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챈(강혜원X이채연)/조최(조유리X최예나)/딤님(김채원X김민주)

-채원이는 혜원,채연, 예나와 동갑인 설정입니다.

-화 마다 주요 커플링이 달라집니다.






오늘 날씨 좋네. 오늘 말고 내일 모이자고 할 걸 그랬나. 채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학교 복도 한구석에 있는 동방에서 불끄고, 암막커텐 치고, 소파에 옹기종기 모여 스릴러 액션 영화를 보기에는 아까운 화창한 날씨였다. 영화고 자시고 돗자리 챙겨서 소풍이나 가자고 해볼까. 그러기엔 바람이 조금 쌀쌀한가. 그러고 보니 채연의 까만 중단발이 차가운 바람에 흔들렸다. 2학기 중간고사가 막 끝난 10월 말. 다음 시험기간 전까지 신나게 놀자는 부원들의 요청에 이것저것 생각해본 영화감상부 2학년 차장 이채연은 피크닉 계획을 잠시 떠올렸지만, 이제 완전한 가을 날씨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동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나 왔어”

 

“이-채-연-! 왜이렇게 늦었어!한참 기다렸단 말이야”

 

예나가 소파에 앉아 유리를 품에 꼭 껴안은 채 꿍얼거렸다.

 

“너네 그러고 있는거 뻔하니까 일부러 느리게 걸어왔지”

 

“뭐라고?”

 

“아냐”

 

얼른 채원이나 왔으면 좋겠네- 하고 채연은 뒷말을 작게 이었다. 그 말을 용케 들은 민주는 의자위에 쪼그려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더니, ‘채원선배 거의 도착했대요’ 하고 말을 전했다. 영화감상부 단톡도, 우리들 6명이 모인 단톡도 있지만, 굳이 채원과 민주는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스케줄을 우리에게 전했다. 저렇게까지 서로에게 관심도 많고 질투도 많은데, 왜 사귀지는 못하는건지, 생각하며 채연은 고개를 저었다.

 

-철컥

 

동방 문이 열리고, 민주가 채원선배! 하는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채연이 채원에게 인사를 건네려고 고개를 돌린 찰나였다.

 

“혜원선배도 같이 오셨네요!”

 

역시 오늘은 오지 말걸. 고개를 돌리자 마자 혜원과 눈이 마주친 채연은 이 화창한 날씨에 꾸역꾸역 동방에 온 자신을 질책했다. 어떡하지, 인사를 해야하나 고민하고 있으려니 혜원이 ‘안녕’ 하고 선수를 쳤다. 인사를 받아야할까, 피해야할까. 머릿속으로 수십번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으니, 채연의 썩어들어가는 표정을 눈치챘는지 채원이 말했다. 


이채연, 얘기좀 하자.


갑자기 왜저래- 황당한 표정의 민주, 유리, 예나를 뒤로하고 -혜원은 언제나 그랬듯 무표정이었다- 채원에게 손목이 잡힌 채 얼떨결에 끌려나온 채연은, 복도 반대편 자판기 앞까지 질질 끌려갔다. 심각한 얘기할 때는 김채원이 맨날 여기로 데려왔었다.  


“너 뭐하냐”

 

“…”

 

“너 뭐하냐고.”

 

“…”

 

“이게 도대체 며칠째냐. 중간고사 전부터 해서 벌써 3주째야, 3주째.”

 

“…벌써 그렇게 됐나?”

 

“ ‘벌써 그렇게 됐나’ 가 아니잖아. 너 언제까지 강혜원 피할 셈이야? 1학년애들도 불편해하고, 그리고 야, 너 혜원이 기분은 생각 안하냐?”

 

꽤나 화가 난 모양이었다. 채원은 마구 쏘아붙이고는 앞머리를 넘기며 숨을 골랐다.

 

“너 레즈바 돌아다니면서 헛짓거리 할 시간에 강혜원 떠보는게 백배는 생산적이었을거다, 이 등신아.”

 

“야!! 그 얘기가 왜나오냐 갑자기!”

 

당황한 채연이 허둥거리며 채원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그 손길을 가볍게 피하고는, 

 

“내가 틀린말 했냐?”

