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황현진과 양정인 연애의 역사를 읊자면 그것은 3년 전의 어느 날에 시작되었다. 당시의 황현진은 공부에 여념 없어야 할 열아홉이었고, 양정인은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열여덟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꼭 서로의 상황이 바뀐 것처럼 행동했다. 황현진은 열여덟도 모자라 열일곱처럼 여기저기 쏘다니며 신나게 인생을 즐겼고, 양정인은 당장 수능을 100일 앞둔 열아홉처럼 피 터지게 공부했다. 유유상종이라고, 당연히 황현진의 주변에는 황현진 같은 놈들만 가득했고, 양정인의 주변에는 양정인 같은 놈들만 두어 놈 있었다. 한마디로 두 사람은 전혀 접점이 없었단 말이다. 나이도, 행동도, 노는 그룹도. 고등학생을 구성하는 요소의 무엇 하나 겹치는 부분이 없었다.


‘인사해, 얘는 양정인. 나 아는 동생. 얘는 황현진. 내 친구.’


없었는데, 각자의 반경 200m쯤에 우연히 겹치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별로 중요한 인물은 아니다. 왜냐하면, 양정인도 황현진도 걔랑 친하지 않았다. 다만 그쪽이 일방적으로 사교성이 좋다 보니 인사 정도 하는 사이였다. 왜 그런 애들 있잖아. 일탈을 즐기면서 공부도 꽤 하는 애. 황현진은 걔를 술 까면서 알게 됐고 양정인은 걔를 독서실에서 알게 됐다. 야, 우리 학교 유명인사랑 친해질 기회가 생기다니 get cool! 이라며 맥주캔을 부딪히는 놈을 밀어낼 이유가 황현진에겐 별로 없었고, 어, 우리 학교! 와, 이 독서실에서 우리 학교 처음 본다! 그러고는 어깨동무하며 말을 거는 선배를 밀어낼 빌미가 양정인에겐 딱히 없었다. 그러다 마주치면 무시하기 어려운 사이 정도 되었을 때. 바로 그 때에 황현진과 양정인의 반경이 겹치고야 만 것이다.


‘아, 안녕…하세요.’

‘어, 안녕.’


그리곤 제 갈 길들 갔다. 첫 만남은 그게 끝이었다.




하지만 접점이 없었다뿐이지, 양정인은 황현진을 알고는 있었다. 그야 당연하잖은가. 원래 날라리들은 눈에 띄는 법이고 그중에서도 황현진은 훨씬 더 눈에 띄었다. 얼굴은 콩만 한 게 잘생겨가지고 키도 크고. 쉬는 시간이면 목이 터져라 소리지르며 축구를 하는데 모를라야 모를 수가 없었다. 과장이 아니고, 진짜로 그 일대에서 황현진 모르면 간첩이었다. 순 남자들만 처박혀 있는 남고에서도 황현진 이름은 귀에 박히도록 오르내렸다. 그래서 조금 궁금하긴 했다. 소문의 황현진은 정말 소문 같을지. 정말 17대 1로 싸워서 이기는지, 정말 클럽에 드나들면서 매번 여자를 갈아치우는지, 정말 돈 많고 권력 있는 집안이라서 그렇게 사는지. 어쩌면 조금쯤 시비 걸고 싶었던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렇게 몸 갈아가면서 공부하는 게 아니면 앞으로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 막막하기만 한데. 한마디로, 재수 없었다. 재수 중에서도 왕재수. 양정인이 일방적으로 평가한 황현진은 그랬었다.




양정인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후회했다. 그때 그 선배 아는 척을 받아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니면 친한 척까지는 피해야 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최소 술자리라도. 대체 무슨 바람이 들어서 공부하기 힘들 땐 술이라는 개소리에 솔깃했을까. 공부하기 힘들면 집 가서 잠이나 디비 잘 것이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알 수가 없었다. 별 개소리에 솔깃한 덕에 술에 디지게 꼴아도 보고, 어쩌다 황현진 옆자리에 앉아도 보고, 튼실한 황현진 허벅지 위에 거하게 오바이트도 하고.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그동안 보아온 세월로 추측하건대, 그때 황현진 표정 참 더러웠을 것이다. 물론 누구라도 그랬겠지만 황현진은 눈깔 치뜨면 진짜 표정 엄청 더럽거든. 그 표정을 떠올리자 킥킥 웃음이 났다. 제 얼굴은 생각도 않고 한참 웃었다. 그래도, 그때 황현진 허벅지에 토한 건 후회 안 한다. 망할 놈. 언제 취한 척 한 번 더 토해 줄 테다.




