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작하기에 앞서 알려드립니다.


야근을 피하는 방법은 아주 예전에 썼던 이야기로, 부끄럽지만 당시 로맨스적인 부분 이외의 것들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고, 말 그대로 막 써서 순간의 유희를 드리려 썼던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수정되어야 할 부분이 굉장히 많아 언젠가 여유가 되면 싹 뜯어 고쳐서 들려드리겠다고 생각을 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작중의 인물이 다른 인물에게 아무리 호감이 있다고 한들,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도저히 통용되기 힘든 강압적이고 안하무인격의 묘사가 많습니다.

안타깝게도 글을 쓰던 당시 제가 이런 부분에 무지하여 상당 부분 인물의 행동이 미화되거나 그저 재미를 주는 장치로 서술되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송구할 따름입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부분에 불편하신 분들의 메일과 댓글, 쪽지 등 각종 피드백을 받았으며, 늦었지만 위의 부분에 대해 진심으로 고개숙여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저 또한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정말 단 한 분의 독자님들에게도 불편함을 드리게 해선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예전부터 야근에 대한 정식연재 제안은 모두 반려하고 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야근은 연재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연재되는 동안 감사하게도 독자님들께서 일상에 작게나마 유희거리로 삼으신 것 같아,

염치불고하고 미완인 작품을 올려봅니다. 


피드백 주신 모든 독자분들과 좋은 제안 주신 출판사 관계자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늘 고맙습니다.









 








야근이 있는 카페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여기에 오기 전 까진 단 한 번도.

 

 

 

 

 

 

 

 

 

 

 

 

 

 

 

 

 

"저기…… 그쪽 번호요."

 

 

하는 말을 듣자마자 눈이 번쩍 뜨인다. 들어올 때부터 계속 눈이 마주쳤던 손님이었다. 마치 가게를 잘못 찾아 들어온 사람처럼 당황스러워보여서 계속 신경이 쓰이던 남자였다.

 

 

"네? 번호요?"

 

"그, 그게…… 제가 그게…… 기, 기억을 하시는지는 그, 모르, 모르겠는데……."

 

 

카운터 너머로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 남자는 꼭 엄청나게 중요한 발표수업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보기보다 높은 톤의 목소리를 가진 남자였다. 그래서인지 목소리에 묻어난 긴장도 더 잘 들렸다.

 

 

"제가 한 달 전부터 그쪽이 너무 귀여우셔서 여, 여기만 왔거든요."

 

"네?"

 

 

송화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애꿎은 제 머리카락만 귀 뒤로 두어 번 쓸어 넘겼다. 하필이면 남자가 자신에게 대뜸 번호를 묻는 지금은, 이 카페, ‘그녀’의 브레이크타임이나 다름없었다. 비교적 한산하고 조용한 분위기.

 

 

"……아."

 

"남자친구 있으십니까?"

 

 

움찔, 송화가 어깨를 굳히며 눈앞의 남자를 향해 눈을 동그랗게 뜬다.

 

 

"뭐, 사, 상관없습니다! 그냥 번호만 알려 주시면 되거든요!"

 

 

카운터 안에서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이던 송화는 더듬거리며 재차 물었다. 나, 남자친구? 버, 번호?

 

 

민망하고 당황스러운 분위기와는 반대로 카페 안은 봄과 사랑을 노래하는 잔잔한 어쿠스틱 선율로 가득 찬다.

 

 

당황스럽게 허둥거리던 송화의 눈에 그때야 남자의 얼굴이 들어온다. 이목구비가 굵고 선명한 사람이었다. 진한 눈썹과 큰 눈, 코, 입. 조금 과장을 보탠다면 주말드라마에 나오는 남자연예인과 닮았다고 해도 될 것 같았다. 외모만큼이나 준수한 셔츠의 핏도 뒤늦게 송화의 시야를 깨웠다. 지금 이 계절, 이 날씨, 이 음악과 꼭 맞는 상큼한 파스텔블루톤의 드레스셔츠.

 

 

아, 누군지 알 것 같아.

 

 

눈에 익은 남자였다. 남자의 말대로 그는 자주 오는 손님이었다. 늘 같은 시간대에 같은 자리에 앉아서 두 번씩 주문을 하곤 했다. 그것도 좀처럼 인기가 없어 메뉴판에서 곧 사라질 위기의 음료들을 시키던 사람이었다. 버터크림 라떼, 코코넛 커피, 슈크림 핫도그, 아로니아 베이비슈 같은 것들.

 

 

그러고 보니 쌀쌀한 초봄부터 반코트의 깃을 직각으로 세우고 나타났던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지금, 이 완연하고 따사로운 봄 햇살과 꼭 어울리는 화사한 셔츠를 입고 나타난 것이다.

 

 

그랬다. 바야흐로 봄.

 

 

봄이다.

 

 

새로운 만남을 꿈꾸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는 계절.

 

 

"정말이지…… 첫눈에 반했습니다."

 

"네?"

 

"오늘은 다른 걸 주문하지 않고 그쪽…… 그쪽의 전화번호만을 주문하고 싶……."

 

 

- 또각!

 

 

그때였다.

 

 

그러나 갑자기 이 설레는 대화사이를 무슨 실타래 끊어버리듯 등장하는 날카로운 구두굽 소리가 있었다.

 

 

또각! 하고 카페바닥을 내려찍는 그 소리의 주인은, 아주 모세라도 된 듯 알바생과 남자손님의 묘한 기류 사이로 불쑥 등장했다. 검은 광택이 나는 펌프스의 굽만큼이나 높고, 잘빠진 다리의 소유자의 출현에 카운터에 있던 남자와 알바생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 향했다.

 

 

길고 화려하게 빠진 눈매와, 대부분의 사람들을 살짝 내려다 볼 수 있을 것 같은 큰 키. 어딘가 ‘육감적’이라는 느낌이 드는 자태. 늘씬하고 고고한 그 실루엣이 보이자마자 카운터 맞은편에서 알바생의 번호를 물었던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럴 수밖에.

 

 

대학가의 은근한 입소문의 주인공이자 백합대학의 명물로 통하는 대학가 카페 '그녀'의 사장이 등장하신 것이었다.

 

 

분명히 카운터엔 작고 아담한 체구와 어울리는 밝은 갈색의 단발머리 여자 알바생 밖에 없음을 확인했던 남자는 진심으로 당황해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타겟이었던 알바생 여자애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클 것 같은 또 다른 여자의 등장은, 마치 경쟁상대가 없는 먹잇감에 겁 없이 뛰어들었던 하이에나 앞에 불쑥 나타난 맹수 같은 느낌이었다. 살기(殺氣)조차 고혹적으로 뿜어대며 소리 없이 상대의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우아하게 발을 내딛는 암표범. 과연 그 눈빛부터가 이름값처럼 강렬했다.

