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준의 표정이 어리둥절했다. 당황스러운 건 동혁 또한 마찬가지였다. 생각만 해봤지 진짜 내릴 수 있을 줄은 동혁도 몰랐기 때문이다. 심장이 마구 요동쳤다. 이상한데, 나쁘진 않았다. 인준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뭐야? 너 여기서 내려?"

"아니."

"그럼?"


대책이 없긴 했다. 동혁이 눈을 질끈 감고 배를 감싸쥐며 말했다.


"인준아 여기 가까운데 화장실 쓸 수 있는 데 없냐?"

"헉. 잠, 잠시만."


인준이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렸다. 어디를 가야할지 결정했는지 다급하게 동혁의 팔을 잡았다.


"따라와!"

"으응...!"


그리고 동혁은 인준에게 이끌려 어디론가 빠르게 걸어갔다. 구라였는데, 인준이 더 다급해 보였다. 그냥 동혁도 진땀 흘리는 척을 하며 인준의 뒤를 따랐다. 


인준은 가까운 공원에 공중화장실이 있다는 걸 떠올렸나보다. 발걸음이 계속 밤을 맞은 잔디의 짙은 풀냄새와 귀뚜라미 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리고 공원에 들어서 저 멀리 공중화장실이 보였다. 인준이 놓아주자 동혁이 후다닥 들어가며 인준에게 말했다.


"고마워! 근데 가지마! 거기 딱 기다려! 나 여기 길 하나도 모른단 말이야, 알았지!?"

"어어!"


그렇게 다급하게 말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쾅. 문을 닫고 고요를 맞이하자마자 동혁은 우뚝 굳었다. 내가 미쳤나? 왜 이런 짓을? 어이가 없어서 애꿎은 머리를 쥐어 뜯으며 멍하니 서있다가 세면대 앞에 섰다. 자신의 얼굴을 봤다. 18의 얼굴은 반질반질하고 어리숙하다.


"너 미쳤냐? 뭘 어쩌자고...."


혼자 중얼거리고는 세면대에 물을 틀었다. 녹색 물비누를 짜고 손이나 씻었다.


손에 물기를 털며 밖으로 나갔는데 황인준이 서있었다.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가자 이제. 정류장 가는 길 알려줄게."

"어어."


동혁이 말없이 인준을 따라갔다. 


두 남고생이 어두운 인도를 걸었다. 고가도로의 그림자가 이리저리 얽혀 있는곳. 차가 없는 밤이라 어두운 도로에 이따금 승용차 몇대만 헤드라이트를 밝히고 슝 지나갔다. 찬바람이 끼쳤다. 동혁이 무표정한 얼굴로 옆에서 걷는 황인준을 보다가 물었다. 조금 갑작스러운 질문이겠지만. 


"이제노랑...... 싸웠어?"

"어?"


인준이 당황했다. 이동혁이 늘 해오던 시덥지 않은 질문이 아니라서.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말 없이 몇걸음 묵묵히 걸었다. 답을 기다리던 동혁이 심통난 표정을 지었다. 돌아버린 건지 아님 버스에서 내릴 때 뭔 결심이라도 했는지 여태껏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인준이 불편해 하든 말든 다시 물었다. 


"너 왜 요즘 혼자 다니냐?"


이번에도 시덥지 않은 질문이 아니다. 인준은 또 입을 다물었다. 동혁은 답답한지 우뚝 멈춰 인준의 팔을 잡았다.


"내가 이제노 괴롭혀줄까?"


어이없는 말에 인준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동혁과 눈을 마주쳤는데 그 애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인준은 푸하 하고 웃음이 터졌다.


"뭐야 너?"

"왜 웃어. 장난 같애? 장난 아닌데."

"니가 이제노를 왜 괴롭혀. 원한 있어?"

"난 없지만. 그냥. 혹시 니가 원하면."

"왕따청부업자야 뭐야. 개웃기네."


인준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동혁이 뭔 생각으로 그런 농담을 한건지 모르겠다. 농담인 건 맞겠지? 푸하하. 뭔 생각일까? 뭔 생각일까 이동혁. 뭐 알고나 하는 말인가? 우스워.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자꾸 자꾸 웃겨서 푸하하 웃는 와중에 눈물이 고였다. 이런 기분은 흔하지 않다. 겪어본 적 없는 낯설고 기이한 느낌이었다. 웃긴데 울 것 같았다. 달고도 짠 마음. 일그러지는 얼굴. 순식간에 울음이 가득 찬 낯이 되어서 이동혁 소매를 붙잡고 물었다.


