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집에서 하는 찬물 샤워가 익숙한 일과가 될 줄은 몰랐다. 첫키스 운운에 상대야말로 폭탄 맞은 얼굴을 하더니 어색한 눈짓으로 욕실을 가리키며 씻고 나오라던 대만이 뇌리에 남아 태섭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꾸 저를 발랑 까진 놈으로 몰아가는게 욱해서 한 소리였는데. 역시 감정에 쓸려서 내뱉는 말 치고 제대로 된 것은 없다. 인생에 걸쳐 몸소 깨우쳐 놓고도 사람이 참 발전이 없는 것이다. 거울 속에 비친 자기 주장 강한 머리카락들이 타올 드라이 뒤에 다시 하늘로 솟는 것을 보며 태섭의 눈썹이 물결쳤다.

혹시라도 본인이 남녀불문 첫상대라는 걸 알게돼서 부담스럽다고 물러나면 어떡한담. 상상 속 전여친이라도 들먹일 필요가 있나. 냉수 마찰을 해도 여전히 마음 속 현자와 대화하기 바쁜 태섭은 아다였던건 절대로 들키지 말자. 코트 위에 오르기 전 승부를 다지는 기세로 주먹을 꽉 쥔 채 다짐했다.




"오늘이 아라 생일이에요?"

“아니, 생일은 땡겨서 해도 된다더라.”


대만은 어쩐지 시선을 피하는 기색으로 대답했다. 선물이라도 사줄까 싶어 물었을 뿐인데 우물쭈물한 모습에 어깨만 한번 으쓱 거렸다. 그러다 태섭은 제 머리에 툭 손을 얹는 대만을 올려다 보았다. 도대체 어디서 난 것인지 고깔 모자 따위를 얹어 놓고는 피식거린다.


"뭐지 이건."

"야. 베란다 가서 숨겨놓은 것 좀 가져와주라."


대만은 웃음기를 지우지도 않고 본 척 만 척 생일 상의 주인공을 깨우러 갔다. 생일 상이라 봤자 케이크 뿐이고 아라가 좋아하는 것인지 과일과 과자 몇종류를 종이 접시에 나눠 담았을 뿐이이었다. 미역국도 한 그릇 없었다. 선물은 둘째치고 즉석 미역국이라도 하나 사올 걸. 태섭은 종이 모자에 달랑 매달린 끈을 고쳐쓰면서 베란다로 향했다.


“아빠. 지금 가요?”

“응 아빠가 잡아줄게. 나와 보세요.”


대만은 양 손으로 아라의 눈을 가리고는 뒤에서 허리를 굽힌 채 엉금엉금 따라 나오고 있었다. 아빠오리 아기오리 어디 그런 동화가 있지 않았었나. 태섭은 대만이 말한 곳에 숨겨둔 커다란 물체와 눈이 마주치고는 잠깐 깜짝 놀랐다가 (허이쒸 소리가 절로 나왔다.) 번쩍들어 옆구리에 잡아 끼고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살금 거리며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은 아라 옆에 섰다.


"아빠. 눈! 눈눈!!"


아라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눈 위에 올려진 대만의 손등을 밤송이 같은 주먹으로 퐁당퐁당 치면서 발을 동동거렸다. 볼이 빨갛게 열이 오른게 뭔지는 모르지만 선물이 몹시 기대 되는가 보았다. 벌써부터 까륵까륵 재미있는 소리가 연신 튀어나왔다.


"하나, 둘, 셋!"


대만의 구호와 동시에 풀려난 아라는 빛때문에 잠시 인상을 찌푸리더니 제 앞에 놓인 커다란 기린 인형을 알아보고는 흥분해 소리를 질렀다.


"어제 기린이야!!!"


아라는 제자리에서 펄쩍 만세 자세를 했다가 흥분을 못 이기고 자기 얼굴을 붙잡다 했다.


"아빠 기린이 왔어요!!!"

"어제 동물원에서 만난 친구야?"

"네!!!!"