 

 

남자는 저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섰다. 자신을 향해 차갑게 눈웃음을 짓는 여자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여자는 남자처럼 아주 핏이 끝내주는 옷을 입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남자와 똑같은 색의 블라우스였다. 몸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선의 완급이 이런 것이라는 듯, 옷감에도 감춰지지 않는 곡선들이 감춰지거나 드러났다. 가슴과 허리, 그리고 골반으로 이어지는 실크블라우스의 밀착감이, 분명 목 끝까지 노출하나 없는 의상인데도 묘하게 쳐다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야릇한 느낌이 들게끔 하는 것이었다. 그 압도적인 분위기는 마치 배우나 모델을 실제로 본다면 느낄 수 있는 종류일 것이라고, 여자를 본 사람들은 누구나 생각했다.

 

 

"어…… 누, 누구시죠?"

 

 

사실 남자는 여자가 누군지 알 것 같았지만 그리 물었다. 평화로운 봄날, 가슴을 간질이는 자신의 고백의 현장에 찬물이 아니라 아예 얼음물을 끼얹으며 등장한 비쥬얼 쇼크로 인해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아까 알바생의 번호를 물으며 보여주었던 표정의 수십 배는 더 긴장을 담고 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수 없는 노골적인 분위기도 그랬다. 알바생 옆에 찰싹 들러붙어 있는 여자는, 노골적으로 자신에게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아름답고도 강렬한 눈을 한 번도 깜빡이지 않고 맞은편의 남자를 향해 '노려보다시피'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여자는,

 

 

웃고 있었다.

 

 

오로지 입만.

 

 

 

남자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자마자 카페 안의 분위기에 긴장이 서렸다.

 

 

"저는-"

 

 

여자가 과장스럽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긴다. 온 몸으로 불쾌감을 표현하는 제스처였다.

 

 

"저는 강 사장, 이라고 많이 불러주시던데."

 

 

그랬다. 이 여자는 처음부터 뒤에서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있던 ‘강시은’이었다. 이 카페의 사장이자, 대학로에서 가장 유명한 여자 중 한 명이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한 번쯤 시선을 줄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외모의 소유자일 뿐만 아니라,

 

 

"여기, 지금 손님이 ‘전화번호’따위나 주문하고 있는 카페를 만든 사람이죠."

 

 

대학로 앞에 만들어진 카페거리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개인카페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손님, 우리 알바 전화번호를 주문하시는 것 같던데 맞나요?"

 

 

강시은은 본격적으로 ‘사장’의 목소리를 냈다. 나는 존나 커피와 잘 어울리는 여자, 라고 말하는 것만 같은 차분하고 우아한 음성이었다. 누구나 그 목소리를 들으면 괜히 얼굴을 한 번 더 쳐다보는 바로 그 목소리였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와 함께 그윽하게 눈을 마주치며 말이 끝나면 싱긋, 그 얄쌍한 입매를 살짝 끌어올리는 시은의 습관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 부러 카페를 찾아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네? 아, 그, 그게……."

 

 

지금도 그랬다. 다만 조금 차이가 있다면 방금 시은의 목소리에선 우아함과 나긋나긋함에 더해 날이 바짝 선 날카로운 예의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건 마치, 하잘 것 없는 잡식동물의 앞에 선 암표범 같았다. 살며시 몸을 내리깔며 들릴 듯 말 듯 그르릉, 목을 끓는 것 같은 느낌.

 

 

알바생의 번호를 따려던 남자는 순간적으로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

 

 

"맞나요?"

 

 

우리 알바생 전화번호를 주문하신 거? 시은이 재차 묻는다.

 

 

남자가 버벅거리며 자신만큼이나 당황하고 있는 토끼 같은 알바생과 그 옆의 암표범 같은 사장을 번갈아 보며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 그렇습니다만."

"아? 그렇습니다만?"

 

 

남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시은은 마치 연인에게 하듯 제 옆의 여자애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어색함이 하나도 없는 행동이었다. 이내 시은은 눈썹을 으쓱하며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마치 자신을 향해 던져진 공을 야무지게 품에 끌어안은 아이처럼 보였다.

 

 

그러나 알바생의 표정은 남자 못지않게 당혹감과 놀라움이 가득했다.

 

 

"미안해서 어쩌죠, 손님?"

 

"예?"

 

"우리 카페는 여자는 안 파는데."

 

 

아니, 전화번호는 안 파는데. 특히 얘 전화번호는. 무슨 일이 있어도.

 

 

"……?!"

 

 

이쯤 되자 등줄기로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하는 남자였다.

 

 

"지금 손님 앞에 적힌 메뉴이외에 내 카페에서 따로 주문할 수 있는 것 없어요."

 

 

알아듣겠어요?

 

 

빙긋- 눈은 조금도 웃지 않은 채, 입매만 살짝 올리는 시은의 스칼렛빛 립스틱이 꼭 경고신호처럼 강렬하게 남자의 눈을 깨운다. 이마를 드러낸 길고 차분한 헤어스타일, 선연하게 대칭을 이루는 완벽한 눈매, 말하는 내내 한치의 동요도 없었던 도도한 태도. 그리고,

 

 

싸늘한 미소.

 

 

결국 번호를 따려던 남자는 들었던 핸드폰을 서서히 내렸다.

 

 

달칵, 카페 천장 구석구석에 달린 스피커에서 음악이 바뀌는 소리가 들렸다. 상황이 무색하게 노래는 또 다시 발랄한 노래였다.

 

 

알바생은 괜스레 민망해지기 시작했다.

 

 

"자, 그래서 뭘 좀 만들어 드릴까, 손님?"

 

 

아…….

 

 

미치겠다…… 어쩌지…….

 

 

친절함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말투에 알바생은 가슴이 철렁했다. 제 옆의 '사장'이란 여자의 행동 하나, 하나에 제 피가 다 말리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자신을 끌어당긴 사장은, 지금 아예 제 머리통을 그 커다란 가슴에 포옥 파묻어버릴 정도로 꽉 껴안고 무슨 강아지 쓰다듬듯 제 머리카락을 포슬포슬 헤집고 있는 중이었다.

 

 

송화는 직감했다. 제 속에 어떤 센서에서 경고음이 울리고 있었다.

 

 

이 미친 사장님의 또라이 중 또라이, 아주 그냥 상또라이적 행동이 시작될 것만 같다.

