나는 너 먹어도 돼. 안 먹을 거면 내가 먹고.

P.S. 샌드위치는 상했더라. 버렸어.

C-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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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드는 잘 준비를 마친 뒤 마지막으로 베개 위치를 반대쪽으로 바꾸었다. 방문 너머 선댄스가 작게 노래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문을 안 닫았네. 케이드가 문을 닫기 위해 몸을 일으키자, 거울에 붙어 있는 새로운 쪽지가 눈에 띄었다.

- 엑소용 윤활제 종류가 많아서 뭔지 모르겠길래, 네가 평소 쓰는 걸로 달라고 해서 사 왔어. 혹시 다른 거면 네가 직접 바꿔 와.

- 라멘 정식 고마워. (뒷부분에 펜으로 지워진 흔적이 남아 있다.)

- 식빵이랑 우유 떨어졌는데 부탁 좀 할게. 비커 씨네 걸로. 거기가 제일 맛있어.

P.S. 그 샌드위치 상한 거 아냐. 소스 맛이 원래 그래.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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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쪽지. 팬서는 베개를 원래 위치로 돌려놓으며 읽었다.

- 윤활제 제대로 사 온 거 맞아. 고마워. 근데… (이 뒤는 펜으로 줄이 그여 지워져 있다.)

- 우유, 식빵 OK. 냉장고랑 식료품장 안에.

- 식료품장에 못 보던 가게의 돈코츠 라멘 키트가 있더라? 이거 나 먹어도 돼? 사실 이미 먹고 있어.

P.S. 그게 상한 게 아니라고?? 너 후각 괜찮아??

C-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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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된 쪽지. 케이드는 머리를 반대편으로 뉘였다.

- 우유랑 식빵 같은 음식은 하나면 충분해. 다섯 개씩 사다 놓을 필요 없어. 아무튼 고마워.

- 라멘 키트 너 주려고 산 거니까 괜찮아.

P.S. 넌 앞으로 내 샌드위치 손 대지 마.

P.

케이드는 키득거리면서 쪽지를 접었다. 그리고 다음 쪽지를 쓰기 위해 펜을 꺼내들려는 순간이었다. 

오른다리에 갑작스런 경련이 일었다. 케이드는 펜을 바닥에 내던지고 얼른 손으로 다리를 붙잡았다. 다리쪽 신경계 부품에 문제가 있는지 가끔씩 찾아오는 발작이었다. 신경계 발작은 엑소들에게 가끔씩 있는 현상으로 상당한 통증을 동반하지만 치료, 혹은 수리할 방법은 없다. 인간과 각성자 수호자들이 부상당했을 때 고스트의 빛의 힘으로 치료 가능한 것과 달리 엑소들은 빛의 힘을 넘어선 영역에 있는 모양이다. 따라서 이러한 발작 증세가 나타나더라도 잠잠해질 때까지 인내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케이드는 선댄스가 지금 옆에 없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선댄스는 케이드의 발작 증세가 나타날 때마다 한결같이 걱정과 슬픔을 내비쳤다. 케이드는 필사적으로 신음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애쓰며 방 안의 욕실장 쪽으로 가려고 했다. 욕실장 안에 넣어둔 윤활제가 조금이나마 발작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을 줄 것이었다. 하지만 경련이 다리에 일어난 만큼 몸을 움직이는 것은 무척 힘겨운 일이었고, 아니나 다를까 몇 걸음 옮기지도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이쪽으로 기대 봐."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케이드의 상체가 휙 움직였다. 케이드는 뒤로 눕혀지면서 팬서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았다. 팬서는 윤활제 뚜껑을 열고 케이드의 다리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나 이거 처음 써봐서 잘못할 수도 있으니까 네가 봐줘야 돼. 정신 놓지 마."

케이드의 입에서는 대답 대신 작은 신음 소리만 새어나왔다. 케이드는 후들대는 손으로 팬서의 팔을 붙잡고 위치를 조정해주고는 힘을 쭉 빼버렸다. 겨우 정신을 잃지 않도록 집중하는 것이 한계였다.

잠시 후 경련이 멎었다. 케이드는 휘유, 하고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그래도 좀 짧았다."

그러고는 누운 채 팬서를 쳐다보았다.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팬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표정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케이드는 작게 웃었다.

"오늘은 웬일이야? 이 시간에 잘 안 오잖아." 케이드가 물었다.

"일정 변동이 생겨서 시간이 잠깐 떴어. 고스트는 밖에서 쉬고 있어. 선댄스를 방해하진 않을 거야."

팬서가 묻지도 않은 것까지 대답을 했다. 케이드가 우려하는 바를 알고 있다는 듯한 투였다.

"…내가 말했었나? 이거." 케이드가 물었다.

"아니. 윤활제 살 때 뭐 사면 되는지 몰라서 물어보는데 정비공이 말해줬어. 이런 때에도 사용할 수 있다고. 엑소들에게 가끔 일어나는 일이라고. 내가 아는 건 그 정도야." 팬서가 대답했다.

"그래. 뭐, 딱히 비밀은 아니야. 네가 만약 엑소였으면 진작 얘기해 줬을걸. 높은 확률로 비슷한 증상이 있었을 테니까."

팬서는 대답이 없었다.

"네 그런 점이 참 좋다니까."

케이드가 속살거리듯 웃었다.

