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중에 늦게 들어오는 놈 각오해라."



기합받다 게거품 물기 좋은 날이네. 상익이 청량한 하늘을 한번 올려보더니 느긋한 목소리로 듣는 사람이 식겁할 만한 말을 했다. 사무실에서 가지고 나온 낚시의자를 사무실 정면에 갖다 놓고 앉았다. 오늘 날 한번 제대로 잡아보자. 오리걸음으로 사무실 세바퀴를 돌고 오는데 선착순. 옷이라도 좀 갈아입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상익이 허락할 리 없었다. 긴 팔 흰 와이셔츠에 정장바지를 입은 새봄과 동하가 나란히 사무실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귀잡아. 상익의 명령에 둘이 동시에 귀를 잡았다. 동하가 앞을 똑바로 보면서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했다. 내가 지금 아웃코스니까 무조건 초반 러쉬해서 인코스로 들어가야 돼. 옆의 새봄을 곁눈질했다. 내가 그래도 이 새끼보다 체력은 좋으니까 두 바퀴까지만 앞서면 이길 수 있을 거 같은데. 



"출발."



휘슬 대신 하늘 같은 선배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하가 시물레이션대로 미친 듯이 발을 놀렸다. 그러나 이겨야 하는 건 새봄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동시에 코너를 돌았으나, 아무래도 아웃코스인 동하가 자리싸움에서 밀려서 한발 뒤처졌다. 기를 쓰고 따라붙어도 한 바퀴를 다 돌 동안 차이가 좁혀지지 않았다. 한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 등이 몹시 얄미웠다. 다시 한번 코너를 돌아 상익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동하가 앞서가는 새봄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야. 너무한 거 아니냐, 씨발. 지금 누구 때문에 이러고 있는데."




새봄이 멈칫했다. 발을 내딛는 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 새끼지, 니가. 양보를 강요한 동하는 주저 없이 새봄을 앞질러 갔다. 두 걸음 정도의 보폭을 사이에 두고 동하가 세바퀴를 먼저 돌았다. 상익 앞에 서서 뒷짐을 지고 숨을 고르고 있자 곧 새봄이 도착해 옆에 섰다. 미안하지는 않았다. 승부는 정직하지 못했지만, 애초부터 동하는 죄가 없었으므로.



"오, 문동하. 1승."



1승이라니? 단판승부가 아니었던가. 놀라서 입술만 달싹이고 있는데, 팔짱을 낀 상익이 꼬고 있던 다리 한쪽을 까딱해 사무실을 가리켰다.



"몰랐어? 5판 3승제야. 뭐해. 가, 빨리."



동하와 새봄이 다시 출발지점이었던 사무실 문 앞까지 뛰었다. 3판 2승제도 아니고 5판 3승제? 그렇다면 앞으로 열두 바퀴가 남았다. 지금도 숨차고, 허벅지 터질 거 같은데. 출발.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귀를 잡고 앞으로 다리를 옮겼다. 





오늘 이 지랄 난 건 새봄 때문이었다. 오전에 상익선배 따라서 필드 나가기로 되어있었는데 늦잠을 자다 늦게 나왔단다. 상익이 다섯 번 넘게 건 전화는 새봄이 자느라 죄다 불통이었다. 하필 혼자 나갈 수 없는 필드여서 곤란해하다, 다행히 기현선배가 오전 일정이 없어서 대신 나갔단다. 정신 차리고 허겁지겁 뛰쳐나온 권새봄은 상익선배 복귀할 때까지 사무실 대기. 문제는 동하까지 셋트였다는 데에 있었다. 어제 당번이어서 사무실에서 밤을 새웠다가 간신히 잠들었는데, 세시간도 못 자고 새봄의 부름에 깼다. 운동화야, 미안. 오늘 나땜에 개털릴 거 같아. 미리 사과할게. 



사과를 미리 한다고 고통이 덜 해지냐. 밤샌 건 난데 왜 니가 늦잠을 자냐고. 동하가 오만상을 지푸리며 일어나 천천히 라꾸라꾸를 접었다. 새봄은 깨워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다며 혼잣말처럼 변명을 중얼댔다. 나이가 몇 갠데, 누군 깨워줘서 일어나냐. 그렇다고 마냥 화를 낼 수도 없는 게 요전번에는 저 때문에 같이 털렸었기 때문이다. 선 선배한테 몇 대를 맞았던가. 그때 맞은 자국이 아직 사라지지 않고, 착석 시마다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잘못한 놈만 조지면 좋을 텐데 선배들은 동기라는 이유, 그 하나만으로 꼭 둘을 함께 불렀다. 연좌제도 사라진 마당에 피 한방울 안 섞인 남이랑 책임과 처벌을 공유해야 한다니. 세상에 이런 부당한 법이 어디있나. 하지만 어떤 악법이라도 군소리 없이 따라야한다. 저와 새봄은 현재 추1의 피라미드, 제일 아래에 있으니까. 한마디로 까라면 까야 하는 노예, 그 자체라는 말이다. 두 바퀴를 막 돌았을 때, 이번엔 새봄이 속삭였다. 이번엔 내가 먼저 들어갈게. 둘이 비슷하게 이겨야 덜 털릴 거 같아. 일리 있는 말이라 이번에는 동하가 속도를 줄였다.




"니들 열심히 안 하는 거 같은데."




권새봄, 1승. 그 소리를 코너를 막 돌며 들었다. 저 새끼는 비등하게 가자면서 전속력을 내면 어쩌잔 건데. 일부러 나 엿먹이려고 저러나. 동하가 비틀거리며 간신히 새봄 옆에 서자 상익이 꼬고 있는 발을 까딱이며 빈정거렸다. 왜 그러지? 설렁설렁 바퀴 수만 채우면 끝내줄지 알고? 오늘 날 잡자고 한 게 그냥 하는 소린 줄 알고 그러냐? 상익의 목소리 톤이 미묘하게 변해있었다. 아닙니다. 그렇게 합창은 했지만 곧 좆됌이 플러스 될 거라는 걸 직감했다. 상대는 추1 7년 차. 상익은 막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계획이 있는지 훤히 꿰뚫고 있었다. 다리 사이로 팔 넣고 귀 잡아. 군기가 바짝 든 동하와 새봄이 다시 뛰어가서 상익이 시키는 자세를 취했다. 거의 묘기에 가까운 자세였다. 누가 세 판 먼저 이겨도 다섯 판 다 할 거야. 기어코 열다섯 번을 채울 거라는 말이었다. 이러고 남은 아홉 바퀴를 어떻게 돌아. 




"안 맞으니까 장난 같지? 걱정마. 이거 끝나면 때릴 거야. 돌아."




땅에서 발을 떼긴 했지만 한 걸음 전진도 쉽지가 않다. 그 와중에도 새봄이 조금 앞서 나갔다. 이제는 죄책감에 기댄 승부 조작도 어려워졌다. 둘 다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벌을 받지 않으면 이다음엔 더 큰 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사무실 뒤편으로 도는데 차가 한 대 들어왔다. 잠시 후, 차 문 닫는 소리와 함께 지온이 상익에게 인사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선배님, 날도 더운데 밖에서 뭐 하고 계십니까. 어, 지온. 막내들이 잠이 좀 많길래 잠 좀 깨워주고 있었어. 그 와중에 동하는 억울했다. 권새봄 혼자 늦은 건데 왜 막내'들'이야. 코너를 두 번 더 도니 상익 옆에 서 있는 지온의 모습이 보였다. 오, 저런 자세는 또 처음 봅니다. 요가 같은데요. 신기해? 너도 해볼래? 아니요, 괜찮습니다. 지온이 도망치듯 뛰어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 사이 드디어 체력이 방전됐는지 앞서 가던 새봄을 동하가 따라잡았다. 그래도 내가 지구력 하나는 권새봄보다 나으니까. 이제 이번 판 마지막 바퀴다. 동하가 귀가 빨개지도록 손에 힘을 주고 오리걸음을 걸었다. 조금만 더 가면 잠깐 쉴 수 있다. 동하가 상익 앞에 다시 섰을 때, 지온이 사무실에서 이온 음료 캔 세 개를 들고 나왔다. 얼굴이 빨갛다 못해 검어져 숨을 몰아쉬고 있는 동하를 힐끗 보고, 상익에게 캔 하나를 건넸다. 




