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Cat

W. Hathor


♬ Batshit – SOFI TUKKER



※ 워딩 주의.





나 솔직히 이런 식의 삼자대면은 전혀 예상을 못 했는데 말야.



“그니까 둘이 사귀는 거 아니라며.”


“저기 범생아, 미리 말해 두는데 난 너네 사랑놀음에 낄 생각이 정말 추호도 없어.”


“야 미친 니네 둘 다 차 빼.”



아침부터 아주 별난 광경을 다 보겠네.



8:00 AM. 보통 때라면 이 시간엔 대문 앞에 영호의 차가 주차되어 있어야 했다. 아몬드 크런치 넣은 그릭 요거트까지 야무지게 테이크 아웃해서는 빨리 안 튀어냐고 여유롭게 잔소리를 해대면서 시동을 거는 서영호가 있겠지.



그래, 원래라면 그랬어야 했거든? 그런데 어쩐지 오늘은 느닷없이 못 보던... 아니지, 낯익은 세단 한 대가 원래 영호의 차가 있어야 할 자리에 떡하니 파킹 되어있는 거다. 그리고 척 보기에도 그거 때문에 성이 난 듯, 서영호는 제 차를 그 불청객인 세단 앞머리에 금방이라도 처박아 넣을 듯이 마주 보고 댄 채 반대편 차 운전석에 앉은 상대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고. 이 정신 나간 두 차주들이 서로 으르렁대듯 클랙슨을 빵빵 울려 대는 사이 이미 동네 주민들은 이게 대체 무슨 광경인가 싶어 구경을 하러 나와있었다. 앞집의 성격 고약한 Mr. Aiger는 새는 틀니 발음으로 911에 전화해 이 모든 상황을 줄줄이 브리핑하고 있었고, 뭐랄까 그야말로... 아주 가관이었다.



원래 같았으면 모든 게 평온했어야 할 월요일 집 앞 현관 밖에서 존재감 뿜뿜인 클랙슨 소리가 아주 난리도 아니길래 대체 어느 정신 나간 집인가 혀를 끌끌 차며 나와봤더니, 아니 글쎄 그게 다른 집도 아니고 우리 집 앞이더라고. 이민형, 서영호 이 유딩들아.



“남에 집 앞에서 뭐 하세요들? 니네가 무슨 다섯 살짜리야 뭐야? 아, 혹시 내 동생이랑 친구 먹고 싶니? 지금 안에서 양말 신고 유치원 갈 준비하고 있는데 정식으로 소개 한번 시켜 줘?”


“아니 저 너드 새끼가 먼저...! I mean, this space actually has been my private parking lot, but look at that, huh?”

아니 저 너드 새끼가 먼저...! 그러니까 내 말은, 여기 원래부터 내 전용 주차공간이었잖아, 근데 쟤 지금 하는 짓 좀 봐봐, 어?


“Dude, do you think you own this place? If you think of it like that, this space is ‘actually’ owned by her parents, isn’t it?”

야, 여기 전세 냈어? 엄밀히 전세로 따지면 이집 주인은 얘네 부모님인데 여기 네 전용공간 같은 게 어딨어.



지금 니네 나 사이에 두고 운전대 앉아서 멀찍이서 서로 소리나 빽빽 지르고 있는 거니?



“See? 쟤 저렇게 막무가내로 구는 거 봤지? 굴러 온돌이 박힌 돌 빼내려고 하네 하이고오 서러워라.”


“됐고. 이 기회에 둘이 정신 연령 비슷한 건 알게 해줘서 고맙네.”


“누가 누구랑 비슷하다는 거야...!”



불만 가득한 얼굴로 투덜대는 영호를 뒤로하고 난 이 상황을 만들어낸 장본인에게 다가갔다.



“이민형.”


“Hey.”

안녕.


“네가 설명해. 아침부터 시비 걸러 온 게 목적은 아닐 거잖아.”


“왜 왔겠어, 당연히 너 데리고 학교 가려고 왔지.”



동요도 없이 태연하게도 저런 소리를 늘어놓는 마크의 말에 영호는 기가 차서 Dude, 모르나 본데, 얘 나랑 등교 메이트야. 네가 뉴욕에서부터 얘랑 불알친구였는지는 몰라도 LA 메이트는 난데, 이런 식으로 매너 없게 굴면 곤란하지. 따위를 떠들어 댔다. 그런 그 모습을 힐끗 보다 다시 제가 앉은 운전석 등받이에 상체를 죽 기대며 다시 나를 올려다본 마크가 말했다.



“You pick one, Chl.”

클로이, 네가 정해.


“아니 정하긴 뭘 정해...? 진짜 애새끼들이냐고 너네. 야 쩌어기 앞에 할아버지 열받아서 전화하시는 거 보여? 빨리 차 안 빼면 진짜 경찰 보게 되는 수가 있어.”


“우리 아직 할 얘기 남았잖아. And we have a lot of things to explain to each other, don’t we?”

우리 아직 할 얘기 남았잖아. 서로 해명할 것도 많고, 안 그래?



지난주 학교 복도에서 저를 붙잡던 내 말투를 그대로 따라 하는 마크에 난 그대로 입이 다물렸다. 영호는 더 불같이 성을 내며 차에서 얼굴만 빼꼼 내민 채 버럭 소리를 질러 댔고.



“얘기? 뭔 얘기! 왜 나만 빼고 니네만 알아! 설명해 김여주, 아 빨리! 둘이 거기서 뭘 그렇게 쑥덕대는데?!”


“나중에 따로 만나서 얘기하고 일단 차부터 빼. 그리고 너 없는 동안 내내 영호랑 등교했는데 너랑 등교하면 애들이 어떻게 보겠냐? 그래 솔직히 그날, 레지나랑 복도에서 너 놔두고 오피셜 하게 떠들면서 내기까지 한 건 미안한데, 어쨌든 애들도 그거 다 봤고, 만약에 네 차 타고 들어가면 걔들이 진짜로 내가 너 꼬셔서 먹다 버리려는 걸로 볼 거 아냐. 전교생 앞에서 호구 잡힌 새끼로 보이고 싶은 거 아니지?”



