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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 위로 기우는 게 달인가 나인가

31화


궁을 나온 나는 렌타이르 하우스가 아닌 수도의 호텔 파바룸으로 향했다. 그리고 사흘을 머물렀다. 마음 같아선 베라드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수도에서 베라드 영지까지 가기엔 여정도 여정이나 주변정리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공작가의 안주인으로서 일도 있었고, 특히 개중에는 가문 행사에 관련된 게 있어 함부로 손을 뗄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본래 가렌사에서부터 내게 주어진 일이 최소한에 가까웠던 터라, 대부분의 일은 집사 안드레드에게 위임하면 끝날 정도라는 것이다. 


물론 간단하게 처리하려면 하녀장인 미레일에게 넘겨주는 것이 가장 수월할 수 있으나, 기실 나는 그녀에게 받아왔던 그간의 대접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차피 새로운 공작부인을 들이게 되면 미레일이 손을 뻗는 건 자명한 일. 그 전에 그녀의 세를 멈추는 것 정돈 공작가문을 위해서 나쁘진 않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면서 갑작스럽게 일거리가 늘어난 형국이겠지만 안드레드에게 심심찮은 사과와 함께 위임한다는 내용을 적어 보냈다. 더불어 그간 가문 행사 일정에 대한 것들을 추가로 적어둔 나는 그걸 밀봉하여 렌타이르 하우스의 공작에게 보냈다.


미야는 그 사이 수도는 물론 제국 각지에 뻗어있는 플뢰르의 지부에 연락을 넣었다. 물론 그래봤자 수십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목이 좋은 영지엔 죄 지부가 들어서 있었다. 미야가 정보들을 빠삭하게 취급한 이유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정도라면 어지간한 정보상들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다.


나는 미야에게 넌지시 기왕 벌인 사업, 혹 거두려거든 잠시 보류하는 건 어떻겠느냐 물었다. 사실 공작부인으로서의 나는 안살림을 책임지고 휘하의 사용인들을 관리하는 것까진 가능하나 마음에 드는 이를 골라 직책을 내리는 것까진 불가능했다.


그런 것은 가문의 주인에게만 허용되는 것이니까.


물론 지금이라면 베라드 가문을 이끄는 가주이기에 평민인 미야를 준귀족으로 들일 순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임명할 수 있는 선은 준남작 정도. 나는 미야의 능력이 그보다 위로 올라가야함을 알았다.


“걱정하지마세요, 주인님. 저는 주인님의 손발이 되어드릴 거랍니다. 그러기 위해선 잘나신 귀족나리들에 맞춰 다니는 것보다 좀 더 아래에서 위를 올라보는 시늉이 더 낫답니다.”


물론, 주인님껜 늘 사랑받고 싶지만요.   


나는 미야의 간드러지는 목소리에 옅게 웃으면서 그녀의 재잘거림을 즐겼다. 그러다가 사용인들이 똑똑 문을 두드리는 것에 몸을 일으켰다. 귀족들의 신분을 어느 정도 가려주고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하게 금지하는 파바룸인지라 객실 안으로는 직원들조차도 들어오지 않는다. 이 탓에 수발을 드는 일행이 없으면 스스로 해결해야한단 번거로움이 있지만, 미야나 나나 오히려 그런 부분에선 편했다. 문을 열자마자 유니폼 차림으로 예를 갖추며 사용인이 은쟁반을 내밀었다.


“렌타이르 하우스에서 온 편지입니다. 부인.”

“고맙네.”

“편지 외에 온 것은 어떻게 할까요?”

“이전처럼 돌려보내게나.”

“알겠습니다. 혹 시키실 일이 있다면 종을 흔들어주십시오.”


사용인이 물러나자마자 나는 안으로 들어가 저만치서 어린아이처럼 테라스로 나가 밖을 보는 미야를 불렀다.


“미야.”

“주인님. 사흘째 난리네요.”


물량공세라도 하듯 옷이며, 신발이며, 보석까지. 공작부인일적엔 남보다도 못한 사람인양 대하더니 이제 갈라서니까 새롭게 보이나봐요. 하참. 모양새 빠지게.


미야는 파바룸에 들어온 날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뺄 새없이 저것들을 보내온 귀족들의 이름을 열거했다. 개중 몇은 변방귀족에 해당되는 이름이나 태반은 공작과 거리를 둔 이들의 이름이었다. 


