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던 토르가 한숨을 쉬며 길게 눈을 감는다. 눈이 피로하다. 손끝으로 눈두덩이를 꾹꾹 눌러본다. 기대했던 것 보다 제법 시원하다. 눈을 감은 채 서류를 잡았던 손도 마저 들어 두 눈가를 천천히 누르며 마사지한다. 천천히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피로. 피로라. 얼마나 낯설고 어색한 말인가. 고요한 방. 토르의 숨소리와 더불어 작게 탁, 촛불이 튀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올 뿐이다. 문득 가벼운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린다.

‘멍청한 형. 너도 왕이라고 집무실에 촛불만 두는 전통을 잇겠다고? 전통을 이을 거라면 다른 것도 다 옛 방식을 그대로 따르라고. 갈대로 심지를 만들고 부싯돌로 불을 붙여.’

로키의 잔소리가 토르의 귓가에 맴돈다. 세상, 별 미친 꼴을 다 보겠다는 그 어이없는 표정. 감은 토르의 눈앞에 비딱하게 올라간 로키의 입꼬리는 물론, 가볍게 찡그린 미간까지 보이는 듯하다. 틀린 말은 아니다. 아스가르드 왕의 집무실은 촛불로 어둠을 밝히는 것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전통이었다. 그 전통에 따라 지구에 새로이 건설된 토르의 집무실 역시 곳곳에 촛불이 타오른다.

창문도 없는 집무실에 촛불과 온갖 책, 서류와 함께 갇힌 나날.

예민한 토르조차 겨우 잡아낼 정도로 작고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바닥을 가볍게 몇 번 스치더니, 심지가 튀던 소리가 곧 잠잠해진다. 불이 나기 딱 좋은 이 인테리어 덕분에 왕의 집무실에는 언제나 시종이 함께 머문다. 그 영광스러운 임무를 맡을 수 있는 조건은 단 하나. 왕의 사색을 방해하지 않도록 기척을 죽일 수 있는 이. 어느 왕은 아이를 훈련 시켰고, 어느 왕은 호위 기사를 세웠다.

토르도 오딘의 집무실에서 촛불을 관리하던 때가 있었다. 한창 혈기를 억누르지 못하던 천방지축 500살 즈음. 갓난아기인 로키를 품에 안은 어머니 프리가는 토르의 성격이 지금보다 조금 더 침착해지기를 원했다. 침대에 누인 로키를 끌어안겠다며 문가에서부터 전력으로 달려 들어와 온몸을 던지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을 만큼만.

그 덕분에 토르는 꼼짝없이 폭신한 바닥을 가진 부드러운 헝겊 신을 신고 손과 허리에 촛불을 관리할 자질구레한 것을 주렁주렁 달고 들었다. 언제나 전투화를 신던 발을 감은 보드라운 천의 느낌. 이것이 양말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하는 고민은 몸을 움직이기가 무섭게 쩔그렁, 허리춤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는 것들 때문에 짜증으로 변했다. 그리고 제게 날아드는 오딘의 무거운 헛기침에 곧바로 모든 짜증을 잊었다.

내 생에 그렇게 날렵하게 움직인 때가 또 있었을까. 가만히 곱씹어보던 토르의 입꼬리가 또 한 번 살짝 올라간다. 허락된 무기가 묠니르였는걸. 그 전에도 둔기를 가장 즐겼고. 1500년 세월 중 몸이 가벼웠던 때는 오직 그때뿐이었다.

툭. 토르가 대충 놓아둔 서류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한 방에 유난히 크게도 울린다. 좁은 보폭으로 재게 놀리는 발소리가 책상에 다가오는 것보다는 토르가 몸을 숙이는 것이 빠를 터이다. 손끝으로 꾹 누르던 탓에 시야는 평소보다 조금 번진다. 허리를 숙인다는 그 간단한 동작에도 그의 입술 사이에서 끙, 하는 신음이 흐른다. 벌써 몇 시간이나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더니 몸이 굳었다. 어디 오늘뿐일까. 외교를 위해 직접 국외로 나갈 때를 제외하면 토르는 언제나 집무실 책상 앞에 박힌 듯 앉아있었다. 덕분에 허리를 펴기 위해 잠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하나, 둘, 셋, 쿵.

“폐하! 괜찮으세요?”

앳된 목소리가 다급히 토르의 안부를 묻는다. 이내 그의 두터운 팔에 작은 손이 닿는다. 책상을 들이받은 뒤통수가 얼얼하지만 애써 햇살 같은 미소를 한껏 지어 보인다.

