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헤이싱

   BGM. 우효 - Piano Dust




   혼자서 무엇을 결정하다 보니 다니엘의 고집은 만만치 않았다. 이해할 수 없을정도로 제 의견을 피력할때가 있다. 대부분 그에게 맞춰주긴 하지만 끝내 자신이 원하는 바가 되지 않으면 자리를 뜨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이번에도 '이거 아니지 않아요?' 라는 묵직한 음성이 나올 타이밍이었다. 평소 다니엘이 좋아하는 댄스구성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이 대목에서 '그럼 그렇게 해요.' 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성은 수긍하는 다니엘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오래 이 팀에 있으면서 어느정도 다니엘의 사고 흐름을 파악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정말 해비급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정말 알 수 없는 곳에서 고집을 부릴 때가 있는데 그 때마다 리더격인 지성과 부딪히는 일이 허다했다. 별 말 안해도 서로에 대한 오랜 신뢰가 깔려 있던 탓인지 금방 오해를 털어내긴 했다만, 그는 그랬다. 명절이 다가와서 어디에 가냐고 물으면 표정변화 없이 '저 고아인데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외롭게만 자란 것 같지 않아서, 라는 성우의 말은 사실 상 들어맞지 않는 것이었다.


   성우나 민현에게 말할 수 없는 것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자신은 좀 끔찍한 시간을 걸어왔다. 정말로 끝끝내 말하지 못할 것들도 더러 있고. 처음부터 날카로운 것들에 살점이 벌어져 핏물이 흐르는 자신을 알아달라 요구하지 않은 이유는 그랬다. 자신이 초라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안타깝다는 눈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특히나 자신의 형, 성우에게 그간의 상처를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분명 상처는 더욱 가중되어 성우를 할퀴어 낼 것을 알기에. 


   그렇게 보면 민현에게 뭐든 다 말하라고 했던 언질은 최고의 어폐가 아닐 수 없다. 겨우겨우 짜집은 허물이 벗겨진다면, 과연 지금도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줄 수 있을까. 잘 컸다고, 착하다고, 해줬을까.


   곰팡내가 나는 반지하에서 보일러실도 따로 없는 방. 한파에 땡땡 얼어버리면 카파를 입고 이불을 둘둘말아 잠을 청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몸에 있는 피도 얼어버리는 거 같아 심장이 뛸 때마다 머리가 울렸다. 하수구에서는 썩은 내가 올라와서 아무리 싸구려 방향제를 지천에 깔아놔도 잡을 수 없었다. 예전 지성이 우연찮게 들리지 않았다면 다니엘은 그곳에서 아사했을 수도 있겠다 감히 생각했다. 

   지성은 훗날 말했다. 그건 정말 구출작전이나 다름 없었다고 말이다. 다니엘의 으레 헛헛하게 웃는 꼴을 보며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하루하루 쓰러지지 않고, 튀어나가지 않고, 푹 꺼지지도 않은 채 연명해 나가고 있는 걸 보면 참으로 대견스럽기 그지 없었다. 

   지성은 제 방에서 등을 둥그렇게 만 채 자고 있는 다니엘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던 적이 있었다. 넓은 등이 참으로 비어있어서. 그래도 좋아하는 걸 찾아서 다행이고, 눕는 자리가 연습실이 아닌게 어딘가 자위했다. 당시 고정 연습실도 없었다. 하루에 각자 땀이 베인 꼬깃한 지폐 세 장씩 걷어서 연습실을 구하곤 했다. 대부분 연습실이 모질게 춥고 더웠다.

   그래도 하루 12시간 내내 연습할 곳을 찾아야 했기 때문에 온갖 일을 했다. 전에 말했던 고깃집은 예사요, 편의점, 마트, 당구장, 피씨방, 호프집, 등등. 고졸이라고 안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왜냐하면 다니엘은 웃었으니까. 자신을 한번도 한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세상의 분노를 잉태하지 않았고, 오히려 떳떳하다고 했다. 이게 뭐요, 먹고 사는 것보다 중한 것이 어딨다고요. 

