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더러 대체 어쩌라는 거야 젠장....”

 

왠지 떠맡지 말아야 할 일을 떠맡아버린 느낌이다. 태형은 애홀의 황태자에게 도움을 준다고 말한 적은 없다. 그런데 엉겁결에 애홀의 일들이 자신의 책임으로 넘어 온듯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태형은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어떠한 권한도 책임도 없다. 오히려 그들에게 빚을 받아 내야 할 처지다. 그런데도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결국 쓸데없는 동정심 때문이다.

 

 

“그러게요. 뭘 어떻게 해 달라는 걸까요”

 

 

그런 기분을 느끼는 건 석진도 마찬가지다.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애홀의 황태자에게 효민의 모습을 투영해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점은 태형도 같다. 그 누구도 도와 주지 않는 일을 어린 황태자가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도, 친척들도 그를 도와주기는커녕 방해와 위협만 될 뿐이다.

혹시 내 자식이 훗날 저런 상황에 처하지는 않을까? 우리가 저런 무력하고 못난 부모 소리를 듣게 되는 건 아닐까? 태형과 석진이 늦도록 잠들지 못하는 이유다.

 

 

“살다 살다 별 흉악한 사람들을....”

“외숙부들이 설치는 걸 보면 황후 자리가 비었나봐요”

 

“그렇겠지... 그러니 막아 줄 사람이 없는 거겠지”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더니...”

 

 

또한 자신들의 주변을 돌아 보게 된다. 형제, 부모, 자식, 그리고 피를 나눈 많은 사람들. 적어도 아직까지 태형과 석진의 혈육들은 이들을 대단히 곤란하게 만든 적은 없다. 태형의 이복 형제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살고 있으며 결코 정치에 끼어들지 않는다. 마치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말이다. 석진의 형제들 역시 마찬가지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태형과 석진의 권력은 탄탄해 보인다.

 

그러나 사람의 삶이란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다. 언제 어디에서 누가 이 안정을 깨고 불안감을 조성할지는 장담하지 못한다.

 

 

“옷 안 갈아 입으세요?”

“갈아 입어야지....”

 

“조금이라도 주무세요”

“잠이 올까 모르겠네”

 

벌써 삼경인데도 태형과 석진은 옷조차 편히 갈아 입지 못하고 있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애홀의 황태자가 찾아 오면 모든 일을 마무리 짓고 이제는 한숨 돌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의 복병이 나타났다.

 

 

“내 침의는?”

“잠깐만요”

 

“앉아 있어요. 내가 갖고 올게”

“저기 걸려 있어요”

 

 

너무 오랫동안 앉아서 고심했더니 머리도 지끈거리고 온몸이 욱신거리는 듯하다. 답도 찾지 못할 고민은 건강에 해롭다. 태형은 비로소 몸을 일으켜 자신의 침의를 가지러 간다. 지금 당장 잠이 든다 하더라도 어차피 얼마 자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옷을 갈아 입기 위해 가던 태형의 발길을 또 누군가가 붙잡는다.

 

막내 아이가 칭얼거린다.

 

“아이구, 깼네 우리 공주”

 

석진의 손보다 태형이 빠르다. 태형은 능숙한 솜씨로 칭얼거리는 아이를 토닥인다. 그러면서 기저귀를 확인하는 일을 잊지 않는다.

 

“갈아 줄까?”

“젖었어요?”

 

“조금”

“갈아야죠 그럼”

 

“기저귀 이리 줘요”

 

기저귀를 갈아 달라 칭얼대는 아이를 능숙하게 달래 옷을 벗기고 아래를 닦인다. 기저귀를 갈아 채우는 일까지 태형의 손은 멈추지 않고 해낸다. 아이 기저귀를 갈아 채우는 일은 태형이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손쉽고도 고상하며 가치 있는 일이다.

