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아수영 전력 60분 3주차 참여작 (약 5500자)

* 한수영과 헤어진 후의 유상아의 독백

* 다음 전력 주제 올라올 때까지만 공개 예정

 

 

 

 

 

 

 

 

 

집을 청소하던 상아는 침대 밑에서 수영의 이어폰을 발견했다. 그리고 아쉬워했다. 만약 상아가 이 이어폰을 발견한 게 3일만 빨랐더라면, 이 이어폰은 자신의 원래 주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3일 전 상아는 수영과 결별했고, 그래서 이어폰 하나 돌려주자고 다시 연락할 바에는 백주 대로의 수백 명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실연의 아픔을 노래하는 게 낫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이어폰이 다시 수영의 귀에 안착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상아는 약간의 먼지가 묻은 흰 이어폰을 잠시간 들여다봤다. 수영은 이어폰을 자주 잃어버리는 편이었고, 그래서 이어폰에 큰돈을 들이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 이어폰은 달랐다. 수영이 평소 구매하던 이어폰보다 대여섯 배는 더 비싼 고가의 이어폰. 어느 행사에서 운 좋게 당첨된 경품이었다. 본인이 직접 구매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수영은 이 이어폰을 꽤 아끼며 잃어버리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때문에 수영으로서는 드물게도 이 이어폰은 수영과 2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할 수 있었다. 그마저도 결국 분실이라는 형태로 끝이 났지만.

 

그게 여기 있었구나. 이어폰을 잃어버린 후 한참을 찡찡대던 수영을 떠올리며 상아는 저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이내 수영이 한 입 먹고 학을 뗐던 에스프레소만큼 씁쓰름하게 바뀌었다. 거북한 결말이 확정된 추억은 그 당시 달콤했던 만큼 되돌이켰을 때 서글픈 법이다. 상아는 그 이어폰 어딘가에서 수영의 체온을 찾아보려는 것처럼 집요하게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포기했다. 그리고 이어폰의 처분을 고민했다.

 

돌려줄 수는 없다. 지금 돌려주기엔 그 이어폰의 가치를 압도할 정도로 상아의 감정이 혼탁하므로 돌려줄 수 없고, 모든 감정이 무뎌질 정도로 시간이 지났을 때는 그 이어폰의 가치도 무뎌지므로 의미가 없다. 따라서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버리거나, 간직하거나. 상아는 그 두 방법을 모두 선택하기로 했다. 좀 더 풀어쓰자면, 간직하다가 버리기로 했다는 말이다. 상아의 단단하고 냉정한 면은 헤어진 연인의 모든 흔적을 정리하는 게 좋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상아의 무르고 미적지근한 면은 연인이 남긴 유일한 물품을 버릴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상아는 그 모든 면모의 주인으로서 충돌을 중재해야 한다는 의무를 느꼈고, 그래서 자신의 냉정한 면에게 네 의견을 따르겠지만 다른 면모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려주라는 판결을 내렸다. 상아의 두 면모는 극적으로 타결했다. 수영의 이어폰은 쓰레기통 대신 서랍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상아는 수영이 떠오를 때마다 서랍에서 이어폰을 꺼내어 그것이 수영과의 추억을 모조리 녹화해둔 영상물이라도 되는 양 감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그 과거들에는 무신경한 감정이 지하수처럼 스며들었고 그 위로 수영이 없는 새로운 기억들이 켜켜이 퇴적되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이어폰을 꺼내 드는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상아가 서랍을 뒤적거리다 무의식중에 그 이어폰을 집어 들었을 때는, 마지막으로 그 이어폰을 들여다본 지 한 달쯤 지났을 때였다.

 

서랍을 열었던 목적이 이어폰이 아니었으므로, 상아는 집어 든 이어폰을 잠시 책상 위에 올려둔 채 할 일을 하고 돌아왔다. 하늘이 온통 검푸른 와중에 서쪽 한구석이 석양으로 불타는 저녁의 끝이었다. 상아는 책상 위에 엉클어진 이어폰을 내려다보았다. 수영을 생각할 때마다 이어폰을 보았기 때문에, 이제는 그 역으로 이어폰을 보자 수영을 생각하게 되었다. 한때 그 기억들은 상아를 슬픔 속에서 허우적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들기도 했으나 그것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자 단물 빠진 껌이 그러하듯 무미건조해졌다. 상아는 다시 질문을 던져볼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버릴 것인가, 간직할 것인가.

