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5

 

 

 

 

 

-재현아, 혹시 시간 괜찮으면 금요일에 저녁같이 먹을래?

“금요일에요?”

-응, 어차피 우리 토요일에 볼 거긴 한데 그냥. 또 보면 좋지 않나 싶어서. 나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뇨 저도 같은 생각이긴 한데, 죄송해요, 형. 저 금요일엔 약속이 있어서요. 정재현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문태일은 무슨 약속인지 물어보지 않았지만, (사실 궁금했으나 정재현이 순순히 대답할 거란 생각은 안 했다) 짧은 침묵에 담긴 의도를 기가 막히게 읽어낸 정재현이 자발적으로 대답했다. 저 동아리 모임 있거든요. 동아리? 이에 문태일이 화답하듯 대화를 이어 나갔다. 재현이 너 동아리 활동해? 무슨 동아린데? 정재현은 책상에 앉아 강의 시간 내내 필기한 노트를 펴며 볼펜을 꺼냈다. 자전거 동아리요. 동혁이도 저랑 같은 동아리예요. 응? 그래? 그러고 보니 동혁이한테 들은 것 같기도 한데.

“그냥 한강에 따릉이 타고…… 뭐 그러는 동아리에요.”

제일 처음에 동아리 만든 초대 회장 말로는 자전거 경기에 참여하는 게 목표라는데 글쎄요, 제가 동아리 가입하고 나서 아직까지 그냥 마실 나가듯 자전거 탄 기억밖에 없네요. 아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걸요. 정재현의 말에 문태일이 웃었다. 그래도 꾸준히 하는 게 어디야. 생각보다 뭔가를 꾸준히 하는 건 어려운 일이야. ……듣고 보니 그렇네요. 문태일은 수화기 너머로 사각거리는 펜 소리가 들리자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 정재현이 내는 소리를 하나하나 듣고 싶어서였다. 자신과 통화하면서 뭐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지금 공부해? 아, 그냥 학교에서 필기한 거 정리하고 있어요.

-혹시 통화 방해돼? 끊을까?

“아뇨. 괜찮은데요. 형 바쁜 거 아니면 더 얘기하고 싶어요.”

-그럴까? 어…… 난 이제 집 가는 중이야.

자료 찾아볼 게 있어서 지금까지 학교 도서관에 있었거든. 정재현은 문태일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를 떠올렸다. 도서관 자료실에서 책을 검색하고 그걸 찾아보는 문태일을. 혹시 형도 공부할 때 안경 같은 거 쓰는 스타일일까? ……형 사범대라고 했죠? 전공이 뭐예요? 나? 역사교육과. 한문이랑 라틴어 때문에 공부할 때 머리 싸매는 편이야. 재현이 너는 유아교육과지? 네.

-그럼 너도 임용고시 보겠네.

“뭐…… 성적 유지만 잘하면 그렇겠죠? 일단 국공립 들어가는 게 목표긴 해요.”

아무래도 국공립 들어가면 공무원이니까요. 안정적인 월급쟁이…… 를 목표로 하고 있어요. 이렇게 얘기하니까 좀 속물 같네요. 정재현이 조곤조곤하게 제 목표를 말했다. 문태일은 그 말을 들으면서 걸었다. 둘이 사귀기 시작한 후 처음으로 정재현 스스로가 말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얘기를 들어서 그랬나, 문태일은 정재현의 말을 끊지 않았다. 더 얘기해보라는 듯 응, 그렇구나 하고 맞장구치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한참 자기 전공과 목표에 대해 얘기하던 정재현은 문태일이 집에 도착한 듯 보이자 (도어락 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태일이 형. 도착했어요?

-어? 아, 응. 문 여는 소리 들렸어?

“네. 도착했으면 쉬어요.”

-그래. 너랑 얘기하니까 금방 왔네.

오늘 고마워. 뭐가요? 네 덕분에 집에 오는 길이 안 심심했어. 또 연락할게. 네, 형. 정재현은 통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책상에 내려놓으며 필기에 집중했다. 얼굴 보고 얘기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뭐야, 너 오늘 안 나올 줄 알았는데 나왔네?”

“형은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나 안 나온다고 한 적 없는데.”

정재현이 핸드폰을 만지며 물었다. 그리고 다 같이 따릉이 정기결제했는데 꼬박꼬박 타야지. 김도영은 정재현 얼굴 한 번 보더니 씩 웃고는 어깨에 팔을 걸쳤다. 야, 너 연애하는 거 소문 다 났어. 그래서 당분간은 데이트한다고 안 나올 줄 알았지. 내가 형이야? 정재현이 어이없다는 듯 김도영을 바라보았다. 난 형처럼 연애한다고 주변 지인들 뒷전으로 두는 사람 아닌데. 김도영이 정재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너는 몇 년 전 얘기를 아직도 하냐.