나는 그 이름들 모두를 기억하곤 거기에 들지 않는 이들을 미야에게 적도록 부탁했다. 그녀는 어렵지않게 그들의 목록을 추려냈고, 새 편지지를 내어 개중 가장 언론에 힘이 있는 이를 골라냈다. 그리곤 간단한 안부인사와 함께 현재 내가 머무는 곳에 날아온 물건들을 나열했다.


미야가 다가와 보이지않는 귀와 꼬리를 꼼질댄다.


“주인님. 쫓아내시려고요?”

“쫓아내긴. 돌려보내도 내어준다면 그 뜻을 깊이 헤아려주어야하지 않겠니? 위네 자작 부인은 자선사업으로 유명하지. 그녀라면 내 기증을 기껍게 받아줄 거야.”


내 말에 미야가 까르르 웃더니 옆에서 빠진 물건을 나열해댔다. 그러다 한참, 미야는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모레쯤이면 히디가 따로 구한 용병들이 도착해요. 마차와 말, 보급품도 넉넉하고요.”

“잘 되었구나. 마침 내 일도 그때쯤이면 끝나겠다.”

“장거리는 힘이 드실 테니 중간에 게이트를 쓸 텐데 아무래도 가렌사 공작이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구나. 허나 강압적으로 굴진 못한다. 황명 아래 나는 이혼유예기간 중 나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 한다고 해도 게이트 앞에서 진을 치는 것뿐이겠지.”


나는 의연한 얼굴로 내가 보낼 편지를 봉한 뒤, 렌타이르에서 보내온 편지를 열었다. 단정하고 힘이 들어간 필체는 공작의 것이었고, 그는 사흘 동안 판에 찍은 것처럼 같은 이야길 반복했다.


-이혼은 없소. 그대는 부디 가렌사의 안주인으로서 그 의무와 권리를 가지시오. 나를 마주하기 힘들다면 그대가 바라는 대로 별거도 동의하겠소.


“흥. 이제 와서 고양이가 쥐 생각해주네요.”


미야의 심드렁한 반응에 나는 그녀의 콧등을 톡 두드리는 것으로 벌을 대신했다. 그리곤 사흘 내내 그러한 것처럼 공작의 편지를 화로에 넣어 태워버렸다. 편지지가 타들어가면서 매캐한 냄새대신 옅은 풀냄새가 났다. 나는 그 냄새가 가렌사 저택의 후원에서 나는 것과 비슷함을 알았다. 


미야는 어느 새 내 무릎에 고개를 기대고 있었다.


“주인님.”

“그래.”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세드리거너 도련님을 뵐 건가요?”


이미 물에 한참 잠겨있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시신이라면 물에 잠기고 채 얼마 지나지 않아 부패되거나 물고기들에게 몸을 내어주게 되겠지. 허나 베라드는 달랐다. 베라드의 혈족들은 죽음마저 물에게 보호받는 이이기에, 그 속도는 현저하게 느릴 것이다.


"…보아야지. 너무 오래 걸리지 않았니."

"네. 그러네요."





*






“히디는 언제 오는 거지? 꽤 오래 버티네.”


출발하는 날 아침, 내 아침 시중을 돕던 미야가 드문드문 시간을 확인하더니 누군갈 기다리는 것처럼 문쪽으로 시선을 자주 주었다. 


히디. 나는 그것이 미히드 소백작의 애칭임을 알지만, 여전히 매치가 잘 되지 않았다.


제 아무리 한량이긴 하나 어디로 보나 사내다우며 때때로 남들을 훑어보고 가늠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니 귀여우나 제법 사나운 미야완 대립될 뿐, 서로 화합될 것 같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미야를 아는 나이기에, 그녀의 머리 위에 누군가를 두는 건 적어도 나 외엔 없을 것이라 여겼다.


허나 잠시일 뿐이었다.


나와 미야가 채비를 마치고 파바룸의 로비로 내려가기 무섭게, 퉁기듯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주변의 이들을 의식한 것인지 머리는 마법도구로 흑갈색이 되었으나, 얼굴은 바로 며칠 전 연회장에서 마주한 적이 있어 알았다.


“미히드 소백-,”

“쉬. 여기선 참아주십시오. 부인.”


내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후다닥 만류한 그는 회의장에선 전혀 보기 어려울 만큼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곤 내게 가볍게 고개만 까딱이곤 미야에게 냉큼 손을 뻗었다.


“내 아가씨. 잠깐 나 좀 볼까?”

“아니? 왜. 여기서 말하지 그래? 아직 멀쩡한 것 같은데.”


