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끊었다 갈게요!

 

 

석진의 가벼운 손동작에 줄줄이 딸려 있는 스텝들이 분주해진다. 찍 소리도 못하고 소심하게 큐카드나 치던 게, 많이 컸어? 온전히 애정을 담아 놀리자 (구)신입 PD의 목이 벌겋게 물든다. 아잇, 형은 언제적 이야기를 지금 하고 그래여. 말끝을 희한하게 끝내는 건 정국의 귀여운 버릇이다. 출연자들의 헤어며 메이크업을 손봐야 한다는 이유로 카메라 앞을 무식하게 뚫고 지나간 출연자 측 스텝들의 거동 전, 석진은 급히 촬영 중지 사인을 보냈다. 니들이 끊게 둘 것 같냐. 유치한 자존심 싸움이었다.

 

 

“저 쪽은 무슨 예의가 저렇게 없대요?”

“이 정도면 양반이지. 여기서 10년만 굴러봐.”

 

 

라떼는 말이야 따위를 시전하려던 석진은 그냥 제 풀에 지쳐 입을 다문다. 대신 이제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제 선임의 심기를 파악하고 움직임에 제법 빠릿함이 깃든 막내의 동그란 머리통을 죄 헝클어 놓고서, 별 다른 말 없이 끄응차, 과장스러운 소리와 함께 무거운 엉덩이를 뗀다. 고대로 동그란 눈매가 따라 붙었다.

 

 

“밥 먹으려고여?”

“넌 인마 나한테 관심이 왜 이렇게 많아.”

“뭐래. 형 없으면 촬영을 못하니까 그렇지.”

“...누가 키웠는데 이렇게 빈말을 못해?”

 

 

이제는 제법 저와 같은 눈높이에서 농담 따먹기까지 가능해진 후배의 성장이 새삼스럽다. 애들 크는 것만큼 같이 늙으면 답이 없다는데, 그럼 그 동안 난 얼마나 늙은 거야. 석진은 끈질기게 오래 자리를 비우지 말라 요구하는 송아지 같은 눈을 차마 외면하기 어려워 손가락 두 개로 답변을 대신한다. 딱 한 대만 피우고 와요. 후배 등쌀에 무서워서 살겠냐는 둥의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마지막으로 스튜디오를 빠져나왔다.

 

 

 

간절했던 니코틴을 몸으로 받아들이자 영 흐렸던 정신이 바짝 맑아진다. 굳이 정국이 당부하지 않아도,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건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한낱 예능국 중간짬 PD가 무려 한류스타 아이돌을 모셔 두고 갑이 될 수 없다는 것 또한. 적당히 시간이나 죽이다 들어가야지. 하기 싫은 일을 맡았다고 모두 땀 흘려 차리는 밥상에 대뜸 깽판을 놓는 것은 더더욱, 10년차 사회인 김석진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완벽한 포커페이스는 될 수가 없어서, 미팅 단계에서부터 이래저래 삐걱 댔던 게 양 측의 유치한 자존심 싸움으로 번진 것 같아 영 마음이 무거웠다.

 

 

아. 존나 집에 가고 싶다.

 

 

되는 일도 없이 담배는 또 돗대야. 태울 것도 없이 멍하니 서서 시간을 보내는 취미는 없다. 누구보다 없어 보이는 포즈로 짧뚱해진 마지막 발암물질을 흡입하는데, 지금 이 순간에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혹시나 하고 와 봤는데.”

“... ...”

“진짜 여기 있었네.”

 

 

 

피차 반가운 사이가 아님이 분명한데, 어쩌다 우연히 마주쳤다는 말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정확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저를 찾아왔다는 말을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좁아터진 스튜디오 안에서도 존재감을 꽉 채우던 망할 박지민이 기어코 가여운 직장인 김석진의 도피처까지 따라 붙었다.

 

 

아주 광고를 해라. 현수막이든 뭐든 써 붙이라고. 입을 열면 분명히 이 따위 비꼼의 말이 방언 터지듯 쏟아질 것을 알아 애꿎은 볼 안쪽을 깨물며 우두커니 버틴다.

 

 

 

“오늘은 또 누가 화나게 해서 여기까지 왔어요?”

 

 

 

박지민은 못 본 시간 동안 사람 빡치게 하는 스탯만 집중적으로 키워 온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형은 진짜 하나도 안 변했네.”

 

 

 

이렇게 사람 속을 뒤집어 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무슨 개소리야. 초인적 힘으로 제 지랄병을 막아낸 석진이 담배를 비벼 끈다. 그리고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라는 듯 무심히 박지민을 뒤에 두고 촬영장으로 발을 옮겼다. 아무튼 김석진은, 그가 요구한 촬영을 거절하는 사람은 될 수 없으나 1분 1초가 돈으로 환산되는, 전국을 넘어 전 지구적 스타를 개밥버러지보다도 못하게 지나칠 수 있는 사람은 될 수 있었다.

 

 

 

 

 

Dried tulips

박지민x김석진

w. 까마귀

 

 

 

 

 

하나도 안 변했다느니 하는 삼류 소설 속에나 나올 것 같은 말로 김석진의 심병을 불러일으킨 박지민이야말로, 정작 어디서 피부 관리를 받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뽀얗던 옛 얼굴이 그대로였다. 이 새끼는 어떻게 하나도 안 변했네. 태평하게 그런 감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몇 주 전의 개편시즌 폭풍우 속에서였다.

 

 

이번 레귤러 잘 끝내면 소속국 옮겨 주신다면서요. 굳이 목소리를 높이지 않더라도 절대 0도의 분노는 충분히 윗선에 전달되고 있는 것 같았다. 해외 로케이션까지 끼어 있는 아이돌 밀착형 다큐멘터리 제작의 메인 피디로 지명되었다는 걸, 통보로 듣게 된 직후였다. 진정해 김PD. 우리도 그러고 싶었는데, ... 아니 그러니까 적당히 ‘잘’ 끝내라고 했지 누가 대박을 치래? 돌아오는 헛소리에 뒷골을 잡고 쓰러질 뻔한 몸뚱이는 정국이 잘 잡아 직장 내 뇌진탕 사고만은 피할 수 있었으나 소싯적 방송계 공주(-공포의 주둥아리-)라 불리던 제 성질머리 폭발 사고만큼은 막을 수 없었다.

 

 

이거 놔 봐, 정국아. 아니 시발, 애초에 아이돌 다큐를 왜 여기서 찍냐고. 지들 입맛에 맞게 알아서 편집해줄 방송사 널리고 널렸는데 왜 우린데요. 그 쪽에서 나 지목했다는 것도 개구라지? 그냥 만만한 애새끼 피디 하나 슬쩍 던진 거 내가 모를 거 같아?!

 

 

지랄을 하든 얌전히 맡든 어차피 하게 될 거, 지랄이라도 하고 맡는 게 낫다는 공주님의 결론. 권고사직이라는 이름의 휴직을 하지 않는 이상 하라는 대로 해야 하는 직장인 신분에, 이왕 떠맡듯 일하게 될 거 이런 식으로, 속이라도 시원하게 한 바가지 쏟아내야만 했다. 시사 프로그램 만들고 싶어 피똥을 싸 가며 언론고시 뚫고 입사한 방송국은 젊고 열정 넘치는 호구 PD에게 매번 엿을 안겨주었다.

