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독자님들에게>

1년이 넘은 글인데 이제야 처음으로 선보이게 되네요. 조금 기간이 지나서, 저도 글을 교정하면서 어색했습니다. 글을 쓰는 것도 최근 약 4개월 간의 공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어색했던 것 같아요.

청회색 글씨는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의 시점, 대화입니다. 그리고 파란색 글씨는 남자 주인공의 대사입니다. 마지막으로 기울인 글씨는 과거 회상 장면입니다. 타 플랫폼의 습관 때문에, 이 글은 이렇게 표시하려 합니다.  다음 글부터는 피드백을 적극 반영하여 표기할 예정이니, 댓글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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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나는 당신을 보았습니다. 봄의 향기를 흠뻑 머금은 분홍빛 꽃잎이 볼을 붉혀 더욱 붉게 휘날리는 가운데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곤두박질치는 꽃잎 하나하나가 모두 당신만 바라보며 떨어집니다. 오로지 저만 보고 싶지만, 당신은 내 뜻대로 되지 않아 당신을 내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마음들을 가슴이 좁아 버릴 수 없습니다. 선선한 봄바람이 당신의 향기를 전해주고, 화창한 공기가 도란거리는 당신의 목소리를 전해줍니다. 햇빛과 바람이 적당히 기분이 좋습니다. 나는 당신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저 얼굴과 이름, 목소리, 그리고 자잘한 습관만을 알뿐. 그 습관은 항상 저를 이곳으로 불러냅니다. 새까만 머리칼을 가끔 귀 뒤로 넘기며 책장을 넘기는 소리까지도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이렇게 바라만 봐도 좋은데, 당신이 나를 바라봐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바라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자꾸만 싹트는 욕심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당신을 보면 가슴뿐만 아니라 발끝과 손가락 끝까지도 두근대며 떨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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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비가 내립니다. 처음엔 소낙비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봅니다. 굵은 빗줄기 사이로도 당신의 모습이 보여서 다행입니다. 어제처럼 화사하지는 않지만, 오늘은 또 오늘의 매력이 있습니다. 눅눅한 공기 속에서도 오직 뽀송할 것 같은 여린 솜털이 보이는 것도 같습니다. 오직 당신만 가볍습니다. 마른 햇볕에 넌 솜이불 같습니다.

