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전에 썰체로 연재했던 미비싶을 소장본으로 만들기 위해 글체로 수정한 버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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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위무선은 남씨 규훈석 앞에서 홀로 몇 번이고 고개를 주억이며 남다른 소회를 삼켰다. 운심부지처 내 소란 금지. 음주 금지. 야간 통행 금지. 사적인 싸움 금지. 알지, 나 다 알지. 잘 알고말고. 내가 그 ‘아정집’이란 것만 몇 번을 베낄 운명이었는데. 그렇기에 위무선은 해시亥時는커녕 유시酉時부터 방 밖으로 걸음을 하지 않았다. 강징은 아무래도 강풍면의 친아들이자 차기 종주이다 보니 다른 선문세가의 자제들과 할 말이 많아 아직 모임에서 돌아오지 못한 참이었다.


물론 강징이 위무선더러 방에 남으라 권한 건 아니었다. 하고픈 말은 모조리 삼켜 찌푸린 낯을 하고도 강징은 의연하게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때론 어설픈 배려가 더한 독이 되는 걸 잘 아는 이의 뒷모습이었다. 사실, 불안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혹시나 위무선에게 무례한 언사를 하는 놈이 있으면 어떻게 족쳐야 하나 내내 고민하기도 했고.


그러나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도 위무선이 먼저 먼 길을 와서 고단하니 쉬어야겠다고 말을 해주었기에 강징이 반은 안심하고 반은 찜찜한 기색으로 웃는 얼굴로 제 등을 떠밀어주는 위무선의 배웅을 받았다. 여긴 네 집이 아니고 너는 이 집의 애가 아니니 당장 꺼지라 소리치던 까칠한 녀석이 왜 저렇게 되었는지. 강징의 극적인 변화에 제 불안하고 위태로운 꼬라지가 절반을 넘어 태반은 영향을 주었단 걸 까맣게 모르는 위무선은 그저 고개만 갸우뚱이었다.


분명 같은 땅 위에 발붙이고 사는데 고소의 계절은 어찌 이리 운몽과 다를까. 반도 채 열지 않은 창문으로 바깥을 빼꼼히 내다보던 위무선은 눈에 보이는 정경이 그새 익숙해진 연못과 누대가 아닌 깎아지르는 산세인 것에 땅은 같은 땅이되 이 땅은 운몽보다 높아서 그런가보다, 하는 한갓진 생각이나 했다.


운심부지처의 악명 높은 삼천 가규석 앞에서 ‘이게 뭐야!’ 하고 경악의 비명을 지르는 강징의 입을 틀어막을 때부터 귓가에 ‘운심부지처 내 소란 금지.’라고 근엄하게 말하는 기억 속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 위무선은 오늘 종일토록 미묘하게 기분이 들떠 있었다.


심지어 강징의 입은 막아놓고 자기가 웃을 순 없으니 황급히 고개를 숙여 웃음을 참았었는데, 그 떨림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위무선의 어깨를 끌어안고 운심부지처의 문턱을 넘은 강징이 그 후로도 내내 따라다니며 이곳은 운몽과 달리 여름에도 서늘하니 옷을 제대로 챙겨입으라며 잔소리까지 해댔으니.


실없는 웃음이 끈덕지게 새어 나와 두 손으로 입을 막고 밖을 구경하던 위무선은 이 방에선 달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가 알기론, 이날은 달이 아주 휘영청 고왔었는데 말이다. 운몽의 대사형으로 자란 위무선이라면 고소성의 명주인 천자소를 그리워했겠지만 운몽 소종주 강징의 그림자로 자란 위무선은 엉뚱하게도 술보단 달이 고팠다. 우자연이 내준 방은 풍수도 잘 따져 지은 건물이라 사계 중 언제라도 달을 보면서 잘 수 있었기에.


봐 줄 만한 거라곤 멋진 풍광밖에 없는 곳이면서 손님을 어떻게 이렇게 박대할 수 있담?


정해진 미래를 반복하지 않겠다 굳게 마음먹고 방 안에 틀어박히긴 했어도 기이한 향수에 젖기도 했고 아직 남망기가 순찰을 돌 시간까진 멀었다는 안도감이 자꾸 마음을 충동질해 위무선은 결국 방 안에서도 스산한 한기에 벗지 못한 장포를 잘 여미고 밖으로 나섰다. 우자연이 하도 밝은색으로 옷을 지어준 덕분에 고소의 새하얀 수학복이 어색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담장 가까이엔 아예 가까이 가지 않았다. 불필요한 오해를 받을 필요는 없을 테였다. 대신 점점 인적이 드물어지는 잘 가꿔진 정원 사이를 걷다 적당한 누각을 발견하곤 그 지붕 위로 기어올랐다. 유시가 끝나기 전까지만 구경해야지. 위무선은 남망기를 만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 가규를 어기는 것이란 걸 잘 알면서도 그 길을 골라 재회하긴 싫었다. 재회라. 사실 그 단어도 참 우스웠다. 일면식도 없는 이를 그립다고 생각할 수 있을 줄이야.


