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늘 그렇듯이 초고입니다. ^.ㅠ 두 작 동시 집필 중이라 퇴근하고 후다닥 써서 올려요. 너무 오랜만에 써서 살짝 걱정스러운데, 모쪼록 즐겁게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시계를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다소 건조했다. 엘렌은 새삼스레 살이 빠진 걸 실감하며 무감한 눈으로 주변을 훑어내렸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파리는 아름답기 그지없었으나 누군가에게는 별 의미 없는 하루일 뿐이었다.


살 빠진 거 알면 또 한 소리 할 텐데. 순간 누가?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으나 엘렌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고객 중 한 명일 터였다.


“모시러 왔습니다. 타시죠.”


매끄럽게 멈춰 선 차에서 기사가 내리더니 문을 열어주었다. 엘렌은 남자의 눈가에 비친 역겨움을 언뜻 읽어냈으나 아무렇지 않게 차에 올라탔다. 남창 취급도 익숙했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은 차의 움직임을 따라 빠르게 사라졌다.


‘머리 아파….’


두통이 밀려오기 시작하자 엘렌은 눈을 감으며 머리를 기댔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이한 파리는 늘 수많은 인파로 붐볐다. 그렇다는 건 팔아치울 수 있는 약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며칠 내내 고객들과 어울리며 술을 마셨더니 머리가 아팠다. 어쩔 수 없이 점막에 녹아든 약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는데.’


만날 사람의 얼굴은 도통 떠오르지 않았으나, 차라리 다행이었다. 다른 것도 아닌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리는 오르에서는 약을 먹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터였다. 오늘까지 약을 하면 몸이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것만 같았다.


피곤하다. 느낄 수 있는 감정은 그뿐이었다.

 



이상하게 남자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금발에 푸른 눈, 잘생긴 외모가 쉬이 잊힐 인상은 아닌데도 모든 게 흐릿했다. 엘렌은 남자의 말에 건성으로 답하며 기계적으로 음식을 씹어 입에 넣었다.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는 편인데도 도무지 떠오르는 게 없었다. 머리가 망가질 때가 되긴 했지. 아무리 극소량을 섭취한다 한들 마약을 하는데 정상일 리가 없었다.


“엘렌.”

“…아, 네. 죄송합니다.”


엘렌은 뒤늦게야 남자의 말에 반응했다. 파란 눈동자가 가느다랗게 접혔다. 미소를 매달고 있으나 기분 좋아 보이는 기색은 아니었다.


자던 사이였나? 남자랑 잔 적은 없는데.


“아니야. 먹어.”


남자가 접시를 향해 고갯짓했다. 바뀐 접시 위에는 에스카르고가 놓여 있었다. 엘렌은 이번에도 기계적으로 음식을 씹어 입에 넣었다. 맛을 잘 느끼지 못하는 편이라 별 감흥 없이 삼키는데 달라붙는 기색이 따가웠다.


“…왜 그러십니까?”


결국 엘렌은 맞은편의 남자를 향해 시선을 끌어올렸다. 그는 해괴한 장면을 본 사람처럼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잘 먹네?”


좋아하는 음식은 아니었지만, 못 먹을 음식도 아니었다.


“동그란 음식 제대로 못 먹더니.”


내가? 순간 속이 울렁거렸다. 미약한 두통이 해일처럼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허억….”


엘렌은 저도 모르게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일에 떠밀린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릇이 깨지는 소리 역시 날카롭게 와닿지 않았다. 한 겹 뒤에서 산산조각난 것마냥 둔중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뭐야. 왜 그래?”


황급히 다가온 남자가 어깨를 잡아챘으나 엘렌은 벌레라도 닿은 것처럼 손을 떨쳐냈다.


“당신, 흣, 당신이 아니야.”


잇새로 낯선 언어가 흘러나왔다. 독어를 익힌 적은 없는데.


감각이 곤두섰다 무뎌지길 반복했다. 의자를 붙잡은 채 간신히 서 있던 엘렌은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픈 머리 사이로 본 적 없는 광경들이 섞여들었다.


낯선 풍경, 낯선 도시, 처음 보는 바다, 하얀 개, 그리고….


“…리온.”


짐승 같은 황금색 눈동자를 지닌 남자.


제가 불러놓고도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인가? 내가 왜 이러지? 미쳐가고 있나?


