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래?”

 

힘주어 들어 올린 수한의 주먹이 허율의 등에 닿기도 전에 초영의 목소리가 수한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내려치려던 주먹을 괜히 쥐었다 펴며 시치미를 뗐다. 그런데도 초영은 의심을 풀지 않고 수한을 빤히 바라보았다. 수한은 허율을 응징하는 일보다 당장 스크린에 뜬 글자를 옮겨적기로 마음을 바꿨다.

 

“초영아, 나 볼펜 하나 빌려줄 수 있어?”


고등학생이었다면 여러 개를 들고 다녔을 필통에 볼펜 하나만 가지고 온 게 후회되었다. 첫날에는 수업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대학생 수업은 무언가 다르다는 허영심에 볼펜 하나 달랑 들고 왔는데 이런 불상사가 생길 줄이야.

 

“너 볼펜 안 가지고 왔어?”

“아…. 응.”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수한의 필통은 보지 못했는지 제 필통에서 검은색 볼펜을 하나 꺼내 들고 수한에게 건넸다. 수한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고맙다고 전하곤 건네받은 볼펜으로 노트에 일정을 옮겨 적었다.

 

“전달할 사항은 모두 전달했으니 그럼 다음 강의 때 만납시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한참은 어른인 교수님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등학교 수업에 익숙한 수한은 정중한 교수님의 태도가 낯설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여기저기서 성인 대접을 했다. 익숙하던 애 취급에서 하루아침에 어른 대우를 받는 건 낯간지럽다가도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게 대학이구나. 수한은 살짝 뿌듯해지려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웅성거리는 소음에 귀를 기울였다.

 

“와, 수업 개 일찍 끝났어.”

 

뒷자리에 앉은 영민이 입을 쩍 벌려 하품 섞인 목소리로 기지개를 켰다.

 

“그러게. 시간 너무 많이 남는데? 우리 다음 강의 오후에 있잖아. 시간 많이 뜨는데 어떡할래?”

 

영민과 똑같이 뒷자리에 앉은 한나가 수한과 초영사이로 얼굴을 쏙 들이밀며 물었다.

 

“카페 갈까? 아침부터 카페는 좀 그런가?”

 

초영은 수한을 바라보며 물었고, 이제는 초영과 한나의 눈빛을 함께 받게 된 수한이 몸을 뒤로 틀어 한나의 옆자리에 앉은 영민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그냥 점심을 좀 일찍 먹는 게 낫지 않을까?”

“11시도 안 됐는데?”

 

기지개로도 부족한지 이제는 목을 양옆으로 뚝뚝 꺾어댔다. 수한은 다시 앞으로 몸을 돌리고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면 아침밥이라고 치지 뭐.”

 

셋은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곧 수한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럼, 여기서 좀 앉아있다가 밥 먹으러 가자.”

“그래.”

 

수한이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슬슬 자리를 일어서는 동기들과는 달리 수한과 친구들은 느긋하게 자리를 지켰다. 수한은 의자에 등을 기대어 편한 자세를 만들고는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오후 수업도 일찍 끝나면 바로 술 마시러 가면 되겠네.”

“어? 진짜! 그래도 되겠다.”

“오, 좋아! 할 일도 없는데 잘 됐다.”

“나도.”

 

키득거리며 영민과 한나, 초영이 동의했다. 소음이 줄어든 강의실은 슬슬 빈자리가 많아지더니 이제는 몇 명 남지 않았다. 듬성듬성 남은 인원에 수한은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앞자리에 남아있는 허율의 등을 힐끔댔다.

 

‘쟤는 왜 안 가고 앉아있어?’

 

허율이 나가면 볼펜을 주우려고 했는데, 혼자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커다란 등이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다른 사람들도 다 갔나?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훑자 수한이 앉은 자리와 그 앞자리 허율을 빼고는 모두 텅텅 빈자리였다.

 

“우리도 가야 하는 거 아냐?”

 

적막한 강의실이 낯선지 초영이 작게 속삭였다. 한나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수한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수한의 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수한아, 지금이 기회야.”

