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포스타입에 게재한 연성으로, 소장본 천사이야기 회지에 두 번째로 실린 단편입니다. 소장본에 실린 교정/퇴고가 끝난 버전으로 재업로드합니다. 소장본 표지디자인 타르프님(tarf_design)


*세미오픈-해피 엔딩





김독자가 깨어나지 않은 지 일주일이 지났다.


무슨 잠자는 숲속의 백설공주도 아니고.

수영씨, 동화 두 개가 섞였는데요.

김독자 컴퍼니 사람들은 애꿎은 잠든 몸만 노려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아봤자 김독자는 깨어나지 않았다. 유중혁은 아무리 잠들어 있는 김독자라도 거의 죽여버릴 기세였다. 분명 잠들기 전에 자기가 무슨 히든 시나리오 하나를 진행할 거라는 언질을 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겨진 말은 그게 끝이었다. 히든 시나리오를 한다는 것 외에 그 어떤 정보도 없이 사람들은 김독자가 깨어나길 기다렸고,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일주일 동안 그들은 침대에 곱게 눕혀진 김독자를 깨우지도 못하고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찬물을 부어도, 뺨을 때려도, 숨을 쉴 수 없게 코를 막아봐도 김독자는 일어나지 않았다. 거의 가사 상태에 빠진 것 같았다. 가끔은 허여멀건 한 얼굴이 죽은 것만 같아서 코 밑에 손을 대보기도 했다. 숨은 쉬고 있었으나 그뿐이었다. 아저씨가 다시 일어날 거라며 꿋꿋이 기다리던 신유승은 결국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다시는 사라지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아저씨…….

분명히 숨을 쉬고 있으니 죽지는 않은 게 분명한데, 의식이 없이 누워만 있다면 숨 쉬는 게 무슨 소용인가. 유중혁도 속이 타기는 마찬가지였다. 김독자가 자신만만하게 금방 돌아올 거라고 말했을 때는, 혹시 위험한 거면 반드시 같이 가라, 안 데리고 가면 죽여버리겠다고 말해두긴 했었다. 실제로 김독자는 어딜 가지는 않았으나, 설마 그 시나리오의 시작이 방에서 평범하게 잠을 자며 이루어질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아침에 김독자를 깨우러 들어갔던 이길영은 처음에는 형이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고, 다음에는 형이 아프다고 생각했으며, 문제가 생긴 걸 깨닫곤 모든 컴퍼니 사람을 불러왔다. 불려온 모두도 이길영과 똑같은 과정을 거치곤 했다. 잠들어버린 김독자의 몸을 붙잡아 흔들고, 좀 세게 때려도 보았다가, 이내 무언가 큰일이 일어났다는 걸 깨닫고 포기했다. 그리고, 그 누구도 김독자가 무슨 시나리오를 진행하는 중인지 알 수 없었다.

첫째 날은 그래도 좀 여유로웠다. 사람들은 김독자를 잠탱이라 불렀다. 셋째 날까지도 잠만보 같은 농담이 속출했다. 그러나 김독자가 깨어나지 않은 채 닷새가 지나자 사람들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심각해졌다.

메인 시나리오가 시작할 때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건만 김독자는 속눈썹 하나 움직이지조차 못했다. 이미 성좌가 되어 몸의 구성이 다른지라 밥을 먹지 못하는 건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날이 갈수록 김독자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핏기가 가시길래 일단 이설화의 주도하에 설화팩도 몇 개 꽂아 둔 상태였다. 동료들은 김독자를 침대 위에 눕혀두고 나가 각종 서브 시나리오를 하고 돌아왔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매일 밤 번갈아 가며 김독자가 누운 침대 앞에 머물렀으나 김독자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일주일쯤 되었을 때 참지 못한 한수영이 어디선가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왔다.

유중혁, 너도 저 새끼 못 깨우지?

깨울 수 있었다면 벌써 깨웠지 그걸 말이라고 묻는 건가.

유중혁은 한수영을 돌아보았다. 한수영은 품속에서 동그랗게 빚어진 약 몇 알을 꺼내는 중이었다. 척 보기에도 수상해 보였다. 유중혁이 빤히 쳐다보자 한수영이 알약을 내밀었다.

쟤, 그냥 자는 거 아니다.

그건 나도 안다.

저번에 보니까, 잠꼬대를 하더라고.

잠꼬대?

한수영은 설명 없이 약을 내밀었다. 유중혁도 군말 없이 약을 받아들었다. 한수영이 잠든 김독자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이 새끼 그냥 자는 게 아니야. 꿈을 꾸고 있다.

이어지는 말은 유중혁도 짐작할 수 있었다.

도깨비 상점에서 파는 건데, 남의 꿈속으로 들어가는 약이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잃어버린 세계




사용법은 간단했다. 한수영은 약을 쪼갠 다음 그중 반을 가루로 만들어 물에 섞었다. 반쯤 상체를 세워놓은 김독자의 입에 약이 섞인 물을 흘려 넘기고는, 손으로 붙잡아 억지로 턱관절을 움직이고 등을 치며 내려보냈다. 나머지 반은 유중혁의 손에 맡겨졌다.

다녀오겠다.

유중혁은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주저 없이 약을 입에 넣고 꿀꺽,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이물감이 목 너머로 지나가는 순간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몰려왔다. 유중혁은 졸음에 저항하지도 않았다. 누가 어디론가 몸을 잡아당기는 듯한 힘이 몸 전체를 쥐어뜯었다. 그 순간,



유중혁은 어떤 마을 거리에 떨어져 내렸다.


잠에 빠질 때 느낀 압력이 셌던 것에 비교해, 떨어진 충격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유중혁은 툭툭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울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골목길과 슈퍼, 전봇대,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철물상회, 크게 동네 지도가 붙어있는 부동산과 간판은 낡았지만, 새것처럼 보이는 물건들을 바깥까지 펼쳐놓은 문방구가 있었다. 유중혁은 부동산 근처로 다가가 지도를 훑어보았다.


<서울시 ■■구 ■■동>

 

아직 아침인지 한기가 쌀쌀하게 스며들었다. 교복에 잠바까지 두툼히 여며 입은 몇몇 학생들이 삼삼오오 가방을 메고 학교로 향하고 있었다. 유중혁은 잠시간 그 평화로운 모습을 바라보며 할 말을 잃었다.

아주 익숙한, 유료화 이전의 서울 풍경이었다.

김독자의 꿈속에서 나온 이 동네는 어딜까. 그에게 무슨 의미를 지닐까.

문득, 유중혁은 자신이 유료화 이전 김독자가 어떤 동네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멸망이 시작된 이래로 지역의 구분은 시나리오 진행 범위 이상의 의미를 띤 적이 없어서이리라. 나고 자란 동네 같은 것이 갖는 그리운 함의는 소멸한 지 오래였다. 대부분 사람이 그렇다지만 특히 김독자는 자기 과거 이야기를 통 하지 않으니 더더욱 알 수가 없었다. 김독자 컴퍼니의 사람들이 개인적인 이야기를 제일 많이 나눴던 시절은 딱 김독자가 사라진 바로 그 3년간의 공백기였으니, 서로의 어릴 적 추억 같은 건 그 시절에 주야장천 나누고도 남았다. 서로의 학연 지연 혈연까지, 대한민국에 있는 연이란 연은 다 털어먹어 보니 어느새 진력이 나 더는 그 누구도 각자의 정보를 궁금해하지 않는 시기가 왔다. 바로 그 직후, 김독자가 돌아와서는 끊임없이 시나리오만 진행하는 바람에, 그 자리에 없던 김독자의 어린 시절은 누구도 모르는, 잊힌 유적처럼 숨겨져 있었다. 굳이 캐내기엔 눈앞의 현실을 견디기도 급급했다.

아니, 사실은 김독자가 조금 더 풀어져 있다면 누군가는 발굴하고 싶어 했을 터이다. 실은 유중혁이 그랬다. 그러나 어떤 유적은 그 자리에 붙박여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손길을 거부하는 듯한 모양새를 드러내곤 했다. 그리고 대개 그 거부는 실제로 스며들어 있는 의지이기도 했다. 김독자는 읽기를 원하지 읽히기 원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그래서 유중혁은 이수경을 통하는 편법조차 쓰지 않기로 했다.

결국에는, 읽긴 했다. 기회라고도 하기 어려운, 유상아가 만들어 준 틈새 덕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삶의 체험은 아주 짧디짧고 얕디얕은 것으로, 찬물에 잠시 손발을 담가 보았다 하여 계곡을 알았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유중혁은 김독자의 삶을 보았지만, 김독자의 삶을 안다고는 할 수 없었고, 김독자의 순간들을 보았지만 겪지는 못했기에 오히려 자신하지 않았다. 스쳐 지나가듯 본 김독자가 살던 동네의 거리 풍경을 서울의 정확히 어디라고 구분해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거기다가 이곳은 유중혁이 기억하는 장면들과도 미묘하게 다른 외양을 띠고 있었는데, 그것이 유중혁의 왜곡인지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도 확실치 않았다.

적어도 꿈에 나오는 정도라면 김독자에게 친숙한 곳이겠지,

그 정도만 짐작할 뿐이다.


일단 확실히 김독자와 유상아의 회사가 있던 위치는 아니다. 주변에 보이는 것은 깔끔한 빌라들과 아파트니, 어느 모로 보나 번화가보단 주거단지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아직 해가 덜 떴는지 길거리의 빛이 조금 푸르렀다. 꽃집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고, 불이 켜진 편의점 안에선 알바생이 무엇을 정리하는지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유중혁은 혹여, 김독자를 발견할 수 있을까 두리번거렸으나 고요한 아침 거리에 마왕이었던 남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날개는커녕 뿔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 마왕이 아닐 가능성이 더 크다. 유료화 전이 배경인 꿈이라면 본래의 평범한 김독자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며, 코인빨도 없는 모습이라면 지금보다 조금 체구가 작아 보일 수도 있겠지. 그런 가정에 따라 유중혁은 분주히 눈을 굴려 스쳐 가는 행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머리 스타일이 비슷하거나, 키가 비슷하거나, 좀 몸의 형태가 비슷한 느낌이 들거나…….

지나가는 그 누구나 김독자 같은 면면은 어느 정도 갖고 있었다. 바꿔 말하자면, 그 중의 누구도 김독자는 아니었다.

한참 행인을 대상으로 같은 그림 찾기를 하던 유중혁은, 일단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이 꿈속 세계가 김독자가 나오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시나리오라면 사전 정보 파악은 필수다. 지리를 알아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한 발을 떼던 차였다. 자리를 뜨려던 유중혁은, 또다시 걸어오는 한 무리의 학생들을 보면서, 어쩐지 아주 익숙한,

그러나 아주 낯선 얼굴을 발견했다.

유료화 전이 배경인 꿈이라면

본래의,

친구들과 팔짱을 끼고 환하게 웃으면서 걸어오는,

평범한,

그늘 없이 밝은 얼굴로, 경쾌한 걸음걸이의,

김독자……?

 

야 시발 너 또 이 새끼랑 같은 반이냐?

얘 문과잖아.

조까 시발, 담임이나 좀 잘 걸리면 좋겠어.

야! 니네 반 담임 수학이란 소문 있던데…….

아이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어지러이 골목을 울렸다. 열일고여덟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 사이에서, 유난히 하얗고 낭창한 한 소년이 파하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미친,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유중혁의 눈 안에 익숙하나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이 또렷하게 들어왔다. 유중혁도, 이성으로는 그 소년의 이목구비가 김독자의 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알았다. 코의 오뚝함과 눈매의 생김새, 눈썹의 흐린 정도나 모양과 귀의 생김새가 모두 똑같았고 입술의 모양까지 그랬다. 머리 모양도 달라진 바 없었다.

그러나 유중혁이 그가 김독자라고 선뜻 생각해내지 못했던 것은 딱 한 가지 이유였다.



웃고 있었다.

 

너무나도 행복하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김독자가.



김독자라고 해서, 웃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김독자는 도통 잘 웃지를 않았기에―성좌들 앞에서 보이는 그 가증스러운 비즈니스적 웃음이나, 답하기 곤란한 말을 애매하게 얼버무릴 때의 흐릿한 웃음은 당연히 웃음으로 쳐주지 않는다―김독자 컴퍼니의 멤버들은 김독자가 웃는 데에 더 신경쓰곤 했다.

그러다가, 어쩌다 아주 가끔 환한 웃음이 보일락 말락 하면 어른들보단 아이들이 먼저 알았다. 유승이와 길영이의 표정이 따라서 환해졌고, 그다음엔 무엇이 그를 그렇게 웃고 있게 만들었는지 열띤 토론이 벌어지곤 했다. 김독자의 자연스러운 미소는 마치 두더지 같아서 사람들이 알아채자마자 사라지기 마련이었는데, 놓친 후엔 두 번 다시 보기 어려웠다. 남에게 보여주기 그리 비싼 웃음이었다. 남들에게 기쁜 마음을 드러내는 게 죄라도 된 듯이 구는 김독자를 보면, 더 채근해서라도 표정에 변화를 일으키고 싶어지는 게 사람 마음이었다. 그러나 변화는 꾸준히도 느렸고, 매사 조심스러웠으며, 늘 숨고 싶어 했다. 유중혁은 그 입매와 눈가의 미묘한 호선에 집중하다 지치던 나날들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얄밉게도 거기선 그리 보이지 않던 웃음이 여기선 아주 헤펐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웃음을 숨기지 않을 때 얼마나 인상이 달라 보이는지 실감했다. 분명 사람은 똑같은데 분위기가 확 달랐다.

