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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진 욕망이 건네는 잔

22화




“유산 후 마음이 심란하여 울적해 신전을 찾고 있사온데, 거동이 힘들어 신관을 대신 들여 달라 청하였습니다.”


그것도 발라크 소속의 신관을.     


“…….”


미야는 내 침묵에 눈치를 보면서도 말을 이었다.


“그, 물론 폐하께서 윤허하진 않으셨습니다. 애초에 내분이 일어나 가라앉은 지 몇 년 되지도 않은 상황이고, 동맹국도 아닌데다 발라크 교단의 입궁은 제국민들에게 어떻게 보이는 지 환하니까요.”

“허나 총애를 독차지 하고 있는 마마를 달랠 필요는 있겠지.”


시끄러워지는 걸 원하지 않을 테니.


내 말에 미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여름과 가을에만 여는 외궁의 장미정원으로 후비가 몸을 옮겼다고 말했다. 


“후비마마가 속이 조금 나아지셨겠군.”

“네. 일단은요.”


외궁은 황실에 포함되어 있긴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황궁 밖에 위치한 곳이었다. 다만 안으로 들어서는 단일다리가 있었고, 그 주변으로는 계절마다 사람을 불러 인공정원을 만들었다.


황실의 부유함을 증명하면서도, 한편으로 외부침입을 꾀할수도 있는 곳인데 권력의 막강함과 담대함을 과시하고자하는 속내가 있었다.


거기다 외궁의 목적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현 황제는 내분을 잠식하기위해 귀족들을 솎아내는 작업을 그치지않았고, 이를 위해 수시로 귀족들의 만찬을 조장했다.


거기다 수도와 먼 지방에 적을 둔 귀족들이 임시로 머무를 수 있는 거처까지 외궁 내에 만든 터라, 귀족들은 어지간하면 수도로 올라와 황제와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베라드의 경우는 조금 달랐지만.


“입궁까진 아니라 해도 예의주시할 필요는 있겠구나. 비마마께서 발라크와 연이 있었나?”

“공식적으로 관계가 있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부분은 있어요.”

“말해보거라.”

“리아세르 후비마마가 변방 포르트 남작의 장녀라는 것은 이미 귀족들 모두가 알고 있는 내용이죠.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출신 말고 그 분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정확한 정보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나오는 건 뜨내기 소문들, 혹은 구두로 전해지는 말들이고 대부분이 호평에 가까운데, 이상한 것은 포르트 영지 내에서는 이런 리아세르 후비마마에 대해서 언동을 자제한다는 겁니다.”

“그거야 후비마마를 음해할 구실을 없게 할 셈이겠지. 귀족들은 낮은 신분에서 나온 비를 우대할 수가 없다. 그 알량한 자존심이란 게 허락하지 않은 고귀한 이들이니 말이다.”

“그 말씀도 일리는 있으세요. 하지만, 그래도 털어도 먼지 하나 안 나온다는 건 다분히 인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인님. 보통 그런 사람들은 정보를 감추는 게 아니거든요.”


아예 없는 거지. 

미야의 자조 섞인 웃음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가 떼었다.


“의심이 가는 모양이구나. 후비마마의 출생에. 허나 만일 그렇다고 해도 거기에 큰 생각을 하진 말거라.”

“폐하께서 이미 알고 계실 테니까요?”

“그러실 테지만, 혹여 알지 못하신다 해도 개의치 않으실 것이다.”


어차피 후비마마께서는 그 자리가 세력이 붙을 수 없는 허공이니까.

그 말에 미야는 내키지 않으나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화제를 돌려 본래의 목적으로 되돌아갔다.


“대충 보아하니 어디 한쪽으로 화제가 치우쳐질만하진 않구나.”


그건 사교계가 큰 분란 없이 온화하다는 것을 뜻했다. 혹은 폭풍전야처럼 어딘가 터지기 직전의 고요함이거나. 허나 어느 쪽이던 흐름을 타면 금방 불이 붙을 것이 빤하고, 그렇게 붙은 불은 쉬이 꺼지지 않을 것이다.


“무슨 계획이라도 있으신가요, 주인님?”

“그들과 내가 원하는 것이 이제 일치할 때가 되었구나. 사교계에 내가 ‘석녀’라는 걸 퍼뜨려다오. 미야.”


그 말에 미야의 안색이 보기도 안타까울 만큼 하얗게 질렸다.  




*




미야는 울음을 터뜨리다 못해 분통을 내며 주변 가구들을 던질 것처럼 들었다가 내렸다. 어찌나 안쓰러운지 보는 내 마음이 다 헛헛해져서 어찌어찌 달래긴 했으나, 미야는 쉬이 안정을 찾지 못했다.


나중엔 히끅거리면서 꼭 그래야 하는 것이냐 간절히 날 보았다.


허나 나는 그런 그녀에게 내뱉은 말을 철회하진 못했다.


공작부인으로서 그럴싸하게 자리를 지켜온 나였다. 허나 그런 내가 이제와 이혼을 한다고 하면 과연 공작이 나를 놔줄까? 처음엔 이혼하자 말을 내뱉는 게 더 쉬울 것 같았지만, 나는 왕자가 내게 전해준 것을 비롯해 고의적으로 내게 베라드의 정보를 차단한 것을 떠올렸다.


내가 베라드의 일을 알았다면 더 말할 것도 없이 이혼을 언급하고 당장 돌아갔을 걸 알았을 터, 그걸 막는 다는 건 결국 날 내보낼 의사가 없다는 걸로 봐야했다.


그런 그가 이혼에 동의하지 않을 것임은 자명한 일.