애써 영호가 보지 않게 한 걸음 옮겨 마크의 얼굴을 내 등으로 가린 후에 조용히 말했다. 마크는 여전히 내가 제 차에 타기 전엔 주차장에서 조금도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슬슬 출발해야 할 것 같은 시간인 데다,



“Literally, I don’t care. 오늘은 날 그냥 호구 같은 그런 남자 애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해. 너 원래 한번 가지고 놀고 버리는 거 잘하잖아.”



이렇게까지 말하는 애를 무슨 수로 말려.



“Oh, I agree.”

어, 야 그건 동의. ㅇㅇ.


“뭐 이 자식아?”



얄밉게 등 뒤에서 말하는 영호가 어이없어 한 번 흘겨보다, 어쩐지 쟤를 설득하는 게 더 빠르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 그냥 마크의 차를 타기로 했다.



“야, 미쳤어? 너 지금 그 차 타는 거야? 야! 야...!”


“아 오늘은 그냥 얘랑 갈게. 얘가 좀 또라이라 그래. 네가 이해해.”



대놓고 서운한 표정의 영호가 제 차 문을 발로 박차고 나오는 걸 보고 난 서둘러 마크에게 시동을 걸라는 손짓을 했다.



“나중에 얘기해. 일단 등교는 해야 될 거 아냐. 이 미친놈이랑 꿰여서 지각까지 하고 싶냐?”



그리고 시동을 걸기 시작한 마크가 영호 쪽을 한 번 쓱 약 올리듯 보며 웃는 게 보였다.



“아니, 야! 야 차 세워봐! 야...!”



그렇게 영호의 어이없음+당황 콤보인 목소리가 애처롭게 들리는 것을 뒤로하고 마크는 엑셀에 제 발 무게를 실었다. 진땀을 빼며 영호에게 해명하는 문자를 보내는 나와는 달리 여유 넘치게 오디오의 음악소리를 따라 콧노래 따위를 흥얼거리는 마크였다. 듣다 보니 예전에 같이 듣던 저스틴 비버 노래다. 이런 거 보면 영락없는 초딩 적 이마크인데 참... 교복 입고 차 모는 게 이렇게까지 이질적인 애는 처음 보네. 매일 영호가 그러는 거 보는 건 안 어색했는데. 교복 셔츠 단추를 제 목까지 꼭꼭 채워 단정하게 입고는 운전대를 잡고 능숙하게 코너링을 하는 마크의 모습을 홀린 듯 보다가도 당장 내일 아침부터 이 짓을 또 해야 할 생각이 드니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야, 너 앞으로 맨날 우리 집 올 거야?”


“그러길 원해?”


“서영호 저거 오늘 잠깐 물러난 거지 쟤도 한 고집해, 너만 고집 센 거 아니라고. 아침마다 머리 아프게 입씨름하고 싶지 않은데 나는. 그리고 요 며칠은 엄마나 Charlie나 집에 없어서 다행이었지 난 두 분한테 아침마다 그 꼴 보여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어.”


“새아빠 이름이 Charlie야? 언제 한번 소개해 줄 거지?”


“말 돌리지 말고. 그리고 찰리는 그냥 찰리지 누가 아빠야. 엄마 남편이라고 꼭 우리 아빠는 아니잖아.”



마크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슬쩍 내 쪽으로 흘끔 곁눈질을 하더니 이내, 아버진 잘 계셔? 한다. 참 빨리도 물어본다.



“아빤 그럭저럭 잘 지내. 작년에 여자친구 사진 보내줬는데, 행복한가 보더라.”


“아까 얘기한 동생은,”


“아, 나 동생 생겼어. 찰리랑 엄마 딸이고, 7월 지나면 다섯 살.”



그런 내 말에 또 눈치를 보며 마크가 또 흘끔 댔다. 주말에 만나서는 사람 당황스럽게 만드는 말을 따박따박 잘도 하더니 이런 건 면역이 없는 건지 티 나게 어색하게 군다.



“야. 작작 쳐다봐. 그날 그렇게 얘기한 건 내가 좀 흥분했어서 그랬고, 지금은 상처받고 그런 거 없어. 우리 엄마 재혼한지 벌써 7년 차야.”


“I’m sorry.”

미안.


“됐어. 그만해.”


“뭐가 됐든 내가 다 미안해.”


“아 그만하래도. 전학 간 게 네 탓은 아니잖아. 주말에 그렇게 말했던 건... 내가 말이 좀, 과했어.”


“...”


“...”


“수업 끝나고 팬케이크 먹으러 갈까?”


“...”


“Chloe?”

클로이?


“Mark.”

마크.


“Yeah?”

어?


“You took a wrong way. Just should have turned right 1kms back.”

너 길 잘못 들었어. 방금 1킬로미터 전에 우회전했어야 했는데.



[Sorry, You’ve gone off course.]

경로를 이탈했습니다.



“Oh, shoot.”

헐.



운전대를 잡은 채 눈치를 보느라 정신이 팔렸던 마크가 내 말에 그제야 내비게이션을 내려다보더니 놀라 버튼을 이것저것 만지작댄다.



“Hey, are you sure it is the right way?”

야, 너 이 길로 가라는 거 맞아?”



그러더니 뭐가 잘 안되는지 내비랑 대화를 시도하는데, 걔랑 얘기한들 무슨 대답을 해주겠니... 보다 못해 버튼을 조작하는 마크의 손을 쳐냈다.



“야 됐어, 너 운전해. 이거 경로 다시 찍는다?”



경로 탐색 버튼을 누르는 나를 보며 우물쭈물 대는 마크가 굳이 보지 않아도 얼굴 너머로 느껴졌다.



“누가 보면 학교까지 한 시간은 걸리는 줄 알겠네.”


“...”


“근데 너 언제부터 운전했어? 학교에서 이 차 한 번도 본적 없는데.”


