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둘이 계약서까지 작성해서 공식적인(?) 파트너 관계가 됐잖아. 그날 이후 재민이의 분위기가 달라진 거야. 평소에 회사에서 항상 무표정으로만 있던 나재민 얼굴에는 미소가 올라가있고 또 원래 출근할 때 그냥 고갯짓으로 받아주던 인사들을 여주와 계약서를 쓴 다음날부터 웃으면서 받아주고 있대. 측근(이 비서)의 말을 들어보면,





- 이렇게 말해도 되나 싶지만, 정신이 약간 나가신 것 같습니다.

- 어제 주간회의 중에 계속 피식피식 웃으시고 콧노래를 부르셔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릅니다.

- 하필 그때 임원 한 분이 실수를 했던 터라...





보고서에 오타 실수를 낸 임원은 식은땀을 엄청 흘리면서 재민이 눈치를 엄청 봤대. 보고서에 남들이 모를 미세하게 잘못된 부분이 있어도 재민이가 매의 눈처럼 찾아내서 쓴소리하거든. ‘온점’과 ‘반점’을 잘못 써도 알아채는 사람인데.





“ㅈ, 죄송합니다. 실수로 뒤에 0이 하나 더 들어가서...”





그 임원이 한 실수는 무려 숫자를 잘못 썼어. 그 말에 옆에 있는 이 비서에게 어디 부분이냐 묻는 거야. 세 번째 장, 둘째 문단입니다. 이 비서의 말에 보고서를 한 장 넘기고 확인하더니





“......일단 계속 진행하세요.”





실수를 한 임원은 죽고 싶었어. 모두가 있는 앞에서 혼나면 금방 끝나는데 회의가 끝난 다음 불려가겠구나- 하고 생각했거든. 근데 회의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재민은 다음부턴 확인 제대로 하라는 그 한마디만 하고 회의실을 나가는 거야. 회의에 참석했던 임원들 모두가 어리벙벙한 거지.





“급한 용무가 있으셔서 오늘은 그냥 넘어가신 건가?”





재민이가 끝나자마자 급한 발걸음으로 회의실을 빠져나갔거든. 근데 그거 여주 만나려고. 여주가 오늘 저녁에는 알바해서 못 만난다고 해서 점심에 시간 내서 만나기로 했거든.





“뭐야. 이 비서 왜 따라와?”


“저도 점심을 먹어야죠.”


“가서 다른 비서들이랑 먹으면 되잖아. 따라오지 마.”


“항상 이사님하고 먹어서 저랑 안 먹어줍니다.”


“그럼 혼자 먹어. 나랑 여주씨랑 둘이 먹을 거니까 눈치 챙기고 좀 빠지라고.”


“김여주씨는 저도 껴서 먹는 걸 더 좋아할걸요. 이것저것 시켜서 먹을 수 있다고.”





계속 오지 말라는 나재민의 말에도 이 비서는 꿋꿋하게 따라갔지만 자신을 향하는 따가운 눈초리에 이 비서는 결국 테이블을 따로 잡고 점심을 먹었어. 그것만으로 만족한지 나재민은 여주 앞에서 활짝 웃으며 이것저것 먹어보라며 여주를 챙겨주는 게 눈에 보여. 처음 보는 그 모습에 이 비서 속에서 먹던 게 올라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어. 차라리 나재민이 앉아있는 테이블을 보지 말자. 생각하며 살짝 등을 돌린 후 다시 밥을 먹겠지.






* * *






알바가 끝나고 집으로 가려는데 나재민에게 전화가 와. 타이밍 무슨 일이야. 나한테 뭐 추적기 달아놓은 거 아니야? 그 생각에 몸이 흠칫 굳었다가 괜히 두 손으로 몸 한번 슥슥 쓸어보고 재민이 전화를 받겠지.





"여보세요?"


- 여주씨 10분 안에 도착할 거 같은데.





