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강을 한 달 앞둔 캠퍼스에는 지치지도 않고 눈이 쌓였다.


올해는 워낙 첫눈이 일렀다. 처음 며칠이야 예쁘지, 글자가 빽빽한 모니터와 각양각색의 과제로 싸우고 있는 이들에게는 이제 눈이 불편하기만 했다. 첫눈이다! 외치며 좋아하던 학우들은 이제 건물 밖으로만 나오면 한숨을 쉰다. 오늘도 캠퍼스 앞 사거리에서는 아스팔트의 블랙 아이스 때문에 차 사고가 났다. 염화나트륨을 뿌려 녹여놓은 곳은 철퍽거리고 미끄럽다. 때를 가리지 않고 순진하게 내리는 눈송이는 더 이상 반김 거리가 되지 못했다.

닫히는 자동문을 뒤로하고, 교내 카페 현관 앞에서 우산을 펼까 말까 고민하던 아금은 결국 우산을 펼쳤다. 검은 장우산은 펑 하는 소리를 내며 원을 그렸다. 혼자라면 모를까 오늘은 일행이 있으니까.


“경영학과 교수님이 왜 우리 학과장님한테...선배도 참 귀찮은 심부름 하네.”

“근로학생이니까.”


선선한 답이 돌아왔고, 아금은 그와 함께 걷기 시작하며 물었다.


“근로학생...장학금 때문은 아니겠고. 왜, 집에서 졸업 빨리 하래?”

“노골적인 말은 없는데, 분위기가 그렇지.”

“재벌집 아들도 고생이네.”

“고루한 위로 멘트 고마워.”


반은 녹고 반은 얼어버린 눈 위로 새로운 하얀 눈이 포슬포슬 내린다. 언제 내가 내려왔었냐는 듯, 처음인 것처럼 하얗게 그 위에 앉아선 녹아들어 간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신중하게 걷는 두 사람의 발자국이 미술대학 방향으로 향했다. 두 사람의 목적지는 미술대학 부지의 교양 강의동이다. 턱 끝까지 올라온 헐렁한 터틀넥 코트 위로 흰 입김이 번졌다. 졸업 논문 지도교수인 경영학과의 한 교수에게 어떠한 서류 뭉치와 함께 받은, ‘이 자료를 미술대 동양화학과 학과장에게 직접 전해달라.’는 이상하고 귀찮은 부탁. 처음엔 곤란하지 않았다. 그냥 동양화학과에 찾아가, 학과장의 위치를 묻고, 예의 바르게 전달하면 되니까.


그런데 그 간단한 일이 3일간이나 해결이 되지 않았다.


동양화학과 학과장이라는 그의 행방이 늘, 아주 묘연했기 때문이다. 곤란해 하던 이주가 찾아낸 하나의 동아줄은 고등학교 후배였던 아금. 학과연합 술자리에서 재회한 후 지금까지도 종종 교내에서 만나고 있는데, 바로 그가 동양화학을 전공하고 있었다. 아금을 떠올린 후 도움을 요청하려 연락하고, 너희 과의 학과장님이 보통 어디 계시냐 물었지만 시원치 않은 대답만 돌아왔다.


‘어디 계시는지 우리도 잘 몰라. 수업시간엔 칼같이 들어오시는데 그 외에는 전혀 못 봐.

교수실에도 안 계셔, 다른 교수님 말씀으로는 학과장님 작업실...아뜰리에가 과건물 지하 1층에 따로 있나 봐. 그런데 들어갈 순 없어. 엄청 무섭거든, 지하 1층도, 학과장님도’


‘거의 뭐 귀신취급이네.’


이주는 아금에게 그가 수업을 맡은 미술 교양 시간을 알아냈다. 공사다망하신 건지 두문불출 하시는 동양화학과의 학과장이 실기수업중 하나인 수묵화와, 교양수업인 동양화의 역사와 이론을 담당하고 있다는 메리트 있는 정보. 타과 전공수업엔 들어가지 못하지만, 교양 수업이라면 타과 수업이라도 비교적 청강하러 들어가기가 쉽다. 아금은 교양수업 중간 10분의 쉬는 시간이 있으니 그때 학과장님께 서류를 전해보라는 권유를 했다. 이주도 그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납득했다.


“미술대학 부지 들어오는 거 처음이야.”

“올 일이 없지. 경영이랑은 과 건물도 멀리 떨어져 있고 접점도 없으니까...아, 빨리 가야겠다.”


아금이 손목의 시계를 보더니 걸음을 재촉하며, 정각에 맞춰 가느니 일찍 가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눈길에 걸음을 조심하느라 그랬는지 생각보다 이동시간이 더 걸렸던 모양이다.


“여기가 우리 과건물이야.”


앞서서 우산을 접고 유리 현관문을 연 아금이 소개했다. 한창 수업 중인지 그리 인적이 느껴지지 않는 타과의 과건물은 낯설고 막연한 기분이 들었다. 경영학과가 있는 건물에선 느낄 수 없었던 독특한 냄새가 났다. 이에 대해 말하니 아금이 아마 실기실에서 나는 냄새일 거라며 웃었다. 불쾌한 냄새는 아니었기에 고갤 끄덕이며 현관과 가까운 계단을 올랐다. 세로로 긴 유리창을 촘촘하게 붙여놓은 건물 벽 밖으로는 계속 눈이 내렸다. 계단참의 코너를 빙글 돌며 언제 그치려나. 하는 생각이 잠시 했다. 오늘은 차를 가져왔기 때문에 운전 길이 험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내심 있었다.