나는 날 막다른 곳을 밀어 넣었던 공작에게 잠깐이나마 나와 비슷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라도 이 소문이 필요했다. 때문에 미야를 달래주지도 않고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다.


“오셨습니까, 마님.”


저택으로 들어서니 내가 말했던 것처럼 안드레드는 본인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고, 대신 미레일이 날 맞이했다. 미레일은 근 일주일의 고초가 효과를 발휘한 모양인지 퍽 고분고분한 태세였다. 물론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한 함을 나는 물론, 미레일 자신도 잘 알 것이다. 하지만 그걸 짚어낼 생각은 없었다.


나는 하녀들 대신 미레일이 직접 옷을 갈아입혀주는 것에 평상시처럼 얌전히 수발을 받았다. 그리곤 가볍게 세안한 뒤, 대기하던 하녀에게 차를 내오라 시켰다. 


하녀가 나서자마자 미레일이 내게 다가와 바짝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곤 말했다.


“마님, 황실에서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가지고 오거라.”


그 말에 미레일이 빠르게 물러나더니 곧 은색 원형 트레이 위에 붉은 쿠션을 깔곤, 그 위로 금줄로 엮은 편지 하나를 내밀었다. 금줄을 풀자 황실의 문양이 박힌 인장이 보이고, 그것을 페이퍼나이프로 갈라내자 은은한 향의 편지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그것을 천천히 읽어 내리다가 미간을 슬쩍 좁혔다.


때 마침 차를 가지고 온 하녀가 내 눈치를 보더니 차를 내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섰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손짓해 아예 차를 물리곤 미레일에게 까딱였다.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마님?”

“집사를 불러오고, 미레일 너는 채비를 해야겠다.”

“채비요?”

“그래. 수도로 가야겠다. 폐하께서 찾으시는 구나.”


그 말에 미레일은 물론 하녀 모두가 동그랗게 눈을 홉떴다. 무리도 아니었다. 시집을 오고 난 뒤, 황실 문안인사를 드릴 때 빼곤 황제는 공작내외를 따로 부르지 않았다. 공작이 시시때때로 정무회의를 위해서 참석하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사실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황제는 내분을 정리하고 난 뒤엔 공작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공작이 필수적으로 필요하나, 그렇다 해서 의존을 한다면 공작의 위치가 황실보다 올라가게 된다. 특히 이 제국은 온갖 고위급 마법을 구사하는 마법사가 있음에도, 검사로서 최고에 다다른 공작 탓에 마탑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차라리 마탑이라도 세워진다면 마법사 세력과 공작의 세력, 그리고 황실. 이렇게 세분화라도 시키겠는데 실상은 황실과 공작파, 그리고 그 외 귀족파로 나누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공작파가 황실에 충성하고 있다는 것 정도.


허나 모든 권력이 유지되기엔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권력은 어디 한 곳에 모일 순 없는 노릇이었다. 몇 십 년이 흘러 이 공작가문의 후계자인 파바엘이 가주가 되었을 때도 황실에 충성할 수 있을까?


“먼저 수도로 올라가시려고요, 마님?”


미레일이 염려스러운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누군가 본다면 공작부인의 신상을 걱정해 하는 것처럼 여기겠지만, 실상은 달랐다. 수도로 올라가게 되면 나뿐만 아니라 사용인들도 몇은 데리고 가야한다. 거기에 대부분 함께하는 것은 사용인 중에서도 높은 위치에 놓인 이들.


그래, 미레일 같은 이들 말이다.


내가 자리를 비운 틈에 이리저리 발을 놀려대야 한다고 여기는 미레일에게, 혹여 내가 같이 올라가자 한다면 그녀는 여러 고민에 휩싸일 것이다. 이 가렌사령의 저택과 다르게 수도의 저택은 그녀의 입김이 없었으며, 황실과 연이 닿은 이들이 사용인으로 두 셋 정도는 들어가 있었다. 거기서 작정하고 나를 핍박할 순 없을 터. 


반면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공작가의 안주인으로서 휘두를 수 있으니 여러모로 미레일에겐 썩 즐겁지 않을 것이다.


“데려갈 하녀는 둘이면 된다. 이목을 끌 일도 아니거니와, 나 혼자 올라가야하는 데 부산스러워서야 되겠나.”

“그, 렇지요. 그럼, 제가 쓸 만한 아이 둘을 모으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곤 모레쯤 출발할 테니 준비하라고 했다. 그리고 수도로 먼저 올라가겠다며, 전서를 써 원정 중일 공작에게 전달했다. 공작의 답변을 받을 땐 이미 수도로 향해있을 터라서, 돌아올 땐 수도 쪽으로 직접 오시길 권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수도의 귀족들에게 공작의 건재함과 충정을 과시할 수 있을 터. 그리고 동시에 공작에게 포커스가 맞춰지면서 잠잠한 사교계에 말들이 나올 것이다.


그 때 미야가 흐름을 맞춰 내 신상에 대해 흘린다면-,


“내 평판이 내려가겠지만 오히려 불운으로 동정을 사긴 괜찮겠군.”


어차피 후계자가 명확한 가운데, 석녀라도 드러난다 해도 공작가에 피해가 갈 일은 없다. 그저 안주인인 내 처지에 대해서 말들이 오고나올 뿐. 


허나 황제께서도 이를 나무라진 않으실 것이다.


애초에 공작부부를 초대한 이유가 남들 눈을 조금이라도 와해시켜보고자 하시는 걸 테니까.


“하지만 대체 무엇 때문일까?”


나는 황실의 초대장을 다시금 찬찬히 훑었다.


“이제와 제국에 국교를 들이시려는 이유가.”


글쓰는 사람 @firemoth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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