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버 로이 X 심해 괴물(크립티드-루스카)제이슨




바다는 고요하다.

 옅은 바람에 흩어지는 붉은 머리를 다이버 수트에 집어넣으며 로이는 바닷물을 바라보았다. 약하게 일렁이는 에메랄드빛 물빛, 저 멀리 구멍이 난 듯 보이는 군청색의 타원이 오늘 그의 목적지이자 종착역이었다.

오늘은 비번이었다. 스타시티에서 따분해하며 다이버 장비들을 판매하는 그는 오늘 가게 문을 닫기로 했다. 로이 윌리엄 하퍼 주니어의 다이버 샵. 줄여서 로이버 혹은 로이더. 도심의 아파트도 질리던 참이었다. 나바호 족 아래서 화살 하나를 들고 자유롭게 뛰어다니던 어린 날의 추억은 꿈결같이 숲과 바다를 속삭였다. 아, 그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차가운 물 속에 몸을 가슴까지 담글 때 등을 타고 오르는 즐거운 소름이 그는 그리웠다. 심장께에 달랑거리는 작은 화살 모양의 목걸이가 제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어찌 됐든 간에 사장의 특권으로 로이는 오늘 하루, 그러니까 6월 18일 금요일은 쉬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어젯밤 차로 열심히 달려 도착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벨리즈. 그레이트 블루 홀(Great blue hole). 

벨리즈의 그레이트 블루 홀에는 푸른곰팡이가 잔뜩 펴 구멍 뚫린 치즈마냥 블루 홀이 많다. 그러나 로이가 도전할 곳은 딘스 블루 홀(Dean's blue hole)이었다. 

깊이 202m. 세계에서 두 번째로 깊은 블루 홀.

 멋지지 않은가. 로이는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3시간 동안 웹서핑을 하다가 드디어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한 그는 쾌재를 불렀다.



그래서 로이는 한참을 달려 도착한 벨리즈의 해변 근처에 트럭을 세웠다. 트렁크에서 작은 카누를 내렸다. 살짝 녹이 슬은 그의 오랜 친구. 다이빙을 하기 전 카누의 머리부터 유선형의 몸체를 손바닥으로 스치듯 쓰다듬는 것이 그의 의식이었다. 이전의 뱃사람들이 항해를 하기 전에 약소하게 무언가를 하는 것처럼 잘 여행하고 돌아올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로이는 그의 하얀 카누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훑었다. 

-오리발, 마우스피스, 산소통, 장갑, 그 외의 모든 장비들 체크 완료. 마지막으로 얼굴을 덮는 스노클까지. 준비 완료. 

로이는 물 속에 머리를 들이밀 준비를 마쳤다. 카누에 개조한 보트 엔진을 단 그는 끈을 당겼고 얼마 안 가 부드럽게 물을 가르며 입수 포인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내가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나를 들여다본다 했던가. 로이는 약하게 넘실거리는 파도에 손을 휘적였다. 아래로 바닥이 보이지 않는 채도 낮은 구멍이 그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신이 바다를 만들 때 먹물을 뿌린 건지는 알 수 없지만-그는 한 30% 정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블루 홀은 푸른 빛을 넘어 새까만 빛으로 주위의 빛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밤하늘 우주 어딘가에 있을 블랙홀 또한 그리하리라. 주변을 휘는 밝은 빛이 가운데의 무저갱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런 면에서 본다면 바다는 하나의 우주였다. 별이 없는 소우주.



 그는 언제나 모험을 동경했고 그러기에 다이버로 꿈을 정했다. 화살은 그의 친구였으나 바닷속을 파고들어 화살처럼 가를 때면 온갖 상념이 몸과 함께 가라앉았다. 그는 화살이었다. 물 속을 가르는 붉은 화살. 

물 속에서 부유하는 플랑크톤처럼 물길에 따라 흘러가면 어느새 햇빛이 코에 남긴 작은 흔적이 존재를 드러냈다. 햇볕에 보기 좋게 그을린 그의 얼굴엔 언제나 주근깨가 번졌다. 그는 언제나 자신 있는 인간이었다. 흰 이빨을 보이며 웃었다. 물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풍-덩.'

경쾌한 소리가 물을 울렸다. 퍼지는 소리의 흐름처럼 수면이 일렁였다. 

수면 아래로 로이는 천천히 가라앉았다. 딘스 블루 홀은 여타 블루 홀과는 다른 수직으로 떨어지기 전 모레 제방이 있는 것이 매력이었다. 채도 낮은 물 위에서 어른 거리는 빛기둥을 보며 로이는 미소 지었다. 그에게 바다란 해방이었다. 해방. 자유. 유치한 것들이라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바다란 그런 것이었다. 유치하지만 아름다운 것들. 