   그래서 지성은 다니엘이 그쪽에 발을 들일 때도 말리지 못했다. 그쪽이라 함은 술, 담배, 배설과 인간의 냄새가 어우러진 곳. 화려하면서 진창인 곳. 손을 뻗어 몸에 닿는 순간 돈이 되는 곳 말이다. 의외로 주위에선 그쪽 세계로 발을 들이는 이는 많았다. 지성도 가까운 곳에서 더러 봐온 터라 다니엘이 멀끔한 수트차림으로 연습실에 나타날 때 그리 놀라지 않았다. 때깔난다, 라고 속으로 생각만 했을 뿐.

   다니엘이 수트차림새로 연습실에 등장한 날이 한 달 남짓 됐을까, 그 날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연습실오 발길을 돌린 것이 화근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지성은 놀라고 말았다. 지독한 양주 향과 주위에 굴러다니는 캔맥주의 비릿한 보리냄새가 코를 찔렀고, 꾸깃하게 널브러져 있는 큰 덩치도 꼴사나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등은 비어있다. 야, 야. 발로 등허리를 차니까 꿈실거리며 눈을 뜬 다니엘은 또 웃었다. '그게 그렇게 돈이 되냐?' 라고 묻자 '좀 되대요.'라고 말한다. 지성은 그의 발치에 굴러다니는 식어빠진 캔맥주를 땄다. '내 집 나갈라고.' '어디 집.' '형네 집이랑, 그 집.'

   '왜 나가려고.'

   독립한다는 소리에 속상함으로 나온 말. 그만했다는 소리에 안심되며 나온 말. 의외로 그쪽은 얕은 구석도 있기 때문에 다니엘은 예상보다 쉽게 빠져나왔다고 할 수 있다.

   '창피해서.'

   다니엘을 쫓아낸 그녀는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다니엘이 말하기론, 스스로를 창피하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다고 했다. 처음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하라는 대로 했다. 술을 따르라면 따랐고, 옷을 벗기라고 하면 벗겼다. 왜 이런데서 일해, 그냥 나한테 와. 너 얼마야? 하는 소리들은 매우 날것이었다. 그러자 점점 어디 한 쪽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점점 웃음은 허탈해졌고, 초월적인 명령들에 자아가 괴멸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 다니엘에게 너는 판을 옮기라는 소리를 했고 그녀에게 가게 된 것이다. 그녀는 일대에서 '마담 손'이라 불리웠는데, 다니엘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기꺼이 누나의 품이 되주기로 했다. 띠를 돌아 넘는 나이 차이임에도 그는 꼬박 누나라고 불렀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될 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기웃거려.'

   웃고있었으니까. 침대위에 구부정하게 앉아있지만 그 어깨위의 아우라는 우람했다. 습관은 운명이 된다는 어느 영화의 구절처럼, 그는 제 자신을 비관하지 않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나는 이래서 안돼, 나 따위가, 내 까짓게 등등. 그녀의 톡 쏘는 담배향을 맡으면서 다니엘은 처음으로 누군가의 앞에서 울었다. 동시에 물밀듯 밀려오는 쪽팔림에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릴 수밖에 없었다. 제 두 손이 이렇게 큰지 그제서야 깨닫게 되었다.

   '역겹게 자해하지 말아라. 알고보면 다 좆밥이야.'

   혼자라고 깨닫게 되는 순간부터, 울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버려졌다는 박탈감과 혼자라는 두려움의 심연은 악랄했으니까. 하지만 단언컨데 누군가의 앞에서 울어 본적은 없다. 말 없이 눈물냄새를 없애주는 그녀 앞에서 자신은 재정비되었고, 민현의 품에서 울었던 그 날부터 온전히 바뀌었다고 장담한다. 그러니까 생동감이 넘쳤다. 삶에 활력이 돋았다. 심지어 성우에게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쓴 소주와 함께 울음을 삼켜낼 수 있었다. 