"선배님, 필드 갔다 오셔서 피곤하실 텐데 들어가서 좀 쉬십시오. 제가 감시하겠습니다."

"왜. 얘들 봐주려고?"

"어휴, 저를 뭘로 보시고. 저 그렇게 인정머리 있는 놈 아닙니다."




상익이 캔을 따 몇 모금 마셨다. 마침 더워서 막 짜증이 나려던 참이었고, 지온의 재롱이 마음에 들었다. 안에 에어컨 틀어놨습니다, 선배님. 그 말까지 들으니 안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알면서도 속아주게 만드는 강지온. 막내놈들 어느 세월에 강지온만큼 키우나. 상익이 남은 음료를 한입에 다 마시고 빈캔을 지온에게 건넸다. 우리 지온이, 인정머리 없는 거 믿는다. 상익이 지온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두드리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새봄이 마지막 바퀴를 다 돌고 동하 옆에 서자, 지온이 가져온 캔을 둘에게 나눠주었다. 마셔. 감사합니다. 둘이 땀을 뚝뚝 떨어뜨리며 두 손으로 캔을 받아 꿀꺽꿀꺽 마셨다. 달고 시원하고 맛있었다. 잠깐이나마 살 것 같았다.




"상익선배 많이 빡치셨는데? 뺑기쳤냐?"

"아, 아닙니다."

"아니긴, 새끼들. 선배 우습게 보지 마라. 니들 눈만 봐도 뺑긴지 아닌지 다 안다."




지온은 사무실 쪽을 눈치를 보며 둘이 이온 음료를 다 마실 때까지 재촉 않고 기다려주었다. 동하가 마지막 한방울까지 탈탈 털어 넣자 지온이 손을 내밀어 빈 캔을 수거했다. 뛰어가, 똑바로 안하면 뒤진다. 상익 들으라는 듯이 크게 외친 지온이 새봄의 엉덩이를 가볍게 쳤다. 니들 구세주 불렀으니까 그때까지 열심히 해. 알겠어? 




예, 알겠습니다. 크게 대답한 동하와 새봄이 다시 사무실 벽에 딱 붙어 상익이 지정해 준 자세로 오리걸음을 돌았다. 지온은 추파춥스를 입에 물고 낚시의자에 앉아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부럽다. 동하는 지온의 여유도 부러웠고, 지온의 처세도 부러웠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될 수 있을까. 그때까지 내가 여기서 버틸 수 있을까. 사무실 벽에서 낚시의자까지의 거리는 불과 열 걸음 정도. 그러나 걸리는 시간은 무려 3년이 넘는다. 동하가 다시 앞으로 머리를 돌렸다. 속도는 좀처럼 나지 않았고, 몸의 균형이 앞으로 쏠려 몇 번이나 꼬꾸라질 뻔했다. 정장 입고 이게 뭐하는 짓이냐. 현타는 잠시 스쳐 갈 뿐 오래 머물지 못했다. 벌이긴 했지만 어쨌든 이겨야 한다. 여기서 더 맞으면 한동안 엎드려 자야 하니까. 옆에서 나란히 돌고 있는 동기를 곁눈질하자, 새봄도 이를 악물고 있었다. 지온이 준 이온음료가 없었다면 벌써 쓰러졌을 것이다. 이제는 그것마저도 약발이 떨어졌는지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고 시야가 점점 뿌옇게 변했다. 그때 차 한 대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선배님."

"어, 신도. 왔어? 애들 저깄다."




타닥타닥. 급한 발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 도은이 나타났다. 둘이 엉성한 자세로 도은을 올려다봤다. 휴, 하는 한숨 소리와 함께 도은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무실로 들어가는 거 같았다. 마지막 반바퀴. 이온음료가 포션이라도 됐는지, 체력을 회복한 새봄이 동하를 앞질러 갔다. 하트게이지가 빨리 닳고 빨리 차는 스타일인가보다. 반면 동하는 아까 발목을 살짝 삐끗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통증이 심해졌다. 안되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3판2승제만 됐어도 내가 이기는 건데. 마지막 코너를 돌기 직전, 새봄이 퍼뜩 정신이 든 것처럼 갑자기 멈춰서 몸을 돌렀다. 너 먼저 빨리 가. 행여 지온에게 들릴까 봐 한껏 낮춘 음량이었다. 새봄이 왜 그러는지 알면서도 동하는 순간 자존심이 상했다. 됐어, 그냥 가. 새봄은 움직이지 않았다. 늦게 들어가면 너 좆 돼. 동하가 입꼬리를 한쪽만 올렸다. 이미 좆된 지 오래야. 추1에 들어왔을 때부터 좆됐어. 그때 사탕을 문 지온이 새봄의 뒤에서 나타났다. 뭐하냐, 니들? 지온이 한심하다는 듯이 둘을 봤다. 기합받다가도 싸우냐? 이 화상들아. 니들 땜에 맨날 털리는 신도가 불쌍하지도 않냐. 죄송합니다! 둘이 다시 귀를 잡고 오리걸음을 걸었다. 지온이 주머니에 손을 꽂고 옆에서 천천히 걸으며 갈구기 시작했다. 어쭈, 관광왔지? 경치 구경하냐. 빨리빨리 안 가? 결국 새봄이 먼저 골인했다. 5판 2승 3패. 사무실 쪽을 향해 새봄과 나란히 서서 고개를 숙이고 숨을 헐떡였다. 오늘은 또 얼마나 처맞을까. 그때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고 상익이 고개를 내밀었다. 다 돌았어? 지온이 대답했다. 아, 넵. 방금 다 돌았습니다. 들어와. 상익이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가자 지온이 둘의 허리춤을 당기며 가까이 오게 한 후 속삭였다. 한대라도 덜 맞으려면 싹싹 빌어라. 그러나 그럴 수 없었던 이유는, 사무실을 들어가 보니 상익 앞에 도은이 머리를 박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익이 들고 있던 각목 끝으로 지온을 가리켰다.




"하여튼 이게 다 강지온 너 때문 아냐."

"엥? 저 말입니까?"

"신도은이 막내들 대신 맞겠다는데 이 짓을 누구한테 배웠겠어." 

"어...서로 안 맞겠다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나만 나쁜 놈인 거 같잖냐."




지온이 뒤에서 동하의 등에 손바닥을 대고 작게 속삭였다. 얼른 신도 옆에 가서 박아. 새봄과 동하가 동시에 뛰어가 도은의 옆에 머리를 박았다. 도은의 숨소리가 왼쪽 귓가에 들린다. 나 땀 많이 흘렸는데. 동하는 도은이 제 땀 냄새를 맡을까 봐 걱정이 됐다. 도은이, 엎드려. 도은이 뒷짐 진 손을 풀고 바닥에 손을 짚었다. 




"연수 끝난 지가 언젠데, 막내들 계속 정신 못 차릴래?"




퍼어억. 파워가 심상치 않다. 동하는 걱정스러운 표정의 지온의 얼굴을 거꾸로 보고 있었다. 상익이 도은을 한 대치고 각목을 엉덩이에 슥슥 문질렀다. 




"어제 사무실 청소 누가 했어."

"제가, 제가 했습니다."





동하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자마자, 또 퍼억 하는 파열음이 들렸다. 둘. 도은이 담담하게 숫자를 세었다. 



"청소도 개판. 보고서도 개판. 근태도 개판."



도은이 좀 보고 배워라. 퍼어어억. 상익은 보고 배우라며, 보고 배울 사람의 엉덩이를 사정없이 가격했다. 셋. 방금 것이 마지막 한 대였는지 각목을 땅에 던졌다. 한쪽에 가만히 서 있던 지온이 상익의 마음이 변할까 얼른 각목을 주워 등 뒤로 숨겼다. 




"내가 오늘 니들 죽일라 그랬는데 도은이봐서 이렇게 넘어가는 거야. 봐줄 때 잘해라. 초상나고 후회하지 말고."

"예, 알겠습니다."

"앞으로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둘이 같이 청소하고, 야간대기 서. 니들은 한 사람 몫 하려면 한참 멀었어."