기분 탓인지 여기의 김독자는 조금 더 살도 올라 보였고, 피부도 더 뽀얗고 덜 창백했다. 핏기없던 입술에 혈색이 돌고 있었고, 입술이 튼 기색도 없다. 그에 따라 초조하고 예민해 보이던 분위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원스럽게 뻗은 팔다리는 움직이는 데 거침이 없었고 곧게 세운 상반신과 반짝거리는 눈동자에선 그 나이 또래다운 자신감과 패기가 느껴졌다.

세상 무서울 것 없는 눈이었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그런 눈을 본 적이 없었다. 이전의 김독자 역시 세상 무서울 게 없는 눈이었으나 그건 더는 잃을 게 없는 밑바닥에서 자신의 시체까지 대수롭지 않은 이의, 체념에 기인한 오기였다. 유중혁이 들여다보면, 김독자가 아니라 유중혁 자신도 언뜻 비쳐 보이던 마른 눈.

그러나 이 어린 김독자는 마치 잃은 게 없는 듯한 기색이었다. 교복을 입은, 김독자를 중심에 두고 서로 어깨동무를 했거나 발장난을 하며 걸어가는 한 무리의 학생들은 그대로 그렇게 유중혁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 네 걸음 더 걸어간 김독자가 급작스레 고개를 돌렸다. 뜻밖에도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어린 김독자가 유중혁을 쳐다보고 있었다. 유중혁은 순간 저도 모르게 김독자가 자신을 알아봐 주길 바랬으나 그 입에서 나온 반응은 기대와 달랐다.

와, 시발 존나 잘생겼네…….

발간 입술이 천연덕스럽게 열리며 가감 없는 욕설이 귀를 때렸다. 김독자는 유중혁의 얼굴에 순수하게 감탄은 했지만, 그 이상의 감흥은 없는 듯 단순한 욕설로 말을 마무리 지었다.

사는 거 존나 꿀이겠다.

그러면서 걸음은 그대로 학교 쪽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뭐, 누구?

야 방금 못 봤냐? 개씨발 연예인처럼 생긴 놈 있었는데…….

예쁘냐?

아니 씨발, 남자.

넌 또 무슨 남자를…….

여느 길가에 가도 한 명쯤 꼭 있을 법한, 그냥 천진난만하고 사는 게 즐거운 학생들이 그렇게 학교로 향하고 있었다. 유중혁은 멍하니 그들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저도 모르게 칼자루를 꽉 쥐었다.



<히든 시나리오 # ??? 잃어버린 세계>


분류 : 히든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꿈의 주인 ■■■가 자신이 원하는 세계를 선택한다.

제한시간 : 없음

보상 : 선택한 세계의 영구 지속



허공에 떠오른 글씨들이 유중혁의 마음속에 아프게 박혀 들었다. 실패 시 패널티가 없으며 보상은 선택한 세계의 영구 지속……. 김독자는 이 시나리오를 성공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이게 성공의 결과일지도 몰랐다.





김독자는, 조금 흥분과 설렘에 차 있었다. 다른 애들이야 이제 3학년이 되었답시고 짐짓 쿨한 척, 담임이 누구든 같은 반이 누구든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은 주고받았지만 사실 속내는 아닌 게 뻔했다. 3-1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몇몇이 김독자를 알아보곤 손을 흔들었다.

열~ 김똑!

야 감독 왔다 감독!

벌써 책상 위에 양발까지 올려놓고 의자를 불량하게 흔들거리는 놈들 근처에 김독자는 편히 앉았다. 아는 얼굴들도 꽤 있었고 모르는 얼굴도 있었지만, 그래도 대체로 평판이 나쁜 놈은 보이지 않았다. 요람처럼 몸을 흔들거리던 한 명이 김독자의 어깨를 툭 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감독님 오셨으니 올해 우리 반 축구는 우승이겠는데~?

어디 보자, 김독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진훈이랑 성재 있으니 공격수 출중하고, 골대에 인찬이 넣으면…….

야 최인찬 저새끼 존나 눈리신이라서 안 된다고.

응 아냐~ 니보다 나아~

일단 황의준 너 때문에 망한 듯.

김독자는 말을 끊고 들어온 황의준의 다리를 발끝으로 툭 쳤다.

새끼, 말을 끊고 지랄이야.

김독자가 눈에 힘을 주자 황의준이 머쓱하여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김독자는 한 번 피식 웃어주곤 고개를 돌렸다. 올해는 노는 거에 미친 놈들이 많이 보이니, 반에서의 일 년이 심심하진 않을 것으로 보였다. 아이들은 벌써 누가 더 발이 빠르네, 누구는 발보다는 손으로 던지는 게 더 낫네 저들끼리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교실 뒷문이 열렸다. 이미 올 만한 애들은 다 왔다고 생각했던 아이들은 잠깐 뒷문을 흘끔 쳐다보고 말았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대부분이 다시 문 쪽을 쳐다보았다. 방금 막 뒷문을 열고 들어온 동급생에게 시선을 두며,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사위가 고요해지자 성깔 있는 누군가가 감탄사처럼 욕을 뱉었다.

아, 씹…….

씨발 기분 개 같게 반 배정 누가 했냐? 존나 미친…….

덩달아 말을 받는 놈도 성질머리 사납기는 마찬가지였다. 김독자는 눈동자만 굴려 구석 자리에 조용히 앉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쟤 이름이 뭐였더라.

공교롭게도 김독자와 삼 년 내내 같은 반이었지만 김독자는 그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잘 알지도 못했고 말을 나눠 본 적도 없었다. 조별로 무언가를 짜서 같이 발표를 하는 숙제가 나오면 종종 낙오자들은 저 녀석과 같은 조가 되었다며 짜증을 내기도 했으나, 김독자에게는 별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김독자는 대체로 학생들 사이에서 평판도 좋았고 신뢰도 있었으니 큰 노력이 없어도 조별과제에 끼워주는 덕이었다. 익숙한 멤버들과 같이 계획을 짜는 동안, 저 구석에서 말 한마디 못하고 니가 다 해오라며 윽박지르는 아이들 속에 웅크린 남자아이는 눈만 돌려도 보이지 않았다. 끽소리 내질 않았으니 잊어버리기도 쉬운 존재였다.

생각 없는 놈들이 내뱉은 욕설로 인해 가라앉은 교실 분위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드르륵 열린 앞문으로 인해 한 번 더 환기되었다. 이번엔 애들이 앞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아아~! 하면서 어리광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설마설마했더니 진짜 수학이었고 예의 그 공포의 작대기를 들고 칠판을 탕탕 치면서 들어왔다.

야, 다들 자리 제대로 앉고 다리 똑바로 펴고, 늬들 나 알지?

애들이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꿍얼거렸다.

와 씨발 조졌다….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선생의 등장으로 인해 분위기는 급변했고, 아이들은 조금 전에 있었던 서늘한 적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싹 잊곤 적당히 활발하고 명랑하며 담임을 무서워하는 착한 소년들로 변모하여 자리에 앉았다. 김독자는 담임을 한 번 보고, 쩌네……. 하고 한숨을 작게 내쉬곤, 잠깐, 다시 그 구석을 쳐다보았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소년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히 가방에서 필기구를 꺼내고 있었다. 머리카락 밑 그늘에 가려 표정도 잘 보이지 않았다. 김독자는 왠지 모를 위화감에 그를 조금 더 보다가, 여느 때와 같이 눈을 떼고 사소한 존재는 머릿속에서 잊기를 택했다.

그렇게 그날 아침도 평온했다.



개학식 날부터 설교를 삼백 분은 들은 것 같았다. 아이들은 진절머리를 내며 교실을 빠져나왔다. 그나마 수업까지는 안 한 게 기적이었다.

하여간 재수 새끼 진짜 미친 거 아니냐…….

어, 김독자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적당히 걸음을 옮겼다.

야, 떡볶이? 롤?

난 둘 다.

니넨 학원도 없냐?

일찍 끝났잖아. 난 다섯 시부터 시작임.

나 지갑에 백 원 밖에 없는데. 천 원만.

원만이 새끼 또 지랄이네.

김독자 나 천 원만.

천 원으로 니가 쳐먹는 게 커버가 되냐?

김독자는 냉랭하게 쏘아붙이면서도 지갑을 열었다. 주변 아이 중에 지갑에 오만 원 짜리를 상시 구비하고 다니는 건 김독자밖에 없었다. 아직 중학교 3학년밖에 안 된 아이들 사이에서, 김독자는 그런 면으로 눈에 띄는 아이였다. 서슴없이 오천 원을 넘기자 이원민은 뭐가 그리 좋은지 구겨진 지폐를 받아들고선 헤헤 웃었다. 갚을 건 기대도 안 했다. 그래도 이원민은 돈은 없어도 은혜는 갚는 놈이라, 축구를 하든 게임을 하든 과제를 하든 김독자에게 뭐 하나는 꼭 진상하곤 했다. 그게 실력이든 조별과제 자리든 늘 그랬다. 의리 하나로 먹고 살아가는 거지, 김독자는 그와 자신의 관계를 등가교환으로 상정하곤 했다. 그러고 보니 방학 동안은 유럽에 갔다 오느라 동네에서 뭐 먹은 기억이 없었다. 오랜만에 라볶이를 먹을까, 아니면 제육 덮밥을 먹을까 고민하던 도중, 눈앞이 새까매졌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도저히 눈을 뗄래야 뗄 수 없는 미남자가 검은 코트를 걸치고 서 있었다. 아침의 그 남자였다. 어디 연예인인가 싶은 얼굴이 서 있으니 눈길을 안 끌 수가 없었는데, 어째서인지 하교하는 다른 여자아이들은 사뭇 조용했다. 김독자는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움찔했다. 새까만 블랙홀 내부처럼 강렬하게 타오르는 눈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나 하여 제 친구들을 돌아보았지만, 남자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김독자뿐이었고, 남자가 쳐다보는 사람도 김독자뿐이었다.

야?

어? 어.

김독자가 넋을 빼고 걸음이 느려지자 옆에서 어깨를 툭 쳤다. 김독자가 친구를 향해 멍청하게 대답하는 사이, 다시 고개를 돌리자 천천히 다가오는 남자가 보였다. 뭐야 씨발, 진짜 나 보고 있었던 거야? 김독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춤대자 친구들이 물었다.

야 왜 그래? 너 어디 아프냐?

김독자가 니넨 저 남자 안 보이냐고 묻기도 전에 남자의 억센 손이 김독자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남자가 낀 가죽 장갑 사이에서 손목의 살이 아프게 압박되었다. 순식간에 김독자는 남자의 손에 넘어질 듯 끌려가고 있었다. 뒤에서 친구들이 어디 가느냐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남자의 손아귀에서 도망칠 도리가 없어서 김독자는 그대로 발걸음만 옮겼다.

저기, 잠시, 잠깐만요, 아, 형, 잠깐, 아니, 야!

남자는 흡사 김독자의 목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 듯이 굴었다. 그러나 더 무서운 점은 그렇게 주변에 학생들이 많은데도 다른 학생들마저 흡사 남자가 보이지 않는 듯이 굴고 있다는 점이었다. 김독자는 남자에게 질질 끌려가며 주위를 훑어보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주춤주춤 팔을 내밀고 걸어가는 김독자만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뿐, 끌고 가는 남자 쪽은 보질 않았다. 골목을 몇 번 돌아 사람이 없는 주택가 안쪽 담벼락에 내팽개치듯 남자가 손을 놓자, 김독자는 한 번 휘청이곤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붙잡혔던 오른 손목이 얼얼했다.

씨발 존나 센데……. 대들면 뼈도 못 추리는 거 아냐…? 너무 쳐다봤나?

김독자의 머릿속에서 사이렌이 왜용왜용 울렸다. 도대체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그때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김독자.

저 아세요?

아세요 씨발, 하고 되묻고는 싶었으나, 김독자는 오른 손목의 고통을 감안하여 입을 순화하기로 마음먹었다. 삥을 뜯으러 왔다기엔 남자의 태도는 지금껏 보아온 불량배들과 결이 달랐다. 김독자는 문득 초등학생 시절 엄마가 가방에 달아 줬던 안심귀가 어쩌고 어린이 보호 시스템이 격하게 그리워졌다. 내가 그게 진짜 좋은 건지 모르고……. 한참 머릿속이 복잡한 김독자를 내려다보던 남자는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내뱉었다.

날 아나?

아니 그쪽이 절 아시냐니까요. 저는 형 모르는데…요. 누구신데요?

김독자는 이 잘생긴 남자가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아는지 궁금해졌다. 일단 골목길까지 끌고 온 방식은 난폭했으나 남자는 김독자를 해치고 싶어 하는 것 같지는 않았고, 돈을 뜯으려고 하는 것도 아닌 듯 보였다. 그때쯤 김독자는 긴장이 풀려 다소 삐딱한 자세로 서서 유중혁을 야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남자인 자신이 봐도 진짜 억 소리 나게 잘생긴 남자는 보다 보면 저도 모르게 기분이 좋긴 했는데, 별개로 이 남자가 자기한테 무례하고 위협적으로 굴고 있는 건 맞으니까 순순해지긴 싫었다.