 

한나는 초영보다 더 작게 속삭이고는 턱 끝을 살짝 들어, 내내 거슬린 커다란 등을 가리켰다. 약속한 바가 있어 마냥 지나치지는 못하겠고…. 수한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영 내키지 않았지만, 지금이나 다음이나, 차라리 조금이라고 빨리 허율의 번호를 넘기고 편해지고 싶었다. 수한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서자 수한을 지켜보던 친구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수한을 지켜보았다.

 

“저기,”

 

우물쭈물하며 간신히 다가선 수한이 입을 열었다. 늘 거리낌 없이 다가가는 수한에게는 무척이나 어색한 일이었다. 그러나 수한의 목소리가 다 사라지기도 전에 허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동시에 의자가 바닥에 긁히는 소리와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적막한 강의실에 크게 울렸다. 일어서서 잠시 멈춘 허율은 수한을 향해 싸늘하고 경멸이 농축된 눈동자로 흘겨보고는 성큼성큼 강의실 문을 열고 나갔다.

 

“…뭐야?”

 

영문도 모르고 기분 나쁜 얼굴을 목격하게 된 수한의 입에서 황당한 목소리가 먼저 터져 나왔다.

 

“왜?”

“왜 그래?”

“뭐가?”

 

남은 셋이 얼떨떨하게 입을 벌린 수한에게 물었다. 수한은 확실하게 뇌리에 박힌 표정을 지워낼 수가 없었다.

 

‘씨발, 저 새끼 뭐야?’

 

제가 뭘 어쨌다고 사람을 그렇게 보지? 눈을 왜 그렇게 뜨고 난리야? 당장 멱살을 틀어쥐고 따졌어야 했는데, 이미 가버린 사람을 쫓아가기엔 늦었다. 수한의 심상치 않은 모습에 셋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묘하게 싸늘해진 공기에 차마 먼저 입을 열진 못하고 그저 눈동자만 양옆으로 굴려댔다.

 

“아무것도 아니야.”

 

자신만 봤을 그 표정을 뭐라고 설명하나. 게다가 한나는 허율에게 관심을 보이는 상태라 괜히 더 말을 얹기 싫었다. 수한은 대충 얼버무리며 책상 위에 꺼내 두었던 것들을 가방에 쓸어 담았다.

 

“우리도 가자.”

“어, 그럴까?”

“그래, 가자.”

“가자!”

 

수한이 먼저 나갈 준비를 하니 나머지도 모두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했다. 가방을 손에 쥔 수한은 문득 제 볼펜이 떠올라 바닥을 눈으로 훑었는데 이미 볼펜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박살이 난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너무나 멀쩡했던 볼펜은 이제 볼펜이 아닌 쓰레기로 변했다. 아까워 죽겠네. 으깨진 볼펜 위로 싸늘하던 허율의 표정이 피어났다. 살면서 그런 눈빛은 처음 받아본 수한은 찝찝함이 가시지 않았다.


설마… 일부러 그랬겠어? 그냥 실수로 밟았나 보지. 석연치 않은 마음을 애써 외면하며 수한이 마음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볼펜이 아까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수한은 그나마 집히는 조각을 주워들어 찜찜한 마음도 함께 쓰레기통에 버리고 강의실을 나섰다.

 

자리를 옮겨 이른 아침과 점심을 먹은 뒤엔 오후에 있는 강의를 들었다. 수한은 오티 때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넷과 시간표를 맞추어 짠 덕에 오후 강의도 함께였는데, 오후 강의도 첫 강의처럼 일찍 마치는 바람에 해가 지기 전에 밥집보다 술집을 더 먼저 찾게 되었다.

 

갓 개강한 대학교 앞이라 번화가보다 더 일찍 문을 연 술집이 많았고, 술집이 즐비한 거리에는 이미 학생들이 가득했다. 생각보다 많은 인파에 당황했지만 그래도 운 좋게 첫 번째로 방문한 곳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수한과 친구들은 깔끔한 학교 강의실보다 살짝 지저분한 술집이 더 편했다.

