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건 일본이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자란 곳은 일본이 아니다. 자신이 언제 어떤 경위로 일본에서 러시아로 넘어오게 된 건지도, 용병들의 손에 자란 것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런 건 상관 없다. 그들이 없었으면 나는 진작에 얼어 죽거나, 굶어 죽거나,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에게 이유도 없이 총을 맞아 죽었을 것이다. 그들 덕분에 나는 올해로 17살까지 살아있고, 임무로 일본에 와있으며, 이제 보름째가 된다. 




이곳에는 쉽고 간편하게 열량을 채울 수 있는 음식들이 많다. 그런가 하면 필요 이상의 열량을 차지하면서도 정작 필요한 에너지는 보충되지 않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음식들도 많았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사와 빵을 빼고 고기와 야채만 먹었다. 매일 세끼. 빠뜨리지 않고. 먹을 때마다 생각한다. 동료들은 오늘 무얼 먹었을까. 얼마나 죽여야 했을까. 




대장을 포함한 동료들은 본래는 한 때 전쟁 영웅이었다. 사방에서 포탄이 빗발치며, 동료의 절단된 사지가 날아가고, 피를 내뿜으며 신체 밖으로 튀어나온 장기의 일부가 폭발의 충격으로 흙투성이가 되는 와중에 나같은 고아를 거두고, 약한 여자와 노인들을 보호하는 것. 그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일본에 오게 된 이유는 암살 타깃이 일본에 있는 일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조금 이상한 말 같지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러시아에 있던 일본인이니까 사족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보다 한살 위의 여자아이. 고위 정치인의 딸도, 재벌가의 딸도, ‘우리 일’에 방해되는 ‘조직’의 누군가의 ‘딸’도 아니었다. 누군가의 딸이 아닌, 고아. 나와 같은. 

그것이 지금 내가 도쿄에 와 있는 이유다.




동료들 덕분에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이 끝나자 그들의 ‘할 일’도 사라져버렸다. 국가에서는 충분한 보상을 해주지 않았고, 나와 동료들은 먹고살기 위해 ‘하던 일’을 하기 시작했다. 전쟁터가 아닌 곳에서 적이 아닌 사람들을 죽이고, 그 대가로 나를 포함한 동료들을 위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사는 데 부족함이 없는 대가를 얻었다.




그 외에도 타깃과 나는, 몇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총을 다룰줄 안다는 것. 누군가를 죽이는 게 일이라는 것.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먹고 살기 위해’ 하는 행위인데 반해, 타깃은 누군가의 명령으로 행한다는 것이었다. 내게 어떤 것이 더 우월하고 도덕적인지를 구별할 능력은 없다. 다만 내가 타깃에게 유일하게 ‘인간적으로’ 친근감을 느꼈던 것이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을 때의 배신감은 나름 충격적이었다.




처음 보수를 받은 날, 동료들에게 각자의 몫을 나눠준 대장이 홀로 자신의 방에서 돈이 너무 많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울먹이던 혼잣말을 방문 너머로 들은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대장은 ‘하던 일’을 시작한 후로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술을 마셨다. 지금도 마시고 있을까. 




타깃은 낮에는 일본식 카페에서 종업원을 하고, 그 외 자잘한 ‘심부름’ 등을 하고, 밤에 ‘본업’을 하는 이중생활을 한다. 그것도 누군가의 명령인 걸까.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나와 동료들은 대개 낮에는 수면을 취해 체력을 보존하고, 밤에 일어나 새벽에 일을 시작했다. 

러시아에 있었을 때는 달이 뜨면 일을 시작할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이곳 도쿄에서는 해가 뜨면 일을 시작하는 모양이다. 아마도, 나와 동료들을 제외한 나머지 ‘평범한’ 사람들은 그러는 듯하다. 

그들은 누군가를 죽이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다. 타깃도 낮에는 카페에서 일하니까, ‘본업’을 관두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명령이라서일까. 그것밖에는 달리 떠오르지 않았다.