같이 식사하던 남자가 경호원들을 호출했는지 뛰어오는 듯한 발걸음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엘렌은 발작적으로 몸을 떨었다. 남자들에게 붙잡히면 지하로 끌려가게 될지도 몰랐다.


매끈한 이끼와 녹슨 쇠 냄새, 역겨운 지린내와 비릿한 피 냄새가 낭자한 지하실로.


“허으윽, 흑….”


기억이 뒤섞이자 현실이 모호해졌다. 누군가의 품이 절실한데 그 누군가가 정확히 누구인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바닥을 기고 있자 깨진 그릇 파편들이 눈에 들어왔다. 조각들은 샹들리에 빛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였다. 여기서 나가야 돼. 아니, 완전히 벗어나야 끝날 거야.


엘렌은 예리한 조각을 주워들었다. 하얀 접시 위로 붉은 피가 스며 나왔으나 개의치 않았다. 통증 따위 무용할 뿐이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손목을 그어 내렸다.

 

***


거실로 들어서는 순간,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슈네의 발톱이 문을 긁어대는 소리였다.


망할. 짧게 욕을 지껄인 리온은 빠른 걸음으로 방문을 열었다.


“흐윽, 윽….”


예상대로 엘렌이 괴로워하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가끔 찾아오는 악몽이었다.


엘렌이 악몽에 익숙해지지 못하는 것처럼 리온 역시 괴로워하는 연인의 모습에 도통 익숙해질 줄을 몰랐다. 황급히 침대로 다가간 그는 곧장 제 연인을 안아 들었다.


“엘렌.”


침대로 겅중 뛰어오른 슈네가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며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손을 핥기 시작했다.


“아니야, 아니….”

“엘렌.”


몸을 움츠린 엘렌은 손목을 마구잡이로 긁어대기 시작했다. 흐릿하게나마 자해의 흔적이 남아있는 손목이었다. 리온은 부드럽게 손을 떼어 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치고는 퍽 다정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괜찮아. 꿈이야.”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어르는 모양새였다. 마음 같아서는 몸을 흔들어 깨우고 싶었으나, 엘렌이 크게 놀라 발작을 일으킨 이후로는 함부로 깨우지 않는 편이었다. 조금씩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약하게 토닥이며 어르는 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남자가 유일하게 느끼는 무력감이었다.


“일어나, 제발….”


따뜻한 몸이 안겨있는데도 원인이 분명한 불안이 덜컥 스며들었다. 리온은 조바심내지 않기 위해 애쓰며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넘겨주었다. 이마를 쓸고 지나간 커다란 손이 창백한 뺨에 닿았다.


눈물에 젖어 축축해진 속눈썹을 느릿하게 쓸어내리자 눈두덩이가 파르르 경련하더니 눈꺼풀이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리온은 숨도 내쉬지 못한 채 조금씩 내보이는 갈색 눈동자를 응시했다. 잠에서 깨어나며 서서히 혈색이 돌아오는지 붉어진 입술이 틈을 벌렸다.


“리…온?”

“응. 여기 있어.”


그제야 나지막한 숨이 터져 나왔다. 리온은 작게 벌어진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왕! 왕!”


엘렌은 손에 들이 밀어지는 푹신한 털을 만진 뒤에야 상황을 파악했다. 슈네가 맹렬히 짖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잠깐 잠이 든 사이에 악몽을 꾼 모양이었다.


평소에는 악몽의 낌새만 보여도 귀신같이 눈치챈 슈네가 잠을 깨우곤 했는데, 하필 문이 닫혀 있어 들어오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 이상한 꿈 꿨나 봐요.”

“기억할 필요 없어. 끝났으니까.”

“당신 찾은 것 같은데….”

“내가 또 그 자리에 없었나 보네.”


눈썹을 찌푸리는 남자의 모습에 엘렌은 피식 웃었다.


“당신이 없으니까 악몽이었겠죠.”

“최근에 힘든 일 있었어?”


당신이 밤에 몰아붙이는 거 빼면 힘든 일 없는데. 엘렌은 말 그대로 평온한 삶을 유지 중이었다. 하고 싶으면 하고 쉬고 싶으면 쉬는 그런 삶.


결혼 전과 후가 크게 달라진 건 아니지만, 법으로 묶인 가족이 생긴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일 년에 몇 번 보지 않지만 리온의 부모님 역시 좋은 사람들이었고. 그러니 힘든 일도, 스트레스를 받을 만한 일도 없었다.


이유 없이 찾아오기에 악몽이라 불릴 터였다.