"뭐 알고 이러는 거야?"


동혁은 크게 당황했다. 더듬거렸다. 


"내가..... 뭘 알어."

"그럼 뭐야? 이제노가 나 왕따시킨거 처럼 보였어? 나 괴롭히고 있는 거처럼 보였냐? 그래서 네가 정의의 사도라도 되주겠다 이거야? 근데 틀렸어. 걔랑 나 사이에 그런 일은 없었어. 친구사이에 그냥 좀 멀어진 거야. 근데 네 눈엔 내가 불쌍해보였나보다. 그런 거야?"

"그런게 아니라....."


동혁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실수다. 죄다 실수다. 버스에서 따라내린 거 부터 쓸데없는 말 한 것 까지 죄다 실수다. 인준이 울다니. 울면서 저렇게 적대적인 표정과 말투로 네가 뭔데 주제넘게 끼어드냐는 듯이 화를 내다니, 사실 너무 놀라서 동혁의 심장은 어린 새처럼 뛰었다. 아 씨발 내가 왜 그랬지. 그렇게 찬바람 불어도 꿈쩍도 안하더니 황인준 말 몇마디에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다. 동혁이 주섬주섬 수습하듯 말했다.


"내가 대단한 힘은 없지만, 네 편 돼 줄 수는 있다고...."


말하다 보니 끄트머리에는 멋없이 우물쭈물.


"...."


인준이 낯 뜨겁도록 화 낸 건 아마 자존심 상해서였을 것이다. 이동혁이야 뭐 아무것도 모를 텐데, 아무것도 모르는 이동혁 눈에도 자신이 불쌍해보였다는 것 아닌가 싶어서. 역시 숨길 수 없구나. 당당한척 해도, 이제노와 내가 멀어지면 사람들 눈엔 내가 버려진 것 처럼 보이는 구나. 역시나, 그런 건 다 보이는 구나. 시발. 그래서 흥분해버렸다. 참을 새도 없이 순식간에 뾰족해져버렸다. 그런데 그 앞에서 쩔쩔매고 있는 이동혁의 표정과 말들. 대단한 힘은 없지만, 내 편 돼 줄 수는 있다고? 뭔 소리야.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정말. 무의식중에 맥이 탁 풀렸다. 확 쪼그려 앉자 이동혁이 딸려오는 자석처럼 덩달아 쪼그려앉았다. 입술은 핏기없이 질려서 동공에는 지진이 났고 손은 어깨를 토탁여야 하는지 눈물을 닦아줘야 하는지 어쩔줄 몰라 허공을 더듬거리고. 뭐야 바보같이....


동혁이 손으로 인준의 어깨를 감쌌다. 인준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발작버튼 눌린 것처럼 꽤액 성질을 내더니 세상 떠나가라 울어버리는 게,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다 알것만 같아서, 아무래도 자기가 크게 잘못한 것 같아서 쩔쩔매고만 있었다. 그리고 몸이 닿은 곳을 통해 인준의 심장도 어린 새처럼 뛰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엉엉 우느라 갑자기 열이 올라 교복 셔츠 속이 순식간에 더워졌고 손이 잘게 떨렸다. 어리고 어리석다. 상처받은 적 없는 여린 살덩어리는 손톱자국에도 피가 몰린다. 금방 붉어져버린다. 작고 약한 녀석. 그걸 여실히 느끼며 이동혁은 괜히 마음이 물러졌다. 누군가의 우는 얼굴을 보면 그 안에서 저도 모르게 자신의 민낯을 발견하지 않던가. 그래서 이동혁은 우는 황인준을 처음봤는데도 낯설지 않았다. 되게 '우리' 같았다. 사막을 걷다가 겨우 발견한 동족 같았다. 처음 봤는데도 단번에 구별해낼 수 있는. 분명 처음봤는데도 익숙하고 마음이 놓여서 살을 갈아내는 듯한 모래바람 속에서도 잠깐 숨을 돌릴수 있게 하는. 그래서


마음이 쓰였다. 그만 울었으면 했다.


