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게야마는 지친 몸을 소파에 기댔다. TV에선 때 아닌 흑백영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필름과 소리, 그 아래 깔린 복식이며 표정마저도 낡았다. 그는 말없이 화면을 바라본다. 색을 알 수 없는 연미복과 드레스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자연스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것들이 있다. 화가가 손으로 그린 포스터, 아침마다 극장 정문에 걸리던 알파벳, 멋들어진 중절모와 모노클 같은 것들.


그리고 은퇴한 배구 선수.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카게야마는 감고있던 눈을 떴다. 오이카와였다.


“뭐해, 토비오. 불도 안 켜고.”

“빨리 오셨네요.”

“빨리 온 건 너지.”


방 안에서 분주한 발소리가 들린다. 그는 아마 목도리를 끄르고 코트를 걸고 있을 것이다. 어느새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그가 카게야마의 옆자리에 앉았다.


“사람들이 안 놔주지 않아?”

“술 마실 기분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뭐……, 확실히 네가 그렇게 말했으면 통했겠네.”


카게야마는 시선을 돌린다. 오이카와가 어깨를 으쓱한다. 왜? 카게야마는 눈을 끔뻑거리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이카와 씨, 이렇게 생겼었습니까?”

“뭐야. 새삼 너무 멋있어?”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라…….”


뭐? 오이카와가 장난스럽게 카게야마의 목에 팔을 걸었다. 카게야마가 자연스레 그의 어깨에 기댔다. 익숙한 섬유유연제 향기엔 겨울이 스며있었다. 카게야마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습관처럼 손가락을 얽자 귓전에 웃음소리가 울렸다.


“좀……,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오이카와 씨는 늘 대단하지.”


끄응, 하는 소리에 오이카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엄지로 카게야마의 손을 문지르며 등을 쓸어주었다.


“고생했어.”


카게야마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오늘은 카게야마 토비오의 은퇴일이었다.




단언컨대 후회가 남을 만한 선수 생활은 아니었다. 카게야마 토비오는 말하자면 배구에 일생을 바친 수도사였다. 촘촘히 짜인 매일을 소화해왔고, 배구에 지장이 갈 만한 일은 철저히 기피해왔다.


그러니까 후회는 없었다. 은퇴에 대해서도 충분한 시간을 두고 에이전시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이 그 날이 될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선수로서 보내는 마지막 날. 다만, 내일부터 그가 코트에 서지 않으리란 건, 그곳에 제 몫의 자리가 없으리란 사실은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아서.


“외로운 거구나.”


오이카와의 말에 카게야마가 감은 눈을 떴다. 다정한 다갈색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겁니까?”

“응. 토비오 그때랑 뒤통수 표정이 똑같은데.”


눈썹을 구기고 제 뒤통수를 만지작거리는 카게야마를 보며 오이카와가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생각해도 이상하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낯선 길을 걸을 때에는 표지판을 유심히 살펴야만 한다. 이렇게 인적이 드물고 덜 정비된 도시라면 더욱이 그랬다. 오이카와는 손바닥만한 종이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여기서 길을 건너서 오른쪽으로…….”


해안은 내륙에 비해 바람이 거세다. 손가락 사이에 붙잡힌 약도는 금방이라도 꼬리를 찢고 달아날 듯 펄럭인다. 비강에 짠내가 훅 밀려들었다. 꼼꼼히 만진 머리는 그대로였지만, 어쩐지 눈이 따갑다. 마침내 바람이 잦아들었을 때, 그는 무심코 그것이 불어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걸음이 멈춘다.


쨍한 태양과 유리 조각을 쏟은 양 반짝이는 바닷가, 찢어둔 솜사탕 같은 구름과 기러기 두 마리. 그리고 방파제에 앉은 소년의 뒷모습.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설마 아니겠지. 걔가 왜 여기 있겠어. 하지만 저 둥근 머리통은 아무리 생각해도 낯이 익었다. 오이카와는 방파제를 향해 다가갔다.


시외 버스의 종점, 미야기 현의 모서리, 육로로 이어져있으나 또 멀다면 먼 이곳.


“토비오 쨩.”


소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본다. 여전히 짙고 푸른 눈이었다.


파도가 처얼썩, 크게 울었다.


“오이카와 씨? 여긴 왜…….”

“그건 오이카와 씨가 할 말이거든? 토비오 쨩이 여긴 왠일이야? 설마 버스 잘못 탔다곤 하지 말고.”

