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와 부르심의 위대함으로 깊고 넓고 크게 우람해지는 장엄한 신앙의 영광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간절함은 있는데 비는 내용이 너무나 얇습니다. 너무 작습니다. 크게 기도하라고 하면 허황된 것을 구합니다. "아랍 민족을 내게 주시옵소서." 이런 게 장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의 실존을 만드십시오. 예수 믿는 한 인격과 영혼의 위대함과 깊이를 만들어내십시오. 이것이 신앙입니다. 욥은 그리로 갈 것입니다. 욥기의 시작에서 욥이 뭐에 탁 걸려 넘어졌다고요? 사춘기적 신앙, 순수하고 단순하고 확실하고 가난한 신앙에 탁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기서 어떻게 욥을 채우시는가, 그리고 친구들은 와서 이 문제에 어떻게 시비를 걸고 해답을 제시하는가를 우리가 낱낱이 살펴서 이 고비를 넘겨야 합니다. 이 산을 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라는 깊고 높고 넓은 자리로 나아갑시다.

-박영선, <욥기 설교> 중.

미움받는 기독교


우리나라에서 기독교인을 보는 시각이 안 좋아졌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원래 아예 모르는 초보나 완전 많이 아는 고수는 밉지 않다. 미운 것은 그 사이 어중간한 데 있으면서 아는 척은 혼자 다 하는 부류이다. 지금 일반적 비기독교인들의 눈에 비친 흔한 기독교인들 ㅡ사실 기독교인들이 서로를 봐도 마찬가지겠지만ㅡ 이 딱 그런 느낌이다. "우리는 답을 알고 있으니 우리만 따라오면 되는데 왜 그렇게 너는 말을 안 듣냐? 멍청하면 열심히 따르기라도 하든가 쯧쯧" 하고 있으니 가장 기본적 설득조차 안 된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곡은 꼭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알 것이다. 가사의 내용은 엄중한데 노래는 너무 터무니 없이 무작정 불러진다. 깊어지지 않는 한 설득력은 없다. 본인들에게는 먹혔을지 모른다. 모태신앙이라서 자연스럽게 어려서부터 세뇌처럼 교육받았을지도 모르고 너무나 힘든 상황에서 뜻밖의 도움을 기독교인으로부터 받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 저차원적인 설득에 넘어간 것은 잘못은 아니지만 그것이 남들에게도 통하리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사실 전도하는 이의 메시지가 터무니없이 긍정적이고 실제로 교회에서는 상처가 무엇이니, 하고 물어보더니 더 후벼파는 일이나 하고 자빠졌기 때문에 이미지가 안 좋아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강력한데, 심지어 기독교인 타이틀을 걸고 헛짓거리를 하는 일도 너무나 많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리는 아주 독특하게도 '그냥' 얻은 자리이다. 그것은 어떤 잘한 일에 대한 보상도 아니고 금수저처럼 타고날 수 있는 어떤 자산 같은 것도 아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잘해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다면, 그건 하나님과 사람의 격차가 너무 작은 상황 아닐까. 자비와 긍휼에서 비롯된 은혜로 신자가 되었으므로 그것은 '나는 좀 배워서 아는 놈이야' 하는 자랑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제대로 된 삶을 사는 사람이니까'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 같은 황당한 자신감이 몇몇 기독교인에게 흘러 넘친다. 그들은 이기적이다. 자신의 믿음은 고귀하고 소중한 반면 남들의 생각은 하찮다. 들어주는 것 같이 하다가 어느 틈엔가 그저 자기 말이 맞다고만 한다. 그들은, 멋이 없다.

올바른 내용을 설파하는 사람은 멋있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치열한 고민과 울부짖음으로 모종의 깨달음에 도달한 이는 멋있다. 필요조건이 아니라 충분조건이다. 그래서 그들은 설득하고자 하지만 그것이 저열하거나 불명예스럽지 않다. 억지스럽지 않다. 자연스럽고 매끄럽다. 이유는 단순하다. 말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설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에게서 배어나오는 향기는 초감각적이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흡인력 있고, 달변이 아닌데도 왜인지 탄복하게 하는 힘이 그들에게는 있다. 그들 스스로는 모르는 경우도 많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멋과 향과 맛을 그들은 따로 추구한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따라왔을 뿐이다.


쉽게 뱉어진 사랑은 무가치한 법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하는 말은 단순하고 강력한 진실이지만, 남용 및 오용되고 있다. 교회는, 그리고 교인은, 훨씬 더 스스로 깊어지기 위한 노력을 해야한다. '이 정도 했으면 난 할 만큼 했어' 하기 위한 어떤 기도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백날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인류를 위해 기도한들 그것이 단순히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면 쓸데 없다. 하나님을 그런 것들로 충족시킬 수 있다는 기대를 교회에 수년 수십년간 다닌 이가 여전히 하는 것이 오히려 놀랍다. 하나님은 사람이 작전을 짜서 감동시킬 수 있는, 그래서 적절한 감동을 그 분에게 선사하면 그쪽에서는 적절한 복을 주어 잘 살게 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교회에 관심을 가진 상처 받은 영혼은 상처의 치유를 원하지 '하나님은 사랑입니다'라는 문장 암기 요구를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것은 온갖 보이지 않는 것들로부터 자연스럽게 체득되어야지 강의를 들어서 될 것이 아니다. 더이상 교회에서 "야 임마 사랑을 줬으면 받아야지 왜 줘도 못 먹냐?"하는 식의 윽박지름은 보지 않았으면 한다. 이웃을 사랑하되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라 했다. 내가 받았으면 하는 사랑을 저들에게 주면 된다. 진정으로.

사랑에는 완성형이 없다. 사람은 유한하고 하나님과 급이 다르므로 하나님 그 자체인 '사랑'에 자기 힘으로 도달할 수가 없다. 그래도 한 번 해보라고 성경은 말한다. 네가 하는 그만큼이라도 하는 것, 잘 했다고 더 잘 해보라고 권면한다. 그 말을 들으면 내가 잘한다고 잘났다고 자랑할 수가 없다.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사람은, 그 내용을 무시하는 사람 뿐일 것이다. 사랑에는 마침표가 없다. 그렇지만 포기할 수도 없다. "나를 닮아보렴. 안 될 거야. 하지만 최대한 해보렴. 해내는 것이 아니라 하려고 하는 것이 그 자체로 사랑이란다" 하고 말씀하신다. 편하려면 무시하면 된다. 무시해도 내버려두시는 듯하다. 그렇지만 믿는 이의 영광은 그렇게 타협하여 편해지는 데 있지 않다. 고민하고 고통받고 힘들어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이 제시하신 길을 걸으려고 끝까지 시도하고 노력하고 좌절하고 회복하는 그 과정 자체에, 뜻밖의 커다란 영광이 있다. 그 영광과 은혜와 축복의 길을, 가자.

같이 걸어가고 싶습니다. 두런두런 이야기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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