남망기는 단정하고 차분하며 행실이 바른 사람이니 그에 적당한 모습을 보여주면 이번엔 어쩌면 마주 앉아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오지 않을까. 장소는 어디라도 좋지만 그는 책과 고요를 사랑하니 아무래도 장서각이 가장 어울릴 거야. 위무선은 운심부지처에 오는 내내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더랬다. 체벌을 받는 사람과 감시를 하는 사람이란 딱딱한 관계가 아니라, 지기知己는 될 수 없어도 하다못해 동문수학한 안면 있는 상대라도 될 수 있었으면, 하고.


둥글게 차오른 달은 두 손 모아 소원을 빌기에 딱 알맞았지만 위무선은 소원을 빌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질 것을 알기에 잠자코 빈손으로 무릎만 끌어안아 웅크렸다. 연화오의 사람들은 위무선이 지나치게 욕심이 없고 가볍게 투기하는 일마저 없다며 자를 무선无羡이라 지어주었지만 실은 바라고 원하는 게 너무 많아 차마 탐욕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을 뿐인 것을.


단지 제 행복에 앞서 기원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아, 달에도, 유성에도, 풍등에도, 하늘 높이 쏘아 올려진 불꽃에조차 아무것도 빌지 못했다. 식전에 눈 감고 읊조리는 한 마디 감사 역시 사치라. 아직 짓지 않은 죄를 이고 살아가는 제 꼴이 비참하여 눈물이 나다가도, 지금 울지 않으면 훗날 돌이킬 수 없는 비극 앞에 더 처참하게 무너질 것을 아노니.

 


번민에 헐떡이며 잠 못 드는 밤으로 한 명의 눈물을 멈추고.

사무치는 외로움에 어깨를 떠는 새벽으로 한 명의 상실을 막고.

자책과 책망에 쓰라린 여명으로 한 명의 생을 구하고.

 

나 하나 이 악물고 버티어 살아내는 일로 되돌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생각하면 무구無垢로 평온한 자결마저 내겐 과분하여. 그저 이러기 위해 부여된 예지豫知의 삶이기에.

 


그런데, 어디에도 말하지 못하고 눌러 삼킨 속내가 너무 아파서 그랬을까. 그게 아니라면 강징의 성화에 껴입은 옷 덕분에 어둠 내린 밤의 한기가 잘 느껴지지 않아서 그랬을까. 유시가 끝나기 전에 돌아가겠다 다짐한 사람은 어딜 갔는지 시간의 흐름을 까맣게 잊은 채 넋 놓고 하늘만 바라보던 위무선은 어느새 자기 옆에 눈처럼 새하얀 옷자락을 팔락이는 옥골선풍玉骨仙風의 소년이 조용히 선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권운 무늬가 선명한 말액. 은빛으로 빛나는 검. 서리처럼 차가운 눈과 감정이 읽히지 않는 단아한 얼굴. 직전의 우울이 그간의 설렘을 죄다 잡아먹은 것인지 위무선은 그렇게 만나기를 고대하던 남망기가 바로 지척에 왔는데도 반갑기보다는 당황과 부끄러움이 커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다 굳게 다물린 입술이 살짝 벌어지는 걸 보곤 그 입에서 나올 말을 가로채서 대신 읊었다.



“야간엔 통행금지지! 알아, 미안해!”



질책이 두려워 급히 아래로 뛰어내리려던 위무선은 나무 그림자에 가린 지붕의 경계를 잘못 보고 미끄러져 그만 속수무책으로 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겁먹은 소년은 악, 하는 비명만 간신히 삼켜냈다. 왼쪽 발목에 시큰하게 느껴지는 통증이 어쩐지 익숙했다. 꼭 아홉 살에 연화오를 도망쳐 나갔다 구덩이로 굴러떨어진 그 때가 떠올라 요동치는 어린 감정을 꾹 누른 위무선은 소리도 없이 사뿐히 뒤따라 내려온 남망기에게 이미 완연한 울상이 된 얼굴로 작게 덧붙였다.



“소란도 금지였지… 정말 미안해…….”



아. 이번엔 정말 가규도 어기지 않고 남잠에게 미움받을 일이라곤 조금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는데. 미래란 건 늘 이렇듯 언행 몇 개 바꾸는 것으로 손쉽게 비틀 수 있을 것처럼 만만하게 보이다가도 아차 하는 순간 어김없이 동일한 결과를 내어버리니.


대체 언제쯤 긴장 풀고 하룻밤을 넘겨볼지.