“으아! 어떡해!”

그 노력도 무색하게 시동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난다. 굽힌 토르의 등으로 책상에 산처럼 쌓여있던 온갖 서류가 우르르 쏟아진다. 저도 모르게 도망쳤던 시동이 혼비백산해 달려들어 서류의 산을 헤집는다.

“죄, 죄송해요, 폐하! 제가 지켜드려야 했는데! 제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글자 그대로 자신을 덮친 재난에 당황하던 것도 잠시. 제 허벅지에 겨우 닿는 작은 아이가 ‘폐하를 지켜드려야 하는데!’라며 서류의 산을 온몸으로 밀어내는 기척은 우스울 수밖에 없다. 아이야. 내가 지금은 한심한 꼴을 하고는 있지만 어엿한 성인인 데다, 네가 부르는 대로 왕이기도 하단다. 속으로 곱씹던 토르가 단번에 허리를 세운다. 그를 뒤덮은 서류 무더기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아이고, 허리야.

“폐하! 머리가!”

“머리?”

안심시키려 다시 웃어주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토르의 기대를 벗어난다. 화들짝 놀라 왕에게 손가락질하는 무례는 다급한 표정을 보아 넘기기로 한다. 설마. 서류를 조금 맞았다고 피가 나기라도 했나? 세상에. 내 위엄은 대체 어디로-

“……헝클어지셨어요! 제가 얼른 다시 빗어드릴-!”

“아니, 됐다.”

정수리 즈음을 더듬던 손을 머쓱하게 내린 토르가 짧게 대답한다.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아 그러잖아도 낮은 목소리는 더 깊게 잠겼다. 그 낯선 목소리에 시동이 움찔, 손가락을 내린다.

언제나 국민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받던 토르로서는 당황스러울 만큼 낯선 반응이다. 그러잖아도 긴장한 아이에게 그런 기색을 내비칠 만큼 어리숙하지는 않아 그저 매끄럽게 미소지으며 조용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나는 잠시 쉬고 올 테니, 자리를 정리해두렴.”

“예, 폐하.”

바짝 긴장한 아이를 지나 천천히 집무실을 빠져나간다. 육중한 문이 닫히고서야 그 너머에서 시동이 조심조심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진다. 왕자일 때는 제법 인기가 많았는데. 왕이 되었더니 내가 두려운가? 굳은 목을 풀 겸 고개를 갸웃하며 토르는 느리게 걸음을 옮긴다.

평소 토르의 성정이었다면 훈련받은 전사, 그가 여의치 않는다면 최소한 성인을 집무실에 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취향보다 앞서 고려해야 할 것들이 있다.

재건 아스가르드, 지구의 이름으로는 노르웨이 아스가르드 자치령. 지금 이곳에는 인구가 부족하다. 라그나로크를 겪으며 많은 이들이 죽었다. 정착 이후 위그드라실의 아홉 왕국에 사절을 배치하기 위해 인구의 절반과 함께 떠난 순방길. 그 길에서 만난 타노스의 군대. 그렇게 그 길을 따라나섰던 모두가 죽었다.

그 모든 과정에서 희생된 것은 하나같이 고급 인력. 고등 교육을 받고, 수준 높은 훈련을 받은 전사인 그의 백성들은 언제나 앞장서 보다 약자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내던졌다. 그것이 아스가르드인의 자긍심이다.

그리고,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지.

그를 이끄는 익숙한 소리. 절제된 기합을 따라 토르가 복도 중간에 난 테라스로 나선다. 왕궁 안뜰에서 한창 병사를 훈련 시키느라 여념이 없는 발키리의 뒷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명예로운 발키리의 문장이 새겨진 푸른 망토. 질끈 동여매었어도 길게 늘어진 머리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보기 좋게 흔들린다. 토르의 손이 저도 모르게 허전한 제 뒷목을 한 번 쓰다듬는다. 최근 그가 잃은 많은 것 가운데 가장 어이없게 잃은 것. 그의 머리칼.

