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재배열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8구역 전체일지도 모른다.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눈 앞에 펼쳐진 이 광경을 설명하기에는 그 단어가 가장 적절하다고 하연은 생각했다.

 그저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그것에 대응하기 위해 구역 전체를 바꾸다니. 검이나 들고 휘적거리는 자신이 얼마나 하찮고 쉬워 보였을지 조금은 민망하기까지 했다.

 대가는 컸다. 하연은 이곳이 더는 산으로 불릴 수 없는 모양이 돼버렸음을 알았다. 일단 서 있는 곳 아래가 풀밭이 아닌 건물 옥상이란 점이 그 사실을 증명해주는 중이었다. 산의 일부분을 완벽하게 정육면체로 잘라내고 그것에 맞는 건물을 가져다 놓은 거였다. 워낙 순식간이라서, 하연은 아직도 검을 뻗고 있었다. 검 끝은 저 위, 하늘에서 새로운 위치를 찾지 못하고 둥둥 떠 있는 산의 정육면체 조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되지 않아 어딘가로 움직이며 아래로 가라앉았다.

 마치 어린아이가 엉망으로 블록 놀이를 하는 것처럼 초록색은 아래로, 회색은 위로, 노란색은 아래로, 붉은색은 위로 움직였다. 똑같은 색으로 맞춰 놔야 할 부분들은 조각조각 나뉘고 대신 어울리지 않는 색깔들이 그 자리를 채워나갔다. 자리만 채웠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블록들이 쌓아지는 모습도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어떤 탑은 곧장 무너질 듯이 너무 아슬아슬하게 높고, 어느 공간은 허전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으며, 어디의 블록들은 다른 블록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여기서 가장 이상한 건 멀쩡한 모습의 자신뿐이었다. 산과 지면, 건물, 길, 별의별 것들이 조각조각 나고 있는데 어째서 자신은 조각나지 않았나 고민하다가 뒤에 누군가가 함께 있음을 알아챈다.

 "나를 죽이려던 거 아니었습니까?"

 그게 누군지 충분히 예상되었기에, 돌아보지도 않고 질문을 던졌다.

 "맞으면서, 틀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설명까지 해드릴 순 없네요. 보시다시피 완전히 불균형해진 이 구역을 해결하고 그 원인을 당장 잡아야만 하거든요."

 예측이 맞다는 듯 젠이 변함없는 친절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제야 하연은 몸을 돌렸다. 마침 회복이 완전히 되었기도 했고, 어째서 우린 조각나지 않았냐고 묻고 싶었기도 했다. 가까이서 마주한 젠의 얼굴은 생각보단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그게 안전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둘은 아직도 아슬아슬한 절벽 위에 서서 서로를 주시 중인 것과 다름없었다. 당장은 서로를 겨누지 않고 있을 뿐 언제든지 상대를 저번처럼 절벽 너머로 밀어낼 수 있었다.

 게다가 그렇게 되면 먼저 떨어지는 건 역시나 하연일 거다.

 "여긴 닫힌 문 안입니다. 이곳에선 구역 이동 능력의 영향을 받지 않아요. 그렇다고 오래 있을 순 없습니다."

 서로 눈싸움만 하던 차에, 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젠은 하연의 반응을 잠시 기다렸다가 뭔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왜 대령님을 구한 건지 의문스러워 보이시는군요. 솔직히 상황이 좋지는 않습니다. 영이 나름 노력한 것 같지만 대령님은 아직도 8구역을 벗어나지 못하셨고, 가시는 사라진 것 같지만 아직도 불균형에 가깝군요."

 적도 아군도 없이. 그저 균형을 위해서.

 영이 했던 그 말이 떠올랐다. 덕분에 하연은 목구멍에서 당장이라도 쏟아내고 싶은 수많은 질문 중에서 이걸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균형과 불균형임을 결정합니까?"

 "제가 합니다."

 당연하다는 듯 젠이 대답했다. 하연을 주시하는 그 금색 눈동자에는 앞으로도 평생 이해하지 못할 진중함까지 담겨있다. 그 가치관을 결코 바꿀 수 없을 것만 같은 완벽한 확신도 함께.

 "그럼 결정되는 모든 건 그저 당신의 기준, 상대적인 거군."

 나름 비꼬기 위해 최대한 여유가 담긴 표정을 지어보았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미 정수리부터 뒷덜미까지 땀이 나고 있었지만.