위무선은 남망기의 싸늘한 얼굴을 살피다 시무룩히 어깨를 떨구고 부디 남망기가 첫인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기만을 빌었다. 그런 위무선의 상상과는 달리, 남망기는 가규를 어긴 사람에게 화가 난 게 아니라 답지 않게 말문이 막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는 것뿐이었더랬다. 일단 자기가 할 말을 위무선이 먼저 해버리기도 했고. 그야 누구라도 방금 지붕에서 떨어진 사람이 아프단 소리 대신 남의 집 가규나 읊고 있으면 당황스럽겠지 않겠는가.


비틀거리며 일어서려던 위무선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본 남망기가 다쳤구나, 짐작하며 다가서자 위무선은 또 손사래를 마구 치며 남망기를 만류했다.



“괜찮아. 너 남한테 닿는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 혼자 갈 수 있어.”



그 말에 남망기는 기분이 묘해졌다. 나이나 행동거지, 그리고 입은 옷을 보아도 상대는 오늘 막 운심부지처에 도착한 외부 수학생이 분명한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지. 누군가 설명해주었을 리 만무한데.


아래로 내리깐 눈동자에 잠시 혼란이 스쳤다. 규칙을 적용하는 일에 예외를 용납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본인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까지 가혹하게 대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남망기는 다친 사람 앞에서 자신의 호불호를 우선시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부축이라도 해줄까 싶어 바닥으로 내렸던 시선을 조금 올려 위무선을 찾자, 위무선은 그사이 도움을 요청하기보다 정말로 혼자 나무를 붙잡고 일어날 생각이었는지 손으로 바닥을 짚고 벌써 저만치 기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오늘만 해도 두 번째로 놀란 남망기는 황급히 뒤를 따라가 위무선의 앞을 막아섰다. 위무선은 바닥에 엎드려 낮아진 시야에 흙먼지 한 점 묻지 않은 흰 목화가 들어오자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들어 남망기와 눈을 맞추었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심중을 대변하듯 오묘한 회보랏빛의 눈동자가 마구잡이로 방황하고 있었다.



“그럼… 그럼, 나 뒷덜미만 좀 잡아서 일으켜줄래? 그건 몸이 닿지 않는 거니까 괜찮지?”



남망기는 그 천연한 태도에 어쩐지 속이 상해서 아무런 말도 없이 위무선의 팔을 꽉 붙잡고 일으켜 부축했다. 대체 날 얼마나 무도無道한 이로 보고 있기에. 지붕에서 떨어질 때조차 비명을 참았던 위무선이지만 고소 남씨 특유의 너무한 악력은 견딜 수 없어 악다문 잇새로 작게 앓는 소리가 흘렀다. 남망기는 저도 모르게 손에서 조금 힘을 뺐다.


폭 넓은 옷에 가린 태가 늘씬하게 떨어지는 게 말랐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조금 두껍게 겹쳐 입은 옷 너머로 만져지는 팔이며 어깨, 그리고 피진을 든 손으로 감싼 허리가 정말로 얇아서 곧게 뻗은 남망기의 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게다가, 맞닿은 몸이 차가웠다. 아무리 고소가 사철 내내 기온이 낮다곤 해도 계절은 비파가 무르익는 여름일진대.


그런 남망기의 혼잡한 머릿속을 알 길 없는 위무선은 이 애 아무래도 원치 않게 내 부목 노릇하게 된 게 영 못마땅한가보다 넘겨짚고는 다친 발에 자꾸만 힘을 실었다. 다행히 부러지진 않은 모양이라. 실은, 연화오의 사람들은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지금의 위무선은 반쯤 금단을 맺기 시작한 상태여서 뼈만 상하지 않았으면 남망기의 도움 없이도 방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남망기 역시 위무선의 속내를 모르니 팔과 허리를 붙잡아 주어도 제대로 기대지 못하고 계속 비틀거리는 위무선이 거슬렸다. 좀 더 정확하게 따지자면 신경이 쓰였다. 결국 이런 식으로 어설프게 발맞추어 가기엔 거리가 멀다 판단한 남망기가 먼저 위무선의 앞에 업히라고 등을 돌려대었다. 남망기의 손 대신 복도 기둥을 붙잡고 버티던 위무선은 허우대 멀쩡한 사내가 어떻게 다리를 조금 다쳤다고 남 등에 덥썩 업히겠느냐 사양하다 또 그놈의 너 타인이랑 닿는 거 싫어하잖아, 타령만 한참이었다.


남망기는, 이제 위무선이 자길 배려해서 저러는 건지 아니면 도발하려고 자극하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또다시 흐트러진 평정에 드물게 미간을 살짝 구긴 남망기는 결심한 듯 깊은 숨을 한 번 후 내쉬곤 단번에 위무선의 등과 무릎 아래를 받쳐 안아 들었다. 일순 얼어붙었던 위무선이 당장에 내려달라 발버둥 치자 다정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냉랭한 목소리가 아까 위무선이 선수 쳐서 빼앗아간 제 몫의 질책을 엄하게 읊조렸다. 운심부지처 내 소란 금지.