내 이름은 유중혁이다.

그래서요?

대답은 대답인데 전혀 김독자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가 아니었다. 이름도 잘생기긴 했는데, 그게 누군데? 김독자는 퉁명스럽게 곧바로 반문했다. 그러자 유중혁의 눈썹이 꿈틀대었다. 무언가 심하게 맘에 안 드는 듯한 눈치였다. 혹시 김독자는 자신이 잘 모르는 연예인이 지금 연예인병 말기에 시달리며 자신에게 증상을 내보이고 있나 잠깐 생각했지만, 예능도 자주 봤는데 이 정도로 잘생긴 연예인이 기억이 안 날 리가 없다.

나를 모르나?

연예인이세요?

내 이름도?

가수예요?

난 가수가 아니다. 프로게이머고 회귀자다.

아 제가 리그는 잘 안 봐서…….

근데 회귀자는 뭐지. 김독자는 제 작은 머리통을 쥐어 짜내어 기억을 더듬었지만, 난생처음 듣는 단어였다. 더는 이 잘생기고 이상한 남자에 대해 궁금하지 않았다. 연예인이면 셀카나 한 장 찍고 자랑삼아서 뿌려보고 싶었으나 그뿐, 대화를 계속하기 싫어진 김독자는 팔짱을 꼈다.

어쨌든 그래서, 형 저 아냐고요.

…….

유중혁은 입술을 깨물더니,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남자는 표정의 변화가 크게 없는 얼굴인 듯 시종일관 잘생기고 매서운 이목구비가 얌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지만, 김독자는 왠지 모르게 남자의 감정을 알 것도 같았다. 이상하게 혼란스러워 보였다. 김독자가 그 이유를 물으려는 순간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안다.

예?

누구보다, 잘 안다.

그렇게 말하는 유중혁의 눈과 제 눈이 마주치자, 김독자는 이상하게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건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기에 김독자는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모르는 이 남자가 자신을 아주 잘 안다고 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뭐가 있는지 고민해 보았다.

혹시 저희 엄마나 아빠 친구세요?

물론 잘생긴 남자의 외양을 고려해 보았을 때 이제 사십 중반인 제 부모와 이 남자가 곧이곧대로 친구일 가능성은 거의 없었으나, 그나마 떠오르는 생각은 그거였다. 남자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이수경도, 알긴 알지.

예?

김독자는 표정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남자, 유중혁의 표정은 태연했지만, 김독자는 정말 도망쳐야겠구나 하고 생각하며, 머뭇머뭇 대답했다.

뭔가 좀 잘못 아신 것 같은데요, 형.

뭔가?

저희 엄마 이름은 이영희인데.

네 이름, 김독자 아닌가?

네, 맞긴 맞는데요. 성씨 김에 두터울 독, 사랑 자 써서.

태연하게 부정하는 김독자를 내려다보며 유중혁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제 이름에 뭐 문제 있어요?

무언가가 심각하게 잘못되어 있었다.





언제부터 서로에게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감정을 가졌느냐 묻는다면 둘 다 쉽사리 대답하진 못하였다. 유중혁은 그런 시기의 정의가 당장에 별로 필요 없다고 느껴서였고, 김독자는 정말 몰라서, 였다. 김독자는 늘 자신의 감정에 아주 느렸다. 유중혁도 느리긴 마찬가지였으나 일견 비슷하게 표출되는 두 사람의 면면은 그 방식이나 근원이 상당히 달랐다.

유중혁은 감정에 신중하여 확신을 두기까지 견고한 자기를 유지했고, 그에 따라 결론을 내리면 후회하지 않고 돌진했다. 그러나 김독자는 신중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유야무야 최대한 결론을 미루려고만 했고, 때로는 거기에 감정이 있었다는 것조차 몰랐다. 김독자는 정서적인 면에 무뎠다. 물을 마셔야 한다는 것조차 모른 채 갈증에 죽어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그조차 신음 하나 없이 고요해서 이상을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그에겐 보이지 않는 감정을 정의하는 것보단 몸으로 부딪치는 게 훨씬 더 빨랐다. 검이 아니라 입술을 마주 대고, 그 이후엔 몸까지 맞대고 나서야 김독자는 제 손안에 만져지는 유중혁을 사실로 믿었다.

이게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되네.

가끔 유중혁은 그런 식의 발언에 대해 따져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곧이곧대로 들으면 마치 김독자는 유중혁을 원하지 않았던 것처럼 들리는 말이었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김독자 쪽의 감정이 더 크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독자는 유중혁을 필요로 했고, 유중혁을 원했고, 유중혁이 원하는 바를 해 주고 싶어 했고, 유중혁이 있길 바랐다. 비록 그 주인이 사랑으로 이름 붙여도 손색없을 감정에 굳이 진의를 의심하며 다르게 정의해보려는 몹쓸 버릇은 있었어도, 버릇이 진실을 없애진 못했다.

다만 유중혁이 본 바로는, 김독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 욕망할 줄을 몰랐다. 시나리오 클리어에 도움이 되는 아이템 등 실리적인 것, 이미 세워둔 계획에는 그 누구보다 확고했으나 정서적인 필요에 대해, 실제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는 부분이거나 실리적인 중요성이 없는 사소한 영역에 대해서는 무욕했다. 쾌락은 느끼고 조금 즐겼으나 키스나 포옹을 조르진 않았고, 서운함은 있으나 상대를 규제하진 않았다. 매사 요구가 없는 애인을 누군가는 편리하게 여길지 몰라도 유중혁은 아니었다. 그러나 답답함을 강요할수록 유중혁의 욕구만 드러날 뿐 김독자의 기이한 수용은 두 사람의 대립 구도만 굳어지게 만들었으니 유중혁은 참았다. 단지 김독자가 원하는 것에 조금 더 기민하게 반응하려고 노력할 뿐이었다.

유중혁이 알 수 있는 것,

김독자가 요리에 토마토가 들어가면 싫어한다는 것.

김독자가 자기 어머니와 대면하면 조금 어색해하고 불편해한다는 것.

김독자가 아이들을 조금 더 챙겨주고 싶어 한다는 것.

그뿐이었다.

그러니 김독자가 어떤 물건을 좋아하고 싫어하고,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하는지에 대한 아주 단편적이고 지엽적인 항목들만 나날이 리스트에 쌓여갔다. 모든 핵심을 관통하는 포괄적인 대명제는 쉽사리 보이질 않았다. 자잘한 귀납들이 연역에 이르지 못해서 아무런 의미를 형성하지 못했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인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김독자가 자기 과거에 대해 마음속에서 어떻게 처리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유중혁은, 과거를 뒤지는 것이 참 의미 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때론 김독자 같은 사람에겐 그게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본인이 묻어버린 것들을 다시 끄집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유중혁은 김독자에 대해 보고 읽었지만 그게 김독자에게 허락을 받은 사안도 아니었을뿐더러, 그 일은 둘 사이의 어떤 대화를 새롭게 끌어내지도 못했다.

유중혁은 그저 다친 곳이 뻔히 보이는데도 치료를 허락받지 못한 의사처럼―아니 사실은 의사도 아닌, 그저 환자 옆에 앉아서 아무것도 못 하는 병문안 온 손님처럼, 김독자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뿐이었다.

김독자.

그래서 유중혁은 그냥 김독자를 부르고, 가끔 이야기를 말하고 듣고, 살을 맞대고, 잠자리를 가지고 그냥 그렇게 했다.

유중혁은 그때마다, 김독자를 부를 때마다 종종 그 이름에 묻어버린 오랜 폭력과 무시의 기원을 생각하곤 했다.

김독자.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이름으로 불렸던 삶을.

그리고 그 이름대로 원하지 않게 살았던 삶을.



김독자는 돌아버릴 노릇이었다. 경찰은 전화로도 문자로도 오지 않았으며 남자는 영 자신에게서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숨이 턱에 찰 때까지 달려 도망쳐도 남자는 금방 따라왔고, 김독자는 자신이 이 '유중혁'을 따돌릴 수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문을 열고 다급하게 들어간 파출소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자신을 따라온다고 주장하는 김독자를 희한하게 쳐다보더니, 장난치면 안 된다고 짐짓 엄한 말투로 꾸짖고 내쫓았다.

아무도 유중혁을 보지 못하며, 오로지 김독자만이 유중혁을 보고 있음은 확실해 보였다. 그렇다면 김독자가 미쳤거나 지금 이 상황이 꿈이거나 해야 했는데 볼을 아무리 꼬집어도 꿈에서는 깨지 않았다. 기어이 유중혁이 집까지 따라오자 김독자는 어이가 없어 꺼지라며 가방을 휘두르고, 나름 주먹도 휘둘러 보았지만 아주 간단히 제압당할 뿐이었다. 뒤꽁무니에 검은 코트의 키 큰 남자를 매달고서 어색하게 현관문을 연 김독자는 눈치를 보며 신발을 벗었다. 독자 왔니, 하고 안에서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가슴을 뜨끔하게 만들었다. 네, 하고 대충 대답하곤 과일 먹으라는 말도 손사래 친 김독자는 재빨리 유중혁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잠갔다.

와 미친 진짜 여기까지 들어오네…….

김독자는 가방을 바닥에 내던지고 침대에 널브러졌다.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는 유중혁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지친 김독자에게 더는 알 바가 아니었다. 저승사자인지 뭔지, 다른 사람들한테 보이지 않고 위해도 가하지 않으니 당장엔 처리할 필요도 없었고 처리할 방법도 없었다. 김독자는 혼자 벌인 추격전에 지쳐 침대 위에서 숨을 색색 대며 호흡을 골랐고, 유중혁은 태연하게 책상 앞 의자를 빼 뻔뻔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방 안을 구경이라도 하듯 이리저리 쳐다보기 시작했다. 김독자의 호흡이 잦아들 무렵 유중혁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크군.

그건 김독자도 자주 들어본 말이었다. 김독자의 집에 놀러 온 아이들이 으레 하는 말인지라 김독자는 익숙하게 되받았다.

…쩔죠.

집안이 잘사나?

뭐, 조금.

인테리어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유중혁이 보기에도, 집은 꽤 괜찮은 가구들로 차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 많은 가구가 일관적으로 집주인의 취향에 따라 보기 좋게 테마를 형성하고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색채부터 디자인이나, 재료가 된 원목들까지 비슷비슷했다. 과한 장식도 없었으나 단순하거나 값싸 보이지도 않았다. 재력이 없으면 모든 생필품과 가구를 이렇게 일관되게 구비할 수는 없을 터였다. 현관문 앞 복도부터가 시야가 확 트이도록 넓었고, 얼핏 보이는 거실 안쪽에서 들려오는 부모의 목소리는 아주 멀게 들렸다. 김독자의 방과 거실까지 거리가 꽤 있는 듯했다. 김독자의 방 바로 앞에도 열려있는 작은 화장실 문이 보였으나, 집 규모에 비해 턱없이 작았으니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화장실인 게 틀림없었다. 김독자의 방 역시 아이 방치고는 제법 넓은 편이었다. 옷장이 아예 없나 싶더니 벽장을 밀어낸 공간에 코트를 거는 게, 수납공간도 많아 실평수가 더 넓어지는 구조였다.

김독자는 방 안을 관찰하며 미묘하게 변하는 유중혁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보통 이럴 때 애들은 질투 나서 못 살겠다는 표정이거나, 그냥 존나 놀라거나 부러워하던데, 유중혁은 무엇을 생각하는 건지 착잡한 얼굴이었다. 이 잘생긴 귀신은 살아있을 때 거지였나, 생각했지만 후환이 두려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몇 분 후, 한숨 돌린 김독자는 겨우 침대에서 일어나, 코트와 교복 재킷에 조끼까지 벗어 옷걸이에 거는 부지런함을 발휘했다. 그다음 무의식중에 바지 벨트를 끄르던 김독자는 옆에서 빤히 쳐다보는 유중혁과 눈이 마주쳤다. 김독자는 빨개진 얼굴로 성질을 부렸다.

아 시발, 형 진짜 언제 사라져요?

학교 친구들과 수영장을 안 가본 것도 아니고, 목욕탕을 안 가본 것도 아니지만 단둘이 방 안에 있는 상황에서 자기 옷 갈아입는 걸 빤히 보고 있는 동성은 처음이었기에 김독자는 무안했다. 유중혁은 김독자에게 우리는 이미 섹스까지 끝마친 사이라고 이야기해줄까, 잠시 심술궂은 고민을 했지만 그랬다간 정말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빠져 버릴까 그냥 입을 다물길 택했다. 유중혁이 건성으로 고개만 돌리자, 김독자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교복 바지를 벗고 아주 잽싸게 걸려 있던 잠옷 바지로 갈아입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 남자 때문에 집 밖으로도 못 나가고, 앞으로의 대책을 생각해야 하니 편한 옷이 나을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끈덕지게 하반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낯뜨거웠다. 사실 이 형 게이 귀신 아닐까, 하는 생각에 목덜미를 타고 소름이 올라왔지만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유중혁은 여기의 김독자가 생각보다 평범한 몸매라는 데 주목하고 있었다. 남들보다 약간 마른 편이긴 하나 못 먹고 자란 티는 나지 않았다. 천성대로 입이 적어 소식한 결과로 보일 뿐, 피부도 탱탱했고 머리칼도 푸석한 기 하나 없이 윤기가 났다. 항상 김독자가 마른 것을 걱정하던 유중혁에게 있어 내심 만족스러운 부분이긴 했으나, 현상이 시사하는 바는 조금 위험했다. 잘 정돈된 크고 넓은 집안과 부족한 것 없이 자라 걱정이 없어 보이는, 해맑은 김독자.