 그에 비해 젠은 정말로 진심과 여유가 담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하지만 대령님은 제 상대적인 요소조차도 이겨내지 못하고 계시죠. 제가 불균형이라 정의하면 그저 그것에 쫓기실 뿐입니다. 그래도 마지막 배려를 부탁드리죠. 저는 더 불균형에 가까운 이 임무를 마치고, 당신에게 갈 것입니다. 그 전에 그 나무 상자를 가지고 돌아가세요. 당신의 가치가 좀 더 균형을 되찾을 수 있도록."

 "거절한다면?"

 하연은 태연하게 말하면서도 두려움을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떨려오는 걸 느낀다. 거절할 듯이 나오긴 했지만, 결코 젠의 말을 거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알고 있다. 이 임무를 거절한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단 두 가지일 테고, 그건 이제 젠이 할 말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면 대령님은 두 가지 선택을 하실 수 있습니다. 조만간 뒤를 쫓아 온 저에게 끝을 맞이하거나, 당신보다 더 불균형한 것들 뒤에 숨어 죽음의 순서가 나중으로 다가오길 비는 것. 어떤 것을 선택하시던 십자가는 앞으로도 계속 대령님을 쫓아다닐 겁니다. 그건 바꾸실 수 없어요."

 하연은 그저 웃었다. 뭘 해도 똑같은 결말인데 선택권을 주는 데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차피 자신은 죽게 생겼는데.

 그런 하연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젠은 자신의 손목에 있던 두 개의 검은 팔찌 중 하나를 빼내 상자를 들고 있는 하연에게 채워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랍니다. 이걸 잘 이용해보세요."

 팔찌가 채워지자마자, 몸이 균형을 잃고 뒤로 젖혀지는 걸 느꼈다. 강제적인 힘이 자신을 거세게 밀쳐내고 있었다.

 이윽고 좌우로 익숙한 모양의 문틀과 활짝 열려있는 문이 보였다. 젠의 능력으로 만들어진 '열린 문'이다. 하연은 뭔갈 붙잡을 새도 없이 그 문밖으로 쫓겨나 흙바닥을 굴렀다. 자신의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자물쇠까지 철컥 잠기는 걸 듣고 나서야 하연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고,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젠과 문 모두 사라지고 난 뒤였다.


 저 멀리에서부터 네모난 건물 조각들이 차례대로 떨어지고,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하늘을 가득 메웠다. 하연의 바로 옆으로도 십자가가 뚝 떨어졌다. 정직하게 일직선으로 떨어졌기에 살짝 몸을 비틀어 쉽게 피할 수 있었다. 이게 자신에게 떨어진 건지 그 요원을 잡으려고 능력을 쓴 건지는 알지 못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올렸다. 이젠 아예 공중에 떠 있는 젠이 그 거대한 십자가를 든 채로 한때는 산이었었던 곳을 향해 던지고 있었다. 확실히 인간의 범주는 아니다.

 그런 경이로운 젠의 모습 너머로 새로운 십자가가 또다시 하연에게 떨어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더욱 빠른 속도라 얼른 몸을 굴려 멀리 피해냈다. 그 덕에 손목에서 흔들거리고 있던 팔찌가 상자와 부딪히며 작은 소음을 냈다.

 "아."

 그 순간, 하연은 젠이 자신에게 유달리 강조했었던 그 말을 기억해냈다.


 나무 상자를 가지고 돌아가세요.


 도대체 어디로?

 자신에게 되물으며 조심스럽게 상자의 거친 표면을 만지작거렸다.

 하연은 자신이 많은 일을 마주한 만큼 더는 갈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테니케 님께 돌아가 함께 원정을 떠나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아마 자신은 정해진 끝을 맞이하지 못하게 될 거다. 하지만 이 상자 안에 들어있는 선과 다른 뿔족들은 그저 불행하게 목숨을 잃었을 뿐, 아무런 죄가 없지 않던가. 이들만큼은 돌아가야 할 곳으로 가야 했다. 원정을 떠나야만 했다. 그곳이 어딘지는 하찮은 이 뿔족은 모르지만, 아테니케 님은 알고 계실 테니까.

 그러니,

 "상자를 가지고..."

 올리브 나무로.

 당신에게로.

 돌아가야 할 건 하연 자신이 아니라 이 나무 상자인 거다.