콧김을 내뱉으며 인형을 한번 제 아빠를 한번 돌아보는 모습에 태섭은 슬그머니 제 입을 가리고 몸을 잘게 떨었다. 눈매에 힘이 들어가자 정말 정대만 미니어처 그대로라 비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도리가 없었다. 어른인 저의 눈에도 꽤나 정교하게 만들어진 기린 인형은 의자에 앉은 아라의 앉은 키를 훌쩍 넘어 커다랬다. 공들여 준비한 듯한 생일 선물에 이쯤 되니 아라가 기린에 푹 빠진 이유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아라가 몇살 되었죠?"

"세 살 이요오."


아라는 잘 펴지지 않는 손가락 세 개를 옴켜 쥐고는 케이크 초에 불을 붙이고 있는 아빠 대신 저에게 내보였다. 손가락을 살포시 잡아 악수하듯이 흔들자 파다닥 겨울잠 깬 개구리처럼 놀란다.


"생일 축하해 아라야."

"오늘은 가짜 생일이에요."


그러더니 얼굴을 양손으로 폭 숨기고 가짜 생일이란 말이 재미있는지 킥킥 거린다.


"보기 좋다."

"질투해요?"


조금 놀려볼 요량으로 되묻자 대만은 해괴한 걸 마주한 표정이 되어서는, 어느 틈에 손에 쥐고 있던 캠코더 전원을 띡 눌렀다. 뭘 하느라 뜸을 들이나 했더니. 대만은 경기 녹화 같은 것을 할 때 곧잘 들고오던 것과 비슷하게 나와 아라가 함께 있는 방향을 향해 렌즈를 들이밀었다.


"시끄럽고 노래나 불러."

"노래라니.."

"어어. 초 다 녹겠다. 하나 둘 셋!"


짝짝- 생일 축하 합니다~.. 또 한번 대만의 구호 끝에 조건 반사처럼 튀어나오는 멜로디에 저와 대만, 아라의 목소리가 뒤섞인다. 생일 축하 노래를 몇년 만에 입에 올린 건지.. 한구절 한구절 따라 부르면서도 몸둘바를 모르겠는 기분이었다. 실상 아라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핑계로 저를 골려먹으려는 것이 목적은 아닌가. 합리적인 의심을 하며 흘겨보다가 대만이 짤각 짤각 손바닥을 마주치는 아라를 사랑스레 바라보는 눈빛이 정말로 행복한 이의 그것이어서 태섭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왜 직접 안 키우지. 부녀 사이는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을 정도로 가까워 보였다.


"후-."


촛불을 불어 끄는 소리에 태섭은 황급히 상념을 지워냈다. 후, 후, 두어번의 추가 도전 끝에 모든 초를 끄는데 성공한 아라에게 대만이 물었다.


"다 꺼졌네? 잘했다. 아라는 올해 어떤 아라 할 거예요?”

"네! 세 살 언니 됐어요."


세, 사알. 방금 전 처럼 손가락을 어설프게 모아 보여주는 아라를 드디어 본건지 대만이 청량한 웃음 소리를 낸다. 


"또?"

"엄마 아빠 말을 잘 들어요."

"그래. 엄마 말 잘 듣고. 또?"

"응- 또-."


대만은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지웠다. 질문에서 빠져나온 존재가 태섭의 발부리에 걸렸다. 가짜 생일. 생일은 앞당겨도 된다는 미신을 입에 올리던 대만의 멋쩍은 반응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태섭은 뒤늦게나마 깨닫고 말았다. 오늘 이 자리는 송별회였다.


"태섭아 앉아라. 케이크 먹자."


태섭은 빈 의자에 적당히 걸터 앉았다. 가만히 대만의 표정을 읽어보려고 애썼지만 그저 풋풋하게 웃고만 있는 상대의 속을 알 수 없었다. 생크림 케이크 위에 앙증맞게 올라가 있는 딸기 장식. 물러진 곳 하나 없이 생기를 과시하는 과일과 다르게 어딘가 태섭은 텁텁한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함께 지낸 기간 동안 제가 봐온 아이는 아무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부모 한쪽이 없는 삶을 설명 해주기엔 터무니 없이 어렸다.


"아빠 저는 기린 타고 싶어요."

"어. 그래. 근데 혼자서는 안 돼."