“한 번 더 소리 지르면, 금언이야.”



위무선은 도무지 울상을 감출 수가 없었다. 고소 남씨의 금언술이 얼마나 지독한지는 한나절 내내 금언에 걸려 씨근덕댔던 기억이 있으니 정말로 당하기 싫었다. 위무선이 겪어보지 않은 어느 미래의 ‘위무선’은 이런 식으로 현재의 삶에도 깊이 간섭하곤 했다. 그러니 어찌하랴. 남망기의 어깨를 마구 잡아 흔들던 손으로 대신 제 입을 가리고 딱딱하게 굳은 채 얌전히 안길 수밖에.

 





수학생이 머무는 숙소 쪽으로 걷던 남망기는 얼마 가지 않아 그보다 가까운 정실로 향했다. 숙소에는 약과 붕대가 있을지 확실치 않았다. 정실에 와 본 기억이 없는 위무선은 남망기가 자신을 침상 위에 내려둘 때까지 두 손으로 입을 막고 눈만 데구르르 굴리다 서랍을 열어 약과 붕대를 꺼내는 남망기의 손길이 퍽 익숙해 보이고 결정적으로 좌탁 위에 놓인 검은 고금에 이곳이 그의 방인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왜?


생각을 더 잇기도 전에 마주 앉은 남망기가 왼쪽 바지를 걷어 올리자 토끼처럼 팔짝 뛰어 물러난 위무선은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오늘만 해도 몇 번째인지 모를 남망기의 배려를 사양했다. 이것까지 제 고집할 영역은 아니라 남망기는 이번엔 순순히 약과 붕대를 밀어주었다. 종아리가 워낙 가늘어 더 퉁퉁 부어오른 것처럼 보이는 발목을 드러낸 위무선은 약은 내버려 두고 붕대만 빠르게 감았다. 남망기는 그 놀라운 솜씨에 그만 본래 없던 말을 더 잃어버리고 말았다.


천을 여러 번 겹쳐 감아서 풀리지 않게 해야 하는 붕대를 대뜸 발목에 한 번 돌려 매듭을 짓고는 발아래까지 둘러 고정하지도 않고 정말 부어오른 모습만 보이지 않게 후루룩 감는 게 의학에 대한 지식이 조금도 없거나, 혹은 제 몸뚱이 하나 제대로 건사할 줄 모르는 사람 같아 보였다. 말도 잃고 어이도 잃어버려 그 꼴을 묵묵히 지켜보던 남망기는 ‘자, 다 했다. 폐 끼쳐서 미안해.’ 하고 예의 바르게 인사하며 일어나는 위무선의 손을 잡아 도로 침상에 앉히곤, 그 발치에 내려가 앉았다.



“함, 아니, 남… 남망기?”

“가만히.”



색이 옅은 아름다운 눈동자가 짧은 당부에 힘을 싣듯 한 차례 위무선의 것과 마주치고는 벌써부터 끝자락이 풀려 달랑거리는 붕대를 향했다. 위무선은 그저 당황의 연속이었다. 오늘 이 짧은 시간 동안 남망기가 대체 무엇을 했지? 가규를 어긴 사람에게 화를 내지도 않았고 팔과 허리를 붙잡아 부축해준 것도 모자라 아예 안아 들기까지 했다. 심지어 자신의 방으로 외부인을 데려와선 치료마저 직접 해주겠다니.


이 사람이… 남잠이, 이런 사람이… 아니었을 텐데……?


포산산인이 보여준 미래에 틀린 게 있었나? 그럴 일은, 설마, 그럴 리가. 남망기와는 오늘이 첫 만남이라 내게 영향을 받을 일도 없었을 텐데 왜 이렇게 물렁해져선.


입에는 아직은 뱉을 수 없는 호칭인 함광군을 담은 채로 위무선의 작은 머리통에 그런 생각이 오락가락하는 와중, 손짓 몇 번에 후두둑 풀린 붕대를 갈무리하던 남망기는 아무래도 이대로 붕대를 감아선 안 될 것 같단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요행스럽게 뼈가 부러지지는 않았는데 근육과 인대가 심하게 상해 가만 놔두면 덧날 가능성이 컸다.


남망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위무선의 얼굴을 흘긋 살폈다. 잔뜩 찌푸린 낯으로 꼭 다문 입술을 조금씩 우물거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아닌 척해도 다친 상처가 많이 아픈 모양이라 아까 그 손을 붙잡길 잘했다 싶었다. 실상 위무선이 아픈 건 생각으로 터질 것 같아 얼얼하게 울리는 머리였음에도.