   그 날은 유달리 집에 들어오는 길이 멀었다. 그 때 일했던 돈으로 얻은 집이었다. 혼자 사니까 좋으냐, 라고 괜히 삐친 말투로 말하던 지성을 비롯해 꾸준히 다니던 체육관 동생들과 댄스팀원들이 번갈아가며 같이 있어주었다. 그래도 어떻게 형을 혼자 둬요, 라고 말하던 지훈마저 나간 텅 빈 집에서, 잔도 없이 들이키는 알콜에 취해 맨바닥에 웅크려 잠들기까지 생의 눈물은 없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굳게 믿었던 다니엘이 피를 토하듯 오열한 데에는 민현의 기여가 컸다.



   '네가 그동안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당장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단지 너에게 상처 주는 일은 만들지 말자는 생각 말고는.'

   '네가 얼마나 소중한데, 어디서나 너를 낮추지 말라고. 함부로 너를 상처내지 말고.'

   '내가 네 옆에 있잖아.'



   세상에 그렇게 아파본 적이 없었다. 사지가 끊어지는 것 같았고 내장이 새파란 불에 태워지는 것 같았다. 


   그 꼴사나운 짓을 하필이면 또 지성의 집에서 하고 있다. 지성은 한숨을 푹푹 쉬며 예전 그 수트차림의 다니엘을 맞이했다. 더불어 재환이 땀을 뻘뻘 흘리며 그를 부축하고 있었다. 뭐야, 설마 다시, 라고 했더니 단박에 부정하며 급히 화장실로 쳐들어가 구역질을 해댄다. 

   술 쳐먹었으면 곱게 집에 들어가서 발씻고 잘 것이지 왜 남의 집으로 쳐 들어오고 난리야! 지성의 외침에 다니엘은 변기통을 부여잡고 오열했다. 지성은 혀를 끌끌 차며 가자미 눈을 한 채였다. 제 집인 양 찬물을 벌컥 들이키고 있는 재환에게 정황을 물었다. 오랜만에 고정멤버들이 모였는데, 누구의 동의도 없는 모임이라 얼이 탄다. 재환은 신물을 삼키며 말했다. 결혼식 갔다가 피로연에서 저 자식 왕창 취해가지고, 말도 마요. 쟤 지금 눈 돌아갔죠? 미친놈 됐어요. 마침 위액으로 쉬어빠진 굵은 목소리가 화장실 문을 투과하며 날아왔다.

   "형, 내가, 내가. 형. 엄청 좋아하는데,"

   "나? 나? 뭐야. 얘. 돌았냐?"

   "황민현, 황민현... 민현아, 황민현아아!"


   재환의 표정이 급속히 경악으로 차올랐다. 


   "무슨 소리야, 누구 부른거야?"

   "아, 있어요. 그 형."

   "얘 누구 만나?"

   "그런가봐요."


   근데 대체 이게 무슨 꼴이야! 지성이 굳은 재환을 목을 짤짤 흔들었지만,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다니엘의 오열소리가 너무 미어져서 차마 다니엘을 건들일 수 없었다. 


   "쟤 우나봐."

   "그런가봐요."


  지성은 다니엘의 울음소리를 처음 듣는 것이어서 소름끼쳤다.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저렇게 서럽게 우는거야. 그, 있어요. 청순한 형.

   "... 일단 쟤 여기서 재우자."

   "형 좋은 생각이에요. 저도 좀. 택시비가 없어서."

   "쌍으로 지랄해라."

   외롭게만 자란 것 같지 않아서, 라는 성우의 말은 사실 상 89% 들어맞는 것이었다.




-



   시간은 결혼식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민현은 다니엘의 집이 좋았다. 가끔 저가 와서 청소를 해주니 입맛에 맞게 정돈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다니엘의 체향이 매우 진하게 났다. 그래서 그의 집으로 들어서면 그렇게 안아달라 애원하게 된다. 피차 다니엘도 마찬가지였다. 민현의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눈빛은 사나워지니까. 

   정신없이 정사를 치르고 서로의 살갗을 부비고 있다 보니 문득 생각난다.

   "결혼식 때 뭐 입고가게?"

