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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꼭 가야 하는 자리냐며 옷을 입는 내내 몇 번이나 물어오던 학연을 보면서도 택운은 그저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 마, 그냥 밥 먹는 자리야. 택운의 부드러운 음성에도 학연의 굳은 표정은 나아질 줄 몰랐다. 



 이 일의 시작은 아주 단순하고 조용하게 흘러가는 어느 날 시작됐다. 택운의 몸 상태가 나아지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갑작스럽게 걸려온 전화였다. 가이드와 함께 밥 한 끼 먹자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택운은 난처한 표정으로 학연을 한참이나 쳐다봤다. 결국 상대방이 원하는 대답을 해주고서야 전화를 끊을 수 있었던 택운이 무슨 일인지 묻는 학연을 보며 입을 열었다.



 ' 밥 먹으러 가자, 우리 부모님이랑 너랑 다 같이. '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가장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고 택운의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서울 근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고급 한정식 식당이었다. 크기와 화려함에 압도되는 기분에 학연은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택운을 따라 걸을 뿐이었다. 종업원의 안내를 따라 들어간 곳에는 이미 도착한 택운의 부모님이 앉아 있었다.

" 두 분 다 일찍 오셨네요. 저희도 일찍 온다고 왔는데. "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택운의 어머니는 어서 앉으라며 웃었다. 무사한 아들의 모습에 안도함과 동시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흘렀다. 이쪽으로 앉아, 학연아. 택운의 말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며 끄덕인 학연이 어머니의 맞은편에 앉았다.

" 우리 아들 얼굴 좀 보자, 어디 상한 곳은 없나. "
" 괜찮아요, 어머니. 학연이 덕에 많이 나았어요. "

자연스럽게 학연이의 이름이 등장 하자 부모님의 시선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앉아있는 학연에게 닿았다. 테이블 밑으로 손을 잡아주는 택운의 따스한 손길에도 여전히 어찌할 바를 모르고 불안해하는 것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그것은 택운의 부모 역시 마찬가지였다.

" 어머, 손님을 두고 우리가 불편하게 한건 아닌가 모르겠어요. 나는 택운이 엄마예요, 반가워요. 학연 군. 얘기 많이 들었어요. "

어머니의 자상한 말에도 학연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어른들을 대하는 방법은 배운 적 없었다. 학연에게 어른들이란 때리고 괴롭히는 존재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어머니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종업원들이 끊임없이 가지고 오는 음식들을 보며 학연의 앞접시에 음식을 올리는 어머니는 상냥하고 아름다웠다.

" 먹어봐요, 두 사람을 위해서 오늘 특별히 좋은 걸로 부탁했어요. "
" 학연이는 회 못 먹어요, 어머니. "

어머, 그래? 어머니의 말에 웃으며 택운은 학연의 앞접시에 놓인 회를 제 앞접시로 옮겼다. 넌 이거 먹어, 야채도 좀 먹고. 학연이 좋아하는 음식들 위주로 앞접시에 올려주는 택운의 행동은 퍽이나 자상했다. 한 번도 보지 못 했던 아들의 모습에 어머니는 그저 가만히 쳐다보며 웃을 뿐이었다. 당장 젓가락을 움직이지 않으면 직접 먹여줄 것 같은 택운의 모습에 학연이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 앞에 놓인 음식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입안에 넣기 바빴다. 빨리 이 모든 상황이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때 아무 말없이 한참 동안 학연을 쳐다보고 있던 택운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 각인은 아직 안 했다고 들었는데, 맞나? "
" 아버지! "
" 내 아들 곁에서 평생 가이드가 돼준다면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해주마. 물론 네 신원도 원복 해줄게. 우리의 가족이 될 거야. 넌 평생 센터에게 휘둘리는 일 없게 해줄 생각이다. "

아버지의 말에 식사 자리는 온통 침묵만이 맴돌았다. 신원 원복, 가족, 센터에게 휘둘리지 않는 삶, 온통 꿈같은 이야기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밥이라도 먹고 얘기하지, 애가 많이 놀랐잖아요. 어머니의 말에도 아버지는 여전히 곧은 시선으로 학연을 쳐다볼 뿐이었다. 학연의 머릿속에는 온통 '가족'이라는 단어가 맴돌았다. 평생 들어본 적 없는, 자신이 속할 수 없는 세계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주겠다고 말하는 목소리는 단호하고 정직했다. 그래서 학연은 좀 더 용기를 내기로 마음먹었다.

" 햇빛... 보육원이라는 곳이 있어요. 그곳에 원장 선생님이 아이들을 많이 때리고 괴롭혀요. "
" ... "
" 구해주세요... 살려주세요...! "

보육원을 도망치던 날 밤, 곁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어있던 어린동생들이 떠올랐다. 아이들을 깨워서 함께 데리고 가자고 형들에게 말했지만 당장 따라 나오지 않으면 자신 역시 버려두고 가겠다는 말에 아이들을 외면했었다. 여전히 폭력적이고 무지비한 원장이 있는 곳에 아이들을 그대로 두고 나왔다는 것이 늘 학연을 힘들게 했었다. 버렸다, 이미 부모에게 버림받고 자신들을 보호해야 하는 어른들에게서 버림받았던 아이들을 또 한번 버리고 도망쳤다. 그 생각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더 학연을 죄책감에 떨게 만들었다.