알겠다는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어. 그 말대로 10분도 안 돼서 여주 앞으로 검은 세단이 부드럽게 정차했어. 보고 있던 휴대폰 화면을 끄고 여주는 자연스럽게 뒷좌석 문을 열고 올라탔어. 저번에 차를 탔는데 차 문을 열자마자 나재민의 페로몬이 너무 진해서 못 타겠는 거야. 그 뒤로는 나재민 여주한테 데리러 갈 때 페로몬 감추고 페로몬 탈취제 미친 듯이 뿌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창문까지 다 열고 달려오는 거지. 오늘도 그렇게까지 했는데 약하게 느껴지는 나재민의 페로몬. 역시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라서 그런지 쉽게 옅어지지 않아. 그래도 여주는 억제제도 꾸준히 먹고 있으니까 이 정도면 참을만한 거지.





"오늘도 바빴어요?"


"아뇨. 오늘은 별로 안 바빴어요. 이사님이 바쁘셨을 거 같은데."


"아, 하도 빡쳐서 가만히 못 있겠더라고요."


"아......"


"다들 입만 열면 쓰레기 같은 기획을 내뱉기만 하고."





그딴 생각 하라고 월급 주는 게 아닌데. 그래서 일 벌이기 전에 그냥 나왔어요. 평온한 표정과는 다르게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의 내용은 거칠었어. 근데 여주씨 보니까 스트레스가 다 풀리네요. 역시 오늘도 보러 오길 잘했어. 그러더니 갑자기 싱글벙글 웃으며 여주를 바라보는 나재민.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하다 백미러로 이 비서와 눈이 마주쳤어. 저번에 봤을 때와 다르게 푹 꺼진 눈꺼풀과 방금 나재민의 그 발언에 질색했는지 찌푸려져있는 미간에 여주가 입술을 말며 웃음을 참겠지.





“여주씨 이거요.”


“아니, 하... 오늘은 또 뭐예요.”





제 쪽으로 쭈욱- 건네오는 쇼핑백을 보고 여주가 심각한 표정으로 되물었어. 그런 여주와는 다른 신난 표정을 하고 있는 나재민. 생글생글 웃으며 그냥 열어보라고만 말하는 거야. 한숨을 내쉰 여주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쇼핑백을 열어 포장이 되어있는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 딱 봐도 비싸 보이는 구두가 보여.





“아니. 만날 때마다 이런 걸 왜 사오냐고요.”


“여주씨 그새 까먹은 거예요? 우리 계약서 조항 중에 하나잖아요!”


“까먹은 게 아니고, 얘기한 것과 다르잖아요.”


“뭐가 달라요?”


“’분명히 생활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적었잖아요.”





그런데 이게 왜 제 생활에 대한 지원이냐고요. 딱 봐도 제가 신을 리가 없는 비싼 구두인데. 머리가 아픈 듯 여주가 손을 올려 이마를 짚겠지. 오늘은 구두지? 이틀 전에는 원피스였어. 그것도 지금껏 인터넷에서만 봤던 명품 브랜드. 만날 때마다 여주에게 물질적인 선물 공세를 하며 ‘생활에 대한 지원’이라는 나재민.





“그래도 받으면 여주씨가 나중에 분명히 입고 신을 일이 생길 텐데?”


“제가 이걸 어디에 신고 간다고요...”


“왜요? 여주씨가 신고 싶다고 한다면 파티라도 열 준비가 다 되어있어요.”


“저는 그런 거 바란 적도 없고요. 이것도 필요 없어요.”


“......나는 여주씨가 되게 좋아할 거라 생각했는데.”


“......”


“여주씨 웃는 얼굴 생각하면서 되게 설렜는데...”


“......”


“그래요... 어쩔 수 없죠. 나는 그냥 그 구두 보니까 여주씨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런 건데 여주씨가 싫은 거면 뭐...”


“...하, 진짜 한두 번도 아니고 제가 그런다고 또 넘어갈 것 같아요?”


“네.”