“나 등교할 땐 원래 버스 타.”


“뭐?”


“운전해서 등교는 처음이라...”


“...”


맙소사.



그렇게 대충 내비와 씨름을 하다 우여곡절 끝에 학교에는 잘 도착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범생이 마크 리, 이 구역의 개 인싸 클로이 킴. 참 공통점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어 보이는 요상한 한 쌍. 아니나 다를까 우리 둘이 한 프레임에 걸린 걸 눈치챈 애들이 건물 초입에서부터 뜨거운 시선들을 보낸다. 의식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 천천히 차 문을 열고 일어나려는데, 마크가 손목을 붙잡아왔다. 열이 많은 손이었다. 예전에 알던 그 체온 그대로.



“마지막 수업 AP Calculus지? 끝나고 앞으로 나와. 차 대놓을 게.”


“집에 바래다주겠다고...?”


“Why not?”

안돼?


“너 저기 서영호 드리프트 하면서 주차장 들어오는 거 안보여? 아까도 말했지만, 쟤도 진짜 보통 또라이 아니거든? 웬만하면 쟤 성질 안 긁는 게 좋을걸.”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으로 마크가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백미러 너머로 저 멀리서부터 주차장 바닥을 다 긁어 대듯이 차를 몰아 거칠게 파킹한 영호가 차 문이 부서져라 닫고 씩씩대며 걸어오는 게 보인다.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너 쟤랑 무슨 사이야?”


“그렇게 궁금했는데 안 물어보고 뭐 했냐 그동안?”


“말 돌리지 말고.”


“내가 쟤랑 무슨 사이면 어때서?”


“네가 쟤랑 무슨 사이면 안 되지.”


“그러니까 그게 왜 안되냐고.”


“...Are you really having a fling with me or something? Then why did you kiss me that day?”

...너 진심으로 나랑 엔조이 뭐 그런 거 할 생각인 거야? 그럼 그날 나한테 키스는 왜 했는데?


“뭐, 주말에 그거? 한 번 했다고 두 번은 못하겠냐? 그리고 분명히 말했지, 넌 나한테 마음 있을지 몰라도 나는 그냥 몸이 동해서 한 거라고, 그러니 오해 말라고. 너 여기 와서 내 평판 다 들었다며. 나 이제 아무나랑도 키스해, 몰랐어? 야, 쩌어기 지나가는 잘 빠진 여자애 보이지? 나 지금 당장 쟤랑도 할 수 있는데? 그래 네 말 다 맞어. 나 예전에 네가 알던 그 클로이 킴 아니야. 그리고 까놓고 말해서 먼저 키스한 건 너잖아. 가타부타 말도 없이, 네가 누군지 나한테 설명도 안 하고 말야. 너 진심 이중성 쩌는 거 알지?”


“...”


“알아들었으면 이제 이것 좀 놔줄래?”


별다른 반박은 없었다. 그런데도 나를 붙잡은 손만은 놓지 않은 채 마크의 시선이 올곧게 나를 향했다. 어딘가 마음에 안 드는 듯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고집스러운 마크의 태도에 결국 난 한숨이 절로 나왔다.



“눈 있으면 주변 좀 둘러나 봐. 겉으론 안 보는 척하면서 다들 힐끔힐끔 너만 쳐다보잖아. 내가 원래 아무나랑 키스해도 아무나랑 등교는 같이 안 하거든? 애들 눈에 딱 봐도 너 지금 나한테 호구 잡힌 애야. 말 그대로 이번 주 Chloe’s Sex Toy, 클로이 발싸개라고.”


“...”


“축하해, 너 이제 슈퍼스타야.”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뭐가?”


“다시 나 좋아하게 될까 봐, 겁나서 이러는 거잖아.”


“미쳤냐...? 내가 널 왜, 널 왜 좋아해, 내가 언제?”



아 씨, 당황한 티 너무 냈어. 이 새끼 어떻게 알았지? 귀가 뜨거워지는 게, 얘 앞에서 몇 분 더 있었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속마음이 완전히 까발려질 것만 같았다. 시선을 피하며 잡힌 팔목을 슬 비틀자 마크가 그런 내 행동을 눈치챈 건지 서둘러 덧붙인다.



“여기서 길게는 설명 못해, 슬슬 수업 들어가야 되잖아. 굳이 단편적인 것만 말하자면 왜 그... 옛날에 네가 내 스타일 아니라고 복도에서 쪽준 날 기억나? 학교에서.”


“...”


“대답해, 기억나 안 나.”


“...기억나.”


“너 내가 그날 너네 집 식탁에서 스파게티 먹으면서 좋아한다 말한 뒤부터는 계속 내 손 안 잡으려고 했잖아. 내가 먼저 잡으면 피하고, 티 나게 어색해하고.”


“야! 솔직히 그건 억지지! 그날 네가 갑자기 고백하니까 이게 웬 날벼락이냐 하고 선 그으려고 그런 거잖아...!”


“너 뒤에선 Lily Poster한테 나한테 떨어지라고 말했다며? 내 스타일 아니라고 굳이 말해가면서 애 울리기까지 해놓고 말이야, 초등학생이 아주 영악하기도 하지. 진짜로 이중성 쩌는 게 누군데 그래.”


“그게... 진짜로 널 좋아해서 그런 거겠냐? 막말로 너 그때 걔랑 잘 돼서 진짜 둘이 사귀기라도 하면 나는 누구랑 집 가냐고? 지 말고는 친구도 못 사귀게 철벽 오지게 쳐 놓고선... 근데 너, 걔 이름을 아직도 기억해?”


“이거 봐. 너 지금 까마득한 그 시절에 만난 여자애 상대로 질투하고 있잖아.”


“아니 저기요; 그게 아니라...”


“너도 솔직히 그때 나한테 마음 있던 거 맞잖아, 내가 널 몰라?”