“태용이 형이랑 동혁이는?”

“한강에 먼저 가 있는데, 자리도 잡아놓고.”

정재현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형, 근데 어깨 무거워. 이 팔 좀 치우면 안 돼? 그 말에 김도영이 정재현의 어깨에 제 무게를 더 실으며 매달렸다. 싫은데? 어쩌다 보니 김도영 품에 갇힌 정재현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그의 어깨를 팡팡 때렸다. 아, 형!

 

 

 

 

 

평소처럼 공강 시간에 학교를 돌아다니던 문태일은 저 멀리서 정재현이 보이길래 인사하려다 그의 옆에 누군가가 있는 걸 보고 들고 있던 손을 슬금슬금 아래로 내렸다. 오늘 동아리 활동 있다고 했으니 아마 정재현이 전화로 얘기했던 동아리 멤버인 듯싶었다. 이동혁은 아니고 처음 보는 사람이네. 가서 인사라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문태일이 핸드폰으로 카톡을 켜며 그들에게 다가섰다. 재현아, 나 지금 너 보이는데- 까지 자판에 치고 있는데 정재현 옆에 있던 남자가 정재현에게 어깨동무하더니 이내 끌어안는 게 보였다. ……어? 문태일이 발에 못이 박힌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가까운 거리는 아니라 둘이 대화하는 게 들리진 않았지만, 정재현은 싫은 기색 없이 남자의 등을 두드렸다. 환하게 웃는 얼굴이 멀리서도 잘 보였다. 문태일은 그걸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카톡 전송 버튼을 눌렀다. 아, 지운다는 게 그만…….

“어? 형 잠깐만 떨어져 봐.”

“왜? 내가 그렇게 무겁냐?”

“아니, 나 카톡 와서.”

정재현이 김도영을 밀어내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화면 상단에 뜬 이름을 확인했다. 문태일이었다. 나 지금 너 보이는 데까지 적힌 카톡을 읽은 정재현이 고개를 돌려 주변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김도영은 갑자기 주위를 살피는 미어캣 같은 정재현의 행동에 뭐 하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갑자기 뭐해? 정재현이 어색하게 입 꾹꾹이를 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니, 태일이 형이 근처에 있다길래……. 태일이 형? 아, 네 남자친구? 그 발언이 부끄러웠는지 정재현이 다시금 김도영의 등을 두드렸다. 정확히는 때렸다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이었다. 악! 왜? 네 남친 맞잖아? 그럼 여친이니? 너 부끄러운 걸 왜 나한테 그래! 김도영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문태일은 정재현과 눈이 마주치자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정재현이 멀리서 문태일을 향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정재현이 문태일에게 오자, 덩달아서 그 옆에 서 있던 김도영이 정재현의 뒤를 따라 걸었다. 문태일은 멀리서 자신에게 꾸벅 인사하는 김도영을 보며 똑같이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그러면서 제 앞에서 뛰어오느라 숨을 헐떡이는 정재현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왜 뛰어오고 그래. 아니, 그냥 형이 있으니까요.

“옆에는 저랑 같은 동아리 형이에요. 도영이 형.”

“김도영입니다. 재현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안녕하세요, 문태일입니다.”

그나저나 내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문태일이 김도영의 얼굴을 바라보다 정재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김도영은 그냥 인사치레로 한 말이었는데 문태일이 관심을 보이자 당황한 듯 복식 호흡으로 웃었다. 하하, 하. 어, 그러니까 잘 만나고 있다, 뭐 그런 얘기에요. 재현이가 남한테 자기 얘기 막 하는 스타일 아니니까 오해는 마시고요…….

그제야 문태일은 김도영이 말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했다. 아마 주변에 소문이 났겠거니 싶었다. 자신이 정재현과 사귀는 걸 아는 사람만 주변에 두 명 이상 있으니까. (학교에도 소문이 돌았을걸?) 그 중 이동혁은 김도영과 같은 동아리니까 안 들을 수가 없었겠지. 문태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동아리 모임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따릉이 타고 뭐 그런다면서요. 여기서 시간 잡아먹어도 괜찮아요? 그 말에 김도영이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헉, 저희 가봐야겠네요. 재현아, 가자.

“형, 저 이따가 연락할게요.”

“그래, 잘 가. 안녕히 가세요.”

“네, 그럼, 다음에 또…….”