2.


양정인이 일방적으로 평가한 황현진이 재수 없었다면, 서로를 알게 된 후의 황현진은 역시 재수 없었다. 겉으론 멀쩡하게 웃으면서 속으론 비비 꼬인 양정인이라 그렇게 느낀 건지 진짜 황현진이 재수 없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랬다.


‘…어?’


속을 게워내면서 정신도 같이 게워버렸던 지난밤을 뒤로하고 눈을 떴을 때 양정인의 눈에 들어온 건 낯선 벽지였다. 알록달록한 꽃무늬가 답답할 정도로 규칙적인 벽지. 구리다. 구려 죽겠다. 벽지 정말 구려 죽겠고, 제 상태도 구린 것 같다. 왜, 이런 곳에 있지? 왜, 다 벗고 있지? 왜, 황현진이랑 같이 있지? 혼란스러운 게 한둘이 아녔다. 양정인은 일단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부재중 전화가 열 건이 넘게 찍혀있었다. 발신자는 당연하게도 엄마였다. 가장 마지막으로 도착한 문자는 내일 아침 열 시까지 연락이 없으면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양정인은 서둘러 액정의 오른쪽 상단을 봤다. 9시 58분이었다. 기겁을 하며 전화를 걸었다. 수화음이 채 3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은 엄마는 아무 말이 없으셨다. 양정인도 죄송하다는 말 이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 말없이 시간만 보내다가, 마침내 엄마가 입을 열고서야 그 침묵이 깨졌다.


‘별일 없지?’

‘…네.’


아마도요.


전화를 끊고 나니 어느샌가 일어난 황현진이 저를 빤히 보고 있었다. 양정인은 그 시선을 한 번 피하지도 않았다. 안 그래도 통통한 입술이 자고 일어나서인지 퉁퉁해 보이기까지 한다. 괜히 얄미운 주둥이다. 그래서 내가 쟤랑, 무슨 일을 친 건가?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 어제 나한테 토한 건 기억해?’


먼저 입을 연 쪽은 황현진이었다. 양정인은 기억이 난다고 할지, 모르겠다고 잡아뗄지 잠시 고민했다. 그런데 정작 황현진은 양정인의 답이 필요하지 않았던 모양인지 묻지도 않은 말을 혼자 주절주절 떠들어댔다. 너 어제 토하는데 진짜 가관이더라. 언제 앉은 지도 모르게 내 옆에 앉아있더니, 혼자 병나발 불다가 상 위에 엎어지고. 집 가라고 깨웠더니 갑자기 토하고. 심지어 너 그 와중에 나를 존나 째려보더라? 진짜 빡치고 어이없어서 너 쥐어박으려다가, 대신 너 데려온 애 조졌다고. 별로 듣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 그래서 그거 뭐 어쩌라고 떠드는지 모르겠다. 발음은 웅얼웅얼 해가지고 멍청이 같은 게. 양정인은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그것참 죄송하게 됐네요. 세탁비 드릴게요.’


근데 황현진은 그 말에 기절할 듯 웃어대기 시작했다. 정말 배를 붙잡고 웃더니, 나중에는 침대를 팡팡 치면서 웃었다. 뭐야, 미친놈인가. 양정인은 황현진이 조금 무서워졌다. 하여 침대에서 슬쩍 내려가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하나씩 꿰었다. 아, 진짜, 그래서 왜 속옷까지 다 벗고 있는데. 마음이 심란하기만 했다.


‘너 진짜 웃기다.’


양정인이 양말까지 주워 신고 나니까 황현진이 그랬다. 너 진짜 웃긴다고. 양정인은 콧방귀 불었다. 너는 미친놈 같아요. 속으로만 대꾸했다.


‘내가 왜 너 안 때렸는지 알아?’

‘…네?’


그 말엔 대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렇게 봐줬다는 듯이 말하고 생색낼 거면 그냥 줘패지 그랬냐. 역시 상종 못 할 왕재수다.


‘귀여워서.’


상종 못 할.


‘귀여워, 너.’


왕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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