슬슬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지 못하는 내 얼굴을 보던 마크가 이 말싸움에서 자신이 우위를 차지했다고 생각한 건지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대략 한 열두 세살 애기 적 마음을 뭐 그리 큰 애정이라 말할 수가 있겠냐 만은, 그래, 솔직히 그날 그렇게 마크의 감정을 다 알게 된 이후로 틈만 나면 얘가 내 머릿속에서 자꾸만 떠나지 않았던 건 확실히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난 원체 감정이 얼굴에 잘 드러나는 편이라, 눈치 빠른 이마크가 그걸 캐치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만은 않았을 거고.



그래도 지금은 나름 감정을 숨기는데 능숙해지긴 했다. 얼마든지 거짓말로 날름 누구든 속여먹을 수 있었다. 단지, 그 상대가 마크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눈으로 척, 귀로 척, 얜 내게서 보여지는 말투나 행동을 보고 듣기만 해도 내가 진심이다 아니다를 너무 잘 눈치챌 애니까. 내가 즐겨 먹는 음식 취향부터 성격, 어쩌면 매 순간순간의 기분까지도.



그날 팬케이크 집에서도 그래. 그동안 떨어져 있던 긴 시간이 무색하게도 나를 잘 알고 살뜰히 챙겨주는 마크의 행동이 너무도 무서우리만큼 세심해서,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는 예전 이마크 모습 그대로라서, 저 올곧은 눈앞에서 난 늘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었다. 물론 지금도.



“뭐, 지금은 그래 인정해. 남자 보는 네 취향... 참 많이도 변한 것 같다만.”


“너 내 말 좀 직통으로 알아들을 수 없냐? 나 진짜 너한테 감정 없이 키스한 거라니까? 넌 예나 지금이나 전혀 내 취향 아니거든?”


“좋아 그럼 말해봐. 바뀐 네 취향은 뭔데?”



마크의 눈앞에선 늘, 날 것 그대로의 내가 다 까발려지는 것만 같았다. 꼭 궁지에 몰린 듯한 쥐를 보는 그 시선을 피해 난 고개를 모로 돌렸다. 그러다 문득, 이쪽을 보며 휘슬을 부는 9학년 George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 아 그래, 마침 잘 됐네. 조지를 발견한 난 옳다구나 하고 재빨리 그쪽을 가리켰다.



“For instance,”

예를 들면,


“...”


“내가 원하는 건 저런 스타일이지. 너처럼 목 끝까지 단추 꽉꽉 채운 금욕적인 스타일 말고. 한마디로, 이마크 너랑 정 반대라고.”



딱 봐도 날 티 그 자체인 조지를 콕 집어 말하자 마크의 눈이 그쪽을 따라간다. 한눈에 봐도 마크와는 정 반대로 헐렁한 교복을 대충 걸친 채 단추는 어디다 뜯어 버린 건지 제 쇄골을 훤히 드러내고 있는 조지가 나와 눈을 마주치자 이제는 윙크까지 날리며 플러팅을 해댄다.



“그래?”



그쪽을 향해 웃으며 응해주는 내가 영 못마땅한 지 마크가 돌연 내 고개를 제 쪽으로 돌려 보게 한다.



“너 지금 뭐 하는...”



그리고는 눈을 마주친 그대로 제 교복 타이를 잡아당겨 느슨하게 한 뒤, 그대로 셔츠의 단추를 두어 개 정도 푸는데,



“No big deal. 내가 맞춰가지 뭐.”



이 새끼 진짜... 2차 성징 올 때 뭐 이상한 거 잘 못 먹은 거 맞는데?







Taming The Cat







“야 넌 애가 조심성이 없냐 좀.”


“뭐가.”



와 오늘 물리 개 노잼. 영호가 한숨을 내쉬며 내 셔츠를 여며준다. 아직 목에 남아있을 마크가 만든 키스마크가 훤히 드러나는 게 꼴 보기 싫었는지 그걸 가려주는 모양새였다. 우리 영호 스윗하네, 아주 몸에 매너가 박혀 있어 그냥. 셔츠 깃을 꼼꼼히 세워주는 그 손을 내려다보다, 야, 너 요즘 만나는 애 없냐. 물으니 심드렁한 목소리로 연애 귀찮아. 란다.



“역시 게이지 너.”


“아 아니라니까 그러네!!!”



아 깜짝이야. 그 소리가 꽤 컸는지 앞에서 열띤 강의를 하던 Ms. Smith는 말을 멈추고 코 끝의 안경을 치켜 올리며 이쪽을 흘긋 째려본다.



“야, 너 그렇게 흥분하는 게 더 게이 같애. 걱정 마, 네가 원하지 않는 한 내가 반드시 네 아웃팅 지켜준다. 누나 믿지?”



영호는 더 할 말이 안 나온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혹시 학교에 너랑 내 사이 보고 오해하는 애들도 있을까?”


“뭐가, 또 우리 절교했다고 누가 소문이라도 냈어?”


“아니 그냥 혹시나... 너랑 나랑 사귀는지 오해하는 애들이 있을까 궁금해서.”


“어떤 멍청이가 그런 오해를 해. 이 학교 다니면 다 이 동네 애들일 텐데.”


“역시 그렇지?”


“그리고 혹시나 지구상에 여자가 암만 너만 남았대도 너랑은 안자.”


“Oh, that makes two of us.”

어, 이하 동문임.


“재수 없게 그딴 소리는 왜 해.”


“존나 어이 털리네... 나도 재수 없어 새꺄.”


“혹시 마이클인지 맥슨지 그 범생이가 그래?”


“아 마크라고 멍청아.”


“Whatever.”

어쩌라고.


“매너 하고는.”


“지금 자기소개해?”


“Fuck you.”

좆 까.


“근데 솔직히... 이제 상관없는 거잖아. 오스틴이랑 깬지 일주일은 넘지 않았냐? 그 정도면 꽤 예의 차린 거야 너.”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너 범생이 걔랑 뭐 있는 거 아니었어?”


“Are you insane...? 있기는 뭐가 있어, 우리 그런 거 아냐.”