타깃의 ‘심부름’은 몇가지 있었는데, 지금까지 파악한 패턴으로는 커피콩 배달, 보육원에서 아이들 돌봐주기, 경찰 ─ 아마도 형사인 것 같다 ─ 의 부탁 들어주기, 고양이나 물건 찾아주기 등이 있었다. 대가를 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타깃은 대부분은 아무런 대가도 없이 사람들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궁금해서 하는 소리는 아니다. 내가 타깃에게 접근도 하지 못한 채 몇날며칠 관찰만 하고 있는 것 만큼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대장이 이 임무를 맡겼을 때, 동료들이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내게 스나이퍼 임무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사격 실력의 문제는 아니었다. 단지 내 성격상 며칠 동안 진득하게 타깃을 관찰하는 게 서툴 것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나도 내심 동의했다. 실제로 이 정도로 오래도록 시간이 걸리는 건 예상 밖이었다. 

첫째, 믿기 어렵지만 타깃은 ‘총알을 피하는’ 능력이 있다. 그건 나도 그의 ‘본업’을 관찰하고 직접 확인했다. 애초에 대장도 그래서 스나이퍼 임무를 내린 것이리라 충분히 이해했다.

둘째, 처음에는 낮에 타깃을 암살하려고 했다. 정체야 어쨌든, 낮에는 겉으로 보는 한 민간인이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타깃이 일하는 건물 주변에는 몸을 숨기고 저격할만한 건물이 없었다. 이게 가장 큰 맹점이었다. 어쩌면 타깃은 생각보다 용의주도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동료들의 말마따나, 나는 타깃을 관찰하고 적절한 때를 기다리는데,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수확 없이 무의미한 보름과 그보다 더한 수일의 고민 끝에, 나는 작전을 바꾸었다. 아마 이건 대장도 동료도, 타깃조차 예상하지 못한 작전이리라.




앞서 내가 타깃에게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 것은, 비록 동기는 다를지라도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죽이는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한 또래의 일본인 여자아이가 사실은 비살상 탄을 쓰고, 누군가를 ‘구했다’라는 것이었다. 낮에도, 밤에도, 타깃이 하는 일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누군가를 돕고, 구하는 것. 타깃이 일을 하는 걸 보면 동료들이 생각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왜. 어째서. 




‘일’을 할 때의 타깃은 일견 장난스러운 것 같아도, 빈틈이 없었다. 단순히 총알을 피하는 능력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말 그대로 허점이 보이지 않는다. 타깃이 상대하는 ‘적’이 앞에 있건 뒤에 있건, 그의 붉은 눈을 피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타깃은 밤의 심판자였다. 이곳을 지키는 수호신이었다. 무력은 쓰지만, 살생은 하지 않는다. 그가 쏘는 자는 쓰러지기는 해도, 죽지는 않았다.

일이 끝난 후 타깃이 외부에 연락해서, 쓰러진 자들을 어디론가 데려가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그것조차 그들을 죽게 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단순히 까다로운 임무 대상이라고 생각했던 자에게, 러시아에서는 느낀 적 없던 이상한 감정들을 느꼈다. 기만. 오만. 자만. 자기만족. 자기 과시. 표현이 서툰 편이라는 건 알지만, 그런 단어들이 떠올랐다. 부정적인 감정이란 것만 간신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어쩌면, 단순한 타깃에게 불필요한 감정을 느끼는 걸지도 모른다.



‘구 전파탑’이라 불리는 쓰러진 폐허 건물의 최상층에 서서, 밤에도 환하게 빛나는 도시를 내려다본다. ‘본업’을 마친 타깃이 가끔 홀로 이곳에 와서 지금의 나처럼 마을을 내려다보는 것을, 지금까지 몇 번 정도 보았다. 

한 손에 권총을 들고 어둠 속을 거침없이 전력 질주하던 타깃이, 유일하게 총구를 내려놓고 빈틈을, 등을 보이는 순간. 달빛이 그의 금발을 비추고, 붉은 눈동자에 황금빛이 밤하늘의 별처럼 새겨진다. 고요의 순간. 옆얼굴에는 만족감이 언뜻 비치며, 낮에 카페에서 손님을 상대하면서도 볼 수 없었던 부드러운 미소와 동시에 어딘가 쓸쓸한 눈빛을 하는 모습을. 

