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는 승리한다. 정파의 무인들은 곧잘 그렇게 말한다. 그 말을 부정하는 이들도 있다. 이기는 사람이 정의라고. 정파는 올바르기 때문에 정파가 아니라 강하기에 정파인 것이라고.


올바르기 때문이든 강하기 때문이든, 어쨌든 정파 연맹은 마교에게 승리했다. 천마는 큰 상처를 입고 모습을 감췄고 네 명의 마영 중 둘이 죽었다.


그래서 남궁영인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았다. 그녀는 이겼고 앞으로도 이기는 쪽에 설 것이었다. 많은 사람이 그녀를 찾았다. 단인마녀(丹刃魔女) 화유설을 베었다는 이름값은 귀하고도 무겁다.


무림맹 이곳저곳에 불려가며 인맥을 쌓는 동안 영인은 유설에게 감사했다. 제 손에 죽어 주어서. 그리고 친척의 팔을 잘라서.


오른팔을 잃은 친척, 남궁윤은 가주의 아들이다. 영인보다 실력은 몇 수 떨어졌지만 그 배경 탓에 무시할 수 없는 가주 후보였다. 하지만 오른팔 없는 검사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넓디 넓은 중원 어딘가에는 잘린 팔다리를 대신할 수 있는 기물(奇物)이 있다고 하지만 금방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주가 아들의 팔을 되찾아주려 애쓰는 동안, 영인은 흔들리지 않을 만큼 자리를 굳힐 생각이었다. 짧지 않은 외유 끝에 본가로 돌아온 영인은 멀찍이 보이는 대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가 이겼다. 방계로 태어난 내가. 여자로 태어난 내가. 남장으로 정체를 숨겨가며 무림을 떠돌고 실력을 키운 끝에.


"하."


웃음이 반짝 터졌다. 영인은 남궁세가 본가로 다가갔다. 문지기가 일찍이 그녀를 알아보고 문을 열었다. 처음 이곳에 발을 들일 때는 이러지 않았다. 이름이 무어냐. 신분패는 있느냐. 이것이 네 것임을 어떻게 증명하지?


이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일어날 수 없다. 영인이 가주가 될 테니까. 앞으로 평생 남자인 척하며 살아가야겠지만, 그래도 가주가 될 테니까.


영인은 문을 넘었다. 단단한 석판이 깔린 넓다란 전원(前園) 양옆으로 남궁세가의 검사들이 줄지어 섰다. 그들의 시선을 한 눈에 받으며 영인은 전원을 가로질렀다. 입꼬리를 한껏 비틀어 올린 채.



* * *



그 날 밤, 돌아온 영웅을 환영하는 주연이 열렸다. 가주의 바로 옆자리에 앉은 영인은 그가 직접 따라주는 술을 마셨다.


그리고 가주의 얼굴에 도로 뱉어버렸다.


며칠 뒤, 흑운신검 남궁영인이 병상에 누웠다는 소문이 퍼졌다.



* * *



남궁세가로부터 몇백 리는 떨어진 어느 주루에서, 영인은 말린 고기를 씹었다. 소문은 바람보다 빠르다. 유명한 무림인에 대한 것이라면 더더욱. 가문에서 도망쳐나온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영인이 있는 곳까지 소문이 닿았다.


"병상이라."


영인은 피식 웃었다. 나는 여기 있는데?


하긴 세가에게 명예와 명분은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러니 유력한 소가주 후보가 사실 한낱 여인이었고, 그 여인에게 산공독과 몽혼약 섞인 술을 마시게 했고, 그나마도 실패했다는 소식을 알릴 수야 없었을 것이다.


예상대로라 더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가문의 수작질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영인은 남궁세가의 가주가 되고 싶었다. 방계의 여자로 태어나 남궁세가에 할 수 있는 가장 큰 공격이니까. 그리고 그 바람을 이루기 전까지 남궁세가는 유서 깊은 명가로 남아 있어야 했다. 가치 없는 것을 가져봐야 의미가 없다.


하지만……. 남궁세가의 지원 없는 영인 역시 무력을 빼면 아무 가치도 없다. 하지만 무력도 지금은 제대로 쓸 수 없다. 영인이 자랑하는 적운무애검(積雲無碍劍)은 남궁가의 무공이다. 대놓고 썼다간 남궁세가에게 들킬 수도 있다.


경험도 제법 쌓았고, 무공을 숨긴 채로도 할 수 있는 일은 많았으므로 당장 먹고살 걱정은 없다. 하지만 시간을 흘려보낼수록 목표도 멀어진다.


영인이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목소리가 들렸다.


"같이 앉아도 될까요?"


왠 여자가 영인의 건너편에 앉았다. 영인은 칼자루를 쥔 채 가만히 상대를 노려보았다. 이 여자, 고수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가느다란 머리칼을 길게 길렀다.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넘기자 부드러운 광택이 사르르 쏟아졌다. 속눈썹이 유난히 길었고, 눈매는 단아하고 표정은 단정했지만 이따금 떠오르는 눈웃음은 꽃 향기처럼 고혹적이었다. 옷은 낡고 수수했지만 아름다움을 가리지는 못한다. 잡초 속에 피어난 모란 같은 사람이었다.


영인은 그런 사람을 하나 알고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바로 그 사람이었다.


"……화유설? 살아있었나?"

"네에. 다음에는 확인사살을 철저히 하세요."

"지금 할 수도 있는데."

"그러면 적운무애검을 쓰셔야겠죠? 저도 천녀소혼도(天女消魂刀)을 써야 할 테고요. 그럼 피차 피곤해지지 않을까요."


맞는 말이었지만 그럴 가치는 충분했다. 화유설은 사마영의 일인이다. 마교에서 가장 가는 도법의 고수이기도 했다. 그녀의 목은 비싸게 팔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를 못 들을 것도 없었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기어코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있을 테니까. 영인은 칼날을 아주 약간 뽑은 채 말했다.


"그래……. 그럼 어디 들어볼까. 멸망한 사교의 주구가 내게 할 말이 무엇인지."


유설이 눈을 깜빡였다.


"네? 우리 교 망했어요?"




영인이는 이 글의 하드보일드(하프보일드?)를 담당하고


유설이는 이 글의 개드립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사실 영인이 탈출을 좀 더 하드보일드한 액션으로 쓰고 싶었는데, 호흡이 너무 늘어지는 거 같아서(+ 분량 문제도 있고) 짧게 줄여버렸어요. 언젠가 제대로 보여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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