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제품에 그렇게 열과 성을 다 하더니 반응이 좋아서 꽤 뿌듯하겠어요."


"예상했던 것보다 반응이 더 좋아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에요-"





행사가 있어 장소에 도착한 여주는 바로 자신을 쳐다보며 질문해오는 사람들을 보며 형식적이고 반듯한 여주의 대답에 어쩜 그렇게 겸손하기까지 하냐며 웃어 보이는 사람을 보며 그저 사르르 웃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방금 그 말을 했던 사람은 신제품 출시 행사 때 여주를 보며 수군거리던 사람들 사이에 껴있었다는 걸 여주는 알고 있었다. 그때 뭐라고 했더라. 여주를 뭣 모르는 철부지로 치부하던 말들에 맞다며 맞장구를 쳐댔었다.





한참을 사람들하고 대화를 나누다가 샴페인을 들고 한쪽 구석으로 와서 목을 축였다. 어쩔 수 없이 이 행사에 참석하긴 했지만 정신 없이 자신을 향해 붙어오는 그 많은 인원들을 상대하기는 버거웠다. 사람들하고 대화를 하는 걸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 곳에서 하는 대화는 한마디 한마디 다 신경을 쓰고 조심스럽게 내뱉어야 하는 곳이니까. 벌써 피곤하네. 작게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는데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니 재민이 여주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나 기다린 거야 여주야?"


"하..... 나재민 네가 그랬잖아. 네가 다 커버 쳐줄 테니까."





그냥 나는 와서 자리만 지키고 있어도 된다며. 재민을 째려다 보며 작게 얘기하자





"그래도 좀 봐주라-"


"왜 늦었는지 설명하면."


"아, 머리를 올릴까 내릴까 고민하다가....."


"......."





여주는 바로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말을 꾹 삼켰다. 둘을 지켜보고 있는 눈들이 많았다. 여주는 많은 뜻이 담긴 눈빛으로 재민을 쳐다봤다. 죽고 싶냐. 고작 그런 걸로 날 기다리게 해? 여주의 눈빛에 담긴 뜻을 읽은 재민은 눈을 사르르 접어가며 웃더니





"여주 네 옆에 있어야 되는데 내가 꿇리면 안 되잖아."


"......"


"게다가 첫 날인데."





당연히 더 신경 쓰고 와야 하지 않겠어? 재민의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한 여주는 째려보던 눈빛을 거두고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와 나 회장까지 불러 같이 식사를 했던 날. 아니라고 해서 오해를 풀어야 할 판에 아버지에 뜻에 맞장구를 쳐대는 나재민 때문에 여주는 화가 났었다. 자신의 말을 들어보라는 재민의 말에 여주는 화를 꾹 참고 무슨 생각이었는지 들어나 보자며 재민을 쳐다봤다.





"여주 네가 그때 그랬잖아."


"내가 뭘. 언제."


"우리 둘이 술 마시고 너 필름 끊긴 날."


"......"





그날 둘만 있는 룸이라 누가 대화를 들을까 걱정할 필요도 없었고 술도 꽤 들어갔겠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재민과 마주했던 그날 이야기를 다시 꺼내며 그날 후에도 여주에게 은근슬쩍 몇 번의 선 자리가 또 들어왔었다고 자신은 아직 결혼 생각이 없는데 아버지는 여주에게 결혼을 재촉한다며 푸념 아닌 푸념을 늘어놓자 재민은 입술을 한번 말아 물으며 여주를 쳐다봤다.





'그때 너 마주쳤던 날에도 아버지가 억지로 잡아놨던 선 자리였거든.'


'왠지 그럴 것 같았어.'


'근데 왜 나만 가지고 그러냐고. 오빠도 있는데.'





진짜 짜증나. 예전부터 나한테만 그랬어. 하- 진짜 어떻게 연애라도 하는 척 해야되나? 테이블 위에 팔을 올려 머리를 기대고 중얼거리는 여주를 재민이 빤-히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여주야. 내가 해결할 방법 하나 알려줄까?'


'응? 네가?'




재민의 말에 여주가 눈을 올려 쳐다봤다.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눈을 한번 깜빡인 여주가 네가 어떻게? 하며 되묻자 재민은 피식 웃으며 술을 한 모금 마시고서 잔을 내려놓더니,





'바로 앞에 답이 있잖아.'


'....?'


'내가 답이라고.'


'......무슨 말이야?'


'나를 답으로 얘기하면 바로 해결 될 일인데 왜 어렵게 가려고 해.'





여주는 자신이 기억도 못하고 있는 그 이야기를 굳이 꺼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 이해를 못 하는 척 했다. 지금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재민이의 눈빛을 보고 모를 수가 있을까. 여주는 그 시선을 피했다. 다시 눈빛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여주야. 난 널 어렸을 때부터 봐왔고 네가 뭘 원하는지 잘 알고 있어."


"...."


"물론 너 혼자 못 해낼 거라고 생각해서 이런 말 하는 거 아니야."