-


버스정류장. 두 남고생이 앉아있다. 황인준은 어색한 표정으로 바닥을 보고 있고 이동혁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버스가 오는 방향을 보고있다. 아까 쪼그려 앉아 엉엉울던 황인준은 언제 그랬냐는듯 울음을 그쳤고 축축했던 눈가도 다 말랐다. 찬바람에 버석버석해진 눈가가 소금기로 하얗게 틀 지경이었다. 이동혁은 아무말도 안했다. 그래주어야 할 것 같았다.


둘은 더 친해졌을까? 그건 장담못하겠다. 별로 친하지 않은 친구를 목욕탕에서 마주쳐 본의 아니게 서로의 알몸을 보게 된 것처럼, 오히려 어색해질 수도 있는 노릇이다. 


"어, 버스 왔다."


저 멀리 어둠속에서 동혁이 타야할 버스가 다가오고있었다. 동혁과 인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준이 인사를 건냈다.


"안녕. 잘 들어가."

"응, 너도 잘 들어가."


짧은 눈맞춤. 허공에 대충 흔드는 손. 촤아 하는 소리와 함께 버스가 섰고 문이 열렸다. 동혁이 버스에 올라탔고 인준은 얼른 몸을 돌려 걸었다. 이동혁이 자리를 찾아 앉았는지 손잡이를 잡고 섰는지는 모르겠다. 안 보련다. 그냥 얼른 걸어 버스정류장의 적나라한 흰빛으로부터 빠져나왔다. 버스가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가로등이 물들인 주황색 어둠속을 계속 계속 걸었다.


우리는 더 친해졌을까. 모르겠다. 그건 장담할 수 없지만, 이건 안다. 앞으로 황인준은 이동혁 앞이라면 눈물을 참지 않아도 된다.


-


며칠이 흘렀다. 이동혁은 황인준을 피할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이동혁의 사각지대에서 황인준이 몸을 숨기는 것일 테다. 매점 오다가도 자판기로 몸 돌리고, 화장실 오다가도 계단 두칸씩 껑충 뛰어올라 멀리 있는 4층 화장실 간 것일 테다. 밥은 아주 일찍 먹거나 혹은 아주 늦게 먹거나, 어쩌면 도시락을 싸 다닐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여튼 확인할 순 없다. 등이 스멀거렸지만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그러니 모든 것은 추측일 뿐이다.  


자습시간에 엎드려 있었다. 몇몇은 자고 몇몇은 공부하고 몇몇은 딴짓을 했다. 그 몇몇들의 사부작 거리는 소리가 백색소음을 이뤄 눈을 감고 있어도 이동혁이 있는 공간을 가늠케 했다. 엎드린 아래로 허벅지 위에 올려둔 휴대폰을 봤다. 황인준의 프로필 사진이 보인다. 인준은 그 사진을 아주아주 오랫동안 프로필로 해 두었다. 2학년 그 언젠가 겨울에, 시내에서 놀다가 이제노가 찍어준 사진. 동전노래방 알록달록한 푸른 조명에 마이크 들고 웃고있는 사진. 확대해서 보면 평화롭다. 웃느라 감긴 눈이 순하고 둥그렇게 올라간 뺨도 순하다. 뭐야, 예쁘게 웃고 지랄. 속으로 틱틱대고 또 그 사진을 빤히 바라다봤다. 마음 어딘가 젖는 것 같다. 귀퉁이가 젖은 박스처럼 흐물거리다가 터져서 쓸모없어질 것만 같다. 아 씨발. 왜 날 피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갑자기 억울함이 솟구쳐 숨을 크게 삼켰다. 


뭐하냐?


보낼까 말까 한참을 고민했다. 뭐하기는. 공부하겠지. 뻔히 알면서도 그냥 고민해봤다. 그러다가 어미를 바꿔 여러 문장을 썼다 지웠다 반복하다가, 그냥 껐다. 욕이나 읊조리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이동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황인준의 반으로 갔다. 이동혁의 방식대로.


-


제 옆에 선 이동혁을 보고 인준은 얼이 빠졌다.


"뭐, 뭐야?"