여전히 어색하게 웃던 김도영이 정재현의 팔을 잡아끌었다. 정재현은 아무 말 않고 그를 따라 걸었다. 문태일은 둘의 자연스러운 스킨십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둘은 문태일에게서 멀어지면서도 투닥거렸다. 정재현이랑 사귀는 건 난데 왜 둘이 더 잘 어울리는 느낌이지? 문태일은 자신의 속이 이렇게 좁다는 것에 스스로도 놀랍다고 생각했다. 정재현이 저와 사귀게 된 계기가 온전히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님을 잘 아는데도 그랬다. 아니, 그래서 그럴지도. 문태일이 한숨을 내쉬었다.

 

 

 

 

 

영화를 보기로 약속했던 토요일, 정재현은 문태일과 데이트하는 내내 그의 눈치를 살폈다. 영화관에서 만난 문태일의 표정이 어딘가 어두워 보여서였다. 형, 컨디션 안 좋아요? 어디 아픈 건 아니죠? 무리해서 나왔다던가……. 문태일이 저를 걱정하는 정재현을 향해 웃었다. 아니, 나 컨디션 완전 좋은데? 우리 오늘 데이트잖아. 그럼 정재현은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괜찮다는 걸로 끝맺은 둘은 영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문태일은 어제 봤던 김도영 때문에, 정재현은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 문태일 때문에. 형, 진짜 아픈 거 아니죠? 밥을 먹으면서도 정재현은 그것만 물었다. 문태일은 정재현이 제 눈치를 살피는 걸 잘 알아서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게 생각보다 어렵다고 느꼈다. 딱 봐도 그렇잖아. 김도영 앞에선 그렇게 편하게 웃던 애가 자기 앞에서는 눈치만 보니까.

“형 오늘은 제가 데려다줄래요.”

“어? 괜찮은데.”

“지난번에 형이 저 데려다줬잖아요.”

거절은 거절합니다. 정재현이 문태일의 등을 살살 밀었다. 앞장서라는 의미였다. 문태일은 정재현을 길 안쪽에 세워 걸으며 자취방에 가는 길을 설명했다. 우리 집은 여기서 이 골목을 돌아서 가면 되는데. 생각보다 안 멀지? 우리 집이랑 완전 반대 방향인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네요. 정재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다 왔어. 저기 건물 보이지? 저기야.”

문태일이 가로등 밑에서 바로 앞에 보이는 주택가를 가리켰다. 다 왔으니까 너도 얼른 가. 오늘 피곤했겠다. 문태일이 정재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재현은 그런 문태일의 얼굴을 보다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히 가세요. 어디서 본 적 있는 상황에 문태일이 웃음을 흘렸다. 너 내가 그렇게 인사하면 뽀뽀할 거라고 그랬었는데……. 그새 까먹었어? 농담처럼 말을 꺼냈다. 숙였던 고개를 든 정재현의 얼굴이 피가 몰렸는지 잔뜩 빨개져 있었다.

“까먹은 거 아닌데요…….”

근데 저 표정은 뭐지? 해도 된다는 의미인가? 문태일이 침을 꿀꺽 삼켰다. 어두워지는 골목길, 선명한 가로등 불빛이 정재현의 얼굴을 밝혔다. 조명 아래 둘만 서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으니 분위기가 묘해졌다. 문태일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정재현의 뺨을 쓰다듬으니 정재현이 눈을 꼭 감았다. 이거 진짜야? 문태일이 숨을 들이켰다. 덜덜 떨리는 손이 조금 부끄러웠다.

문태일의 입술이 정재현의 입술에 닿았다. 살짝 닿았다 떨어지자 정재현이 눈가를 파르르 떨더니 눈을 살며시 떴다. 눈이 마주쳤다. 형, 오늘 기분 안 좋아 보여서요. 좋아졌으면 좋겠어요. 정재현이 우물쭈물했다. 아래에서 꽉 쥐고 있던 손을 풀고 문태일의 팔을 잡았다. 문태일은 그 모습 보면서 알 수 없는 용기가 났다. 재현아.

“나, 너 진짜 좋아해.”

너도 날 좋아했으면 좋겠어. 내가 좋아졌으면 좋겠어. 아마 정재현이 들으면 놀랄 말이었다. 애정을 조르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문태일이 다시 한번 정재현에게 입 맞췄다. 이번에도 키스는 아니고, 뽀뽀였다. 두근두근. 정재현이 아까와는 다르게 눈을 감지 않고 문태일과 마주했다. 너 왜 눈 안 감아? 문태일이 물었다. 그러는 형은요. 정재현이 대답했다.

“난 너 보려고 안 감았는데.”

가자. 데려다줄게. 문태일이 정재현의 손을 잡았다. 둘은 그렇게 문태일의 집 앞에 와놓고 다시 정재현의 집을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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