"...."


".....왜?"


"...."


"왜... 나를 왜 그렇게까지..."


"하루라도 빨리 네가 원하는 걸 이뤘으면 해서..."


"...."







"그러니까 날 이용해도 돼. 여주야."






*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온 동혁은 털썩- 자리에 앉고서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 피곤해. 눈을 꾹 감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동혁은 어제 여주 연락처를 띄어놓고 뭐라고 핑계를 대며 찾아가야 할까 고민하고 고민하다 결국 잠을 설쳤다. 잠시 그렇게 눈을 감고 있는데 책상 위에 올려뒀던 휴대폰이 작게 울렸다. 감고 있던 눈을 바로 뜨고 바로 휴대폰을 집어 확인했다. 혹시 여주에게 온 연락일까.





[오빠 마지막으로 얘기 좀 해요.]


"아...."





하지만 기대했던 거와 달리 예진에게 온 문자였다. 옥상에서 송 대리와 얘기한 다음 날 동혁은 퇴근 후 예진과 약속을 잡았다. 오랜만에 동혁이 먼저 보자고 한 약속이라 한껏 들떠서 나온 예진을 보며 동혁은 죄책감이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마음을 뒤늦게 깨달아버린 이 시점에 미룰 수는 없었다.





차라리 펑펑 울며 욕이라도 하면 모를까, 헤어짐을 통보 받고 울음을 꾹 참고 있는 예진을 보니 먼저 자리를 뜰 수도 없었다. 한참 뒤, 어느 정도 진정을 하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예진은 말했다.





'....나중에....'


'....'


'나중에 얘기해요....'





그날을 생각하고 있는데 동기 중 한 명이 동혁을 불렀다. 고개를 들어 파티션 너머로 쳐다보자 아직 점심 시간이 남았으니 나가서 좀 쉬고 오자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예진에게 알겠다며 답장을 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심 시간의 회사 근처 정자에는 사람이 많았다. 비어있는 벤치에 앉아 동기들이 수다를 떨고 동혁은 커피를 마시며 그걸 듣고 있는데 귀에 꽂히는 이름. 빠질 수 없는 여주와 재민의 이야기였다. 며칠 전에 플리마켓 목격담이 풀리니 나도 영화관에서 봤다- 나는 카페에서- 하나 둘씩 더 풀리기 시작했다.





저렇게 옆에서 들려오는 얘기를 동혁만 들었을 리는 없었다. 맞아맞아- 하며 동기들도 여주와 재민이의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 남자 저 남자 다 간 보고서는 제일 있을만한 놈한테 정착했나 보지."


"쯧, 여자를 잘 만나야 되는데-"





동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당연히 여주를 못마땅히 여기는 부류가 있었다. 웃기는 일이었다. 여주의 밑에서 일하면서 여주를 못마땅해한다는 게. 근데 여주의 안 좋은 이야기를 할 거면 장소를 잘못 잡은듯했다. 다들 알다시피 회사에는 여주의 추종자들이 더 많았다.





"아- 다들 그거 아세요? 전에 전무님 안 좋은 소문 났던거-"





제가 들었는데 그거 다- 고소하셨다고 하더라고요. 법무팀 통해서 해도 되는데 개인 일이라 회사 법무팀 말고 따로 변호사 구하셔서 하셨다고- 일부러 큰 소리로 얘기하자 큼큼- 헛기침을 하던 둘은 급하게 담뱃불을 끄고서 자리를 떴다.






*






화면에 있는 여주의 연락처만 빤히 바라보기를 30분째. 동혁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망설이다 전화를 걸었다. 첫 번째 신호음이 들리자 심장이 미친 듯이 떨려왔다. 두 번째 신호음에는 받으면 무슨 말을 할지 다시 한번 정리했고 세 번째 신호음에는 여주가 전화를 안 받을 거라는 예상을 해봤지만서도 불안해졌다.





- 여보세요.





불안했던 마음은 곧 여주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 안정이 됐다. 동혁은 답지 않게 손이 떨려왔다.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서





"어...여주야."





떨리는 목소리로 여주의 이름을 부르자 무슨 일이 있는 거냐며 물어왔다. 





"아니... 그..."





분명히 머릿속에 정리했던 말들이 하나도 안 떠올랐다. 동혁은 떠오르는 대로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내가 공포영화를 봤는데."





내뱉어놓고 제 스스로가 한심하고 멍청해서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기껏 뱉은 말이 공포영화라니.





"....그래서 집에 혼자 있기 조금 무서워서."


- ....너 공포영화 잘 보잖아.


"어... 어. 근데 오늘 본 건 좀 무섭네."





공포영화를 보고 무서워하는 건 동혁이 아니라 여주였다. 하...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여주가 안 들리게 작게 한숨을 쉰 동혁은 눈 앞머리를 꾹꾹 누르며 이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댄 이유를 말했다. 







그래서 그런데 나 오늘 너희 집에서 자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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