당당하게 대답하는 나재민의 말에 여주가 입을 꾹 다물겠지. 아니라고 말을 못 하겠어. 그 며칠 사이에 나재민은 여주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가고 있어. 어떻게 해야 여주 마음이 약해지는지, 그리고 그걸 이용해 자기가 선물한 것을 거절하는 걸 못하게 하고 있지.





“......신발을 선물하면 그 신발을 신고 다른 사람한테 떠나버린다는 말이 있어요.”


“그건 연인 사이에 도는 소문이죠. 근데 여주씨는 저한테 계속 비즈니스 파트너라고 하셨잖아요.”


“......어쨌든 개념이 다르긴 해도 파트너니까.”


“오케이. 알겠어요. 쨌든 그래서 그 구두를 신고 저를 버리고 다른 남자한테 가겠다는 거예요?"


“아, 말이 그렇다는 거죠.”


“괜찮아요. 여주씨는 그럴 거라고 생각 안 해서.”


“이사님도 미래를 보는 거 아니시면서 되게 확신에 찬 대답을 하시네요?”







“네. 여주씨가 다른 남자에게 관심이 생기지 않게 제가 잘 할 거거든요.”





제가 더 노력할게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한테 줄 관심까지도 저한테 다 줘요. 씨익 웃으면서 얘기하는데 여주가 할 말을 잃었어. 생각을 해봐 봐. 저 얼굴, 저 피지컬. 능력까지 갖춘 사람이 저런 말을 하는데 어느 누가 안 넘어가겠어? 저 사람은 정말 뭐 저렇게 사람을 잘 구슬리냐고. 사람의 탈을 쓸 천년 먹은 능구렁이 아닐까. 결국 오늘도 여주가 졌어.





“정말 마지막이에요. 이것까지만 받을 거예요"


“네. 알겠어요.”


“전 이런 거 받는 것만 해도 손이 덜덜 떨린단 말이에요.”


“그럼 안 떨리고 익숙해질 때까지 계속 선물 받는 건 어때요?”


“이게 마지막이라고 했죠.”





그 말에 여주가 표정을 찡그리며 나재민을 노려봤어. 그 눈빛에 눈썹을 들썩이며 스을-쩍 시선을 피하는 나재민. 진짜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선물해 주는데 싫어하는 사람은 처음 봐요. 그냥 여주씨가 생각이 나서 그래서 여주씨에게 주고 싶어서 그런 건데. 내가 뭐, 어? 여주씨한테 뭘 더 바라고 주는 것도 아니고. 아니. 바라기는 하죠. 여주씨의 관심과 애정! 들릴 듯 말 듯 혼잣말을 꿍얼꿍얼하는데 여주 애써 안 들리는 척하며 다시 상자를 그대로 쇼핑백에 넣고 조심스럽게 무릎에 두겠지.





“진짜 제발, 이런 비싼 거 선물이라고 사 오지 마요. 집도 좁아서 보관할 데도 없고 먼지 쌓일까 봐 잘못 놨다가 흠집이라도 날까 봐 엄청 신경 쓰여요.”


“그러니까 이 집도 이사를...”


“이사님.”


“...네. 진짜 입 다물게요.”





곧 집 앞에 도착했고 여주가 백미러로 이 비서와 시선을 맞추고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리겠지. 그리고 뒤따라 내리는 나재민. 왜 따라 내리냐는 듯이 쳐다보다가 생각난 듯 페로몬을 풀었어. 정말 미세하게 풍겨오는 여주의 페로몬. 더 짙게 맡고 싶다는 욕심에 계약서 조항을 떠올리겠지. 안아도 되겠냐고 물어볼까. 머릿속에는 이미 여주를 품에 껴안고 어깨에 얼굴을 파묻는 상상을 하고 있어. 고민을 하다가 결국 여주에게 가까이 가는 걸로 만족하기로 했어. 아직 그 단계까지는 아닌 것 같아서 속으로 입맛만 다시는 거야.





"여주씨 이 비서는 여주씨 페로몬 못 느껴요.”


