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섭이가 준섭이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파도에 종이가 녹아 가라앉는 걸 지켜보고 있습니다.


For a Lifetime · Charles Bolt 






난 형보다 나아지려고 한 적 없었어. 그럴 생각도 해본 적 없었고. 근데 어렸을 때는 그 얘기를 들으면 저절로 시선이 엄마한테 가더라. 엄마는 나와 형을 비교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입은 벙긋거렸지만 어떤 말도 하지 않았어. 항상 그랬지. 엄마는 그 사람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끝까지 엄마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채로 그 입을 나불거렸고. 오히려 엄마는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했어. 엄마의 입술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말들이 무진장 많아보였는데 말이야.


무슨 말이 하고 싶었을까, 엄마는.


‘그렇지 않다’? 그 얘기는 아니겠지. 이런 얘기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는데 엄마는 마음에 없는 말은 못했잖아. 내가 형보다 나은 지점이 없었으니까 그 말은 아닐 것 같아. 농구 얘기가 아니라… 엄마랑 대화를 해본 게 언젠지 모르겠어. 간단한 인사정도야 하지. 요즘 어떻냐, 학교 생활은 어떻냐, 농구부는 어떻냐, 그렇게 물어보면 난 그 질문에 ‘괜찮아요.’ 한마디로 대답할 수가 있잖아. 그리고 그 외의 다른 말을 뭘 해야할지 막막해. 안 그래도 내가 퇴원한 뒤로 엄마가 날 걱정하는 게 눈에 띌 정도인데 다른 걱정거리를 더 얹어드리기도 싫고…

이따금 새벽에 목이 말라서 깨면 엄마랑 송아라가 같이 자는 방에서 지직거리는 농구공이 튕기는 소리가 들려. 형이 농구경기를 하는 모습이 찍힌 그 비디오. 엄마는 형을 보고 있었어. 비디오에 녹화된 형을 자신의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한참을 들여다보더라. 저러다가 결국엔 브라운관 안으로 엄마가 곧 들어갈 것 같이 가까이 앉아서 말이야. 그걸 보고도 내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어…

근데 문제는 내가 엄마에게 잘하려고 할수록 점점 멀어져. 심지어 내 발로 직접 멀어지는 것 같아. 내가 직접 뒷걸음질 쳐서 멀어지고 있다는 게 내 발로 느껴져. 이러면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있냐고 생각해. 못 쓰겠지? 그러니까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하려고 하진 않으셨겠지.


그렇다면 역시 ‘그렇다’? 이건 좀 아니지? 엄마가 그런 말을 할 사람도 아니고. ‘형보다 속은 더 썩인다’. 그래, 차라리 이쪽이 더 그럴 듯 하네.


내가 이렇게 추측을 해봤자 엄마는 한 번도 대꾸를 한 적이 없었어. 오히려 그 옆에서 난리를 친 건 송아라였지. 송아라는 엄마와 내가 하지 못한 말을 전부 다 자기가 대신 해주려고 하는 것처럼 꿍얼거리고 심지어 화도 냈잖아. 농구의 농 자도 모르면서 말이 많다나. 웃기지, 나보고 형보다 나은 동생은 없다며 말한 사람들은 대부분 코치들이었고, 그 말을 삼키고 있는 사람들은 지보다 더 많이 농구경기를 보러 온 사람들일텐데. 농구의 농 자를 너무 잘 아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지만 그 말이 시원하다는 건 부정할 수가 없네. 송아라, 그 녀석 성질머리는 누구를 닮은걸까. 형이나 나는 아니잖아, 그치?


7번. 내가 어떻게든 형의 등번호를 이어가려고 하니까 사람들은 나를 마주하고도 형을 봐. 사실, 주장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어. 나는 농구하는 형이 멋있어보였고 어릴 때야 멋있는 모습을 그대로 따라하고 싶어 하잖아. 아버지가 그렇게 떠난 뒤에도 형은 멋있게 주장이 되겠다고 말하고, 나한테는 부주장 역할을 주는 게 멋있었어. 형이 어떤 부담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르면서. 하지만 나도 머리라는 게 있어서 형과 내가 아주 다르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어. 형이 형을 부어서 채우던 자리가 낚시한 물고기를 담는 아이스박스 정도라면 내 자리는 그 옆에 꿈틀거리는 구더기가 담긴 미끼통 정도라는 것쯤은. 나는 낚시한 물고기를 담을 필요가 없고, 형은 구더기를 담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나만 아는 것 같아. 형의 자리를 내가 그대로 채우기를 바라는 사람들밖에 없어. 아이스박스의 깊이를 미끼통이 채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알만한 바닷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원, 참… 차라리 이사를 가기로 한 게 잘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여기 사람들은 내가 형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형이 아이스박스고 내가 미끼통이라는 것도 모르거든.


