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흑백으로 보인다는 것. 그리고 그 답답한 세상을 한 번에 채색해줄 수 있는 사람이 그 흑백 세상에 숨어살고있다는 것. 일명 컬러버스라고 불리는 세계관은 어느 동화의 삽화로나 존재할 법 한, 꿈만 같은 이야기다. 소설의 소재로 쓰이면 딱 좋겠지. 운명같은 사람과 만났는데, 세상이 막 색이 칠해져. 만약 이 척박한 한국 땅에 그런 영화가 나오고, 또 내가 색을 구별할 수만 있다면 나라도 그 영화를 보고싶을 정도의 로맨틱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색깔이 무엇인지, 분홍색은 어떤 색인지 하늘색은 어떤 색인지 전혀 구분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나에게 있어 그런 감각적인 것들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아침에 양말색깔을 구별하지 못해 한참동안을 들여다보다가 일찍 일어난 친구에게 사진을 찍어 카톡을 보내는 그 마음을 도대체 누가 알아주겠어.



사고 시 충격과 외상 후 스트레스로 인한 시각세포 상실, 전색맹. 병원 내 이름과 신상이 기재되어있을 어느 차트에 쓰인 말이었다. 어렸을 때 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교통사고였고, 어린 뼈들이 수없이 부러지는 바람에 누워서 뼈를 붙이는데도 몇 년이 걸렸었다. 그리고 겨우 자리를 접고 일어났더니 갑자기 세상이 흑백이 되어버린 거지. 시력은 좋은데 색을 구별을 못하시죠. 이게 사고 후유증이라는게, 저희도 어떻게 올 지 정확히 모르는 거라서... 오열하는 내 앞에서 의사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나는 그냥 수속이 끝난 환자가 되고 말았다. 정확히 말하면 조금 특이한 케이스의, 그러나 문제는 없는 환자. 그 이후에 내 인생이 어떻게 될 지는 나밖에 신경쓰지 않았다. 온갖 의사를 찾아다녀도 그랬다. 세상이 색을 잃듯 내 삶도 색을 잃어갔다.



"안녕하세요, 변백현 환자분."

"..."

"...환자분?"



그래서 내가 이 쓸데없고도 복잡한 이야기를 왜 하냐면,



"옷 색깔이... 예쁘네요."

"아, 감사합니다."



그 때 즈음에 처음으로 색깔이라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원래 보이던 하얀색과, 그리고, 연한 분홍색의 니트. 그 연한 색에 눈이 팔려서 차마 남자의 얼굴을 확인 할 생각도 못했다. 그 순간 내 머리를 때려왔던 게 바로 그 컬러버스라는 소재였다. 이 남자가 내 운명일까? 낯간지러운 생각도 해가며.



"..."

"어, 그럼 앉아볼까요?"



그리고 곧 깨달을 수 있었다. 그의 앞에서 몇 십년만에 다시 만난 '색깔'이라는 것은, 나를 아주 쉽게 매료시키고, 또 그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게 만든다는 것을. 오세훈은 그때부터 쭉, 나의 컬러버스였다.






너의 의미






오세훈을 처음 만났던 그 날은 언제나 내 기억속에 선명히 남아있다. 존스 홉킨스였나, 뭐, 유명한 대학을 졸업했고 우리나라에서 가히 최고라 불리는 의사라기에 찾아갔었던 기억이 난다. 수많은 안과의사들이 내 차트를 보곤 헛소리나 하다가 그랬다. 아마, 그, 세브란스 병원에서 오세훈 선생님 찾으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이번에 발표한 논문이 어떻고 가능성이 어떻고... 반포기 상태였던 내가 희망을 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지.


