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라는 저울 위에서 불행과 행복은 늘 같은 무게로 존재한다.’

나라를 빼앗긴 어린 시절의 어느 날, 병상에 누워 창 밖만 보던 할아버지는 내게 그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명예로운 죽음 대신 비겁한 삶의 연장을 선택했고, 나는 선진 문물을 누구보다 빠르게 배워야한다는 이유로 조국의 모두가 말하는 ‘적국’으로 보내 졌다.

비겁한 삶의 연장은 쉽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나는 이 나라의 말을 배워야 했고, 이름을 숨기며 다른 사람이 되어야 했다. 새로운 패션이라고 하더라도 기모노에 하카타를 걸치는 여성의 수가 아직은 많았지만, 신여성이라는 이름 하에 서구식 드레스를 선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뒤에 바짝 붙어 쫓아오는 발소리를 무시하려 노력하면서 걸음을 서둘렀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발소리는 멀어지지 않았고, 심지어 불쾌한 웃음소리까지 들리기 시작했다.

이제 슬슬 내 삶에 행복의 무게가 더해질 때도 된 것 같은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왜 하필 오늘 학교에서 남아 공부를 한다고 했을까. 왜 하필 오늘 익숙치 않은 부츠를 신는다고 했을까. 아니, 게타나 부츠나 어느 쪽이건 어색한 건 마찬가지였을까.

살고 있는 쉐어 하우스로 갈 수는 없었다. 괜히 무고한 사람들을 말려들게 할 수는 없었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나쁜 건 국가이며 정치이지, 사람이 아니었다.


이런 무른 마음으로 대체 무얼 한다고.

마음 한 켠 스스로를 비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라, 벌써 포기한거야?”


재미있었는데,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막다른 골목 길 벽을 마주하며 눈을 감았다. 주저앉아 울고 싶었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딱히 신을 믿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 목을 쥐어 잡는 손길이 인간의 것이 아니라는 건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래, 어차피 죽을거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지키며 죽자.


“잘 먹겠습니다-”


기분 나쁜 웃음이 울려퍼짐과 동시에 나는 품 안의 은장도를 꺼내 스스로의 심장을 향해 강하게 찔렀다.


아니, 찌르려고 했다.


“소녀! 삶을 스스로 포기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우렁찬 목소리. 순식간에 사라진 위화감에 눈을 뜨자 태양처럼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쳤다.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있던가.


이렇게 강한 열기와 힘을 본 적이 있던가.


남자의 오른 손이 은장도를 쥐고 있는 내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제야 나는 내 손이 형편없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심장을 찌르지 못한 단도가 무엇을 찔렀는지 깨닫자 마자 화들짝 손에 힘을 풀어 은장도에서 손을 놓았다.


“피!”


남자의 왼손은 내 은장도에 뚫려있었고, 칼끝은 내 몸 끝에도 닿지 않았다. 힘으로 눌러 막았는지 손잡이가 닿은 손등이 눌려있었다. 뚝뚝 떨어지는 피에 놀라 소리치자, 남자가 호탕하게 웃었다.


“괜찮다. 소녀의 생명을 구하고 이 정도면 싼값이지.”

“그래도…!”


안절부절 못하며 남자의 왼손에 닿지도 못하고 떨어지지도 못하는 상태로 손을 움찔거리다 문득 시야에 걸리는 무언가에 시선을 옆으로 내렸다.

아까 나를 노리던 것은 이제 붉은 색으로 타올라 바스라지고 있었다.


“해가 지면 이 근방은 혈귀가 나오니 밖에 돌아다니지 않는 것이 좋다!”

“혈귀?”


남자는 내 물음에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낯선 이에게 사는 곳을 알려주다니, 사실 모든 게 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다.

분명 집에 가는 길은 제법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남자와 함께하는 귀가길은 이상하리만큼 가깝게 느껴졌다.


“그럼 이만!”

“나리!”

“음?”


인생이라는 저울 위에서 불행과 행복은 늘 같은 무게로 존재한다. 이 남자는 내게 행복일까, 아님 또 다른 불행이 될까?

그건 알 수 없었지만, 이대로 그를 놓친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은 분명했다.


“성함…나리의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내 말에 그는 놀란 듯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아까와 같이 호탕하게 웃었다.


“몸에 찔린 칼을 뽑으면 더 출혈이 심해지는 것을 알고 있나?”

“네?...아니요. 모릅니다.”


힐끔 시선을 내렸다. 남자의 왼손은 여전히 내 은장도에 뚫려 있었지만, 더는 피가 흐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칼은 뽑을 수가 없군!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으니 이걸 빌리겠다.”

“아.”


분명하게 그는 이 만남이 끝이 아닌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네, 꼭 돌려주러 오세요.”


그리고 그 남자, 렌고쿠 쿄쥬로와 재회한 것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아침이었다.


현생이 방해하지 않을 때, 쓰고싶은 걸 씁니다.

생선(FISH)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