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카와는 지친 몸을 끌고 부실 문을 열었다. 뒤에서 타박타박 따라붙는 발소리가 들린다. 문을 아예 닫아버릴까, 하다 아무리 그래도, 싶어 조금만 열어두었다. 그는 쓰러지듯 옆 라커에 머리를 박고, 제 이름표가 붙은 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아스라한 꽃향기가 코끝에 닿은 것은.


오이카와 토오루는 감이 좋은 편이었다. 라커를 여는 덜 자란 손과, 무언가를 삼키는 듯 억눌린 소리, 그리고 근래 몇 번인가 그의 후각을 자극했던,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향긋한 냄새가 그의 감각을 두드렸을 때, 그는 곧장 발을 내딛었다. 칸막이처럼 소년을 숨긴 라커 문을 밀어젖히면 사정없이 흔들리는 푸른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이카와는 소년의 양뺨을 한 손으로 억세게 틀어쥐었다. 붕어처럼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하얀 꽃잎이 힘없이, 스르륵, 추락한다.


그는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오이카와는 그 어린 감정이 어느 곳을 향하고 있는지 알았다.


“네가 어떻게……, 날 좋아해?”




오이카와는 신경질적으로 공을 퉁, 퉁 올렸다. 옆얼굴에 꽂히는 시선이 따갑고 거북스러웠다. 오이카와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한다.


“난 너 안 좋아해.”


짧은 정적이 이어지고, 카게야마가 말했다.


“압니다.”

“근데? 토비오 쨩은 혹시 짝사랑이 취미에요?”


부러 날카롭게 대꾸했다. 네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보자.


어렸다. 자존이 모자라 치기를 덧대어야만 버틸 수 있는 나날이었다. 여린 마음에 양껏 생채기를 내면 저를 구렁텅이에 내몰았던 작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음습한 보상 심리가 뱃속을 휘저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렇게까지 모질게 굴 리 없었다. 비겁하다는 것도, 답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충동처럼 행하고 마는 일들이 있다. 더욱 깊은 환멸에 빠지더라도 멈출 수 없는. 그의 심장은 어린 시기에 너무 무거운 것을 담아버렸다.


“……저도, 압니다.”


미련스러울 정도로 올곧은 답만이 돌아왔다. 잦아들 줄을 모르는 은은한 꽃향기. 그것은 모든 못된 짓들에 대한 용인이었다.




카게야마는 걸음을 재촉했다. 오이카와는 그보다 키도 크고, 다리도 길쭉하다. 서두르지 않았다간 금세 놓쳐버릴 것이다.


어느새 그는 소각로로 가는 모퉁이를 돌았다. 소년은 바지런히 뜀박질을 했다. 황급히 코너를 돌았을 때 그는 단단한 벽 같은 것에 부딪혔다.


“으악!”


나자빠지기 전 누군가가 그의 팔을 단단히 붙잡아왔다.


“토비오 쨩.”


오이카와였다. 살짝 접힌 눈은 마냥 살갑지가 않다. 읽어내긴 힘들었으나 가슴이 따끔거리고 목이 근질거렸다. 그래서 그 눈에 담긴 것이 제게 좋은 마음이 아닐 것을 알았다.


“오이카와 씨, 졸업 축하드립니다.”


고개를 깊이 숙이자 머리 위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대단하네.”

“네?”


오이카와는 소년의 멱살을 쥐고 얼굴을 바짝 갖다댔다. 심장은 쿵덕거리고, 시선보다 조금 아래에 위치한 촘촘한 속눈썹이 생소했다. 그의 코끝이 당장이라도 제 입꼬리에 닿을 듯했다.


짧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말했다.


“아직도 나를 좋아하는구나.”


아, 아프다.


오이카와는 미련없이 카게야마를 놓아주었다. 바람에 교복이 흩날린다. 검은색 재킷 위로 실밥이 나달거린다. 남아있는 단추는 없었다.


“잘있어.”


그가 웃는다. 숨이 막혔다.


마음을 토해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가 졸업한 지 2년도 더 지났다. 카게야마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키가 많이 컸다. 최고도달점이 비교도 안 되게 높아졌다. 토스는 말할 것도 없고 서브도 더 잘 때릴 수 있게 되었다.