“Did you just say ‘우리’?”

너 방금 ‘우리’라 그랬냐?


“아...! 걔랑 나랑 그런 사이 아니라고...”


“넌 몰라도 걘 진심인 거 같던데. 오늘 아침에 걔 진짜 살벌했어. 나한테 대뜸, 너한테 정말로 마음 있는 거 아니면 주변에서 알짱대지 말라 그랬다고. 서로 오래 떨어져 있던 만큼 풀 오해도 많고, 정리해야 할 얘기도 많으니까 방해 말라고. 행여나 친구인 척하면서 가볍게 접근할 생각인 거면 경고하는데 엄두도 내지 말라고. 미친 새끼... 접근은 무슨 접근? 짚어도 한참은 잘못 짚었으면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너랑? 진짜 올해 들어와 들은 개소리 중에 가장 참다운 개소리다.”


“걔가 그런 얘기를 했다고?”


“그렇다니까.”


“...”


“너 진짜 걔랑 뭐 없어?”


“있기는 개뿔.”


“그럼 취향도 아닌 애랑 데이트는 대체 왜 했는데? 말 그대로 먹고 버리는 애였음, 등교는 왜 같이 해? 너, 자는 애랑은 학교에서 티 내고 그러는 거 죽어도 싫어하잖아.”


“아 걔랑 안 잤어!”


“그럼 대체 둘이 뭐야? 그런 거 아니면서 왜 안 하던 짓을 해? 너 혹시 아직도 오스틴 신경 쓰이냐?”


“...그런 거 아냐.”


“오스틴이랑 사귈 땐 제법 진중하더라니.”


“아 진짜 아니래도오...”


“아니긴, 목소리 기어들어가는 거 봐라.”



솔직히, 19살이 돼서 나타난 으른 이마크한테 끌리는 감정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그날 키스에, 작은 터치에, 데이트 한 번에 갑자기 마음이 호로록 동해버렸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걔 앞에서 백 퍼센트 태연하게 행동할 수 없는 건 사실이었고. 그 눈빛에 자꾸만 기분이 묘해지는 걸 나 스스로도 눈치를 못 챈 게 이상할 정도라.



근데 내 마음이 아직 다 정리가 안됐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영호 말이 맞다. 난 아직, 오스틴 무어에게서 미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진짜 많이 좋아했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지금 마음에 누굴 새로 들이고 말고 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그게 이마크든, 다른 어느 누구든.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물밀듯 싹 쓸어 없어질 수 있겠어. 저렇게 쓰레기 짓 하는 꼬라지를 보고도 좋아 죽겠는데. 강의실 문 쪽 끝자리에서 오스틴과 레지나가 사이좋게 앉아 그 자리에서 금방이라도 텐트 칠 기세로 쪽쪽대며 붙어먹는 게 눈에 들어왔다. 넌 전 여친이랑 같은 수업 듣는 공간에서 새 여친이랑 잘도 그럴 수 있나 보다 나쁜 새끼야.



“신경 쓰는 거 맞네 뭐.”


“...”



피해 다니기엔 겹치는 수업이 너무 많았다. 과목 선택할 때만 해도 이렇게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될 줄 예상도 못 했다고... 보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홀려들 것 같은 저 웃음을, 이제는 내가 아닌 다른 기집애한테, 것도 원수 같은 애한테 흘리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금방이라도 속이 뒤틀려 미칠 지경이었다. 진짜 나 쟤 앞으로 어떻게 보지.



마음 같아서는 미친 척 자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라 오전 내내 뒤숭숭했는데, 잠시 심란한 그 틈을 주지 않는 어느 누구 덕에, 그런 생각들조차 훌훌 날아가 버렸다. 그게 누구냐고?



“아... 진심 오바야.”



누구긴 누구야. 존나 폭풍의 전학생 이마크지.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며 내 꼬붕 마냥 설치는 얘 덕분에 난 금세 또 다른 의미로 심란해지기 시작했다.



하여간 그때 복도에서 냅다 첩보영화 찍은 날부터 벌써 싹수가 보였어 이 너드 새끼는. 정말로 전교생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춰지는지, 지 평판이 어떻게 되든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건지, 내가 제 눈에 띌 때마다 다가와 살뜰하게 에스코트를 해대는 통에 도리어 부끄러워지는 건 내 쪽이었다. 만나는 수업마다 자연스럽게 옆에 와 앉지를 않나_덕분에 영호는 씩씩대며 뒷자리로 밀려나야 했다_시도 때도 없이 둘 간에 chemical한 무드를 만들어 내질 않나... 무슨 여왕님 대하듯이 손수 의자까지 빼 주는 걸 보고 난 후부터는 난 그대로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아, 아침에 금욕적인 건 결코 취향이 아니라는 내 말이 상당히 인상 깊었는지, 오후 내내 셔츠의 단추 두 개는 훤히 풀려 있는 채였다. 쪽팔려 죽겠으니 제발 그만하라고 사정 사정을 해도 소용 없었다. 어떻게든 나랑 뭐 하나는 엮여보겠다고 기를 쓰고 저러는데 저걸 누가 말려. 정말 제가 무슨 내 남자친구라도 된 것 마냥 막무가내로 굴었다. 진짜 환장도 이런 대 환장이 없지. 애기 땐 공부에 관심도 없던 애가 갑자기 범생이가 돼서 나타난 건 이 끈질긴 성격이 한몫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야, 저기 네 친구들 기다리는데 그냥 너 저기 가서 밥 먹음 안되냐? 네 범생이 친구들이 나 죽어라 노려보는데?”



심지어 영호가 없는 틈을 타 점심을 같이 먹자고 와서는 오늘 식단을 훑으며 내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음식들을 꼼꼼히도 걸러내고 있는 중이었다. 진심 밥 먹기도 전에 체할 거 같네.



“너 혼자 먹잖아 그럼.”


“아니이... 영호 시합 있는 날은 나 원래 혼자도 잘 먹어, 왜 이러냐 진짜아?”