 

 

시발 그 쪽 소속사는 뭘 믿고 수출용 얼레벌레 저가예능 한 편 만들어본 적 없는 피디한테 아이돌 다큐를 찍으라 마라야. 말하다 보니 스스로도 어이가 없다. 가수 이름이 뭔데, 들어나 봅시다. 후배의 하극상에 준하는 히스테리에도 익숙한 듯 제 할 일을 하던 최 피디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 왜~ 요새 그 잘 나가는 애들 있잖아! 우리 딸내미도 환장을 해.”

 

 

 

정확히 그 때부터 쎄했다. 더위를 먹었나, 나도 참 무슨 생각을. 하지만 쎄한 기분이 들면 대체로 맞아 떨어지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우리 방송국이 무슨 대한민국에서 원탑으로 잘 나가는 곳도 아니고 통장에 찍히는 돈 보면 재정상황도 그렇게 넉넉하지 않아 보이는데~로 시작하던 행복회로~는 3초도 가지 못하고 보기 좋게 무너졌다.

 

 

 

“헉, 설마 BT21이에여!?”

“이야, 역시 전 피디가 젊어서 그런지 대세를 아네.”

 

 

 

눈치 없는 동구래미는 드디어 BT21 실물을 볼 수 있는 거냐며 흥분했고, 난데없이 폭탄을 떠안게 생긴 김석진은 제 행복회로와 함께 타들어가던 속을 어쩌지 못하고 해탈의 미소를 지었다. 어어, 우리 공주 웃는다! 어어, 만세! 역시 BT21이 대단하긴 하네요~! 귀찮고 힘든 일을 떠맡기는 데 성공한 최 피디는 연신 됐다, 됐어를 외치며 석진의 손을 붙들었다.

 

 

되긴 뭐가 돼. 아무리 생각해도 된 건 석진의 금연실패뿐이었다. 어디서 포트폴리오로도 못 쓰일 일회용 파일럿 예능만 줄곧 시켜주더니 커리어를 걸고 맡긴 것이 아이돌 다큐멘터리란다. 잘 해야 본전, 못 하면 전 국민은 물론 바다 건너 월드 와이드 슈퍼스타의 팬들에게도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을 다큐멘터리의 책임자가 되었다고 해서 절망하고 좌절할 짬은 아니었지만 BT21이 대상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러니까 그, 망할 놈의 박지민이가 속해 있는 그룹이라면.

 

 

 

 

 

-

 

 

 

 

 

바쁘다고 연애 못한단 말이 핑계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박지민과는 생에 가장 바쁜 시기에 만났다. 어쭙잖은 정의감에 불타오르던 햇병아리 인턴 기자 시절이었다.

 

이제 와서야 기자를 계속 했어도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라 확언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끓어오르는 정의감을 주체 못하던 이십 대 초중반의 혈기를 갖고 있었던 지라 매일이 아주 스펙타클 요지경이었다.

 

 

미지의 저 뒷세계가 얼마나 거대한지도 모르고 팩트를 낱낱이 까발리는 기사를 적어, 컨펌도 받지 않고 인터넷 사이트에 올려 해소하던 때. 꽤나 이름 있는 잡지사였지만 고작 인턴이 작성한 사회부에나 실릴 만한 요상한 글을 싣기엔 서로의 니즈가 맞지 않았던 탓이었다. 아마 인턴 잘못 뽑았다고 인사 담당자는... 까였겠지. 하지만 잡지사가 마음에 들지 않던 건 맹랑했던 그 인턴도 마찬가지였다. 잡지 지면에 실으면 이걸 누가 읽어? 결국 모든 싸움의 핵심은 여론전이었으므로 결과적으로는 옳은 판단이었다. 물론 정의는 누구의 안전도 지켜주지 않으니 모든 건 익명으로.

 

 

약자에게 일어나는 부조리한 일들은 샅샅이 취재하지 않아도 도처에 깔려 있었다. 물론 어깨 너머로 보고 들은 것들의 덕을 본 것도 맞다. 그걸 모르고, 어느 정도는 자아도취적이었다. 돈 없고 빽 없는 자들의 억울한 이야기를 들어주는 언론의 순기능을 오롯이 저 혼자 행사하고 있다며 자만하던 나날이었지.

 

 

당연하게도, 그런 자만은 오래 가지는 못했다. 하도 겁 없이 굵직한 기업을 깔짝대며 건드리다보니, 알음알음 소문이 새어 나갔는지 활동 반경이 제한되고, 따로 시간을 내서 취재든 뭐든 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이 쏟아졌다. 정작 정식채용은 죽어라 안 해주면서 인턴만을 1년 연장해준다는 입발린 호의를 덥석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후회해 봤자 늦은 일이었다. 생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패션이라든가 연애, TV에 출연하는 연예인과 관련된 자잘한 업무를 억지로 떠맡느라 말 그대로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몸도 마음도 지쳐가던 그 때 만난 게 박지민이었다. 막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해 데뷔를 목표로 뼈를 깎아가며 연습한 뒤 평균보다 빠른 속도로 데뷔해 적당히 팬 장사로 먹고 사는 신인 아이돌이 되는 데 성공한 그 애와의 만남은, 그 당시에도 억지로 떠맡게 된 일 중에 하나였다. 철 지난 명품 브랜드를 얼기설기 걸치고 찍은 화보 사이사이에 들어가는, 아이돌 홍보용 인터뷰를 작성하는 것이 석진의 주된 임무였다.

 

 

아무리 해 본 적 없는 고까운 일일지라도 공식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데 피해는 끼치지 말자는 투철한 직업윤리에 의해 인터뷰를 하기 전 이것저것 검색을 하고 미팅을 진행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팬들이 만들어 놓은 박지민 영상이나 예쁘게 보정된 사진 자료 같은 걸 함께 보게 된 거다. 좀, 귀엽긴 하네. 정신을 차려 보니 손가락이 저장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이전 인터뷰 내용까지 싹 훑고 나서, 귀엽게 생긴 것 답지 않게 악바리 근성이 있는 그가 궁금해졌다. 이번 인터뷰를 계기로 서로 알고 지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우습지만 그런 사심 섞인 생각도 했다.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강렬하고 냉한 인상이어서 놀랐던 게 그 애의 첫인상이었다.

 

 

 

“안녕하세요, 기자님.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도 웃으니까 ‘박지민 레전드 엠카 눈웃음짤’에서 보던 귀여운 분위기가 좀 났고. 호들갑을 떨기 보다는 세 살이 더 많은 어른답게 마주 웃어보였던 게 전부였다. 안녕하세요, 오늘 인터뷰 진행할 하이브 매거진 인턴기자 김석진이라고 합니다. 전날 밤부터 첫 인사를 어떻게 건네야지, 라고 생각했던 게 무색하게 무난한 인사 멘트를 건네면서.

 

 

그 날 특별히 까탈스레 굴지 않는 박지민 덕에 화보 촬영도 금세 끝이 났다. 하이패션의 세계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어서 석진은 몇 번씩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디렉션에도 지민이 찰떡같이 그를 따라준 덕이었다. 많이 기다리셨죠, 저 이제 끝났어요. 얼마나 본 사이라고 살갑게 어깨를 붙들며 인터뷰 석까지 동행하는 동안에도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곧 작살이 났다.