오이카와와는 가끔씩 만났다. 우연처럼 길목에서 만나면 그는 옛날보다 훨씬 가뿐한 얼굴로 알은체를 해왔다.


카게야마는 여전히 꽃을 토했다.


축축하고 흰, 그를 성가시고 아프게 만드는 것. 가끔씩 궁금하다. 제 안의 어느 부분이 이토록 무의미하고 해로운 짓을 반복하고 있는 걸까.


카게야마는 납작한 배 위에 손을 얹었다. 배구에 방해가 되는 것은 불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게야마는 그것을 꺼내거나 없앨 수 없었다. 당최 제 어디에 그 사람이 박혀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으므로.




오이카와 토오루는 언제나 예고도 없이 그의 인생에 침범한다. 하굣길, 그는 교문 앞에 서있었다.


“안녕, 토비오 쨩.”

“……무슨 일이십니까.”

“간만에 만난 선배한테 할 말이 그것뿐이야?”


생긋 웃으며 그는 덧붙였다.


“토비오 쨩한테 오이카와 씨는 ‘그냥 선배’도 아니잖아?”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보며 오이카와가 앗차, 소리를 낸다. 딱히 진심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는 샐샐 웃으며 카게야마에게 손짓했다.


“조금 걷자.”




둘은 나란히 육교 위를 걷는다. 이제는 애쓰지 않아도 그럭저럭 보조가 맞았다. 카게야마는 곁눈질로 그를 쳐다본다. 오이카와는 정말 걷기만 하고 말이 없었다.


그를 볼 때면, 목이 자꾸만, 따끔거렸다.


오이카와가 말했다.


“잘 지내고 있어?”

“……팀원들은 다 좋습니다. 배구도 좋고요.”

“그 외엔?”


걸음을 멈춘 오이카와가 그를 돌아본다. 부드럽게 미소 짓는 얼굴. 제 몫의 감정이 아직도 남아있음을 믿어 의심조차 않는 그의 눈.


카게야마는 입술을 짓씹었다. 이 말을, 줄곧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오이카와 씨.”


세상은 타오르고 있었다. 노을이 굴곡진 그의 머리칼 위를 미끄러지고, 그의 고개가 모로 슬며시 기울어진다. 입체적인 이목구비 아래로 그늘이 졌다. 카게야마는 갑자기 타듯이 서러워진다. 목이 메였다. 꽃잎인지 그 외의 무엇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저 이제 오이카와 씨 안 좋아할 겁니다.”


그의 얼굴을 보고 말할 자신은 없었다. 바람은 불지 않고, 주변에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고, 모노레일만이 단조로운 바퀴 소리와 함께 멀어져갔다. 한참이 지나고 오이카와는 물었다.


“할 수 있겠어?”

“노력, 할 겁니다.”

“……그래.”


오이카와는 먼저 자리를 떠났다. 카게야마는 한참동안이나 그 자리에 서 제 발치만 보고 서있었다. 녹물을 뒤집어쓴 낡은 표지판처럼, 영영 이곳에서 떠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기분은 기분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놀랍게도, 그 날 이후로 카게야마는 단 한 번도 꽃을 토하지 않았다. 그는 새삼 제 의지력에 놀랐다. 말하고 나니 정말 그렇게도 되는 것이었다.


그는 거울에 비친 제 몸을 본다. 불필요한 부위 따위 없이 배구를 위해 정제되어가는 그의 신체.


실은 오이카와 씨가 없어도. 괜찮았던 거구나.


어쩐지 우습고, 씁쓸한 기분. 그는 감상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대강 이런 것을 실연이라고 하는구나, 하고 깨쳤다.


그 모든 거절을 곱씹자면 지나치게 늦은 깨달음이었다.




그러나 종종, 심장이

덜컥

내려앉고 목이

꽈악

메이는 순간이 있었다.


실연으로 외사랑이 종결되었다면 더는 이럴 수 없는 것이 아닌지? 그의 사랑의 기관은 이미 죽어 낱낱이 소화되어버린 것이 아니었던가.


답은 또다시 불시에 찾아왔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발견하곤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반사적으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뻣뻣하게 굳은 카게야마를 보며 그가 키득거린다.


“몇 달 만이지?”

“저희 시합도 했는데요.”

“말고.”