 

라며 채연을 긁어댔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채연은 여름방학 내내 유명한 레즈바라는 레즈바는 다 돌아다니며 이제는 레즈비언 바에 대해 꽤나 빠삭한 지식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어떤 표정으로 봐야할 지 모르겠어서 그래.”

 

우물거리며 채연이 변명을 했다. 그랬다. 채연에게는 중간고사가 끝난 오늘이, 혜원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알아챈 이후 그녀를 제대로 마주하는 첫 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날 부터 지금까지, 채연은 혜원을 알게 모르게 피하는 중이었다.


.

.

.


 -두 달 전


“나 강혜원 좋아하는 것 같아”

 

“난 민주 좋아하는데”

 

특종★충격 이채연의 고백! 을 준비했던 채연으로서는, 심히 당황스러운 전개였다. 절친한 친구 강혜원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단순한 우정이 아님을 깨닫고는, 그나마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봐 줄 수 있을 것 같은 채원을 불러 자신의 비밀을 터놓으려 했다. 예전에 동성애에 대한 생각을 슬쩍 떠봤을 때도 편견은 없는 듯 했고, 그도 그럴것이 같은 친한 동아리 부원인 예나와 유리는 이미 사귀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을 굳게 먹고는 여름방학이 일주일 쯤 남았을 때 즈음이었나, 룸소주방으로 채원을 불러내어 자신의 가장 큰 고민거리를 털어놓았다. 꽤나 충격을 받으면 어떡하지, 했던 걱정이 무색하게, 채원에게서 돌아온 대답이 저모양이었다. 난 민주 좋아하는데.

 

“야, 뭐라고? 야, 야, 너도 레즈비언이야???”

 

“엉. 나 레즌데. 그리고 지금은 민주 꼬시는 중.”

 

당혹스러워하는 채연과는 상반되게, 태연히 자신은 레즈비언이고 민주를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밝혔다. 채연은 잠시 허둥지둥 하다가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김채원도, 레즈였다고...차라리 이 편이 상담받기에는 좋았다. 채연은 터놓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야,  그래도 너한테 말하고 나니까 속이 좀 후련하다. 솔직히 계속 숨길 생각 하니까 답답했어. 불안하기도 하고.”

 

“다른애들한테는 얘기 안하려고?”

 

“응. 너만 알아주면 됐어. 가끔 너한테 힘들다고 징징거리지 뭐.”

 

처음 자신의 마음을 털어 놓았을 때와는 사뭇 다른 차분한 태도와 말투로, 니가 알아주면 됐다-고 말하는 채연이었다. 하지만 채원의 생각은 달랐다. 괜찮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짝사랑도 짝사랑인데다가, 상대가 동성이다. 심지어 채연의 짝사랑 상대는 겉보기에 흠잡을데 없는 뼛속까지 헤테로였던 것이다. 자타공인 미대여신, 대학내일 표지 모델, A대학 미모 원탑 강혜원(현재는 민주의 입학과 동시에 투탑으로 달리고 있다. 정작 당사자들은 그다지 관심없어하는 것 같지만). 그리고 그런 그녀는 ‘얼굴값 한다’ 는 말이 누구보다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혜원의 모토는 “오는 사람 안내치고, 가는 사람 안 잡는다” 였다. 혜원의 미모에 홀려 다가오는 수많은 남자들을 내치는 법이 없어, -물론 기본적인 스펙은 되어야 했지만- 남자친구가 끊기는 날이 없었다. 사귈래? 좋아. 헤어지자. 그래. 이런 요상망측한 흐름이 계속되고, 교내에서 혜원의 평판이 ‘남자 갈아치우는게 취미인 사람’ 으로 깎여나가고 있었지만, 정작 혜원은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이 없었다. 그저 노는게 좋을 뿐.  이런 골치아픈 상황을 상기하며 채원은 표정을 썩혔다.

 

“야 미안한데, 너 앞으로 존나 힘들 것 같다”

 

“알아”

 

채원은 욕먹을 각오로 필터링 없이 내뱉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태연했다. 

 

“그리고 난 고백할 생각 없어”

 

“엑”

 

이번엔 채원이 되려 당황했다. 도대체 왜? 사랑은 쟁취하는 건데. 내 것이 아니면 무슨 의미지. 원체 소유욕이 강한 채원은 도저히 채연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뭘 그리 놀라.”

 

“이유가 뭔데?”