 

 

 

“다음 질문 드리겠습니다. 지민씨는 지금 그룹 히트파이브의 소년 가장이라고 불리는데, ...혼자 예능 출연도 하시고, 이렇게 화보도, ....음,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무슨 질문이 이따위야. 꼭 포함해야 할 에디터의 입김이 들어간 질문을 먼저 끝내야 개인적으로 준비한 질문을 편하게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아 쓰여진 질문지를 줄줄 읽는데, 인터뷰어도 인터뷰이도 곤란할 것들이 왕왕 존재했다. 어차피 그룹 자체의 인지도가 크게 높은 편이 아니니 박지민 개인에게서 어그로성 질문을 이끌어 내고 그것을 화제화할 생각인 것 같았다. 아무리 우리가 갑이어도 이건 좀 아니지. 고작 스물을 갓 넘긴 아이에게 수위의 질문들이 아니었다고 판단하자, 잠시 내려두었던 같잖은 의협심이 샘솟았다.

 

 

 

“아, 이건 곤란하실 테니까 제가 따로, ...”

“아니에요. 기자님도 곤란해 보이시는데 제가 적당히 대답할게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제가 미리 커트했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지민씨.”

 

 

 

그래서 질문지에 줄을 직직 긋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종이 뭉텅이 맨 마지막 장으로 보내버리고 대신 직접 준비해 온 질문들로 인터뷰를 할 결심을 내렸다. 적당히 해야지. 중얼대는 소리에 박지민이 뜬금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때는 속없이 웃는 박지민이 답답했다. 어려서 지가 무시당한 것도 모르나. 웃는 얼굴이 귀여운 건 귀여운 거고, 답답함을 느끼는 건 좀 다르지. 그래서 왜 그러냐는 얼굴을 하고 흰 종이 뭉치에서 눈을 떼고 가엾은 어린 양을 바라보니, 첫인상의 냉기는 찾아볼 수도 없는 따뜻한 눈을 하고 저를 뚫어져라 보고 있더라.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기자님 같은 분은 처음이에요.”

 

 

 

박지민은 그런 간지러운 말을 꼭 별 것 아닌 것처럼 했다.

 

 

 

“저 오늘 이 스케줄이 마지막인데.”

 

 

 

저랑 술 한 잔 하실래요? 별 것 아닌 게 아니어서 거절할 수 없는 그런 제안이었다.

 

 

 

 

 

 

-

 

 

 

 

 

술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또 다음 약속이 되고, 다음 약속이 데이트가 되어 둘 다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서의 연애가 시작되었다. 그 때 기자님 눈이 어땠는지 모르지? 우리 팬들이 날 보는 눈보다도 더 사랑에 빠진 눈이었다니까. 인터뷰이에서 썸남이 되었다가, 기어이 애인까지 된 박지민이 저를 놀리고 싶을 때는 늘 첫 만남의 레퍼토리가 흘러 나왔다. 나 처음부터 들이대는 스타일 아닌데, 형이 너무 시그널을 다 줬어. 남은 얼굴이 터질 것 같은데 혼자 자지러지게 웃으며 하는 말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말은 저렇게 하면서, 오늘부터 우리 1일 하자! 같은 거창한 이벤트 같은 건 다 박지민이 도맡아 했다. 원체 오그라드는 걸 싫어하기도 하고, 이 정도면 우리 사귀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해서 손을 놓고 있었더니 어느 날은 혼자 술을 이빠이 마시고 와서 형, 저 가지고 노는 건 아니죠? 하더라. 기함을 하며 형이 널 왜 가지고 노냐며 쭈굴댔더니 쾌남 박지민, 그 다음 날로 화끈하게 고백 이벤트를 실시하셨다.

 

 

뜬금없이 고급 호텔방을 잡아놨다기에 오늘이 거사를 치르는 날인가, 나름 준비까지 하고 찾아갔는데 거사는 무슨, 거대한 핑크 무리를 형성하고 있는 수많은 꽃냄새에 파묻혀 질식하기 전에 방에서 나오는 게 최선이었다. 방을 꾸밀 시간까지는 도저히 만들 수가 없어 업체 직원에게 분홍색 튤립으로 방을 꾸며 달라 부탁했다는데, 생전 이런 이벤트를 해 봤어야 양을 가늠하지. 무조건 예쁘게! 그러려면 더 많이! 남들이 하는 것보다 두 배 정도 더 많이 해주세요, 같은 촌티가 불러온 참사였다.

 

 

지민아, 꽃을 적당히 준비했어야지. 한껏 시무룩한 얼굴이 귀여워 짓궂게 놀리다가, 이러다 애 울겠다 싶을 때쯤 손도 잡고 뽀뽀도 했다. 형 아까 방에 꽃잎으로 써 있던 글씨 못 본 거 아니다. 오늘부터 우리 1일 맞아. 금세 또 뿌앵 하고 울어버리는 게, 연하 데리고 사는 맛이 쏠쏠할 것 같았다. 근데 왜 튤립이었어? 보통 장미로 하지 않아? 물어보는 말에 박지민은 울다가도 숫내를 풍기며 형 입술이 도톰해서 튤립이랑 닮았어. 같은 앙큼한 대답을 했다. 그래서 분홍색 튤립이었다고.

 

 

둘 다 은근히 성실한 타입이어서, 연애가 일에 방해되는 일은 없었다. 석진은 여전히 뼈빠지게 구르면서도 틈틈이 이 곳 저 곳 세상의 어두운 곳을 캐고 다녔고 지민은 착실히 아이돌로서의 입지를 굳혀 나갔다.

 

 

 

“그거 알아? SBC 방송국 E관 뒤편에 샛길 있는데, 완전 민첩하게 요리조리 슉슉 뚫고 나가면 담타하기 딱 좋은 데 나온다.”

[“푸핫. 그래서 지금 거기 있어요?”]

“엉. 여기 완전 내 속풀이 핫플.”

[“왜. 또 누가 화나게 해요?”]

“야, 말하면 입만 아파. 하, 지민이 넌 이런 거 하지 마라.”

[“내일 SBC 음방 가는데 한 번 찾아봐야지. 우리 돼지 어디서 맨날 팀장님 욕하고 있나.”]

 

 

 

그렇게 서로 바쁘다 보니 만남은 새벽 시간에나 겨우겨우 이루어졌다. 인기가 고만고만한 아이돌을 먹여 살리는 대표 멤버가 늘 그러하듯, 박지민은 굵직한 정규 편성 방송뿐만이 아니라 잡다한 예능이며 행사, 인터넷 방송까지 하지 않는 게 없었다. 지미나 형이 언플 잘해줄게, 소속사 고소 한 번 하자. 농담조로 던지면 꺄르르 받아 웃는 지민이었으나, 사실 백 퍼센트 진심이었다. 그 놈의 소속사, 애를 어떻게 굴리면 첫 만남 당시에만 해도 통통하던 볼살이 날이 갈수록 내려갔다. 내가 이거 빨아 먹는 재미에 사는데, 시발... 부산에서 상경한 파워 상남자 박지민은 그럴 때마다 형, 예쁜 말 하랬죠, 하며 남을 가르치는 재주까지 있었다. 깜찍하게.

