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를 만나지 않는 날은 비슷하고 지루한 일상의 반복이었다. 어쩌다보니 피터에게 토니는 존재만으로도 일탈이자 일종의 자극이 되었다. 피터는 아무래도 좋았다. 언제나 토니의 연락을 기다리고, 토니와의 저녁식사를 기다리며 또 다른 일주일을 버텼다. 언제나 그가 저를 찾기만을 기다리는, 마치 그의 애완견이라도 된 것 같은 꼴이었지만 피터에겐 그 기다리는 시간마저도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로 묵묵히 제 할 일을 했다. 주위의 시선따위는 신경쓸 겨를도 없이. 

토니가 자신의 고급 세단을 끌고 친히 피터의 학교까지 마중나간 그 날부터 학교에선 피터의 뒤로 수근대는 목소리들이 들렸다. 보나마나 뻔한 내용이었다. 피터 파커가 돈 많은 슈가대디를 끼고 스폰을 받는다는. 원래 진상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말이 더 많은 법이었다. 피터는 무감했다. 어느 날 제 캐비넷의 책을 비롯한 자신의 물건들이 모두 사라져있거나, 그 물건들을 몽땅 젖은 채로 화장실 쓰레기통 속에서 발견하거나, 화장실에 갔다 온 사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제 책상이나, 복도를 걸어다닐 때면 제 뒷통수로 날아드는 아무렇게나 찢어 뭉친, 한 때는 누군가의 공책 중 한 페이지였던 종이뭉치에도 말이다. 아무렴, 다들 곧 기억도 못할 텐데. 평소엔 관심도 없다가 가십거리 하나가 던져지자 굶주린 피라냐 때처럼 몰려드는 가시같은 눈초리에 신물이 났다. 고요한 수면에 큰 파동이 일었지만 그건 곧 바람과 함께 사라져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고요히 달그림자만 비출 터였다. 피터는 신경쓰지 않았다. 누군가 제 뺨을 갈겨 깨워주기 전까진.

“으악!”

복도 모퉁이를 돌아가는 피터를 누군가 잡아끌었다. 캐비넷에 오른쪽 갈비뼈를 세게 찧어 욱씬거렸다. 통증을 신경쓸 겨를도 없이 마주한 자신을 구석으로 끌어당긴 사람의 얼굴은 꽤나 익숙했다. 네드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왼쪽 갈비뼈를 문지르는 피터를 쳐다보고있었다.

“네드! 아오, 아프잖아! 뭐하는 거야!”

“피터. 소문이 사실이야? 어떻게 된 일이야,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야? 지금 넌 학교에서 실언으로 구설수에 오른 비호감 스타가 됐다고! 정말 그 재벌 아저씨랑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거야?”

“무슨, 무슨 소리야. 네드, 그런 거 아니야. 나 정말 괜찮아. 그런 일 없어. 난 진짜 괜찮아.”

“거짓말 마. 지금 전교에 소문이 쫙 깔렸다고. 네가,”

“알아 네드, 나도 알아. 네가 걱정하는 게 어떤 건지 잘 아는데, 그런 거 정말 아니니까 걱정하지마. 정말이야.”

“정말이야? 맹세할 수 있어?”

“응. 정말이야. 맹세할 수 있어.”

“휴...그럼 다행이고.”

네드는 안심한 듯 머리를 쓸며 한숨 돌렸다. 상기된 얼굴이 조금은 풀어진 듯 했다. 그러나 주위를 경계하는 듯이 소근거리는 목소리는 여전했다.

“그나저나 그 아저씬 도대체 누구야? 차를 보니 돈 꽤나 많은 아저씨 같던데. 정말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그냥...그냥 아는 분이야. 좋은 분이셔. 도움도 많이 주시고. 정말 걱정 안해도 돼. 수업 시작하겠다. 갈게, 이따 봐!”