 

 

송화는 시은의 품안에 강제로 잡혀져있는 제 머리통을 낑낑거리며 빼고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곧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제대로 벌어질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기분. 여기 제 옆의 강시은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자신이 이런 쪽으로는 제법 감이 좋은 편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송화는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아마 이 직감은 빗나가지 않을 것 같다. 아까부터 계속 시은에게 보냈던 자신의 눈빛이 모조리 무시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님, 내 말이 안 들려요? 뭘 좀 만들어 드릴까? 응?"

 

 

시은의 낮고 싸늘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송화는 정말이지, 절절한 눈빛을 만들고 고개까지 도리도리 흔들었다. 그건 간절한 메시지였다.

 

 

사장님 그러지 마세요, 제발.

 

 

안돼안돼안돼요.

 

 

제발-!

 

 

그럼에도 자신은 쳐다보지도 않고 무슨 눈싸움이라도 하는 양 똑바로 남자만을 쏘아보고 있는 시은이었다. 송화는 시은의 옆선만 하염없이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하필 오늘따라 시은의 눈매는 더 선명해 보였고, 아이라인은 완벽했으며, 그건 달리 말하면 더 강렬했다고 할 수도 있었다. 지극히 아름답기도, 또 적대감을 표현하기에도 안성맞춤인 시은 특유의 눈매였다.

 

 

알바생은 잠시 고개를 들어 자신을 사이에 두고 두 눈을 마주하고 있는 남자'손님'과 여자'사장'님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숨을 잔뜩 들이켜고 사장의 팔을 잡았다. 덥석.

 

 

제발, 하, 지, 말, 라, 고-

 

 

 

요!

 

 

 

그러나 그 순간,

 

 

 

"아니면 꺼지시던가?"

 

 

 

두둥.

 

 

 

아.

 

 

 

아, 또…… 이렇게 되어버렸다.

 

 

 

부처님 하느님 성모마리아시여…….

 

 

 

이 미친 사장녀ㄴ 철 좀 들게 해주소서.

 







 

 

 

 

야근을 피하는 방법 1부

 

 

 



 





 

손님들은 두 가지 유형이었다. 그냥 손님과 자신의 번호를 따는 손님. 물론 후자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극히 적은 건 사실이었으나, 일주일에 한두 번꼴로 자신의 번호를 묻는 남자들이 나타났다. 그 남자들도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뉘었다. 번호를 묻기 전에 건네는 멘트의 종류로. 하나는 남자친구가 있냐는 질문을 먼저 건네는 사람, 그리고 또 하나는 제 이름을 묻는 경우였다.

 

 

"채송화, 예요."

 

 

그런 경우 남자들은 놀라울 정도로 한결같은 멘트로 받아쳤다. 이름이 채송화예요? 채송화? 아, 그거 꽃 이름 이잖아요. 역시, 이름처럼 꽃다우시네요. 짐짓 위트가 담긴 말투로 하나같이 모두 짜 맞춘 것처럼 그리 받아쳤다. 그러면 송화도 그들만큼이나 진부한 미소로 응대했다. 사실 소나무송(松) 자를 써요, 하고 굳이 말 할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대화가 길어지면 꼭 시은이 나타났고, 그때부터 우아하고 나긋나긋한 시은의 폭언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부킹하려면 나이트나 갈 것이지 왜 카페를 와? 남의 장사밑천에 뭐가 잘났다고 추파질이야? 손님은 왕이다- 라고 하니까 진짜 네가 왕인줄 아니, 거지새끼야? 내가 너 좋으라고 얘를 카운터에 둔 줄 아니? 이렇게, 그 내용과는 전혀 다른 아름다운 목소리가 남자들에게 사정없이 내리 꽂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까지 한결 같은 언어폭력을 고수해 준 시은 덕분에 송화는 홧홧해진 얼굴을 감출 길이 없었다. 안타까움, 민망함, 심지어 미안함까지 느껴야 하는 이런 상황이 사실은 가장 힘든 일 중 하나였다. 송화는 결국 손님보고 꺼지시던가, 와 같은 엄청난 발언을 한 카페사장 강시은의 옆구리를 쿡, 찌르고 말았다. 오늘은 부러 조금 더 힘을 실었다.

 

 

그러나 잠시 주춤하던 시은은 금세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 특유의 뻔뻔하고 우아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내 말 알아들었나요, 손님?

 

 

아, 이 바보 같은 사장님. 송화는 차마 대놓고 말하진 못하고 시은을 올려다보며 그만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저 손님이 그동안 우리 카페에서 팔아준 매출이 얼만데…….

 

 

가뜩이나 요즘 사방팔방에 생긴 카페들 때문에 매출이 떨어질까 전전긍긍 예민해져 있는데 정작 사장이란 여자는 하루가 멀다하고 이렇게 손님들에게 꺼지라는 말을 일삼는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이건 당최 누가 사장인지 모르겠다.

 

 

"손님, 내 말 알아들었냐고."

 

"사, 사장님?"

 

 

송화가 꼭 꼬집을 듯 시은을 잡아대며 속삭였다. 그만, 그만 좀 해요.

 

 

"우리가 전화번호 파는 장사가 아니잖아, 응?"

 

"사장님!"

 

"이쯤 되면 눈치껏 퇴장해 주셔야지? 아, 나가는 문은 저어기 있고."

 

 

시은은 쐐기를 박는다. 아, 미칠 것 같아. 송화는 눈을 질끈 감았다. 차마 눈 뜨고는 보지 못할 민망한 현장의 당사자로 있는 게 괴로웠기 때문이었다. 도저히 남자의 눈을 볼 자신이 없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미안한 기분이다.

 

 

남자는 당황스럽게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더니 결국 크흠, 기침을 하고 몸을 돌린다. 카페 안엔 봄노래의 절정이다. 그 사이로 딸랑- 하고 카페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사라진 남자의 뒷모습과 함께 카페 안엔 잠시 오묘한 분위기가 맴돈다.

 

 

그때서야 송화는 다시 눈을 떴다. 남자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못살아.

 

 

송화가 입술을 꼭 다물고 시은 쪽을 올려다보며 흘겼다.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그건 내가 할 말이잖니."

 

"손님한테 이렇게 하시면 어떡해요? 장사 말아먹을 일 있어요?"

 

 

거기다가 이거 내 카페가 아니라 니 카페라구요.

 

 

송화는 다다다 몰아붙였다. 바로 옆 건물 1층에 또 카페가 들어선대요. 이번 달만 벌써 카페가 두 개 생겼어요. 우리 아메리카노의 반값밖에 안된다구요. 사장님, 새로 생긴 카페들 지나가면서라도 한 번 자세히 본 적 있어요? 요 앞에 편의점 자리도 곧 카페로 바뀐대요. 요앞에 토스트가게랑 밥버거가게도 커피를 팔기 시작했구요. 그런 건 알고 있어요? 가뜩이나 손님 줄어들까봐 걱정하고 있는데 도와주진 못할망정- 근데 제 말 듣고 있어요? 이봐요, 사장님, 저기요!