“우리 저기 앉을까?”



그런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식판 두 개를 양손에 야무지게 들고는 턱짓으로 저 끝 자리를 가리키는 마크였다. 그리고 무슨 자리를 콕 찝어도 거기를 찝니 너는... 하필이면 가리킨 자리가 오스틴-레지나 커플이 앉은 그 옆자리였다. 눈에 꿀이 다 떨어질 듯 제 현 여친을 보고 있는 오스틴, 그 옆은 레지나. 레지나와 난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날 보고 우월감에 취하기라도 한 듯 그 애가 픽 웃었다. 아, 기분 좆같네 진짜.



“됐어, 여기 앉아 그럼.”



대충 잡친 기분을 가라앉히고 그래 밥이나 먹자 하고 앉았는데, 이번엔 주변 시선들이 문제였다. 마크와 한자리에 마주 앉아서 먹으려니 주변이 온통 흘끔 대는 시선들로 가득 찬 거다. 하여간 정글이 따로 없다니까. 이럴 줄 알았음 같이 점심 먹을 수 있는 여자 buddy 하나쯤은 만들어 놓는 건데, 이 기집애 저 기집애 남친 다 뺏어 먹으니까 학교에 XX염색체 가진 애들이라곤 온통 다 적뿐이네.



“Hey- Chloe! Oh, is it your new boyfriend? What a lovely couple in this season!”

클로이 안녕! 어, 새 남친이야?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



누군가 귀에 대고 비꼬듯 그렇게 말했다. 구겨지는 내 표정에도 마크는 식판 위의 콘 샐러드 따위를 퍼서 내게 넘겨줄 뿐이었다. 내가 졌다 졌어. 고집으로는 나만큼이나 끝판왕인 마크에게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든 난 내 입으로 다가오는 샐러드를 한입 물었다.



어, 뭐지. 눈 마주쳤다. 그리고 그렇게 마크와 마주 앉아 ‘한쪽만’ 오붓하게 느끼는 점심 식사를 하는 사이, 멀리 던진 내 시선의 끝에 오스틴의 파란 눈이 걸렸다. 그 애는 알 듯 말 듯 미묘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Taming The Cat







“I guess you want my number?”

내 번호 물어보려고?



이마크 인내심에 금 가는 소리 여기까지 다 들리는 거 같네. 아우 살벌해. 내 쪽을 향해 걸어오는 풋볼팀 Leo를 향해 웃으며 플러팅을 날리는 사이, 저 멀찍이 제 범생이 무리 틈에 섞여 내 쪽을 주시하고 있는 마크의 눈빛이 참 강렬하게 느껴졌다.



"..."



세상에, 작살이 따로 없네.



이게 무슨 소리냐고?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건 특단의 조치였다. 오스틴에 대한 내 마음이 아직 정리 안된 상황에서, 이마크는 지 혼자 나랑 뭐 어떻게 해보겠다고 하루 종일 적극 구애질이지, 학교 곳곳에서 자꾸만 마주치는 오스틴은 옛정 때문에 나한테 자꾸만 측은지심이 드는 건지 마크와 같이 있는 날 애잔한 눈빛으로 쳐다보지, 어울리지도 않는 범생이 새끼랑 자꾸만 붙어 다니니 학교에선 또 웬 불쌍한 호구 하나 클로이 그물에 잘못 걸렸네 하며 나를 무슨 마녀사냥이라도 하는 것 마냥 뒤에서 쑥덕대지. 그러니까, 뭐 하나 맘에 들도록 흘러가는 게 없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었다. 뭐가 됐든 간에 일단 이마크랑 거리를 두자. 쟤에 대한 내 감정, 그리고 오스틴에 대한 내 감정이 다 정리되기 전엔 둘하고도 가급적 엮이지 말자. 그냥 살던 대로 살자.



그래, 오스틴이랑 사귀기 전의 모습으로, 풋볼팀 에이스든, 파티 왕이든, 존나 핵 인싸든, 범생이든 그 누구든지 간에 상관없으니까 대충 아무나 여럿이랑 가볍게 어울려서 마크 리나 오스틴 무어, 그 어느 한쪽과도 엮이는 상황만은 당분간 피해보자. 그래서 작정하고 안 하던 플러팅을 시작한 거다. 오전엔 조지랑 수업 듣고 점심엔 브라이스랑 밥 먹고, 오후엔 사이먼이랑 앉아 수업 듣고.



뒤통수 너머로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이 불편했지만 일단 당분간 어떻게든 쟤랑 거리를 둬야 했다. 복잡한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는 당분간. 마크가 시도 때도 없이 하도 다가와 치대는 통에, 몸과 마음이 계속 불편했으니까. 예상 못 하게 들어오는 마크 때문에 머릿속에 자꾸만 옛날 생각이 떠올라 혼란스러워지는 걸 참고 견딜 수가 없었거든. 진짜 말도 안 되는데, 그런 그 애의 행동에 어딘가 설레는 감정이 드는 게, 영 유쾌하지가 않았다.



What is worse, 오스틴이 자꾸만 눈을 마주치는 순간들이 많아졌다. 학교에선 늘 레지나 옆에 찰싹 붙어서 눈꼴사나운 스킨십을 해대면서 이상하게도 시선은 자꾸만 내게 맞닿아 오는게 퍽 낯간지럽기 짝이 없었다. 내가 아무래도 생각보다 훨씬 많이 쟬 의식하나 보다. 이렇게 자주 눈이 마주치는 걸 보면.



그렇게 두 남자의 시선 사이에 껴서 이도 저도 못하고 자꾸만 신경이 곤두서는 통에 뭐라도 해야겠다 싶었거든. 그러니 이대로 일주일만 넘기자, 일주일만. 이렇게 전처럼 지내다 보면 오스틴을 보는 눈도 덤덤해질 거고, 마크도 제 감정을 좀 진정시키기 시작하겠지. 내 얼굴을 향해 저 두꺼운 안경 너머로 쏘아 대는 마크의 따가운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난 꼿꼿이 앞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Can I call you on this weekend?”

