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정토에서 일어난 일들을 시간순서대로 볼 수 있는 글

매번 인물은 바뀜.















우지끈 소리가 나더니 곡괭이에 쩍 하고 금이 갔다. 사실 이음새 부분이 헐거워지던것을 몇시간 전 부터 느끼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손잡이도 나무 결을 따라 갈라지고 말았다. 그탓에 손을 다쳤다. 예전같으면 손을 다치면 생계 걱정에 눈물이 찔끔 나왔을텐데 이제는 진짜 순수하게 고통 때문에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햄스왕은 자기가 파놓은 지하 굴에 잠시 앉아서 손바닥에 박힌 나뭇가지들을 뽑아냈다. 소독은 어떡하지? 피가 줄줄 나고 있었다. 짐을 놓고 우선은 일어서서 파놓은 굴 반대편으로 걸었다. 굴을 파며 오는 길에 고인 지하수를 발견했던 것 같았는데, 거기에 손을 씻어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지하수를 발견하여 거기 손을 담구고 나서야 짐에 들어있던 술 한병을 떠올렸다. 치타 두 마리 중에서 말을 덜 곱게 하는 쪽에게 주려고 했던 것인데 그걸로 소독을 하면 될 것 같았다. 지하수에 담궈놨던 손을 탈탈 털고 상처를 횟불에 비춰보는데 멀리 뭔가가 반짝거렸다. 광물 같은데, 뭔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새 곡괭이를 들고 위치만 기억해놨다가 나중에 돌아오면 된다.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손을 쭉 뻗어 횟불을 내밀었다. 그때 머리 위에서 우르릉 소리가 났다. 위를 문득 올려다보자 지반이 약한 천장이 무너지면서 자갈과 이내 모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햄스왕은 그대로 매장됐다. 


꿈 속에서 그는 신을 훔쳐보고 있었다. 

칼리는 끝없는 사막에서 맨손으로 모래를 파고 있었다. 땅에 묻힌 자신의 동생 사트야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모래는 너무 고와서 파는대로 다시 쏟아졌다. 그는 영원히 쏟아지는 모래를 다시 파내고 또 파내며 영원한 징벌에 갇혔다. 그걸 멀리서 훔쳐보고 있는데 누가 어깨를 콕콕 찔렀다. 햄스왕이 돌아보자 거기엔 사트야가 있었다. 사트야는 검지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더니 필멸자의 손을 잡고 당겼다. 햄스왕은 사트야가 가자는대로 걸었다. 맨발이 푹푹 파이는 모래 위를 걷는데 평지보다 편안했다. 그의 육신은 사트야의 축복에 의해 모래 위에서 더 가벼웠다. 

사트야는 자신의 필멸자를 데리고 신전이 아닌 아스팔트로 갔다. 모래에서 뜬금없이 시작된 아스팔트 길의 저 끝에는 카페가 있었다. 햄스왕은 사트야가 보내는대로 카페를 향해 가서 자신이 한때 앉았던 익숙한 자리에 앉았다. 사람이 많은 카페였다. 야외 자리밖에 없었고, 거기 앉아서 책상에 기타를 기대두었다. 그는 멍하니 얼음이 떠 있는 커피를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에 상처가 많았다. 기타를 치면서 생긴 흉이었다. 어릴때는 그것이 자랑스러웠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끔찍하게 돈이 안되는 일이었다. 성공의 기회가 계속해서 좌절되니 재능도 그저그런 것이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혹시 합석해도 될까요?”

위를 올려다 보자 키가 큰 여자가 서 있었다. 훤칠하고, 웃고 있었다. 목에는 초커를 하고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잘 어울렸다. 

“자리가 없어서…. 안되면 말구요.”

여자는 그렇게 덧붙였다. 딱 붙는 검은 티셔츠에는 장난스런 글씨체로 어쿠스틱! 이란 프린팅이 그려져 있었다. 작은 기타 모양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햄스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앉으세요.”

“기타 치세요? 저도 그런데.”