   민현은 제 수트를 빌려줄 작정이었다. 눈대중으로 봤을 때 어느정도 체구가 비슷하니까 맞을 것 같다. 다니엘은 민현의 말에 눈두덩을 몇 번 긁적이더니 옷이 있다고 했다. 놀란 민현이 그의 어깨에 기대고 있던 머리를 떼었다. 눈에 총총히 박힌 궁금증에 다니엘은 퍽 난감했다. 입어봐, 수트라니.

   "어서 입어봐!"

   "오래전 거라, 잘 맞는지 모르겠네."

   "빨리, 빨리!"

   나체도 훌륭하지만 그의 수트는 또 얼마나 황홀할까. 민현은 다니엘의 등을 떠밀어 결국 침대밖으로 쫓겨난 다니엘이 드레스룸으로 비척비척 걸어 들어갔다. 민현도 맨몸으로 있을 수 없어 손에 집히는 다니엘의 티셔츠를 입었다. 엉덩이까지 가릴 수 있는 박시한 티셔츠라 하의는 입지 않겠다. 이어서 제 손에 의해 구겨진 침대보를 펴고, 바닥을 뒹구는 젖은 실리콘과 굳은 휴지조각 따위를 정리했다. 


   그 사이 다니엘이 드레스룸에서 나왔다. 미묘한 표정의 다니엘에게 민현의 입술이 감탄으로 벌어졌다. 이거는 뭐, 금의옥식하는 도련님이잖아! 그 새로운 모습에 민현은 목각인형이라도 된 듯 굳어졌다. 서로의 모습을 응시한 채 굳어있는 다니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의미가 깃들어져 있다.

   이 옷은 그렇다. 거울을 보니 그때의 자신이 있었다. 성우와 민현을 만나기 전의 자신. 역한 자해의 흔적이 가득한 채 그곳에 가기 위해 갑옷처럼 수트를 입고 다녔던 자신. 멋쩍게 서있는 다니엘에게 민현은 침대에서 일어나 천천히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그 모습은 마치, 영엄한 다리를 건너 이상의 공간으로 빨려들어가는 듯 보였다. 그 자체로도 포근해서 온순한 포식자같은 다니엘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민현은 앙앙불락한 마음을 뒷켠에 묻은 채 그를 똑바로 마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보내기 싫어.

   "너무 멋있다. 잘생겼다, 우리 니엘이."

   "아니다. 어깨가 좀 작아진 것 같고."

   "안되겠다. 가지 말아야겠다! 그냥 나랑 있자!"

   "그럴까?"


   푹- 안겨온다. 붙잡듯 매달려온다. 다니엘은 그의 얄따란 허리를 한 팔로 감았다. 나머지 한 손은 민현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온화한 체온으로 다니엘의 목에 얼굴을 묻은 민현이 칭얼거렸다. 마찬가지로 다니엘 또한 그의 흰 목에 숨을 불어넣으며 감히 말하고 싶었다. 그간의 상처로 울멍진 가슴이 콱 메이고, 텅 빈 등을 보듬는 손으로 벅차게 치솟는 감정을 말이다.


   "다니엘은 내 건데."


   사람의 모든 것을 이렇게 사랑해 본 적이 없다고. 사랑만이 이렇게 크게 차지한 적이 없다고. 사랑 뒤에 딸려오는 절망, 실망, 비관 등의 끄트머리조차 느껴보지 못했다고 말이다.


   심지어 열락으로 우는 자신을 들키고 싶었다.



-



   결혼식은 설렜고 아름다웠다. 평소에 알고 있던 녀석들이 아닌 것 같았다. 한껏 들뜬 표정들이었다. 잔뜩 힘을 준 차림새를 보며 여느 남정네 마냥 툭툭 장난을 걸어왔다. 다니엘의 얼굴은 연신 웃는 표정이었는데 일순 그의 입꼬리가 굳어진 건 아마도 원지영의 출현 때문일 것이다. 신경쓰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지만 찰나에 봤던 그는 생각보다 많이 변해있었다. 그 시절에 봤던 느낌은 온데간데 없고, 피폐해진 느낌을 고스란히 달고있었다. 원래도 작은 얼굴에 얄쌍한 몸을 갖고 있었지만 더욱 말라서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어디 한 곳 모나지 않고 뛰어나지도 않는 모습이었다. 재환도 그를 발견한 것인지 쟁쟁 울려대던 목소리를 낮췄다.