주말에 연락해도 돼?



그런 내 손짓에 홀리듯 저 멀리서부터 걸어온 풋볼팀 남자애와 난 서로를 향해 한 걸음 정도를 사이에 두고 더 다가갔고, 그 애의 손이 내 허리에 감기려는 찰나, 뒤에서 누군가에게 손목이 붙잡히는 느낌과 동시에 갑자기 시야가 반대쪽으로 획 돌아갔다.



“Mark...?”


“...”



마크였다. 아까 분명히 저 멀찍이 서있었는데 네가 왜 여기 있어...? 눈앞의 상황을 정리할 틈도 없이 그 손에 붙들려 나갔다.



“엥...? 야!!”



어안이 벙벙했다.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붙잡아 나가는 통에 날 끌고 가는 마크의 뒷모습만 보였다. 방금 막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는지 반대쪽 손엔 화학 책이 들려 있었다. 그 와중에 또 내 손목을 붙잡은 손이 너무 뜨거웠다. 내가 아는 그 체온을 담은 손. 누군가 지금 내 얼굴을 봤으면 홍당무가 되어 있을 거 같은데. 그래, 자꾸만 이런다고! 지금 내가 너랑 같이 있으면 내가 어떻게 헤까닥 돌아버릴 것 같아서 일부러 거리를 둔 건데...!



정신 차리고 놓으라 소리쳐봐도 꿈쩍도 않고선 제 앞길을 성큼성큼 가는 마크였다. 힘주어 내 쪽으로 팔을 당겨봐도 앞으로 끄는 힘에 더 당겨질 뿐 소용이 없었다.



“아 이것 좀 놓으라고!!”



메인 클래스 건물을 지나쳐 실내 체육관으로 향하는 마크의 발걸음에 그제서야 얘가 날 어디로 데려가는지 알아차렸다. 아, 거기구나. 우리가 처음 키스한 다음 날 학교에서 마주친 후 둘만 있던 그 좁은 복도. 아무도 다니지 않는 그 복도의 끝에 다다른 후에야 마크는 내 손을 놓았다. 익숙한 벽면의 색깔에 그날 마크가 벽까지 몰아붙여 내 목에 두 번째로 그 흉흉한 마크를 찍어 대던 기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목을 부여잡았다. 손 밑에 가려진 목엔 아직 자국이 남아있을 거다. 그때 그날처럼 체육관 안에서는 삑삑 대는 호각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고, 마크는 앞을 보고 서있을 뿐이었다. 다짜고짜 끌고 나온 이유가 뭔 지 따져 물으려 한 발자국 다가서는데, 날 향해 돌아선 마크가 더 빨랐다.



“왜 넌 매번 그딴 식이야!”


“뭐가...! 갑자기 왜 승질인데! 너 미쳤어?”


“같잖은 것들이 왜 널 함부로 대하게 만드냐고!”


“야! 지금 멋대로 끌고 온 건 누군데!”


“솔직히 말해봐. 그냥 내가 싫은 거야?”


“뭐?”


“너 지금 나 괴롭히고 있는 중이잖아.”


“뭔 소리야, 그런 거 아냐!”


“말해, 뭐가 문젠데.”


“아 그런 거 아니라니깐! 그냥 이게 원래 나야! 예전 내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거야! 왜 엄한데 와서 난리야!”


“도대체 뭘 어떻게 살아왔길래 변해도 이렇게 변해!”



책을 들고 있던 마크의 반대쪽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아니, 이게 이렇게까지 화낼 일이야? 전학 오고 나서 다 봤다며,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모습으로 바뀌었는지 다 안다며! 그리고 애당초 네가 뭔데 나한테 이렇게 화를 내...?”


“처음엔... 그래, 이해해 보려고 했어. 네가 가장 힘들 때 널 두고 떠났다고 해서, 어쩌면 그 시간 동안 나 대신 널 채워줄 것들이 너무나 필요했겠지. 나도 떠나고, 너희 부모님도... 그래서 행여나 그게 건강한 방법이 아니라 해도 그런 것들이 아니면 견딜 수 없이 외로웠겠지 하고.”


“...”



왜 인지 모르겠지만 그 말에 울컥하고 안에서부터 무언가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의 이혼 후 내게 유감이라고 말하던 주변 사람들의 겉도는 말에도 티끌만큼의 우울감이나 슬픔이 느껴지질 않았었는데. 왜 갑자기.



‘외롭다’라는 감정을 언제부터 알게 됐더라...? 처음엔 그냥 남들처럼, 단지 남들만큼만 사랑받고 싶었다. 아빠, 엄마, 두 사람의 울타리 안에서 여느 자식들처럼 평범하게.



왜 엄마 아빠는 눈만 마주쳐도 서로를 못 견뎌서 늘 안달일까? 왜 우리가 살던 집 안은 늘 헐뜯는 말들뿐이었을까? 잠들기 위해 방에 들어간 순간부터, 왜 두 사람은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로 서로를 힐난할까? 어쩌면 내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건 아닐까? 나 때문에 맞지 않는 두 사람이 억지로 가족이라는 끈에 매인 건 아닐까? 그럼 나를 왜 낳은 걸까, 난 둘의 결정에 의해서 태어난 죄밖에 없는데.



어디 하나 그 무거운 주제를 물을 곳이 없었다. 답해줄 곳도 없었고. 그래서 기댈 곳도 없었지. 그렇게 이해할 수없이 우울하기만 했던 내 세상에, 어느 날 마크가 들어왔다. 내가 수플레 팬케이크를 제일 좋아하는 걸 어쩌면 엄마 아빠는 모를지도 모르지만, 마크는 알았다. 말하자면 가족 대신이었다. 차가운 공기뿐이던 집에 돌아가는 대신 그 애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유독 그 따뜻한 체온의 손만 부여잡고 있던 이유는 그거였다. 마크의 손까지 놓아버리면, 정말 내가 세상에 기댈 수 있는 것이 이제는 더 없을 것 같아서.