진짜 좆됐다. 그나마 청소도, 야간대기도 새봄과 번갈아 하면서 했던 덕분에 지금까지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는데. 아까 접지른 발목이 시큰거렸다. 상익이 바지 뒷주머니에 있던 지갑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지온과 눈만 한번 마주치고, 아무런 말 없이 사무실을 나갔다. 지온이 도은을 일으키고 머리 박느라 생긴 눌린 머리카락을 매만져줬다. 신도, 밥 먹었어? 도은이 손목시계를 봤다. 안 먹었는데 지금 바로 필드 나가야 될 거 같습니다. 어, 나도. 지온이 상익이 두고 간 카드를 집었다. 



"상익선배가 카드 주셨으니까 둘이 나가서 사먹든, 시켜먹든 하고."



잘 좀 하자. 지온이 동하의 옆에 쪼그려 앉아 동하의 바지주머니에 카드를 넣으며 말했다. 십 분만 더 있다가 일어나. 둘의 대답을 들은 지온과 도은이 사무실을 나갔다. 잠시 후 차 두 대가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정적이 찾아왔다. 매트도 아닌 시멘트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지만 아픈 것도 몰랐다. 동하는 우울했다. 청소도, 보고서도 다 저를 향한 비난이었다. 누구 때문에 이러고 있냐고, 아까 새봄을 힐난했던 게 부끄러워졌다. 새봄의 지각은 방아쇠를 당겼을 뿐, 총알을 채워 넣은 건 자신이었다. 무엇보다 도은이 혼내는 말이건, 위로의 말이건, 단 한마디도 없이 그렇게 가버린 게 속이 상했다. 도은선배도 이제 지쳤겠지. 나였다면 벌써 나가떨어졌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서운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야. 미안하다."




어깨가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머리를 박고 있는 새봄이, 신음처럼 사과를 뱉었다. 뭐가. 뭔 말을 하는지 알면서 동하는 일부러 퉁명하게 받았다. 



"지각한 거 미안하다고."

"됐어. 나도 청소로 털렸는데, 뭐."

"그래도. 나 아니었으면 오늘 평범하게 지나갔을지도 모르는데."





평범한 날이란 게 대체 뭘까. 한 대도 맞지 않고, 한번도 대가리 안 박고, 누구에게도 지적받지 않는 날. 연수기간은 그렇다 치고, 시계를 받은 그다음 날부터 단 하루도 둘에게 '평범한' 날은 오지 않았다. 




"...야. 우리...흡, 십분 지나지........않았냐?"

"...몰라. 안 쟀어?"

"나도 지금 대가리 박고 있거든?"

"지난 거 같긴 한데. 괜히 빨리 일어났다가 나중에 들키면."

"들키면 뒤지겠지."

  



새봄이 팔을 풀고 시계 찬 손을 눈에 가져다 대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 15분이니까 20분까지만 박았다가 일어나자."

"그러던가."




다시 조용해진 사무실. 간간히 새봄의 한숨소리만 들린다. 야, 운동화. 들어봐. 내가 어제 분명히 알람을 맞추고 잤거든? 그럼 6시가 됐으면 울려야 되는 거잖아. 근데 안 울렸다니까. 이게 말이 되냐고. 이건 핸드폰이 주인인 나를 우습게 보고 배신한 거야. 안 그러냐? 야, 어떻게 생각해. 정말 한숨을 쉬어야 하는 건 동하였다. 이 새끼하고 나하고는 대체 무슨 악연이길래, 이 좋은 날 사무실에 처박혀서 사이좋게 대가리를 박고 있을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20분 됐어, 안 됐어? 새봄이 다시 팔을 풀었다. 어, 지났다. 22분. 일어나자. 동하와 새봄이 자세를 풀고 일어났다. 피가 쏠려 뻘게진 새봄의 얼굴. 아마 지금 내 얼굴도 저렇겠지. 새봄이 캐비닛에 가서 수건 두 개를 꺼낸다. 야, 땀 닦어. 동하가 새봄이 던진 수건을 받았다. 새봄이 수건으로 머리를 비벼 말리니 곧 말쑥한 얼굴로 돌아왔다. 동하가 무심코 새봄의 얼굴을 뚫어지게 봤다. 다시 봐도 참 예쁘장하게 생겼다. 투박하고 선이 굵은 저하고는 완전히 딴판이다. 저러니 안 속아? 순전히 내 잘못이라고만 할 수 있냐고. 그때 그 과거를 회상할 때면 으레 그렇듯, 어제 일처럼 다시금 선필에 대한 분노가 새삼스레 샘솟았다. 고선필, 그 개새끼. 지금 내가 권새봄이랑 같은 회사, 같은 팀에 있다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선필은 중학교 동창이었다. 성격도, 관심사도, 진학한 고등학교도 달랐지만 대학 가서까지 이따금씩 만났던 건 순전히 집이 가까워서였다. 동하는 102동 1304호, 선필은 103동 1304호. 아파트를 날림으로 지었는지 동간 간격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스케치북에 글씨를 써서 필담도 가능한 거리였다. 근접주거지가 주는 편리함 때문에 반강제적인 친분이 생겼고, 그다음엔 딱히 멀어질 이유도 없어서 가깝게 지냈다. 대학교 2학년 9월 말쯤이었다. 중간고사가 끝나 밤늦게까지 빈둥대던 동하가 앞 동 친구 방에 드디어 불이 켜진 걸 발견하고 새벽 세 시에 그의 방을 찾았다. 태생이 인싸였던 선필은 대학교 총학생회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날도 학생회 일 때문에 이 시간에 들어왔단다. 그딴 귀찮은 걸 왜 하냐? 씻고 온 선필이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대꾸했다. 너 같은 아싸들은 모르는 리더들만의 세상이 있단다. 어, 그래. 대통령까지 해 먹어라. 동하가 이죽였다. 축제 땜에 그래. 딴 때는 이렇게 안 바빠. 니네 학교는 축제 언제냐? 수업만 끝나면 집으로 달려오는 문동하가 학교 축제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었다. 몰라? 벌써 했나? 그거 몇월에 하지? 선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 솔직히 지금 니네 과에 친구 몇 명있냐? 남의 침대에 허락 없이 누워있던 동하가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나 친구 있어. 밥 같이 먹는 친구. 선필이 비웃었다. 한 명? 동하가 다시 드러누웠다. 어. 쯧쯧쯧. 혀를 차던 선필이 책상의자에 앉아 동하쪽으로 몸을 빙글 돌렸다. 




"야, 너 여친 소개 받아볼래?"

"여친?"

"너 여자 한번도 못 만나봤지?"



동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딩 때 한번 사겨봤다고 구라를 쳐볼까 고민하다 그만뒀다. 상상력에 자신 없는 공대생은 가상의 여친을 설명할 재간이 없었다. 못 만난 게 아니라 안 만난 거야. 결국 그 항변도 선필의 비웃음을 샀지만. 선필이 휴대폰 갤러리에 있는 폴더 하나를 열고 동하에게 다가갔다.





"내가 진짜 이런 거 절대 안 하기로 유명한데 우리 아싸 인생이 불쌍해서 봐준다. 골라봐."

"야. 됐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러면서도 동하의 눈은 벌써 선필의 휴대폰 액정화면에 가 있었다. 니가 또 겉보기엔 멀쩡하잖냐. 성격이 등신이라 그렇지. 그런 모욕도 참아넘길 수 있을 만큼 그의 갤러리는 빛이 났다. 한 명만 골라라, 욕심 부리지 말고. 알았어, 새끼야. 조용히 좀 해봐. 한참을 사진에 열중하던 동하가 마침내 한 여자를 짚었다.




"진짜 소개 시켜줄거냐? 구라 아니지?"

"못 믿겠으면 지금이라도 니네 집 가시고."

"아니, 고맙다고. 그럼 난 이... 분."

"얘? 오~ 문동하. 모쏠 주제에 보는 눈이 꽤 높으셔? 얘가 이번 축제 퀸이었는데."

"어? 그래?....그럼 남친 있는 거... 아냐?"