 

“난 지금이 좋아. 난 우리 여섯 명이서 노는게 좋고, 다같이 있는 시간이 행복해.”

 

설마 저 뒤에 올 문장...

 

“괜히 고백해서 이 관계를 망치고 싶지는 않아”

 

채원의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사랑해서 놓아주는거야' 따위의 멘트를 치는 채연을 한심하게 노려봤다.

 

“지랄…”

 

“진심이야”

 

심지어 진심이랜다. 채원은 뒷목잡고 쓰러질 지경이었다. 채연은 그런 채원의 속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난 니가 내 마음 알아준 것 만으로 만족해. 고맙기도 하고. 난 가끔 투정부리는 걸로 괜찮다니까?”

 

“어련하시겠어”

 

“자꾸 비꼬지 말고. 넌 민주랑 잘 됐으면 좋겠다.”

 

“응. 잘 될거야. 누가 꼬시는건데.”


자신만만하게 채원이 대답했다. 풋, 하고 새어나온 채연의 웃음을 시작으로, 그 날 채연과 채원은 밤새 수다를 떨었더랜다. 


.

.

.


그리고 다시 현재. 

 

한바탕 혼이 난 채연은 잔뜩 기가 죽어서는 채원과 함께 동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들어오자 마자 들리는 목소리.  

 

“야-! 도저히 안되겠다!”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예나의 고함을 들은 모두는 그렇게 생각하며 예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렇게 화창한 날에 무슨 동방이야! 난 놀러 나갈래.”

 

“언니 나랑 쇼핑이나 하러 갈까요?”

 

“완전 좋지! 중간고사도 끝났겠다, 데이트 하러 가자!”

 

예나와 유리가 주고받는 대화를 멍하니 듣다가 정신을 차린 민주가 호통쳤다.

 

“야, 조유리! 오늘 모이기로 한날인데 이러기야? 예나선배도요!”

 

민주의 외침은 공중으로 사라지고, 예나와 유리는 이미 나갈 준비를 하고있었다. 아까 내 보조배터리 어디뒀더라, 언니 코트 여기있어요, 하며 꽁냥거렸다. 민주는 씨이… 하고 섭섭하다는 티를 냈다. 그걸 본 채원은 눈을 잠시 희번뜩하게 빛냈다.

 

“그럼 민주는 언니랑 놀까?”

 

“네..네?”

 

“나랑 놀자고. 밥먹으러 갈까? 저번에 갔던 거기?”

 

“좋아요! 좋아요! 갈래요!”

 

섭섭하다는 표정은 온데간데 없고 민주는 금새 얼굴에 꽃을 피웠다. 디저트는 자기가 사겠다며 조심스럽게 건낸 말에 긍정의 대답이 돌아오자, 민주는 더욱 화색이 도는 얼굴로 나갈 준비를 했다. 

 

동방을 이미 나선 유리와 예나, 분주하게 짐을 챙기는 민주와 채원을 보며 채연은 잠시 벙쪄 있다가 이내 목청을 높였다.

 

“야!! 이런게 어딨냐!”

 

“뭐 어때, 이렇게 된 김에 오랜만에 너희 둘도 오붓하게 데이트 해”

 

채연의 고함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채원은 태평하게 말했다. 채연과 혜원의 관계회복을 원하고 그리 말한건지, 아니면 단지 자신이 민주와 데이트를 즐기고 싶었던 건지는 모를 노릇이다. 여하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채연과 혜원을 제외한 모두가 동방을 떠났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시험은 잘 봤어?” 

 

침묵을 깬건, 그새 동방 의자를 꺼내 채연의 앞에 앉은 혜원의 한마디였다.

 

“나야 뭐, 평소대로지.”


나 방금 자연스러웠나, 목소리가 떨리지는 않았나, 하고 채연은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잘봤다는거네”

 

그럴줄 알았어- 하며 말려올라가는 혜원의 입꼬리를 보며, 채연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오랜만에 한마디 한 것 가지고 요동치는 자신의 심장을 잠시 원망했다. 

 

위험하다.

 

당장이라도 좋아한다는 말이 입밖으로 터져나올 것 같아 침을 삼켜 밀어넣었다. 우리는 친구다. 심지어 여자 사람 친구가 몇없는 혜원에게, 나는 소중한 '여자인' 친구다. 그런 혜원을 나는 내 마음이 불안하다는 이유로 3주를 내리 피해다닌 것이다. 