 

 

고작 세 살 차이인데도 요즘 애들은 이렇게 수완이 좋고 능글맞은가 싶을 정도로 질릴 틈 없는 연애였다. 제법 깜찍하게 굴 줄 아는 연하남은 시기적절하게 마초 짓도 할 줄 알았고, 의지가 되는 구석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애초에 강한 것에는 반발 심리로 더욱 강한 체를 하고 약한 것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는 제 유치한 심리를 박지민이 파악했던 게 아닐까 싶지만 이러면 어떠하고 저러면 어떠하랴. 그러니까 저보다 어리고 작은 애 밑에 깔려 앙앙 운들 어떠하랴. 내가 박지민을 좋아하니까, 그리고 박지민도 나를 좋아하니까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

 

 

 

 

흔히들 사랑의 유통기한이라 부르는 2년 반 정도를 지지고 볶고 징그럽게도 붙어먹으며 즐거웠다. 그렇게 순풍에 돛을 단 듯 평화롭고 순조롭게 지속되던 연애 전선에 먹구름이 낀 것은 진작 고소를 했어야 할 그 놈의 소속사 문제를 두고서였다.

 

 

 

“형.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요.”

“대충 봐도 알아서 못하고 있는 게 보이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

“지금 얘기 잘 마무리 하고 있다구요. 계약 조건도 내가 불만이 없는데 왜 형이,”

“야, 내가 그런 식으로 실컷 몸만 굴려지다 팽 당한 애들 한 둘 본 줄 알아?”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요?”

“왜 얘기가 또 그렇게 흘러가?”

 

 

 

좆소에서 보석을 발굴해냈다고 해야 할 만큼 박지민의 위상은 높아져만 가고, 그와 반비례해서 그 쪽 소속사와 서로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던 시기였다. 지금에서야 당시의 자신이, 계약직으로 무려 3년이나 구른 뒤 정규직 전환 없이 자리를 빼게 생긴 상황에서 생긴 스트레스로 저 자신을 지민과 동일시하여 지나치게 간섭했다는 반성을 할 수 있지만 그 때는 그것이 괜한 히스테리인 줄도 몰랐더랬다.

 

 

반반하게 생겼으니 잘 키워서 어디 얼굴마담으로나 써 보려고 했더니 저렇게 카메라랑 낯을 가려서야 원. 석진씨 아직 너무 어리고 기회도 창창한데 다른 직장을 알아보는 게 어때요? 영상 리포팅을 하는 기자가 되려 했을 때 듣고 지면 기자로 진로를 틀었을 때 들었던 말을 그대로 들으며 느낀 좌절감과 또 다시 취준생이 되어야 한다는 불안감, 그리고 그런 현실적인 이야기와는 거리가 먼, 전혀 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애인과의 괴리감. 그런 것들이 저를 뒤흔들던 암흑의 시기였다.

 

 

제 상황과는 별개로 지민의 사정 역시 꽃밭은 아니었다. 애초에 프로젝트성 그룹으로 단기 계약을 걸고 데뷔했던 게 생각보다 떴고, 계약 연장이라는 카드가 독이 될지 득이 될지는 확실치 않았으나 그 때 제안 받은 조건이 지민에게 불리했음은 사회생활을 해 본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치졸한 종류의 것들이었다. 석진은 천성적으로 사람을 좋아하고 잘 믿는 지민이 그 놈의 정 때문에 제 발로 가시밭길로 걸어 들어가는 꼴이 답답했고, 그 이전에 그런 지민을 이리저리 굴리며 이용만 존나게 해 먹는 그 소속사에 열이 올랐다.

 

 

 

“형, 생각해 주는 건 진짜 고마운데, 나 형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순진한 애 아니에요.”

“누가 너더러 순진하대? 난 그냥, ...”

“애 취급을 그만하라구요.”

“그럼 네가 애지, 어른이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지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이야기해 볼 것도 없다는 것처럼, 의미 없는 말다툼에 감정을 낭비하고 있다는 것처럼, 지겹다는 것처럼. 여태껏 실컷 짜증을 부려 놨던 주제에 그 한숨에 속이 상해서,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래, 넌 네 방식대로 해. 난 내 방식대로 할 테니까.”

“형.”

“그리고 나가. 지금은 얼굴 보기 싫어.”

 

 

 

그리고 내가 먼저 연락하기 전까지 연락하지 마. 연락하면 화해고 뭐고 헤어질 거야. 감정적으로 대처하는 게 최악의 수라는 것을 알면서도 속수무책으로 모진 말이 튀어나왔다. 그간 사소한 일로 유치하게 싸우면서도 한 번 언성을 높이는 일 없던 박지민의 다정에 대책 없이 길들여져 있던 게 그제서야 실감이 났다. 더 얘기 해봤자 서로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느꼈는지, 박지민은 군말 없이 현관문을 나섰다. 오히려 그 후에야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또렷하고 맑아져 제가 뭘 해야 할지 판단이 섰다.

 

 

굳이 컴퓨터를 뒤져보지 않았는데도 한 동안 떠들썩했던 연예 기획사들의 유흥업소를 통한 불법 자금유통, 성매매 알선 비리, 노동 착취 문제 같은 것이 뇌리를 훑고 지나갔다. 그러고 보면 박지민 기획사는 소싯적 제가 익명으로 들쑤시던 대형 기획사의 이사 쯤 되던 사람이 어쩐 일인지 따로 떨어져 나와 설립한 기획사였지.

 

 

엿 돼 봐라, 씹새들아. 제 안위 따위를 생각하기엔 대한민국 중고취준생의 간덩이가 심히 비대했다. 그렇게 꽤나 이름 있는 방송국의 사회부 조연출에 지원하는 석진의 포트폴리오에, ‘두 얼굴의 연예 기획사, 그 날 룸싸롱에서는 무슨 이야기가 오갔나.’ 따위의 자극적인 제목의 폭로 기획파일이 추가되었다. 마침 자극적인 가십거리가 필요했던 언론은 기획서를 덥석 물었고 파이널 실전 입사 과제로 만든 시사 다큐 영상은 어마어마한 조회수를 기록하며 이른바 대박을 쳤다. 제 남친 괴롭히던 악의 무리에게 엿도 먹이고 겸사겸사 취업까지 성공한 거다.

 

 

해당 소속사의 인기 아이돌 그룹 히트파이브의 전 멤버가 억대의 계약금을 받고 탄탄하고 깨끗한 유명 기획사와의 인연을 맺어, BT21이라는 새 이름을 가지고 또 역사를 만들어가게 되었다는 기사에 달린 수많은 댓글을 읽으며, 지민에게 연락해 볼 자신감이 샘솟았다.

 

 

이전에 싸운 것도 걸렸고, 또 마침 다큐 찍으며 미친 듯이 바쁘기도 했기 때문에 연락을 보지도, 하지도 못한 채 본의 아니게 냉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어느 정도 갈등 사안을 해결했으니, 이제 지민이랑 다시 얼굴 보고 차분하게 대화를 해도 되지 않을까. 지민이가 너무 고마워하면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해야지. 너는 나한테 너무 소중한 사람이라고, 예전에 나쁜 말을 해서 미안하다고 해야지.