왜 쳐다보는데요?

유중혁은 이 김독자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다소 귀여운 디자인의 잠옷 바지를 입은 어린 김독자는 이내 침대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유중혁을 맞받아 쳐다보았다. 이 어이없는 상황에서도 다시 자세히 보니 유중혁은 지나치게 잘생겼을뿐더러 그 잘생김이 도가 넘어 남자인 자신도 설레게 할 지경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저승사자가 보통 그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얼굴로 온다는데 나 사실 게이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발가락만 꼼지락대던 김독자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형 진짜 용건이 뭔데요.

말하지 않았나? 나랑 함께 돌아가자고.

여기가 제 집인데 뭘 어디로 돌아가요?

아니, 네 집은 여기가 아니다.

하여간 잘생긴 귀신은 아까부터 시종일관 같은 말뿐이었다. 대충 요약하면 네 진짜 세계는 여기가 아니니까 돌아가자는 말이었는데, 김독자는 왜 자신이 애들이 읽던 라노베를 안 읽었는지 존나게 후회했다. 이거 그 이세계 판타지물 그런 거에 나오는 전개 아니야? 그래도 안 읽어 본 것 치곤 제법 정확한 추측이었지만, 당장의 김독자에게 도움이 될 만한 지식은 아니었다. 차라리 김독자가 조금 더 평범한 집안의 아이였다면 내가 숨겨진 재벌의 손자라도 되나 기대라도 했겠건만 김독자는 그런 것도 필요 없었다. 김독자는 이 집이 좋았고 자기 가족이 좋았고 친구들이 좋았고 학교가 좋았고 이 동네가 좋았다. 딱히 삶에 불만이 없는데 갑자기 자기보고 다른 데 가자고 하는 사람을 무작정 따라나설 이유가 없었다.

너는 시나리오 진행 중이다.

그러니까 그게 뭔데요?

쉽게 말해서 이게 다 연극이나 꿈 같은 거란 소리다.

말을 하면서 유중혁은 발끝으로 김독자가 앉아있던 침대 매트리스를 툭툭 건드렸는데, 건드릴 때마다 매트리스가 살짝 들어갔다 나오는 게 보였다. 김독자는 자기 몸 밑에 자신을 받치고 있는 매트리스와 시트의 부드러운 감촉을 선명히 느낄 수 있었고 그래서 오히려 유중혁에 대한 신뢰는 가면 갈수록 더 떨어지고 있었다.

아 다른 사람 대신 데려가면 안 돼요? 이 동네 말고 딴 곳 가서.

혹시라도 귀신이 친구들한테도 이 짓거리를 할까 봐 조건까지 덧붙였건만, 유중혁은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아무나 데려가려고 온 게 아니라 널 데려가기 위해서 온 거다.

그러니까 전 거기 관심 없다니까요!

거기가 네 세계다.

여기가 제 세곈데요!

아니, 넌 거기에서 여기로 왔다.

시발, 그럼 거기 있던 게 저랑 동명이인이겠죠!

아니, 너다.

김독자는 가만히 앉아, 개명을 하면 이 귀신이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갈지 진지하게 고민했으나 고민이 길어지진 못했다. 첫째로 그렇다고 얘가 떨어져 나갈 것 같지도 않았고 둘째로 김독자는 자신의 이름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 이름자에 부여된 뜻이나 거기에서 고민한 부모님의 흔적 같은 게 김독자는 정말로 맘에 들었다.

여기 이 세계는 가짜다. 원래 세계에 네 부모인 이수경도 있고…….

아 뭔 소리야, 우리 엄마 이영희고 아빠 이름 김형규라니까!

기어이 김독자는 다시 소리를 높였다가, 곧바로 바깥 거실에서 티비를 보고 있을 엄마에게 들렸을까 봐 입을 막고 문 쪽을 흘끔거렸다. 유중혁은 때아니게 눈이 동그래진 어린 김독자가 조금 귀엽게 생겼다는 생각을 했으나 맘 놓고 구경할 때가 아니라는 게 그저 아쉬웠다.

형, 그럼 제가 계속 거절하면 언제 포기할 거에요?

안 포기한다.

제가 평생 거절해도?

네가 설득될 때까지 난 여기를 나갈 수가 없다. 여긴 지금 시나리오 구역이니까.

김독자는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믿고 싶진 않았지만, 경찰 신고도 안 들어가고 사람들도 유중혁을 보지 못하는 지금 상황에서 그 시나리오 구역이라는 거 하나는 진짜인 게 틀림없었다. 사람들은 유중혁을 모르고 물리력을 행사할 수도 없었지만, 유중혁은 김독자를 붙잡고 끌어당길 수도 있었고 그보다 더한 폭력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 그게 문제였다. 결국, 김독자는 그 어떤 일도 하지 못한 채 유중혁을 제 방 안에 두고 그날 하루를 보냈고, 심지어는 가족들과 저녁을 먹을 때까지 그랬다.

독자 무슨 일 있니?

저녁 식탁에서 죽을상을 짓고 있는 김독자를 보고 어머니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버지 역시 혹시 반 배정이 맘에 안 드냐, 선생님이 별로냐 물어왔다. 은근하게는 선생님께 잘 봐 달라고 부탁을 드려보겠다는 말까지 나왔으나 독자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저 뻔뻔하게 거실 소파에 앉아 남의 가족 밥 먹는 걸 쳐다보는 미남 귀신 때문에 체할 것 같았으나, 그건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유중혁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김독자의 두 부모를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특히, 김독자의 아버지가 손을 높게 들 때마다 그는 눈에 띄게 움찔거리며 여차하면 자리에서 일어날 태세를 취했는데, 이내 김독자의 아버지가 김독자의 밥 위에 고기반찬 하나를 더 얹어주면 혼란스러워하는 얼굴로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김독자는 저 새끼가 우리 엄마, 아빠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신경이 쓰여 미칠 지경이었으며 여차하면 부엌의 어디서 식칼을 꺼내 들어야 할지 심경이 복잡했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머릿속으로, 달려드는 유중혁을 식칼로 위협하는 상상을 열 번쯤 하며 밥을 꾸역꾸역 먹던 김독자는 얼마 못 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김독자는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후식도 마다하고 방에 들어와 문을 잠갔다.

형, 내가 진짜 형 다른 것도 맘에 안 들지만 뭐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데, 우리 부모님 건드리면 형 진짜 내 손에 죽어요.

어불성설이었다. 김독자는 유중혁의 털끝 하나 댈 실력조차 없었다. 체격 차이도 완연할 뿐 아니라 완력도 약했다. 김독자도 유중혁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김독자의 표정이 참 비장했기에 유중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그저 가만히, 그럴 생각 없다, 하고 대답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렇게 확신을 가진 얼굴로 당당히 ‘가족’을 말하는 김독자가 너무 낯설었다.

그날 김독자는 조금이라도 하려던 공부를 일찌감치 덮었다. 시종일관 유중혁을 째려보다가, 결국 할 수 있는 것이 없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컴퓨터를 켜서 게임에 접속했다. 익숙하게 로그인을 한 뒤, 헤드셋까지 끼곤 컴퓨터 너머의 친구들과 익숙한 양 대화하다 보니 김독자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유중혁은 게임을 하는 김독자를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이전의 김독자라면 관심을 두지 않았을, 유중혁과 공유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한참 김독자의 플레이를 보던 유중혁은 종내에 참지 못하고 몇 마디 훈수를 뒀고 김독자는 반신반의하면서도 따랐다. 그러자 그날 게임은 연전연승이었다. 헤드폰 너머로 와 역시 감독, 개쩌네! 하는 아이들의 칭찬이 돌아오자 김독자의 입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뺨이 빨개졌다. 그제야 김독자는 유중혁이 맨 처음 했던 자기소개에서 '프로게이머'라는 단어를 기억해냈고, 게임을 끄자마자 유중혁을 향해 몸을 돌렸다.

형 게임 잘해요?

그렇다.

그럼 저 가르쳐 줄 수 있어요?

김독자의 눈이 반짝였다. 유중혁은 한참 침묵하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김독자.

예?

소설은 안 읽나?

예?

김독자는 잠시 눈을 깜박이다가 멋쩍게 말했다.

…저 국어 실력 좋은데요.

그게 아니라, 책은… 안 읽나?

김독자는 입술을 비죽였다. 무슨 소릴 하나 했더니 이 귀신 형도 다른 어른들과 똑같은 꼰대질이었다.

어릴 때는 좀 읽긴 했는데…근데 저 안 읽어도 국어 잘한다니까요?

유중혁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오늘 하루 동안 유중혁이 그렇게 드러내놓고 불쾌감을 표시한 것은 처음이었기에, 순간 김독자는 겁에 질려 유중혁의 눈치를 보았다. 책을 안 읽는다는 말의 어디에 저렇게 화난 표정을 지을 이유가 있는지, 김독자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소설도?

김독자는 고개를 저었다.

인터넷으로도 안 읽나?

안…읽는데요…….

왜?

김독자는 집요하게 물어오는 의도를 이해할 수 없어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애들이랑 놀고 축구하고 학원 다니다 보면 그런 거까지 읽을 시간도 없는데…아니 책 읽는 게 중요한 거 저도 아는데요…저 어쨌든 국어 점수 달리지도 않고…….

유중혁의 표정이 점점 더 구겨졌다. 이상하게 목소리가 떨리는 것도 같았다. 유중혁은 결국 올리고 싶지 않은 이름을 입 위로 올렸다.

'멸살법', 모르나?

그게 뭔데요?

잠시 후, 김독자는 유중혁의 매서운 눈길과 지시에 따라 다시 컴퓨터를 켰다. 한 번도 가지 않은 웹 소설 플랫폼을 검색해서, 유명하다고 하는 플랫폼―김독자는 죄다 처음 본 곳들이었다―을 되는 대로 다 새 창으로 띄워놓곤 하나씩 열기 시작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각고의 노력 끝에 겨우 검색 결과가 일치하는 단 하나의 글을 발견했는데, 멸망하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라는 글의 1편이었다. 그러나 클릭하자마자 아주 짧은 화면과 짧은 글이 하나 뜨고 끝이었다. 글의 내용이 전부 지워져 있었으며, 작가의 말에는 한 문장이 남아 있었다.

'조회수 부진으로 인해 연재를 중단합니다. 짧게나마 봐주셨던 분들께 감사하며, 더 좋은 작품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유중혁은 마우스를 만지며 도통 영문을 몰라 하는 김독자를 살짝 밀어내고 자신이 마우스를 잡았다. <글쓴이: tls123> 을 클릭하자 작가가 쓴 글 목록이 보였으나, 1편 글이 그 사람이 쓴 글의 전부였다.

형, 왜 그래요?

김독자가 유중혁을 올려다보며 물었지만, 유중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이 세계에는 멸살법이 없었다.


김독자는 멸살법을 보지 않았으며, 유중혁을 모른다.





그 싸움 전까지 유중혁이 소설의 등장인물이라는 사실은 두 사람 사이에 불문율로 묶여있었다. 묻지도 않고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을 부분이었다. 한 사람의 존재 자체를 송두리째 부정해버릴 수 있는 사실이었으니 그게 편했다. 그러나 부풀어 오른 환부가 평생 건드려지지 않길 바라는 것은 사치였다. 멸살법은 유중혁의 삶이었고, 유중혁의 삶은 유중혁의 상처였으며, 멸살법은 김독자의 삶이었고, 김독자의 상처를 견디게 해준 것이 멸살법이었다. 기묘하게 두 사람의 본질을 관통하고 지나간 이야기가 여전히 실재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아도 잡아당기면 두 사람의 심장이 동시에 꿰인 채 딸려 나오기 마련이었다.

어느 날 저녁 예기치 않게 이야기가 그쪽으로 샌 것은 그 누구의 의도도 아니었다. 시나리오가 진척이 없고 뒷일이 막연해진 시기였다. 김독자는 더는 완결 텍스트를 보지 않았기에 일행들에게 그 어떤 묘수도 낼 수 없었다. 답답함과 불안함이 쌓여 있는 상태에서 시작된 짧은 말다툼이,

너도 모르는가?

이내 서로에 대한 서운함과 공격으로 번졌고, 그 근원에 도사리고 있는,

왜 내가 모든 걸 알 거라고 생각해?

네가 내 이야기를 봤다

내가 네 이야기를 봤다

는, 부정할 수 없는 명제가 끄집어내 졌다.