“아닙니다, 그런 거.”


카게야마는 미간을 좁힌 채 도로 고개를 돌렸다. 평소와는 달리 그는 매우 조용하다. 오이카와는 어쩐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옆에 앉은 사람이 요 후배만 아니었다면 그럭저럭 로맨틱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를.


“안 가십니까?”

“토비오 쨩, 그게 선배한테 할 말이야?”

“……여긴 왜,”

“삼촌 집에 반찬 배달. 토비오 쨩은?”

“저는 그냥…….”

“그냥?”

“……바다에 오고 싶었습니다.”


하? 오이카와의 입에서 우스운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카게야마 토비오가, 그 배구밖에 모르는, 감성이라곤 씨가 마른 후배가 단순히 ‘바다에 오고 싶어서’ 이 먼 곳까지 버스를 타고 왔다니.


“솔직히 말해 봐. 너 토비오 아니지.”


삐죽 튀어나온 입술에 오이카와의 입이 씰룩였다. 자칫하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는 다리를 쭉 뻗고 카게야마를 향해 묻는다.


“그래서? 바다는 왜 보고 싶었는데?”

“오늘따라 왜…….”

“왜 자꾸 뭘 묻냐고? 오이카와 씨는 지금 토비오를 귀찮게 굴고 싶은 기분이랍니다.”


눈을 찡끗하자 카게야마가 얼굴을 찡그렸다.


바보. 나도 평소 같았으면 토비오 쨩 따위 내버려두고 지금쯤 집에 가는 버스에 탔을 거거든.


봤다. 키타이치제일의 마지막 경기. 허망한 눈으로 제 등 뒤를 구르는 공을 좇는 그 얼굴을.


오이카와가 어울리지도 않는 착한 선배 역할을 자처하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토비오 쨩, 지금 자기가 어떤 얼굴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오이카와는 소년의 동근 콧망울에 고인 빛을 시선으로 덧그리며 참을성 있게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제 TV에서,”

“응.”

“고래가 모래 위에서 죽어있는 걸 봤습니다.”


희고 커다란 고래였는데. 저 배보다 컸습니다.


소년은 더듬더듬,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걸 보니까, 바다에 오고 싶었습니다.”


오이카와는 이를 악물었다. 카게야마가 지금 자신을 돌아보지 않길 바랐다.


“근데, 고래는 없네요.”


새까만 동료들 사이 혼자만 흰 고래. 어째서 넓고 미끈한 배 위에 자잘한 모래알을 붙이고, 홀로 메마른 모래사장 위에서 죽어갔을까. 가쁜 숨으로 말라갔을까.


너는 어째서, 그 고래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을까.


카게야마는 저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오이카와는 입을 여는 대신 방파제를 짚은 카게야마의 손을 꽉 쥐었다. 카게야마가 그를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왜냐고 묻지 마.


그저 그 순간엔, 제 몸에 입력된 유일한 행동이 그의 손을 잡아주는 것인 양 느껴졌다.




이후론 많은 일들이 있었다. 카게야마는 고등학생이 됐고, 그들은 몇 번인가 네트를 사이에 두고 겨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귀고 있었고, 또 깨닫고 보니 동거하고 있었다. 상대방만큼이나 상대의 물건을 잘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서로에게 익숙해졌다.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조차 정의해내지 못하는 그의 감정들을 능숙하게 건져낼 수 있을 정도론. 애인이 지친 눈으로 무의식 중에 그의 손을 찾아들 때, 자연스레 그 손을 맞잡아줄 수 있을 정도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어깨에 이마를 얹으며 말했다.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뭐가.”

“외로웠던 걸지도…….”


오이카와 씨가 오곤 나아졌으니까요. 이마를 문지르는 모습이 감정을 못 이겨 무작정 머리를 부벼오는 애완동물을 닮아있었다. 그만큼 사랑스럽단 말이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손등을 누르는 단단한 굳은살을 느꼈다. 아마 금세 물러질 것이다. 그 또한 그랬으니까.


“오이카와 씨는 어떻게 견디신 겁니까?”

“뭘?”

“은퇴하셨을 때요.”

“뭐, 쉽지야 않았지.”


두 사람이 동거를 시작하고 일 년쯤 지났을 때였다. 코트에 먼저 선 것이 그였으니, 먼저 떠나는 쪽도 그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분하고 아쉬운 감정이 덜해지는 것은 아니었으나. 수십 수백 번을 생각했다.