 

 

봄노래가 계속 흘러나온다. 송화의 잔소리가 무슨 노랫말처럼 들리는지 시은은 그저 태평한 표정이다. 아니, 꼭 재롱을 부리는 강아지나 고양이를 보는 주인의 눈을 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뻔뻔하기 짝이 없는 포커페이스. 그 느긋하고 여유로운 표정은 권태롭게까지 보여서 송화는 혼자 역정을 냈던 게 순간 한없이 허무해져 버렸다.

 

 

"사장님, 제 말 듣고 있냐구요."

 

 

물론 시은은 아주 잘 듣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대답을 하지 않으면 걱정이랍시고 계속 그 맑고 산뜻한 목소리로 자신에게 조잘조잘, 재잘재잘, 옹알옹알…… 떠들어댈 송화라는 걸.

 

 

"사장님!"

 

 

대답 대신 눈썹을 한 번 으쓱거리며 시은이 송화에게 조금 더 바투 다가섰다. 마치 ‘입맛’을 다시는 것처럼, 열심히 송화의 어깨와 허리, 그리고 살짝 흔들리는 단발머리가 내비치는 목덜미로 힐끔힐끔 시선을 옮겨대며.

 

 

그 늘씬한 몸을 은근히 송화 쪽으로 밀착시키면서 길고 화려한 눈꼬리 끝까지 웃음을 머금고서.

 

 

"장난하는 거 아니란 말이에요."

 

"누가 장난이래?"

 

 

- 딸랑!

 

 

마침 카페의 입구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새로운 손님들이 들어서자, 시은은 길고 잘 손질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우아하게 인사를 건넨다. "어서 오세요. 오늘 좀 덥죠?", "어머, 오랜만에 오시는 거 아닌가요?", "어서 와요. 날씨도 좋은데 창가자리 어때요?" 아까 손님을 향해 꺼지라는 말을 뱉어냈던 사람과 동일인물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 같다.

 

 

"……하아."

 

 

한숨이 터져 나온다.

 

 

송화는 아직 제 마음속에 울분이 더 남았음을 느꼈다. 방금 전 번호를 따이는 상황만해도 그렇다. 그런 건 나도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다구요. 자칫 잘못하다가 어디 인터넷에 글이라도 올라와봐. <제목 : ㅇㅇ대학 남문 앞 '그녀'카페의 실상.>, <내용 : 알바생 번호를 땄더니 사장이란 작자가 인간 취급을 안 하더군요. 인권을 무시당한 기분이었습니다. 앞으로 그 카페에 가지마세요. 다른 카페로 가세요. 여러분 이 글을 널리널리 퍼뜨려주세요>…….

 

 

하…… 미쳐, 증말!

 

 

송화는 조금 느슨해진 앞치마 끈을 다시금 제대로 동여맸다. 톡톡, 괜히 어깨를 두드리고 돌려본다. 벌써부터 피곤한 기분. 일 때문이 아니라-

 

 

강 씨 성을 가진 이 카페의 사장 때문에!

 

 

누가 보면 팔불출마냥 알바생을 끔찍하게 챙겨주는 사장이라서 좋겠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절대로,

 

아니다.

 

 

 

그래, 이 강시은이라는 '갑'은 가히 악덕업주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여자였다. 지금 자신이 앓는 모든 근육통의 원인제공자이자, 육체노동을 넘어 혹독한 정신노동까지 시켜주시는 고용주 되시겠다.

 

 

카페 ‘그녀’는 대학가에 있는 개인카페 치고는 제법 테이블이 많은 편이었다. 심지어 테이블 사이의 간격도 꽤 넓어서 어떤 사람들은 대형 프렌차이즈 카페 중 하나로 아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송화는 당연히 다른 알바생들도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사장인 강시은이라는 여자를 제외하고는. 이 큰 카페에. 누구도. 아무도.

 

 

그래, 그땐 몰랐다.

 

 

사실은 그동안 수많은 알바생들이 있었지만 모두 또라이 같은 사장을 견디지 못해 모조리 그만 두었다는 것을. 미리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아마 송화는 애초에 이곳, ‘그녀’로 발길을 들이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시은은 일하는 내내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칼같이 저를 몰아붙였다. 문제는 역정을 낸다든가 화를 내는 게 아니었다. 웃으면서, 웃으면서, 또 웃으면서. 아주 그냥 그 화려하고 우아한 입꼬리를 세상에서 가장 곱게 휘어 접으며 사근사근 속삭이는 것이었다.

 

 

"넌 나랑 그렇게 오래 있고 싶니? 자꾸 실수하게?"

"그, 그게 아니라……."

"어쩔 수 없네. 오늘도 늦게 가야겠어. 교육을 좀 받아야겠어, 너."

 

 

그러니 오늘도,

 

잘 부탁해, 야. 근♡

 

 

귀에 바람이라도 불어 넣듯, 자신의 귓바퀴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 조곤조곤 뜨거운 숨결을 내뱉으며 싱긋 웃는 시은의 행동. 그래. 야근이고 나발이고 이런 변태 또라이적 행동 때문에 송화는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무슨 사무실도 아닌 카페에 '야근'이라니? 게다가 24시간은커녕 새벽까지 영업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러나 송화를 시은에게 일절 토를 달지 못했다.

 

 

시은에겐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분명 말도 안되는 트집을 잡아대지만 그 앞에 대고 무어라 반박하기가 힘든 압도적인 아우라가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시은은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할 때마다 꼭 우아한 미소를 뿌리며 말했다. 그 화려하고 아름다운 눈웃음만 보면 아주 엄청난 교양과 기품의 소유자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개소리를 정성스럽게 하는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뿐만이 아니었다. 이상야릇한 언행으로 송화를 괴롭히다가도 손님들만 오면 백팔십도 사람이 달라져서는, 변태 또라이에서 ‘여신사장’으로(이건 송화가 지은 별명이 아니었다. 카페에 오는 학생들이 시은을 두고 지은 ‘억울한’ 별명이었다), 아주 LTE급으로 얼굴을 바꿔버린다. 천의 얼굴도 그런 천의 얼굴이 없었다.

 

 

그런데 ,

 

 

평소엔 자기가 사장인지 한량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카운터 일에 나몰라라 하던 사람이었으면서, 꼭 제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는 저를 보호해 준답시고 나서는 순간이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번호를 따이거나, 서빙을 할 때 관심을 보이는 '남자'손님들을 볼 때였다.