그리고 그 애가 캐나다로 떠난 다음날부터, 내 세상은 또다시 조금씩 부서져갔다. 엄마 아빠의 이혼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다. 단지 그걸 겪었던 당시의 내가 너무 어렸을 뿐.



아이 키우는 환경은 뉴욕보단 LA가 더 낫겠어, 클로이 내가 키워.


맘대로 해.



두 사람의 온기 없는 결정 몇 마디에 그렇게 또 한 번,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몇 시간을 날아온 낯선 곳에 정착했다. 여기도 의지할 곳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새 가정을 꾸렸고, 몇 년 뒤 동생이 태어났다. 그래도 여전히 난 겉돌았다. 아빠가 아닌 낯선 남자와 행복해하는 엄마의 얼굴을 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그냥 그 안에 속한 것처럼 보이는 거. 실상은 그렇지 않더래도 아무렇지 않은 척 구는 거.



 그래서 여기선 허기진 감정들을 멋대로 채웠다. 집에서 받지 못한 애정을 보상받으려는 듯이 정말 닥치는 대로. 같은 반 맨 앞자리에 앉은 반반한 남자애, 만인의 첫사랑이라 불리는 누군가, 혹은 가장 친한 친구의 남자친구. 옆자리의 누군가를 쉼 없이 갈아치우며 애정을 갈구했다. 그게 누구든, 어느 누군가가 소중히 아끼던 사람이든, 전혀 상관없었다. 죄책감 같은 건 느끼지 못했다. 애초에 내가 가졌던 것들은 남김없이 다 뺏겼잖아. 돌이켜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나를 외롭게 하던 순간들이었는데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어?



“그런데 이제는 잘 모르겠어. 내가 모르던 모습으로 변한 건지, 아니면 그동안 내가 알던 네 모습들은 다 가짜고 이게 진짜 네 모습인 건지.”


“...”


“기대는 게 그렇게 어려워? 아직도 내가 떠날까 봐 무서운 거야? 지금 날 받아줘도 언젠간 내가 없어져 버릴까 봐서?”


“...”


“클로이, 나 이제 어디 안가.”



그런데 다시 눈앞에 나타나 그동안 꽁꽁 숨겨온 내 외로움을 자꾸만 다시 끄집어내 까발리려는 마크 때문에 난 다시금 초조해지기 시작한 거다. 끝까지 책임지지도 않을 거, 이대로 내 슬픔을 누그러뜨려 놓고 다시 떠나버릴까 봐서. 행여나 그때처럼 물리적인 이별이 아니래도, 만약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사랑에 빠지더라도, 혹여나 네가 나한테 질려버리면...? 그래서 마음이 떠나버리는 거면? 엄마처럼, 아빠처럼, 처음엔 날 위하는 척 굴다 가도 결국은 새로운 사람, 새 가족을 만나 떠나면? 또다시 나 혼자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짐처럼 버려두면? 그럼 그때 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해...?



“처음 그랬던 것처럼 이렇게 흐지부지한 상태로 네 주변만 맴도는 거, 네 마음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결국 어느 한쪽이 떠나버리면 또 아무것도 아닌 관계로 남는 거, 다신 안 한다고. 그러니까 이제 그만,”


“너.”


“...”


“주제넘는 행동하지 마.”



이를 악물고 뱉은 내 말에 마크가 허탈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렇게, 난 또 너를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쩌면 아직도 내 상처가 더 아픈 열두 살에서 성장이 멈췄는지도 모르겠다.



“진짜 웃기지도 않아.”


“야,”


“네가 뭔데...?”


“너 진짜...”


“그러니까 도대체 무슨 권리로 나한테 이러는 건데? 애당초 네가 나한테 뭔데! 네가 뭔데 날 자꾸 가르치려 들어!”


“어! 나 너한테 뭣도 아니야, 매번 아주 조금만 다가가려고 하면 자꾸 도망가는 너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난 너한테 아무것도 아니라고!”


“...”


“나라고 좋아서 너랑 친구 하는 줄 알아? 내가 정말 너랑 그런 관계로 남길 바라는 게 아니란 거, 너도 알잖아! 네가 제일 잘 알잖아!”


“...”


“근데 자꾸만 내가 선 넘으려고 하니까, 너 또 도망치려는 거잖아.”



그 말을 한숨과 함께 내뱉은 마크가 한 손으로 제 뒷목을 짚었다. 그리곤 화를 삭이려는 듯 긴 숨을 들이쉬었다.



“너 이제 열두 살 아니야. 사춘기 지난 지가 언젠데 제 감정하나 똑바로 표현을 못 해서 사람을 피 말리게 만들어?”


“...”


“넌 그래, 도망가길 원하면서 정작 사랑받길 원해. 근데 단 한 번도 그걸 솔직히 말한 적이 없어.”


“닥쳐,”


“네 감정에 솔직해지는 게 그렇게 어려워?”


“...”


“여전히 네 자존심이 훨씬 더 소중할 만큼 너한테 내 무게가 그 정도 밖에 안되냐고.”


“...”


“너 좋아하는 거, 진짜 힘들다.”



그대로 마크는 돌아섰다. 이제는 너무도 지쳐 손을 놓는 듯, 완전히 질려버린 표정으로. 그렇게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것처럼 걸어서 복도를 빠져나갔다. 차마 다시 부를 용기가 나질 않았다. 내가 처음으로 마크에게 상처를 입혔던 어린 날, 릴리 포스터의 손을 잡고 교실을 나서던 그날의 마크가 떠올랐다. 빈 교실에 나만 덩그러니 남겨둔 채,  내 앞에선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차가운 얼굴을 하고선 마치 모르는 사람인 양 지나쳐가던. 어라, 나 지금 왜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바라던 바였는데, 마크가 나에게 보내는 관심을 꺼 주길 그렇게 바랬는데 왜 울적해지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바빠 죽겠는데 입덕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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