여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앉았다. 그가 마시는 음료는 차가운 에일 맥주였다. 

“저는 가나안이라고 해요.”

그러면서 씨익 웃었다. 하얀 이가 드러나고 눈주름이 지는 웃음이었다. 기분좋게 숨이 막혀왔다. 


그는 종종 그 여자 생각을 했다. 싸구려 펍의 쥐꼬리만한 일급을 받고 기타를 연주하러 무대에 오르기 전, 화장실이 옆에 있는 한쪽 구석 자리에서 기타 줄을 조율하다가 문득 그 여자 생각을 했는데 그 눈주름이 떠올랐다. 햄스왕은 멍하니 앉아있다가 시간이 돼서 무대에 올랐다. 그에게 관심없는 손님들을 향해 관성적으로 기타줄을 튕기는 동안 그 여자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사실은 별거 없는 대화였다. 

그는 낙원국 출신으로 여행중이라고 했다. 

세상 구경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쿠페 하나를 렌트했고 이 도시가 마지막이므로 아쉽다고 했다. 

취미로 기타를 치고, 사실 직업은 재미없는 마켓 캐셔라고 했다. 

하지만 모든것이 즐겁다고 했다. 

마켓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양쪽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편백나무길은, 20분 넘게 걸어야 하는 길을 매일같이 다니고싶게끔 만들어 늘 나무를 보며 고맙다고 말한다며 웃었다. 

햄스왕은 재미없는 일을 하면서 돈을 적게 받는데 행복한 것이 어떤 기분인지 궁금했다. 


기타를 치다가 멈췄다는 것은 펍 주인이 멀리서 황당하단 표정으로 이쪽을 노려보는 눈과 마주치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햄스왕은 멍하니 앉아있다가 일어섰다. 기타를 두고 왔다는 건 버스에 타고 나서야 알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그대로 공항에서 낙원국으로 가는 티켓이 있느냐고 물었다. 바로 한시간 뒤 비행기가 있었다. 붙일 짐도 없었고, 가진것도 없었다. 늘 들고다니는 배낭 안에는 그가 가진 모든것이 들어 있었다. 

햄스왕은 고개를 들어 공항 직원을 보았다. 거기엔 사트야가 비행기 티켓을 내밀고 있었다. 다시 사막 위였다. 햄스왕은 눈앞에 까마득히 높은 신전을 올려다보았다. 그 앞에 어떤 왕족의 후손이 자신의 사촌을 목졸라 죽이려 들고 있었다. 광기로 눈이 돌아 있었다. 벌건 눈에는 목이 졸리는 상대보다 공포가 서려있었다. 햄스왕은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어 자기 목을 만지다가 벅벅 긁기 시작했다. 버석버석 손톱 사이에 모래가 끼었다. 그는 사실 모래로 만든 인형이었기에 긁어댈때마다 바스라지고 무너져버렸다. 고함을 지르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고 입 안으로 모래가 쏟아져들어왔다. 그는 울면서 가나안을 생각했다. 

네가 사는 곳을 보고 싶었다. 그곳은 대체 어떻길래 네가 그토록 행복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나도 가질 수 있는 행복인지 알고싶었다. 

내게도 기회가 있다면 그걸 가질 수 있는 것인지, 

내게 어떤 지긋지긋한 저주가 걸려 있어서 이렇게 사는 게 아니라 그저 어떤 선택만 바꾸면 되는 것임을 증명받고 싶었다. 

나는 네가 되고 싶었다. 


모래가 무너지면서 여러명의 손이 그의 팔목을 붙잡고 확 끌어당겼다. 그들은 햄스왕을 끌고나와서 온통 물을 부어댔고 그런 다음에는 들것에 실어 나른 다음 다시 지상에서 또 물을 부었다. 입 안에서도 코에서도 끝없이 모래가 나와서 계속 기침을 하고 토하다가 어질어질한 시야 너머 모래로 된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걱정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틈에서 그는 태양이 스며든 황금 사막의 저 멀리 서 있는 두 명의 신들을 보았다. 그들은 속삭이고 있었다. 그 말이 무엇인지 들어야 했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걸음 가지 못하고 쓰러져 기절하고 말았다. 