 

 

지민아, 오늘 만날 수 있어? 말풍선 옆의 숫자는 얼마 안 가 사라졌고 대신 그리웠던 목소리를 담은 전화가 걸려왔다. 형.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물기로 푹 젖어 있다는 것쯤은 그 애를 사랑했던 시간이 짧지 않아 대번에 알아챌 수 있었고.

 

 

 

[“...형, 미안해요.”]

“지민아, 왜 울어. 어디야, 왜 울고 있어.”

 

 

 

당장에 하고 싶었던 말들이나 그간의 서운했던 감정보다 걱정이 앞섰다. 혹시 제 행동이 빌미가 되어 무슨 봉변이나 당한 건 아닐지, 덜컥 그런 것부터 걱정이 됐다. 나 안 울어요. 속일 사람을 속이라고 윽박을 지르는 대신 그저 애가 닳아 또 애 취급부터 하게 된다.

 

 

 

“지민아, 어딘지만 말해주면 형이 갈,”

[“형, 내가 다 미안해요. 우리 헤어져요.”]

“... ...뭐?”

 

 

 

헤어지자는 그 말에 지민과 연락을 하지 못하고 있던 시간 동안 느끼던 현실감이 죄다 사라지고, 세상에 오직 저와 지민만이 남겨진 것 같은 고요한 당혹감이 밀려왔다. 박지민, 너 그게 무슨 소리야. 너 무슨 일 있지. 얼른 말해. 떠드는 건 나 혼자였고, 이제는 숨소리마저 내지 않고 고요한 건 박지민이었다.

 

 

지민이 갑자기 이런 식으로 이별 통보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 석진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답답한 마음에 아무 의미 없이 수화기에 귀를 더 바짝 붙이고, 다시 한 번 차분히 지민아, 이름을 부르니 그 때 언제 푹 젖어 있었냐는 듯 꾸며낸 것처럼 버석한 목소리로 박지민은 또 한 번, 이별을 고했다.

 

 

 

[“헤어져요. 진심이에요.”]

“... ...이유가 뭔데.”

[“...형 제멋대로인 거, 그거에 지쳤어요. 몇 년이 지나도 나 어린애 취급하는 것도 싫고, 이렇게 상의도 없이 혼자서 멋대로 일 해결해버리는 것도 속상해. 연락하지 말래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연락하는 것도 이기적이야. 이런 게 한 두 번이었어요? 나 이제 그만 하고 싶어. 그니까 헤어져요, 우리.”]

 

 

 

연애가 처음인 것도 아니었고 차여본 게 처음인 것도 아니었는데,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석진 이제 다시 누굴 못 만나겠구나, 하는 예언을 했다. 슬프게도 정확한 예언이었다. 사회의 찌든 때를 먼저 뒤집어쓰고 내가 사랑하는 너만큼은 깨끗하게 행복하게 남아있기를 바랐던 내 얄팍한 열등감이, 너에게도 열등감을 갖게 했구나. 나 만나면서 그만큼 힘들었구나. 그런 생각도.

 

 

 

[“... ...끊을게요.”]

 

 

 

끊긴 전화를 붙잡고 오래도록 했다.

 

 

 

 

-

 

 

 

 

그러니까 세상에 좋은 이별이란 없다지만, 굳이 분류를 해보자면 나쁘게 헤어진 쪽에 더 가깝다는 거다. 이후 글로벌한 이름을 달고 박지민네 그 BT21은 정말 무섭게 성장해서 해외투어 매진 같은 건 껌처럼 가볍게 씹어 먹는 그런, 언터쳐블 존재가 됐다. 물론 그 쪽이 바빠진 것과 동시에 한국에서, 특히 방송국에서 그들을 마주할 일이 적어졌다는 건 잘 된 일이었다.

 

 

지원했던 사회부가 아닌 연예부에서 굴러먹다 어느덧 중급 피디가 되었을 무렵까지도 단 한 번을 방송사에서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러다 무슨 특집 기획이니 뭐니, 거창한 이름을 달고 성황리에 해외 투어를 끝마치고 입대만을 남긴 슈퍼스타들을 모신다는 일회성 토크쇼에서는 당연히 자발적으로 이름을 뺐다. 실패한 커리어와 실패한 사랑의 흑역사가 오롯이 떠오르는 탓이었고 현재진행형으로는 그렇게 염불을 외던 정의구현 따위보다는 연예오락 같은 걸 찍어 대고 있던 탓이었다. 창피했다.

 

 

토크쇼 당일엔 제 심경뿐만이 아니라 방송국 전체가 하루 온종일 어수선했다. 그 쯤 되니 아이돌 그룹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갑을관계가 바뀌어야 하나 싶었지만 이 바닥 생리가 그랬다. 뜨기 전에는 최하층민만도 못한 취급을 받다가 어느 정도 떴느냐에 따라 귀족 계급이 생겨나고, 귀족을 넘어서서 아예 건드리면 좆 되는 위치도 형성된다. 건드리면 좆 되는 박지민이 예전에 제 좆을 그렇게 꼴리게 빨아 줬었지.

 

 

아무튼 신경을 끄고 밀린 편집이나 하자. 그런 생각으로 BT21을 구경해야 한다며 평소와 달리 화장까지 곱게 하고 온 후배 하나를 협박하듯 데려와 함께 편집실에 쳐박혔다. 찍어둔 영상을 편집하는 작업은 사실 해도 해도 끝이 없고, 결국은 자기만족의 영역인지라 다른 잡생각을 없애주기에 제격이다.

 

 

 

“어쭈. 편집실에서 끽연을 해?”

“아, 선배가 나 BT 애들 못 보게 했으면 이 정도는 봐줘야 한다, 솔직히!”

“참 나. 걔들이 뭐라고...”

 

 

 

정말 걔들이 뭐라고. 진심을 가득 담아 마우스를 딸깍이자 입이 댓발이나 나와 화면에 닿기 직전인 지영이, 또 한 번 툴툴댄다. 그래도 걔넬 언제 보겠어요. 이제 다 같이 군대 간다는데.

 

 

 

“면봉 같은 실물을 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휴대폰 속에서 봐, 고화질로.”

“에이, 진짜 산통 깨는 데 뭐 있어 오빠는.”

“전문이지 내가.”

“예, 공주님 어련하시겠어요.”

 

 

 

아무튼 김석진 못 이겨, 못 이겨. 말은 밉게 해도 보조 하나만큼은 기깔나게 해 주는 지영이 함께 편집실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다. 지영은 몇 개월 전 고백을 받고, 어물쩡 연애할 여유도 마음도 안 된다고 거절한 사이였다. 그래도 언젠가 남들이 맞춰둔 기준에 맞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되거든, 연애를 하는 간지러운 마음보다는 잘 맞는 친구 한 명을 둔다는 느낌으로 함께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 여자였다.

 

 

 

“근데 그거 알아요?”

“뭘.”

“박지민 있잖아요, 걔 남자 좋아한대요.”

“아.”

 

 

 

...그렇구나. 동요 없이 대답하는 제 모습이 무척이나 이질적이었다. 박지민은 그간 처신을 어떻게 하고 다녔기에 방송국에 이런 소문이 났는지, 저와 헤어진 뒤로 누구를 어떻게, 얼마나 만났으면 남의 입에서 가십거리로 오르내리는지. 그런 찌질한 생각들을 전부 억누른 대답이었다.