선필이 씨익 웃었다. 남친은 없어, 그건 걱정 마. 불길한 웃음도 못 알아챌 만큼 동하는 사진 속 여자에 푹 빠져있었다. 너랑 친해? 어, 그럼 친하지. 절친이야. 우와, 이런 절친도 있고 좋겠다. 이런 게 인싸의 삶인가. 동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선필이 부러웠다. 언...제 만나? 어디보자. 선필이 벽에 걸린 달력을 펄럭였다. 이번 달은 좀 바쁘고, 다음 달은 시험 기간이고, 다다음달이 좋겠다.




"다다음주도 아니고, 다다음달?"

"싫음 말고."



선필이 냉정하게 동하의 손에서 휴대폰을 뺏었다. 이 정도 인내심도 없는데 어떻게 미인을 얻겠다고. 넌 모솔탈출 하려면 멀었다, 친구야. 




"그게 아니고....기다리는 건 괜찮은데... 그 사이에 남친 생기면 어떡해."

"그럼 인연이 아닌 거지, 뭐."

"아이씨, 야."

"알았어, 알았어. 내가 남친 안 생기게 잘 감시하고 있을 테니까 넌 그동안 공대생 물 좀 빼라. 옷장에 있는 체크셔츠 좀 다 갖다 버리고."




체크셔츠 버리면 뭐 입고 다니라고? 할 말은 많았지만 하지 않았다. 대신 자존심 다 버리고 이렇게 물었다. 




"나 또 뭐해야 되냐?"




선필이 동하를 머리끝부터 쭈욱 훑었다. 넌 뭐랄까, 약간 덜 긁은 복권이랄까? 와꾸는 또 꽤 봐줄 만 하잖냐. 일단 너는, 살을 좀 빼. 그냥 안 먹고 빼는 거 말고, 헬스라도 해서 근육을 키우라고. 동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십여 년 동안 선필이 얼마나 많은 여자를 꼬셨는지 알고 있는 동하에게, 선필의 조언은 금과옥조일 수밖에 없다. 




"어, 어, 그리고?"

"이발소 말고 미용실 가서 머리를 하는데, 니가 뭘 해달라고 하지 말고 그냥 거기서 해준다는 대로 해."

"알았...는데....혹시 내 머리 구리냐?"

"어, 조오온나 구려."





동하가 제일 자신 있는 건 인내심이었고, 그다음으로 자신 있는 건 노력이었다. 운동을 그만두고 대학에 가기로 결심한 다음부터 수능 날까지, 동하는 누워서 자본 적이 없었다. 하도 앉아 있어서 엉덩이에 진물이 난 것도 여러 번이었다. 전처럼 먹는데 운동은 안 하고, 책상에서 공부만 하니 살이 차곡차곡 쌓였다. 이깟 살, 빼면 되지. 동하는 정말 다음날부터 하루에 세시간씩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밖에서 조깅을 하자니 트라우마가 여전했고, 그렇다고 헬스장에 가자니 남들 앞에서 뛰는 게 부끄러웠다. 엄마를 조르고 졸라 자본금을 기부받고, 집에 헬스기구들을 들여놓아 홈짐을 만들었다. 의지가 약해질 때마다 선필에게 빌고 빌어서 얻어 온 핸드폰 사진을 들여다봤다. 근데 이 분 이름이 뭐냐. 이름? 어... 보미. 보미? 와아, 이름도 이쁘네.





그렇게 보미를 만나기 위해 고군분투한 삼 개월. 동하는 15킬로를 감량하고 식스팩을 만들어냈다. 와, 진짜 문동하, 의지의 한국인이다. 선필이 동하의 팔근육을 눌러보며 감탄했다. 보미씨, 아직 남친 안 생겼지? 어, 그럼그럼. 보미 아직 남친 없어. 내 이야기했어? 소개받는다 그래? 어, 이제 해야지. 자꾸 눈을 피하는 선필이 의심스러우면서도 동하는 마음을 다잡았다. 선필이는 보미씨와 나를 만나게 해줄 좋은 놈이야. 살도 뺐고, 근육도 만들었고, 옷도 괜찮다는 걸로 몇 벌 장만했으니까 이제 보미씨만 만나면 돼. 





-너 내일 시간 되냐. 보미랑 터미널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터미널? 터미널에서 소개팅을 한다고?"

-어. 올 수 있어?

"갈 수는 있는데... 커피숍이나 파스타 가게나 이런 데가 더 좋지 않을까?

-보미가 거기가 좋다 그래서. 싫음 말구.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는데. 싫어도 말수가 없는 동하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예전부터 생각해놓은 코디를 갖춰 입고 머리를 세팅한 다음, 약속장소로 나갔다. 몇 주 만에 만난 선필은, 머리를 짧게 깎은 모습이었다. 꼭 군대 가는 사람처럼.




"뭐냐. 너 무슨 군대가냐?"

"어."

"어?"

"나 군대 가. 오늘."




이게 무슨 소린가. 동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래, 군대야 가겠지. 나도 가야 하니까. 근데 그게 오늘이라고? 선필은 동하의 어깨에 제 팔을 걸치고 속삭였다.

 



"동하야. 내가 부탁이 하나 있어. 우리 십 년 우정을 걸고 꼭 들어줬으면 좋겠어."

"소름 끼치니까 떨어져라. 뭔데."

"어떤 일이 있어도 나 죽이면 안 돼. 살인은 나쁜 짓이야. 너 감빵 가면 너희 어머니 우신다."

"너 뭐 죽을 짓 했냐?"




선필이 입술을 말아 물고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이거 참 어떻게 말해야 할지. 나도 이렇게 될지는 몰랐지. 언제 말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니가 자꾸 헬스기구를 사들이잖냐. 또, 뭐, 운동은 좋은 거니까? 너도 임마, 잘 생각해봐. 몇 달 전에 비해 지금 네 모습. 얼마나 멋있어졌나. 이게 다 내 덕이라고.




"뭔 개소리를 하고 있어. 너 진짜 오늘 군대 가?"

"고선필. 뭐해. 저 버스 타야 돼."




누군가 선필이 매고 있는 가방을 탁, 치고 지나갔다. 어, 그래, 가자. 동하는 뒤통수만 간신히 봤다. 선필이 동하에게서 떨어졌다. 동하야,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나중에 내가 전화로 말해줄게. 지금 말했다간 너한테 피살될 거 같아. 그래도 군대는 가야되잖냐. 지금 안 가면 탈영이야. 멀뚱히 서 있는 동하를 놔두고 선필이 손을 흔들며 멀어지더니 그대로 버스에 올라탔다. 동하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선필이 탄 버스로 뛰어갔다. 버스는 이미 승강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야, 고선필. 뭐냐고. 무슨 이야긴데. 동하가 차에 탄 선필에게 소리를 질렀다. 선필이 반쯤 쳐있던 커튼을 확 걷고 옆자리를 가리켰다. 동하가 선필의 입 모양을 읽었다. 




얘가, 보미야, 보, 미. 







동하는 선필의 부모님을 따라 첫면회에 갔고, 둘만 있는 때를 만들어 옆구리를 수차례 때리며 복수를 했다. 니가, 사람이냐, 이 씹새끼야. 선필은 홀쭉해진 얼굴로 동하에게 사과했다. 미안하다, 나도 니가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보미를 좋아할지는 몰랐지. 앞으로 보미 어쩌고 그딴소리 또 지껄이면 진짜 살인날 줄 알아라. 그렇게 보미를 잊은 줄 알았는데, 그때 버스에서 선필의 옆자리에 탔던 그 남자를 회사 체육대회에서 또 만났다. 날 현혹시킨 미모는 여전하네, 권새봄. 곱상한 외모와는 다르게 성격은 개차반이었다. 도발은 제가 먼저했지만, 그렇게 바로 주먹이 날아올지는 몰랐다. 그 주먹맛이 꽤 매웠던 것도 의외인 점이었다. 추1에서 새봄을 또 만났을 때, 동하는 고선필의 저주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어, 막내들 둘 다 있었네. 잘됐다."



도은과 함께 들어온 사무실에 들어온 선이 커다란 비닐봉투를 거꾸로 뒤집어 테이블 위에 쏟았다. 잘게 잘린 종이뭉텅이들이 테이블을 가득 채우며 산을 이뤘다.




"이게....뭡니까?"