오물오물 바삐 입을 움직이며 케이크를 먹던 아라는 기린 인형에게 주던 눈길을 숨기지 못하고 보챘다. 대만은 먹던 것을 대충 한번에 쑤셔넣고 티슈를 뽑아 아라 입주변을 닦아내고는 일어났다.


"태섭아, 아라 좀 안아서 잡아줄래?"


이제 낯가리는건 아예 끝난 건지. 어색한 기색 하나 없이 작달만한 팔이 저를 향해 뻗어온다. 겨드랑이 아래에 양손을 넣어 조심스럽게 들어올리자 쭈욱 늘어나는 몸에 깜짝 놀랐다. 뼈가 무슨 고무줄이야? 몸이 붕 떠오르자마자 아라가 달랑거리며 발장난을 친다. 


“한 팔은 엉덩이 아래 받히고.”

“아.”


갈피를 못잡는 제게 대만이 알려준 대로 자세를 바꾸자 가볍게 들린다. 아라를 인형 등 위에 앉을 수 있게 옮겨주자 엉덩이가 인형에 닿기 무섭게 와락 기린 목을 껴안는다. 크게 흔들거린 인형을 반사적으로 붙잡은 태섭은 예상을 피해가는 재빠르고 단단한 몸놀림에 식은땀이 났다. 


“아라야. 여기 봐봐.”


그 과정을 전부 카메라에 담던 대만이 아라를 부른다. 


“아빠 사랑해?”


언뜻 평온한 목소리에 태섭은 고개를 들었다. 대만은 화면 속의 아라를 보고 있었다. 


“네!”

“얼만큼?”


아라가 머리 위로 동그라미를 만들려고 대뜸 팔을 풀어내는 바람에 휘청이는 몸통을 붙잡았다. 농구공 마냥 정말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다. 화들짝 놀란 속을 전혀 모르는 정대만은 촬영에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이—만큼!!”

“선물 받을 때만 사랑해요?”

“아니요!!”


대만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간다. 판에 박힌듯 상투적인 질문이 어쩐지 애처로운 것이 기분탓이길 바랐다. 


“…내가 찍어줄게요. 둘이 서봐요.”


태섭이 손을 내밀자 카메라가 저를 향한다. 잠시 대답이 없던 까만 렌즈가 대만의 손에서 빠져나온다. 


“그럴래?”


캠코더를 넘겨 받으며 손길이 스쳤다. 제 손 보다 한결 더운 체온이 능선처럼 유려하게 닿았다 떨어진다. 대만의 엄지가 만지고 간 손등 위가 간지러웠다. 

잠시 일시정지 해두었던 화면이 다시 움직인다. 태섭은 한걸음 물러나 부녀를 한 캔버스 안에 모았다. 서로 번갈아 가며 귀에 속닥거리는 모습이, 정말로 질투가 날 만큼 달았다.


"아빠 사랑해요."


대만의 볼에 쪽 쪽 소리나게 뽀뽀 세례를 해대는 아라에게 대만은 짓궂게 계속 누구보다 사랑하냐느니, 기린 보다 저가 좋냐느니 유치해 못봐줄 질문들을 이어가더니.


빡.


"윽."


결국 아라 주먹에 이마 뼈를 한대 맞고나서야 멈췄다.


"아라, 손 괜찮아요?"

"아.. 야.. 맞은건 난데. 너도 넘하다."


카메라를 내려놓고 다가갔다. 아라는 잘못했다는 생각은 있는 건지 악동같이 웃고 있는 입을 주먹으로 가린 채 기린 목 뒤에 제 얼굴을 숨기고 엎드려 있었다.


"애기 주먹이 뭐 얼마나.. 형 돌머리에 맞았으니 문제지."

"너 언제부터 정아라 편 됐냐?


허, 참, 기가 차다는 소리들을 뱉으며 대만이 이마를 문질거렸다. 들여다보니 빨갛게 자욱이 올라있다. 이 사람 피부가 얼마나 약한거야.


"보기엔 아플 것 같기도..."

"야 니가 안 맞아봐서 그렇지 쟤 손 대따 매워."

"천상 공주같이 생겨서는 제법이네요."

"공주같애?"