오른손을 뻗어 힘 있게 쥐면 금방이라도 폭신함이 느껴질 것 같습니다. 당신에게 닿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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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창밖의 바람 소리가 창을 넘어 들립니다. 그 탓에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매일 들었던 목소리인데 오늘 하루 듣지 못한다고 이렇게 우울합니다. 당신이 나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다면 이렇게 숨어서 당신을 지켜보지 않아도 될 텐데 말입니다. 나와 당신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 수도, 넘을 수도 없는 게 화가 납니다. 그건 벽에 내는 화가 아닙니다. 이 화는 나 자신에게 내는 화입니다. 과거의 제가 저지른 못된 잘못에 대해 반성하는 것이고, 회개하는 것이고. 그러니까 이건 벌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너무 가혹한 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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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날씨가 화창합니다. 하지만 꽃잎은 날리지 않습니다. 비에 흠뻑 젖어 땅에 떨어졌겠지요. 나는 비에 젖어도 떨어지지 않는 꽃잎이 되고 싶습니다. 거센 비와 바람을 이겨내고 당신 앞에 온전히 서고 싶습니다. 당신이 나를 바라보면 그제야 떨어져 당신 주변을 맴돌고 싶습니다. 그렇게 맴돌다가 결국 떨어져도 행복할 겁니다. 짧지만 충분히 당신을 느꼈으니까요. 해도 되고 싶습니다. 당신의 방안을 가득히 채우며 당신을 내 안에 품고 싶습니다. 세상의 따뜻함을 당신에게 전하며 그 눈부심의 일부가 되겠습니다. 비도 되고 싶습니다. 소낙비가 되어 당신의 창문을 두드리며 나 여기 있다고 외치고 싶습니다. 당신의 삶에 배경음악이 되고 싶습니다. 또, 장대비가 되어 당신의 머리와 어깨, 손등, 무릎에 닿고 싶습니다. 그렇게 당신을 적시다 그쳐도 병들지 않을 겁니다. 오랫동안 당신 대신 아파 왔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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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당신이 보이지 않습니다. 몸이 조금 나빠 보여도 항상 이 시간에는 이곳에 있던 당신이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을 보지 못하게 되어 화가 납니다. 당신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당신의 촉촉한 눈동자를, 당신의 새하얀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화가 납니다. 하지만 이런 '화'보다는 호기심이 더 큽니다. 그리고 호기심보다는 걱정이 더 큽니다. 자꾸만 당신 앞에 나서고 싶습니다. 내 곁에 왜 당신이 없나요. 나는 오늘도 당신의 흔적을 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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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당신을 볼 수 없습니다. 살아 있다는 게 이토록 잔인한 일인지 미처 몰랐습니다. 눈이 있는데도 보지 못하는 당신이 어렵습니다. 손이 있는데도 만질 수 없는 당신이 간절합니다. 코가 있는데도 느낄 수 없는 당신이 애절합니다. 어제와 다른 심장이 무섭습니다. 당신을 그리워하며 하루를 지새웁니다. 당신의 얼굴 한 번 못 봤다고 이렇게나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당신 없는 내 삶은 이렇게나 허전합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사람을 결국 찾아냈다. 나는 이렇게나 커버렸는데 내 기억 속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이 조금 이상했지만. 그런데 나를 보는 눈빛이 이상하다. 증오나 원망, 복수심보단 애정이 느껴지는 눈빛. 그 사람이 아닌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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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당신을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지독한 열병이 나서 창 너머 세계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보고 싶지만 볼 수 없어서 한없이 창문을 손등으로 닦아보다가 당신의 잔상으로 만족하고는 내일을 위해 누웠습니다. 잠이 올 리 없지만, 내일이라도 보려면 억지로라도 자야 합니다. 이 와중에도 당신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어서 커튼을 치지 못합니다. 내가 쬐는 햇빛과 당신이 쬐는 햇빛은 평등해서 내게 과분합니다. 당신에게 전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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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당신의 집에서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굵은 선의 목소리가 나를 두렵게 만듭니다. 흘낏흘낏 보이는 짧은 머리가 추측을 현실로 만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당신이 좋습니다. 당신이 낯선 이를 좋아한다고 해도 당신이 좋을 겁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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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당신이 그곳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는데 하나도 기쁘지가 않습니다. 당신의 웃음소리가 잦아졌는데 하나도 기쁘지가 않습니다. 이 모든 감정의 이유는 그 원인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것. 왜 나와 당신은 이런 사이여야만 할까요. 그렇다고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당신과 만날 수 있다는 것도 내겐 기적이니까요. 이 기적이 가능한 한 오래 지속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진심으로 당신의 행복을 빌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불안한 마음에 그 사람을 잡아들였다. 역시나 똑같다. 저주라도 걸린 듯 변하지 않는 외모라니. 정말이라면 꽤 짓궂은 저주다. 누구의 짓일까…? 북쪽 숲의 끝자락에 사는 파란 마녀? 아니면 심해에 있는 뾰족 궁의 하얀 마녀? 그것도 아니라면 떠돌이 생활을 한다는 백의의 연금술사?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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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꿈을 꿉니다. 그 꿈은 너무나 달콤합니다. 영원히 깨지 못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당신이 내 앞에 있습니다. 숨을 들이마시면 당신의 향이 폐를 가득 채웁니다. 지독한 청향. 꿈에서 깨게 될까 봐 눈을 깜박이기도 싫어집니다. 손을 뻗어 당신에게 닿게 된다면 꿈이라 확신하게 되겠죠. 그러니 손이 자유롭지 못한 것은 행운입니다. 꿈속에서라도 당신에게 직접 전하고 싶은 말이 많아 입이 닫힐 틈이 없을 겁니다. 그러니 입이 자유롭지 못한 것도 행운입니다. 발을 움직여 당신 바로 앞에 서서 눈을 맞추고 싶겠죠. 그러니 발이 자유롭지 못한 것도 행운입니다.


직접 추궁하겠다고 한 게 문제인 건지, 질문을 해도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고문은 될 수 있으면 피하려고 했는데. 벽 한쪽에 놓여있는 무수한 물건들을 쳐다본다. 벌써 들리는 찢어지는 비명과 검붉은 피의 향연. 어차피 같은 결말이라면 빨리 끝내버리지. 머리가 지끈거린다.


오늘은 조금 아픈 꿈에 삽니다. 당신이 내게 묻는 그 어떤 말에도 저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하고 싶던 모든 말 중 단 하나도 입 밖으로 낼 수 없습니다. 입에 담을 수는 있지만 그게 전부입니다. 이런 나를 모르는 당신이 혼자 아파할까 봐, 다만 그것이 지금의 유일한 걱정입니다.


내 예상과는 다르게 아주 미세한 소음도 생기지 않았다. 고통스러움에 못 이겨 입을 열고 신음을 토할 만도 한데, 표정만 일그러질 뿐 다른 건 없었다. 계속해서 묻는 이름과 가문에도 그 어떤 말도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써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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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내 향이 강해 당신의 향을 맡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내겐 아직 당신의 향이 아닌 모든 것이 남아 있으니까요. 주변이 어두운 탓에 당신이 더 잘 보입니다. 내가 당신을 더 잘 볼 수 있게 빛나주세요. 해가 뜨고, 달이 뜨며, 별이 뜬다 하더라도 그보다 더한 빛을 내, 내가 당신만을 볼 수 있게 해주세요. 이것이 오늘의 내가 바라는 유일한 소망입니다.