 "그래. 이 임무는 완수할게."

 여기서도 하늘까지 뻗을 정도로 거대하고 울창한 올리브 나무를 본다. 폐쇄구역 안이라서 거무죽죽한 색에 겉은 마르고 속은 썩어가는 모습이지만 아직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 나무는,

 스트라테이아의 모든 것. 우리의 신.

 하연은 주변의 소란과 소음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그 나무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건 이제 자신의 마지막 원정이 될 터였다.






 "두르 8구역."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확신하기 위해 읊조린다. 

 "8구역... 8구역..."

 여기가 정확히 어디일까. 표지판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다가 그런 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한때 산이었던 곳이 건물 조각 모음집이 되어있고, 뿔족들이 살던 주택가는 정육면체의 덩어리가 된 흙과 나무로 덮여있는 와중에 표지판이 무슨 소용일까. 혹여나 찾았다 해도 표지판에 쓰여 있는 단어와 지금 서 있는 장소가 똑같을 리는 없었다. 

 그래도 아까의 전투 구역에서 멀어질수록 능력이 반영되는 정도도 적어지는지, 십자가가 떨어지는 빈도는 상당히 줄어들었고 정상적으로 서 있는 건물들도 많아지고 있었다. 슬슬 자신이 알고 있는 숲의 끄트머리도 보인다. 그들에게서 어느 정도 멀어졌다는 판단이 들자 하연은 가던 길을 멈추고 가진 짐들을 확인했다.

 단검이나 라이터, 비상용 식량 같은 당장 생존에 필요할 것들을 제외하고는 다 버리거나 먹어버린 뒤, 군복 윗옷을 벗어 상자를 감싸고 옷소매를 묶어 가방처럼 멘다. 상자가 단단하게 잘 고정된 것을 몇 번이나 확인한 후에야 마지막으로 실종 전단지를 다시 펼쳤다.

 마하와 두르 구역 사이 경계. 여기에는 그렇게 쓰여 있다.

 '두르 구역 근처라서....'

 소년은 그렇게 말했었다. 그 소년이 엉망으로 삐뚤빼뚤하게 그린 지도라도 올리브 나무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어딘지 파악할 수 있는 위치다.

 두르 7과 8구역 사이, 마하 1구역으로 갈 수 있는 작은 샛길. 울창한 숲속이긴 해도 짧은 직선 길이라 피난하기에 지름길로 생각되어 뿔족들이 상당수 몰렸지만, 하필이면 그곳엔 이미 괴물들이 가득했었지.

 하연은 전쟁 초반에 그곳으로 지원 나갔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부근은 벌목을 업으로 삼는 몇몇 가족들만 살았기에 상부에서는 시간 낭비라며 가지 말라고 했지만, 선이 바득바득 우겨서 갔던 곳이었다. 하지만 하연의 부대가 도착했을 땐 이미 늦어버린 후라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었다. 그러니 지금 간다고 기적을 마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하연의 머릿속에서 다른 것들도 떠오르고 있었다. 군인들이 씁쓸하게 발걸음을 돌리던 와중에 선은 일일이 뿔족들의 유해를 주웠던 것. 하필이면 곧장 다른 구역으로 가야 하는 바람에 선이 그 유해들을 어떤 나무 아래에 묻는 광경도. 그리고는 반드시 다시 돌아오겠다며 그 나무에 표식을 남기던 장면까지.

 달리고 있던 하연의 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주변의 모든 구성물이 나무라서 하나하나씩 손으로 만지며 확인해야만 했다. 몇 그루의 나무를 지나쳤는지 세던 것도 50개가 넘고 나서는 그만둔 지 오래였다. 숲길 초입의 나무였던 것 같은데 그것도 아니었던 건가.

 "여기 있다."

 드디어 손가락 끝에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얇은 선이 닿았다. 나무 기둥에 아래를 향하는 화살표가 새겨져 있다.

 선, 너무 티 나잖아.

 그런 생각을 하며 하연은 곧장 무릎을 꿇고 뿌리 부근을 파내기 시작했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입고 있던 검은색 반팔티가 축축하게 젖을 정도로 한참을 깊게 파고 나서야 하연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흙 범벅이 된 손에는 영롱한 색의 유해도 하나 쥐어져 있다.

 그리고 고개를 내리면,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선의 약속을 기다리며 조용히 잠들어 있는 그들의 흔적들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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