 

 

 

“대박이죠. 근데 그거 묻으려고 지금 소속사, 빚지고 들어간 거래.”

“...뭐?”

“한창 재계약을 하니 마니 얘기 나올 때 그 옛날 소속사가 걔랑 사귀는 사람 거론하면서 계약금 후려치기 엄청 했었대요.”

 

 

 

그 사귀는 사람이 공개되면 팬 떨어지는 건 당연하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수준이었다니까, 다들 그게 남자겠거니 생각한 거지. 애초에 박지민이 지고 들어갈 입장이 아니었잖아요. 근데 법원에서 공개됐던 그 불공정한 계약서에 군말 없이 싸인 다 하고 자발적으로 계약 연장한다고 했다며. 그럼 그게 뭐겠어, 지도 약점 잡혔고, 찔렸다는 거죠.

 

 

그 때부터 뭔가 가슴을 누르고 있는 것처럼 숨이 차고 골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충분히 그럴 법한 개새끼들이긴 했다. 저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렇게 어른인 척 굴던 박지민도 어느 면에서는 개새끼였고. 그럼 전 소속사는 그렇다 치고, 지금 소속사에 빚지고 들어갔다는 건 무슨 소리야. 평정을 가장하려 해도 끝이 떨리는 게, 영락없이 충격 받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오빠 이런 데 관심 있었어? 웬 일로 엄청 몰입했네? 동그랗게 커진 지영의 눈동자가 석진의 안색을 좇았다. 어두운 편집실에서도 창백해진 얼굴이 둥둥 떠다니는 걸 확인하고서, 지영의 목소리가 커졌다.

 

 

 

“선배, 어디 아파요?”

“아니. 빨리 말해봐. 박지민 그 얘긴 뭔 소린데.”

“지금 박지민이 문제가 아니라 선배 안색이, ...”

“말하라고!”

 

 

 

말해줘, 지영아. 지금. 지금 들어야 돼. 덩달아 핏기가 싹 가셔 창백한 얼굴로 지영이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갔다. 한참 난리났던 그 유튜브 영상 기억하시냐고. 전 소속사 국회의원과의 룸싸롱 뇌물수수 비리 터트린 그 영상 때문에 박지민 재계약 건이고 뭐고 다 흐지부지 된 건 맞다고. 그런데 그 당시 도산하고 수십억 빚더미에 앉은 그 소속사 사장이, 제 버릇 개 못 주고 또 한 번 그 쪽 카드를 집어 들었다고. 박지민은 무슨 거대한 약점이 또 잡혔는지 그 빚 다 제가 떠안겠다고 했다고. 그래서 현 소속사 계약 조건이, 그 빚 대신 갚아주는 대신 계약금 한 푼 없이 들어간 곳이 지금 소속사라고. 그래도 그 정도면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고.

 

 

 

“그래서 지금 떠도는 얘기가, 남자 좋아하는 것도 좋아하는 건데 그 당시에 그 국회의원 만나서 성접대 한 게 박지민이 아니냐는, ...”

 

 

 

지영이 하는 말 속에서, 그 날 박지민이 뭘 가지고 협박을 당했는지 너무나 잘 알 것 같아서. 별 것도 아닌 애인 한번 지켜보겠다고 그 불구덩이로, 알아서 들어가는 박지민 모습이 관찰한 것처럼, 그림처럼 선명하게 그려져서. 그래서 숨이 가빠져 왔다. 심지어 이렇게 은밀히, 뒤로 도는 더러운 루머를, 내가 알게 될 정도라면 박지민이 모르고 있지 않았을 텐데. 그냥 너는, 나를 지키고 싶었을 뿐이었을 텐데. 너는, 지금보다 한참이나 어렸던 너는.

 

 

 

“시발.”

“응?”

“시발. 진짜 개시발놈들이다. 지영아, 너한테 한 말 아니야. 그냥 내가, 내가 존나, 아, 지금 미친 듯이 야마가 돌아서, 흑, 그래서, 그래, 아아, 흐...”

“어머, 선배, 석진 오빠! 괜찮아? 숨 제대로 쉬어봐, 어떡해! 여기요!! 오빠, 내가 사람 불러올게! 기다려요!”

 

 

 

 

 

 

-

 

 

 

 

 

 

사람이 너무 화가 나면, 지나온 시간이 미친 듯이 억울하면, 또 누군가의 진심을 최악의 방법으로, 뒤늦게서야 듣게 되면, 그렇게나 갑작스레 숨이 모자라질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수면부족과 스트레스 누적으로 인한 과호흡, 흔한 병명이 그 날의 작은 소란을 설명해 주는 수식어로 남았다.

 

 

아무튼 그 날 시장 복판처럼 떠들썩한 8인 병실에 누워 혈관에 다이렉트로 영양제를 꽂아 넣으며 다시 한 번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사귀는 동안에 그렇게 질색하던 어린애 취급이란 걸, 이런 방법으로 돌려줬어야 했는지. 이렇게 비참한 기분이라는 걸, 이따위 방식으로 알게 했어야 했는지. 사실 분노의 방향은 박지민이 아니라 저 자신을 향하고 있었음에도 그랬다.

 

 

애초에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니었으니 퇴원은 빨랐다. 문제는 마음이었다. 하필 같은 공간에 있을 때 그 난리가 나 놓아서인지 마음도 자꾸만 센티해져갔다. 의무적으로라도 외면하고 있던 박지민과 관련된 소식들을, 모니터링이라는 핑계로 자꾸 접하기 시작했다. 한국에 있는 시간이 짧았던 박지민. 이제는 그 좋아하던 그룹 멤버들과 함께 군 입대를 하기 위해 잠시 휴식기에 들어갔다는 박지민. 쉬는 동안 그간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며 즐겁게 웃고 있는 저화질의 파파라치 사진들, 그 다정을 숨기지 못해 불거지는 가볍고 자잘한 스캔들, 형식적인 해명 기사, 사람들의 반응들.

 

 

포슬포슬 웃는 박지민을 다시 보는 건 좀 힘들었다. 스캔들은 아무렇지 않았다. 이 쪽 사람들이 보기엔 좀, 허술한 스캔들이어서 그랬다. 한낱 방송국 조연출이 알고 있는 게이 찌라시를 소속사가 모를 리 없다. 이번 기회에 이미지 메이킹 다시 하려나보다. 그냥 그런 생각으로 포털 메인 기사에 추천이나 박았다. 글로벌 탑 아이돌과 신예 배우의 목하열애? 소속사, 사실 확인 중. 다른 생각을 하기엔 자진해서 새로 맡은 웹 예능이 빡셌다. 과로사를 일부러 노리는 사람처럼 살 예정이었다.

 

 

 

[나 걔랑 안 사귀어.]

[아프지 마요.]

[밥 잘 챙겨 먹어요.]

[보고 싶다.]

 

 

 

이런 해명 문자 같은 걸 보내지 않아도 됐다는 말이다. 모르는 번호로 도착한 문자에서 자동으로 음성이 재생되는 것 마냥 환청이 들렸다. 헤어지고 한 3년 정도는 혼자서 생일이며 특별한 기념일 같은 걸 챙겨서 연락을 하곤 했었다. 찌질한 구남친을 자처하면서,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고 자기합리화를 해 대면서 ‘자니...?’ ‘생일 축하해...’ 따위의 문자를 보냈다는 거다. 읽씹만 하고 답장 한 번 없다가 이제 와서? 거하게 스캔들 하나 거하게 내 놓고 이제 와서?