 

 

알바하시는 분이 참 예쁘네요, 하고 손님이 한 마디 내어 놓을라 치면, 시은은 "그래서? 어쩌라고?" 하며 쏘아대었다. 대학 축제 기간에 왔던 단체 남자손님들 무리가 송화의 팔을 잡고 카페 언제 마치냐고 물었을 때에는 기세 좋게 쌍욕을 퍼부어댔으며, 마감시간에 가까운 때에 들어온 취객들이 송화와 시은에게 저질스러운 농담을 건네자 인근 파출소의 소장을 대동해, 개새끼야 소새끼야 하며 정강이를 걷어찼던 게 바로 여기, 강시은이었다(파출소의 소장이 보지 않을 때만 골라서 구두의 뾰족한 끝으로 다리를 찍어대는 스킬을 보며 송화는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자, 그럼 오늘도 열심히 장사를 해볼까, 쏭?"

 

 

쏭화는 대답 대신 시은을 새침하게 흘겨보았다. 쏭, 이라니. 꼭 뉘 집 똥개 부르는 것만 같다.

 

 

대학가에 위치한 카페 ‘그녀’는 1층이 아니라 2층에 위치해 있었다. 넓고 탁 트인 것뿐만 아니라, 사장의 취향이 반영된 깔끔한 디자인과, 무채색 위주로 꾸며진 실내 인테리어 덕분에 주로 공부나 일을 위해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실제로 스터디카페 같은 곳으로 쓰이기도 했고 학과 모임 같은 단체손님들도 많았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화이트와 그레이톤의 인테리어와 한 세트인양, 완벽한 핏을 자랑하는 강시은의 셔츠와 분위기가 이 카페의 ‘매력’이었다. 너 남문 앞에 2층 카페 알아? '그녀'라고? 거기에 사장이 여자인데, 세상에 그렇-게 예쁘댄다. 그렇게 수군대는 말을 송화도 언젠가 한 번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런데 그 카페가 설마 이 카페일 줄이야.

 

 

그리고 그 사장이 설마 이 사람, '강시은'일 줄이야.

 

 

손님들의, 그것도 대부분 대학생들의 방문이유 중에 적지 않은 비율이 바로 이 카페의 사장, 강시은 때문인 것도 이해는 된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저 여자가 어딜 봐서 예쁘대."

 

 

사람들은 모른다. 아주 야릇하고도 은밀하게 감춰진 강시은의 ‘진실’을.

 

 

대다수의 타인들이 모르는 비밀이나 진실을 알고 있는 소수로 산다는 건 정말 외롭고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니, 뭐, 강시은이 예쁘다는 건 맞다. 그래, 예쁜 건 맞아, 맞는 듯. 하지만 그건,

 

 

정말, 어디까지나 겉모습일 뿐이었다.

 

 

"변태에 또라이인데."

 

 

어느새 카운터에서 비켜나 카페 한쪽에 늘어선 화분이나 슬쩍슬쩍 닦고 계시는 (게으르고 재수 없는) 여자를 보며 송화는 새삼스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혹시나 그 '변태에 또라이'가 들을까봐 혼자서 숨을 죽여 한 번더 되뇌어 본다 아, 저 변태에 또라이! 오늘도 혼잣말이 늘었다.

 

 

지역의 미스코리아 출신으로 왕년에 병원이나 지하철광고 등의 모델로 활동했다, 슈퍼모델 출신으로 모터쇼에서 지명률 1위로 이름 꽤나 날렸던 여자다, 유흥업계의 일타였다, 어디 유명한 재벌 2세의 약혼녀더라, 등등 무수한 소문을 뿌리고 다니지만 정작 진실은 다른 곳에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른다는 게 억울할 뿐이었다.

 

 

게다가 최근엔 인터넷 블로그에 카페나 맛집 포스팅이 늘면서 '그녀' 카페는 더욱 더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바로 훌륭한 화소수를 자랑하는 핸드폰 카메라와 카페 조명이 만나 새로운 문명이라도 창조시키는 듯, 아주 여신처럼 찍혀버린 강시은 때문이었다. 하필이면, 올라온 포스팅 중에 '여기 사장님 존예;;; 보고 기절하는 줄;;; 사랑...에 빠진 것 가타여;;;'라는 내용과 함께 별 다섯 개의 평가를 내린 블로거가 입소문을 탄 카페만을 전문으로 포스팅하는 유명한 파워블로거인건 또 뭔가.

 

 

거기다가!!

 

 

시은이 그 미끈쭉쭉빵빵 몸매에 하얀 블라우스와(단추 세 개 풀고) 앞치마(가슴팍을 가리는 게 아니라 허리까지만 올라오는 슬림한 에이프런), 혹은 섹시한 종류의 어떤 코스튬플레이라도 하는 것 같은 검은 베스트(바스트가 잠기지 않는)라도 걸치고, 머리라도 질끈 묶고 오면 그 날은 바로 가게 매출이 두 배로 뛰는 날이었다.

 

 

몸매를 이야기 하면 더 열이 뻗쳐오른다. 어째 가슴이 큰 것 까지 재수가 없다. 팔다리는 늘씬하고 길게 잘 빠졌는데 어떻게 가슴은 또 저렇게 클 수가 있지? 순간 슬쩍 제 가슴팍을 내려다보다가 울컥, 세상만사 불공평함에 어깨가 축 늘어져 또 한숨만 내쉬는 송화였다. 무겁지 않을까. 저 여리여리한 몸에 메론을 두 개나 달고 살아야 하다니.

 

 

저토록 길고 늘씬한 몸. 군살 하나 없이 매끈하게 빠진 등과 허리의 곡선. 솔직히 같은 여자가 봐도 완벽한 시은의 몸과 얼굴에 송화는 가끔 신기한 기분을 느꼈다. 여자인 송화가 봐도, 사장인 '강시은'은 예뻤다. 아름다웠다. 흔히 여기 학생들이 '시은여신', ‘사장여신’, ‘여신사장’ 이런 유치찬란한 별명을 자기들끼리 속삭이는 게 뻔히 들릴 때에도 송화는 민망함보다는 그 당위성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자신에게 시은은 시은여신보다는 시은등신에 가까웠지만.

 

 

송화에게도 시은이 ‘여신’ 같았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러니까, 그건 ‘첫날’이었다. 이곳, 카페에서의 첫 근무날.