그리고 처음으로. 명성답게 삐까번쩍한 진료실에 앉아서 내 증상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나는 그 동안 연분홍색 니트만 바라보고있었고. 뭉근히 데워진 목소리가 귀로 흘러들었다. 희귀한 케이스이긴 하지만 아예 없지는 않아요. 그래도 제 옷 색깔은 보이시나봐요. 아주 심하지는 않네요. 다행이에요. 눈을 내리깔고 웃으면서 제 옷을 문지르던 오세훈이 했던 소리는 그랬다. 이 옷은 약시나 색이 잘 안보이시는 분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옷이에요. 어, 제 눈에는 빨간색으로 보이지만 백현 씨 눈에는 조금 다르겠죠? 전색맹이라고 들어서 아예 안보이실까 싶었는데, 정말 다행이네요. 약시 전용이란 말에 멍하니 앉아있다가 눈을 들어올렸었다. 자잘한 흑백으로 나뉜 얼굴이 이런 말을 하긴 뭐 하지만... 의사 같지가 않았다. 모델 해도 되겠네. 공연한 생각 뒤로 따라붙는 묵직한 말들. 초록색과 빨간색 구분이 안되시는 것도 힘들어하시는 분들이 정말 많아요. 하물며 모든 색이 제대로 안보이는 건 얼마나 힘들겠어요. 최대한 빨리 진행해보기로 합시다. 바쁘기 짝이 없는 의사면서 뭘 그렇게 다정한지 그 날 처음으로 병원에서 울어보기도 했다. 대뜸 울기 시작하는 환자에게 건네는 다정한 토닥임까지. 아.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기적같은 일은 오세훈을 만난 그 순간부터 일상처럼 일어난다.



"혀엉, 우리 오늘 전시 보러가요."

"뭐 보려고? 난 잘 모르잖아."

"현대미술인데, 어, 티켓 생겨서."

"그래."



그리고, 많은 시간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몇 십 번의 만남을 갖고 수많은 검사를 거치고 또 수술대에 오르기까지. 처음해본다는 수술이 성공한 후 색이 보인다며 울던 내가 네게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오세훈이 그 대답으로 내 눈을 쓸어내리기까지. 정말 많은 감정이 오갔다. 두꺼운 책 한 권 분량의 이야기가 우습게 오갈 수 밖에 없었다. 눈 뿐 아니라 감정에마저 능숙한 너와 이제야 세상을 보기 시작한 어린애같은 나의 연애는 이를테면 꿈과 같은 것이었다. 대단하지. 엄청나. 사람의 인연이라는 건 필연과 우연을 나눌 수 없는 것이었다. 아직도 나는 가끔 생각한다. 만약 그 때 내가 날 포기했더라면? 이 정도도 괜찮은 삶이라 자위하고 네 병원에 들르지 않았더라면? 그것만큼 무서운 말이 없다.



"눈이 많이 아프진 않아요?"

"피곤한데... 괜찮은 것 같긴 하다."

"눈 혹사시키지 마요."

"알겠어."



내가 온갖 물감을 집에 사두고 색을 바라보는 일도, 또 눈이 아플까봐 온 집의 벽지를 흰 색으로 바꾸는 일도 없었을거다. 나는... 사람의 피부색이라는 게 그토록 다양한지도 몰랐다. 색채라는 것도 그랬다. 십 년 만에 마주한 빨간색은 눈이 아팠고 파란색은 피곤했다. 초록색을 보면서 오오, 입으로만 감탄하는 나를 보면서 네가 실실 웃었던 건 아직도 뇌리에 선하다. 아주 기본적이고도 내게 필수적이었던 것들이 속속들이 내 안으로 들어차는 일 따위는 없었겠지. 나는 다시 눈을 돌렸다. 네가 보인다. 오늘은 흰색 볼캡을 쓰고 연한 회색의 스웨터를 걸쳤다. 검은색 슬랙스를 입었고 피부는 여전히 새하얗다. 그래서 언제 가려고? 하면 시계를 툭툭 치며 한 한 시간 뒤면 괜찮을 거 같다는 오세훈. 아직도 앞길이 창창한 의사.



"너 피부 진짜 예쁘다."




그 따뜻한 피부를 만져보며 말했다. 그래? 수십 번 들은 말이라 질린다는 듯 제 볼에 얹힌 손을 어깨 위로 누르면서 오세훈이 말한다. 알면 됐어. 배싯 웃는 웃음이 연하늘색이었다. 












@_texture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