 

“너 나랑 놀고 싶어서 깼지”

“재우세요. 재워야 돼요”

 

“자자, 딸아... 오늘은 아버지가 무척 피곤하구나”

“애 주시고 얼른 옷부터 갈아 입으시라니까요”

 

 

[폐하, 오 상궁이옵니다]

 

 

그러나 안락한 시간을 깨뜨리는 목소리. 이 깊은 밤에 어지간한 일로는 태형과 석진을 찾지 않을 것이다. 막 기저귀를 갈아 채우고 아이를 석진에게 넘기려던 태형도, 그 아이를 받아 들려고 손을 뻗었던 석진도 동시에 멈춘다. 그리고 서로의 눈을 불안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이 시간에 왜.....?”

“안 자고 있으니 들어오시게”

 

 

삼백 육십 오일 중 이들이 편히 잠들 수 있는 날은 많지 않다. 손에 꼽을 정도다. 태형과 석진은 또 다시 알 수 없는 이유로 긴장해야 한다.

 

 

 

 

 

 

 

 

 

 

“안에 누가 있는가”

“저희 황태자 저하만 계시옵니다”

 

“오 상궁만 남고 다들 밖에 나가 계시게. 내 명이 있을 때까지”

“..................”

 

“내 말이 들리지 않는가?!”

“예 마마”

 

“영진아. 너도 이 사람들이랑 같이 나가 있어라”

“아... 예 마마”

 

애홀 황태자의 숙소에서 온 급한 전갈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태형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석진에게 전하는 다급한 부탁이었다. 석진은 애홀의 황태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 태형이 아니라 자신에게만 전할 부탁이라면 내용은 뻔하다. 문을 꾹 닫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체할 수 없는 향기가 문 틈으로 새어나오고 있다. 석진은 재빨리 오 상궁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낸다.

아직 어린 사람들은 열락기가 찾아 왔을 때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석진의 경우 일찍부터 태형의 도움으로 열락기를 다스리는 좋은 약을 타 먹었고, 나중에는 태형을 만나 혼인함으로써 굳이 애쓰지 않아도 무난하게 조절이 되었다. 하지만 애홀의 황태자처럼 아직 어리고 반려가 없는 경우는 다르다.

더군다나 이곳은 그에게 객지이기에 피로와 정신적인 압박감 등으로 몸의 균형이 깨졌을 수 있다. 그런 경우 열락기가 찾아 올 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아유 세상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오 상궁은 인상부터 찌푸린다. 향이 지나치기 때문이다. 방 안은 온통 애홀의 황태자가 뿜어 낸 향이 들끓고 있다. 석진은 쓰러지듯 누운 애홀의 황태자에게 다가 가 그에게 말을 걸어 본다.

 

“정신이 듭니까? 내가 누군지 알겠습니까?!”

“으..... 황후 마마....”

 

“약은? 약 갖고 온 것 없습니까?!”

“먹었....습니다... 그런데도....”

 

“하... 큰일이네”

 

몸이 펄펄 끓고 있다. 자신이 가져 온 약을 먹어도 별 효험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대로 두면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다. 벌써 온몸이 불덩어리다. 마치 대단한 열감기를 앓는 것과 비슷한 증상이다.

 

 

“마마, 가서 약을 갖고 오겠습니다”

“얼른 가서 좀 갖다 주시게. 하나 더 먹는 거야 크게 상관 없겠지”

 

“예 마마”

 

불필요한 동정심을 갖지 않으려 애썼지만 잘 안 된다. 석진은 마치 자신의 옛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측은하고 마음이 아프다.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 열락기는 고통일 뿐이다. 약을 먹거나 양인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 있다. 하필이면 여기에 와서 이런 일이 - 석진은 오 상궁이 약을 가져 올 때까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식은땀으로 젖은 얼굴을 닦여 주는 것만이 유일하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다행히 오 상궁은 빠른 시간 안에 약을 가지고 왔다. 석진은 애홀의 황태자를 억지로 일으켜 본다.

 

 

“약 먹읍시다. 일어나 앉아 보시오”

“....................”

 

“못 앉겠소?”

“....................”

 

“큰일이네... 그 약 이리 줘 보시게”

“예 마마”

 

석진은 오 상궁에게 약을 받아 환약을 직접 물에 넣어 으갠다. 원래는 물을 먹을 필요 없이 씹어 먹으면 그만인 약이다. 그러나 애홀의 황태자는 일어나 앉지도, 약을 씹어 먹을 여력도 없는 것 같다. 석진은 약을 물에 차곡차곡 갠 후 그의 머리를 자신의 허벅지에 얹는다.