젖은 우산을 정리하는 아금 대신 이주는 눈앞에 당도한 교양 강의실의 문을 열었다. 미술학부 인원 전체를 수용할 수 있는 계단식 강의실이라 규모가 무척 넓었고 학생들의 착석률도 높아 마치 상영직전 영화관 안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저마다 웅성웅성 이야기를 하는 학생들의 책상이 피라미드처럼 층층이 쌓여있고 그 한참 아래에 교단이 보였다. 교단 위에서 조교로 보이는 여자가 빔 프로젝터를 켜는 동안 이주와 아금은 적당한 빈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처음 보는 사람이 눈에 띄는지 여기저기 이주를 흘끗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조교는 마이크와 노트북이 교탁에 잘 세팅 되어있는지를 확인하더니 곧 벽으로 가까이 갔고 강의실의 조명이 탁 소리를 내며 꺼졌다. 손목의 시계를 보니 긴 분침이 5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강의실이 어두워지자 학생들은 암묵의 약속이라도 한 듯 아주 빠르게 조용해졌고 조명을 끈 조교가 컨트롤러를 조작하자 꽤 큰 진동음을 일으키며 교단 뒤로 흰 스크린이 내려왔다. 스크린은 아주 느릿느릿 내려왔다. 창밖에는 다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지겹네.


생각하는 순간 강의실 중앙의 시계 초침이 찰칵 소리를 내며 귀를 때렸다. 정각. 1초도 지체 하지 않고 강의실의 앞문이 열렸다. 문 앞에서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정확한 시간에 들어온 남자의 흰 셔츠 차림이 눈을 자극했다.


‘젊잖아.’


남자는 학과장이라는 말에 막연히 생각한 초로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젊은 신임 교수 정도의 나이로 보였고.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한겨울에 춥지도 않은지 외투도 없이 들어온 남자는 가슴 정도까지 내려오는 검은 긴 머리를 묶으며 교탁에 섰고 바로 마이크 스위치에 손을 내밀었다.

탁, 깨끗이 깎인 손톱 끝으로 마이크의 스위치를 올린 젊은 교수는 학생들을 향해 고개를 들었고, 그 많은 학생들 중 한 단명.


이주와 눈이 마주쳤다.





시선이라는 이름의 화살이 서로의 눈동자에 꽂혔다.

꾹 다문 입매의 교수가 아주 빠르게 얼어붙었다. 분명 초면일 텐데, 만난 적이 없는데. 교수는 강의실 안에 있는 이주의 존재에 분명 동요했고, 이주 역시 그와 마주친 눈을 떼지 못했다. 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쿵...쿵... 저 멀리 심연 깊은 곳 응어리 속에서 소리가 울린다. 가속이 걸린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왜 그래? 하고 조그만 목소리로 아금이 물어보는 목소리는 마치 심해의 소리처럼 불분명하게 들렸다.


“......”


느리고 묵직한 침묵이 프로로젝터의 빛에 의존한 어두운 강의실을 지배했다. 평소처럼 칼같은 수업의 시작을 기다리던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낯선 학생 한 명을 보고 찬물을 뒤집어쓴 듯 멈춰버린 교수의 행동이 참 의아했다. 그도 그럴 게 학과장인 저 교수는 늘 도자기 가면처럼 딱딱한 얼굴을 하고 상대가 학생이건 교수건 감정이란 걸 드러내질 않는 사람이었다. 세상이 뒤집혀도 ‘뒤집혔군.’ 한 마디가 끝일 듯한 같은 교수의 동요는 다른 이의 눈에도 선명하게 보였다. 

왜 저러시지. 뭐지? 저 사람 누군데? 저마다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상황의 답을 찾지 못하여 조금 커질 때 쯤.


“수업 시작 합니다.”


마이크로 확성 된 낮은 목소리가 강의실에 울렸다. 수런수런 일어난 소란은 강압적인 목소리에 바로 제압되었다. 학생들에게서 눈을 거두고 오늘 강의 내용의 소개와 한 시간 뒤에 있을 쉬는 시간을 의무처럼 공지한 교수는


“다음부터 타과 학생의 청강을 일절 금지합니다.”


라는 돌발적인 말을 덧붙이곤 바로 본 수업을 시작했다.

아금은 조금 놀란 얼굴로 옆자리의 이주를 보았다. 지금 이 강의실에 있는 ‘타과 학생’은 이주 뿐이다. 학과장님이 저런 말을 한 건 처음이고, 평소 누가 자기의 강의를 청강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던 그를 생각하면 무척 의외이다. 누가 봐도 지금 학과장은 여기 이곳에 앉은 ‘이주’라는 학생 하나만을 확실하게 거절했다.


“......”


하지만 이주는 초면에 자신의 존재를 거절한 남자에게서 여전히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본 수업을 시작한 교수는 슬라이드를 넘겨가며 동굴처럼 깊고 낮은 목소리로 강의를 이어갔고 때때로 학생들에게 시선을 던졌으나 다시는 이주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왜?

이주는 눈 깜박이는 일도 잊은 채 강의 중인 그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쳐다보았다는 말보단, 뜯어보았다는 말이 맞을 지도 모른다. 보이는 면만이 아닌 그 안의 무언가를 헤집고 찾으려는 집요한 시선. 그 노골적임이 분명 느껴질 텐데도 남자는 태연하게 강의를 진행하며 이쪽을 전혀 보지 않았다. 분명 일부러였다. 이주는 숨소리를 섞어 잔뜩 낮아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부터 라는 건...”


바로 곁에 앉은 아금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엔 희미한 확신이 담겨있다.