대야에 찬물을 담아 와 냉찜질을 먼저 하라고 일러주는 목소리에 꼭 남망기가 몹시 파렴치한 짓이라도 명했단 양 습관처럼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젓던 위무선은 얼마 못 가 남망기의 차갑다 못해 시리게 굳은 얼굴에 백기를 들고 발을 집어넣었다. 속눈썹 깜박이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정적이 못내 견디기 어려워 입안의 혀를 이리저리 굴리며 말을 찾던 위무선은 원래부터 냉하던 발이 숫제 얼어붙는 것 같은 감각에 사뭇 조심스러운 태도로 남망기에게 말을 붙였다.



“저기, 부기가 가라앉으려면 얼마나 있어야 해?”

“이 각은 있어야 해.”



조금 더 말을 걸어볼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남망기는 담담하게 딱 필요한 대답만 하곤 제 할 일이 남았는지 피진을 쥐고 일어섰다. 또다시 눈빛만으로 가만히 있으라 주의를 주기에 위무선 역시 입을 다물고 고개만 끄덕여 답했다. 위무선은 열린 문틈으로 흰 옷자락이 사라진 뒤에야 참았던 숨을 탁 터트렸다. 야간 순찰이 덜 끝났구나. 이 각이 지나려면 얼마나 남았지? 강징이 걱정하고 있을 텐데. 그 이전에 야간에는 통행을 금하는데 숙소로 돌아갈 순 있을까?


잔잔하게 가라앉은 대야의 표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위무선은 알 수 없는 답답함에 발을 참방거리다 바닥에 물이 튀자 제풀에 놀라 재빨리 소맷자락으로 바닥을 문질러 닦았다. 남잠의 방을 더럽히다니. 절대 안 될 말이지. 그러다 아까 풀밭 위를 기느라 무릎과 소맷단에 풀물과 흙물이 가득 든 것을 보곤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우 부인, 그러니까 제 옷은 검은색으로 충분하다지 않았습니까….


강징만큼 옷을 많이 챙겨오지 않은 위무선은 이 옷은 또 어찌 빨아야 하나 걱정스러웠다. 위무선의 짐을 살펴주었던 우자연이 무심했던 것은 단연코 아니었다. 그냥… 그래야 할 것만 같아서. 강풍면이 챙겨준 두둑한 돈주머니도 고사하고 강염리가 챙겨준 좋은 옷도 물리고 우자연이 조용하게 당부한 말 몇 마디만 가슴에 깊이 품고 운몽을 떠나왔었다.

 

네가 운몽의 사람인 것을 늘 기억하거라.

네 부모의 이름을 물으면 위장택과 장색산인이라 답하되,

운몽 종주의 자식이 몇이냐 물으면 셋이라 답해야 할 것이다.


…그것참. 황송하고 황공하여 감히 받잡기 어려운 호의라. 위무선은 떨리는 심장을 가만히 눌러 달랬다.

함부로 뛰지 말아. 네 욕심 낼 사람들 아니니. 베풀어 주신 은혜는 잊지 말되 갚을 길 없는 은혜는 처음부터 받아선 안 돼.


분명, 후회하게 될 테니까.


남망기를 기다리는 동안 위무선은 아주 많은 것을 생각하고 고민했고, 그 가운데 제 다친 발목에 대한 관심은 조금도 없었다. 단지 이 각이 지나는 걸 어떻게 알지만 걱정했을 뿐. 남잠이 알려주러 오지 않을까? 아니면 순찰을 다 마치고 돌아오려나? 언제든 좋으니 내 발이 얼어버리기 전에 왔으면. 위무선은 어쩐지 진이 빠져 침상 머리맡에 머리를 툭 기대어 앉았다. 발아래에 그림자가 길게 지는 걸 발견하고 고개를 등 뒤로 돌리자 환히 열린 창 너머로 희고 아름다운 달이 보였다.


과연 둘째 공자님 지내시는 방이라 이건가. 차별 아닌 차별에 절로 입술을 삐죽거리던 위무선은 무선无羨이라는 두 글자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곤 고개를 흔들어 애써 고운 달에 대한 욕심을 떨쳐냈다. 몇 달 동안 달님 좀 못 보면 어때. 밤이 조금 더 외로워지는 것 말곤 달라질 것도 없을 텐데.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그러나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문자 그대로 명월청풍明月淸風의 정경은 몹시도 아름다워 바짝 갈아세웠던 신경줄을 절로 누그러뜨렸다. 남망기가 사라진 방향을 흘끔인 위무선은 살그머니 창틀 위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이 각 정도는, 쉬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야간 순찰을 마치고 돌아온 남망기는 바람에 흔들려 꺼진 초에 불을 붙이고 뒤를 돌았다가 자기 침상에 낯선 사람이 기대어 잠든 것을 발견하곤 흠칫 놀랐다. 방에 저이 들인 것을 잊은 건 아닌데 새삼스레 놀란 건 무엇 때문일지.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흔들어 깨우면 될 일을 두고 제자리에 붙박인 듯 월광이 유려하게 타고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과 흰 옷자락 어디쯤을 시선으로 따라 그리던 남망기는 조금 망설이다 방금 불을 붙인 초를 가볍게 불어 다시 껐다. 달이 이리 밝은데 곤하게 자는 걸 보면 이 빛 더해진다고 깨진 않을 것 같지만서도.