"네. 알고 있다니까요? 이 비서님 베타인 거?"


"근데 왜 이 비서한테 그렇게 웃어줘요."





위이잉- 창문 열고 있던 이 비서 급하게 창문을 올려 닫았어. 아, 이 비서님 가지고 그만 장난쳐요. 익숙하게 넘어가는 여주. 나재민이 이렇게 질투 섞인 투정을 하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거든. 날이 풀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저녁 바람에 여주가 추울까, 재민이는 어서 여주에게 들어가라고 손짓하겠지. 조심히 가라는 인사와 함께 미련 없이 뒤를 돌아 들어가는 여주.





그리고 그 자리 그대로 서서 여주가 들어간 집을 빤히 보던 나재민. 누가 봐도 연식이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 주위에는 꺼진 가로등도 많이 있겠지. 어떻게 해야 여주가 자기 집으로 들어오게 할 수 있을까. 가만히 자리에 서서 고민을 하다 차에 올라타겠지. 그리고 구석에서 둘을 지켜보고 있던 검은 형태가 재민이 차가 사라지는 걸 보고 슬그머니 사라지겠지.





수상한 검은 형태는 며칠 안 돼서 정체가 밝혀지겠지. 여느 때와 같이 저녁 알바를 마친 여주. 사실 일주일에 3~4번 만나는 걸로 정했지만 알바 끝나는 시간마다 맞춰 나재민이 데리러 와줬었거든. 근데 오늘은 스케줄이 바빠서 못 온 거야. 물론 전화는 왔었지. 근데 옆에서 다른 사람들 목소리도 들리는 거 보니까 많이 바쁜 것 같아서 얼른 대화 마무리하고 끊은 거지. 그러고서 혼자 걸어온 여주가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몸이 뒤로 쏠리고 뒤통수가 아픈 거야.





“이! 이 나쁜 기집애!”


“아, 아! 뭐야!”


“뭐야? 뭐야라고 했어?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이모가 집 앞에서 숨 죽이고 숨어있다 여주가 보이자마자 달려들어 냅다 여주 머리채를 잡고 내려 끌은 거야. 여주 도장까지 훔치고 사고 쳐서 도망쳐놓고서는 이제서야 나타나서 무슨 짓을 했냐는 알 수 없는 말만 질러대며 머리채 잡은 손을 이리저리 흔드는데 여주가 또 가만히 듣고 당하고만 있겠어?





“일단, 이거 놓으시라고요!”


“아악!”





머리채를 잡은 우악스러운 손을 떨쳐냈더니 이모가 맥아리 없이 뒤로 나자빠지는 거야. 여주가 그 정도로 힘 준 건 아니었는데 말이지. 하여튼 여주도 뒤로 엉덩방아 찧는 거 보고 놀라서 이모 부르면서 다가가서 일으켜 세워주려는데 이번엔 손을 뻗어 여주 멱살을 쥐어잡는 거지.





“너! 이 나쁜 년! 지 혼자만 살겠다고 가족 팔아먹은 년!”


“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이거 놓고 얘기하세요!”


“네가 어떻게 우리한테 이래!”


"이모야말로 저한테 왜 그러시는데요!!!”





저 걱정하는 척하면서 제 도장 훔쳐 가시고, 안 그래도 부모님 빚 이자까지 갚느라 저한테 쓸 돈도 없는데 이모는 사고 쳐놓고 저한테 다 떠넘기시려고 하시고! 여주도 울부짖는데 이모는 여주가 하는 말 귀에 들리지도 않아. 왜냐면 자기가 지금 큰일이 났는데 남 상황을 왜 봐줘. 계속 여주한테 너 때문이라고. 네가 다시 책임지라며. 여주를 붙잡고 흔들고 난리를 치다가 밀치겠지.