 

“약 좀 먹여 보시게. 방금 개어 놓은 거”

“예 마마”

 

열이 올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아이에게 억지로 약을 먹이듯, 석진과 오 상궁은 애홀 황태자의 입을 억지로 벌려 조금씩 약을 흘려 넣는다. 다행히 토해내지는 않고 조금씩이나마 받아 먹는 것 같다. 약이 기도로 넘어가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흘려보낸다. 조금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다행히 그는 약을 다 먹었다. 이제 약 기운이 몸에 퍼지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파리한 얼굴로 석진의 다리를 베고 누운 애홀의 황태자. 석진은 마치 자신의 아들에게 하듯 머리와 얼굴을 쓰다듬는다. 많이 지치고 고단해 보인다. 열락기의 열통에 시달려서가 아니라 그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가 얼굴에 드러나는 것 같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고서야, 석진은 그의 숨소리가 조금씩 차분해지는 것을 느낀다. 데일 것처럼 뜨겁던 열감도 조금씩 식어가는 것 같다. 차가운 땀을 팥죽같이 흘리며 숨을 쌔근쌔근 몰아 쉰다.

 

 

“오늘 밤은 아무래도 내가 여기 있어야겠네”

“예?”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내가 있어서 책임을 지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마마 그래도 여기서 밤을 새우시는 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외국의 황태자이니. 내가 책임을 지는 게 맞네”

“.......예 알겠습니다 마마. 폐하께 그럼 그리 아뢰겠습니다”

 

“내 명이 있을 때까지는 아무도 이 방에 못 들어 오게 해 주게”

“예 마마”

 

 

석진은 자신의 다리를 꼭 붙들고 잠이 든 애홀의 황태자를 뿌리치지 못한다. 나는 상관 없는 일이라고 속으로 말하면서도 떨쳐내지 못한다. 만일 이 황태자에게 좋지 못한 일이 생긴다면 누군가는 책임질 사람이 필요하고, 그렇다면 자신이 이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마마님, 문 좀 열어 주십시오!”

“아 글쎄 안 된다니까요. 황후 마마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명하셨다는 말씀을 몇 번을 드려야 합니까?”

 

“아니 마마님, 저희 황태자 전하께서 안에 계신데 저희가 못 들어 간다는 게 말이 됩니까?”

“나으리.. 지금 안에 계신 귀국의 황태자 전하께서 어떤 상태이신지 뻔히 아시면서 우기실 걸 우기십쇼!”

 

“하... 미치겠네 진짜”

 

날은 밝았다. 아무도 함부로 들이지 말라는 석진의 명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애홀의 황태자를 따라 온 무관들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 그들은 자신의 시야 안에 자신들의 황태자가 없는 것을 무척 불안해 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황태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라고 보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석진이 자신들의 황태자를 비밀스럽게 보호하고 있는 한 그들은 자신들의 책무를 다 할 수가 없다. 그러니 훗날 책임 추궁이라도 받을까봐 애가 타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궁인들이 겹겹이 둘러싸고 틈을 내어 주지 않는다. 열락기를 맞은 음인이 있다면, 그의 반려가 아닌 이상 다른 사내가 그 안을 드나드는 건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들어 가 보겠다고 우기는 건 다른 의도가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이들은 불안한 시선을 저희들끼리 주고 받는다. 만일 이곳이 애홀의 황궁이었다면 이들은 원하는 대로 궁인들을 밀치고 억지를 부려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영토가 아니다. 엄연히 다른 주인이 존재하는 한의 황궁이니 더 큰 소란을 만들 수가 없다.

 

“황후 마마 나오십니다”

 

석진이 드디어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역시 어지간히 지친 기색이 얼굴에 역력하다. 밤새 애홀의 황태자를 간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석진의 눈은 날카로운 빛을 잃지 않는다. 조금 전의 소란을 안에서 모두 들었다. 석진은 천천히 뜰로 걸어 내려와 애홀의 무관들 앞에 선다.

