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인지 관심인지 알 수 없는 빛으로 번뜩이는 그의 녹색 눈동자가 나에게 고정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 눈동자가 신경 쓰이는 것보다 그의 머리 위 숫자가 더 신경 쓰였다. 뉴욕 침공 사태를 대략적으로 알았기 때문에 그가 토르의 입양된 동생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로키의 친부모는 아스가르드인이 아닌걸까? 아니면 저 숫자가 그의 운명인 것일까?  


이 건물에 들어오면서 안대를 벗어 주머니에 넣었기 때문에 계속 보이기도 했지만 형과의 큰 차이가 시선을 잡아 끌었다. 그는 내가 아무 말 없이 계속 그의 머리 위 어느 곳에 시선을 두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딱히 보채지는 않았다. 이 시선이 인간에게 어떻게 느껴지는지 나는 잘 몰랐지만, 적어도 내가 이런 눈빛을 보낼 때면 그걸 보고 있는 인간들이 본능적으로 적대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렇지 않게 흘려넘기다니. 내 안에서 그의 평가가 조금은 올라갔다.


로키는 내가 누군지 정확히 알고 있는 듯했다. 나를 보고 처음으로 내뱉은 말도 그러했지만 그의 태도가 조금 더 확신을 주게 했다. 


"내가 누군지 알아?"

"어머니로부터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온 차원의 생과 사를 관망하는 신을요."


온차원의 생과 사를 관망하는 신. 라이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물론 그 신의 지위는 불변의 자리가 아니었다. 선대의 신이 라이에게 넘겨준 직책일 뿐이었다. 


선대는 유독 나와 라이를 신경썼다. 그는 라이나 나에게 있어서 부모 비슷한 존재였다. 기억이 사라진 우리가 처음 본 인물이었으니까. 수많은 시간이 흐르고 우리가 많은 영혼을 만났을 때 그는 나와 라이에게 더 높은 직급을 제안했다. 나는 귀찮은 일은 질색이었기에 현재에 머물렀지만, 라이는 더 높이 올라갔다.


그리고 라이가 선대의 지위를 제외한 가장 높은 직급에 올랐을 때 선대는 이제는 쉬고 싶다는 말과 함께 라이에게 직책을 넘겨준다는 문서를 남기고 돌연 사라졌다. 그래도 무대포는 아니라 자신이 사라지고 난 후에 생길지 모르는 문제들을 깔끔하게 정리해 놓고 간 게 그 사람 다웠다


생각해보면 선대는 특이한 존재였다. 그 누구도 사신의 역할을 맡은 이에게 그리 살갑게 굴지 않았다. 아니 그 영역에서는 누구도 자신의 부하를 신경쓰거나 자식 대하듯이 돌봐주지 않았다. 그 때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지만 그가 사라지고 난 뒤 그게 특별한 일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튼 그건 됐다. 어쨌든 나는 궁금했던 인물을 만났다는 목적도 이뤘고, 로키가 여전히 수많은 사람을 죽인 또라이라는 건 여전했지만 오늘 내일하는 곧 죽을 사람이 아닌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 내 존재를 명확하게 인식한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한 가지 찬스를 주기로 했다.


"만나서 즐거웠어. 나를 알아본 사람은 정말 오랜만이었거든. 그래서 그런데 충고 한마디 하자면. 당신, 6년 남았어."


그가 의아해하든 당황스러워하든 내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그의 몫이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마치고 망설임 없이 뒤를 돌아 방문을 나섰다. 그런데 나는 재밌었던 만남 때문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잊고 있던 사실이 귀를 떠나가는 알람과 함께 돌아왔다. 아.... 나 여기 몰래 들어온 거였지.





***





"으아아악!!"

"으음.... 뭐..야?"


고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단번에 부순 남자의 비명소리가 어벤져스 타워 안을 뒤흔들었다. 아까까지만해도 로키와 같은 공간에 있었는데, 지금 눈을 뜬 곳은 침대 위였다. 뭐야 꿈이었나.....꿈이라고? 꿈이라니? 


내가 놀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사신도 잠을 자기는 하지만 그건 자는 것보다 일 하는 도중 상처 입은 영혼을 회복하는 것에 가까웠다. 물론 자지 않아도 상관은 없지만 잠드는 쪽이 더 빨리 나았기 때문에 나도 가끔 잠에 들기도 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꿈을 꾸지는 않는다. 꿈은 인간의 전유물이었으니까.


그것도 꿈이라기보다는 회상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이렇게 꿈을 꾼 적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없었다. 몸의 반이 인간이라고 정신마저 인간이 된건가? 사신이 인간의 몸으로 벌을 받았다는 사례는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원인을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직접적으로 해를 입은 것은 아니었기에 나중에 라이를 만나면 물어보기로 결정했다. 


나는 생각을 뒤로 하고 내 눈 앞의 커튼으로 가려진 창을 보았다. 아까까지는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이제서야 커튼 사이로 은은하게 햇살이 들어오고 있는 것을 알았다. 벌써 날이 밝았다니. 꿈을 꿨다는 사실이 찝찝했고 몸 여기저기는 찌뿌둥한 것 같아서 자리에서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하려고 했는데.... 어라? 몸이 안움직인다?