뒤로 넘어지진 않았지만 힘이 빠져버린 여주. 여주도 진짜 속상하고 울고 싶지. 그래도 부모님 살아계실 때는 자주 왕래하면서 친하게 지냈는데 이제는 죽일 년 살년 하면서 욕까지 하는 사이가 되어버렸으니까. 그러더니 이모가 또 주저앉은 여주한테 어딘가로 계속 가자고 하는 거지. 가서 네가 다 책임지겠다고 해. 그러고서 우리 도윤이랑 아윤이는 제자리로 돌려놔! 팔 붙잡고 끌고 가려는 거 다시 힘줘서 뿌리치고





“제가 뭘 책임져요? 제가 뭘 했는데요?”


“네가 우리한테 이러면 안 되지! 어?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줬더니 은혜를 이딴 식으로 갚아?”


“그래서 제가 다 모른 척 해드렸잖아요!!!”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준 거 고마워서! 그래서 저희 부모님 사망보험금 다 갖다 쓰신 거 제가 모른 척 눈 감아드렸잖아요! 여주가 두 눈을 꾹 감고 소리쳤어. 처음으로 이모한테 소리 바락바락 지르면서 대든 거야. 여주 급발진에 이모도 놀라서 어버버 거리고 있으면 터져버린 여주가 그동안 꾹 참았던 말 다 쏟아내는 거지.





“저한테 쓰셨다고 했는데 그 돈으로 이모네 집 빚이랑 이모부 사업비에 보탠 거. 또 도윤이랑 아윤이 좋은 옷 입히고 좋은 학원 보내고 다 하셨잖아요. 저한테는 아윤이가 쓰다 버린 것들만 주시고.”


“ㄴ, 너... 너...!”


“제가 아무것도 모를 것 같았어요? 그래놓고 이모가 저질러놓은 일까지 제가 다 책임을 지라고요?”





아뇨? 그걸 제가 왜 져요? 전 이미 충분히 이모한테 도움드렸는데? 도윤이랑 아윤이는 이모 자식들이니까 이모가 감당 못하면 걔네들이 책임져야죠. 이제 저한테 찾아오지 마세요! 이모 알아서 하시라고요! 그대로 지나쳐 달려가겠지. 사람들 지나다니는 거리까지 나온 여주. 일단 다리에 힘이 풀려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았어.





이제서야 터진 눈물. 자리에 앉아 울고 있으니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힐끗거리는 게 느껴져. 근데 지금 그런 시선 따위 신경 쓰일 리가 있겠어? 어떤 사람은 가방을 뒤져 휴지를 여주에게 조심스럽게 건네주겠지. 휴지 받으면서 울음 섞인 목소리로 감사 인사까지 하는 여주. 또 한참을 울다가 좀 진정이 돼서 울던 걸 멈췄어. 주위를 둘러보자 이제 시간도 많이 늦어서 주변에 아무도 없이 여주 혼자 앉아있어.





코를 훌쩍이며 정신을 차리는데 또 집에 가기도 겁나. 이모가 아직도 있으면 어떡해?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여주. 휴대폰을 꺼내 망설이다가 결국 재민이에게 전화를 걸겠지.





- 여주씨!





신호음이 한번 가기도 전에 바로 전화를 받는 나재민. 왜 이제 전화해요. 집에 들어갔다고 연락이 없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뒤이어 들리는 제 걱정이 담긴 목소리에 이상하게 불안했던 마음이 점점 편해지는 거야. 이 사람이 뭐라고 참…





- 여보세요? 여주씨?


“......제가 무슨, 어린애인 줄 아세요?”





뭘 그렇게 걱정을 해요. 울음을 멈춘 지 꽤 돼서 먹먹한 목소리도 원래대로 돌아왔고, 전화하기 전에 목소리를 가다듬기도 해서 평소처럼 얘기했는데.





- 여주씨.


“......네. 이사님.”


- 나 여주씨 목소리 들으니까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러는데.