초반에 타깃의 행동반경과 패턴을 파악할 무렵 빈손으로 쫓아다니던 시기였었다 ─ 근거리에서는 총알을 전부 피할 테고, 얼마나 될지 모르는 짧은 타이밍에 저격 소총을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면서 조립할 여유는 없었으므로 ─ . 지금 생각하니 그게 유일한 기회일 거라 생각했다.




보름달이 뜨는 밤이었다. 러시아에서 보름달이 뜨는 날에 일하면 대개는 둘 중 하나였다. 잭팟이 터지거나. 동료 중 누군가 크게 다치거나 죽거나. 과연 이곳 일본에서도 같은 법칙이 적용될까. 




타깃은 ‘오늘도’ 어김없이 ‘구 전파탑’의 최상층에 올랐다. 노리긴 했지만 요즘 들어 잦아지는 것 같다. 심경의 변화라도 있는 걸까. 아무래도 상관없다. 타깃이 가장 방심하는 타이밍도 완벽히 파악했다. 오늘은 일본 날짜로 9월 22일. 날짜가 변하기 전, 반드시 임무를 완수할 것이다.




*안녕, 스토커 씨. 생각보다 귀엽게 생겼네*.” 

이후 *표시는 러시아어

타깃이 나를 보자마자 그런 말을 했다. 정확히는 서로 총구를 맞대고, 수차례 몸싸움을 벌인 후에. 생각보다 손쉽게 제압당해서 욱하는 바람에 몇 번을 다시 덤볐지만, 번번이 제압당했다. 화가 치밀었다. 


*왜 날 죽이지 않는 거지.”

*그쪽이 날 죽이러 온 거 아니야?”


당황한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한다. 언제부터…………. 진작 알고 있었다는 건가. 


*위조 여권 봤어. 일본식 이름이 이노우에 타키나라며? 네가 지은 거야?”

*폭포 밑에서 주웠으니까.”

*응?”

*폭포 밑에서 주웠다고, 대장이.”

“아, 아아. 아아~. (たき)인가. 그런 거였구나. 잘? 어울리네?”


방금 일본어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타키나.”


이번에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내 위조 여권상의 이름. 발음은 조금 낯설었지만, 이게 진짜 일본식 발음인 거겠지.


*이건 우리에게 아름다운 우정의 시작이 될 것 같아.”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러시아어인데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적이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카사블랑카. 영화 대사인데, 몰라?”

*그런 건 본 적 없어.”


그럴 시간은 없었다. 그럴 환경도 아니었고. 총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눈앞의 타깃을 노려본다. 타깃은 나를 보며 웃었다. 구 전파탑의 최상층에서 마을을 내려보는, 그 눈. 그 미소. 붉은 눈에 내 모습이 비친다.


*타키나, 혹시 생일 언제야?”

*몰라.”


어째서 일일이 답해주고 있는지 스스로 알 수 없었다. 아니, 맞다. 나는 기회를 노리고 있다. 타깃을 죽일 기회를. 그가 완전히 방심한 찰나에, 그의 이마를, 또는 정수리를, 완벽하게 노릴 틈을.


*있지, 몇 시간 있으면 곧 내 생일이야.”


그러니까 살려달라는 말인가 생각했다. 그 다음에 이어질 말에 총을 쥔 손이 나도 모르게 움찔, 떨렸다.


*이야기하면 긴데, 내 심장이 기계거든. 아이언맨 같은. 아, 이것도 모르려나. 하여튼, 기계는 뭐든 수명이 있잖아? 그게 내 18번째 생일까지야. 여기까지는 이해하겠어?”

*어차피 곧 죽을 목숨이라 이건가?”

*뭐,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한데. 정확히는 너한테 죽으러 왔어.”

“…………………….”