“힘든 일 없어요.”


엘렌은 그제야 제가 리온의 품에 어린아이처럼 안겨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민망함에 내려가고 싶었으나, 그러기에는 리온의 심장이 너무 거세게 뛰었다. 가슴이 맞닿아있는 탓에 상대의 심장 소리를 훔쳐 듣기란 어렵지 않았다.


나 때문에 놀랐겠지. 결국 엘렌은 배우자의 품에서 떨어져 나가는 대신 머리를 기대는 쪽을 택했다.


“그래도 전보다 많이 좋아졌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다음부터는 문 열어놓고 자. 나 없을 때는 슈네가 봐주잖아.”


걱정하지 않겠다는 말은 없었다. 그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라 엘렌은 순순히 답했다.


“알았어요.”

“저녁에 나가지 말고 집에서 쉴까.”


리온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제안했다. 엘렌은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조금 걷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듯했다. 저나 제 연인에게나.


“크리스마스잖아요. 나가요.”

“눈 오는데.”

“눈 오는 드레스덴도 예쁘겠네요.”


피식 웃은 리온이 머리카락 위로 입을 맞췄다.


“알았어. 언제 나갈까.”

“한숨 자고 나가요.”

“옆에서 보고 있을게.”


아직도 제가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엘렌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반쯤 내리깔린 눈꺼풀 아래로 황금색 눈동자가 보였다.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 눈동자를 찾았던 것 같다.


“보고 있지 말고 같이 자요.”


왜 이렇게 걱정하는지 알고 있으나 정말 괜찮았다.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다. 몸도, 정신도.


“당신이랑 자면 악몽 안 꾸니까.”

“알았어, 그럼. 같이 자.”


가뿐하게 몸을 일으킨 남자가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슈네가 등 뒤에 몸을 기댔다. 앞으로도 뒤로도 따뜻한 체온이 물씬 풍겨왔다.


더는 악몽을 꾸지 않을 것 같았다.

 

***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드레스덴은 아름다웠다. 크리스마스 장식을 한 건물들이 길게 늘어졌고, 사람들이 줄지어 행진했다. 트리는 고개를 완전히 젖혀야 그 끝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엘렌은 나눠주는 슈톨렌을 부드럽게 거절하고는 광장을 걸었다. 밤이 되자 노란 조명들이 하늘을 밝히기 시작했다.


“사람들 많네요.”

“불편해?”


인파에 휩쓸릴까 걱정되는지 리온이 허리를 끌어당겼다. 과보호하는 게 민망했으나, 엘렌은 얌전히 몸을 맡겼다. 그가 저 때문에 놀랐을 때는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하게 두는 편이 나았다.


“아뇨. 그냥… 좋아서요.”

“프랑스랑 비슷하지 않나.”

“으음, 모르겠어요.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오랜만에 느껴봐서.”


작년에도 독일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했지만, 마켓에 나온 건 올해가 처음이었다.


“베를린에 있을 걸 그랬나. 식물원에서 축제한다던데.”

“내년에 가면 되죠.”


자연스레 미래를 기약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래, 내년에.”

“…예전에.”


발걸음이 한적한 곳에 다다랐다.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노랗게 장식된 관람차가 보였다.


“크리스마스에 길거리 지나다니는 사람들 얼굴 보면서 행복해 보인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리온이 손가락을 얽어왔다.


“딱히 부럽다는 생각은 안 해봤는데…. 왜, 사람 얼굴을 보면 보이잖아요, 감정이.”


엘렌은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실으며 제 배우자를 올려다봤다. 시선을 느꼈는지 리온이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런데 제가 지금 그 사람들과 같은 표정일 거라고 생각하니까 조금… 신기하네요.”

“…행복해?”

“네.”


단언할 수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처럼 그리고 평범한 연인들처럼 손을 잡고 길거리를 걷는 별것 아닌 시간이, 행복하다고.


엘렌은 웃으며 다시 한번 말했다.


“행복해요. 당신이랑 있어서.”

“나도 네가 곁에 있어서 행복해.”


크리스마스의 아름다운 조명도 저 남자의 눈동자만큼 아름답지는 못하리라.


엘렌은 까치발을 들어 남자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메리 크리스마스, 리온.”


입술을 떼어 내려는 순간 허리를 끌어당기는 악력과 함께 도리어 입술이 먹혀들었다. 호흡이 뒤엉키며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전해져왔다.


“메리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밤이었다.


따뜻하고 행복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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