피터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하는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다. 물 속에 있는 것처럼 귀가 먹먹해져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작장 걷다가, 뛰다가, 자신을 쫓는 것마냥 뿌리도 없이 자라나기만하는 소문들로부터 도망쳤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 일이라 생각해서 괜찮았던 거다. 내 일일 뿐 아니라 그의 일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피터를 옥죄었다. 피터는 무작정 계단을 오르다 턱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눈 앞이 흐려졌다. 일어서야 하는데 자꾸만 팔을 헛디뎌 일어설 수가 없었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수업종은 울린지 이미 한참이나 지난 모양이었다. 피터는 꾸역꾸역 몸을 일으켜 계단 귀퉁이에 앉았다. 자꾸 눈물이 나왔다. 무릎을 안고 얼굴을 묻었고, 호흡이 가빠졌다. 너무 이기적이었던 것이다. 내가 그의 옆에서 어리광을 부릴 수록 그의 사회적 지위와 명예가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그에게 매달렸다. 피터는 도피할 곳이 필요했다. 이러면 안될 걸 알면서도 속으론 조금만 더, 한번만 더, 라며 자꾸만 그를 갈망했다. 어쩌면 경제적 지원뿐만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그에게 구걸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결국 피터는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릴 때까지 교실로 들어가지 못했다. 무작정 학교를 뛰쳐나와 정처없이 거닐다 근처 공원으로 몸을 숨겼다. 길을 걷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됐다. 나를 쫓는 건 없다는걸 알면서도 초조해지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한참을 서성이다 공원 벤치에 몸을 구겨 앉았다. 생각은 정리할 수록 낡은 옷장에 켜켜히 쌓인 다 헤진 옷처럼 하염없이 새어나왔다. 사실 답은 이미 정해져있었고, 피터는 그게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다. 인정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렸고, 언제까지고 그의 이유도, 조건도 없는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두 사람 모두 누구보다 잘 알고있으면서도 그에 대한 언급은 암묵적으로 금기시되었다. 언젠간 반드시 이렇게 해야할 거라는 걸 알고있었다. 다만 그 시간이 너무 빨리 찾아온 것 같아 마음이 저렸다. 비단 돈때문만이 아니었다. 아니, 눈물이 나는 이유 중 돈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제 다시는 그를 보지 못할 거란 생각만이 피터의 눈시울을 붉혔다. 이제 다신 그와 얼굴을 마주해선 안되고, 그와의 꿈같던 저녁식사도 이젠 끝이라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계속 얼굴을 보면 분명 내가 매달릴 게 뻔하니까. 그를 잡기 위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최대한 그에게서 떨어지는 편이 나았다. 이별이라 말할 수도 없는 이별임이 피터를 더욱 아프게 했다. 피터는 토니와의 이별아닌 이별을 상상하며 조용히 울음을 터뜨렸다. 와중에 눈치없게도 울리는 알바시간을 알리는 알람을 듣고 피터는 본능적으로 일어났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돈은 벌어야 한다는 본능이자 절박함이었다. 달마르 샌드위치까지 가는 길이 이렇게 멀게 느껴진 적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공원을 빠져나온지 얼마 안돼 비가 왔다. 폭우도, 그렇다고 이슬비도 아닌 소나기. 가을비였다. 그를 처음 만난 게 초여름이었는데 시간이 이렇게나 흘러 벌써 덜컥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을씨년스러운 공기였다. 토니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청량한 바람과는 사뭇 다른 바람이었다. 빗방울은 피터의 모든 것을 적시며 피터를 잠식시켜갔다.

달마르 샌드위치 가게에 도착했을 땐 이미 알바시간보다 훨씬 늦은 시각이었고, 달마르 아저씨는 쫄딱 젖은 채 죽을상을 한 피터의 꼴을 보고는 오늘은 쉬라며 그대로 집으로 돌려보냈다. 피터는 한손엔 달마르 아저씨가 준 샌드위치를 쥐고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비는 정말 소나기였던 건지 가게를 나왔을 땐 이미 비가 그친 후였다. 한동안 확인못했던 핸드폰을 보니 알림이 잔뜩 와있었다. 그 중 가장 많은 부재중을 남긴 사람은 단연 토니였다.

- Kid, 어디야.

- 왜 전화 안 받니.

- 지금 어디야.

- 제발 전화 좀 받아.

- Pete.

깨진 액정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다시 곧 처절히도 퍼부을 모양이었다. 피터는 토니의 문자에 답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가 보낸 문자를 들여다 볼 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토니의 전화는 계속 이어졌다. 몇 분이고 서서 화면을 보다 이내 배터리가 다 닳아 꺼진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물놀이하기엔 좀 추운 날씨 아닌가?”