 

 

카페에서의 첫날이었다. 복장에 대한 언급이 없길래 유니폼이 따로 없다는 것을 눈치 챘다. 그래도 어느 정도 드레스코드를 맞춰야 되지 않을까, 싶어서 송화는 자신의 파스텔 분홍빛 스웨터를 꼼지락 거리다가 흘긋, 저를 빤히 쳐다보는 시은의 셔츠에 눈을 주었다. 아, 저렇게 입어야 하나 봐. 마른침을 꼴딱 삼키고 저기, 사장님, 하고 조심스레 물었었다.

 

 

"저도 셔츠를 입고 오면 되나요?"

 

"응?"

 

"유니폼…… 따로 없는 것 같은데, 사장님처럼 셔츠를 입고오면……."

 

"미쳤어?"

 

"네?"

 

"셔츠는 얼어 죽을."

 

 

미래에 이 카페의 유일한 알바생이자, 장기근무자가 될지도 모를 자신의 열정어린 질문에 시은은 정색으로 받아쳤다. 그 정색에 송화는 진심으로 당황해야했다. 혹시 제가 한 말에 실수가 있었나 곰곰 다시 되짚어 봐야했다. 허나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셔츠를 입고 오면 되냐고 물었는데…… 그런데…… 왜 화를 내는 걸까, 이 사람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송화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 제, 제가…… 뭔가 실수라도 했나요?"

 

"터틀넥. 붙는 거 말고."

 

"네?"

 

"아니다. 그걸 입어도 줄줄 흘리고 다닐 상이야."

 

"네?"

 

"아버님이 입으시는 옷 구할 수 있어?"

 

"……무슨?"

 

"아버님이 입으시는 스웨터나, 비슷한 스타일로 아무거나 걸치고 와."

 

"네에?!"

 

"누가 봐도 이상한 옷이어야 해. 알겠니?"

 

 

그게 공식적인 첫출근날의 첫대화였다. 뭐지, 이 또라이 같은 사람은?! 하고 송화는 생각했다. 시은의 첫인상은 '이상한 여자'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예쁜데 이상한 여자'였다.

 

 

그래, 알바고 나발이고 인생을 통틀어 이런 여자는 처음 본 것이었다.

 

 

송화가 이곳에서 알바를 시작하게 된 건, 사장의 고약한 성미를 이기지 못하고 그만둔 도진의 소개 때문이었다. 도진은 과 선배였다. 생김새가 어쩐지 커피를 잘 만들 것 같은 댄디함이 있는 남자였다.

 

 

졸업하기 전에 카페에서 알바를 한 번 해보는 게 나름 해보고 싶었던 일 중 하나였기 때문에 송화는 도진의 제안이 꼭 운명처럼 느껴졌다. 너 카페 알바 한 번 해 볼래? 그 말에 송화는 덜컥 고개부터 끄덕였다. 대학 내내 한 번도 알바를 쉬어본 적 없다던 도진이 추천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아마 다른 곳보다 조금 더 믿음이 가기도 했다.

 

 

어쩌면 그 믿음이 너무 순진한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뒤늦게야 알았지만, 도진은 이 카페에서 가장 오랫동안 '버틴' 알바생이었던 것이었다.

 

 

첫출근이 끝나자마자 송화는 바로 도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 오, 오, 오빠! 여기 사장님이, 좀, 아니, 많이, 이, 이상해요, 하고 다급하게 말했다. 무슨 사기꾼에 걸려 경찰서에 신고하는 사람마냥 그렇게 말했다. 그때서야 도진은 실토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을 위안삼아 등록금부터 생활비까지 모든 비용을 자급자족하던 도진이 유일하게 학을 떼며 그만둬 버린 게 바로 카페 ‘그녀’의 알바였다. 송화야, 이제 말해서 미안하다. 수많은 알바를 해봤지만 이렇고 곱게 미친 고용주는 처음이야. 그렇지만 사람 자체가 나쁜 건 아니야. 돈을 안 준다거나, 법적인 문제를 야기시키거나, 몸을 혹사시킨다거나, 툭하면 험한 말을 뱉는 사람은 절대 아니야.

 

 

다만 말과 행동이 좀 특이할 뿐이니까 조금만 참아봐.

 

 

대신 페이는 내가 보장할게. 학교 근처 카페에서 이렇게 괜찮은 시급은 없어. 사장님이 좀 또라이라서, 자기 기분이 좋을 땐 막 두 배, 세 배로 쳐준다니까. 돈도 괜찮고 근무환경도 좋은데 고용주만 좀 미쳤다고 생각하고 딱 한 달만이라도 좀 버텨주면 안되냐. 내가 부탁할게.

 

 

안 돼요! 못하겠어요!

 

 

라고 해야 했다. 그래, 그래야 했다.

 

 

그러나 송화는 받아들이고 말았다.

 

 

왜냐면 정말이지 돈이 필요했고, 추웠다.

 

 

무언가 열심히 하긴 했는데 막상 4학년이 다가오자, 정말 겁이 났다. 겨울이었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만 하는 것들 사이에서 하루에도 몇 번이고 혼자만의 줄다리기를 했다. 휴학을 결심했다. 그동안 학교에서 교내근로를 하며 충당했던 용돈도 휴학을 하면 더 이상 얻을 수 없게 될 것이었다. 모아놓은 돈도 모두 떨어졌다. 결정적으로,

 

 

이상하리만치, 그 겨울이 추웠다.

 

 

따뜻한 곳이면 어디든 좋다고 생각했고, 마침 커피에 관심이 가던 시기였다. 결국 도진의 소개를 받은 이튿날 바로 카페 '그녀'에 들어가 하루 종일 끙끙거리며 정성스럽게 이력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카페의 카운터에서 자꾸만 자신과 눈이 마주치는 '아름다운' 여자에게 쭈뼛거리며 다가가 이력서를 건넸다. 마치 자기가 카페 알바를 위해 이력서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끈덕지게 자신을 쳐다보던 여자였다.

 

 

그런데 여자는 정작 송화의 이력서는 쳐다보지도 않고 송화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정말이지, 빤히.

 

 

다소 예의에 어긋나 보일 정도로 빤히.

 

 

진짜 사진에 찍힌 사람처럼, 정지된 화면 속에 있는 사람 같은 눈동자였다. 송화는 단번에 알아챘다. 이 사람이 사장이겠구나. 분명해. 시은이 가진 고고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다만, ‘예쁜데 어딘가 좀 이상한 느낌이 있는 사장님'이었다. 어쨌든 송화는 생각했다. 와, 앞으로 내가 이런 사람이랑 같이 일을 하게 될 수도 있어.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의 곁에서 일을 하는 건 어떤 느낌일까.

 

 

요컨대, 그 정도로 아름다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이토록 아름다운 사람에게서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이상행동'이 나오자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저, 저기…… 이거 이력서……왜 안 받으……."

 

"누구 소개라고?"