 

상아가 그 이어폰을 사용해보기로 한 것은 그 자신도 잘 설명하기 힘든 복합적인 이유에서였다. 수영이 그렇게 좋다고 극찬한 음질에 대한 호기심이 조금, 비싼 이어폰을 침대 밑과 서랍 안에 몇 달간 처박아두다가 버리기엔 아깝다는 마음이 아주 약간, 이제는 애타게 바라보기만 하던 나날들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 같다는 용기가 제법. 그리고 그 이어폰을 사용해본다면 보관 여부를 확실하게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거 같다는 막연한 예감이 잔뜩. 그 외에도 구체화할 수 없는 여러 감정과 생각이 혼란스레 섞인 상태로 상아는 이어폰을 양쪽 귀에 꽂았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도 무슨 노래를 들을까 한동안 망설이던 상아는 곡을 고르는 대신 셔플 버튼을 눌렀다. 곧 어쿠스틱 기타가 연주하는 선율이 귀에 흘러들어왔다. 감정 없는 알고리즘의 결정치고는 꽤 괜찮은 선곡이었다. 이 노래는 음악 취향마저 영 달랐던 상아와 수영의 플레이리스트에 동시에 들어있는 얼마 안 되는 곡이었다. 상아가 태어났을 때쯤 발매됐던 그 오래된 곡조에 집중하고 있자니 새로운 기억이 부상했다. 수영과의 과거가 하루에도 몇 번씩 숨통을 조여올 때도 떠올린 적 없는 짧은 기억이었다. 그것은 아직 사귀기 전, 오랜만에 약속을 잡고 카페에서 만났을 때였다.

 

 

- 수영 씨, 여기요.

- 어. 오랜만이다.

- 피곤해 보이는데……, 무슨 일 있었어요?

- 어제 영화 보다가 좀 늦게 잤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수영은 곧 카페에 흘러나오는 음악에 흥미를 가졌다.

 

 

- 이 노래 오랜만에 들어본다. 옛날엔 꽤 자주 들었는데.

- 정말요? 저도 이 노래 좋아하는데.

 

 

이 별거 아닌 기억이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나는 이유가 있었다. 수영은 그때 거짓말을 하고 있었고, 상아는 그걸 알아챘었다. 상아는 그때의 수영이 가족 문제로 상당히 마음고생을 했다는 것을 건너 들어 알고 있었다. 수영이 솔직하게 털어놓고 편해졌으면 했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그 사정을 숨기려고 하는 수영의 결정을 존중해주었다. 오랜만에 만난 자신과 좋은 이야기만 나누고 싶어 하는 그 마음 역시 알고 있었으므로.

 

하지만 수영은 본디 그런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어떤 말이든 상대와 상황에 상관없이 툭 던져놓고 마는 점은 수영의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수영은 자신이 인정한 상대에게는 거짓말보단 침묵의 미학을 주장하는 걸 선호하는 편이었다. 그 침묵의 결과가 자신에게 이득이든, 손해든 말이다. 그러나 상아와의 관계가 깊어져 가면서 수영의 거짓말은 점점 늘어만 갔다. 상아는 자신 때문에 감정을 더 깊이 묻어두는 법을 배워가는 수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나를 위해서’라는 사실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에 이도 저도 못 했다. 결국 수영은 거짓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별을 고하는 그 마지막 순간에도.

 

 

-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여기서 헤어진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될 거야.

 

 

상아와 수영은 정말 달랐다. 그리고 달랐기 때문에 그토록 좋아했다. 수영과 함께하는 매 순간은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의 지평을 넓혀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색다른 것들도 언젠가는 무료해지기 마련이다. 다르기 때문에 즐거웠던 순간이 정점에 다다랐던 어느 날, 수영은 말했다. 여기가 우리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라고. 앞으로 남은 길은 퇴색밖에 없다고. 그러니까 지금 헤어지는 게 옳다고. 상아는 당황했지만 곧 누군가는 행복하기에 그 끝마저 행복한 기억으로 내고 싶을 수도 있단 사실을, 그것이 수영 나름의 변하지 않는 행복을 간직하는 방법임을 슬픔 속에서 인정했다. 어쩌면 상아에게도 그런 마음이 조금쯤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아에게 수영은 마지막으로 위안을 남겼다. 분명 미래의 언젠가, 여기서 작별한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게 될 거라고.

 

헤어진 이후 수도 없이 곱씹었던 날이었다. 그러나 이어폰과 음악이 저 아래에 가라앉아있던 기억의 촉매를 끄집어내는 바람에 상아는 여태까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정확히는 알면서도 외면했던 사실을 맞닥뜨렸다. 그날에도 수영은 거짓말을 했다. 수영은 이 작별을 다행이라 생각할 날은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늘 그랬듯, 그때도 상아 때문에 거짓말을 했을 뿐이지.