 

“왜 이리 소란스러운가”

“마마... 그것이 이 사람들이 자꾸 안에 들어가서 확인을 해 봐야 한다고 하여...”

 

“자네들”

“예 황후 마마...”

 

“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뻔히 알면서 들어가 보겠다고 하는 건 무슨 생각인가”

“..........소인들의 책무는 황태자 전하를 무탈히....”

 

“자네들은 무관들이니 음인들은 아닐 것이고”

 

 

석진은 그들을 겁박하듯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선다. 그들은 석진의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저 땅을 향해 고개를 푹 꺼뜨릴 뿐이다.

 

 

“그런 자네들이 저 안에 굳이 들어가겠다는 말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송구하옵니다 황후 마마....”

 

“그리고 내가 명을 내렸다고 하는데도 우기는 것은 무슨 객기인가”

“황공하옵니다. 황후 마마. 소인들은 그저 소인들의 맡은 바 책무를 다 하기 위해....”

 

“말이 길다. 내 명이 있을 때까지는 아무도 저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만일 내 명을 어길 때에는... 이곳이 한의 황궁임을 잊지 말거라”

 

“예 황후 마마...”

 

석진의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지만 그 의미는 어떤 말보다 냉엄하다. 이곳이 한의 황궁임을 잊지 말라는 말은 만일 명을 어길 시에 이곳의 법에 따라 처분하겠다는 뜻이다. 석진이 싸늘한 기운을 남겨 놓고 그들을 스쳐 지나간다. 씁쓸한 입맛을 다시는 무관들의 표정이 어둡다.

 

 

 

 

 

 

 

 

 


 

“이제 좀 괜찮습니까”

“황후 마마...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직 몸이 편치 않을 텐데. 앉으세요”

“.............예 황후 마마”

 

그날의 늦은 저녁, 석진은 애홀 황태자의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그의 숙소를 찾아 왔다. 몸살을 심하게 앓은 후라 그런지 얼굴이 해쓱하고 창백하다. 그러나 어젯밤처럼 고통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상궁들의 말에 따르면 저녁 식사도 별 탈 없이 했다고 한다.

그는 석진에게 무척 송구해하며 고개를 들지 못한다. 석진이 애홀의 황태자를 도운 이유에는 전혀 정치적인 목적은 없다. 그저 먼 외국에서 이런 힘든 일을 당했으니 그 처지가 안쓰러웠고, 자신의 옛 모습이 떠올라서 동정심이 갔을 뿐이다.

 

“죽을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고개를 드세요”

“.......... 너무... 큰 신세를 졌습니다”

 

“고작 이런 걸로”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황후 마마”

 

그는 어쩌면 한의 황궁이 자신의 무덤이 될지도 모른다는 각오로 온 건지도 모른다. 모든 일의 책임을 황태자에게 떠넘기고, 지금쯤 그 일을 꾸민 자들은 두 발을 뻗고 편히 잠들어 있을 것이다. 내 아들이 이런 일을 당하고 있다면 - 태형이 가장 분개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실은 애홀에 있을 때 황후 마마에 대한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내 얘기가 거기까지 흘러 들어 갔습니까”

 

“예.....”

“뭐라고 욕들을 하던가요”

 

“욕이라니요. 당치도 않으시옵니다! 한에서 처음으로 남 황후가 나왔다며... 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부러워하고 경탄했습니다”

 

석진이 황후가 된 것은 역사에 길이 남을 중대한 사건이기는 했다. 석진을 황후로 만들기 위해 수백 년 동안 이어 온 법마저 바꾸었으니 말이다. 아직도 한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는 음인들의 운신에 한계가 많다. 애홀만 해도 이 황태자가 음인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한다. 물론 언젠가는 밝혀질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이 황태자를 조종할 민감한 약점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어서 폐하를 뵙고 용서를 구해야 하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그냥 내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래도 됩니다. 편히 말씀하세요”

 

“............. 예 황후 마마”

 

아직 태형은 애홀의 황태자를 만날 수 없다. 그의 열락기가 완전히 지나간 후에야 황태자와 태형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석진은 태형이 무엇을 궁금해 하고 답답해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우선은 애홀의 상황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어제 제가 저를 좀 도와 달라고 부탁드린 것은... 사실 말씀 드리지 못한 속내가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런 말씀을 드리면 저를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이런 황태자가 무슨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하고 비웃으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사실 나라를 뒤집어 엎고 싶습니다”