계속 흉을 보던지 처음부터 팔불출을 고집 하던지. 이제 내려가고 싶다며 아빠 팔을 죽죽 당기는 아라를 번쩍 안아 올린 대만이 허허실실한 표정으로 냉큼 묻는다. 그 턱빠진 놈에게 태섭은 불량하게 입술을 삐쭉거렸다.


"그렇게 좋아요?"

"당연히 좋지."


하나 있으면 나도 얼마나 좋은지 알려나. 태섭은 자꾸만 그을려 가는 마음 속 잿가루를 털어내며 한숨을 쉬었다. 산 넘어 산이다. 대만이 곁에만 있으면 될거라 생각한 극히 최근의 자신이 역시나 순진한 새끼는 아니었구나 냉소했다.


대만의 딸은 객관적으로 보아도 예쁜 외모였다. 새끼 손을 잡아끌고 온 첫 만남에 '이쁘지?' 라는 말로 출발선을 끊은 대만이 얼빠진 놈처럼 보이지 않을 만큼은 되었다.

선이 시원시원하고 호쾌한 미남상인 대만의 콧대와 눈매를 둥글려 세필로 옮겨 그린듯한 눈망울은 조금이라도 흑심을 품은 놈팽이면 간쓸개 다 빼 줄 것 같이 빛났다. 피부도 뽀얗고 전체적으로 올망졸망한 귀여운 상이다. 하지만 가만히 올려다보는 얼굴은 냉한편이다. 그러다 히히 웃는 모습의 온도차이가 꽤나 커서 보고 있는 사람이 떡이라도 하나 더 주고 싶게 하는.. 이것도 제 아빠를 그대로 닮은 것 같은데. 

아무튼 태섭이 보고 자란 제 여동생도 귀여운 얼굴이라 생각하지만. 이건 완전히 그림체가 다르다고 해야할까.


대만이 아라에게 태섭이 아저씨랑 놀이공원 가자 하는 소리를 한귀로 들으며 태섭은 케이크 잔해를 치우고, 일회용 식기들을 쓰레기 봉투 안에 구겨 넣었다. 뒤엉키는 의문과 감정들까지 꽉꽉 눌러 묶어버렸다.






백화점과 놀이공원 주차장으로 들어가려는 차량 행렬을 보고 질렸던 것과는 다르게 막상 내부는 한산한 느낌이 들었다. 이왕 늦게 출발 하는 김에 클로징 퍼레이드까지 보고 오자며 대만은 집에서 만반의 준비를 했다. 야간 개장 자유이용권. 대인 둘, 소인 하나. 티켓을 지하 아케이드 입구 펀칭기에 찍고 들어가며 태섭은 정말 서울 구경 끝내주게 한다는 생각을 했다.


너구리 인형 탈을 뒤집어 쓰고 손인사를 해주는 직원들을 무서워 하면 어쩌나 했던 걱정이 무색하게도. 놀이공원이란 공간에 홀려버린듯이 아라는 침이 흐르는지도 모르고 아까 전부터 입을 못 다물고 있었다.


"처음 데려 와봐요?"

"어 그러게. 반응 끝내준다."


대만은 저가 밀고 있는 유모차에 실어둔 천 가방에서 익숙하게 가제 수건을 꺼내더니 아라 턱 밑을 닦아주었다.


"아라야. 앞에 보고 똑바로 걸어야죠."

"네에."


아라는 대만을 쳐다보지도 않고 멀리 하늘을 보며 혼 없는 대답을 했다. 시선을 따라가보니 알록달록한 열기구들이 천장에 매달려 유유히 돌고 있다. 대만은 어깨의 배낭을 고쳐 메고는 넋나간 딸을 보며 피식거렸다. 

대만의 등에 매달린 까만 배낭은 원정이나 갈 때 쓸만한 물건이었다. 이렇게 준비성 있는 사람인지 미처 몰랐다. 집에서 한참 쓴 캠코더도 미리 충전해 둔 새 배터리로 바꿔 가지고 나왔고, 유모차에 수건에 얼린 생수 페트에 보온병에 혹시 모른다며 갈아 입힐 옷에.. 다행히 운동하는 남자가 둘이니 애가 딸려 있어도 버겁지는 않다. 태섭은 빈 유모차 손잡이를 다시 쥐고 두 사람 뒤를 뒤따랐다. 천천히 걸어가며 저 역시 여유롭게 풍경 구경을 즐겼다.