“오늘은 봐도 괜찮다는 거지?”


설명을 위해 스크린 앞으로 이동한 교수의 흰 셔츠가 이주의 눈을 찔렀다. 교수의 등과 어깨는 장신에 걸맞게 넓었고 그 가운데로 흘러내려 있는 검은 머리카락은 마치 먹물을 잔뜩 머금어 화선지에 올려놓은 붓 같았다. 

양 팔에, 아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이주는 그에게서 끝까지 눈을 떼지 못한 채 숨을 죽였다. 지겹게만 느껴졌던 창밖의 눈보라도 교수의 등 뒤로 보이니 그 자연은 그저 그 남자를 위해 준비한 한 폭의 풍경화일 뿐이었다.


그날 밤부터 이주는 특이한 꿈을 꾸었다.


꿈속의 이주는 아주 어렸고 누군가의 긴 소매 깃을 잡고 산을 걷고 있었다. 누군가가 정성스레 천이며 솜으로 덧대준 신발은 하얀 눈 속에 푹푹 파묻혔다. 뒤뚱뒤뚱 제대로 걷지 못하자 소매 깃의 주인이 꾸깃꾸깃 천만 쥐고 있던 손을 잡아주었다. 작은 손을 잡아준 맨 손은 무척 차가웠다. 인간의 손이 아니란 걸 알았다. 하지만 전혀 무섭지 않았다. 둘은 손을 잡고 한참 동안 눈 덮인 산을 걸었다. 

거의 정상에 이르렀을까. 손을 잡아준 남자가 돌연 자신을 부르더니 하늘을 보라고 했다. 얼굴을 들어 올려다본 까마득한 하늘에는 한 마리의 새가 날고 있었다. 아주 크고 새까만 새였다.


‘무슨 새인가요?’

‘글쎄다. 한 번 물어볼까.’


질문에 답하는 목소리엔 낮게 웃는 숨이 섞여 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남자는 하늘로 손을 뻗었다. 어디로든 갈 수 있을 듯 보였던 커다란 새는 돌연 바람을 일으키며 내려와 남자가 가로로 뉘어 내민 팔 위에 갈퀴를 감고 앉았다. 제 몸집만큼 새의 노랗고 부리부리한 눈을 마주치자 무서웠지만 반듯하게 정리된 깃털의 결이 꼭 검은 비단처럼 반짝거리고 부드러웠다. 마치 남자의 긴 머리카락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저 남자의 머리카락을 만져본 적이 있었던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분명 만져보고 손가락 사이로 빗어보았던 기억이 있다. 손아귀에서 물처럼 흘러내리는 감촉은 꼭 뱀이 지나가는 양 서늘하고 매끄러웠다. 성가셔하는 남자의 머리를 연거푸 빗어 내리는 손가락은 지금처럼 작고 통통한 아이의 손이 아니었다. 뼈의 마디마디가 불거진 성인 남성의 큰 손가락이 계속해서 유유히 검은 머리카락을 이지러트렸고 머리카락의 주인은 고른 숨소리를 내며 눈을 감곤했다.


이건 언제의 기억? 어디에서? 언제의 내가?


뽀득뽀득 하얀 눈을 밟으며 조심스레 검은 새를 만져본 어린 아이는 남자를 올려다보고 신기하다며 웃었다. 남자도 희미하게 웃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부드러워진 입가의 실루엣만이 간신히 시야에 남겨져, 그것을 놓치기 싫어 카메라로 사진을 찍듯 눈을 몇 번 깜박인다. 세 번. 고양이와 인사하듯 천천히. 그리고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육각형의 차가운 눈송이가 조그만 코끝에 내려앉으면 딱 거기까지.


그 이상을 생각해내려고 하면 반드시 꿈에서 깨어난다.


누군가가 그 이후의 기억을 떠올려냄을 막고 있딘. 겨울이지만 따뜻한 기억에어 아주 단호하고, 차갑게 깨어난다. 밤을 넘은 새벽의 바람이 돌연 서글프다. 꿈에서 깨어났단 사실 만으로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왜 나만?

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며 그날은 다시 잠들지 못한다. 그 남자를 만난 날 이후로, 계속. 매일을.






.





“계속 꾼다니까요.”

“나한테 말해봤자...”


셔츠의 마지막 단추를 잠그며 말하니 침대 위의 남자가 중얼거리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시트를 대충 두른 채 몸을 웅크렸다. 겨울의 막바지라해도 아직 공기가 차니 나체차림은 추울 만하다. 이주는 침대 가까이 가 남자의 어깨까지 시트를 끌어올리고 바람 들 새 없이 꼼꼼하게 구석구석을 여몄다. 흰 시트 위로 콧등부터 머리까지만 남은 남자는 아직 눈 뜰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꼭 꿈이 아닌 것 같아요. 혹시 정말 전생일까요?”

“전생 같은 거 믿지 마. 전생이니 윤회니 그런 일에 빠지면 한도 끝도 없다.”


조용조용 말하는 효운의 목소리는 잔뜩 잠겨있었다. 어젯밤의 섹스가 남긴 여파다. 체위를 바꾸는 중간중간 계속 물을 먹었지만 몸 속 깊숙이 떨어지지 않는 이주의 집요함 때문에 헐떡임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결국 또 목이 갔다. 자주 있는 일이다. 이주는 따뜻한 물을 가져올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는 따뜻한 물보단 커피를 찾을 것이다.