큰 눈을 꿈뻑거리자 동혁이 아랫입술을 삐죽거렸다.


"뭐긴 뭐야. 뭔 귀신 본 얼굴을 하고 그래, 서운하게. 야, 체육복 있냐? 나 이번 교시만 빌려줘."

"어, 어, 잠깐만."


인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 뒤편 사물함으로 갔다. 동혁을 위해 체육복을 꺼내면서도 뭔가 얼떨떨했다.


"여기."


체육복을 받은 동혁이 인준에게 물었다.


"야, 너 점심 굶냐?"

"어?"


굶는 건 아니었다. 무슨 질문인지 의중을 알 수 없어서 인준이 눈을 깜빡거리다가 말했다.


"안 굶어."

"근데 왜 급식소에서 코빼기도 안 보이냐?"

"옥상에서 혼자 먹어."

"도시락 싸다녀?"

"그냥.... 빵이나 샌드위치 같은 거."

"뭔 청승이야. 웃기셔. 야 그럼 체육복 돌려줄 겸 점심시간에 바로 옥상으로 갈게. 거기서 보자."

"어? 어어."


인준은 얼떨결에 대답했고 이동혁은 너무도 가뿐하게 손을 흔들며 교실을 나갔다. 남겨진 인준은 아직도 얼떨떨했다. 


-


다음시간이 체육이었을까? 아니, 국사였다. 동혁은 인준의 체육복을 돌돌 말아 베개처럼 베고 엎드려 눈을 감았다. 사물함엔 동혁의 체육복이 처박혀 있을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웃겨서 풉 웃음이 났는데, 그렇게 웃고 들이쉬는 숨에 달콤한 냄새를 느꼈다. 인준의 체육복에서 나는 섬유유연제 냄새. 이게 뭘까? 마트 세제 코너에 가면 좌르륵 나열되어있는 수많은 종류의 세제와 섬유유연제들. 분홍과 노랑, 하늘색과 연보라색. 온갖 꽃 그림과 활짝 웃고있는 여성 모델의 얼굴들. 그 중에 무엇이 이 향기를 자아낸 건지 동혁은 모른다. 어디서든 맡아봤을 향기지만 태어나 처음 맡아보는 것 같다. 별거 아닌데 솜사탕같은 그 냄새를 맡으니 제 심장이 솜사탕으로 변한 것만 같아서, 숨을 들이쉴 때 마다 심장이 폭신 폭신 부풀어오르는 것 같다. 너무나도 나약해진 것만 같다. 불안하다. 조금이라도 울음이 차오른다면 그 심장은 파사삭 몇방울의 핑크빛 설탕물만 남긴채 사라져 버릴 것이다.


심장이 뛰어 졸음은 애저녁에 달아났는데, 체육복에 코를 박고 계속 자는 척 했다.


-


옥상에 먼저 도착한 것은 인준이었다. 동혁이 옥상에 들어서자 이미 환기구 턱에 걸터앉아있는 인준이 보였다. 동혁은 제 몫의 빵을 사오느라 늦었다. 껄렁껄렁 주머니에 손을 넣고 옆으로 가자 인준이 동혁이 앉도록 자리를 조금 내주었다. 인준은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동혁을 기다릴 생각은 없었는지 이미 반정도 먹었다. 동혁이 주머니에서 빵과 바나나우유를 꺼냈다. 북북 찢고 맛대가리 없는 걸 맛나게 뜯어먹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있었다. 오늘은 하늘이 푸르다. 동혁이 옆을 돌아보지 않고 빵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왜 옥상에서 빵 드시는데요? 빵을 특별히 좋아하시나?"

"빵 싫어하는 사람도 있냐."

"빵은 간식이지. 나는 밥이 더 좋은데."

"밥 먹으러 가시든지요."

"아냐. 오늘은 그냥 빵 먹어볼래."

"그러든지."

"그러니까 너도 담엔 나랑 밥 먹어봐."

"뭔...."


뭔 웃기는 소린가. 인준은 질색하는 표정으로 동혁을 돌아봤는데 동혁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바나나우유를 들이키고 있었다. 


"내가 왜? 싫은데? 거절."

"거절은 거절한다."

