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런 저런 일들을 겪는 동안 날이 많이 더워졌다. 무더위는 나에게 아주 긴 밤을 선사한다. 피부를 뒤덮은 열기를 식히기 위해 찬 바닥에 몸뚱이를 데굴데굴 굴린다. 몸이 좀 식으면 알아서 잠이 온다. 새벽녘에는 오히려 추위 때문에 잠이 깨버린다. 도로 요 위로 올라가 주섬주섬 이불을 덮으면 간밤에 억지로 잠을 청할 때보다 잠이 잘 온다. 몇 시간 남지 않은 출근 시간에 신경이 곤두서있기는 하지만 새벽에 새로 드는 잠은 꼭 좋은 꿈을 꾸게 한다. 밤 중에는 회사 일에 곤욕을 치르는 꿈을 꾼다든지 누군가와 다투는 꿈을 꿔버려서 불쾌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되는데, 새벽에 잠시 깼다가 다시 잠이 들면 짧게나마 추억을 회상하는 시간 여행을 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러다 고작 몇 주, 혹은 몇 개월 전의 일들이 아련하게 꿈에 나왔을 때는 복잡한 여러 심경 중에서도 유독 민망함이 있었다.

  여행을 본격적으로 기획하고 시작한 건 작년 10월 경이었는데, 제대로 노는 맛이 들어버린 건 올해 1월 초의 스키 캠프였다. 그렇게 된 건 철저히 과학적인 결과였다. 마음껏 아드레날린을 분출한 직후에 어두운 조명 아래 옹기종기 모여서 가슴 벅찬 노래를 감상하고, 누군가는 열렬히 뜨거워진 마음을 분출하듯 노래를 토해내고, 설상차는 소리 없이 하얀 눈을 하얀 눈 벌판 위에 토해내고, 사람들은 들떠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초롱초롱한 서로의 눈과 눈을 맞추며 이 밤이 그 어느 밤보다 길기를 같은 맘으로 기다려보는 것이다.

  한순간에 지폈던 불꽃이 다시 차디찬 눈 속에서 꺼트려지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에 나는 수많은 복잡한 사건과 연관성과 개연성과 사람들의 눈빛과 속내를 읽다가도 여지없이 민망함에 온몸을 구푸린다. 놀랍도록 우습고 어리석은 한 명, 한 명의 선택과 과오가 재미를 넘어서서 짜증이 일도록 엉망진창이었다. 신중하지 못하고, 절제력이 없다는 건 무더위의 짧은 밤을 못 견뎌하는 나와 닮았다. 그러나 우리는 좋은 핑계를 찾았다. 우리는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해도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순간의 즐거움을 그리 쉽게 포기하지는 못할 것 같다. 백 번이면 백 번 다, 대단히 큰 잘못도 아닌데, 그런 마음으로 같은 선택만을 수도 없이 반복하겠지. 마치 영화 트라이앵글처럼.

  20년도 상반기를 큰 소득없이 보내는 와중, 다니는 회사에 싫증이 심하게 나고 있다. 마음이 이미 많이 떠버린 상태다. 눈치 빠른 과장님은 알아챘을 것이다. 지금은 마음을 다스리자는 쪽이 60% 지지를 받고 있지만, 98%의 내 마음 국민들은 선한 영향력에 기대어 죽지 못해 다니자는 염세적이고 체념조 주의자이다.

  원이에게 소개 받은 독후감 대회의 접수 마감일이 얼마 안 남았는데, 책은 펴보기만 하고 여태 완독을 못했다. 퇴근 후에도 언니의 육아를 돕느라 바빴던 한달하고 일주일을 보냈다. 다음주에 언니는 아기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다. 아기가 오고 일주일 정도 되었을 무렵, 때이른 섭섭함에 눈물을 글썽였었다. 금세 아기에게 정이 붙어서 곧 돌아갈 아기가 보고 싶어질 걱정이 들었다. 언니와 한 집에서 지내기도 오랜만이라서 참 좋았다. 언니와 아기가 다시 돌아가면 그 섭섭함과 그리움으로 남은 20년도 하반기를 보내게 될 것 같다.

  다시금 이 무더위와 또 금방 찾아올 써늘한 가을과 또 매서운 추위를 나는 나를 꼭 닮은 동생과 보내게 될 줄 안다. 어떤 날은 견디기 힘들 만큼 너무 길었지만, 다 지나고 나면 손 끝에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짧아서 다시 그 날들을 찾아온다는 건 영영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다 아쉽고 섭섭하고 아직 가지도 않은 세월이 그리워져서 슬퍼지고 눈물을 글썽이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날들은 민망함을 남기겠지만 때로는 잠깐의 회상만으로도 마음이 미어지게 애틋하게 만드는 추억도 종종 생길 것이다. 어제는 매우 크고 밝은 달이 원형의 하늘을 넓게 비추었었다. 한동안 아름다운 풍경에 눈과 마음이 빼앗겨 동생과 가만히 서서 달과 하늘을 구경했다. 그러니까 그저 바라만 봐도 아름다운 날이 꼭 이렇게 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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