이런 생각까지 이어지니, 갑자기 죄책감이 몰려왔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거야? 그동안은 정리가 되지 않아서 그랬다고 쳐도 -레즈바를 섭렵하고 다녔을 정도였으니- 혜원을 제대로 마주할 생각을 하지 않은 것에 뼈저리게 후회했다.

 

“표정이 안좋아, 왜.”

 

얼굴에 걱정과 죄책감이 드러났는지, 금방 눈치 챈 혜원은 따뜻하게 물어왔다. 그래, 이런 사람이지. 매사에 무관심하고, 상관하지 않고, 엮이는거 싫어하고. 그런데도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따뜻한 사람. 그리고 이거 봐. 채연의 턱을 가볍게 잡고 이리저리 안색을 살피는 저 행동. 서슴없는 혜원의 터치는 채연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익숙해질 만도 했지만, 마음을 자각한 이후의 스킨십은 너무나 자극적이어서, 감당할 수가 없었다. 채연은 자신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혜원의 손을 잡아 내리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나 너랑 놀고싶어.”

 

얘 또 훅 들어온다, 강혜원 진짜 선수 아니냐, 하는 불건전한 생각과 함께 내가 피해다녔던건 일부러 언급하지 않는 것에  안도했다. 그리고 채연은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설레지 말아야지. 설레도 티내지 말아야지.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

.

.

.

.

.

.

.

.

.

.

.

.

.

.


첫만남이 어땠더라, 벌써 4년 전인데. 장원영 친구라고 소개받았던 거였나. 아니야, 더 전..  우연히 복도에서 부딪혀서 내가 떨어진 지갑을 주워줬던거. 응. 그거였던 것 같다. 그때부터 예쁘긴 정말 예뻤지. 그때 난 공부한다고 바빴던데다가, 너랑 같은 반 한번 안됐으니, 서로 있는 듯 없는 듯 얼굴만 알고 지냈었지. 그러다 대학 신입생 환영회에서 봤을 때는 정말 놀랐어. 반갑기도 했고. 둘 다 낯을 가리는 성격이어서 다행이었을까, 아는 사람이 있다는거에 안도하고 그걸 기점으로 우리 정말 많이 친해졌지. 영화 감상부도 같이 들고, 과팅도 같이 나가보고. 물론 인기는 니가 제일 많았지만, 하하. 여하튼 1학년 내내 끊이지 않던 너의 남자관계는 경이로울 정도더라. 김채원이랑 최예나랑 같이 니 전남친 까는것도 꽤 재밌었어. 

 

그리고말이야, 혜원아, 언제였더라. 1학년 겨울방학때였나. 사실 정확히 언제였는지도 잘 모르겠어. 언젠가 니가 내 곁에 있는게 당연하게 되었고, 가장 자랑할만한 친구였고, 그리고… 소중한 사람이었으니까. 여기까진 너도 나랑 같은 마음일거라고 생각해. 그런데 내가 중간부터말이야 , 단추를 잘못 끼워버렸어. 나도 진짜 모르겠어. 나도 내가 그러려고 한건 아닌데, 니가 좋아진 것 같아. 우정말고 성애로. 욕정섞인 애정으로. 도저히 친구에게 품을만한 감정은 아닌, 그 무언가로. 널 좋아해. 좋아하고있어. 

 

근데 나 이거 말 안하려고. 숨길거야. 적어도 너에게 만큼은. 난 니가 너무 소중하거든. 채원이, 예나.. 그리고 1학년 동생들도 내가 너무 아끼고 좋아하거든. 우리끼리 놀러다니는것도 좋고, 가끔 당일치기로 바다보러 다녀오는 것도 좋고, 그냥 다같이 하는 모든게 너무 좋거든. 그리고 무엇보다, 너와의 이 관계가 진짜 소중하거든. 나 그냥 이 마음 아끼고 아꼈다가 어딘가에 슬쩍 묻어두고 올 생각이야. 시간이 해결해준다잖아. 묻을 수 있을거야. 그때까지만 좀 버티면 되겠지, 뭐.  




그들의 고백법 (1) fin.





아이즈원에 꽤나 진심인 사람.

가비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