찬물에 잠긴 발을 꺼내 물기를 닦아내는데 손에 닿는 온도가 체온이라기엔 지나치게 낮아 설마 이 각이 언젠지도 몰라 계속 이러고 있었나 싶었다. 위무선은 무시했던 약을 붉은 기가 조금 가신 발목에 바르고 붕대도 단단히 감고 나니 이미 시간은 해시가 지척이었다. 대야에 남은 물을 비우고, 붕대와 약을 치우고. 이제 남은 건 사람을 치울 일뿐인데, 야간 순찰을 하는 날엔 평소보다 늦게 자긴 하지만 난데없이 마음을 쓰고 신경을 썼더니 남망기도 드물게 피곤해서 잠든 사람을 굳이 깨울 마음도 들지 않았다.


결국 남망기는 불편하게 기대어 앉은 위무선의 자세를 바르게 눕도록 고쳐주고 창문을 단속한 뒤 정실에 딸린 작은 협실의 문을 열었다. 오늘따라 제 속이 참 많이도 울렁거린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11.

다음 날 아침, 낯선 천장을 보며 눈을 뜬 위무선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낭랑하게 짹짹이는 새소리, 그리고 반쯤 감긴 눈 아래를 파고드는 쨍한 햇살에 망했다는 생각부터 먼저 떠올렸다. 해가 이만큼이나 높이 떴으면 남계인의 강석은 이미 시작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운심부지처에 온 첫날부터 가규를 어기고 둘째 날엔 수업에 지각을 하다니, 글러 먹어도 이렇게까지 글러 먹을 수 있나 한탄스러웠다.


내 인생 본래부터 어그러진 것 잘 알고 있다지만.


어지럽고 멍한 머리에 생각을 쑤셔 넣기보다 일단 만회할 수 있을 때까지 노력해볼 작정을 한 위무선은 누운 옆자리에 곱게 개어진 제 장포를 낚아채기가 무섭게 정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내달렸다. 자고 일어난 직후라 흐트러졌을 옷차림이 걱정이라도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운심부지처의 최고 웃어른이신 남계인의 심기였다. 말이 내달린다지 실상은 다친 다리 질질 끌면서 제 몸 혹사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어도 아무튼 열성인 노력이었다.


기억 속의 길을 이리저리 조합해가며 난실까지 도달한 위무선은 숨 한 번 제대로 고르지 못하고 먼저 닫힌 뒷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리곤 고개부터 푹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남계인은 몹시 완고하고 딱딱한 사람이었고 빈말로라도 융통성을 발휘하는 법이 없어서 아마 위무선의 꼴이 조금만 더 괜찮았더라면 강석 첫날에 지각한 것도 모자라 다른 수학생들의 수업까지 방해한 천방지축에게 아주 크게 경을 쳤을 테였다. 어쩌면 이 일을 기회 삼아 모두에게 본보기를 보였을 수도 있었고. 하지만 앞서 말했듯, ‘위무선의 꼴이 조금만 더 괜찮았더라면’ 이었다.


어딜 보아도 요령 부리지 않고 급하게 달려온 게 분명해 보이는, 신발도 신지 않은 한쪽 다리엔 붕대가 칭칭 감겨있고 땀방울이 송골 맺혀서 어깨까지 들썩거릴 정도로 숨을 헐떡이는 안쓰러운 꼬락서니에, 거기에 정말 죄송하다며 연거푸 사과하는 얼굴엔 진실한 죄책이 만연해 결국 남계인 역시 어제 위무선 앞에서 여러 차례 말을 잊었던 남망기마냥 목구멍까지 차오른 고함을 한 번 꿀꺽 삼켜줄 수밖에 없었다.