미야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연신 누군가를 기다리는 얼굴을 했으나, 미히드 소백작의 앞에선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함을 가장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얼굴에서 살짝 비껴져 그의 배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이상한 행동을 주시하다 곧 소백작의 얕은 신음 섞인 목소리에 슬쩍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즐기기는 같이 즐겨놓고 마무리 없이 홀랑 가버리면 어떡하지?”

“그러게 평소처럼 쪼르르 왔어야지. 여태 늑장을 부려놓고 내 탓을 하면 어떡하니, 히디?”

“하하. 아가씨, 체벌은 바로 해줘야지. 내가 아가씨 덕분에 이리저리 발로 뛰어다니다가 몇 번이고 주저앉은 줄 알아?”

“어머, 내 구둣발 앞에선 자주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들이 점점 노골적으로 변해지는 것 같아, 나는 혹 사용인들의 이목을 끌까 큼큼 기침을 해댔다. 그러자 소백작과 미야는 어느 정도 타협을 끝냈는지 조그만 열쇠 하나를 건네받고는 떨어져 나와 내게 몸을 틀었다.


소백작이 먼저 다가와 손을 내밀자 나는 그 위로 가볍게 손등을 내보였다. 입술을 맞추지 않고 슬쩍 얼굴만 가까이 대었다 뗀 그가 말을 이었다.


“참 아쉽습니다. 좀 더 시간이 된다면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눌 텐데 말이지요.”

“기회는 이후로도 있을 겁니다.”


내 말에 그도 그렇다며 소백작은 더 이상 붙들지 않고 뒤를 돌았다. 그러면서도 미야에게 슬쩍 눈길을 주며 작게 저들끼리 속닥댔다. 이윽고 로비에서 나온 나는 준비된 마차에 올랐다. 그리곤 출발하는 날까지도 공세를 멈추지 않는 물건들에 배웅을 나온 호텔의 지배인에게 지금까지의 비용과 별도로 추가금을 내어주며 말했다.


“미리 언급한 대로 위네 자작가로 보내게나.”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부인.”

“그간 잘 쉬었다 가네. 수고하게.”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그리곤 미야가 올라타자마자 더 뒤도 돌아볼 것 없이 마차가 출발했다. 나는 안정적으로 움직이는 마차 안에서 미야가 평소와 달리 조용한 것에 슬그머니 그녀를 불렀다.


“무슨 일이니, 미야?”

“…아. 일전 주인님께서 말씀하셨던 마수 말인데요.”


노란 눈의 마수.


“그래. 뭔가 알아낸 것이라도 있니?”


미야는 찜찜해하면서도 곧 생각을 정리한 듯, 차분하게 말했다.


“마수들의 출현은 줄어든 것 같은데, 대신 최근 들어 몇몇 귀족들이 이상한 현상을 보인다고 해요.”

“이상하다면?”

“아주 잠깐, 자신이 뭔가를 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하는 행동들을 보여요. 그것들 대부분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이상하게도 짠 것처럼 미묘하게 의도적인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손짓이나, 말투, 시선처리 같은 것들이.” 


그리고-,


“그리고?”

“그런 현상을 보이는 귀족들 대부분이 가렌사 공작령과 가까운 영토의 이들인 것 같아요. 그게 드러나는 것도 공작이 수도에 들어왔을 때 좀 더 두드러진 모양이고요.”


덕분에 공작 쪽에서 이에 대해 알아보고자 움직이는 중이라며, 이게 좋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공교롭게도 내가 출발할 때 공작이 따라 붙을 일은 없을 것 같다 말했다. 


“…….”


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치미는 생각에 몸을 떨었다. 

미야 역시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꼭 같은 얼굴을 해보였다가도 이내 고개를 털어냈다.


“…억측, 이겠지요? 주인님.”


마수가 꼭 공작의 이목을 끌어주려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어느 쪽이던 그 대답이 가지고 올 만약이란 것이 썩 내키지 않았으니까. 그건 미야 역시도 마찬가지였기에, 우리 둘은 게이트에 도착할 때까지 그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게이트를 넘어 북부에 가까워질 때까지, 나는 공작의 흔적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에 의심이 확신으로 접어드는 걸 느꼈다.


덕분에 베라드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잦은 악몽에 시달려야했다.


그 악몽은 늘, 잊지 말라는 것처럼 나를 불러댔다.



아에나아.



글쓰는 사람 @firemoth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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