금방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릴래요? 근데 재민이는 바로 눈치챈 거야. 여주에게 무슨 일이 있었구나. 알아챈 순간 바로 여주에게 가겠다는 나재민. 일이 점점 마무리 되어가고 있었지 끝난 건 아니었거든? 그대로 자기 사무실로 돌아와서 겉옷 챙기길래 같이 야근하고 있던 이 비서가 못 가게 말리겠지.





“어디 가시려고요. 지금 이사님 때문에 야근하는 인원이 몇 명인지 아십니까?”


“이 비서 휴가 가고싶댔지. 이번 프로젝트 마무리되면 휴가 보내줄게.”


“……며칠이요?”


“일주일.”


“이주.”


“하... 일주일에 휴가비 대줄게.”


“제 선에서 마무리 지어보겠습니다. 조심히 퇴근하세요 이사님.”





나재민도 야근까지 하면서 하나부터 열까지 다 신경 쓰고 있는 중요한 프로젝트였는데 그걸 내치고서 여주한테 달려가는 노빠꾸 나재민. 여주에게 금방 가겠다고 한 말을 지키려고 밟고 달려갔어. 아무도 없는 버스정류장에서 혼자 앉아 발 장난을 치고 있는 여주가 보여. 재민이 차 발견하고 조수석에 탄 여주. 얼마나 밖에 오래 있었나 코와 귓바퀴가 빨개진 거 보고 나재민 지금도 빨리 와놓고 좀 더 빨리 올 걸 생각하겠지.





“여주씨 내일 오전에 바빠요?”


“네?... 아, 아뇨. 내일은 안 바빠요.”


“그래요? 알았어요. 벨트 매요.”





벨트? 일단 재민이 말대로 안전벨트를 하겠지. 어디 간다고 말도 안 해주고 차는 출발했어. 늦은 시간이라 도로에 차가 한산해서 막힘없이 쭉 가겠지. 여주도 굳이 어디 가냐고 묻지는 않았어. 그저 창밖으로 지나치는 풍경만 멍하니 바라볼 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바로 묻지 않는 나재민의 배려가 고마웠어. 여주도 막상 그렇게 질러버리고 왔지만 머리가 복잡했거든.





한참을 달리다 도착한 곳은 앞에 한강이 보이지만 사람은 별로 없는 곳. 차 소리도 잘 안 들려서 조용하고 복잡해서 쉬고 싶을 때 오면 좋을 장소였어.





“아무도 안 알려주는데 여주씨한테만 알려주는 곳이에요.”


“......”


“조용해서 혼자 생각하기도 좋고 앞에 야경도 예쁘고, 그래도 저도 가끔 와서 한참 있다가 가요.”





그 뒤로 이어지는 정적.





“......이모가 집 앞에 찾아왔더라고요.”





한참 이어지는 고요함을 여주가 먼저 깼어. 이모와 집 앞에서 있었던 일을 꺼내니까 계속 그 전 얘기들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거야. 어차피 나재민은 여주 뒷조사해서 대충 어떤 사정인지 다 알잖아. 근데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이모네 집에서 얹혀서 산 그 순간이 얼마나 눈치 보이고 힘들었는지, 그래도 가족이니까 꾹 참고 넘겼던 일들과 복잡한 속마음 같은 그런 세세한 얘기는 모르니까. 그리고 여주도 그런 얘기를 나눌 친한 친구조차 없어서 16살 때부터 꾹 참아왔던 속마음이 한번 터지니까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거지.





“결론은 이제 가족이고 뭐고, 그냥 저 혼자 잘 먹고 잘 살려고요.”


“네. 그럼요. 그런 사람들 가족이라 생각하지 말아요. 원래 인생은 혼자라잖아요.”


“맞는 말인데 그런 말 하면서 진짜 혼자인 사람들은 없잖아요. 저는 이제 진짜 혼자인데.”


“.......서운하네요. 제가 있는데 혼자라고요?”


“...하하, 맞네. 이사님이 계시네요. 이 비서님도 계시고...”