 

역시 그런 말을 하고 싶었구나 - 석진은 자신이 어렴풋이 예상한 내용이 맞음을 확인한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지금의 상황을 해결하기 역부족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저 혼자 힘으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러니 누구의 도움이라도.. 받아야 합니다 황후 마마”

“모후께서는 안 계십니까? 어째서 외숙들이 그렇게 설친단 말입니까”

 

“어마마마께서는 몇 해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외숙부들이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 그때부터입니다”

“어쩐지....”

 

“부끄럽지만 저는 차라리 연이 한 번 더 쳐들어 와 이 나라를 발칵 뒤집어 주길 바라고 있기도 합니다. 정말 부끄러운 생각이지만....”

 

연은 애홀의 땅 덩어리 절반을 앗아 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 같다. 그들을 완전히 정벌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명맥은 이어가도록 관대하게 구는 것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우선 당장은 정벌 야욕을 보이질 않는다. 그러니 절반만 남은 애홀 안에서는 온갖 어수선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우리가 그런 일을 해 주길 바라는 겁니까 황태자께서는”

 

“.............. 그래 주실 수만 있다면.... 제 외숙부들과 그 세력들을 처단할 수만 있다면... 부탁 드리고 싶습니다. 횡포가 너무나 심합니다. 가뜩이나 전쟁을 겪은 뒤 살기 힘들어진 백성들이 도저히 못 살겠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런데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저는 너무나 무력한... 쓸모없는 황태자입니다”

 

그는 몹시 자괴감을 느끼는 것 같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는 태형의 모습이 겹친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혹은 자신의 선택이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 왔을 때. 머리를 감싸며 어둡게 한숨을 쉬던 태형의 모습이 애홀 황태자에게도 있다. 석진이 가장 가슴 아파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가 굳이 개입할 이유 없어요. 당신도 그러니까 더는 신경 쓰지 마요”

“.................”

 

“그 사람이 불쌍한 건 불쌍한 거고. 이건 내가 감당할 이유가 없는 일이오”

“그건... 그렇죠”

 

태형은 단호히 선을 긋는다. 석진은 태형에게 어쩌자는 말을 한 적은 없다. 그저 애홀의 황태자가 한 말을 가감 없이 전달했을 뿐이다. 직접 만나 볼 수 없기에 태형은 좀 더 알고 싶은 것이 있어도 당장 물을 수가 없다. 태형의 골치 역시 아프기는 매한가지다. 애홀에 원하는 것을 요구하고 당한 것에 대한 보상만 받으면 끝내려고 했다. 그런데 일이 꼬여가는 느낌이다. 분명 원래 기대했던 바와는 많이 다르다.

 

“몸 상태는 이제 좀 낫다고?”

“예. 일단은요. 며칠 좀 두고 봐야겠지만”

 

“참... 그 사람도 앞날에 고생길이 훤하네”

“폐하 생각이 났어요”

 

“내 생각?”

“옛날 제 생각도 났고”

 

“..................... 내 생각은 왜”

“그냥 뭐. 고민하고 힘들어 하는 모습이요”

 

“내가 뭘 그렇게 힘들어 했다고....”

“뭘 이제 와서 아닌 척하세요. 누구보다 제가 잘 아는데”

 

“그 정도도 안 힘들어서 무슨 황제를 하나”

 

음인 사내로서는 처음으로 황후가 된 석진. 그리고 그와 비슷하게 음인 사내로서는 처음으로 황태자가 된 그. 이래저래 비슷한 점이 많다. 그가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들은 태형과 석진이 과거에 느꼈던, 혹은 지금 느끼고 있는 수많은 생각과 감정들의 총체다. 그러니 쉽게 외면할 수가 없다.

 

“그럼 거긴 지금 누가 지키고 있는데?”

“감찰상궁더러 잘 경계하라고 했어요. 무관들은 바깥에 다 세워 놨고”

 

“처남은? 처남도 어제 거기 있었던 거 아닌가?”