집 앞에 도착했을 땐 물기가 채 마르지 않아 물이 뚝뚝 떨어지는 피터의 머리칼을 삐딱하게 쳐다보는 그가 서있었다. 고급 세단에 기댄 채 선글라스를 벗으며 다가오는 그를 그저 무력하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어디 갔었니. 전화는 왜 이렇게 안 받아? 학교도 마음대로 빠졌다면서. 왜 그러는 거야, 응? 뭐가 문젠데! 약속했잖아, 학업에 집중하기로. 나머진 내가 다 알아서 한다니까, 왜 이렇게 말을 안듣니! 왜 자꾸 걱정되게,”

“죄송해요...죄송, 죄송...죄송해요 토니...”

“오 이런...이러기야?”

피터는 울먹이다 이내 울음을 참지 못했다.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은 닦아내도 멎을 생각을 않았다. 토니는 우는 피터를 가만히 안아줄 뿐이었다.

“미안해, 내가...너무 감정적이었어. 미안해.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pete. 응?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토니는 피터의 뒷통수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울면서도 연신 죄송하다는 말만 숨과 같이 내뱉는 피터를 집 안으로 부축했다.

집 안으로 들어온 토니는 피터의 집에 방문한 게 처음이 아닌 것 같이 익숙하게 서랍에서 옷과 수건을 꺼내 피터에게 건내곤 피터를 욕실로 보냈다.

“일단 따뜻한 물로 샤워 좀 해. 몸이 얼음장이네. 도와줄 거 있으면...아니 없겠지만. 어쨌든.”

토니는 그대로 욕실 문을 닫아버렸다. 왜 괜시리 가슴이 떨리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이 어린애를 상대로 욕정을 한다는 것을 부정하기엔 너무 정직한 생리현상이었다. 토니는 바퀴 하나가 빠진 의자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욕실은 조용하다 이내 물줄기가 타일바닥을 차갑게 내려치는 소리가 났다. 토니는 얼굴을 쓸고는 더욱 긴 한숨을 내쉬었다. 토니는 눈을 감고 먹먹히 들리는 물소리에 집중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피터의 나체를 상상하기엔 생각할 게 너무 많았다. 담배를 피우고싶었지만 이 방엔 재떨이가 없을 거란 걸 알고는 또 다시 한숨을 쉬었다. 문득 방 안을 둘러보았다. 자잘한 잡동사니들로 둘러싸인 작은 방. 딱 피터같은 방이라 생각했다. 우는 피터의 얼굴이 토니를 스치고 지나갔다. 무엇이 이 아이를 그렇게까지 힘들 게 한 건지 감이 오질 않았다. 성적이 떨어졌나. 공부에 집중을 못하나? 혹시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끝도 없이 이어질 즈음에 피터가 젖은 머리를 털며 방을 들어왔다. 문을 닫은 피터는 수건을 머리에 올려놓은 채 그대로 문 앞에 서있었다.

“앉아.”

토니는 고개짓으로 피터에게 침대에 앉으라고 말했다. 피터는 느린 걸음으로 걸어가 침댓가에 걸터앉았다. 둘 사이엔 오랜 침묵이 가라앉았다. 그저 서로 지긋이 마주보기만 할 뿐이었다. 토니는 어떤 말부터 꺼내야할지 재고있었다.

“스타크씨.”

예상 외로 먼저 침묵을 깬 건 피터였다. 어느 때보다 단호하고 침전된 말투와 목소리였다. 피터는 다음 말을 꺼내기도 전에 목울대가 시큰거렸다. 피터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어갔다.

“이제 그만 찾아오세요. 이제 저녁먹는 것도 관둘래요, 돈도 그만 주세요. 저한테 왜 그러시는 거예요 도대체...토니도 제가 귀찮잖아요. 이제 그만하셔도 돼요. 정말이예요. 정말...”

토니는 다 쉰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는 피터를 보며 골똘히 생각했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고개를 숙이는 피터를 보며 확실히 피터에게 무슨 안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피터는 말이 없었다. 어쩌면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

“오늘 학교도 빠졌다며.”

“그건 어떻게...”

“저번에 너희 학교 찾아갔을 때. 내가 보호자라고 선생님께 인사드렸어. 엄밀히 말하면 법적보호자는 아니지만. 무슨 일 생기면 나한테 연락달라고했지. 말도 없이 사라졌다면서. 지금까지 어디서 뭐했니.”

“...”

토니는 일어서 팔짱을 끼고 책상에 걸터기댔다. 여전히 저를 향하지 않는 시선에 짧은 한숨을 쉬었다.

“말하기 싫어? 그럼 난 납득할 수 없는데.”