폭탄 돌리기 식으로 맡아버렸던 학과장직에서 물러나 개인 작품 작업을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아침에 약해졌다. 반년 전만 해도 매일 새벽 다섯 시면 일어나서 조용히 커피를 내리고 있었는데. 하지만 이주는 그가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마냥 좋았다. 교수님 귀여워요. 소리 내어 말하면 말 상대도 안 해줄 테니 입은 다문 채 싱긋 웃었다.

이주는 푹신하고 청결한 카펫을 슬리퍼로 밟으며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시계를 차고 소매 단추를 잠근 후 뒤를 돌아보자 시계를 정리해놓은 쇼 케이스 위에 넥타이와 핀이 하나씩 올라가 있다. 어두운 남색 바탕에 조그맣고 은은한 흰색으로 무늬가 있는 넥타이. 핀은 이주가 가진 넥타이 핀 중 가장 가늘고 심플한 핀이었다.


“오늘은 이거네.”


저절로 양쪽 입가가 올라갔다. 연인이 내려준 모닝커피로 잠을 깨는 달콤함이 사라진 건 아쉽지만, 그는 대신 이주의 넥타이를 매일 골라주는 일은 빠트리지 않았다. 빠르면 전날 밤. 늦으면 그날 새벽에 꼭 이주가 할 넥타이를 골라 이곳에 올려놓는다. 그 모습을 보면 뒤에서 끌어안지 않을 수가 없다. 셔츠의 목깃을 세운 이주는 오늘의 넥타이를 목에 둘러 매듭을 묶기 시작했다. 모양을 확인하려 거울 앞에 선 자신의 입꼬리는 내려올 줄을 모르고 있다. 이주의 입에서 달콤하고 깊은 한숨이 푹 흘러나왔다.


“아, 못 참겠다.”


다 묶은 넥타이의 매듭을 조여 올릴 인내도 남지 않았다. 드레스 룸을 벗어난 이주는 다시 침대에 뛰어들었다. 침대가 푹 꺼지는 반동에 눈을 뜬 남자는 연인의 기습에 놀랄 틈도 없이 입이 막혔다.

닫혀있는 입술을 꾹 한참 눌렀다가 떼니 찌릿한 시선이 돌아온다. 더 자고 싶다는 눈빛이었다지만 이주에겐 소용없었다. 열어달라는 듯 여러 번 입술을 부딪치고 쪽, 하는 마찰음을 연달아 내자 얕은 한숨과 함께 입이 열렸다. 맞부딪친 혀가 미끄러지며 다디단 입안을 끈적끈적하게 만들고, 그 틈에 서로의 숨소리가 뒤섞이자 가슴이 충만해졌다.


“그만.”

“키스만 할게요.”

“얼마나.”

“음...10분.”

“10분?”


10분이나 키스를 하겠다는 거냐고 되물으려 했지만 그 말도 음성이 되진 못했다. 아까보다 강하게 불쑥 들어온 혀는 입천장을 살살 긁으며 몸을 굳어지게 만들었고 천천히 호흡을 맞추던 숨소리도 점차 엇갈리며 격해졌다. 계속해서 뭉개지는 위아래 입술의 감촉이 얼얼해 머리가 아득해진다. 이런 키스를 10분이나 했다간 키스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때 마침 침대 협탁에 올려놓은 스마트폰이 긴 진동음을 냈다. 붕, 소리를 길게 내는 액정화면 위에는 익숙한 이름이 떠 있었다. 전화를 받기 위해 이주의 어깨를 밀었지만 당연히 밀리지 않았다.


“전화 받아야 해.”

“싫어요.”


앙큼하게 계속 입안을 탐하는 혀를 따끔하게 깨물고 나서야 이주는 물러났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서는 삐진 얼굴로 입술을 내민다. 겨우 빠져나와 계속 진동하는 전화를 잡았다.


“무슨 일이야.”

[일어나셨어요? 오늘 강의 까먹지 않으셨죠?]


“......”

[애들이 효운 교수님 진짜 특강 나오시냐고 계속 물어봐요! 전화도 계속 오고!]


“까먹지 않았어. 어제도 전화했잖아.”

[대답 없이 끊으셨잖아요!]


“...네가 이렇게 시끄럽게 구니까 그런 거야.”


스마트폰을 귀에 갖다 댄 채 성가시단 표정으로 침대에서 일어나니 이주가 눈에 띄게 서운해하며 침대 위를 반 바퀴 굴렀다. 그리곤 다시 침대로 오라는 듯 효운을 빤히 쳐다본다. 웬 서운한 척. 요즘 전시 때문에 일이 바빠져, 만날 때마다 오냐오냐했더니 자신의 응석이 먹힌다는 것을 깨닫고선 대뜸 저런 애교를 부려온다. 다 큰 남자의 애교 따위 하나도 귀엽지 않다고 생각하며 효운은 이주의 뺨에 짧은 키스를 하고 침실을 벗어났다. 침대 옆 바닥에 굴러다니는 가운을 어깨 위로 대충 두르고 맨발로 거실로 나서니 침대 위에 홀로 남겨졌던 이주도 서운함을 털어내며 다시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오후 두시예요 두시.]

“알았다니까.”


[특강 듣고 바로 교수님 전시 보러간다는 애들이 많으니까 시간 지켜서 꼭]

“잔소리 좀 그만해. 내가 시간 안 지킨 적 있어?”


[있어요.]

“......”


냉장고에서 꺼낸 물이 참 시원하다.