"넌? 전에 와 본 적 있냐?"

"어.. 초등학생 땐 가.. 더 커선 가. 아무튼 완전 예전이라 다 커서 오니 재밌네요."

"그래?"


얼굴만 돌아본 채로 묻던 대만이 찡그리듯 웃는다.


“잘 됐네.”


대만이 턱 짓으로 옆으로 오라 한다. 태섭은 따라 웃으며 걸음을 조금 빠르게 했다. 이 사람은 왜 주름살이 잡혀도 잘 생겼나 모른다. 






놀이공원에는 저희처럼 아이를 데려온 가족도 적지 않았지만 저녁 시간이 가까워져 그런지 압도적으로 연인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실내용 어트랙션 옆에 있는 스낵 테이블에 앉아 아라 입에 구슬 아이스크림을 떠먹여 주며 태섭은 간식을 사러 간 대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은 전부 서로 팔짱을 끼고 시시덕거리는 커플들이 에워 싸고 있었다. 자리 선정 좀 잘못됐나. 

아라가 처음엔 괜찮더니 롤러코스터가 지나가며 나는 큰 소음이나 여기저기 울리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기 시작해서 비교적 조용해 보이는 곳을 찾아 왔더니 이 모양이다. 


“야. 여기 길이 왜이리 복잡하냐.”


추로스 하나와 핫도그 세트 두개를 들고 돌아온 대만은 늦어진게 미안했는지 오자마자 이런 말부터 했다. 이마에 땀이 송골 송골 맺혀선. 대만이 사온 것들을 테이블 위에 차려놓는 동안 태섭은 배낭 안에서 얼린 물을 꺼내 건네주었다. 


“오던 길에 반층 내려가는 입구 있던데 거기서 헷갈렸나 보다.”

“어! 맞아. 역시 송태섭이 눈썰미 끝내주고.”


어쩐지 슛 쏠 때처럼 신이 난 손놀림이 어깨를 툭 두드린다. 생수 뚜껑을 뜯어내고 얼음물을 참 달게 넘기는 목에서 눈을 떼고 물었다. 


“멀리 갔다 왔어요? 미안하게.”


얌전히 아이스크림에 집중 하고 있는 아라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주던 대만은 놀란 눈을 했다.


“아냐아냐. 내가 중간에 헤매서 그랬다니까. 너 이거 먹고 싶다며 왜 구경만 하냐.”


태섭은 불쑥 내밀어진 추로스를 보고 선뜻 기쁜 티를 내지 못했다. 뭐가 먹고 싶냐는 질문에 걸어오다가 봤던 기억이 나서 가볍게 말했는데. 아무리봐도 이거 찾는다고 빙빙 돌다 온 행색이다.


“형아 팔 떨어지겠다 태섭아~~”

“알았어요. 고마워요.”


대만의 귀엽게 늘어지는 투정에 마지못해 웃으며 받아들었다. 시나몬향이 풀풀 나는 것을 한입 베어 물자 바삭하게 입안에서 부서진다. 기름이 베어나와 혀 위에 설탕 알갱이들과 뒤섞인다. 입 주변에 묻은 설탕 가루를 핥아냈다. 맛은 솔직히 없었다. 


“음, 맛있다. 이거 미국에서 첨 먹고 맛들여서 한동안 식단 때문에 혼났어요.”


고생시킨 사람에게 미안해 크게 한입 더 베어먹는데 묘하게 곁이 조용하다. 눈을 들어올리자 조금 멍해보이던 대만이 화들짝 페트병에 감아둔 손수건을 풀어내 얼굴이며 목덜미를 닦아낸다. 


“아, 에어컨이 소용이 없네. 움직이면 덥고. 어휴.”


어딘가 연극조의 말투에 태섭의 눈이 갸름해진다. 


“아라야 아이스크림 맛있어? 아빠도 한입만 주세요.”

“아빠 배탈이 났잖아요.”