긴 침묵이었다. 피터는 할 말을 꾹꾹 눌러삼키는 듯 자꾸 입술만 물었다. 이젠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다. 조금만, 조금만 참고 견디면 될 거라 생각했다.

“Pete, 나 안 볼 거야?”

피터는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토니의 얼굴을 봤다. 토니의 얼굴을 마주한 피터는 이미 눈 주위가 온통 붉어져 툭 치면 눈물이 도록 흐를 것 같았다.

“싫증나니? 내가 싫어진 거야?”

“아니, 아니요, 그건...그건 아니예요, 절대...아니예요.”

토니는 다시금 시선을 땅으로 옮기며 고개를 가로젓는 피터의 머리를 두어번 쓰다듬었다.

“오늘은 갈게. 피곤할 텐데. 내일 얘기하자.”

피터는 자신을 지나쳐가는 토니를 외면했다. 지금 그를 놓치면 영영 그를 못볼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피터는 방문을 열려는 토니에게 달려가 그를 안았다.

“가지마세요...”

토니는 잠시 멈칫하다 자신의 허리를 감은 피터의 팔을 풀고 뒤로 돌아 피터의 얼굴을 마주했다. 이미 반쯤 흐느끼고 있는 피터의 얼굴을 쓸어주고는 그대로 입술을 부딫혔다.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는,그 무엇도 방해하지 못할 오직 둘만의 키스였다. 서로의 입술을 어루만지고 서로의 숨을 주고받다 피터의 어깨를 감싸 천천히 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둘의 발걸음은 침대로 향했고 금새 침대와 한 몸이 되었다. 키스는 여전히 느릿느릿 이어졌고 서로의 몸을 감각하기 바빴다. 피터는 옷 속으로 들어온 그의 손을 느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새어나는 앓는 소리를 담아누르기에 바빴다. 그는 손과 입술로 피터의 모든 것을 만졌다.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다시 입술로 되돌아오던 토니는 가슴께부터 치골까지 짧은 간격으로 키스를 하다 피터의 바지 버클을 풀렀다. 몸이 노곤해진 피터는 두 눈께를 팔로 짖누르다 바지 버클을 푸는 토니의 손길에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토, 토니, 그건, 아직...”

“싫어?”

“아니, 그게...”

“그만할까? Honey, 멈추고싶다면 언제든 얘기해. 네가 싫다면 그만할게.”

“아니, 요...그건 아닌데...”

토니는 몸을 일으켜 피터와 입을 맞췄다. 짧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맞춤은 피터를 안심시켰다. 지긋이 마주치는 눈빛에서 어렴풋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다시 제 두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토니에게 그저 몸을 맡길 뿐이었다. 형형히 세워진 자신의 형체가 토니의 입에 담겼다. 피터는 아무도 자신을 지켜보지 않는데도 두 팔을 베베 꼬며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그런다고 입에서 나는 앓는 소리까지 가려지는 건 아니었다. 토니는 느릿하게 움직이는 데도 피터는 벌써부터 죽을 맛이었다. 생경한 감각에 몸이 벌벌 떨리고 여러가지 생각이 피터를 덮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맨살에 맞닿는 서늘한 공기에 소름이 돋았다.

“흐으...아, 으으...흐으...아...아, 자, 으..잠,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피터는 제어할 수도 없이 정액을 내보냈고, 그건 모조리 토니의 입 속으로 분출됐다. 토니는 당연하다는 듯이 피터의 정액을 삼켰고, 피터는 그 광경을 목격하고는 구슬같은 눈물을 도록 흘렸다

“죄송해요, 토니, 죄송...죄송해요, 윽, 죄송해요...”

“어...왜 또 우는 거야, kid.”

뭐가 그리도 서러운지 숨도 못 쉬고 끅끅대며 우는 피터를 토니는 감싸안아주며 정수리에 몇번이고 키스를 했다. 토니는 놀란 피터를 달래주기 바빴다. 서럽게 우는 피터의 머리를 그저 쓸어줄 수밖에 없었다.



토니는 피터의 빨갛게 부어오른 눈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그래도 피터는 반응이 없이 애궂은 자신의 손가락만 지분거리며 토니의 눈을 피했다. 토니는 피터에게 이불을 더 단단히 덮어주었다.

“Honey, 말 안할 거야?”

“...뭘요.”

“아까 왜 울었는지.”

“...언제요.”

“밖에서.”