이 비서도 있다는 말에 나재민 또 표정 찌푸리는 거야. 안되겠어. 이 비서 그냥 해외 지사로 보내버릴까. 혼자 속으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여주가 재민이한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어볼 게 있다고 하는 거지. 금세 웃는 표정으로 바꾸고 어떤 거요? 하며 다정한 목소리로 묻는 나재민. 여주가 뭐 물어보는데 이 비서 해외 발령 보낼 생각에 제대로 못 듣고 단어만 들은 거야. 화들짝 놀라는 나재민.





“뭐라고요 여주씨? 호텔이요?”


“네...? 네. 그때 그 호텔...”





호텔? 가자고? 나랑? 단계 건너뛰기가 이렇게 갑자기? 하지만 오히려 좋아. 여주는 어리둥절하지. 아니. 그걸 대답을 해주기 어려우신가?





“대답해 주기 어려우시면 그냥 안 해주셔도...”


“아뇨. 대답할게요. 저야 너무 좋죠. 좀 갑작스럽긴 하지만. 여주씨가 먼저 가자는데 어떻게 거절을 해요 제가.”


“네?”





그제야 나재민이 내 말을 제대로 안 들었다는 걸 눈치챈 여주가 되물어보겠지. 내가 뭐라고 얘기했냐고. 호텔 가자면서요. 나재민 커다란 두 눈 껌뻑이면서 대답하는 거지. 내가 호텔을 이사님이랑 가겠냐고요! 소리치니까 그럼 나랑 가야지 누구랑 가! 어떤 남자랑 가게요! 되돌아오는 말에 여주 진짜 돌아버려. 그 호텔 하루 자는 거 얼마냐고. 그거 물어봤는데 뭘 호텔을 가네 마네야. 진짜. 그럼 오해 풀린 재민이가 호텔에 연락 넣으라고 이 비서한테 전화해서 얘기했는데 전화 끊고 나니까 번뜩 생각이 나는 거야.







“아아, 어쩌죠 여주씨. 이 비서한테 답이 왔는데 호텔에 방이 없다네요?”


“정말요? 아, 그럼 다른 곳으로...”


“다른 곳은 좀... 국내에서 이 호텔이 보안이 철저해서 제가 자주 가는 건데.”


“그래도 다른 호텔도 괜찮은 곳 있겠죠.”


“제가 믿음이 안 가서... 어쩔 수 없네요. 여주씨 오늘은 일단 우리 집으로 가요.”


“......저는 이사님에게 믿음이 안 가네요. 이 비서님한테 직접 들어봐야겠어요.”





‘근면 성실’ 또 ‘청렴’ ‘도덕적인 사람’ 이 비서님은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 주장하며 얼른 이 비서님께 전화를 해보라는 여주. 결국 스피커폰으로 해서 이 비서한테 전화를 걸겠지.





- 네. 이사님.


“이 비서 호텔에 자리 없다는 거 확실하지?”


- ......네. 그렇답니다.





봐요. 내 말이 맞지? 의기양양한 표정과 함께 전화를 끊는 나재민. 반대로 이 비서는 하던 거 멈추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반성했대.







죄송합니다 김여주씨. 제가 거짓말을 했습니다. 제 좌우명과 다른 죄짓는 행동을 해버렸습니다. 부디 저를 용서해 주세요.





저번 호텔은 방이 없고, 다른 호텔은 보안을 믿을 수 없어서 여주를 못 보내겠다. 결국 나재민의 꼬드김에 넘어간 여주. 어쩔 수 없이 오늘 하루는 나재민의 집에서 보내기로 했어. 그리고 내일부터 이사 갈 집을 알아봐야지.





계속 나재민이 이사를 제안하면 여주가 거절했었는데 오늘 일을 겪고 나니 또 찾아올까 봐 이사를 가야겠더라고. 여주는 얼른 집을 빼야겠다고 생각했고, 나재민은 거기서 또 머리를 굴리고 있겠지.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가는 글ƪ(˘⌣˘)ʃ



트위터 @deok_c 

푸슝 https://pushoong.com/ask/4081200648

김 덕춘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