놀란 새봄이 묻자 장비를 정리하던 도은이 대답했다. 오늘 필드에 있던 파쇄기에서 가져온 건데, 순서대로 맞춰서 붙여놓으면 돼. 급한 건 아니니까 짬 날 때마다 해. 무리하지 말고.




"그래, 무리는 안 해도 되는데, 그래도 일주일 안에 해주면 참 좋겠네?"




건질 게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선이 종이 뭉치를 뒤적거리며 은근슬쩍 기한을 정했다. 돈 많은 회사라 그런지 파쇄기 비싼 거 쓰나 보다. 참 잘도 갈았네. 어휴, 이건 뭐 퍼즐 맞추기도 아니고. 잠깐만 봐도 눈이 아픈지 선이 고개를 흔들며 진저리를 쳤다. 





"니네 상익선배님이 당분간 청소랑 야간대기 같이 하라고 하셨다며? 어이구, 동기 있다는 게 얼마나 큰 복인데 그걸 걷어차냐. 2년씩이나 혼자서 막내일 한 도은이도 있는데, 둘이 나눠서 일하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도 모르고. 안 그러냐, 도은아?"




동기 있다는 게 얼마나 큰 복이냐니. 선 선배는 동기 있어 본 적 없으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지. 동하가 속으로 선에게 말대답을 했다. 아닙니다, 선배님. 도은은 아직도 막내들보다 더 각 잡혀 있었다. 둘이라서 더 힘든 것도 있을 겁니다. 동하과 도은이 눈이 마주쳤다. 면목 없다는 말을 이런 때 쓰는 거구나. 이 와중에도 후배들을 감싸는 도은에게 정말 면목이 없었다. 열심히 해. 청소도 빈틈없이 잘하고, 야간대기도 성실하게 하면 상익선배가 곧 풀어주실 거야. 예, 알겠습니다, 선배님. 새봄과 동하가 도은에게 크게 대답했다. 





그렇게 둘이 매일 같이 사무실에서 밤을 샜다. 물론 쌩으로 꼴딱 샌 건 아니고. 불침번 서듯이 세시간씩 번갈아가면서 라꾸라꾸에서 잤다. 새봄은 이상하게 알람 소리는 잘 못 듣고, 사람 목소리를 잘 들었다. 삼분씩 반복해서 울리는 알람이 열번 넘게 울려도 못 일어나면서, 동하가 권새봄 일어나 한마디만 하면 벌떡 일어났다. 잠귀가 밝은지 어두운지 전혀 알 수 없는 인간이었다. 반면 동하는 원래 잠이 별로 없는 편이었다. 밤이 깊어 질수록 정신이 더 말똥말똥해졌다. 그 부작용으로 낮에는 반쯤 가수면 상태가 지속되었다. 생활리듬이 엉망진창이 되니 신경이 점점 예민해졌다. 상익선배가 곧 풀어주시겠지. 그럼 이틀 중 하루라도 제대로 잘 수 있겠지. 그 기대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새봄에 대해 알게 된 것이 많아졌다. 새봄은 잘 못 일어나는 것만 빼면 단점이 거의 없었다. 뭐든 여러 번 반복해서 해야 적응이 되는 저와 달리, 새봄은 처음 해보는 일에도 금방 요령이 붙었다. 집중력과 몰입도가 좋은 것 같았다. 동하가 더듬더듬 설명서를 읽고 있는 동안, 새봄은 이미 조립은 물론이고 해체까지 마치고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새봄이 저를 한심하게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너 같은 게 어떻게 나랑 같이 여길 들어왔냐. 새봄이 불고 있는 휘파람이 꼭 그런 곡조를 연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실수를 안 하려고 기를 쓰면서 사니, 정신적 압박과 강박이 점점 심해졌다. 권새봄보다 인정받고 싶다. 그게 동하를 지배하고 있는 삶의 목표가 되었다. 





그렇게 동하가 자신을 갉아먹고 있던 어느 날 밤이었다. 맨날 샤워만 하니까 몸이 근질거려서 몸 참겠다. 나 사우나 얼른 갔다 올게. 어차피 동하가 깨어있을 차례여서 다녀오라고 했다. 겨우 자정이 넘은 시간. 밤이 길었다. 동하가 늘 하던 대로 테이블에서 조각난 종이를 붙였다. 지네들끼리 점심내기로 사다리 탄 걸 왜 파쇄기에 갈어. 해도 해도 줄지가 않네. 그러고 있는데 기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 문동하. 권새봄이 전화를 안 받네. 옆에 있어?"

"아.....권새봄 잠깐 씻는다고 사우나 갔습니다. 씻느라고 못 받는 거 같습니다."

"그래?"





기현이 수화기에서 입을 떼고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선배님, 권새봄 지금 사우나 갔다는데 어떡할까요? 예, 예. 알겠습니다.





"시청 근처에 있는 서울사우나 갔지?"

"예, 아마 그럴 겁니다."

"미안한데, 지금 바로 가서 권새봄한테 연락 좀 하라고 전해줘. 이...십분이면 충분하지? 검은색 아반떼 타고 가."

"예, 알겠습니다."





동하가 전화를 끊고 정신없이 키를 챙겨 차를 탔다. 차로 10분 거리. 꾸준히 운전연습을 해서 예전만큼 서툴지는 않다. 그래도 밤운전이라 조금 긴장하긴 했다. 침착하게 천천히. 그래도 도로에 차가 없어서 비교적 수월하게 사우나에 도착했다. 대충 주차를 하고 사우나로 뛰어 들어갔다. 아저씨, 잠깐 사람만 찾을게요. 탈의실에 없는 걸 보니 사우나 안에 있는가 보다. 양말만 벗고 목욕탕 안으로 들어가 수색을 하다, 사우나 안에서 수건으로 얼굴을 반쯤 덮고 자고 있는 새봄을 발견했다. 야, 권새봄, 일어나봐. 어, 어? 운동화. 왜. 밖으로 나와, 빨리.



잠에서 반만 깬 새봄이 비틀거리며 탈의실로 나왔다. 기현선배가 빨리 전화 주래. 나? 왜? 됐고, 땀이나 빨리 닦아. 전화는 내가 걸 테니까. 새봄이 마른 수건으로 땀을 닦는 동안 동하가 기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 권새봄 바꿔드리겠습니다. 휴대폰을 새봄에게 건넸다. 새봄이 넵넵, 만 열댓번 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너 타고 온 차 있지? 그거 내가 좀 쓸게. 지금 바로 필드로 오라시네. 어, 알았어. 동하가 얼결에 주머니 있던 차키를 새봄에게 주었다. 땡큐. 새봄이 키를 받고 서둘러 옷을 입었다. 그리고 사우나를 뛰어나갔다. 




그렇게 혼자 남은 동하는 십오분이 넘도록 택시를 잡다가 결국 실패하고 사무실로 걸어가기로 결심했다. 둥근 달이 떠 있는 논두렁 옆을 터덜터덜 걸으며 생각했다. 왜 내가 아니라 권새봄일까. 새봄이는 운전을 잘하니까. 갑작스러운 필드에도 적응을 잘하니까. 나는......다 못 하니까. 그래서 오늘 내 역할은 고작 그거였던거다. 선배들이 너 찾어. 이 말 한마디를 새봄에게 전해주는 전령사 역할. 한숨과 함께 스스로에게 욕이 나왔다. 아, 씨발 진짜 왜 이러고 사냐,동하야. 






사무실로 돌아온 동하는 잡념을 이기려 종이를 붙이는 데 열중했다. 차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은 건 동이 틀 무렵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어, 그래. 장비를 매고 먼저 사무실에 들어온 기현이 동하의 인사를 받았다. 밥 먹었냐? 예. 동하가 작업을 하던 테이블을 잠깐 훑어보더니 캐비닛으로 가서 장비를 정리했다. 동하가 그대로 서서 곧 들어올 진홍과 새봄을 기다렸다.





"새봄이 운전 진짜 잘하더라. 니 덕에 오늘 안 놓치고 잘 따라갔다."

"아닙니다, 선배님. 선배님이 지시를 잘 해주셔서. 제가 한 거 아무것도 없습니다."

"칭찬은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받으면 돼."

"옙, 감사합니다."