   얘기가 뒤섞였다. '도대체 누가 연락한거야.' '신랑이 했겠지.' '무슨 이웃집 슈퍼 할머니한테도 청첩장 돌리지 그러냐.' '그랬다던데.' '미친놈.' 


   누군가 그랬다. '다니엘 보러 온 거 아냐.' 순간 재환이 다니엘을 쳐다보았다. 어쨌든 그 사건은 학교를 꽤나 시끌벅적하게 만들었으니까. 그러니까 다니엘이 폭행을 저질렀다. 입원할 정도라면 엄청 때린 거 아냐. 그럴 녀석 같아 보이진 않았는데. 무궁무진한 소문의 진원지였으니까. 안면 튼 녀석들은 복수하러 온 것 아니냐며 우스갯소리로 지껄여댔다. 재환이 쉰소리 하지 말라며 버럭 소리지르자 축의금 부스에 있던 원지영이 곧 이쪽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다니엘은 묘한 감정이 들어서 입술을 씹었다. 아련한 느낌은 아니었다. 일종의 죄장감이었다.

   다니엘은 친구들보다 앞서 식장으로 들어섰다. 하객들이 꽤 많아서 앉을 자리는 없어 보였다. 뒷편에 걺음하며 멈추어섰고, 뒤이어 원지영이 따라붙은 것은 부러 모른척 했다. 대신 소매를 살짝 걷어 손목에 채인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검은 캐주얼 시계는 수트랑 안 어울린다며, 제가 선물해 준 메탈시계를 내어준 민현이었다. 그 살에 닿았던 것을 직접 채워주는데 묘한 안정감에 슬며시 미소지었던 다니엘이었다. 자연스레 자켓 안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몇 자 찍어내었다. [식 시작한다. 미니형, 자나.] 사회자의 목소리가 곧 식의 시작을 알렸고 동시에 원지영이 말했다.



   "오랜만이네."

   "..."


   헛기침, 침묵. 전날 새벽까지 붙잡고 놔주지 않아서 부은 모습으로 시계를 채워주었던 민현의 얼굴을 떠올렸다. 깨끗한 솜털에 퍼런 핏줄이 보이는 흰 피부, 저보다 더 속없이 웃어보이는 아름다운 얼굴, 몸, 마음, 말, 행동, 목소리, 눈빛. 대화창이 빼곡한 스마트폰을 흘깃 본 원지영은 훌쩍 자리를 뜬 다니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불쾌한 더위에 숨이 막힌 듯했다. 이제 더 이상 볼 일 없겠지, 라고 생각한 다니엘의 생각은 얼마 안가 큰 오산이었음을 깨달았다.

   문제는 조촐하게 진행된 피로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이 끝나고 상훈은 다니엘의 팔부터 붙잡았다. 임마, 너 튀지 말고 끝까지 남아있어라. 신부 친구분들이 꼭 부탁하는거고, 나도 부탁한다. 진짜 크게 쏠테니까 절대 토끼지 마라! 상훈의 손을 차마 뿌리칠 수 없었다. 무려 새신랑이지 않는가. 다니엘은 또 키판을 두드렸다. 화면엔 제가 보낸 문자로 가득했다.

  [미니형, 아직도 자나? 나 노래방이야.]

   민현의 답문이 없었다. 읽음 표시가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아 늦잠을 자고 있는 거 같았다. 너무 괴롭혔나, 그렇다기엔 잘 느꼈던 거 같은데. 라고 생각하자 집중력이 확 떨어져서 옆에 누가 앉았는지도 몰랐다.

   독한 향수냄새가 코를 찔렀다. 와글와글한 소리가 멀리 사라져있었던 다니엘의 바운더리 안에 낯설어진 목소리가 불쑥 침범했다.