안다와 모른다는 이야기로 시작한 것이 서로의 삶에 대한 공격이 되고 있었다. 유중혁은 그만큼 자신의 삶을 읽어온 김독자가 차라리 조금 더 자신에 대해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랐고 김독자는 더는 일행의 미래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없게 된 자신이 하찮아졌다. 약간의 말다툼 끝에 주먹이 오갔고 잠시 후 둘은 욕설과 함께 흙바닥을 한 차례 굴렀다. 때마침 근처에 있던 일행 몇이 달려들어 격양된 둘을 떼어냈고, 그날 분위기는 그렇게 싱숭생숭한 상태에서 밤을 맞이했다. 두 사람 다 잠을 편하게 이루진 못했다. 김독자는 얼얼한 어깨를 문지르며 숙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을 배회했고, 다소 피곤한 상태긴 했으나 다가오는 유중혁을 알아차릴 정도의 감각은 남아 있었다.

김독자.

김독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날은 달이 휘영청 뜬 보름이었고 두 사람은 잠시 길가에 앉아 오랫동안 숨겨둔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집안에 강아지가 생기든 고양이가 생기든 검은 코트를 걸친 키 큰 미남자 귀신이 생기든…….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출근했고 김독자는 등교를 해야만 했다. 작년 여름 호우 특보가 내렸을 때도 얼마 전 겨울에 폭설이 내렸을 때도 그러했으니 '잘 생긴 귀신의 출현'에도 예외는 없었다. 김독자는 고작 하루 지났다고 익숙해진 유중혁의 시선을 받아내며 다시 교복으로 갈아입었고, 어머니가 차려 준 떡을 받아먹고 야채 주스 팩을 쪽쪽 빨며 학교로 길을 나섰다. 말할 필요도 없이 유중혁은 기어이 따라왔다. 학교까지 따라오는 게 정말 짜증 나서 미쳐버릴 지경이었으나 사람들 눈에 보이지만 않으면 없는 셈 치고 어찌어찌 버틸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김독자는 이제 유중혁을 완전히 무시하고 제 생활을 해보기로 했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끝없는 요구로 인해 김독자와 꽤나 떨어져서 걸었다. 그게 김독자의 주변을 더 많이 관찰할 수 있었기에 유중혁에게도 편하긴 했다. 김독자의 집에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십오 분 정도의 거리였다.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타는 다른 아이들에 비하면 상당히 좋은 위치였다. 그 십오 분 동안 유중혁은 김독자의 폭넓은 인간관계를 볼 수 있었다. 처음 길을 나설 때는 (뒤에 붙은 유중혁 때문인지) 퍽 긴장되어 보이던 김독자는 금세 다시 원래의 페이스를 되찾았다. 지나가다가 막 문을 여는 문방구 아저씨에게 넉살 좋게 인사를 했고, 길을 가다가 보이는, 같은 교복의 다른 학생들과도 아는 사이인지 반갑게 하이파이브를 했다. 이내 골목을 돌아 신호등을 건너자마자 몇 명이 김독자에게 달려들었고 그중 한 명이 김독자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싸움인가 싶어 김독자에게 다가가려던 유중혁은, 김독자가 몸을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보곤 멈칫했다.

김독자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야, 씨발 숨막히다니까!

팔이 풀리자 김독자가 낄낄대면서 상체를 다시 세웠다. 교복은 잔뜩 구겨지고, 머리카락은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졌지만, 표정만큼은 굉장히 즐거워 보였다. 단언컨대 유중혁이 거의 본 적이 없는, 아니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김독자가 저렇게 웃을 수 있었던가 하는 의문이 차오르면서, 그럼 저 아이가 김독자일까, 저 아이가 김독자라면 원래의 김독자는 저렇게 웃을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연이어 따라왔다.


김독자는 행복했던가?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교실 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필기하고, 눈을 반짝거리며 수업을 듣다가, 지루해지면 교과서 구석에 낙서를 하고 짝에게 보여주며 낄낄대는 것을 지켜보았다. 가끔 유중혁이 가만히 있나 확인하려고 교실 뒤쪽으로 슬쩍 고개를 돌려 볼 때 외에는, 김독자는 시종일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꾸며 낸 미소도 아니었고, 그 이면에 일말의 씁쓸함이나 계산조차 보이지 않았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라나 버린 김독자는 계속 유중혁에게 이질감을 들게 했다.

분명 김독자와 똑같은 아이고 김독자가 맞는데도, 유중혁은 김독자가 무언가를 잃어버린, 아니 자신이 알고 있던 김독자가 본연의 많은 것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 싶어졌다.

몇 개의 쪽지를 들켜 교사에게 등을 얻어맞은 김독자는, 쉬는 시간 종이 치자마자 곧바로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갑을 꺼냈다. 키가 큰 다른 녀석이 돈을 받아들더니 기가 막힌 속도로 교실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야, 지금부터 삼 분 잰다!

김독자의 고함과 함께 낄낄거리는 웃음이 교실 안에 터져나왔다. 정확히 사 분 이십 초 후에 키 큰 놈이 품 안에 빵과 음료수를 잔뜩 안고 돌아왔다. 김독자는 제 몫인 듯 초코우유 하나를 가져가곤 뜯어 마셨다.

야 시발 일 분 넘게 늦었잖아. 너 이래 가지고 어떻게 체육 특기생이냐.

아 씹, 니들이 뛰던가!

어쭈, 대드냐?

됐고, 황의준, 거스름돈 돌려줘.

떠드는 아이들 사이에서도 유난히 또렷하고 청명한 목소리가 울렸다. 소란스러운 아이들 사이에서 김독자는 익숙한 듯 잘도 제 페이스를 유지했다. 조금 전까지 빵 한 봉지를 뜯어 입에 욱여넣던 아이는 허겁지겁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김독자의 손에 쥐여 주었다. 김독자는 태연하게 돈을 받아 다시 지갑 속에 집어넣고, 지퍼까지 올려 잠그고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비스듬히 기댔다. 아직 벽에 몸을 기대기엔 싸늘한 겨울의 냉기가 교실 벽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자 반대편 복도 쪽, 벽에 가까운 자리에 힘없이 엎드린 소년이 보였다. 그러니까 쟤 이름이……. 김독자는 눈을 찡그렸으나 여전히 생각나지 않았다.

문득, 생각이 나 교실 뒷쪽을 곁눈질하자 여전히 대걸레 옆에서 태연하게 벽에 몸을 기대 서 있는 유중혁이 보였다. 김독자는 실룩여지는 입술을 억지로 붙잡아 내렸다. 진짜 미치겠네……. 김독자는 계속 잘생긴 귀신을 무시하기로 했다. 비록 지문을 읽을 때 교실 여기저기를 유난히도 돌아다니는 국어 선생이, 유중혁 근처로 다가갈 땐 조마조마해서 계속 쳐다보긴 했지만, 그럴 때 외에는 대체로 성공했다. 김독자는 급식 종이 치자마자 번개같이 뛰어나가 적당히 줄을 설 수 있었고, 오늘의 급식을 먹고 축구 한판을 뛸 때까지도 유중혁의 존재를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유중혁은 김독자를 따라 식당으로 갔다가, 운동장으로 갔다가 컴퓨터실까지 왔다 갔다 했다. 하루는 무난했고 별 탈이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김독자의 입 짧음은 여기서도 여전한지, 친구들도 모두 익숙한 눈치로 아무렇지도 않게 반찬을 뺏어 먹고 있었다. 유중혁은 인상을 쓸 뻔 했으나 김독자는 태연했다. 그 와중에도 유난히 더 뺏어가는 반찬이 있고 아닌 반찬이 있었는데, 유중혁은 잠시 후에 그것이 모두 김독자가 딱히 좋아하지는 않는 식재료로 이루어져 있음을 깨달았다. 달가워하지 않는다 뿐 크게 호불호를 드러내지 않았던 김독자의 거부감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심지어 김독자는 자기가 손도 대지 않던 반찬 하나의 마지막 한 점을 집어 기어이 옆자리 아이의 식판에 얹어버렸다.

밥을 다 먹고 일어선 아이들은 삼삼오오 운동장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이미 정해진 팀이 꽤 있는 모양인지 금세 편이 갈라졌는데, 유중혁은 김독자가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뛰어다니는 모습을 상상해본 적도 없는지라 내심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김독자가 한 번이라도 유중혁을 쳐다보았다면 처음으로 멍청한 표정을 지은 유중혁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독자는 조끼를 가지런히 정리해 놓곤 신발 끈을 다시 동여매느라 여념이 없었기에, 유중혁이 있다는 것도 잠시 잊고 있었다.

몇몇 아이들이 서로 자리를 잡고 태세를 취하자 가운데에서 축구공이 튀어나왔다. 여느 아이들처럼 김독자도 뛰기 시작했다. 실력이 딱히 좋진 않은 듯 거의 공을 잡진 않고 운동장 구석을 뛰고만 있긴 했지만, 땀을 흘리면서 싱글대고 있는 김독자의 얼굴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유중혁에게 가치 있긴 했다. 김독자는 약 이십여 분간 고작 몇 번의 공을 겨우 상대편으로 걷어내곤 예비종이 치자 곧바로 운동장을 나왔다. 활약이 별로 없었음에도 아이들과 대화를 하는 것을 들어보니 공은 못 차는데 전력에 대한 분석이나 전술 짜는 건 잘하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예전보단 몸이 덜 연약해 보이는 게 보기 좋았다―거기까지 생각한 유중혁은 문득,

자신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김독자에 대해 지나치게 만족하고 있음을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흠잡을 데가 없는 하루였다. 김독자는 컴퓨터실로 가면서 아이들과 가위바위보를 해서 교과서를 몰아 들려주곤 즐거워했으며, 돌아와서 나머지 오후수업이 진행되는 동안은 조금 졸았다. 그러다가 마지막 수업에는 빠딱 깨어나선 열심히 필기하곤 앞자리의 똘똘해 보이는 친구에게 졸았던 시간의 공책을 빌려내어 제 가방에 챙겼다. 별것도 아닌 평범한 일상임에도 불구하고 유중혁에게 그게 좋아 보였던 이유는, 유중혁 역시 김독자를 읽었기 때문이었다.

유중혁이 김독자의 마음속 도서관에서 본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풍경이 김독자의 어린 시절로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비교하자면 당연히 이쪽이 훨씬 더 좋아 보였다. 유중혁은 자신의 머릿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김독자의 실제 어린 시절을 생생히 그려낼 수 있었다. 어두운 사물함이나, 냄새 나는 화장실이나, 수군대는 소리와 사람들의 시선, 구석 자리에 엎드려선 시체처럼 한없이 말라가며 목소리 하나 내지 않는 하얀 소년이 있었다. 무채색의 교실에 색이 없는 삶이었다. 그에 비하면 이곳은 알록달록한 수채화 같았다. 그래, 적어도 이게 훨씬 나았다.

유중혁은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조금, 절망적인 생각을 했다.

…김독자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가?





그날은 수요일이었기 때문에, 김독자는 학교를 마치고 나서 떡볶이를 사 먹고 학원에 갔다. 학원 문 앞까지 가선 김독자는 기어이 유중혁을 돌아보며 언제까지 따라올 거냐 한소리를 했지만, 여전히 유중혁을 설득할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건물 하나에 여러 과목이 몰려서 지나치게 비좁은 학원 교실에까지 유중혁이 들어오니 시각적으로 그렇게 숨이 막힐 수가 없었다. 학교에선 그래도 괜찮았는데. 김독자는 애써 수학 문제에 집중하며 그래프를 열심히 들여다보았지만, 자꾸 눈길이 돌아갔다.

정말 공부는 종친 게 틀림없었다.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평범하게 잘살고 있다고 생각하던 김독자로서는 자신의 삶에 만화 같은 일이 일어난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애매했다. 이걸 좋아해야 하나, 싫어해야 하나? 짜증이 나긴 했는데 생각해보면 이거 뭐, 수천 년 지나 선택받은 용사 뭐 그런 것 아닌가?

김독자도 아주 어릴 땐 TV를 보면서 그런 모험을 꿈꾼 적이 있긴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엔 디지몬 세계로도 가고 싶었고 포켓몬을 잡아 보고 싶기도 했다. 수많은 변신 모험물을 보면서 변신에 필요한 팔찌나 장갑을 흉내 낸 장난감을 사기도 했고, 종이에 그리거나 만들어 본 적도 있었다. 비록 그때보단 머리가 굵어져 당장에 나타난 유중혁의 존재를 환영하진 못했지만, 돌이켜 보면 갑자기 나타난 유중혁은 만화로 치면 제일 멋지고 센 주인공, 혹은 악당 같이 생기긴 했다. 잘생겼고 힘도 무지막지하게 센 주연, 그런 남자가 김독자가 필요하다고 나타난 것이다.

그런 유중혁이 김독자를 졸졸 따라다닌다니, 이건 전형적인 선택받은 주인공 스토리나 다름없었다. 에이, 삼 년만 더 늦게 나타나지 나 수능 조질 것 같으면 그때 부탁 들어주게…….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X와 Y축 옆에 검이나 활 같은 걸 그리다가, 학원 선생에게 꿀밤 한 대를 얻어맞았다. 그리곤 겨우 집중해서 그날의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그 날, 문제집을 접어 가방에 집어넣곤 길을 나서는 김독자는 처음으로 유중혁에게 핀잔 외의 말을 걸었다.

저기요, 형.

유중혁은 순순히 걸음을 빨리하여 김독자의 옆에 따라붙었다. 학원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는 같은 방향으로 가는 친구가 없었기에 김독자는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이야기했다.

이야기 좀 할 수 있어요?