"아, 거듭 미안한데 나 침대 좀 눕혀주라. 원래 네 침대니까 네가 쓰는 게 맞는 거 아는데, 오늘만 좀 봐줘?"

팬서는 별다른 대꾸 없이 케이드를 안아올려서는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일어서려 하는 팬서에게 말했다.

"너도 누워. 여기, 옆에."

팬서가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쉬려고 들어온 거 아냐? 조금이라도 자고 가."

"난 밖에서 자도 되는데."

"고스트 있잖아. 우리 선댄스도. 다 깰걸?" 

케이드가 그런 것도 모르냐는 투로 말했다. 

"너랑 얘기하고 싶어서 그래. …나도 지금은 좀 혼자 있기 싫은 기분이고."

팬서는 머뭇거리며 침대 안으로 들어와 옆으로 누웠다. 케이드는 팬서의 얼굴에 떠오른 어색한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 표정도 처음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응?"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팬서가 먼저 입을 뗐다. 케이드는 뭐가? 하고 되물었다.

"얘기하고 싶은 게 뭔데?"

케이드는 뒤늦게 알아차렸다. 한참 동안 기다려도 케이드가 입을 열지 않자 팬서는 기다리다 못해 먼저 말을 건 것이다. 아, 그거. 케이드는 눈동자 모양의 시각 코어를 가늘게 만들었다. 그냥 아무 말이나 대충 한 건데. 그렇게 대답하기가 망설여진 그는 달리 적당한 대답을 생각했다.

"음…… 그 샌드위치, 역시 상한 거 맞지?"

정말 대충 생각한 대답이었다.

"아니라니까." 팬서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저것도 처음 본다.

"그럼 너랑 나 둘 중 하나의 후각에 문제가 있는 건데? 근데 나는 아냐. 내가 멀쩡한 거면? 저런, 너 어떡하냐?"

"소스가 원래 그렇다니까. 발효한 걸 넣어서 그래. 막상 먹으면 맛있어."

"난 네가 산 샌드위치는 안 먹을래."

누가 사다 준댔나. 팬서는 부루퉁해져서 투덜거렸다. 저것도 처음 보는 표정이다. 케이드는 작게 키득거렸다.

"윤활제 달라고 할 때 정비공이 다른 말은 안 했어?" 케이드가 물었다.

"음, 별로. 기능 설명 정도였어. 처음엔 제일 비싼 걸 사라고 유도하는 것 같긴 했지만 네 이름 대니까 별 말 없이 갖다 주던데." 

팬서가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와 대답했다. 그리고 잠시 뭔가 생각하는 것 같은 케이드를 보더니 안심하라는 듯 덧붙였다.

"네 증상에 대한 얘기는 한 마디도 없었어."

"응? 아, 그건 상관없어." 케이드가 말했다. 팬서의 의아한 눈을 보고 그는 말을 이었다. "별 건 아니고, 소문이 퍼졌더라고. 너랑 내가 같이 산다고."

팬서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재밌네. 케이드는 생각했다.

"네가 내 물건을 산다고 하니까 그렇게 말이 난 모양이야. 나도 딱히 부정은 안 했더니 기정 사실로 소문이 확 돌더라고. 몰랐구나?"

"어… 탑에 오래 머무르질 않아서."

팬서의 대답에 케이드는 그럴 것이라고 납득했다. 탑에 있는 시간은 압도적으로 케이드가 많고 팬서는 거의 없는 편이니 시시한 가십 정도 빠르게 못 듣는다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뭐 이상한 내용은 없어. 같이 산다더라, 그 정도.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들이 좀 많아져서 그렇지 일에 지장도 없고."

팬서는 별달리 말이 없었다.

"불편해?" 케이드가 물었다.

"음… 아니." 팬서가 답했다.

"그치?" 케이드가 큭큭 웃었다. "애초에 우리가 한집에서 얼굴 본 게 오늘이 처음인데."

이걸 같이 산다고 할 수나 있나. 케이드는 그렇게 덧붙이려다 그만두었다. 왠지 핀잔처럼 들릴까봐서였다. 팬서는 역시 말이 없었다.

"…팬서?"

그래도 좀 지나치게 조용하다 싶어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케이드는 다시 한 번 시각 코어를 가늘게 뜨고 어둠 속 팬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이 감겨 있었다. 작지만 색색대는 숨소리도 들렸다.

케이드는 한동안 가만히 잠든 얼굴을 관찰했다. 코와 입에서 숨이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아주 작게 이불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케이드는 한 팔을 들어 팬서를 향해 뻗었다. 그리고 얼굴 바로 위에서 손을 멈추었다. 허공에서 머뭇대던 손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려앉듯 뺨에 닿았다. 손가락 하나가 닿았지만 팬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두 개, 세 개, 네 개, 이윽고 다섯 손가락이 모두 닿아도 여전히 큰 움직임이 없자 케이드는 그 손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뺨을 한 번 쓸었다. 그리고 잠시 움직임을 멈추어 손가락으로 전해지는 따뜻함을 실감하고는 곧바로 손을 떼었다. 케이드는 정면으로 돌아누워 손을 자신의 머리 위에 가져다 댔다.

"하아."

생각보다 큰 소리로 한숨이 터져나왔다. 다행히 팬서는 깨지 않은 것 같았다. 그것을 확인한 케이드는 눈을 감았다.



- Fin.


그때 그때 좋아하는 것을 막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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