찌푸린 미간만 한참 꿈틀대다 몸이 좋지 않으면 담당 수사에게 말하고 수업에 빠져도 좋다 나직하게 일러주는 말에 당장이라도 호통과 책벌을 받을 각오를 했던 위무선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배시시 웃었다. 그 얼굴이 기이하게도 또 참 예뻤다. 뭐가 좋다고 웃냔 섣부른 핀잔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반면, 어제 밤새도록 위무선이 돌아오지 않아 강석 시작 직전까지 그를 찾아 헤맸던 강징은 어디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제 사형이 수업에 지각한 것도 모자라 다리까지 분질러왔으니 누구에게 끌려가 맞기라도 했나, 아니면 저 덜떨어진 인간이 또 제 몸 함부로 굴렸나 싶어 걱정에 얼굴을 야차처럼 일그러뜨렸다. 실제로 부러졌는지 아닌지는 이미 강징에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위무선은 강징이 비워둔 게 분명한 옆자리로 걸어가면서도 그저 웃기만 했다. 혹시라도 강징이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져 공연히 남계인의 미움을 살까 수업 시간 내내 그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다만 대놓고 크게 한숨을 쉬거나 무엇에 화가 났는지 어금니를 으드득 가는 소리엔 어쩔 수 없이 어깨가 움찔움찔 떨렸다.


강징은 제 오른편에 앉은 위무선에게서 문득 낯선 향내가 풍기는 것 같아 골머리를 앓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차라리 연지나 분내였으면 평생 여인 손 한 번 제대로 잡지 않고 수절할 것만 같았던 사형이 서투른 유혹에라도 빠졌었나 싶겠지만 그런 붉은 색채와는 거리가 먼 맑고 시원한 향기라 저도 모르게 눈 사이가 슬쩍 좁혀들었다.


이 향기를, 운심부지처 어디선가 맡아본 적 있는 것 같은데.

누구였더라?


하지만 암만 강징이라도 남망기와 위무선을 같은 선상에 엮는 것은 너무한 생각의 비약이라 거기까진 상상하지 못했다. 다친 발목 때문에 제대로 정좌하지도 못하고 어설프게 앉아 남계인이 하는 말을 받아적기에 정신없는 위무선만 불만스레 몇 번 힐끔일 뿐. 대체 누구랑 같이 밤을 보내고 온 거람. 그렇게 본인이 들었다면 새파랗게 질린 낯으로 손사래 잔뜩 치고 움츠러들었을 상상이나 하며.

 





수업을 마치고 강징의 부축을 받아 문을 열고 나가자 뜻밖에 복도 끝엔 남망기가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도와줘서 고맙단 인사 한마디 제대로 못 했던 터라 위무선은 강징이 어깨동무해 부축한 팔을 내리고 절뚝절뚝 걸어가 남잠! 하고 그 이름을 불렀다. 아직 다 흩어지지 않았던 문하생들이 전부 소리 없이 경악하는 와중 남망기는 미미하게 눈썹만 찌푸리고 말았다. 지적할 게 한두 군데가 아닌데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어제까진 입에 담지도 않던 제 아명은 또 어떻게 알았냔 질문도 무용無用할 것 같았고. 남망기는 위무선 앞에서 말을 아끼는 대신 손에 들고 있던 붉은 머리끈만 조용히 건네주었다.



“아, 어제 네 방에서 자고 놔두고 왔구나. 일부러 가져다준 거야? 미안해.”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강징은 ‘네가 왜 남망기의 방에서 자?’ 하고 묻듯 눈을 치켜떴으나 위무선은 미처 그 얼굴을 보지 못했다. 어제 달빛 아래 보았던 이를 태양 아래에서 다시 보니 분명 같은 인물인데도 느낌이 어찌 이리 다른가 싶었다. 여름 햇살이 금빛으로 따스하여 그런가, 혹은 고작 하루가 지났다고 가깝게 느껴지기라도 하나. 평소와 다름없이 냉막한 인상이 묘하게 부드럽게 다가왔다.


위무선은, 막연히 피어오른 친밀감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제 맘 단속을 잘해야겠다 다짐하면서도 퍽 자연스레 남망기의 이름을 부른 건 또 까맣게 몰랐다. 남망기는 위무선의 다친 발목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몸이 좋지 않을 땐 수업에 빠질 수 있어, 하고 알려주었다. 그 말이 아까 남계인이 영 탐탁잖단 낯으로 했던 말과 꼭 같아서 위무선은 습관처럼 눈매를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폐 끼치고 싶지 않아서 그래. 그러면, 이제 뒤집히는 건 강징의 속이었다.



“누가 너한테 다친 다리 이끌고 수업 들으라고 했어? 누가 그래!”



그 목청이 제법 커서 위무선은 황급히 소란 금지의 남씨 가규를 외며 강징의 입을 막으려 들다 한 발로 무게 중심을 잡기가 통 여의치 않아서 앞으로 비틀 기울었다.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허리와 팔을 붙잡은 남망기가 의약원醫藥院은 저쪽에 있다 낮게 속삭였다. 위무선은 어쩐지 제 허리를 감은 팔에 실린 힘이 어제보다 못하다고 느꼈다.