   "다니엘."


   이 사람의 무엇이 좋았었을까. 그 땐 자신조차 미워했는데. 다니엘은 고민했다. 만약 나중에 우리도... 아니, 고민할 것도 없다. 지영의 눈을 맞췄다. 철저한 벽이 느껴졌을테다.

   "지금 만나는 사람 있어?"

   "...어."

   "그래, 그렇구나."


   무더위 같은 시간이다. 입술도 떼지 않은 채 목을 울렸다. 다니엘의 눈이 매서워졌다. 그 정도면 난 너한테 충분히 했어. 그러니까 너도 네 인생 알아서 잘 살아. 그 눈빛이 말해주었다. 흔들림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얼굴에서 미련없이 시선을 뗐다. 이토록 민현이 보고싶어졌다. 말랑하고 예쁜 입술을 한 입에 삼키고 씹고 맛보고 싶다. 마른 입안에 혀를 굴리며 어디 앉을 자리 없나 주위를 둘러보던 차에 재환과 눈이 마주쳤다. 턱짓으로 제 옆자리를 가리키는 것이 보였다. 다니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릎에 힘을 주고 일어나려는 순간, 그의 허벅지 위에 원지영이 손을 얹었다. 순간 술비린내가 확 끼쳤다.

   "그 사람도 널 사랑하니?"

   "...어."

   "진짜 나빴다."

   다니엘은 도로 앉으며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 시절의 자신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잘한 연애는 아니었다. 당시는 너무 어렸고 방황을 빙자한 방탕한 삶을 살았고, 정체성의 혼란으로 애써 여자를 만나려 그에게 상처를 주고, 그 상처를 후벼파기도 했다. 불완전한 자신은 지나가는 족족 모두 피바다였다. 그래서 미안했고, 다시는 나같은 사람 만나지 말라고 했고. 그리고 그의 어긋남을 모조리 제 탓으로 돌렸었다. 하지만 사랑스러운 이가 그랬다. 자신을 낮추지 말라고, 상처주지 말라고. 자신을 일깨워 준 이가 말했다. 자해하지 말라고. 어떤 지위에 있든 다 좆밥이라고. 

   다니엘은 그 모든 것이 제 탓이 아님을 알았다. 그래서 초연히 지영을 볼 수 있었고 예전의 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 과오는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너도 한 것이라고.

   "손 치워."

   하지만,

   "난 한번도 너 잊은 적 없는데."

   "..."

   "개새끼."


   전가된 책임마저 막을 수 있을까.

   "너 엄청 지저분하잖아, 그 사람도 알아?"

   날 이렇게 만든 건 너잖아.

   다니엘의 눈이 번쩍 뜨였다. 순식간에 아니라고 반박할 수 없는 자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과오의 때가 묻은 수트를 보며 맑게 웃고 있던 민현의 얼굴이 부상했다. 때론 저보다 짖궂게 장난을 쳐오는 순수한 얼굴이 떠오르자 다니엘의 손은 술로 향했다.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그 이명소리가 민현의 목소리로 둔갑해버렸다.

   날 망쳐버린 건 너잖아.

   가히 덮치는 두려움이 충격적이었다. 직감적으로 민현에게 이 말을 들을 순간이 올 것 같았다. 동시에 그 순간만큼은 절대 만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매우 강력하게 들었다.

   그가 지어주는 웃음에 넋이 나가 주위를 둘러보지 못한 것이다. 점점 환기되는 자신의 과오들은 분명 민현을,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무릎꿇게 만들 것 같았다. 무서웠다. 한 술, 한 잔을 들이키며 제 전적들을 되짚었다. 

   가슴 안쪽 주머니가 떨렸다. 몇 분간 계속 떨리다가 멈췄다. 이런 상태로 민현을 만날 수 있을까. 자신은 너무 초라해서, 그는 너무 빛나서. 미천한 제 욕심에 더 이상 그를 놓아줄 수 없을 것 같아서.

   민현의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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