일 년만 더, 한 시즌만 더 뛸 수 있다면.


“오이카와 씨는 토비오랑은 달라. 넌 오늘, 아니 당장 은퇴식 가기 전까지만 해도 코트만 보고 있었겠지.”

“아님 뭘 봅니까?”

“그 앞?”


오이카와는 충분한 시간을 가졌다. 전환점을 지나친 그의 인생이 어떻게 변하게 될지, 앞으로 그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같은 것들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전부를 걸고 달려왔기에 더욱이 휩쓸리듯 마무리짓고 싶지 않았다. 둘은 그런 점에서도 안팎을 뒤집은 듯 상이했다.


반면 카게야마 토비오는 지나치게 적은 가지로, 지나치게 높은 곳을 찌른 나무였다. 이제 그의 연인은 내려와야 한다. 정상에서부터 디딤조차 드문 그 나무를. 벼랑은 언제나 오를 때보다 밑을 보고 내려올 때가 더 두렵다.


오이카와는 그의 손을 꽉 맞잡아주었다.


“뭐, 어쩔 수 없네. 오이카와 씨가 도와줘야지.”


그 말에 카게야마가 고개를 들고 오이카와를 빤히 쳐다본다. 중학교 때 이후론 볼 일이 없었던, 존경 비슷한 것이 그 눈에 서려있었다. 오이카와가 씩 웃으며 묻는다.


“반했어?”

“솔직히, 네. 제가 오이카와 씨보다 먼저 은퇴했으면 오이카와 씨 머릴 다 뜯어놨을지도 모릅니다.”

“야!”

“……오이카와 씨는 뭐든 혼자서 잘 해내시고.”


조금 분한 듯한 목소리에 오이카와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토비오.”

“지금 돌아가면 저도 좀, 위로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지금 하는 건 의미 없잖습니까.”

“왜. 어차피 못 돌아가니까 지금 해줘도 괜찮잖아.”


그 말에 카게야마가 반박하려다 입술을 툭 내민다. 조금 고민하던 그는 잡은 손에 힘을 꾹 준다. 단정한 손톱 끝이 희게 물들었다.


“끝이야?”

“……모자랍니까?”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눈을 찡그린다. 그 말은, 역으로 그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단 뜻이었으므로.


오이카와는 어쩔 수 없단 듯 고개를 내저었다.


“네 덕이었어.”

“뭐가요?”

“은퇴하고 나서. 네가 남아있었으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데요?”


방금 전까지 머리털을 다 뽑아버리겠다고 말한 애인은 이해가 안 된단 얼굴이었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한 가지로 담백하게 정리해낼 수 있는 감정도 아니었지만,


“그럴 수 있었으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같이 살고 있는 거 아냐?”


그 말엔 카게야마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카게야마는 몸을 떼어내곤 남자의 반대쪽 손에도 깍지를 꼈다. 오이카와가 웃으며 말한다.


“토비오는 오이카와 씨 손을 너무 좋아하네.”


그 말에 카게야마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인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엄청 대단한 세터의 손이니까?”

“뭐, 그렇긴 한데.”


카게야마는 여전히 깍지를 낀 채 오이카와의 손등에 입술을 붙였다. 그리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큼지막한 눈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손이 없었으면 지금의 전 없었을 테니까요.”


손등 위로 움직이는 입술이 뜨거웠다. 순식간에 얼굴에 열이 훅 오른다. 이거 좀 반칙 아냐? 오이카와는 무시무시한 방향으로 성장한 후배의 얼굴에 닥치는 대로 입술을 찍었다.


“오이카와 씨!”

“몰라, 이건 토비오가 책임져!”


뒤엉켜 쓰러지면 소파 밖으로 종아리 아래가 비죽 튀어나왔다. 비좁은 데서 몸싸움 아닌 몸싸움을 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놀랍게도, 카게야마는 여전히 속이 헛헛하고 쓰라린데도 웃는 일이 버겁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가 곁에 있었다.




외로움은 둘이 되고서야 깨달아지는 것. 곱게 잦아든 바다 위, 그는 제가 건너온 먹구름을 뒤돌아본다.


안녕, 흰 고래.

안녕, 외로운 죽음.


온기는 확고했고, 겹겹 포개어진 손가락은 견고했다. 고로 그는 떠나오고도 마냥 불행하지만은 않은 사람.


매일을 열정으로 전소시켜온 청년은 이제 미온의 평온 속에서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행복해질지도 모른다.



초코티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