해라.

저, 그러니까 형이 온 세계가 어떤지에 대해서요.

유중혁이 김독자를 쳐다보았으나 김독자의 표정은 천진했다. 처음으로 김독자가, 유중혁이 이야기하려 했던 주제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날부터 김독자는 매일 밤 유중혁의 이야기를 들었다.


김독자는 월수금을 학원에 다니고, 화요일 목요일엔 일정량의 공부를 한 이후 친구들과 게임을 하거나 TV를 보는 걸 빼놓지 않았기 때문에 유중혁과 이야기를 할 시간은 한정적이었다. 물론 유중혁도 말을 그리 많이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차라리 그게 더 편했다. 김독자가 하루를 마치고 씻는 일까지 끝내고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앉으면 그때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첫날, 유중혁은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고민하다가 몇 분이 지난 후에 이야기의 첫 단락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우리 세계는……. 멸망했다.

김독자는 유중혁이 이야기하는 내용이 정말 진부하다고 생각했다. 세상이 멸망하고, 사람들이 서로 배틀로얄처럼 싸우고 죽이고, 괴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이미 골백번도 더 들었던 이야기였다. 이런 내용으로 시작하는 일본 만화가 한 천 개쯤 있을 것 같은데, 생각하면서도 김독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쨌든 굉장히 잘생긴 남자가 굵직하게 좋은 목소리로 자기 전에 들려주는, 청소년 수위용 멸망 이야기는 그렇게 나쁜 컨텐츠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독자는 종종 유중혁의 이야기 사이에 끼어들어 질문을 던져대었다.

그럼 우리나라 대통령 죽었어요? 그래서 미국은 어떻게 됐어요? 편의점 털면 안 돼요? 그럼 용산 가서 닌텐도 집어와도 아무도 모르겠네…….

김독자가 하는 질문의 수준은, 하나 마나 한 것들이었다. 게임에서도 축구에서도 나름대로 전략을 짜는 포지션을 도맡아 하는 것 같길래 조금 기대했던 유중혁은 약간 아쉬워졌다. 스물여덟 살의 김독자다운 통찰이나 고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평범한 열여섯 살의 소년이 그저 제 흥미가 가는 대로 호기심을 찌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유중혁은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첫 일주일간 김독자는 제법 열렬했다. 그러나 이주 차, 김독자는 종종 저녁 늦게 집에 들어가곤 했으며 피시방이나 만화방, 놀이터 등을 들렀다가 귀가했다. 가끔 숙제가 밀려서 눈을 비비며 ebs문제집을 푸느라 이야기를 마다하기도 했다. 삼주 차가 되었을 때 즈음엔 유중혁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시간까지 친구들과 약속을 잡곤 노래방에 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 오기도 했다. 처음에는, 김독자도 그 모든 과정 가운데 바깥에서 빤히 쳐다보는 유중혁과 눈만 마주치면 곤혹스러워하긴 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때였다. 김독자는 이제 유중혁을 자신의 상상 속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친구나 요정 정도로 생각하기로 했고, 유중혁이 들려주는 이야기도 재밌는 동화 정도로 치부했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유중혁의 멸망한 세계 이야기보단,

김독자 자신의 삶이 훨씬 재밌었기 때문이었다.

유중혁도 문제의 핵심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평소의 방식대로 그냥 밀어붙인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시나리오의 클리어는 철저하게 김독자의 선택에 달려 있었으며, 여기서 유중혁이 김독자에게 겁을 주거나 선택을 강요한다고 해서 결과가 좋을 리가 없었다. 유중혁은 김독자를 물리적으로 협박하거나 심리적으로 괴롭혀 선택을 끌어내는 방식도 생각해보았으나, 단 1초도 지나지 않아 그 계획을 폐기했다. 비록 지금 김독자가 제정신이 아니라 하더라도 자신이 김독자에게 할 일이 아니었다. 하고 싶지도 않았으며 해서는 안 되었다.

확실한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실은, 유중혁이 방법을 찾아낸다고 가능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영부영 시간만 흘러가기 시작했고, 차츰 날이 풀리며 김독자는 더는 코트를 입지 않는 대신 교복 재킷만 입고 등교하기 시작했다. 학기 초와 다름없이 매일 아침에 나갈 때마다 김독자의 표정은 밝았다.

유중혁은 한 달 내내 즐거운 김독자의 얼굴을 주구장창 보고 있었다.


가끔은, 오히려 유중혁이 기억하고 있던 김독자의 과거 이야기가 꼭 거짓말 같았다.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며 숨죽여 생활하던 어두운 김독자는 어딘가의 사람이 지어낸 소설 같고, 이 세상이 더 김독자에게 합당한 것만 같았다. 이 모든 게 사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유중혁에게까지 그렇게 느껴지는 지경이었으니 유중혁은 점차 이해할 수 있었다.

김독자가 왜 이 시나리오에서 깨어나지 못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유중혁에게 남는 고민은 단 한 가지였다.

그래서 김독자는 깨어나지 못했는가, 아니면 깨어나지 않았는가?





유중혁과 기묘한 동거 생활을 유지하며, 3월의 막바지가 되어갈 때쯤이었다. 그 날 점심 김독자는 식당으로 뛰어가다가 저도 모르게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운 없게도 정확히 계단 난간 사이로 떨어진 핸드폰은 학교 4층부터 지하 2층까지 수직으로 낙하했다.

김독자는 혀를 차며 계단을 내려갔지만 이미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은 볼썽사납게 금이 가 있었고, 전원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지지직대는 화면을 바라보며 인상을 찡그리던 김독자는 우악스럽게 주머니에 핸드폰을 구겨 넣었다. 이건 엄마한테 혼나겠다, 새 걸 안 사주진 않으시겠지만……. 들을 잔소리를 생각하니 가벼운 한숨이 나왔다. 평소에는 따라왔을 친구들도 급식 빨리 먹겠다고 저들끼리 가 버렸다. 김독자는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고개를 들어 위쪽을 바라보니 두 층 위까지만 같이 내려오다 멈춘 유중혁이 위에서 아래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김독자는 천천히 걸어 올라오다가 문득, 구석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

그 애였다. 김독자와 삼 년 내내 같은 반을 했음에도 이름을 여전히 잘 모르겠는 그 아이다. 마르고 수척하고, 항상 그늘져 있어서 표정도 잘 안 보이고 목소리도 들어 본 적 없는 애였다. 딱히 말하는 걸 들은 적도 없고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식당에서도 거의 본 적이 없다. 김독자는 괜히 머쓱해져 지하 계단 귀퉁이에 앉아있는 아이를 보고, 한 마디를 툭 건넸다. 충동적인 오지랖이었다.

…넌 밥 안 먹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안 먹지, 생각하다가 김독자는 문득, 아이가 가끔 반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는 걸 그제야 떠올렸다. 공공연하게 모두가 알고 있으나 묵인하는 사실이었다. 복도에 아이가 걸어가면 발을 걸고, 넘어지면 아무 일도 아닌 척 몇몇은 낄낄대고 모두는 시선을 돌리고, 아이가 무언가 숙제나 준비물에 대해 부진하면 수군거림이 돌아다닌다. 김독자는 그 모든 일에 딱히 동참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쉬이 잊어버렸다. 아마 식당에서 급식을 받는 것도 껄끄러운 처지일지도 몰랐다. 김독자는 왠지 모르게 걸쩍지근한 기분에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다가, 아이가 자신의 핸드폰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뭘 보냐?

갑자기 신경이 예민해진 김독자는 퉁명스럽게 되물었으나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김독자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아이가 입고 있는 낡고 해진 교복도 눈에 들어왔다. 보통 애들은 너무 키가 커서 사이즈가 달라졌거나, 운동장에서 뒹굴다 빨리 해진 등 여러 이유로 교복을 한 번 정도는 바꾸는 편이었다. 새로 사 입는 경우도 있었고 정 사정이 안 되면 물려받은 거라도 여분으로 해서 입었다. 그러나 아이는 주야장천 한 교복만 가지고 매일 입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될 정도로 아이는 키나 체구가 많이 커지지도 않았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것만 입을 만큼 돈이 없다는 소식이 익히 들려왔다. 도둑질을 하더란 말도 들려왔고, 언젠가 없어졌던 누군가의 돈이나 휴대폰도 그 녀석 손에 되팔린 거란 낭설도 있었다. 그런 녀석이 김독자의 부서진 휴대폰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김독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기분 나쁘고 꺼림칙했다. 잘 움직여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움직여서, 마음에도 없는 권유를 했다.

너 이거 갖고 싶냐? 너 줄까?

그러나 아이는 대답이 없었다.

…씨발, 왜 꼬라본 거야?

무안해진 김독자는 작게 중얼거리고는 아이를 지나쳐서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전력 소모를 줄이기 위해 등을 한 개만 켜놓은 지하 복도에서, 지상 1층으로 올라가자 빛이 훨씬 환했다.

환한 1층으로 걸어 올라가던 김독자는 그래도 뭔가 찜찜해서 걸음을 옮기다 말고 다시 지하를 내려다보았다. 어두컴컴한 지하에 여전히 그 아이가 가만히 앉아 김독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히 말 걸었다 싶었다. 김독자는 저런 부류의 인간이 싫었다. 꼭 불행이 저에게 옮을 것만 같았다.

김독자는 다시 빠르게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피 같은 급식시간을 벌써 오 분 넘게 소비했다는 생각에 걸음이 자연히 빨라졌다. 두 층을 올라가자 유중혁이 김독자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한 달을 같이 지냈다고 김독자는 이제 이 유령의 표정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다. 유중혁은 무언가 말하고 싶은 기색이었다. 김독자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냐고 물어보려다가, 당장 못 먹은 점심이 급했기에 일단 계단을 올라갔다. 어찌 되었든 학교 복도에서 남들 눈에는 안 보이는 귀신과 이야기를 하다가 눈길을 끌고 싶지도 않았고, 방금 겪은 일은 그저 기분 나쁜 해프닝으로 치부하고 넘어가면 될 일이었다.


그날 밤, 김독자는 꿈을 꿨다.

김독자는 학교에 있었는데 주변이 너무 어두웠다. 밤도 아닌 것 같은데 우리 학교에 이렇게 어두운 곳이 있었나 싶었다. 김독자는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엉덩이가 차가움을 느꼈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이 지하 층계참에 앉아있던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왜 여기에 앉아있지? 김독자는 가만히 생각했으나 이유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김독자는 일어나고 싶었으나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고 발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복도 저편에서 한 무리의 아이들이 수런대며 걸어왔다. 김독자는 그게 제게 익숙한 목소리들이라는 걸 알았다. 아까도 저랑 같이 축구도 하고, 학교 끝나고 피시방도 두어 시간 같이 갔다 온 애들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김독자는 그들에게서 소름끼치는 한기를 느꼈다. 아이들이 가까워질수록, 목소리가 커지고 그들의 얼굴 윤곽이 선명해질수록 김독자는 무서워졌다. 이빨이 딱딱 소리 나게 부딪치고 피부에 닭살이 돋았다. 왜 친한 친구들을 보는데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지 모를 일이었다. 입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들은 층계까지 다가와선, 김독자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김독자는 그들과 같이 걸어 올라가고 싶었지만,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순간, 무리 끝의 한 명이 김독자를 향해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았다.

…씨발, 왜 꼬라본 거야?

그리고는 머리를 툭, 손바닥으로 밀어버렸다. 순간 김독자가 휘청였다. 김독자는 어안이 벙벙해져 밀쳐진 제 얼굴을 붙들곤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마주친 몇몇 눈이 분명하게 경멸의 의사를 담고, 가늘어지고 있었다. 김독자는 왠지 모를 공포에 휩싸여 재빨리 고개를 숙였고, 그제야 그들은 다시 저들끼리 이야기를 하며 계단을 올라가 빛 속으로 멀어져갔다. 김독자는 발자국 소리가 작아진 한참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그때 옆에 누군가가 있었다.

항상 얼굴이 보이지 않던, 이름도 모르겠고 소리도 들리지 않던 그 아이가 김독자의 바로 옆에 앉아있었다. 김독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이를 쳐다보았다. 김독자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상상하지 않은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김독자는 뻣뻣이 굳은 혀를 힘겹게 움직여 물었다.

너 누구야?

새하얀 얼굴에 메마른 눈의 아이가 김독자를 마주 바라보며 무심하게 되물었다. 너, 나 진짜 몰라?

아이가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그때까지 어둠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드러나며 김독자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래, 아이들은 저런 부류의 인간을 싫어했다.


내 이름, 김독자잖아.


꼭, 불행이 옮을 것 같아서…….


김독자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 안의 어두운 풍경들이 학교 지하층이 아닌, 그저 불 꺼진 자신의 방이라는 걸 알아차리기까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손으로 뒷목에 흥건한 식은땀을 훔쳐내곤 김독자는 일어나 앉았다. 다행히 가족들이 깨어나진 않은 것 같았다. 별것도 아닌 개꿈 때문에 온 집안의 사람들을 깨웠다면 그것만큼 쪽팔릴 일도 없었다. 순간 갑작스레 눈앞을 움직이는 검은 덩어리에 김독자는 다시 한번 식겁할 뻔했으나, 곧 그것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가오는 유중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안심했다.

꿈꿨나.

어…….