정신을 조금 차린 효운은 생수를 몇 모금 마시곤 소파에 앉았다. 지겨운 잔소리에 잠시 휴대폰을 귀에서 떼며 고개를 돌리자, 큰 드레스 룸의 유리 너머 이주와 눈이 마주친다. 넥타이를 가리키며 씩 웃는 걸 보니 오늘의 넥타이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아참, 저도 오늘 갤러리 갈 거예요. 오늘이 마지막 날이잖아요? 평생 있을까 말까한 교수님 개인전 한번이라도 더 봐야지. 다른 조교들도 같이 간대요.]

“일찍 폐장 시켜야겠는걸.”

[그러 농담 좀 하지마세요. 좀!]


징징거림을 듣고 있자니 산미 섞인 커피 냄새가 나기 시작했고, 어느새 정장의 쓰리피스를 모두 갖춰 입은 이주가 흰 김이 나는 머그잔을 들고 다가와 효운의 곁에 놓아주었다. 칭찬해달란 표정으로 또 슬금슬금 입술을 붙이려 하기에 손끝으로 콧등을 톡 건드리며 거절했다. 이번엔 순순히 물러난 이주의 귀에 인터폰 알람이 울렸다. 출근 시간에 맞춰 도착한 기사의 호출이었다. 이주는 짧은 한숨을 쉬며 현관으로 향했다.

연인을 두고 출근하기 싫은 마음은 어찌 이리 매일매일 똑같을까.

현관 행거에 걸려있던 흰 코트를 팔에 걸자 효운이 커피를 든 채 다가왔다. 통화는 끝난 모양이다. 이주는 효운의 배웅을 반기며 물었다.


“저 어때요?”

“예뻐, 예뻐. 어서 나가. 기사가 기다리잖아”


원하는 대답을 얻어낸 이주가 구두를 신고 현관을 나설 준비를 했다. 그리곤 효운의 뺨에 입술을 가까이 붙이곤 속삭였다.


“저도 이따 갈게요 전시.”

“네 퇴근 시간보다 갤러리 폐장 시간이 빨라.”

“적당히 튀죠 뭐.”


퇴근하기도 전에 사라진 대표 자리를 보고 절망하는 비서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착한 비서를 너무 괴롭히지 말라고 말했지만 이주는 대답 없이 씩 웃었다. 음흉하기도 하지. 이게 뭐가 예쁘다고. 계속 붙어 있으려고 수를 쓰는 이주는 정말 물리적인 힘으로 등을 밀고 나서야 현관을 나섰다. 

도어록이 닫히는 전자음을 뒤로하고 효운은 가운을 벗으며 욕실로 향했다. 길게 기른 머리카락이 등을 간지럽혔다. 슬슬 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


.


“오셨습니까.”

“예.”


기사가 열어준 세단의 문은 자동으로 닫혔다. 너른 뒷좌석에 앉아 오만하게 다리를 꼰 남성은 결제 탭이 가득 찬 태블릿 기기의 화면을 무심한 얼굴로 훑었다. 회사의 주가 상승도 계열사의 이슈도 요란한 국제 뉴스도 그 무엇 하나도 이주의 관심을 끌 수 없었다. 차창밖에 펼쳐진 아름다운 설경에도 웃음은 나오지않았다. 날씨가 좋다는 기사의 말에 입만 웃는다. 어차피 이주는 감성회로가 제대로 망가졌다. 효운의 곁에 있을 때만 진심으로 웃을수있다. 

아, 일하기싫다.

어차피 곧 회사에 도착할 테고 빨리 처리할 일도 없으니 다시 옆 좌석에 태블릿을 던졌다. 부드럽게 핸들을 돌리던 기사가 기다렸단 듯 입을 열었다.


“오늘은 영하 12도까지 내려간다고 합니다.”

“그래요?”


효운이 든든히 입고 나가야 할 텐데.


“옷을 골라놓고 나올걸...”


걱정이 중얼중얼 흘러나왔다. 여러 옷을 겹겹이 입는 걸 싫어하니 분명 셔츠차림에 코트 하나만 덜렁 걸칠 텐데. 더 따뜻하고 좋은 코트를 맞춰 놔달라고 테일러에게 연락을 넣어둘까. 이번에 비서가 새로 소개한 테일러의 솜씨와 취향이 마음에 들어, 이주는 올겨울 셔츠를 비롯한 효운의 정장과 코트를 그의 사이즈에 맞춰 30벌정도를 맞춤주문했다. 물론 효운은 겨울이 채 되지도 않은 시기에 집으로 쏟아져들어온 겨울옷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엔 이주의 옷을 같이 맞추겠다고 동행했다. 기분 좋았던 데이트의 기억이다.

자신의 옷 디자인과 원단을 진지하게 골라주던 연인의 생각을 하니 다시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효운한정으로 이주는 아주 쉬운 인간이다. 

갤러리의 폐장 시간은 8시니까. 너무 늦어지기 전에 같이 집으로 와야지. 깊숙한 주차장을 벗어난 차창에 햇빛이 들어왔다. 이주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창 너머로 효운과 자신의 집이 보인다. 

첫 만남부터 지금. 동거에 이르기까지 6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교수이자 동양화가인 그를 대학 시절 우연히 만났다. 수업을 듣는 두 시간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찾았다.’는 세 글자만 선명하게 떠올랐다. 하여 이주는 그에게 다가갔다. 숙명을 마주친 사람처럼, 마음의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접근조차 허락하지 않는 남자에게 천천히 시간을 들여 스며들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는 이상하리만치 자신을 피했다. 처음엔 경멸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심했다. 결코 이 만남을 바라지 않았다는 듯. 처음 만나는 사이인데도, 다신 만나선 안 될 사이였다는 듯 자신을 무시하고 피했다.