새봄과 이야기를 하느라, 진홍이 동하를 발견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동하, 안 자고 있었네. 저녁은 먹었어? 예, 먹었습니다. 잘했네. 진홍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옆에 있던 새봄에게 건넸다. 새봄이, 내일 동하랑 나가서 맛있는 거 사 먹어. 일 인당 한 끼에 십만 원 이하로 긁으면 혼난다. 옙, 선배님. 새봄이 싱글벙글해져서 동하 곁으로 왔다. 





"와, 벌써 이만큼 했어? 대단하다."

".................."

"줘봐. 여기서부터는 내가 할께."

"됐어. 너 필드 갔다 와서 피곤할 텐데 쉬어."

"나 아직 쌩생해. 야, 니가 쉬어야겠다. 니 눈 겁나 빨개."

"됐다고. 내가 하면 돼."

"니가 반절했으니까 이제 내가 반절해야지."

"괜찮다니까."

"나와봐. 내가 또 이런 건 기가 막히게,"

"아, 씨발. 됐다니까. 사람 말 못 알아들어? 나는 운전 못 하니까 이딴 거라도 해야 될 거 아냐. 왜 이것도 못하게 지랄인데. 가라고. 내가 다 할 테니까 가라고. 제발 좀 꺼지라고."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어도 분이 식지 않은 동하가 계속 씩씩댔다. 정신을 차린 건, 마지막 말을 뱉고 수 분 뒤. 사무실에 있던 모두가 동하를 보고 있었다. 이 새끼가 어디서. 기현이 동하 쪽으로 두발자국 정도 성난 걸음을 걷는데, 진홍이 한쪽 팔을 들어 기현을 멈췄다. 권새봄, 퇴근해. 지금. 새봄이 당황한 눈으로 진홍과 동하를 번갈아보다가 네엡, 하고 대답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새봄의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소리를 다 듣고 나서 진홍이 말했다. 기현이, 나가서 각목 가져와. 예, 선배님. 기현이 잰걸음으로 매를 가지러 갔다. 동하는 감히 고개도 들지 못했지만, 진홍은 내내 동하를 노려보고 있었다.





"문동하."

"......네, 선배님."

"이딴 게 뭔데. 필드 나가는 건 대단한 거고, 사무실에서 종이 붙이는 건 하찮은 거야?"

"....아닙니다."

"일에 대한 기본자세가 안 되어있네."




동하가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선배들 있는 데서 욕하고 소리 질러서 혼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그런 건 아무 것도 아닐 정도로 큰 잘못을 저질렀구나. 새봄이 악의적으로 동하를 놀리려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건 동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냥, 그 순간 제 모습이 너무 비참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하는 짓마다 왜 이렇게 등신 같을까. 그때 기현이 각목 세 개를 가지고 돌아왔다. 진홍에게 하나를 건네고 나머지 두 개는 테이블에 기대놓았다. 그리고 진홍의 뒤에 섰다. 



"엎드려."



동하가 재빨리 진홍의 앞에 엎드렸다. 팔이 잘게 떨렸는데, 온종일 종이를 붙이느라 그런 건지, 매를 앞두고 긴장돼서 그런 건지 동하도 알 수 없었다. 




"숫자 세는데, 니가 맞을 만큼 맞았다고 생각되면 안 세도 돼. 그럼 멈출 테니까."




몇 대 맞을 건지 직접 선택하라는 말이었다. 예, 하고 대답하자 각목이 엉덩이에 내리꽂혔다. 아무리 맞아도 첫 번째 매가 주는 충격은 적응이 안 된다. 더욱이 추1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진홍에게 맞는 매였다. 백필을 할 때도 어지간한 건 좋은 말로 넘어가 주던 진홍이었다. 




"하나."




결국 흐트러지더라도 처음엔 굳건하고 싶었다. 온 힘을 다해 자세를 유지하고, 크게 숫자를 외쳤다. 




퍼어억.



"두울."



이제 겨우 두댄데 벌써 팔이 휘청인다. 



퍼어어억.



".....세엣."



퍼어어억.




"....흡...넷."




...........여얼 셋. 채 열다섯도 세지 못하고 결국 바닥에 엎어졌다. 땀과 물로 얼굴이 엉망이었다. 원래 이렇게 못 맞았었나. 진홍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문동하, 일어나라. 진홍의 뒤에서 기현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 경고가 너무 섬뜩해 동하가 다시 어깨에 힘을 줘 팔꿈치를 폈다. 권새봄이었으면 스무대도 거뜬했겠지. 아니 아까 같은 상황 자체가 없었겠지.




퍼어어어억.




머리로는 숫자를 세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입으로 나오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금붕어처럼 입술만 뻐금댔다. 여기서 그만 맞겠다고 하면 틀림없이 나한테 실망하시겠지. 아니, 이미 기대 같은 건 다 사라졌으려나. 모범생으로 살아 온 문동하는 남을 실망시키는 데 면역이 없었다. 물론 매를 맞는 데에도 면역이 없었다. 




"그만 셀거야?"

"..............아닙니다. 열.... 다섯."




겨우 열다섯대로 되겠어, 니 죄가? 그만 셀 거냐는 진홍의 물음이 동하에겐 그렇게 들렸다. 각목은 고작 하나 부러졌다. 내 죄에 걸맞은 벌을 차라리 진홍선배가 정해주면 좋겠는데. 서른 대건 쉰 대건, 때리는 사람이 먼저 나가떨어질 정도로 담담하게 맞고 싶은데. 현실은 한 대 한 대에 식은땀을 흘리는 엄살쟁이 쫄보일 뿐이다. 









퍼어어어억.



"...........스물 여섯."




서른까지만 버텨보자. 동하가 서른까지 겨우 세고 또 쓰러졌다. 진홍이 좀 기다리다가 다시 물었다. 동하야, 그만 셀 거야? 동하의 뇌와 입이 아직 합의를 못 본 상태였다. 고? 스톱? 




"........서...서른 하...나."




퍼어어어억.




"그만, 그만 맞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뇌와 입이 한 대만에 극적인 합의를 보았다. 일어나. 동하가 무릎을 땅에 대고 심호흡을 잠깐 한 뒤, 진홍 앞에 섰다. 엉덩이의 통증이 하반신 전체로 퍼지며, 다리가 후들거렸다. 진홍이 각목을 뒤에 있던 기현에게 넘겼다. 





"문동하. 니가 생각하고 기대했던 거보다 추1이 재미없고 시시해?"

"아닙니다, 선배님."

"내가 볼 때 너는, 지금 사무실에서 종이 붙이는 일도 과분해."





그 어떤 매보다 더 아픈 한마디였다. 자괴감이 폭풍우처럼 몸을 적시며 쏟아졌다. 어깨가 축 처져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동하를 두고, 진홍이 먼저 사무실을 나갔다. 기현이 동하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동하의 한쪽 어깨를 한번 꽉, 잡아주고 각목을 정리해 들고 떠났다. 또다시 혼자 남은 사무실. 동하가 허물어지듯 무릎을 꿇고 참고 있던 울음을 터트렸다. 매우 길고, 고통스러운 밤이었다. 


















"막내들 들어오고 전체 회식은 처음인가? 오늘은 가볍게 마시고, 조만간 좋은데 가서 비싼 술 먹자. 다들 잔 들고. 추1, 원 앤,"

"온리!"