 

 

얼마나 상징적인가. 그건, 박지민이나 김석진이나, 여전히 그 때처럼 힘없이 결정에 따르는 인간들이라는 뜻이었다. 이미 끝난 사이라는 것만 더 절절하게 와 닿았다. 우린 이별을 몇 년 째 하고 있는 거냐. 깔끔하게 번호를 차단하고 다음 날 반차까지 내고 폰 번호를 바꿨다. 이미 잘 살고 있겠지만 더 잘 살아라. 문자로든 전화로든 하고 싶었던 말은 그냥 마음속에 묻었다.

 

 

BT21은 예정대로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국방의 의무를 지러 떠났고, 박지민이 그 신인 배우와 조심스럽게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는 공식 기사는 진작 엠바고를 깨고 세상에 퍼졌다. 박지민이 제대를 한 뒤에도 고무신이 꽃신이 된 아름답고 풋풋한 연애의 대명사로 심심하면 배우 여자애의 SNS나 박지민의 무대 위 애드립 따위가 화제가 되곤 했다.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으니 예전처럼 강박적으로 박지민 소식을 외면할 필요도 없었다. 더 바쁘고 더 무감정하게 살면서 가끔 혼술이나 하면 그걸로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끝이었다.

 

 

 

 

 

-

 

 

 

 

 

그렇게 끝을 맺었으면, 박지민은 이딴 식으로 내 앞에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거지. 뭐, 그 쪽에서 지명을 해? 김석진 피디 아니면 다큐 안 찍어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가슴을 팡팡 쳐 봐도 여전히 둥실둥실 그 능글맞은 얼굴이 따라다녔다.

 

 

 

“어차피 이 다음에 찍을 건 한참 뒤에나 그림 나오잖아요.”

“그래서 뭐, 시발 뭐.”

“나랑 밥 먹어요. 밥차 말고, 더 좋은 걸로.”

 

 

 

이제 와서 뭘 어쩌자고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대놓고 플러팅이야. 다큐멘터리는 초반에 기획한 것처럼 올로케, 그니까 해외 공연까지 다 따라가며 생생한 무대 아래의 땀과 열정을 담기로 결정되었다. 첫 공연 일정인 한국 공연을 끝마치고 인터뷰까지 다 따낸 시점에서 추가적으로 놓친 장면이 없는지 체크하고 그 다음 공연 때 쓸 만한 그림을 미리 협의하러 만난 미팅 자리에서 저 지랄이다.

 

 

 

“그래, 석진아. 옛날에 둘이 잘 알던 사이라면서! 나머지는 우리끼리 정리할 테니까 오랜만에 둘이 밥도 먹고 그래.”

“어, 국장님도 허락해주셨네요. 가요, 형.”

 

 

 

저건 양 측 다 모인 자리에서 괜히 사람들 불편하게 만들지 말고 박지민 데리고 썩 꺼지라는 말이다. 친절하게 법카까지 내 주며 나가서 밥을 먹고 오라는데, 거절할 명분이 있을 리가.

 

 

죽상을 하고 미팅룸을 빠져 나가자마자 잡힌 손을 털어낸다. 살성이 약해 잡히면 잡히는 고대로 손자국이 남는데, 그걸 제일 잘 아는 새끼가 여보란 듯 여기저기 손자국을 내고 있는 게 아니꼬웠다.

 

 

 

“예약해 둔 식당으로 갈게요.”

“바빠 죽겠는데 무슨 식당 타령이야. 이 앞에 국밥 잘 하는 데 있어.”

“국밥이 먹고 싶어요?”

“어. 주문하면 1분 안에 나오고 푹푹 퍼서 15분 안에 먹고 나올 수 있는 국밥이 먹고 싶어.”

“에이. 그럼 안 되지. 얼른 타요. 괜히 실랑이만 길어진다.”

 

 

 

기분 나쁘라고 한 말에 타격 없이 실실 쪼개는 건 박지민 주특기다. 자존심이 없는 놈인가, 싶다가도 제게만 그러는 걸 보면 같이 웃게 되고 그랬는데. 지금은 그냥 짜증스럽다. 너랑 나 없으면 회의 진행 안 돼. 얼른 들어가야 된다고. 떠밀리듯 조수석에 앉아 퉁명스레 면박을 주니 어차피 우리가 나온 시점에서 회의는 끝났단다.

 

 

 

“저 이미 수고하셨다고 톡까지 다 보냈는데요.”

“뭐야, 언제 이렇게 뻔뻔해졌어?”

“이제 좀 뻔뻔해지려고.”

 

 

 

그래도 될 것 같아서요. 그렇게 말하는 박지민 눈이 제 왼 손, 네 번째 손가락으로 향한다. 얼마 전, 지영에게 다시 한 번 고백을 받았고 그 다음 주에 지영이 맞춰온 반지를 별 말 없이 손가락에 끼웠다. 여전히 로맨틱한 감정보다는 전우애에 가까운 감정이었으나 그게 뭐 얼마나 중요할까. 물 건너 간 사랑 외의 나머지는, 별로 의미가 없었다. 물 건너 간 건, 말 그대로 물 건너 간 거고. 이제 와서 다시 시작하니 마니 하는 것보다 그냥 서로 행복할 길을 찾는 게 맞는 것 같아서 굳이 반지를 빼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 속도 모르고 갑자기 나타나 뻔뻔해지겠단다.

 

 

입을 다무는 게 정신 건강에 제일 낫겠다는 생각에 차창에 머리를 기대는 것으로 대꾸를 대신했다. 박지민이 운전하는 차는, 분홍 튤립을 가득 채워놨던 그 방의 기억을 고스란히 담은 호텔로 향한다. 박지민은 자꾸만 반칙을 썼다.

 

 

 

 

둘 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다큐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아마도 그 호텔에서 제일 비싼 코스일 거창한 저녁식사를 마치고, 제일 비쌀 와인을 시키는 것까지 별 말 없이 구경했다. 예전부터 박지민과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편했고, 말을 하면 설레고 재미있었다. 예전에 우리, 이랬던 거 기억나요? 이런 것도 했잖아. 취해서였는지. 박지민이 시도하는 알량한 추억팔이가 모조리 기억이 나는 게 서글펐다.

 

 

형 소주랑 맥주는 섞어서도 잘 마시는데 꼭 와인은 몸에 안 받는다고 금방 취했잖아. 몇 잔째인지 모를 비싼 와인을 잘도 먹여놓고 저 역시 벌겋게 올라온 얼굴로 귓가에 달큰한 숨을 속삭인다. 마주 앉았던 자리는 어느새 착 붙은 옆자리가 되어 있다.

 

 

 

“근데 형, 만나는 사람 누구예요?”

“... ...알아서 뭐 하게.”

“하긴.”

 

 

 

부러 반지를 빼지 않았고, 또 지금도 괜한 어깃장을 놓은 것인데 그럼에도 쉽게 긍정하는 박지민 말에는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진다. 두 개새끼들 연애 놀음 때문에 괜히 좋은 여자만 욕을 보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나서 얼굴이 새로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어차피 헤어질 건데 알아서 좋을 거 있나.”