“다, 다 났어!”


당황한 목소리가 동굴 같은 실내를 울린다. 주변에서 잠깐 시선이 모여들었다. 아라의 순수한 질문과 대만의 과민한 연쇄 반응에 태섭 역시 얼굴로 조금 열이 몰렸다. 

출발 전에 옷까지 다 챙겨 입고 화장실에서 못나오는 대만에게 ‘아빠 배탈 많이 났어?’ 하며 문앞에 찰삭 붙어 기다리던 아라였다.


“아빠 배는 아야해서 아이스크림이 아야해요.”


지난 밤일 때문에 뒤늦게 배앓이가 터진 대만 때문에 야간 개장 시간에 오게된 것도 있었다. 막판엔 정말 눈이 뒤집혀서.. 미쳤었지. 태섭은 민망함을 감추려고 한 손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내 딸은 천잰가보다 아무래도.”


꼭 마치 어딘가의 빨간머리 바보를 연상케하는 감탄사에 태섭은 긴장이 쭉 풀렸다. 아. 그치만 애들 앞에선 진짜 조심해야겠다. 


“태섭아 나도 한입만 줘봐라.”


타겟을 나로 바꾼 대만은 까닥까닥 손짓한다. 먹으라며 내밀어주자 오히려 내 손목을 잡고 쭉 당긴다. 어어 하는 사이에 얼굴을 내민 대만과의 간격이 순간적으로 좁혀졌다. 

이마가 스칠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바삭. 튀겨낸 과자가 씹히는 소리가 났다. 내 놀란 눈을 응시하던 대만은 이마를 콩 찧더니 유유히 물러나 자기 의자에 기대 앉았다. 엄지에 묻은 설탕을 핥아내며 미간을 찌푸린다. 


“다 식었다. 어쩌냐. 별로 맛없네.”


저 인간이. 추파를 부릴 거면 사람이나 좀 없는데서 하던가. 태섭은 주변 커플들의 숨소리까지 줄은 것을 느끼며 손 안에 남은 것을 구겨 쥐었다. 애 앞에서는 조심 좀 하자고 당부도 잊지 말아야겠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호수 구경이라도 하자며 세 사람은 모노레일을 타고 밖으로 이동했다. 아라를 가운데 앉히고 그 양옆에 앉아 아래에 펼쳐진 경치를 구경하니 정말로 꼭 데이트를 하는 것만 같았다.

태섭은 아라 등 뒤로 손을 내밀어 깍지를 껴오는 대만 때문에 아까부터 벌컥벌컥 속이 타서 미칠 것만 같았다. 이런 버릇은 고등학교 시절에도 몰랐다. 투명하게 서로 다 아는 사이라고만 생각해서 새로운 일이 있을까 했던 스스로를 뉘우쳤다. 대만과 스스럼 없는 사이였던 것은 맞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살갗이 닿는 묘한 접촉이.. 늘었다.

모노레일의 도착음에 천천히 손가락이 떨어졌다. 떨어지면서도 손톱 위를 훑는 미련 넘치는 움직임을 툭 쳐냈다. 그만해요! 째려보자 상대방 입이 삐쭉 나온다. 뭐 어쩌라고. 찐하게 키스라도 한판 때릴까?


모노레일의 다른 좌석에 따로 묶어둔 유모차를 내려주는 직원에게 감사하다 목례하고 있자니, 저만치 아라 손을 잡고 휘적휘적 가버리는 대만의 발걸음이 심통이 나있었다.


"아빠. 태섭이 아저씨이."


아장아장 따라 걷는 아라가 저를 놓고 간다며 이쪽을 향해 손가락질 하는 걸 힐긋 내려다 보던 대만의 대답이 아주 가관이다.


"정아라 넌 누구편 할거야?"


이쯤 되면 이 셋 중에 누가 애인지 구분이 안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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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 에서 이어집니다.


제가 애기를 좋아해서 뭔가 사족이 너무 불어난 것 같지만

태대 유사육아 데이트다~...생각하고 봐주시면 .. 이제 아라가 나올 날도 많이 안 남았으니 한번만 봐주세요.. 제송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뚜하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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