나는 버둥거리다가 여기가 내 방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이불 안에서 내 허리를 감고 있는 팔을 찾았다. 팔의 주인은 아직도 자고 있는 듯 했다. 팔을 따라 시선을 올리니 편안한 표정의 토니 스타크가 보였다. 방금 전 비명소리에도 그는 전혀 일어나지 않고 나를 풀어주지도 않은 채 쿨쿨 자고 있었다. 그렇다면 비명의 주인은 누구지?


그러다 나는 침대 맞은편, 방문을 열고 놀라서 얼어 있는 배너 박사님을 발견했다. 그는 봐서는 안 될 걸 본 사람처럼 잔뜩 굳어 있었다. 그 모습이 조금은 순진해 보이고 뜻 밖에도 귀여워 보여서 나는 작게 키득거렸다. 내 웃음소리에 배너 박사는 정신이 돌아왔는지 입을 벙긋거리며 사태 파악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 좋은 아침이에요. 배너 박사님"

"이..이게?"

"상상하는 그런 일은 없었으니까 걱정 말아요. 토니. 일어나요"


나는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박사님을 멈춰 세우고 현실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를 걱정인형처럼 여기는 토니를 흔들며 깨웠다. 요새 하도 잠을 자지 못하는 것 같길래, 먹여주고 재워주는 은혜를 갚으려고 능력을 사용해서 푹 자게 해줬는데 아주 인형마냥 나를 끌어안는 바람에 밤에 딱히 할 일도 없어서 그냥 나도 자버렸다는게 지금 상황이 되었다.


"으- 뭐야?"

"아침이고요, 일어나야 되고요. 놀라서 당황한 배너 박사님한테 해명도 해야해요."

"나는 어제 늦게 잤고, 배너는 이 방을 나가서 놀랐으면 좋겠고, 자기는 내 옆에서 더 잤으면 좋겠어."


토니는 일어나기 싫다는 듯 날 안은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 꽉 감았다. 나를 자기(honey)라고 부른 것은 물론 그의 장난이었지만 이 사실을 알리 없는 배너 박사는 본인이 여기서 왜 이러고 있나 라는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더니 방을 나갔다.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듯해서 나는 눈 감은 토니 스타크의 볼을 꼬집고 옆으로 늘렸다.


"으그 므흐는 즛으ㅇ"

"장난하지 말고 일어나라고요."


기어코 아프게 응징을 받고 나서야 꾸물꾸물 자리에서 일어나는 토니였다. 애초에 토니가 상의를 벗고 있지 않았더라면 배너 박사님이 오해를 할 일이 없었을 테지만, 나도 그렇고 토니도 그렇고 딱히 오해를 풀 만한 행동은 하지 않을 터였다. 귀찮거든. 앞으로도 밥 값 하려면 종종 저 사람의 수면제가 되어야 하는 판이었는데 그 때마다 해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오늘 저녁은 어제 토니가 말한대로 작게 파티가 있을 예정이었다. 토니와 배너는 파티 준비하랴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느랴 바빴지만 나는 아니었다. 어제 밤, 라이가 지정했던 구역으로 가서 미뤄놨던 그 동안의 업무를 다 끝냈기에 나는 매우 한가했다. 일은 원래 기한까지 미루다가 마감기일이 닥쳤을 때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 앞으로도 계속 이럴거고 남는 시간엔 책을 읽으면서 쉴 예정이었다.


다행히 어벤져스 타워에도 수많은 장서가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오늘도 전에 골라 놓았던 책을 마저 읽느라 시간이 가는 줄 몰랐고 토니가 문을 두드리지 않았더라면 아마 계속 몰랐을 거다.


토니는 내 방 문 앞에서 비싸 보이는 원피스 형태의 드레스와 구두를 들고 서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 우리끼리 하는 작은 파티인데 뭘 이렇게까지 하냐고 물었는데, 이러는게 훨씬 즐겁다며 나에게 물건을 떠 넘기고 늦지 않게 오라는 말과 함께 가버렸다.


그가 가지고 온 옷은 나한테 딱 맞았는데 도대체 나도 모르는 사이즈를 어떻게 알았는지가 궁금했지만 준비하는 사이 어느 덧 약속한 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에 나는 거실로 나갔다. 내가 제일 마지막이었는지 불이 꺼지고 은은한 조명으로 채워진 그 곳에는 벌써 다른 사람들이 즐겁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리브."


토니와 배너 박사가 부르는 소리에 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동안 쉴드에서 들어온 자잘한 임무 덕분에 만나지 못했던 나타샤, 바튼, 스티브가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모두."

"잘 지냈던 것 같아서 다행이야."


그들은 토니와 배너에게 꾸준히 보고를 받았던건지 그들 안의 경계단계를 한 층 정도 낮춘 것으로 보였다. 어차피 내 목적을 위해서 그들과는 계속 만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좋은게 좋다고 그런 그들의 모습이 기꺼웠다. 


"토르는요?"

"한동안 제인이 있는 곳에 가본다고 했었지. 지금쯤 도착할 때가 됐는데?"

"천둥치는 거 보니까 근천가보네."



마음의 바다(心海)에서 헤엄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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