피터는 붉은 기가 채 가시지 않은 눈으로 옆에 마주 누운 토니를 쳐다보다 다시 꼼질대던 손만 바라봤다. 피터는 턱을 괴고 저를 바라보는 토니의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전 ‘아까’ 왜 울었는지 물어보는 건줄 알았어요...”

토니는 푸스스 웃으며 그래서 말하지 않을 거냐며 피터의 이마를 쓸어넘겼다. 피터는 다정한 토니의 말투와 제스쳐에 얼굴이 붉어졌다. 피터는 안심이 됐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이 사람이라면, 온전히 믿어도 될 것만 같은 강한 확신이 들었다. 설사 나중에서야 보니 그가 나쁜 사람이었거나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멋진 사람이 아니거나 혹은 내가 이 사람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 할 지라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후회해도 후회되지 않을 것 같았다.

“학교에서...저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들려서요, 근데 그게...토니와도 관련이 있는...소문이라. 저는 상관없지만 제가 토니에게 걸림돌이 되는 게 아닌가 하고...제가 정말 그러고 있다면, 제가 정말 토니에게 해를 끼치고 있는 거라면 더 이상 토니의 곁에 있어선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래서...더 이상 토니의 얼굴을 보지 못할 거란 생각을 하니까 너무...슬퍼져서...”

토니는 다시금 가벼운 웃음을 터뜨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한 팔로 피터를 끌어안았다.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피터의 체취를 들어마시던 토니는 얼굴을 들어 피터의 얼굴을 부여잡고 쪽 소리가 나는 뽀뽀를 해댔다.

“Pete, 난 누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안써. 네가 내게 어떤 존재인지 안다면 그런 생각 못할걸? 설령 그런 말이 들린다 할지라도 그건 절대 네 탓이 아니고 네가 신경써야할 부분이 아니야, 그렇지? 게다가 난 진짜 ‘Sugar Daddy’, 맞잖아?”

토니는 피터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토니의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이 새삼 처절하게 실감됐다. 그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 증명되는 것에 모든 신경이 쏠렸다. 팔의 솜털이 돋는 것이 느껴졌다. 뭐든 좋았다. 그와 함께라면 뭐든지 다 괜찮을 것 같았다. 피터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의 깊고 진한 눈에 홀린 듯 그의 눈만 바라봤다.

“저를 사랑하세요?”

공허한 정적이었다. 토니는 한동안 말이 없었고 그런 토니의 눈동자를 피터는 그저 응시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놓쳐버린 말이었고, 뒤늦게 공중으로 흩어진 것을 깨닫고나서야 이런 토니의 반응을 예상했지만 그 침묵이 피터의 두려움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금단의 말을 감히 꺼낸 벌이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무력한 자신이 원망스러우면서도 그저 그의 눈동자를 잠시라도 더 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 그리고 누군가는 먼저, 반드시 둘 사이에 다루어져야 할 문제였다. 무언가를 바라는 것은 맹세코 아니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자신이었다.

토니는 꽤 오랫동안 자신을 바라보는 피터의 찬찬히 바라보았다. 복잡하게 얽힌 여러 말보다 더 많은 것이 담긴 시선이었다. 토니는 자신을 향한 그 시선에 무언가 확신이 선 듯 무거운 입을 뗐다. 맨 몸으로 떼는 외줄타기의 첫걸음이자 미지로의 도약이었다.

"Pete, 난...지금까지 방황해왔어. 그래서 방탕한 삶을 이어왔고, 정착하지 못하고...우리가 처음 만났던 것처럼 채팅앱으로 단순히 하룻밤을 보낼 상대만 찾아해멨지. 사랑을 할 자신이 없었어. 그런 감정을 책임지기가 싫었던 거지. 음, 어쩌면 무서웠는지도 몰라. 난 어른인 척하지만 사실 열아홉살의 내 모습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 난 네 생각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야."

피터는 그의 말을 경청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무슨 말이든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의 뜻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토니는 잠시 말을 고르다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내가 너를 사랑하면 네가 힘들어질 거야. 물론 나는 노력하겠지만...내가 너에게 느끼는 이 감정을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아니, 애초에 숨기려해도 숨길 수가 없었지. 사랑과 재채기는 숨길 수 없다는 말도 있잖아? 후...자꾸 이상한 말만 나오는데...그러니까 내가 하고싶은 말은,"

그가 그토록 당황한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 살풋 웃음이 나려는 것을 애써 밀어넣었다. 두려우면서도 그도 똑같이 두려우리란 생각에 조금 안심이 되면서 긴장이 풀렸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는 것, 처음부터 다 알고있으면서도 모른 척 숨겨버린 것이 후회가 되었다. 우린 두려웠기에 너무나도 지나치게 조심스러웠고, 미숙했으며 용기가 부족했던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면, 내가 너를 사랑해도 되겠니?"