 그렇게 죄책감을 꾹꾹 누르며 살아왔다. 이제 와서 뭘 어쩌겠어, 다시 돌아가도 달라지는 건 없어. 애써 스스로에게 변명하며 살아왔던 시간들이 부끄러웠다. 구원할 수 없다면 모두 잊은 것처럼 살고 싶었다. 그러나 아이들의 칭얼거림과 원장의 폭력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을 수 없었다. 입 밖으로 죄책감을 고백하자 그동안 억눌러왔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던 추악한 기억들을 모두에게 고백하는 순간을 온몸으로 견뎌내는 것이 힘들었다. 비난하겠지, 그렇다고 지금까지 버려두고 살았던 과거가 바뀌는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미래에는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가 가슴속에 피어났다. 따듯한 택운의 손이 죄책감에 떨고 있는 학연의 손을 덮었다.

" 그래, 꼭 도와주마. 이제 걱정하지 마라. "
" ... 감사합니다. "

 아버지의 단호한 음성에서 이젠 모든 것들이 바뀔 것이라는 기대감이 솟았다.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닦아내는 택운의 손길이 부드럽고 따듯해서 웃음이 났다. 괜찮아? 하고 물어오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목소리에 학연은 웃었다.

" 이제 밥 먹자, 밥 먹으러 와서 우리가 너무 딱딱한 소리만 했지? "
" 당신만 계속 딱딱한 소리 하셨거든요. "

그런가요?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어머니를 쳐다보는 눈빛이 자신을 쳐다보는 택운의 눈빛과 많이 닮았구나, 하고 생각했다. 식사 자리는 곧 어느 평범한 가족의 시간과 같이 흘러갔다. 택운이 앞접시에 놓아주는 음식을 보며 학연은 가끔 볼멘소리를 하며 싫다고 투정했고 그래도 먹어야 한다며 택운은 제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학연 역시 당해보라는 식으로 택운의 앞접시에 이것저것 다양한 음식을 놓으며 남김없이 다 먹으라고 말했고 택운은 그 말을 충실히 따랐다.

" 돼지야, 도대체 못 먹는 게 뭐냐. "
" 차학연의 바나나 우유. "

그건 내가 안 주니깐 못 먹는 거잖아! 학연의 말에 사람들의 입술에 웃음이 번졌다. 그러고 곧 어머니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센터에 소속된 오랜 시간들, 그곳을 나왔지만 늘 폭주 직전의 불안으로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수 없었던 택운의 과거를 떠올리며 이렇게 함께 모여 앉아 식사를 할 수 있는 시간이 꿈처럼 아늑하게 느껴졌다.

" 정말 뭐든 잘 먹는구나. "
" 네, 어머니. "
" 그래, 잘 먹는구나. 너무 예쁘다. 우리 아들. '
" 다음에는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밥 먹고 싶어요. "
" 그래, 다음엔 꼭 엄마가... 엄마가.... "

결국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이제 조금씩 평범함이 주는 행복을 알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택운뿐만 아니라 그의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가족들이 모여 함께 식사를 하는 상상을 매일 했었다. 함께 장을 보고 함께 음식을 준비하고 다 함께 식탁에 앉아 하루의 평범한 이야기들을 하며 식사를 하는 상상, 센티넬인 아들이 안정제와 약, 링거로 연명하는 삶이 아닌 다른 삶을. 연신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있던 아버지가 얼굴을 찌푸리며 어머니를 껴안았다. 그리곤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괜찮다고 속삭이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학연은 눈을 뗄 수 없었다.

결국 집에서 함께 할 다음 저녁 식사 약속까지 결정이 되고야 저녁식사가 겨우 끝났다. 어른들 앞에서 긴장한 탓에 평소보다 많이 먹은 학연이 불편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저씨, 배가 터질 것 같아. 지친 표정으로 택운의 어깨에 기대는 학연과 다르게 그 곱절을 먹어치운 택운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앞서 걷는 부모님은 그저 서로에게 몸을 기대 걸을 뿐 별다른 대화는 없었다. 주차된 차게 가게 앞에 서자 어머니는 뒤를 돌아 학연을 쳐다봤다.

" 한번 안아봐도 돼요? "
" 네? 아, 네.... "

어색하게 서있는 학연의 어깨에 어머니의 손이 둘러졌다. 자신보다 한참 작은 택운의 어머니였지만 어쩐지 크게 느껴졌다. 고마워요, 학연 군. 어머니의 다정하고 따스한 음성이 품 안으로 함께 스몄다. 태어나 처음으로 어른 여자에게 안긴 순간이었다. 학연은 용기를 내 어머니의 등으로 제 손을 둘렀다. 단지 서류상의 가족이 아니라 진짜 이 사람들의 가족이 되고 싶다는 욕심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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