하지만 자신도 그만큼 이상했다.

아무리 사랑을 퍼부어대도 일절의 마음도 주지 않으며, 조금의 틈조차 보이지 않는 남자인데 결코 떨어질 수 없었다. 잠시나마 그에 대한 생각을 지우려고 해보면 죽을 듯 가슴이 뛰었다. 지독한 병에 걸린 기분이었다. 두 해 전 그가 자신을 피해 다른 나라로 떠났을 땐 아무 일도 손에 잡지 못한 채 그의 행적만을 집요하게 쫓았다. 덧붙이자면 그를 찾는 내내, 매일을 울었다.

결국 해외생활을 반년도 채우지 못한 채 한국에 돌아온 효운은 급한 연락을 받고 서울의 한 병원으로 향했다. 망설이며 병실문을 열고, 흰 침대에 눈을 감고 누워있는 이주의 수척한 모습에 결국 마음을 꺾었다. 창백한 빛을 내는 병실 침대와 그만큼 창백한 이주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효운 역시 죽고 싶단 표정이었다. 참담해보였다.지독한 병에 걸려있는 사람은 저 혼자가 아니었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피하지 못했어. 결국 이렇게 됐어. 뜻 모를 말만 계속하는 효운의 등을 시간을 들여 끌어안고 얼렀다. 그렇게 겨우 연인이 되었다. 겨우 연결되었고, 겨우 허락 받았다.

어릴 적부터 늘 무언가가 허전했다.

태어날 때부터 모자란 게 집안. 형제 많은 집의 셋째. 손윗사람에게도 손아랫사람에게도 사랑받는 차남. 금실 좋은 부모님 역시 늘 다정했다. 펑하고 터질 만큼 충족한 환경. 그럼에도 그는 이상하게 외로웠다. 밤이 되어 침대에 홀로 누우면 사늘한 바람이 휑하니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자꾸 침대 양옆의 허전한 공간을 뒤적거렸다. 나에겐 무언가가 빠져있어. 백 개의 퍼즐이든 천개의 퍼즐이든 꼭 마지막 가운데 맞춰야 할 한 조각이 모자랐다. 

하지만 효운과 만나고 이어지니 모자람은 바로 채워졌다. 희게 비어있는 퍼즐판 한가운데의 단 한 조각. 다신 빠지지 않을 것이고 다신 비워지게 하지 않을 거라 여기며 소중히 여겼다. 너무 슬퍼 눈물이 나던 꿈도 이젠 그리 가슴 아프게 여겨지지 않았다.


하얀 눈이 수북이 쌓인 산. 아주 작은 자신의 발. 유유히 하늘을 나는 검은 새. 흰 달이 뜬 흐린 하늘. 비틀거리는 손을 꽉 잡아주는 체온 낮고 큰 손가락...

그 하나하나가 더해진 아득한 꿈은 뜻 모를 애틋함만 남기며, 몇 년의 시간을 보내도 이주의 수면을 점령하고 있다.


“대표님, 도착했습니다.”


불쑥 들려온 기사의 말에 이주는 정신을 차렸다. 벌써 회사 정문 앞이었다. 창턱에 턱을 괴고 옛 생각에 빠져있었더니 목이 무척 뻐근했다. 옆 좌석의 태블릿을 한손에 들고 뚝 소리를 내며 고개를 꺾은 이주가 묵직한 차에서 내리며 아차, 중얼거렸다.


“이거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당장은 시원하겠지만 오히려 목에 안 좋으니 소리 내서 꺾지 말라고. 안 그런척하면서도 늘 이주의 건강을 걱정하는 효운의 말이었다. 말 잘 들어야 예쁨을 받지. 딱딱하게 굳어있던 얼굴이 효운의 말을 생각하자 부드럽게 풀렸다. 흰 코트를 입은 재색겸비의 젊은 대표가 유유한 걸음으로 로비로 들어서자 출근하던 이들 모두가 아침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쏟아지는 인사 속을 가로질러 고층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한 이주가 그들에게 답했다. 다정한, 아니 다정한 척 하는 가면을 쓰고


“예, 모두 좋은 아침입니다.”


꼭 일찍 퇴근해야지. 생각을 하며.




.




새까맣게 어둑해진 밤하늘 아래, 이주는 보기 드물게 욕지거리를 하며 갤러리 입구에 들어섰다. 늦었다. 손목의 시계를 보니 갤러리 폐장 시간으로부터 한참이 지나있었다. 찰칵 찰칵 멈추지 않는 초침소리에 유난히 거슬렸다.


“하아...”


전속력으로 뛰었더니 몸에 열이 오르고 동시에 짜증이 치밀었다. 코트를 벗어 팔에 걸며 몇 걸음을 더 걸어봤지만 갤러리의 유리문은 굳게 닫혀있다. 내부의 불은 아직 켜져 있지만 안쪽 문에는 자물쇠가 이중으로 걸려있고. 현관 자동문의 감지 센서도 검게 꺼져있다. 이주는 출입을 허가하지 않는 자동문에 이마를 대며 짜증 섞인 한숨을 쉬었다. 깨끗한 유리에 한숨이 하얗게 달라붙었다.


일찍 올 수 있었는데. 조금 더 빨리 끝낼 수 있었는데...

앞에 있는 차들을 박을 수는 없지 않냐고 우는 기사를 협박하다가, 결국 차에서 내려 여기까지 뛰어왔는데. 결국 늦었다. 팔에 걸려있던 코트가 돌바닥 위로 흘러내렸다. 그러든 말든, 이주는 제 한심함을 자책하며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쉬었다.