유중혁이 차분히 물어봐 주는 소리에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안심했다. 주변이 온통 어두워서 유중혁의 표정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유중혁은 자신에 대해 퍽 진지한 것 같았다. 그게 김독자를 안정시켜 주었다. 지금 이 유령도 제 눈앞에서 몇 주째 살아 움직이고 있는데 그깟 악몽 하나가 무슨 대수려나 싶었다.

무슨 꿈을 꿨지?

김독자는 웃어넘기기로 했다.

그냥, 개꿈이요.





4월이 되었고 김독자는 계속 학교에 다녔다. 3월에 개학과 함께 생겨버린 유령이 아직도 김독자의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는 점이 조금 특이했으나, 그 외에는 생활에 큰 차이가 없었다. 중학교 1학년, 2학년을 거쳐 가며 학교생활에 익숙해진 김독자에게는 어려울 것 없는 루틴이 계속되었다. 매일의 낙은 한 달 식단표에 형광펜을 쳐둔 반찬의 개수와, 좋아하는 과목이 얼마나 있느냐로 좌지우지되었다. 크게 별날 일이 없었다.

다만, 그 이후부터 김독자는 공연히 교실 구석을 힐끔거리게 되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으로, 꿈을 꾼 이후부터 교실에서 그 '이름을 모르겠는 아이'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김독자는 자신이 꿈에서 들은 그 아이의 이름이 정말 자신과 같은 김독자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일 년도 아니고 삼 년이나 같은 반을 한 동명이인의 이름을 기억을 못 하겠는가, 자기 이름 그대로인데? 김독자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김독자 외에는 그 아이의 다른 이름이 생각나지도 않았다. 그게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에게 꼭 맞는 이름인 듯했다.

그건 참으로 묘한 기분이었다. 그 아이는 솔직히 말해서 왕따에 가까웠고 공공연하게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이나 폭력에 노출되어도 '괜찮은' 존재에 속했다. 김독자와는 인생에 하등 연이 없을 상대였고 앞으로도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 대상이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상당한 불쾌감을 일으켰다. 그러나 기가 막히게 4월부터 아이는 등교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에 대해 기억이 안 난다는 듯 언급하지도 않고 신경 쓰지 않았으니 김독자도 그냥 입을 다물고 있길 택했다.

만약 한 번이라도 실수하여 그 아이에 대해 입을 연다면, 어쩐지 자신과 그가 지독하게 엮일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전 같았으면 신경도 안 쓸 감각이었으나, 유중혁이 나타나 김독자 주변을 배회한 뒤로 김독자는 조금 더 오컬트적인 부분을 믿는 면모가 생겼다.

며칠을 고민해도 딱히 다른 일은 생기지 않았다. 김독자는 그렇게 아이에 대한 고민을 기억 속에서 잊어가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학원을 마치고, 가방을 메고 나와 걷던 순간, 김독자는 한 가지 가설을 떠올렸다.

혹시 그 애가 정말로 이름이 나와 같다면, 유중혁이 찾던 진짜 김독자는 그 애가 아닐까?

유중혁은 김독자를 찾는다고만 했으며, 처음 만났을 때부터 김독자의 이름이 김독자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는 김독자의 이름자인 '두터울 독'에 '사랑 자' 한자에 대해 의아해했으며 부모님의 이름을 틀리기까지 했다. 이렇게 되면 그동안 유중혁이 마치 엉뚱한 사람을 붙잡고 갈구고 있던 듯한 모든 상황이 단번에 이해되었다. 김독자는 그제야 수수께끼가 풀리려나 보다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후 다시 생각해보니 또 아닌 것도 같았다. 정말 멸망한 세상을 구하려는 용사가 찾기에, 그 애는 어느 모로 보나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 애는 너무 볼품없고 작았으며 비천했다. 체구도 작고 말랐으며 늘 바람 불면 날아갈 듯이 휘청였었다. 목소리도 내지 않았고 무언가를 열심히 하지도 않았고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최선인 것인 양 굴었다. 그런 애가 세상을 구하려는 주인공일 리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두 사람이 모두 김독자가 맞아서 선택할 수 있다면―두 김독자 중 유중혁이 데려가서 세상을 구하는 데 도움을 받을 만한 존재는, 지금의 자신에 훨씬 더 가까웠다. 그건 어느 모로 보나 확실했다. 그렇게 한심한 놈이 필요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혹시?

만약의 가능성을 두고 김독자는 반신반의했다.

그제야 김독자는 유중혁이 단 한 번도 자신이 찾는 '김독자'에 대해서 제대로 얘기해 준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저, 김독자 보고 네가 그 김독자라고 말할 뿐이었다.

유중혁은 자신이 모르는 김독자의 어머니를 이야기한 적이 있었으며, 김독자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해 이상히 여기면서 그저 자신이 아는 김독자를 찾았다. 김독자는 유중혁이 찾는 그 '김독자'가 누구인지,

김독자는 김독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 시나리오에 들어온 지 한 달이었다. 한 달. 유중혁은 대충 시간을 계산했다. 김독자의 반응이나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해 보았을 때, 유중혁의 입장에서는 한 달이 흘렀지만 밖에서는 아닐 가능성이 컸다. 현실에서도 시간이 똑같이 한 달이 흘렀다면 김독자가 이 세계에서 자란 지 두 달도 안 되었어야만 했다. 그러나 김독자는 과거의 일에 대해 말하는 데 스스럼없었고, 작년에 누구랑 같은 반이어서 어떻게 지냈는지, 재작년엔 가족들과 어디로 여행을 가서 어떻게 지냈는지도 유창하게 잘 말했다. 그 막힘없는 모든 말이 시나리오가 부여한 설정이라기보다는 진짜 경험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였다. 8일을 잠든 김독자가 여기서 열여섯 살이니 바깥의 하루에 여기의 이 년이 흐른다는 가설이 세워진다. 그렇게 따지면, 지금 지난 한 달은 바깥의 입장으로 한 시간이 될까 말까다.

유중혁 본인에겐 좋은 소식이었지만 김독자에겐 나쁜 소식이기도 했다. 그럼 김독자는 바깥에서 팔 일, 이곳에서 십육 년을 보냈다는 소리였다. 그 정도면 김독자의 정신을 되돌리기는 상당히 어려워 보였다. 카이제닉스 제도에서의 일이 다시 떠오르며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때는 김독자가 제일 늦게 왔었기 때문에 이런 사태를 걱정할 일도 없었다.

유중혁이 보기에 김독자가 원래의 기억을 되찾을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김독자의 무의식이 품고 있는―숨겨놓은 징표 같은 것이 곳곳에서 눈에 띄기도 했고, 상황과 그에 따른 성격이 많이 바뀌긴 했어도 아주 가끔, 지금의 김독자에게도 원래의 김독자다운 면모가 보이긴 했다. 유중혁은 자신이 알고 있던 김독자의 특징을 지금의 김독자에 끼워 맞추느라 스스로 애쓰고 있는 게 아닌지 조금 헷갈렸지만, 그래도 그런 지점들에서 위안은 얻었다. 어렴풋이, 김독자가 항상 자신을 미묘하게 엇나간 다른 인물처럼 헛추측하곤 했던 것이 떠오르며 헛웃음이 지어졌다.

상황이 완전 거꾸로였다. 김독자의 이야기를 먼저 아는 유중혁이 다시 김독자를 찾아 자신이 알던 이야기와 맞춰 보게 되는 상황이 오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유중혁은 김독자의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김독자가 학원에서 돌아오기까지 십 분이 남았다. 매일 학원에서 따라다니며 김독자의 일상과 동선을 파악한 지는 이미 꽤 되었으니, 유중혁은 가끔 이렇게 양해를 구하곤(김독자는 양해 구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 김독자와 떨어져 생각할 시간을 가지곤 했다. 원한다면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이점을 이용하여 여러 곳을 드나들 순 있었으나 유중혁은 줄곧 어린 김독자의 방에 남아 있길 택했다. 자신이 전혀 모르는 세계에서 전혀 모르는 방식으로 자라난 김독자의 공간에 있는 건 항상 기묘한 느낌이었다. 즐겁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는데 특히 김독자의 책상에 올려진 갖가지 나이의 김독자가 환하게 웃는 사진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더 그러했다. 사진들의 김독자는 한결같이 행복해 보였는데, 유중혁이 김독자의 기억 속에서 읽어낸 어린 시절의 김독자와는 표정들이 완전 딴판이었다.

유중혁은 문득 스물여덟의 김독자를 불러내 묻고 싶어졌다. 지금도 이 모든 광경을 사실 보고 있을, 어디선가 잠들어 있을 김독자의 무의식을 깨우고, 멱살을 잡고 묻고 싶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여기서 만족하냐고. 여기서 괜찮냐고.

이해를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자신이라도 깨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1863번의 삶과 수많은 고난을 겪었던 유중혁의 가장 커다란 고비에, 언제나 극장 던전과 환영 감옥이 손꼽히는 것과 같은 이유였다.

유중혁이라도 어느 날 이런 세상에 자신을 던져 놓곤 선택하라 하면 어려울 것이다. 회귀도 멸망도 없는 채로, 부유하고 상냥한 부모 밑에서 안전하고 행복하게 자라는 삶이라면 그 무엇보다 유혹적일 게 뻔했다. 유중혁도 한때는 그런 삶을 꿈꾼 적이 있었다. 이루어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회귀 사이사이 조금 그리워했던 적이 있었다.

…김독자는 얼마나 바랐을 것인가?

비록 살아온 삶의 길이는 유중혁이 훨씬 더 길었지만, 유중혁은 감히 김독자의 바람이 자신의 것보다 약하다고 생각하진 못했다. 그 삶을 읽어 본 적이 있는 자로서는 더더욱 그랬다. 버티기 어려운 삶을 버텨낸 자들의 길 위에는, 항상 수많은 후회와 절규와 헛된 소망이 깃들어있다.

그게 그 길을 잘 걸어갔다고 해서 안 남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너는…

방의 자그만 창문으로 넘어 들어오는 달빛이 밝았다. 의심할 여지 없이 만월이었고, 보름이었다. 꼭 그날 밤 같았다. 유중혁은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꼭 아주 먼 날의 기억 같았다.



그 날, 유중혁은 김독자를 때린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었다. 사리판단보단 감정이 앞선 결과였다. 맞서 때린 것은 김독자도 마찬가지였으나 본의가 아닌 것을 둘 다 알고 있었다. 귀뚜라미가 우는 고즈넉한 밤, 내가 조급했다는 사과에 대답 대신 김독자가 내민 질문은 핵심에 가까웠다.

…너, 두려웠어?

유중혁은 소리 내어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독자는 유중혁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솔직히 나도 존나 두려웠어.

이미 익히 읽어 알던 부분이기도 했으며, 시나리오를 깨 가는 지금 이 순간순간 항상 겪었던 감정이기도 했다. 김독자는 유중혁이 회귀 우울증을 겪고 있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며, 끝없는 실패에 지친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항상 실패가 전부인 삶을 살았던 김독자 역시 알고 있었다.

더 이상 회귀라는 재도전의 기회가 없어진 바로 이 순간, 그 무엇보다도 실패가 무섭게 다가온다는 것을 이해했다. 김독자는 눈을 감고 제 손에 맞닿은 유중혁의 손에 깍지를 꼈다. 손가락이 얽혀들어 가며 피부의 온기가 사이사이로 스쳤다.

아주 가끔, 어떻게 버틸지 막막한 순간이 있다, 아무리 보지 않으려고, 아무리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1863번을 겪고 견뎌내도 무서운 것은 무서운 것이었고, 아픈 것은 아픈 것이고, 두려운 일은 두려운 일이었다. 1863번의 공략을 보고 앞으로 다가올 일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유중혁은 새삼 자신이 어떻게 그리 긴 시간을 오래도 잘 버텨왔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건 인간이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그건…….

중혁아.

김독자가 유중혁을 보며 웃었다.

나도 그렇더라. 억겁의 삶을 살던 네가 막막해 보였어.

그런데, 그래도…….



그 순간 도어락 소리가 들렸다.

직전에 들려왔던 발걸음 소리의 크기, 간격이나 번호를 누르는 속도를 보아 의심할 여지 없이 김독자였다. 유중혁은 비스듬히 의자에 기댔던 몸을 일으키고 눈을 떴다. 현관문을 열더니 대충 운동화를 벗어 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안 가 방문이 벌컥 열렸다. 김독자는 들어오자마자 가방을 내려놓고 문을 잠갔다. 문을 잠그는 것이, 그날은 김독자가 유중혁과 오래 대화를 하고 싶어 한다는 신호였기에 유중혁은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며 입을 열 준비를 했다.

형.

그러나 이어지는 질문은 유중혁도 미처 예상치 못한 내용이었다.


형이 말하는 김독자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그날 유중혁은 오랜만에 길게 이야기를 했다. 말을 하는 유중혁의 얼굴과 목소리는 평소와 똑같았으나, 미묘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김독자는 눈을 똥그랗게 뜨곤 유중혁의 이야기를 멍하니 들었다.