"으엑.... 언제적...."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시덥지 않은 티키타카를 나누다 보니 웃음이 터졌다. 인준이 웃음기를 흩트리려 고개를 떨구자 동혁이 하늘을 보며 말했다.


"너 나 불편하냐?"

"......."

"이해는 됨. 존나 어색하겠지."

"어색한 건 아니고."

"그럼?"

"그냥 좀 쪽팔려서."

"아, 너 그때 엉엉 운 거? 후에엥."

"야아!"

"아, 쏘리 쏘리."


인준이 짜증을 내고 동혁이 웃어댔다. 그렇게 희석되어갔다. 언제 그랬냐는 듯 괜찮아져 갔다. 우습다. 사람은 때때로 이렇게 단순하다. 이제 동혁이 덜 불편해진 인준이 세모눈을 뜨고 동혁에게 쏘아붙였다.


"내 체육복은?"

"아, 까먹었다. 내 자리에 있어."

"뭐야. 왜 안 갖고 왔냐? 그리고 너 체육도 아니더만 왜 빌려 갔어?"

"나 체육 아닌 거 어떻게 알았어?"


동혁이 조금 놀랐다. 쪽팔려서. 인준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수업중에 밖에 보니까 체육 하는 반 없던데."


아까, 선생님이 판서를 하는 동안 인준은 목을 쭈욱빼고 창 밖을 봤었다. 동혁이 보이는지. 하지만 밖엔 아무도 없었다. 그때 쯤엔 이동혁도 교실 안에서 창 밖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돌돌 만 황인준의 체육복을 베개처럼 끌어안고 황인준 생각을 하며. 


동혁은 아무렇지 않은 척 괜히 말을 돌렸다.


"하여튼 까먹고 안 들고 왔어. 들어가면서 같이 우리 반 들리자. 돌려줄게."

"......너네 반 가기 싫어."

"왜? 이제노 마주칠까봐?"

"......."

"참나. 알았어. 5교시 시작 하기 전에 갖다줄게. 이 핑계로 또 보구용."


동혁이 인준을 대하는 태도가 틱틱거리는 듯 하면서도 퍽이나 다정했다. 인준도 못 느낀 건 아니라서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빵을 먹으며 두 사람이 나란히 하늘을 봤다. 우물우물, 말 없이 목 막히게 빵만 먹어도 속은 불편하지 않았다.


-


이동혁과 황인준. 이제 꽤 친구라고 할 만하다. 이동혁은 뻔질나게 황인준 반에 와서 교과서나 체육복 등을 빌려갔다. 꼭 한번에 바로 가는 법이 없고 파리처럼 왱왱대며 주변을 한참 맴돌다 갔다. 황인준은 도도한척, 관심 없는 척, 밀어내는 척 했기에 이동혁은 기꺼이 더 들러붙는 척을 해주었다. 황인준이 밀어낼 수 있도록 더 다가가 주었다. 그 애는 그런 관계를 편하게 느끼는 것 같았으니까. 황인준은 이제 이동혁을 놀리거나 꼽주는 것에 거침이 없었다. 미운놈 대하듯 해서 진짜 미워하나 보면 그건 아니었다. 뭐가 생기면 꼭 나눠줬다. 웃긴 걸 보면 이동혁에게 알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자기가 이동혁을 다 아는 것 처럼 굴었다.


으이구 너 그럴줄 알았어. 역시 이동혁 내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구만. 이것 봐 이것 봐. 야, 나는 네 머리 꼭대기 위에 있다니까? 그런 농담을 하면 이동혁은 펄쩍뛰며 지랄발광을 해준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조금 의외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너는 나를 다 안다고 생각하는 걸까? 네가 안다고 생각하는 나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까. 그게 맞고 틀리고는 사실 크게 상관없다. 이동혁은 그저 인준의 그런 태도가 흥미로웠을 뿐이다. 많이 아는 만큼 그 관계에 책임을 느끼기 마련이니까. 이동혁에게 무슨일이 생긴다면 앞으로 인준은 자신이 마땅히 그걸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 할 테지. 그게 좋았다. 인준이 드디어 자신에게 '관여'해준 것 같아서. '네가 무슨 상관이야?'의 경계선을, 드디어 넘어온 것 같아서. 


너에게 나는 어때보일까. 나는 사실 아직 너를 다 모르겠어.