“왜 한숨이야.”


튕겨지듯 문에서 떨어진 이주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보았고 그곳엔 효운이 서 있었다. 흰 셔츠에 연한 회색 바지를 받쳐 입은 그의 입가 끝에선 빨간 담뱃불이 흔들렸다. 이주는 빠른 걸음으로 가까이 가 팔에 걸고 있던 코트를 그의 어깨에 걸쳤다. 몸이 가까이 붙고 흔들리자 이주에게 담뱃불이 붙을 것 같아 효운은 팔을 조금 들어 올렸다. 말없이 입을 꾹 다물고 속상하단 표정을 짓고 있자 효운이 피식 힘 빠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나온 거야.”

“잠깐 나오는 시간에도 챙겨 입고 다니시면 좋겠어요.”


“추위 안 타는 거 알잖아.”

“담배도 끊었으면 좋겠는데요.”


우물거리는 목소리에 효운은 담배 한 모금을 빨아들였다.


“네가 내 시간을 갑자기 비워버렸잖아. 이 정도는 봐줘.”


이주는 대답하지 못했다. 육지를 박찬 다리 때문에 크게 뛰던 심장이 점차 제 박동을 찾아갔다. 숨도 점점 완만하고 고르게 변했다.


“이미 늦었는데 왜 뛰어, 위험하게.”

“늦어서 죄송해요. 전시 꼭 보고 싶었는데...”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는가. 약속 시간에 늦은 이유 역시 묻지 않아도 된다. 대체 왜 늦었냐, 지금 시간이 몇 시냐, 왜 약속을 어기냐. 그런 왈가왈부한 언쟁은 두 사람 사이에선 불필요한 요소다. 회사 대표는 결코 한가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주는 분명 제 시간이 오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지금 이렇게 전속력으로 뛰어온 것처럼.

효운은 바지 주머니에서 꺼낸 휴대용 재떨이에 담뱃불을 뭉개곤 그 안에 필터를 던져 넣었다.


“이쪽으로 와.”


덤덤한 목소리로 말하며 돌아선 효운의 머리카락에선 싸한 담배 냄새 섞인 비누향이 났다. 아침에 갈라져 있던 목은 다행히 회복한 모양이다. 이주는 흰 이마에 맺힌 땀을 살짝 닦아내며 얌전히 효운을 뒤따랐다. 포마드를 발라 말끔히 빗어 올렸던 머리도 많이 흐트러져 있었다. 효운이 이주를 안내한 곳은 갤러리의 뒷문. 큐레이터와 청소부 등 갤러리 스탭들이 오가고 전시작을 반입하는 용도의 문이다. 앞서서 문을 연 효운을 따라 갤러리 안으로 들어가자 전열기의 온풍이 훅 밀려들었다. 사람 하나 남지 않은 채 전시용 조명과 난방만 켜져 있는 갤러리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봐도 되나요?”


효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한명의 마지막 손님인 이주를 위해 효운이 폐장을 막았다. 작가가 자기 전시 막겠다는데 어쩌겠는가, 난처한 얼굴을 하던 스탭들은 다 퇴근하고 효운이 혼자 남아 이주를 기다렸다. 효운은 문 근처에 있던 접이식 의자를 펼쳐 앉으며 이주에게 말했다.


“난 여기 있을 테니 보고 와.”

“...천천히 봐도 돼요?”

“오래 볼 거 못 돼. 빨리 봐.”


효운은 유명세에 비해 너무 겸손을 차린다. 작품을 극찬해도 그게 어디가 좋냐는 얼굴만 돌아온다. 뉴스에 실려도, 신문의 몇 칸을 차지해도, 미국의 큰 미술관에 그림이 걸려도. 그는 늘 자신의 그림에 불만을 가진 듯 보였다. 이유를 물어도 마음처럼 안 나온다고, 아직 멀었다는 대답만 돌아온다.

두 사람의 집 가까이에 마련한 아뜰리에에 이주는 출입금지를 당했다.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도 그는 아뜰리에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림이 마음처럼 그려지지 않는 시기가 오면 효운은 며칠이고 아뜰리에에서 나오지 않기도 했다. 그럴 때의 이주는 애타게 기다릴 수밖에 없다.

효운이 작업하는 모습은 대학 시절 단 한번 보았다. 겨우 허락을 받아 들어가 몰래 숨죽여서 보았던 그의 그림은 아름다웠다. 시간이 묻어나는 앞치마도, 칠흑에 잠긴 붓을 들고 있는 모습도, 먹 때문에 검게 물든 손가락 끝도, 그 끝에서 흘러 나와 백지를 채우는 선도 모든 게 수려했다.


기다리겠다는 효운을 남겨놓은 이주는 잠긴 정문으로 돌아가 첫 작품부터 감상을 시작했다. 미술에 대한 일가견은 없는 편이지만 그가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의 감정이기도 하고 감상이기도 한 그림들을 보던 이주는 바닥에 표시된 동선을 따라 걸으며 천천히 그림들을 보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진정시켰던 가슴이 묘한 설렘으로 술렁였다. 이 선과 모양들이 효운의 손끝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보니 작품 하나하나가 모두 사랑스럽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효운은 전시를 자주 하지 않는다. 그러니 오래도록, 계속 기억할 수 있도록 공을 들여 봐야 한다. 딱딱한 접이식 의자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효운이 걱정되었지만, 앞으로도 아주 가끔만 찾아올 이 시간을 놓칠 순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전시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 앞에 선 이주는 아주 잠시 동요하더니 얼음처럼 얼어붙었다. 전시작 중 가장 크고, 유일하게 색을 쓴 작품. 가로로 길게 걸린 작품의 길이는 이주가 양팔을 벌려도 양 끝에 손이 닿지 않을 만큼 컸고 높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주가 몇걸음을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아야 그 끝이 보였다. 전시의 피날레인 이 그림을 본 사람들 모두 경탄하며 아름답다, 크다, 수려하다, 멋지다, 입을 벌렸겠지만 이주만큼은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