얇은 바늘이 피부를 뚫고 들어가는 그 순간에도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이쯤 되면 지독하다기보단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이렇게나 고통을 참을 수 있나? 정신은 올곧지 못한지 눈은 반쯤 감기고, 숨소리는 고르지 못하다. 그러길래 처음부터 말하면 이러지는 않았을 텐데. 기분이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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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입안에서 비린 맛이 감돌고, 당신의 모습도 흐릿합니다. 향도 잃어버렸는데 모습마저 잃어버린다면 내가 취할 수 있는 것은 목소리일 뿐일까요. 아니요, 그것마저 좋습니다. 그러니 마지막까지 함께만 해주세요. 당신이 나를 까맣게 잊어버려도 괜찮습니다. 내가 당신을 기억할 테니 부디 곁에만 있어 주세요. 당신을 조금이라도 온전히 기억할 수 있게, 거짓된 기억을 가지고 가지 않게 도와주세요.


지독한 피비린내 때문인지 머리가 울린다. 기력이 다한 건가? 가까이 다가가 소리를 들어보니 살아는 있는데. 그 와중에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걸 보니, 정신이 완전히 나갔군. 이걸 어쩐다. 포기할 수밖에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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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꿈은 지나치게 호화롭습니다. 코도 눈도 멀쩡하지 않지만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이 내 바로 앞에 있다는 사실을요. 최후의 만찬, 그런 것일까요. 만약 그런 거라면 누리고 싶은데.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없습니다.


약이 들어갔으니 온갖 말들을 술술 털어놔야 정상인데, 어째서 단 한마디도 없을까. 내가 원하는 사람이 아니었나? 가문도, 이름도 없는 자인가? 내 욕심이 무고한 생명을 하나 죽였구나. …'말이 없다'라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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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비가 오나 봅니다. 날씨도 춥고, 바람도 많이 붑니다. 나야 상관없지만, 당신은 맞으면 안 될 텐데요. 그럴 리가 없는데 비가 따뜻합니다. 이런 비라면 당신이 맞아도 괜찮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를 맞아보고 싶어 했던 당신의 소원, 이룰 수 있을 겁니다.


설마 했는데.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머리가 멍하다.

이건…뭐야? 이게 무슨…!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자라지 않는 것도, 말을 하지 못하는 것도 전부 내 탓인데. 나는 너를 아프게만 했다. 그동안 너를 잊어버려서, 잊어버리고 혼자만 잘살아서 벌을 주는 걸까? 이런 벌은 불공평하잖아. 잘못은 항상 내가 하는데, 왜 벌은 모두 네가 받는 거야. 나 때문에 아파야 해서 미안해. 내가 이기적이어서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어서 미안해.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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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비는 비가 아니었나 봅니다. 아니면 오늘 보이는 이 모든 것이 거짓인 걸까요. 당신이 내 손을 잡고 흐느껴 우는 소리, 그런 당신에게 잡힌 손의 온기, 선명히 느껴지는 눈물 냄새와 당신의 냄새. 나는 너무 이기적이어서 당신이 나를 위해 울어주는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합니다. 하지만 너무 울지는 마세요. 마지막으로 보는 당신의 모습이 우는 모습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꼭 웃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우는 모습만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울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항상 그랬듯이 콧잔등을 한 번 꼬집고는 못생겼다고 핀잔을 줄까요? 그게 싫다면 그냥 말없이 품에 가득 안고서 등을 다독여 줄까요? 어찌 되었건 이리 오세요. 내 처음이자 마지막.


조금 전부터 계속 소소한 바람 소리만 들린다. 한참이 되었는데도 너는 아직 말을 꺼내지 않는다. 무슨 말일까. 내가 예상하는 게 맞을까. 계속 이렇게 있으면 추울 텐데.

"정국아."

"응."

"왜 그랬어?"

그래, 결국엔. 나는 네가 한 말의 의미를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모른 척할 수밖에 없다. 혹시라도 네가 그냥 넘어가 주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뭐가?"

"왜 나 대신...... ."

네가 말을 잊지 못하고 눈을 붉게 물들인다. 네 입에서 나올 말이 뭔지 알고 있다. 나는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한 일이다. 네가 행복해야 나도 행복하니까.

"좋아하니까."

"뭐?"

"좋아한다고."

결국, 네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흐른다. 그 조그만 몸에 흘릴 눈물이 얼마나 있다고. 조금 위험하긴 하지만, 네가 우는 건 싫으니까.

"뭐 하는 거...!"

"좋아해."

아주 짧게 마주쳤다 떨어진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다행히도 너를 보니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다.

"정국아, 나는..."

"알아."

네 입으로 그 힘든 말들을 꺼내게 하고 싶지 않아서 말을 가로막아 버렸다. 이것도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랑해."


*

나는 당신을 봅니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 속에서 당신의 흔적을 찾습니다. 지독한 비린내 속에서 당신의 향을 맡고,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치켜뜹니다. 당신이 머문 공기를 들이마시며 당신이 머문 공기를 한 움큼 쥐어 놓치지 않으려 애를 씁니다. 내가 기억하는 당신의 마지막 모습이 헛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오늘의 기억이 아닙니다.

반갑습니다! 상풀에서 활동하다가 시크릿 러브로 넘어갔었습니다. 그러다가 인연이 닿아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제 글 읽어주시고, 좋아해주시고, 댓글 남겨 주시는 한 분, 한 분께 너무 감사드립니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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