오이카와는 그를 잡아당겼다. 언젠가 그가 이렇게 찾아왔었다. 그는 좀 걷자고 했었고, 어느 낯선 육교 위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그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겠다고 말했었다.


그는 왜 다시 자신을 찾아온 것일까. 그 용건이 배구가 아니라는 것은 둔감한 카게야마도 알 수 있었다. 한참을 걷다, 그가 멈추어선다.


꼭 이 언저리에서 그에게 안녕을 고했었다.


“토비오.”


카게야마는 그를 바라본다. 육교의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그가 카게야마에게 묻는다.


“잘 돼가고 있어?”

“뭐가 말입니까.”

“오이카와 씨 안 좋아하기.”

“그건, 이미 성공했습니다.”

“거짓말.”


오이카와의 눈이 둥글게 휜다.


아. 짤막한 감탄사가 카게야마의 입술 새로 흘러나온다. 언제부터였을까. 그 눈이 더는 아프지 않았던 게.


카게야마는 심장이 쿵덕거리는 것을 느낀다. 무언가가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다. 꽃잎은 아니었다. 아닌데.


“이리와.”


한 걸음.


“더.”


두 걸음.


“더.”


마침내 아주 가까운 곳에 섰을 때에야 오이카와는 웃으며 그에게 손을 뻗었다.


“토비오.”


움찔하는 몸을 보며 그가 쓰게 웃는다. 그의 엄지가 카게야마의 아랫입술에 닿았다.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오이카와 씨를 더는 좋아하지 않는데, 얼굴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고, 이건 다 새빨간 노을 탓이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면,


그는 꼭 어느 봄처럼 아스라히 웃었다.


“왜 네가 꽃을 더 이상 안 토하는 것 같아?”

“제가, 오이카와 씨를 안 좋아해서,”

“토비오. 내가 내내 너를 싫어한 것 같아?”




사랑의 시작은 언제일까. 꽃송이는 어디를 기점으로 제 사지를 떨구는 것일까.


오이카와 토오루는 후배의 병이 끝을 보이고 있음을 직감했다. 뒤늦게 신체를 따라잡듯 자라난 제 속을 들여다 보면, 그곳엔 점점 꽃대를 위로 뻗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 날, 소년은 말했다.


‘저 이제 오이카와 씨 안 좋아할 겁니다.’


세상은 예상치 못한 어느 국면에서 저지른만큼 갚아내라 한다. 세상은 석양에 흠뻑 젖고, 모노레일은 그들을 스쳐지나갔다. 오이카와는 그가 지금 아주 중요한 것을 잃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태양는 동으로 역행하지 않으며 모노레일의 바퀴는 오로지 일방통행의 전진을 위해 만들어졌다. 그는 제 모든 잘못을 알고도 변명을 읊을 만큼 뻔뻔한 사람은 못 되었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갈피를 못 잡는 카게야마의 얼굴을 본다. 그는 쓰게 웃으며 묻는다.


“너는 더 이상 꽃을 안 토하고, 그럼 나는, 어떻게 이렇게 멀쩡한 걸까.”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야, 네가 날 아직도 좋아하고,”


그는 여전히 엄지로 후배의 입술을 짚은 채, 손바닥으로 그 뺨을 감쌌다.


“내가 널 좋아한단 소리잖아.”


꽃송이는 어디를 기점으로 제 사지를 떨구는 것일까. 그러나 어떠한 꽃도 봉오리를 여는 동시에 낙화하지 않는다. 갓 피어나기 시작한 마음 아래선 어떠한 꽃도 죽지 않는다.


오이카와는 뻐끔대는 입술 위로 제 입술을 겹쳤다. 순식간에 입 안을 훑어낸 혀가 떨어져나갔다. 그는 어쩐지 애달픈 듯, 벅찬 듯 미소 짓는다.


“봐. 아무것도 없지.”


카게야마가 황급히 입술을 가렸다. 오이카와는 먹먹한 가슴으로도 웃고야 만다.


생각했다. 나는 사실 벌을 받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해는 다시 떠오르고, 모노레일은 또다시 몇 번이고 육교 언저리를 지나 빌딩 숲을 가로지를 것이다. 그 변함없는 주행이 네 마음을 닮아있어 내 마음은 버림받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앞으로 변제해나갈 기적의 한 단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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