"네, 토니, 네..."

오랜 방황 끝에 내게 닿은 말은 너무도 친절해서 눈물이 났다. 친절하고 보듬어주는, 제 뺨을 어루만져주는 애정어린 말이었다. 토니는 울음을 터뜨리는 피터를 감싸안으며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연신 어깨를 쓸어내렸다. 서툰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둘은 좁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 맞닿은 피부로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새벽이 지고 동이 틀 때까지 밤새 이야기를 나눴다. 그 중에는 정말 어이없이 실없는 이야기도, 조금은 무겁다고 할 수 있는 주제의 이야기들도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렇게 서로의 세계를 넓혀가는 것을 좋아했다. 피곤한 걸 느끼지 못할 정도로 오로지 서로에게만 집중하는 둘이었다.

"그럼, 언제부터 나를 좋아했어요? 음, 대답하기 싫으면 안해도 돼요."

"부둣가에서 널 처음 봤을 때부터. 네가 어두운 부둣가에 서있는데 그 뒤로 다리의 형형색색의 불빛이 비춰질 때부터 생각했지. 저 아이한테서 벗어나지 못하겠구나, 하고."

"정말요? 거, 거짓말, 토니는 그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요..."

"거짓말이 아닌걸. 난 그 날 네가 무슨 옷을 입었는지도 전부 기억해. 파란색 체크셔츠 안에 '슬픔의 맛 양상추'를 입었었잖아. 밖은 어두워서 레스토랑 테이블에 앉아서야 본 거지만, 그걸 보고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알기나 해? 웃고싶어 죽는 줄 알았다고."

"...그 옷이 그렇게 웃겼어요?"

"...아니, 귀여운 티셔츠라고. 내 말은 귀엽다는 뜻이었어."

"그런데 왜 티를 내지 않았어요? 작은 신호라도 줬으면 더 빨리 알아챘을 텐데. 나는 토니를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부터 그 감정을 숨기고 부정하기에 급급했어요. 분명 토니는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닐 거라 생각으니까요. 처음부터 어느정도 눈치라도 챘으면 내 감정을 숨길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스스로 부정하진 않았을 텐데 말이예요."

"허? 그 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신호를 줬는데. 나한텐 너와 함께한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신호였다고. 세상에 어떤 미친 사람이 아무 감정 없는 사람한테 매달 빌린 돈을 갚는 것처럼 착실히 돈을 줘?"

피터는 플러팅을 그런 식으로 하는 사람이 어딨냐며 토니의 단단한 팔뚝에 얼굴을 파묻으며 웃었다.

"저는 제가 아직 미성년자이고...누구의 잘못이든 부적절한 관계를 맺을 뻔한 데에 대한 입막음용 쯤으로 생각했다고요..."

"네 말대로 네가 아직 너무 어리니까. 물론 정신적으론 성숙하지만,그래서 조심스러웠던 거야. 네 재능이 아깝고 널 돕고싶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네가 그렇게 눈치가 없었다는 건 예상 밖이지. 난 네가 알고도 날 밀어내는 줄 알았어."

"아하, 그래요? 플러팅을 돈으로 하는 건 드라마에서밖에 못 봐서요. 그런 의미에서 토니는 대단한 사람이네요."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토니는 몸을 일으켜 피터의 배를 간질이기 시작했다. 피터는 토니의 손을 피하려 몸을 웅크렸지만 그럴 수록 그의 손은 더욱 집요히 파고들었다. 머리가 띵해질 정도로 웃은 뒤에야 멎은 손길 뒤에는 부드러운 키스가 이어졌다. 그의 달콤한 키스가 피터의 두려움을 치유해주는 듯 했지만, 여전히 두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두렵지만 그 이외의 다른 것들은 상관없었다. 그 어떤 장애물도 그와 함께라면 아무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무엇이든 전부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강한 확신이 드는 피터였다. 

서로의 체온으로 녹아드는 새벽이 지나고 있었다.





@KINGMYEONGH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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