동하가 소맥을 원샷했다. 옆에 있던 도은이 작은 목소리로 동하를 말렸다. 동하야, 천천히 마셔. 네, 선배님.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테이블 저 끝에 앉아 있는 새봄의 잔이 깨끗하게 비워진 걸 본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새봄이 술 잘 마시네. 수헌이 새봄에게 소맥을 새로 말아주었다. 새봄이 황송한 몸짓으로 술잔을 받았다. 예, 술을 좋아합니다. 맥주파? 소주파? 이왕이면 소주가 좋습니다. 그건 나하고 똑같네. 팀장과 새봄의 대화를 지켜보며, 동하는 더 목이 탔다. 선배들은 자기들끼리 떠들면서도 비어있는 술잔이 있으면 잘도 알아채고 채워주었다. 덕분에 동하의 잔은 마를 시간이 없었고, 동하는 받는 족족 원샷을 했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한계가 왔다. 큰일 났다. 토할 거 같은데. 동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술집 화장실을 찾을 겨를도 없이 토사물이 목구멍으로 밀고 올라왔다. 손으로 입을 막고 가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천성이 모범생인 동하는 그 와중에도 하수구를 찾았다. 간신히 골목을 돌아 참고 있던 구토를 했다. 위액과 함께 눈물이 밀려나왔다. 마음만큼 주량이 따라주지 않는 게 속상했다. 나는 씨발 술도 못 마셔, 왜. 뭐 하나 잘하는 게 없어. 한참을 벽을 잡고 웩웩거리다 주저앉았다. 누군가 옆에 와 등을 두드렸다. 괜찮아, 더 토해, 동하야. 당연히 도은이겠거니 했다. 갓난아이 잠재우듯 다독이는 손길과 응원에 힘입어 동하가 남아있는 걸 깨끗이 토했다. 소매로 입가와 눈물을 쓱쓱 닦았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하면서 손길의 주인을 돌아보니 도은이 아니라 석현이었다.




"부...부팀장님."

"다 토했어?"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여긴 좀 그렇고. 저쪽에 편의점 앞에서 좀 쉬자."




석현이 동하의 손을 잡아끌었다. 위장이 비어서 그런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석현이 이끄는대로 종이인형처럼 팔랑이며 걸었다. 석현은 편의점 앞 파라솔테이블에 동하를 앉혀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술이 몸 밖으로 나가니 점점 정신이 돌아왔다. 나 아까 실수한 거 없겠지? 방금까지의 회식자리가 아득히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석현이 생수 한 병과 술 깨는 음료를 사서 나왔다. 손수 마개를 따고 동하의 손에 쥐여줬다. 지금 바로 마셔. 감사합니다. 동하가 술잔을 받은 듯이 고개를 돌려 마셨다.




"주량이 어떻게 돼?"

".......잘 못 마십니다. 소주 반병 마십니다."

"근데 오늘은 왜 그렇게 많이 마셨어."





동하가 고개를 푹 숙였다. 이거 하나라도 권새봄을 이기고 싶어서요.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근성이든 오기든, 애쓰면 이길 수 있을까 싶었었는데 이것마저도 상대가 안 됐다. 달큰해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세게, 여러 번 비볐다. 권새봄 새끼는 어떤 인생을 살았길래 술도 잘 마셔. 뭐 하나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네. 동하는 엉엉 울고 싶었다. 그냥 이대로 뿅, 하고 없어지고 싶었다. 둘 중 하나만 뽑으시지 하필 권새봄과 저를 함께 뽑은 팀장님이 미웠다. 별다른 노력도 안 하고도 항상 저를 훌쩍 넘는 권새봄이 미웠고, 못난 자격지심에 괜히 권새봄을 미워하는 자신이 미웠다. 




"여기 되게 오랜만이다."



석현이 갑자기 추억에 잠긴 목소리로 주위를 둘러봤다. 예전엔 되게 자주 왔었는데. 동기네 부모님이 이 근처에서 음식점을 하셔서 팔아드릴 겸 뭐 겸사겸사. 저쪽 골목에 양대창 엄청 잘하는 집 있는데 아직 장사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다음 번에는 거기서 한잔할까. 예예, 좋습니다. 동하가 멍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리액션을 했다. 





"나 추1 막내 때, 여기서 동기모임을 한 적이 있었는데."




요즘 후배들은 동기모임 같은 거 잘 안 하나? 우리 때는 그래도 최소한 일 년에 두어 번은 꼭 했었는데. 대리 달기 전에는 더 자주 모였고. 막내 때 진짜 정신없고 바쁜데 어떻게 또 딱 그날, 일이 없었어. 팀장님이 막내들 푹 쉬라고 삼일인가 야간대기도 빼주시고. 근데 뭐 막상 쉰다고 할 일도 없는 거야. 갈 데도 없고. 그래서 동기모임을 갔지. 경민이랑.




"아, 경민이라고. 넌 모르겠지만 예전에 추1이었던 내 동기 있거든. 지금은 추진4팀 팀장이고."

"....예, 그렇습니까."




부팀장님한테도 동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갑자기 엄청난 동질감이 느껴졌다. 둘의 사이는 어땠을지 궁금했다. 친했을까. 아니면 그저 그랬을까. 나와 새봄이 같은 사이였을까. 




"그런 동기모임 주최하고, 모이는 놈들 다 뻔해. 승진과 출세에 대한 열망이 가득한 놈들. 능력이나 성과는 자신 있으니까, 이제 정보를 모으려고 여기저기 다니는 거지. 대리야 내가 먼저 달았지만, 아마도 그놈들이 나보다 회사에 대해 더 빠삭하게 알고 있을 거야."




그런 부류의 인간들은 사원 시절에 동하의 주위에도 넘쳐났었다. 딱히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알아서 살아남지 않으면, 아차 하는 사이에 도태되는 게 이 바닥이다. 그런 경쟁에 뛰어드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그런 이들을 비난한 생각도 없었다. 




"신입연수 받을 때 추억이나, 주식, 부동산 뭐 그런 이야기나 하고 있는데 담배피러 나간 경민이가 한참이 지나도 안 들어오는 거야. 화장실 다녀오는 김에 나가보니까 술집 앞에서 다른 동기놈이랑 한판 붙고 있더라고. 벌써 두, 세대씩은 주고받았는지 눈에는 멍이 올라오고 있고, 입술은 다 터져있고. 뛰어 들어가서 말리다가 나도 몇 대 얻어맞고."





석현이 그때를 생각하며 즐거운 듯이 웃었다. 동하는 이해가 잘 안 갔다. 동기들끼리 육탄전을 한 게 뭐가 웃기지. 




"간신히 둘이 떼어놨는데 경민이가 막 소리를 지르는 거야. 니가 최석현에 대해 뭘 안다고 그딴 개소리를 하고 지랄이야. 이러면서. 난 황당하지. 여기서 내 이름이 왜 나오나. 그리고 대사가 좀, 너무, 오글거리지 않냐? 옛날 드라마 같잖아."




그렇게 말하고 또 웃는다. 확실히 촌스럽기는 하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동하가 저도 모르게 석현을 따라 웃었다. 




"그래서 경민이 끌고 조용한 데 가서 물어봤지. 내가 뭐 어쨌는데 그러냐고. 처음엔 입 다물고 말 안 할라 그래서 그 다음엔 회유를 했지. 너 그 얼굴로 출근하면 백프로 팀장님이나 선배들한테 깨질 텐데 그럼 나는 이유도 모르고 같이 깨지는 거 아니냐. 깨질 때 깨지더라도 이유라도 알아야 되는 거 아니냐. 그랬더니 마지 못해서 말하더라고."




설마. 까놓고 말해서 그냥 친구들끼리 싸운 거나 마찬가진데, 회사가 무슨 상관이라고 그렇게까지 할까.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다가 아, 여기 추1이지, 하는 생각에 금방 수긍했다. 그러고도 남을 곳이지, 여기가.




"경민이나 나나 딱히 말한 적 없지만, 거기 온 놈들은 우리가 추1이라는 걸 이미 다 알고 있었어. 추1에서 뭘 하는지는 자세히 몰라도, 2년이나 먼저 승진했으니 앞서갔다고 생각했겠지. 그게 부럽고 질투 났나 봐. 정작 우리는 추1에서 피똥 싸고 있는데 그건 모르고."




평소 그렇게 말을 많이 하지 않던 부팀장 석현은, 의외로 이야기꾼이었다. 마침 이야기의 배경이 이 근처라 하니 쉽게 상상이 되었다. 이 시간쯤이었을까. 저 골목쯤이었을까. 경민이라는 사람은 왜 싸웠을까. 





"같이 담배 피러 나간 놈이 그랬나 봐. 경민이 너야 추1에서 뽑아간 게 이해가 되지만, 최석현은 왜 뽑혔는지 모르겠다고. 성적이야 좋았을지 모르지만 추1하고 전혀 안 어울리는 거 같다고. 추1 팀장님이 너 뽑는데 온 정성을 쏟아서, 다른 한 명은 그냥 아무나 뽑은 거 아니냐, 이랬다더라. 뭐, 그 말 한 놈은 경민이 추켜세워 준다고 한 말인 거 같은데 그 말 듣고 경민이가 확 돌았었나 봐. 원래 좀 다혈질이거든. 그래놓고 금방 후회하곤 했지만."