근데 나만 형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는거라면 역시 엄마도 그 사람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겠지. 그래서 잠깐은 형보다 낫지 못한다면 최소한 비슷해져보려고 노력한 적도 있긴 해. 형처럼 공을 능숙하게 옮기기 위해서 드리블을 연습하고 슛 점수 득점력을 올리기 위해서 점프슛 연습도 했어. 아파트 단지에 있는 그 작은 농구코트에서는 나한테 같이 농구하자고 하는 녀석들이 없었고 시간이 좀 지나서는 달재가 있었지만, 달재도 나랑 키가 비슷하잖아. 내가 체육관 농구코트 위에서 마주하게 될 녀석들은 나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녀석들이라는 것을 잊었지. 형은 나보다 키가 아주 컸기 때문에 농구에서 나와는 다른 고민을 갖고 있었다는 것도 잊고 있었던거야.

엄마한테 잘하는 방식도 틀렸다는 것도… 알고 있어. 나는 형처럼 엄마한테 다가가서 이 집에 주장이 되겠다느니 뭐니 하는 말은 못하겠더라. 이제 형이 가졌을 부담을 알고 있고 난 그 부담을 형처럼 짊어질 자신이 없어. 이것봐, 말했잖아? 난 엄마랑 대화다운 대화를 나눠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난다니까. 그러니 난 몸에도 맞지 않는 일을 관뒀어. 남들이 내가 형보다 낫기를 기대한다고 해도 나는 형이 아닌 걸 어떡하겠어? 그렇게 짧은 형 흉내내기가 종료되었지. 시작한 것도, 종료한 것도 나 빼곤 아무도 몰랐지만. 형도 몰랐지? 티도 안난 것 같더라고.


그런데 말야. 나 주장할 생각 없다고 했잖아. 근데 차기 주장이 나래. 우와… 그 얘기 듣고 정말인가 싶었어. 난 평생 누군가를 뒤따르는 게 익숙했는데 내가 가장 큰 형이라잖아. 난 그게 말이 되냐고 농담하지 말라고 하려고 했는데 글쎄, 그 녀석들이 다 날 쳐다보고 있었어, 심지어 달재도. 솔직히 말하자면 그 시선들이 좀 부담스러웠어. 입가가 굳어가는 느낌에 ‘달재는 어떻고요?’ 하고 물어보려는데 달재가 ‘그래, 네가 아니면 누가하겠어!’ 라고 말하더라. 그 녀석, 맨날 그렇게 햄스터처럼 쏙쏙 빠져다니고… 그 얘기를 들으니깐 정신이 확 들었어.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어? 달재, 그 녀석이 해? 참나, 그 녀석 아직도 백호한테 휘둘리고 다닌다고. 태웅이가 잠들면 걔 근처 걸어갈 때 조용히 걷는 걸 내가 못 봤을까봐? 그 천방지축들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이제 나밖에 없으니까 어쩔 수 없지, 뭐.


형.


형을 따라서 시작했던 농구였고 잠깐이었지만 형을 흉내내기도 했던 농구였는데 내 플레이는 형이 하던 플레이와는 많이 달라졌어. 점프슛은 좀 약하지만 키가 큰 상대에게 대응하는 방법도 어느정도 익혔고. 코트 위에서 소통하는 것도 이젠 뭐, 거기가 만남의 광장이지. 내 플레이는 형이 하던 플레이와는 달라졌어. 그리고… 산왕이야, 형. 제법이지? 내 7번이 어디까지 갈지 잘 지켜보라고. 정말 우승하는 7번이 될지도 모르잖아.

이제 줄여야겠다. 아침부터 연습하러 가야해. 산왕을 이겨야한다고 (지금) 주장이 아주 칼을 갈고 있거든. 저번에 라멘집 가서는 엉덩이 1cm 띄우고 라멘 먹으라고 하지 뭐야. 그 짓거리 또 하기 싫으면 아침 연습에 늦으면 안돼. 이만 잔다. 편지도 끝. 답장은 산왕이랑 맞붙기 전에 보내줘. 기다릴게.


ps. 우승 단체사진 찍을 때 옆에 와서 찍고 싶으면 그래도 돼. 차기 주장으로서 그것 정도는 허락해줄 수 있겠지.

twitter @lan_gam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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