 

“차라리 일찍 먹고 집에 일찍 가는 게 더 좋은 거 아닌가?”

 

한나가 그럴싸한 논리를 펼치자 초영이 냅다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 일찍 꼴아서 일찍 자면 내일도 문제없지.”

“맞네, 그러네!”

 

이번엔 영민이 킬킬대며 동의했다. 수한은 웃는 셋을 따라 함께 고개를 끄덕이다가 지나가던 직원을 불러 맥주 3병과 소주 1병을 추가했다.

 

다시 술을 먹으면 개가 되겠다는 다짐은 이미 지워버린 지 오래였지만, 자존심상 완전히 멍멍이가 될 순 없었기에 오티 날처럼 무작정 들이붓지는 않았다. 친구들도 술 게임보다 수다에 더 열을 올려 수한이 술을 적게 마시는 걸 도와주었다.

 

네 명이 모이니 빈 병은 순식간에 늘어났다. 다들 기분 좋게 취기가 올라왔을 때쯤 영민이 돌연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세게 내리쳤다.

 

“생각났어!”

 

테이블 위에 있던 식기들이 소리를 내며 흔들리더니 쇳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이고, 다 떨어지네.”

“야! 뭐 하는 짓이야!”

 

영민의 옆에 앉아있던 초영이 얼굴을 찌푸리며 바닥에 떨어진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초영은 손에 든 젓가락으로 분풀이하듯 영민을 마구 찔러댔지만, 영민은 개의치 않고 목소리를 낮추며 소곤댔다.

 

“야, 근데 너희 그거 알아?”

“뭐? 중요한 거 아니면 죽는다.”

 

워낙 작은 소리라 막 잔을 들어 들이키려던 초영이 잔을 내려놓고 영민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초영을 따라 수한과 한나도 함께 모여들었다. 머리 네 개가 한데 모이자 영민이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우리 학교에도 특이형질인 애들이 있대.”

“특이형질?”

“응.”

 

별것도 아닌 이야기를 거창하게 늘어놓았다. 모여들었던 머리는 순식간에 멀어졌고 수한은 특성 없는 베타이기에 악의 없이 물었다.

 

“혹시 우리 중에 있어?”

“난 아닌데.”

“나도 아니야.”

“아니, 너희가 특이형질이라는 말이 아니라!”

 

영민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퍽퍽 치더니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그게 뭐 해가 되나?”

 

중요한 일도 아닌데 왜 저래? 반응을 영 이해하지 못한 수한이 받아치자 영민이 대꾸했다.

 

“일반인이랑은 좀 다르잖아.”

“그런가?”

“요즘에도 특이형질인 거 숨기고 다니는 애들이 있어?”

“아무래도 영민이처럼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있어서 그러겠지?”

“역시…. 영민이가 문제군.”

 

특이형질이라는 사실을 숨길 정도라면 민감한 사안이기에 장난스럽게 넘기려는데, 영민은 굳이 그 주제를 붙잡고 질질 늘어졌다.

 

“우리 학교에도 말 안 하고 다니는 애들이 있다는 거지.”

 

수한은 살면서 특이형질인 사람들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있었을지 몰라도 자신에게 말하지 않는 이상은 알 수가 없으니 특이형질은 그저 별나라 이야기쯤으로 여겨졌다. 종종 연예인이나 유명 인사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형질을 밝히며 남들과는 다른 세상에 산다는 걸 과시하기도 했지만, 아직 세상은 베타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베타의 세상에 사는 수한에게는 소설 속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나, 이거 수일 선배한테 들었는데.”

“수일 선배가 누구야?”

 

한나가 묻자 초영이 대답했다.

 

“왜, 그때 우리 오티 때 같이 있었던 선배 중에서 키 작은 남자 선배.”

“잘 기억 안 나는데.”

“아무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그 선배가 알려줬거든.”

 

영민이 또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파묻힐 정도로.

 

“권허율, 알파래.”

 

BL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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