 

"유도진 선배요."

 

"하, 유도진이가 드디어 제대로 일을 한 번 하네."

 

"네?"

 

"이름은?"

 

"채송화…… 입니다."

 

 

송화의 이름을 들었을 때 남자들이 위트 있는 척 내뱉던 진부한 멘트를 시은은 일절 하지 않았다. 으레 제 이름을 들었을 때 사람들이 인사치레로 했던 말들, 이름이 예쁘네, 라든지. 꽃의 이름에서 따온거냐, 라든지-의 말들은 없이 그냥 눈썹을 으쓱하며 싱긋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끝없는 질문들을 퍼부어댔다.

 

 

"나 몇 살로 보이니?"

 

"내 첫인상 어때?"

 

"샴푸 뭐 써?"

 

"한 번 웃어볼래?"

 

 

거기서 끝났으면 그냥 조금 별난 면접이다 싶었는데, 그 질문들은 곧, 애인 있니? 어머, 그럼 현재 연락하는 사람은? 따로 썸타는 사람도 없어? 유도진이랑은 무슨 관곈데?로 이어졌고,

 

 

"쓰리사이즈, 말해 봐."

 

 

라는 말까지 듣게 되었다. 송화는 당황스러웠지만 사장이 건네는 질문들엔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어쩌면 카페에서 입는 유니폼과 관련이 있지도 몰랐다.

 

 

꼭 고개넘듯 겨우겨우 대답할 만한 종류의 질문들은 끝이 없이 이어졌다. 사장은 곧 사는 곳을 묻더니, 이내 연애를 몇 번 해봤냐는 질문을 했다.

 

 

면접(을 가장한 질문세례)을 카운터에서 하고 있는 시은 때문에, 송화의 뒤로 점점 손님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주문을 받는 사람은 사장인 시은 말고 다른 사람이 없었다. 손님의 줄은 마침내 송화가 흘깃흘깃 제 뒤로 눈치를 봐야할 정도로 길어졌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도 송화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여전히 능청스럽게 속사포로 질문하는 걸 멈추지 않는 시은이었다. 과연 도진의 말대로 조금, '똘끼'가 있는 여자인 듯 보였다.

 

 

"넌 뭐하는 거 좋아해?"

 

"예?"

 

"취미 말이야."

 

"취, 취미요? 아, 전 음…… 여행잡지 같은 거 보는……."

 

"특기는?"

 

"네? 트, 특기는…… 특기는 뭐가 있지……."

 

"주말엔 뭐해?"

 

"주말엔…… 토익학원 다녔었는데 잠시 휴강 해뒀어요."

 

"그래? 흐음- 좋네."

 

 

아참, 너-

 

 

"혈액형은 뭐야? 생일은?"

 

"……네?"

 

 

제발 거기 있는 이력서를 봐주세요, 라고 말 하고 싶었지만, 시은의 얼굴엔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진지한 즐거움이 서려있었기 때문에 송화는 그저 당황스러운 되물음만 내어놓았다.

 

 

송화는 제 앞에 시은과 제 뒤에 손님들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되어있었다. 앞뒤로 눈치를 보며 겨우 대답을 내어놓으면서도 이래도 되나, 싶은 걱정에 어쩔 줄 몰랐다. 그러나 제 당황스러움은 전혀 모르는지 시은은 멈추지 않고 약 50여개의 질문을 더 퍼부었다. 마침내 송화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쩌면 꺼지라는 말을 시은은 아주 고운 방식으로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아, 주문 좀 받지 그래?"

 

 

뒤에서 손님들이 사장에게 불만스러운 말을 건넸다.

 

 

그 말에 송화는 화들짝 놀라 퍼뜩 몸을 돌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비켜서려고 했다.

 

 

"아, 지금 알바생 뽑잖아요."

 

 

……?

 

 

엥?

 

 

손님들을 향한 시은의 말은 너무나 태평한 어조였다.

 

 

"커피가 그렇게 마시고 싶으시면 다른데 가던지."

 

"……?!"

 

 

헐.

 

 

오.

 

 

미쳤나봐 이 사람.

 

 

과연 사장을 두고 ‘곱게 미친 여자’라고 하던 도진의 말이 일리가 있는 모양이었다. 송화는 그 자리에서 뒤로 돌아 "뭐야?!"하며 표정을 구기는 손님들에게 "아니에요! 주문하세요, 주문!"하고 외치며 일을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도대체 왜 죄송한진 모르겠지만 죄송합니다. 손님들의 줄을 손수 당겨주며 송화가 억지웃음을 지었다.

 

 

그때 송화는 제 모습을 무슨 동물 새끼 보듯 하던 시은의 눈빛을 본 것 같기도 했다. 길고 화려하게 빠진 눈꼬리 가득 웃음이 담긴 모습. 뭔가 사로잡힌 듯한 느낌이 드는 기분.

 

 

"너, 채송화. 이리 와 봐."

 

 

그리고 손님들을 당겨주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송화의 뒤로 시은의 목소리가 꽂혔다.

 

 

송화의 허둥거리는 모습을 보며 쿡쿡 거리던 시은이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송화의 눈앞에는 한 장의 명함이 내밀어져 있었다.

 

 

"오늘이 가기 전에 나한테 메시지 하나 넣어."

 

"네?"

 

"내일부터 당장 나오는 거야, 알았니?"

 

"예?"

 

"주말에 할 거 없댔으니까 평일주말 다 하는 거야. 응?"

 

 

송화는 그날 일기를 썼고, 거기엔 [그때 나는 등신바보 같이 네, 라고 대답했다] 라고 씌어있다.

 

 

그랬다. 사실 머릿속으로는 이미, 사장이란 여자가 좀 이상한 것 같아- 하고 생각해서 조금 더 생각해보겠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밀려있는 손님들이 순간 짜 맞춘 듯 일제히 자신을 쳐다볼 뿐 아니라, 송화를 향해 빙긋 웃고 있는 ‘사장’이란 여자의 표정이 정말이지 이미 자신의 고용주가 된 것마냥 능청스럽고 묘하게 강압적이어서,

 

 

송화는 저도 모르게,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고 고개까지 꾸벅 숙이고 나와 버렸다.

 

 

그리고 그날 송화는 도진의 연락을 받게 되었다. 도진은 진짜 송화가 무슨 생명의 은인인 것처럼 고맙다는 말을 40번쯤 했다. 그리고 송화를 소개해줬다는 이유만으로 카페 사장인 시은에게서 아주 값비싼 원두와 텀블러, 찻잔세트, 수제초콜릿 따위를 선물로 받았다고 하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 송화야, 너 지금은 확실히 애인이 없는 거지?