-


버스정류장에 내려가보면 황인준이 있다. 어쩔땐 동혁이 먼저 나오는 날도 있다. 서로를 발견하기 전 까지 버스를 타지 않고 정류장에 서있는다. '먼저 가 쏘리' 메세지를 받으면 훌쩍 버스를 타버리지만, 최근에 그런 적은 별로 없다. 


같이 버스를 탄다. 같이 앉거나 같이 선다. 같은 풍경을 본다. 같은 방향으로 몸이 기울고, 같은 관성을 느낀다. 그리고 같은 정류장에서 내린다. 언제부턴가 그랬다. 동혁이 인준이 내리는 정류장에 같이 내렸다. 같이 걷다가 인준은 집으로 들어가고 동혁은 다시 정류장으로 와서 버스를 타고 마저 집으로 간다. 동혁이 매일 인준을 집까지 데려다주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둘 중 누구도 그것에 의문을 제기한 적 없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 습관처럼.


함께 걷는다.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눈다. 오늘 있었던 일에 자신의 생각을 곁들여 전한다. 그 생각을 전하다 보니 과거에 있었던 비슷한 경험을 전하고, 그것에 공감을 표하기 위해 자신에게 있었던 비슷한 경험을 전한다. 우리가 얼마나 같은지, 또 얼마나 다른지 견주어보며 서로는 서로를 계속해서 알아간다. 대화에는 너무나도 많은 정보가 있었다. 상대방이 들려주는 이야기 그 자체에도 있었고,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에도 상대방의 정보가 담겨 있었다. 양손을 꽉 깍지 낀 모양새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계속 엉겨들어 빈틈없이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삭제된 이야기가 있다. 검열된 감정. 가려진 단서. 황인준의 비밀. 이제노라던가, 이제노만큼 좋아했던 과거의 누군가라던가. 뭐 그런 종류의 이야기까지 하기에는 부족했나보다. 그게 서운하거나 하진 않다. 그냥 조금 답답할 뿐. 동혁도 그냥 모른척 한다. 여태껏 모른 척 했음으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아 진짜?" 

"어, 완전 어이없지."

"개 또라이네."


함께 걷는 길. 인준의 집에 거의 다다랐다. 인준이 뭐라뭐라 수다를 떨고 있다. 동혁은 반쯤 감긴 삼백안으로 눈썹만 들썩이며 아 진짜? 아 그래? 연발하며 인준의 말을 들어주고 있다. 그러면서 신경은 다른 곳에 가있었다. 인준이 어떻게 웃는지 살폈다. 그 언젠가 엿봤던 얼굴. 이제노를 보며 사랑에 빠진 눈을 하고 세상 모든걸 녹여버릴 듯이 환하게 짓던 그 미소를, 자신에게 말 할때도 지을 때가 있는지 살폈다. 언젠가부터 매번 그걸 살폈다. 계속 신경쓰였다. 하지만 본 적 없다. 한번도 자신에게는.... 갑자기 심기가 뒤틀렸다. 볼 안쪽을 잘근댔다. 못된 마음이 불쑥 올라왔다. 황인준을 곤경에 빠트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야 너 남자 좋아하지? 2학년 때 이제노 좋아했었지? 새꺄 넌 나한테 다 들켰어. 내가 네 머리 꼭대기 위에 있다고. 그런 말을 대뜸 저질러 버리고 싶었다. 뾰족한 걸 주머니 속에 숨기고 있는 사람처럼 곰곰히 이제노라는 이름의 날카로운 부분을 만졌다. 이걸 꺼내서 황인준을 확 찔러버릴수도 있을 것이다.


"어, 다 왔다. 나 들어갈게."

"아, 응. 내일 봐."

"응, 너도 잘 가. 내일 보자."


인준이 부드럽게 웃었다. 동혁에게 손을 흔들었다. 동혁이 주머니에 넣고있던 손을 꺼내 인준에게 흔들어주었다. 인준이 뒤 돌아 멀어졌다. 총총거리며, 뒷머리를 나풀거리며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동혁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흔들던 손을 툭 떨궜다. 날카로운 부분을 만지던 제 손만 다친 것 같았다. 


이제노가 밉다.






트위터 @badbad_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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