“괜찮아요?”

눈을 떴을 때 그는 자기 침대에 누워 있었다. 창문이 덜컹덜컹 흔들리고 수많은 긴 손톱이 바깥 문을 긁고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모래폭풍이 시작된 것 같았다. 햄스왕은 눈을 꿈벅거리다가 옆을 돌아보았는데, 거기 타로가 어색하게 웃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타로는 물을 내밀면서 말했다. 

“문병하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모래폭풍이 시작돼서.”

그는 뒷목을 문질거리더니 조금 머뭇거리다가 다시한번 물었다. 

“좀 괜찮아요?”

“그런 거 같아요.”

그는 대답하고 나서 눈을 꿈벅거리며 두꺼운 가죽을 커튼 대신 걸어둔 것을 약간 걷어보았다. 유리창 너머에 누런 모래폭풍이 사선으로 창을 할퀴며 지나가고 있었다. 창문이 덜걱거리는 것은 괜히 불안해지게 했기 때문에 가죽을 다시 내버려 두고 물을 마셨다. 

“승객들 중에서 가끔 기절하는 사람들이….”

타로는 말을 길게 늘이다가 머뭇거리며 맺음말을 꺼냈다. 

“있대요.”

들은 적이 있는 말이었다. 꼭 전염병처럼 자다가 깨어나지 않는 사람들, 혹은 멀쩡하게 잘 지내다가 갑자기 기절하는 사람들. 햄스왕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떤 사람들은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셧다운 되는 것이다. 그들은 실제로 깨어나지 않는 사람들을 데리고 다녔다. 깨어났다가도 다시 잠들어버린 사람들을, 기약없는 약속을 기다리듯 그들의 잠든 얼굴을 어떻게든 외면하면서. 타로는 걱정하고 있었다. 네가 괜찮은 게 맞느냐고 묻는 것만 같았다. 햄스왕은 잠시 빈 물병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전 괜찮아요. 그냥….”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말을 잇지 못했다. 

문득 항구도시에서 사막으로 오던 중에 새와 사자가 했던 대화가 기억났다. 상단이 잠시 비박 준비를 하는 동안 그는 계곡에서 물을 뜨고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멀리 재고확인중이던 청금강과 화연이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말살정책 말입니까.’

‘맞아요. 먼저 신을 죽여야 그의 피조물이 멸종하게 된다는….’

‘옛날에 사막왕국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저희 날개들은 정규과정에서 배웁니다.’

‘네. 그거요. 혹시 뭘 먼저 찾아봐야 하는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쪽 사자들은 상단장과 정보공유가 전혀 안되는 겁니까?’

햄스왕은 청금강의 그 비아냥대는듯한 투에 화연이 화낼거라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화연은 인상을 쓰고 입을 꾹 다문 채로 서 있었다. 괜히 더 훔쳐듣는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아 후다닥 자기 텐트로 돌아갔던 그날 햄스왕은 꿈을 꾸었다. 


어떤 자매가 모래언덕에 앉아 서로 손을 잡고 속삭이고 있었다. 그들이 내는 소리를 더 자세히 들어보기 위해 모래를 기어올라가는데 그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말했다. 왕관을 쓰고 싶으냐고 묻기에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신자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잔인하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왕관을 쓰면 모든 것을 말해줄게.’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가야해요. 

나 자신에게 기회를 줘야 해요. 

내가 쓰이고 버려지는 존재가 아님을 증명해야 해요…. 

그러자 자매는 그의 눈앞에 진실의 편린을 언뜻 보여주었다. 그건 구덩이였다. 햄스왕은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적어도 그때 그곳으로 기어들어갔을 당시에는. 


“괜찮아요?”

타로가 다시한번 묻자 그는 멍하니 있다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그리고 그는 낡은 황금 왕관을 깊숙히 밀어 숨겨둔 침대에서 일어서며 웃었다. 모래폭풍이 잦아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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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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