석현은 뭐가 재밌는지 계속 웃었다. 정작 화는 듣고 있던 동하가 났다. 추1이 어떤 곳인지는 오직 추1만이 알 수 있다. 추1에 대해 뭘 안다고. 부팀장님에 대해 뭘 안다고. 진짜 추1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이 자기 자신을 증명해야 했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쨌든 뭐, 주먹질 한 건 둘이 퉁치기로 하고 넘어갔는데. 문제는 추1이었지. 삼일 안에 멍이 빠질 리가 있나. 뭐 멍 아니었어도 이런 사건이 팀장님 귀에 안 들어갔을 리도 없고. 우리 땜에 일주일인가 반참 걸리고, 막내 새끼들이 기운이 남아돌아서 사고치고 다닌다고 한 달 내내 둘이서 야간대기 서면서 개고생했었지, 아마?"




추1이 이런 곳이라고. 뭐 하나 그냥 넘어가지를 않는다. 다 큰 성인들이 밖에서 좀 싸웠다고 팀원 전체가 단체기합 받는 게 말이 되냐고. 지금이야 이렇게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그때 당시엔 적잖이 힘들고 괴로웠을 거다. 특히, 일방적 피해자인 부팀장님은 더더욱. 






"동하야."





석현이 돌연, 방심하고 있던 동하를 다정하게 불렀다. 




"예, 옙, 부팀장님."

"동기는 경쟁자가 아니야."





동하가 눈을 꿈뻑였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걸까. 




"동반자. 같이 가는 사람이지."




나라고 동기가 밉고 원망스러운 순간이 없었겠냐. 매일매일 끊임없이 비교당하면서 사는 것 같은 기분, 내가 제일 잘 알지. 어떻게 한결같이 좋아만 할 수 있었겠어. 그래도,





"하나뿐인 동기를 이기려고 마음먹으면, 회사는 그때부터 전쟁터가 돼. 네 마음속은 지옥이 되고."





경험자가 하는 말이니까 새겨들어. 석현이 동하에게 윙크를 한번 했다. 권새봄의 ㄱ자도 안 꺼냈는데 부팀장님이 어떻게 아셨을까. 선배들은 어떻게 이렇게 모르는 게 하나도 없나. 





"적은 밖에 많으니까, 추1은 같은 편에서 싸우자."




너도 새봄이도, 이 지랄맞은 추1에 뽑히고 또 살아남은 사람들이잖아. 조바심 내지 마. 새봄이보다 잘하려고 할 필요 없어. 너는 어제의 너보다 더 잘하면 돼. 그걸로 충분해.





고민과 심정을 들켜 부끄러우면서도, 너덜너덜 누더기가 됐던 마음에 다시 살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전지전능한 것 같은 팀장님도, 그런 팀장님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부팀장님도, 내 일거수일투족을 다 지켜보고 있는 거 같은 선배들도, 그리고 때론 웬수같이 얄미운 권새봄도. 이런 사람들과 같은 편에 서 있다는 말이 벅차올라서.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이가 있다는 게 든든해서.




"예, 명심하겠습니다."

















"권새봄. 긴장 안 하지? 너 계속 지각할래, 진짜? 아예 잠을 못 자게 만들어 줄까?"

"아닙니다, 선배님. 죄송합니다."





새봄이 동하의 오른쪽 귓청이 떨어질 정도로 크게 대답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동하와 새봄이 매트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에휴, 권새봄. 이게 몇 번째냐고. 내가 선배라도 빡치겠다. 




"한 시간 있다 올 테니까 그때까지 그러고 있어. 뺑기치면 뒤진다."




아, 맞다. 파쇄기 다 했다며? 예에, 선배님 책상 위에 올려뒀습니다. 동하가 신음소리를 흘리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어, 그래. 고생했다. 동하 다리 똑바로 펴라. 옙. 선이 뭔가를 주섬주섬 챙기다가 좀 덥나, 하더니 에어컨을 틀어주고 나갔다. 둘만 남게 되자, 새봄이 머리 박은 상태에서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사과하기 전에 늘 하는 습관 같은 거였다. 




"운동화야, 미안하다."

"죽을래, 진짜?"

".........깨워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래."

"학교는 어떻게 다녔냐?"

"그래서 자주 안 갔어. 이왕 늦은 거 걍 가지 말까, 이런 생각이 들어서. 넌 그런 적 없냐?"




동하는 그런 적이 없었다. 결석은 물론이고 지각 한번 한 적이 없다. 그런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었다. 권새봄 하여튼 또라이 새끼. 이걸 진짜 어떡하지?




"야, 너 그냥 당분간 우리 집 들어와서 살아라."

"니네 집?"

"깨워주는 사람 없어서 맨날 지각한다며. 모닝콜은 소용이 없고. 내가 깨워줄 테니까 당분간 들어와서 살으라고. 그럼 최소한 지각해서 털리는 일은 없을 거 아냐."

"...........남이랑 같이 살아본 적이 없는데........너 진짜 괜찮냐?"

"일단 급한 불은 끄고 봐야 될 거 아냐. 언제까지 이러고 살어. 너 전화만 안 받아도 가슴이 철렁한다고."

"알겠어. 생각해볼게."




뭔 생각을 해.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네. 정작 생각은 동하가 더 바쁘게 했다. 여분 이불 놔둔 거 어디다 놨었지? 일단 가서 청소를 좀 하고. 저 새끼 옷 되게 많던데 우리 집에 놓을 데가 있던가.





"아니다. 그냥 내가 열심히 노력해볼게."

"뭘 노력해. 노력해도 안 되니까 지금 이 지경인 거잖아."

"아니, 나도 니가 깨워주면 좋긴 한데."

"근데, 뭐."

"..................너 잘 때 코 골아. 되게 심하게."

"뭐?"





아 진짜 권새봄 또라이. 동하가 크게 소리내서 웃었다. 그 바람에 매트에 닿아 있는 머리가 울렸다. 





"우리 집 방 두개야. 방음 잘 된다."

"아, 그래? 그럼 오케이."





혼자였다면 어땠을까. 이 적막한 사무실에 혼자 머리 박고 있었다면. 틀림없이 지금보다 훨씬 외롭고 서럽고 처량했겠지.





"야, 근데 너도 잠꼬대 겁나 하거든? 내가 말을 안하니까 지는 조용히 자는 줄 아네."

"뭐? 그럴 리가. 뭐라고 잠꼬대 하는데?"

"그건 말 못 하지."

"이거 봐. 구라치는 거니까 말을 못하지."

"아니거든?"

"그럼 말해봐, 말해봐."

"어? 선배님, 오셨습니까."

"오셨습...............야. 장난칠래, 문동하? 이거 은근 꼴통이야."

"너한테 배웠다."

"가르친 적 없거든?"





혼자 있는 천국보다, 어쩌면 같이 있는 지옥이 더 나을지도 모르지. 권새봄 정도면 지옥메이트로 나쁘지 않으니, 이왕 있게 된 지옥, 즐겁게 지내볼까.




털컥. 

동하와 새봄이 사무실 문 열리는 소리에 동시에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제가 구독자 400인 이벤트를 안하고 바로 500명 이벤트로 넘어갔나봐요ㅋㅋㅋㅋㅋ

구독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진짜로 진짜로 감사드리는데 이제 더 이상 구독 안해주셔도 될...거 같은....구독자 600명 이벤트 할 일은 없겠지여....설마....예....초심을 잃었습니다.....)



또한 이번 외전을 오랫동안 동하외전을 기다려 주신 분들께 바칩니다.

이것으로 이번 시즌이 완전히 종료되었습니다.

그동안 사랑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https://asked.kr/seulgombal6



비평도, 비난도 감사히 받겠습니다.

정다운 인사는 에스크에서 나눠요. >_<

이번 주 내에 슭곰발5 에 밀려있는 답변들과 슭곰발6 에 새로 달린 답변들 다 답변해 드리는 게 목표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또 만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다음편 대신 써주실 분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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