*너무한 거 아냐?!”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바디랭귀지로 오른쪽 검지를 자신의 이마에 대고 빙빙돌리자, 타깃이 소란스럽게 떠들었다. 잘 통한 모양이다.


*봐봐, 예쁘지?”


타깃이 턱짓으로 깨진 유리창 너머의 풍경을 가리켰다. 보름달을 일부 가렸던 구름이 걷혀, 타깃의 금발과 얼굴을 비춘다. 그 모습을 바라본다. 트리거에 손가락을 건 채.


*나, 이 풍경이 좋아.”

*여기서 이걸 내려다보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한눈에 보이거든.”

*커다란 도시가 움직이기 전의 조용함.”

*선생님하고 만든 리코리코. 아, 우리 가게 이름이야. 알고 있으려나? 그리고 선생님이 내리는 커피 냄새도 좋아하고. 단골손님들, 마을 사람들, 맛있는 음식, 풍경이 예쁜 곳. 동료.”

*그게 내 전부야. 타키나가 날 타깃으로 한 사정까진 모르겠지만.”

*날 필요로 해주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일을 해주고 싶어. 그럼 그 사람의 기억 속에 내가 남을지도 모르잖아.”

“…………………….”

*그러니까, 자꾸 머리에 대고 손가락을 빙빙 돌리지 마! 혹시 그거야? 러시아식 욕이야? 아니면 일본어로 바보라는 말이 뭔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 절대로! 안 알려줄 거지만!”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타깃은 헛기침을 했다.


*죽는 건 무섭지 않아. 어렸을 때부터, 심장 수술을 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던 거니까.”

“…………………….”

*단지, 소중한 사람들 앞에서 죽는 모습을 보이는 건 죽는 것만큼 싫었어. 그래서 너로 정한 거야.”


아까부터 타깃이 일방적으로 떠드는 걸 듣고 있자니, 점점 머리가 혼란스러워진다. 모순이 가득한 발언. 아니, 에고인가? 자기애? 누군가에게 죽기를 바라는 자기애란 게 존재하는 걸까?


*타키나는 임무를 완수하고. 나도 사람들 몰래 조용히 죽을 수 있고. 이거야말로 일석이조!”


검지와 중지를 펼쳐 들어 보이며 웃는다. 분명하다. 타깃은 제정신이 아니다.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다.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임무나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서, 이 자는 위험하다. 죽여야 한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총을 들 수 없었다.


“타키나.”


타깃이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온다. 총을 쥔 내 손을 양손으로 감싸듯 잡고 들어 올려, 자신의 왼쪽 가슴에 총구를 가져다 댄다. 고동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제야 타깃의 심장이 기계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건 우리에게 아름다운 우정의 시작이 될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가 또다시 영화의 대사를 인용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틈을 놓치지 않고 방아쇠를 당긴다. 기계로 된 그의 심장에. 이마에. 또 한번 심장에.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밤하늘을 수놓는 황금 빛들 아래 차가운 바닥 위, 그는 머리에서 대량의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더할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은채. 그 모습을 보고, 또 한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여러번 심호흡을 해도 분노가 가시지 않았다. 화풀이로 아직 남아있는 탄을 또 한번 그의 몸에 쏠까 했지만, 총알 낭비라 생각했다.


"*젠장, 젠장! 어째서! 어째서!"


시체가 되어버린 그의 옆에 대고 탄이 떨어질때까지 마구잡이로 총을 쏘아댄다. 죽어서도 총알을 피하는 건지, 그의 몸에는 처음 죽일 때 쏜 것 외에 총상은 없었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이 그의 눈동자색처럼 붉은 카펫이 줄줄 새어나오는 것을 보고, 뒤로 물러나 피한다.

시계를 보자, 날짜가 지나 있었다. 9월 23일. 00시 03분. 생각보다 오래걸렸지만, 무사히 임무를 완수했다. 내 할일은 끝났다. 이제 동료들에게 돌아가면 된다. 아주 잠깐이라도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보름달이 지기 전에, 나는 그곳을 떠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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