그림의 배경은 산이다. 녹지 않는 만년설처럼 새하얀 눈이 수북이 쌓인 산에는 바싹 마른 나무의 긴 가지들이 눈을 이겨내고 드문드문 솟아있다. 넋이 나갈 정도로 크고 흰 설산의 산등성이를 따라 시선을 옮기다 보면 어느새 그 산 귀퉁이에 조그맣게 틀어진 작은 초가가 눈에 들어온다. 아무도 살지 않을 것 같은 산. 하지만 사람이 살고 있다는 흔적이 선명하다. 초가에서 눈을 떼 산 위를 올려다본 이주의 검은 눈동자가 겨울바람을 맞은 마른 낙엽처럼 부산스럽게 흔들렸다.


단 하나의 존재를 위하여 남겨둔 하늘. 그 가운데를 길게 날고 있는 한 마리의 검은 매. 꽁지깃에 붙어있는 채도 강한 푸른색이 무례하게 눈을 찌르고 들어와 심장을 난자했다. 난생처음 본, 하지만 너무나 그리웠던 푸름. 이주의 밤을 몇 년이고 잡아먹고 있던 그 꿈이 벌컥 문을 열고 내려다본 창밖의 풍경처럼 펼쳐져 있다. 이주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떼어보았다가. 다물었다가. 그 행동을 몇 번이나 반복하다가 겨우겨우 말을 꺼냈다.


“이럴 줄 알았어.”


그 후의 말은 둑이 무너진 강물처럼 흘러나왔다.


“꿈이 아닐 줄 알았어...”


이주는 뒤를 돌아보았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효운이 자신의 백색 코트를 걸친 채 서 있었다.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가라앉은 눈으로 이주를 보고 있다. 무언가 모자라던 자신의 그림은 이주가 들어서니 비로소 완성되었다. 효운은 그동안 무시하려 애쓰던 사실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효운의 눈가는 뜨거워지는 동안, 이주의 눈에는 이미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큰 눈물이 맺혀있었다.


“역시 아니잖아요.”

“...그래.”


들릴 듯 말 듯 작은 효운의 대답에 결국 눈물이 떨어졌다.


“꿈 아니잖아요.”


서럽게 트인 눈물은 뺨에 흐르지도 못하고 한 방울 한 방울 툭툭 떨어져 옷 위에만 흔적을 남겼다.


“대체 뭐예요?”

“......”

“알려주세요. 제발.”


제발, 이라는 마지막 말은 이주가 코트 째로 효운을 와락 끌어안는 탓에 아주 흐릿하게 들렸다. 이주는 마치 효운이 이별을 고하기라도 한 듯 눈물을 흘리며 그의 몸을 속박해 끌어안았다. 효운의 어깨와 허리를 쥔 손등엔 굵은 힘줄이 돋았고 거세게 팔이 떨렸다. 기묘하게 뒤틀린 그리움. 있어선 안 되는 쓸쓸함. 영원히 돌아가지 못할 저 산이 서러웠고 다신 따뜻해지지 못할 저 작은 집이 서글펐다.


“그래, 꿈이 아니야.”


이주의 강한 힘 때문에 효운은 상체의 모든 뼈가 눌려 숨이 막혔다. 난 어디에도 가지 않아. 말해주고 싶었지만 숨이 막혀 말할 수 없었다. 쉽지 않는 숨을 천천히 쉬어보고 있자니 이주도 호흡을 고르며 힘을 조금 뺐다. 그제야 효운은 이주의 등에 한 손을 올렸다. 너른 등을 가볍게 문지른 효운은 약간의 침묵 후, 가만가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억이지.”

 

그 말을 끝으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침묵하던 이주는 느슨해졌던 팔을 효운의 허리에 다시 감았다. 효운은 이주의 어깨 위로 이마를 기댔다. 효운도 이주만큼 장신이기에, 그 목이 죄를 지은 사람처럼 푹 꺾였다. 효운의 귓가에서 조용히 숨을 쉬던 이주는 그의 등 뒤로 흘러있는 긴 머리를 천천히 빗어 내리기 시작했다. 굵고 흰 손가락이 검은 머리카락을 연거푸 그리고 애틋하게 긁어내리는 감각에 얕은 소름이 돋았다.

한겨울 캄캄한 어둠 속 유일하게 불을 밝힌 갤러리. 별도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 다시 쏟아지기 시작한 눈송이는 갤러리 불빛에 잠시 반짝이곤 떨어지길 반복한다. 함박눈 속에 남은 연인은 그렇게 한참 동안 눈을 감은 채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지 않으며. 기억하며.

아주 오래도록.










 안녕하세요 미울입니다. 새해를 맞아 그동안 써보고 싶었던 주효록 현대버전 if 외전을 써보았습니다. 이 외전은 주효록을 사랑해주신 분들께 제가 드리는 새해 선물로. 본편과 상관없는 정말 순수한 if 세계관이기 때문에 무겁지 않게, 그리고 즐겁게만 봐주세요. 

멋진 삽화를 그려주신 어피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 넙죽 드리며,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모두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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