위무선이 또 너 싫어하는데 굳이 맞닿아 부축해주지 않아도 된다 종알거리면, 그 필사의 멀어지려는 노력을 알 길 없는 남망기는 굳게 다문 입매만 지그시 비틀다 곧바로 위무선을 들어 안았다. 이미 한번 해 본 일이라 그런가 어제보다 망설인 시간도 훨씬 짧았다.


강징은 할 말은 많은데 야속하게 숨이 멎은 입만 딱 벌렸고 위무선은 악! 소릴 질렀다가 제풀에 입을 틀어막고 발만 열심히 동당거렸다. 그 바람에 손에 들고 있다 놓친 신발 한 짝은 남망기가 가볍게 발끝으로 차올려 잡았다. 남잠, 망기 형, 이럴 필요 없다니까. 나 진짜 괜찮아. 아침에도 여기까지 멀쩡하게 뛰어왔어. 저기, 내 말 듣고 있어? 나 튼튼하고 건강해!



“차라리, 차라리, 차라리 업어줘! 나 창피하단 말야!”



위무선이 흡사 제 기억 속의 열다섯 살 저와 동화라도 된 듯 남망기를 부산스레 채근해도 남망기는 이미 무를 마음이 없었다. 게다가 제 팔 안에서 파닥거리는 무게가 너무 가벼워서 자칫하면 떨어질 것 같아 그에 신경 쓰느라 타인과 맞닿는 게 불쾌하단 생각에 분배할 여력마저도 없었다. 대신 조용히 금언, 한마디를 하면 위무선은 어제처럼 울상으로 입술을 딱 붙였다. 장서각에서 부단히 금언 걸렸던 기억에 예사론 입도 못 뗄 노릇이었다.


그렇게 남망기가 위무선을 안고 성큼성큼 의약원으로 향하자 멍하게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강징은 한 발 늦게 후다닥 달려 그 뒤를 쫓다 위무선이 ‘운심부지처 내 질주 금지야!’ 하고 외쳐주는 말에 그만 뒷목을 잡고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지금 중요한 게 그거야?!”



그러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게 대체 뭘까. 위무선도 그 말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뭐에 화났는지 모를 강징을 달래주는 게 우선일까, 아니면 탈사라도 당한 듯 제 기억과 도무지 합치되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 남망기를 파악하는 게 우선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설마하니 다친 제 발목 치료하는 게 가장 우선일까. 셋 중에서 유일하게 확고한 목표의식을 가진 남망기만이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12.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



치료를 마친 위무선이 쉽게 나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었던 남망기는 급하게 앞서나가느라 발아래가 불안해 보이는 이의 어깨를 붙잡아 강제로 속도를 줄이도록 했다. 그리곤 문득 어제와 오늘을 합쳐 위무선이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에 대한 짧은 상념을 곱씹었다. 그중에서 고맙다는 말로 대신할 수 있었던 때는 또 몇 번이나 되었는지. 내게는 남과 닿는 것을 꺼리지 않느냐 아예 노래를 부르는 주제에 정작 가장 타인을 꺼리는 건 네가 아닌가 하여.



“남잠?”



그렇게 부르는 호칭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字가 아닌 휘諱를 부른다는 건 그만큼 친밀한 사이임을 의미하는데 위무선이 남망기를 대하는 태도는 몹시 조심스럽고도 눈치 보기에 바빠 어젯밤의 일이 없었더라면 남망기는 위무선이 자기가 모르는 새 큰 죄라도 지었나 의심했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거리를 두면서도 엉뚱한 곳에선 친근하게 구니, 위무선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도통 종잡을 수가 없었다.


파문 하나 없이 잔잔하던 속내에 가슴에 이런 동요가 인 건 처음이라 잠재우는 방법도, 무시하는 방법도 알지 못하는 남망기는 그저 그 순간을 전부 견뎌내기로만 마음먹었다. 힘들게 파헤쳐 알아보지도, 상대에게 설명을 요구하지도 않고. 깊게 얽매이지 않고 피상적으로만 이어진 관계는 노력하지 않으면 곧 끊기기 마련이니.

 

어차피 상대는 잠시간만 머물렀다 떠날 객客.

구태여 서로 헤집어가며 이해할 필요 무엇 있나.

마음속에 자리 마련해 두어도 떠나면 돌아올 길 요원한 사람인데.

 

하여, 남망기는 위무선에게 어떤 것도 묻거나 지적하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보단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게 더 낫다는 조언도,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냐는 질문도, 함부로 남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책망마저도. 나 네게 영향 주지 않을 테니 너 또한 그리하라. 오로지 그런 생각으로.


만일, 앞으로도 그 얼굴 마주할 날 한참 많고 많단 걸 진작 알았더라면 그 고아한 태도에도 조금은 변화가 있었을지도 몰랐다.





잔불의 기사 / 마도조사 (프로필 사진 - 배추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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