“이 뻔뻔한 새끼가 뭐라는 거야. 나 결혼할 거야.”

 

 

 

결혼해서 너 보란 듯이 잘 살 거야.

 

 

이런 말 자체가 아직 널 잊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임을 알면서도 이미 취한 정신머리로는 필터링이 없었다. 박지민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덥고, 취했고, 레스토랑은 약속이라도 한 듯 기이하게 우리 둘뿐이고, 좆같이 세월은 흘렀다. 그러니 여과 없이 조금만 솔직해도 되지 않을까.

 

 

 

너도 그랬잖아. 너도 나 위한답시고 네 마음대로 다 결정하고, 내가 손 쓸 새도 없이, ...그랬잖아. 박지민에게 하는 말이 되레 제게 비수로 돌아와 꽂힌다.

 

 

 

“나도 그랬지만, 내가 그랬다고 너까지 그러면 어떡해.”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질질 샜다.

 

 

 

“결혼하지 마.”

 

 

 

제 주정 앞에서 박지민은, 뻔뻔하고 당돌하기 그지없다. 결혼하지 마. 나랑 살아, 나랑 결혼해. 나랑 있어요. 형, 나 버리지 마.

 

 

뻔뻔할 거면 끝까지 뻔뻔할 것이지 끝에 가서는 누구 억장 무너지라고 끝이 죄 갈라져 떨리는 목소리로 결혼을 하지 말라고 한다. 버리지 말라고, 누가 누구더러.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전하는 멋대가리 하나 없는 박지민 말에 가슴이 뛰는 게 싫었고, 붉어졌을 귓바퀴가 창피했다. 그걸 모르고 대답이 늦으니 옆에 앉은 저까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벌벌 떠는 지민에게, 또 책임을 오롯이 떠넘기고 싶어진다. 이 곳으로 함께 오면서, 도망치지 않고 자리에 앉으면서, 박지민이 따라 주는 와인을 마시면서 이렇게 될 걸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그냥 전부 박지민 탓이라고 패악을 부리기로 한다.

 

 

 

“흑, 다 너, 때문이야.”

“맞아요, 나 때문이야.”

“네가 멋대로 헤어지자고 해 놓고, 또 멋대로 이렇게 나를, 나를...”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요.”

“개새끼. 박지민 나쁜 놈. 뻔뻔하고 파렴치한 놈.”

“그건 좀 마음이 아픈데.”

“지밖에 모르는 놈. 지만 멋있는 거 하면 다야.”

 

 

 

너만 멋있으면 다냐고. 니네 회사 지분, 네가 그만큼 인수한 거, 그래서 다시 내 앞에 나타난 거 내가 모를 줄 알았냐고. 너 진짜 날 위해서라면 그러면 안 됐어. 너만 힘든 거 다 하고, 너 혼자 다 안고 가고, 그럼 그걸 들키지나 말든가, 내가 얼마나, ... ...

 

 

술주정에 가까운 성토가 더 이어지지 못하고 다가온 입술에 먹혀 속으로 삼켜졌다. 여전히 보드랍고 따뜻한 입술이 그 간의 그리움을 집어 삼킬 듯 거침없이 제 안을 헤집는다. 그리웠던 더운 숨이 마음을 녹이는 것 같았다. 사실, 무자비하게 내리꽂히는 박지민의 애정에는 언제나 속수무책이다.

 

 

 

“더 해도 돼?”

 

 

 

묻는 말에도, 눈동자에도 전염된 듯 물기가 어려 있었다. 그게 제게는 감당할 수 없는 쓰나미다. 뭘 더 어쩌지도 못하고 동앗줄을 붙드는 듯한 심정으로 지민의 옷깃을 말아 쥔다. 박지민은 그 보잘 것 없는 응대에 세상을 다 가진 사람이 되어 웃었다. 입술이 퉁퉁 불어터진 물만두 둘이 약속이나 한 듯 예전 그 방을 찾아 올라갔다.

 

 

문을 열자마자 웃음이 터졌고 내 웃음소리에 박지민은 조금 부끄러워했다. 테이블 위에 딱 한 송이, 분홍색 꽃송이가 놓여 있다.

 

 

지민아, 왜 이미 예약이 되어 있어? 알면서도 물었고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는 거짓말을 들었다. 여전히 앙큼했다. 내가 여전히 저를 사랑하고 있을 것이라는 도박이 실패했다면 아마 테이블 위의 분홍 튤립은 그대로 버려졌겠지. 제 앞에서 센 척 좀 하면 어떤가. 귀여우면 다다.

 

 

그런 태평한 생각은 곧 굶주린 사람처럼 제 옷을 벗기는 박지민에 의해 죄다 날아갔다. 내 생각만 해. 다른 생각 하지 마요. 억울함에 네 생각을 하고 있었다며 항변을 하려 입을 뗐다가 유의미한 언어를 대신하는 신음성이 흩뿌려졌다. 두 입술이 맞붙는 것도 순식간이다. 말라 비틀어져 있던 꽃송이가 다시 젖어 생기를 얻는다.

 

 

 

홀로 메말라 있던 시간이 억울할 만치 빠른 속도로, 완연한 연인의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fin.

 

 

 

 

 







별 거 없는 후기입니다. 



이렇게 기부를 기반으로 하는 좋은 합작에 참여할 수 있어 영광이었고, 거의 1년 만에 쓴 글을 반겨주시는 분들이 있어 행복했습니다. 글은 써야 는다는 말이 정말 맞는 것 같아요. 한 동안 글을 놓고 있다 보니 패기롭게 합작을 신청해두고서도 몇 주 정도 빈 창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제가 짐진을 너무 좋아해서 진짜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이 컸나봐요. 

아무튼 마감이나 칠 수 있을지 걱정했던 원고를 세상에 나오게 도와주신 합작 주최해주신 분들, 비롯하여 도움 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얼레벌레 마감도 치고 합작 공개도 무사히 한 것만으로 저는... 눈물이 차올라서 고갤들어~~ 상태예요. 


아무래도 글이 석진이 시점에서 진행되다 보니 지민이의 상황이나 감정이 잘 전달이 되었을지가 가장 걱정입니다. 울 지미니 멋진 불도저 영앤리치 연하남인데 귀엽기까지 한 사기캐로 만들고 싶었어요. 물론 석진이도 능력 출중한 피디님입니다. 별명이 공주인데 어화둥둥 방송국에서 살아남은 건 다 능력이 좋아서죠. 이후의 이야기는 여러분이 상상하는대로 읽어주시면 더 좋을 것 같아요. 깨붙한 놈들이 다시 깨지지 않으리란 법도 없고 알콩달콩 잘 살지 못하리란 법도 없고! 하지만 짐진은 영사해. 


셀털이지만 저는 못 찾아뵈었던 기간 동안 타지 생활에 적응도 하고 새 직장에서 살아남기를 열심히... 했답니다. ㅠㅠ 물론 아직 쪼렙이지만 언젠가 점점 여유가 생기면 다시 글을 많이 쓰고 싶어요. 

먼지 쌓인 포타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부를 목적으로 한 합작인 만큼 참여의 개념으로 소액만 걸어두겠습니다. 결제 안하셔도 완전 무방!! 




이어지는 내용이 궁금하세요? 포스트를 구매하고 이어지는 내용을 감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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