“영진이도 거기 있어요. 영진이야 어차피 그 방에 들어 갈 일은 없는 녀석이니까”

 

쉽게 정리가 되지 않는 여러 문제들. 태형과 석진은 오늘 밤도 아마 쉽게 잠들지 못하고 뒤척일 것 같다. 졸지에 커다란 짐을 떠맡은 기분이다. 애홀의 황태자가 고국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계속 이런 무거운 마음을 지고 있어야 할 듯하다.

 

 

 

 

 

 

 


 

“식사는 어떠셨습니까”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행입니다. 다른 필요하신 것은 없으십니까?”

 

영진은 여전히 애홀 황태자의 숙소를 지키고 있다. 다만 그는 두 겹의 문을 사이에 두고 애홀 황태자와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다. 애홀 황태자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그와 관련된 일들을 모두 떠맡은 책임자가 영진이기에 영진은 이곳을 떠날 수 없다.

어젯밤 한 차례 소란을 겪은 후 둘쨋날 밤이다. 오늘도 혹시 무슨 급박한 일이 생길까봐 영진은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한다. 만일 어제와 같은 일이 생길 경우 영진은 또 석진에게 달려 가 고해야 한다.

문 두 개를 사이에 두고 밖에서 말을 전하면, 안에서는 작지만 또렷한 발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다행히 상태는 좋은 것 같다.

 

 

[저를 따라 온 무관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다른 전각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혹시 전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오.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저 궁금하여 여쭤본 것입니다]

 

“아 예.....”

 

 

얼굴을 직접 보지는 못 하지만 영진의 눈앞에는 애홀 황태자의 얼굴이 선명히 떠오른다. 사실 제대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눈을 마주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얼핏 본 인상들이 조합되어 눈앞에 또렷한 형상을 만든다. 여러모로 많은 신경을 기울이게 하는 사람이다. 그 희고 갸름한 얼굴은 부서질 듯 안쓰럽다.

 

[저 혹시... 밖에 다른 사람들과 같이 계십니까?]

 

“아닙니다. 여기 문 앞에 저 혼자 서 있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니요. 그냥 여쭤 봤습니다]

 

 

그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은 모양이다. 제 처지가 답답하기도 하고 낯선 곳에 와 이런 일을 겪으니 황망하기도 할 것이다. 영진은 그래서 선뜻 발걸음을 돌리지 않고 그의 말벗이 되어 주고 있다.

 

“지루하시면 읽을 책이라도 좀 가져다 드릴까요”

 

[.....그냥... 이렇게 이야기라도 좀 나누면... 안 되겠습니까?]

 

 

“아 뭐.. 안 될 건 없습니다만....”

 

[말씀하시는 음성이 참... 듣기 좋으십니다]

 

“예?! 아 하하... 감사합니다”

 

읽을 책보다는 당장 대화를 나눌 상대가 필요한가보다. 영진은 갈까 말까 망설이던 마음을 돌려 그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다. 목소리가 듣기 좋다는 말에 괜히 낯이 화끈거리기도 한다. 자신과는 엄연히 지체가 다른 사람인 줄 알면서도 궁금한 것들이 많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라도 좋으니 영진은 이 시간이 오래 자신에게 머물러 있길 은연 중에 바란다.

 

[황후 마마께서는 참 좋으신 분인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좋게 봐 주셔서...”

 

[어제 저를 보살펴 주시는데...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아아....”

 

[대부인께서는 혹시... 생존해 계시는지요?]

“저희 어머니 말씀이십니까? 예. 건강하십니다 저희 부모님은”

 

[부럽습니다. 어제 어머니가 정말 많이 보고 싶었는데... 황후 마마를 뵙고 많이 위로가 되었습니다]

 

많이 지치고 외로운 사람이구나. 영진은 그가 아마 본국에서는 이만큼 수다스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속마음을 털어낼 곳이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 와서, 자신을 감시하고 경계하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야 주절주절 마음을 털어 놓는다. 영진은 이제 아주 문 앞에 퍼질러 앉아버렸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계속 서 있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밥-뷔진-잠-뷔진-일-뷔진-밥-뷔진... 뷔진 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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