 

 

그건 왜 묻냐는 송화의 말에 도진은 말을 흐리며 사장이 그걸 물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없어요, 하고 대답하자마자 도진은 만사 고민이 해결된 사람처럼 전화를 끊었다.

 

 

그래, 그때 알아야 했었다.

 

 

그때……

 

 

강시은이 얼마나 나쁜 사장인지 알아야 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이유는-

 

 

 

 

 

 

 

 

* * *

 

 

 

 

 

 

 

 

"테이크아웃으로 여덟 잔이요. 늘 주시던 것처럼 네 잔은 샷 한번 씩 추가 해주시구요. 조금 후에 찾으러 올게요."

"아, 네!"

 

 

곰곰 생각에 잠겨있던 송화가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단골손님이었다. 항상 비슷한 시간대에 단체로 아메리카노 주문을 넣는 바로 옆건물의 어학원 교무실이었다. 송화은 제 두 손으로 빠르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방긋 웃으며 말했다. 마침 오늘 저희 새로운 쿠키 주문받았는데, 서비스로 넣어드릴게요. 조금 여유 갖고 오셔도 돼요.

 

 

시은과의 끔찍한 첫만남을 생각하고 있자니 갑자기 주문이 밀리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알바생을 한 명 더, 아니 마음 같아선 한 두어 명 더 써야하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시은은 전혀 그런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너만 있으면 돼."

 

 

정말이지 확고했다. 인건비를 걱정해야 할 만큼 카페가 장사가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시은이 그런 데에서 돈을 아낄 사람은 더더욱 아닌데도 이상하리만치 고집을 부렸다.

 

 

"대신 페이는 두 사람, 세 사람 몫 쳐 주잖니?"

 

 

차라리 일할 사람을 더 구해주는 게 낫다고 송화가 대꾸할 때마다 시은은 고개만 살랑살랑 저으며, 그건 안 돼. 절대 안 돼. 몇 번이고 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진짜 문제는 이것이었다. ‘야근’.

 

 

가뜩이나 사람이 없어 힘들어 죽겠는데도 꼬박꼬박 '야근'이랍시고 영업시간이 지나서까지 자신을 남기는 것이었다. 너 커피 제대로 배우고 싶지? 사근사근 저를 달래면서 속삭이는 시은의 행동이 이어지면, 뭔가 거역하기 힘든 기분이 되어버린다.

 

 

정말이지,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다.

 

 

송화가 이토록 울분을 삼키는 이유는 또 있었다. 노예수준으로 일을 시키는 게 미안하면, 양심적으로 좀 도와주기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미친듯이 주문을 받고, 음료를 만들고, 계산과 청소를 하는 자신을 뻔히 보면서도 사장이란 작자는 저기서 행운목과 대나무야자, 알로에베라 따위의 화분들이나 평화롭게 닦으며 띵가띵가 놀고 있는 것이었다.

 

 

주문이 한차례 폭풍처럼 밀린 후에 송화는 한참동안 안절부절 손가락을 꼼지락 거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다-

 

 

 

- 가 아니다.

 

 

 

사실은 안다.

 

 

저 사장녀ㄴ이 어떤 속셈으로 저렇게 탱자탱자 놀고 있는지.

 

 

"……사장님."

 

"응?"

 

 

여우처럼 웃으며 돌아보는 것 좀 봐, 하고 송화는 생각했다. 무슨 제 목소리가 밥 먹으라며 부르는 주인의 말인양 눈을 반짝이며 돌아보는 커다란 개 한 마리, 아니 여우 한 마리. 안타깝게도 그 반짝이는 눈매가 너무 아름답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인간적으로 좀 도와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지금 음료가 몇 잔 밀렸는지 아세요? 곧……."

 

 

말을 잇다말고 송화는 한숨을 푹 쉬었다. 제 안타까운 사정은 모른 채 시은은 이제 입가에 만연히 미소가 퍼지는 중이다.

 

 

"곧 매장 손님들도 들어 닥칠 텐데……."

 

"그렇지? 응? 바쁘겠지?"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 지 않은 저 미소가 오늘도 송화를 길들이고 있었다.

 

 

"그럼 자."

 

 

…….

 

 

……아.

 

 

……진짜.

 

 

또각또각- 그 섹시한 펌프스의 높은 힐이 고양이 걸음같이 우아하고 사뿐하게 자신을 향한다.

 

 

"주문이 밀리면 늦어지고, 늦어지면 늦어지고, 늦어지면 늦어져서 늦어져버리고 말아. 그렇지?"

 

 

시은이 빙긋 웃었다. 마감 다 하고- 야근도 시켜버릴까? 하고 소곤거리며 말했다. 잘 말려 올라간 아름다운 입매가 꼭 사람을 홀리는 여우 꼬리 같았다.

 

 

가까이에서 훅 끼치는 시은의 아찔한 향기에 송화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이내 곧 시은에게 팔꿈치와 손목 사이를 잡힌다. 리드미컬하게 당겨지는 제 몸이 곧 시은의 몸에 밀착된다.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사실 송화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손, 시은의 손에 잡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

 

"어떻게 해야 하지, 쏭?"

 

"……."

 

"주문이 밀렸다잖아, 응?"

 

"……내가…… 내가 사장도 아닌데……."

 

"음-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런 게 아니야."

 

 

세상에서 제일 뻔뻔한 인물을 고르시오, 라는 주관식 질문이 있다면 송화는 0.1초도 고민하지 않고 빨간색 펜으로 꾹꾹 눌러 강시은, 이라는 이름을 쓸 것이었다.

 

 

여전히 뻔뻔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시은이 얼굴을 내민다.

 

 

미친 게 분명했다.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어서."

 

"사장님…… 저쪽에 손님 있는 거 안 보여요?"

 

"아, 그럼 너 혼자 다하던지."

 

 

아, 씨.

 

 

 

진짜…… 못 살아…….

 

 

 

왜 세상의 진실은 이렇게 엉뚱한 곳에 있는 걸까?

 

 

 

이 건전하고 예쁜 카페에서,

 

 

 

나는 비밀을 하나 간직하고 있다.

 

 

 

아주 엉뚱하고 누구에게도 쉽게 말하지 못할-

 

 

 

"5초 센다?"

 

"지, 진짜……!"

 

"5. 4. 3. 2……."

 

 

 

송화가 눈을 질끈 감는다. 입술도 앙 다물었다. 다만 입술 끝을 조금 오물거리며 내민 채였다.

 

 

 

쪽.

 

 

 

그리고-

 

 

 

그대로 시은의 볼에 뽀뽀해줬다.

 

 

 

 

 


 

 

 






웹소설(GL) zezemem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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