발키리의 우렁찬 구령에 맞추어 기초 군사 훈련을 받는 앳된 이들의 상기된 얼굴을 토르는 찬찬히 훑어본다. 전설적인 전사인 그녀가 기초 군사 훈련을 시키는 것도, 아직 정식 군인이 되기에는 어림없이 어린 훈련병들도. 아스가르드 행성에서는 절대 볼 수 없었을 풍경이다. 어쩐지 입맛이 쓰다. 어린 시절의 자신처럼 수련이 필요한 후계자도 아닌 어린아이를 집무실에 시동으로 둔 것조차 이 극심한 인구 부족 때문이다. 그 아이의 아비는 건축가의 제자. 어미는 주조 명장의 후계자. 둘 다 라그나로크 당시 스승을 잃었다. 겨우 얻은 아이를 돌보기에는, 이 손 닿을 곳 많은 재건 아스가르드에서 그들이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다. 거의 탁아소와 같은 개념으로 국왕의 집무실을 개방한 셈이다.

능글대는 아비보다는 칼 같은 어미의 성정을 닮은 아이는 토르가 아무리 상냥하게 웃어주어도 도무지 긴장을 풀지 못한다. 나이보다 작은 것도 혹시 그 성격 때문일까. 그 어미가 도끼를 들고 알현실의 긴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들어오던 모습이 떠올라, 토르는 빙긋 웃는다.

“왕제님이 훔쳐 간 제주(祭酒)가 필요합니다. 제조 방법을 복원하지 못하면 저는 책임을 다하지 못하여 스승님의 이름을 더럽히게 됩니다. 그 전에 이 도끼로 저를 죽이시거나, 저를 왕제님께 보내주시거나, 하나를 택해주십시오, 폐하.”

그 기백을 더는 외면할 수 없어 다른 명주를 바리바리 싸 들고 로키를 찾아갔던 일이 그의 머릿속에 어제처럼 떠오른다. 물론 한 대 때려주고 간단하게 빼앗아올 수도 있겠지만, 외교 방향을 바꾸기로 결심했으니 실전에 적용해본다. 주먹보다 대화 먼저. 평화로운 물물교환으로 되찾은 제주를 품에 안은 명장 후계자가 연구실에 틀어박힌 지 3년. 그를 왕으로 모시고 따른 백성의 절반과, 거리낌없이 목숨을 맡길 수 있던 벗이자 신하를 잃은 지 이제 겨우 3년. 아버지와 나라를 잃고 지구에 정착한 지, 이제 겨우 5년.

“정신 똑바로 차려! 다시!”

아스가르드 최고의 전사가 호방하게 내지른 일갈이 문득 토르의 정신을 깨운다. 정처 없이 허공을 떠돌던 그의 시선이 아래를 향한다. 자세를 고쳐 잡는 훈련병들 앞에 버티고 선 발키리와 정확히 눈이 마주친다. 버릇처럼 토르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의도한 것도, 심경에 변화가 온 것도 아니다. 그저 반사적인, 거의 기계적인 반응.

“…….”

세상에 흡족한 것이 별로 없는 발키리는 제 왕을 향한 표정을 굳이 다듬을 마음이 없다. 하긴, 쓰레기더미에서 얻어맞던 모습까지 봤는데, 새삼 무슨 예의를 차릴까. 실없는 생각을 하며 돌아서던 토르의 시선 끝에 익숙한 건물이 아슬아슬하게 걸린다. 깎아지른 해안 절벽에 왕궁만큼이나 웅장하게 자리 잡은 건물. 하지만 그저 껍데기일 뿐. 그 내부가 황량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헤임달.

네가 없는 바이프로스트는 그저 고증을 살린 건물에 불과하구나. 누구도 그 빛나는 다리를 불러오지 못한 채, 그저 시간이 흐른다. 나의 친구여. 네가 열어준 다리를 타고 나설 때면 그 끝이 어디라 해도 나는 두렵지 않았지. 가장 든든하게 나의 뒤를 지켜주던, 나의 벗.

내가 직접 여는 다리는 어쩌면 그리도 찬란하고 공허하게 빛나는지. 혼잣말을 입안에서만 곱씹으며 토르가 다시 걸어온 길을 되짚어 돌아간다. 고작 서른 걸음 남짓이나 걸었을까. 이 복도의 절반도 미처 벗어나지 못했었다. 그 짧은 시간이 토르에게 주어진 휴식의 전부였다. 지금 돌아가면 아직 책상을 정리하지 못한 시동이 어쩔 줄 모르며 사죄를 할 것이다. 그 작은 아이를 달래며 대충 밀어내고 책상에 앉을 것이다.

“다시!”

발키리의 우렁찬 기합. 연무장에 서 본 것이 대체 언제였더라. 집무실 손잡이를 잡을 때까지도 토르는 답을 찾을 수가 없다.

Shearoset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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