 

상아는 자신이 수영을 변화시키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수영도 자신 때문에 상아가 변하고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변화는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좋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 변한 자신과 상대가, 정확히는 두 사람의 변한 관계가 최종적으로 어떤 모습이 될지 두렵다는 감정이 생긴 것은 그 때문이었다. 수영은 그런 자신과 상아의 두려움을 파악하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끝을 고할 용기가 있었고, 상아는 그렇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상아는 그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상아는 재생되는 음악을 정지시켰다. 이어폰을 빼고, 다시 서랍 안으로 집어넣었다. 처음에는 그 이어폰을 버리라고 당당하게 주장했던 상아의 이성도 지금은 조용했다. 그날 상아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수영만이 아니었다. 상아 역시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 아름다운 순간이 바래지는 광경을 보고 싶지 않다는 이유는 표면적인 이유이며, 상아가 자기기만에 빠져있던 탓에 수영이 종언을 말하는 역할을 떠맡게 되었음을 그 순간 바로 알았음에도 모른다고 거짓말을 했다. 안개 낀 망망대해 같은 막연함보다 이별의 후회가 낫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모른 척 속여넘긴다면 수영의 거짓말대로 언젠가 ‘다행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을 테니까.

 

이미 수십 수백 차례 떠올렸던 장면이지만, 상아는 새로운 관점에서 이별 그 순간의 수영을 그려보았다. 믿지 않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가장하려던 떨리는 눈가와 경직된 입매. 아, 언제나 나를 위해 거짓말을 입에 담고, 그러나 단 한 번도 자신을 속이지 못한 상냥하고 어설픈 나의 거짓말쟁이. 문득 상아는 자신이 선택한 호칭에서 느껴지는 부조리함에 고소(苦笑)를 금할 수 없었다. 속이고 싶었던 상대에게 모조리 들켜버린 수영과, 자신마저 속여넘긴 상아. 진짜 거짓말쟁이는 누구인가.

 

수영은 상아가 사귄 첫 애인은 아니었고 따라서 첫 이별 상대도 아니었다. 그래서 상아는 함께여서 빛나던 모든 것들을 시간의 지층 아래 묻어두면 빛을 잃는 대신 과거의 물건이라 더 가치 있는 유물로 변하는 것을 몇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수영과의 추억들도 그러기를 바랐다. 그 빛바램에 속도를 더해주기 위한 자기기만이었다. 이윽고 본질을 외면하던 관성적인 되씹기가 고루해졌을 때, 상아는 이제 자신이 괜찮으리라 믿었다. 이어폰을 사용해보려는 만용을 부린 것은 그 과신의 결과였다.

 

그것들은 그저 보이지 않도록 덮여있었을 뿐, 삭아 없어지려면 아직 멀었던 모양이다. 수영을 저 깊은 곳까지 밀어 넣기 위해 동원했던 자기기만은 되려 당시의 기억과 감정을 시간의 흐름에서 지켜주는 보호막이 되었다. 마침내 보호막이 깨지자 그 안에 담겨있던, 여태껏 직면하지 못했던 진실과 고통, 한심함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무뎌졌다고 생각한 감정들이 다시금 생생하게 욱신거렸다. 자업자득이었다.

 

상아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축 기대며 고개를 꺾어 천장을 봤다. 백색등이 시야를 흐트러트렸다. 그 상태로 상아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거짓말이란 것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자신을 기만하는 거짓말은 한 번 들통나면 더 이상은 먹히지 않는다. 상아는 그걸 알면서도 다시 한번 스스로를 속이는 거짓말을 시도해보았다. 언젠가는 그 이별의 날을 후회하지 않는 순간이 올 거야. 몇 번을 더 되뇌어보던 상아는 결국 눈을 감았다. 역시나 잘 되지 않았다.

 

 

 

 

 

 

 

 

 

 

 

 

 

 

 

 

화자를 상아씨로 할까, 수영이로 할까 약간 고민했는데요.

이어폰 자주 잃어버린단 설정은 아무래도 상아씨에게 썩 어울리지 않아서 수영이에게도 돌아갔습니다.

 

근데 막상 제 캐해로는 저렇게 스스로에게 거짓말하는 쪽은 상아보다는 수영이 쪽이라는 게 또 아이러니(...) 하지만 뭐... 전력이니까요...!

 

이별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건 항상 겁이 납니다. 자신이 없어서요... 그래도 이렇게라도 기회가 생겨 나름 경험치가 +1 됐으니... 언젠간 더 자세히 써볼 수 있겠지요?

 

그럼 다음 글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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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건 다음 글을 참조해주세요 : http://posty.pe/4hyc9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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