이야기 속의 김독자는 정말로 자신이 아닌 것 같았다. 무슨 스킬을 쓰고 시나리오를 아무도 예상치 못한 굉장한 방법으로 깨어내고 막 죽었다가 살아나고 날개도 돋고……. 온갖 영웅담을 갖다 붙여도 이것보단 못할 것 같았다. 이게 어딘가의 소설 이야기였으면 이미 시작한 지 1분도 안 되어 너무 유치하다거나 너무 먼치킨이라고 욕을 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김독자'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유중혁은 한없이 진지해 보였고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너무나 깊었기에, 김독자는 차마 어디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굳이 이건 말이 안 된다고 짚기엔 애초에 지금 잘생긴 미남 유령이 앞에서 멸망한 세상 이야기를 해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을수록 현실감은 없어졌다.

그래서 그 모든 일을 전부 다 해낸 게……그게 나라고? 김독자는 반신반의하다가도 저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을 흘렸다. 진짜가 아닐 것이 분명한 환상 속의 이야기를 들으며 헤벌쭉한 스스로가 바보같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어쨌든 쏟아지는 설명과 묘사 기저에 깔린 것이 분명한 칭찬들은 김독자의 몫이었고, 유중혁같이 잘생기고 멋져 보이는 사람이 하는 진심어린 칭찬에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몇 없었다. 게다가 평소에는 말을 길게 하지도 않던 그 유중혁이 제법 길고 상세하게 이야기를 하는 꼴을 보니, 정말 그 김독자는 멋진 사람이었음이 틀림없었다. 한참 '김독자 영웅담'을 들으며 신나던 김독자는, 잠시 후 유중혁의 이야기가 조금 잦아들자 한 가지 궁금증이 일었다.

근데…… 형, 그래서 그게 제가 몇 살 때라고요?

스물여덟.

유중혁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처음 세계가 멸망한 날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너는 스물여덟이었다. 네가 나한테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김독자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지금의 김독자는 열여섯이었다. 열여섯의 김독자가 지금 당장 유중혁을 따라가도 그런 일을 해낼 것 같지 않았다. 김독자는 잠시 고민하다가 별생각 없이 질문을 던졌다.

그럼 그 전까지 저는 뭐 했어요?

그 순간 유중혁이 입을 떼려다 멈칫거렸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유중혁이 그런 적이 거의 없었기에 김독자는 그 찰나를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김독자는 유중혁의 반응에 그 뒷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스물여덟에도 그렇게 대단했으면 스물일곱이나 여섯에도 뭔가를 했을 거 아냐. 지금 당장 유중혁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참에 사실 자신의 이야기를 더 들어버리면 미래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느 대학에 가는지, 내가 무슨 직장을 얻는지 정도는 알아도 되잖아? 그렇게 생각하며 김독자는 유중혁을 빤히 쳐다보았다.

…회사원, 이었다.

무슨 회사요?

게임 회사라고 했다.

게이이이임?

김독자는 실망스러운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물론 김독자 본인도 게임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래도 게임 회사에서 일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수많은 어른과 선생들이 끊임없이 해온 잔소리가 생각나면서, 우리나라 게임 산업이 어떻다느니 저떻다느니 하는 비판을 주워들은 것도 조금 기억이 날락 말락 했다.

돈 많이 벌었대요?

아마…… 아니겠지.

아마?

유중혁은 어린 김독자의 표정을 보면서 잠시 고민했다. 약간의 갈등은 들었지만 지금 와서 거짓말을 더 해봤자 상황에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지금의 김독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신격화해서 듣곤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으로 치부해도 곤란할 일이었다. 유중혁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입을 열었고,

너는 그 회사에서 인턴이었다.

실제로 그것은 유중혁에게 아무 일도 아니었으나, 어린 김독자는 그 순간 자신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갑자기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던 영웅 김독자가 한순간에 지하철에 끼어 출퇴근하는 사람들 사이로 추락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요? 그렇게 되물었으나 김독자의 표정은 이미 찌그러져 있었다. 그 와중에도 김독자의 그 표정이 귀여워 유중혁은 속으로 조금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잠시의 웃음과는 별개로, 다음 대화가 좋게 흘러가질 않았다.

왜 스물여덟까지 인턴밖에 못 했대요?

그 정도면 나쁘지 않은 편이다. 네 생각보단 취직이 쉽지 않고.…….

아니 그치만, 군대 갔다 오고 대학교 끝내도 이 년은 더 있었던 거 아니에요? 나 진짜 공부 열심히 하는데 형이 말하던 걔는…….

너는 최선을 다했다.

유중혁은 순간 어린 김독자를 상대로 짜증이 솟구치려는 걸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김독자가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도 듣기 싫었고, 깨지지 않는 시나리오도 조금 지긋지긋했고, 마치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잣대로 김독자가 김독자의 입안에서 평가되는 현재 상황 자체가 유중혁을 화나게 했다. 그러나 한 달 전이었으면 유중혁의 눈치를 보면서 입단속을 했을 터였던 어린 김독자는 이제 유중혁에게 익숙해졌는지 더 겁이 없었다. 금방 다시 작은 입이 쫑알거렸다.

최선은 무슨 그게 최선이야, 공부 열심히만 하면 다 대학 가고 금방 취직한다고 다들…….

너는 열심히 살았다, 네가 할 수 있는 최대한!

참지 못하고 유중혁은 조금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김독자는 잠시 움츠러들었다가 다시 꿍얼대기 시작했다.

근데 왜 고작 인턴…….

부모의 경제적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그 정도면 대단한 거다. 너는 학비를 혼자 벌었고…….

왜요?

유중혁은 순간 너무나도 천진하게 묻는 김독자에게 말문이 막혔다.

혹시 네가 너무 곱게 자라 세상에는 부모의 지원을 못 받고 자라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느냐 묻고 싶었지만, 상황은 그게 아니었다. 유중혁은 아찔함을 느꼈다. 유중혁은 지금 김독자를 상대로 김독자의 삶을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김독자는, 제대로 된 멀쩡한 부모를 가지고 있는 김독자였다.

왜요? 우리 부모님이 저한테 대학교 등록금 안 줘요?

되물으면서, 그제야 김독자는 유중혁이 했던 말을 또다시 기억해냈다. 김독자의 어머니는 다른 사람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럼…….

…너는, 부모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태였다.

부모님께 무슨 일이 생겨요?

유중혁은 말을 내뱉으면서도 아차 싶었다. 이쪽으로 주제가 흘러가면 안 되었다, 하지만…….

눈앞의 김독자가 유중혁과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깝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가족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아이는 어느새 의심과 혼란이 가득 찬 눈을 가지고 있었다. 주변이 순식간에 고요해지고, 무언가가 가라앉았다. 그렇게 넓던 김독자의 방안이 한순간에 좁아지고, 세상에 두 사람밖에 남지 않은 것 같았다. 김독자는 유중혁을 노려보듯 하면서 재차 물었다.

형, 말해요.

김독자는 오늘 밤을 새워서라도 대답을 들어낼 기세였다.

'김독자'의 부모님은 어떻게 되었죠?

…….

유중혁이 처음으로 입을 다물고 침묵하기 시작했다. 그 침묵에 김독자의 마음속은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그때 꾼 악몽이 계속 생각나면서 마음속을 들쑤셨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김독자는 착잡해 보이는 유중혁의 얼굴을 바라보며 계속 쳐다보았다가, 여전히 대답이 튀어나오지 않자 재차 물었다.

그 세계의 김독자의 부모님은 어떻냐고요?

한참 후에야 유중혁은 입을 열었다.

네 어머니가… 감옥에 갔었다.

김독자가 상상도 못 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닐 터였다. 김독자는 놓치지 않고 생략된 부분까지 기어이 질문해냈다.

…그럼, 아빠는요?

…….

아빠는 어디 갔냐니깐!

김독자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난 소리에 놀랐는지 밖에서 달려온 김독자의 부모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독자야, 무슨 일 있니? 독자야, 괜찮니? 김독자는 흠칫 고개를 돌리고는 짐짓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 네, 저 괜찮아요, 친구랑 전화하고 있었어요……. 문밖에서 조금 의아한 듯 몇 마디가 더 들려왔지만, 곧 인기척은 다시 사라졌다. 김독자는 문 너머로 사라졌을 자신의 지금 부모를 응시하듯 한참 방문을 바라보다가, 다시 천천히 유중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대로 말해주세요, 그래서 아빠는 어떻게 되었는데요?

…죽었다, 네가 어릴 때.

병…이라도 있었어요?

김독자는 재차 물었으나 유중혁은 말을 흐렸다.

예기치 못할 때 죽었다.

말하는 방식을 보아하니 사고로 죽었다는 소리였다. 김독자는 코웃음을 쳤다. 그때까지 아주 멋있게 들리던 영웅 김독자의 세계가 한순간에 아주 이상하고 하찮은 것으로 바뀌었다. 김독자는 제 가족이 좋았고 제 부모가 좋았으며 도덕 시간에 존경하는 사람의 이름을 쓰라면 주저 없이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적어 내는 류의 아이였다. 잠시나마 그런 만화 같은 모험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김독자는 기가 찬다는 듯이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지금 나보고 그게 내 진짜 삶이라는 거야?


김독자의 마음은 그대로 돌이킬 수 없이 굳었다. 더 들을 것도 없이 저 세상은 아웃이었다. 애초에 돌아갈 생각도 없었지만, 말도 안 되는 세상이었다. 세계가 멸망한 것도 모자라서 엄마 아빠는 이미 죽고 감옥에 갔다고? 무슨 설정이 그래? 으레 만화의 주인공들이 그렇다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했으며 김독자 본인이 실제로 겪을 삶으로는 너무 가혹했다. 김독자는 그런 선택지를 자신에게 제시한 유중혁에게 깊은 배신감을 느꼈고, 그가 조금이라도 양심을 가책을 느끼길 바라 그를 쏘아보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

김독자는, 어째서인지 모르게 한 달도 안 되어 유중혁의 표정을 아주 잘 읽게 되었다. 자신도 놀랄 정도로, 그 표정 변화가 미미한 얼굴에서 희노애락 같은 다양한 감정을 알아차릴 수 있었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김독자 자신도 설명하지 못하였다. 유중혁은 그것이 네가 김독자라는 증거라고 했지만 김독자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어쨌든 그 말을 해줬다는 건, 유중혁이 보기에도 김독자가 맞추어 내는 유중혁의 감정이나 생각이 거의 정확하다는 뜻이었다. 김독자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유중혁의 지금 표정은, 전혀 당황하거나 고통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당황도 조금 섞여 있긴 했지만, 그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형, 아직…….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얼굴이었다.

얘기하지 않은 거 더 있어요?

유중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유중혁은 잠시 김독자의 시선을 피할까 했으나 그래서는 될 일도 안 될 지경이었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지 말을 골라내는 마음은 분주했으나 생각보다 결과가 부진했다. 유중혁이 좀처럼 입을 떼지 못하자 김독자가 한참을 쏘아보다가, 문득 스쳐 지나가는 생각을 꺼냈다. 왜 하필 이 생각이 지금 드는지는 모르겠으나,

엄마가 감옥에 갔다고 했죠.

유중혁이 마른침을 삼켰다.

죄목이 뭐였어요?

처음으로 유중혁의 눈이 확연하게 떨렸다. 김독자는 그것도 제대로 보았다. 아무래도 자신이 제일 중요한 부분을 짚어낸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공포가 마음속에 퍼져나갔다. 열지 말아야 하는 판도라의 상자에 손을 댄 것 같았다. 뭐가 있어도 열어 보고 죽자는 마음으로 김독자는 다시 물었다.

죄목이 뭐였어요?

김독자는 마음속으로 자신의 엄마가 지을 법한 죄목을 생각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서관 대출 연체를 했다거나 식당에서 깜박 잊고 밥값을 안 내고 나와 곤욕을 치르는 정도밖에 생각이 안 되었다. 그래도 멸망한 세계라고 하니까 뭐라도 일어날 수 있겠지, 생각하는 사이 유중혁이 치고 들어왔다.

…살인죄였다.

김독자는 잠시 생각했다. 그래, 뭐 그럴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모두 거짓말이고 유중혁은 지금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를 하니까 멸망하는 세계에서 살인이 뭐 대순가?

…잠깐, …?

김독자는 문득, 유중혁이 그렇게 숨기고 싶어 하는 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왜 그런 예감이 들었는지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오랫동안 잊어왔던 퍼즐을 맞추듯, 색도 바라고 보이지도 않는 그림 조각들을 기가 막히게 맞는 자리에 모으고 있었다. 머릿속에 연결되는 일련의 사실들에 김독자가 눈을 크게 떴다. 말문이 막혔다. 엄마는 살인죄로 감옥에 갔고, 아빠가 예기치 않게 죽었……?

…거짓말.

거실 바깥에서, TV 소리가 들렸다. 김독자의 엄마, 아빠가 자주 보던 예능이었다. 웃고 떠드는 MC들과 패널들의 소리, 그리고 그걸 보며 또 깔깔 웃는 부모님의 웃음소리가 문을 통해 아주 먼 세계의 신호처럼 넘어오고 있었다. 괴상한 신호들이 차마 다 밀어내지 못한 끔찍한 침묵 사이에서, 김독자는 유중혁을 바라보며 간신히 물었다.

…아니지?

…….

형, 아니죠?

유중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김독자는 다리 힘이 풀려 저도 모르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실이어서는 안 될 것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어디에 한눈을 팔아도 글쓰기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문의는 side_n_tab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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