색색의 열대어들이 그의 귀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숨을 내쉬었다. 흰 거품이 수면 위로 올라가며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수직의 구멍 아래로 하얀 모래가 중력의 명령을 따르며 낙하하는 중이었다. 멍하니 떨어지는 모래를 제방에 앉아 바라보다가 그는 몸을 일으켰다. 잠깐의 발돋움 끝에, 로이는 블루홀 안으로 몸을 뉘었다.




202m는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오로지 왼쪽 손목에 매인 야광 손목시계와 천천히 풀리는 작고 검은 고무끈에 의지한 채로 몸을 해류에 맡기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더 이상 어디가 밑이고 위인지 알 수 없는 공간에서 의지할 것은 자기 몸뚱이 하나만 남는 느낌. 로이는 그 느낌을 즐겼다. 그에게 자유란 그런 것이었다. 오로지 혼자만의 공간에서 본인만을 믿어야만 하는, 그런 것 말이다.



은빛의 상어들이 그의 발치를 간질였다. 평소라면 기겁했을 크기의 상어들이 다가왔지만 로이는 괜찮았다. 기름이 잔뜩 들어있는 실린더에서 천천히 낙하하는 쇠구슬처럼 로이는 부유물처럼 떠다녔다는 게 옳은 표현일 것이다. 천천히 휩쓸리는 야광의 플랑크톤이 어두운 바다를 별 무리처럼 수놓고 있었다. 그는 하강하는 것이 아니라 상승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방향을 찾을 수 없는 검은 물 아래서 로이는 그런 것이었다. 작은 플랑크톤처럼 떠다니는 무언가.

그 느낌을, 그는 즐겼다.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느낄 때 그는 비로소 인간임을 되새길 수 있었다. 인간. 만물의 영장.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미치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에서도 과연 인간은 자신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지껄일 수 있을까. 로이는 언제나 같잖다고 여겼다. 작은 사회 속에서 반복되는 일상에 로이는 곪고 있었다. 잔뜩 농익어 곧 터져버릴 고름마냥 곪아버렸다는 것이다. 곪으면 연고를 발라줘야 한다. 참을 수 없는 이 사회 속에서 로이는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자유.

자유란 그런 것이었다.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단물. 나바호족의 비호 아래 산새들이 지저귀던 어린 날. 올리의 눈 밑에 들기 전의 자신의 근원. 내가 나로서 기능할 수 있는. 더 이상 증명할 필요 없는. 나 스스로가 당당히 설 수 있는 어떤 것. 더 이상 이 분홍색 젤리 덩어리가 기능할 수 없도록. 로이는 급박했다. 

그의 오랜 습관인 납 화살 모양의 목걸이가 있는 심장께를 지분거리며 로이는 가라앉았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


 동방의 어느 나라의 속담이다. 가(비스트 보이)가 직접 개코원숭이로 변해 바나나를 먹으며 속삭였던 게 기억이 났다. 왜 기억이 났냐고 묻는다면 지금 로이가 처한 상황이 썩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정한다. 많이 좋지 않다.


베테랑도 실수를 한다. 장인도 그렇다. 누구든지 간에 실수는 엉덩이에 갑자기 난 종기처럼 찾아오는 것이다. 썩 달갑지 않은 손님을 잘 달래서 돌려보낼 수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면 지금은 후자에 해당한다는 게 문제였다. 그가 들 뜬 나머지 충분한 양의 산소통을 챙기지 않았다면 믿겠는가. 그럴 수 없는 게 그는 로이 윌리엄 하퍼 주니어였다. 그는 다른 곳에는 구멍 뚫린 스펀지처럼 물렁거렸지만 적어도 다이빙에서는 아니었다. 누구나 마지노선이 존재한다. 로이에게 인간관계와 같은 모든 것을 제외한 것 중 마지노선을 택하라고 했다면 그것은 바로 다이빙이었다.


그래서 적어도, 그는 다이빙만큼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처럼 꼼꼼함을 넘어 철저하게 준비했다. 다이빙은 그에게 자유를 안겨주었지만 언제든지 약탈해갈 수 있음을 알았다. 어제 만났던 다이버를 오늘도 볼 수 있으리라 확신할 수 없었다. 블루홀 옆의 무채색의 작은 비석에 즐비한 몸뚱아리 없는 죽음의 흔적에 오늘도 가볍게 묵념을 하고 온 그였다. 그렇기에 그는 누구보다 이 짧은 자유가 족쇄임을 알았고, 그렇기에 항상 다이빙을 요란을 떨며 철저히 빠르게 준비한다고 별명이 '스피디'였다. 물론, 지금은 다르게 불리지만 말이다.




그런 그가 초보적인 실수를 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단 10분만큼의 산소가 남아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70m 아래로 내려와 있음에 그는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소름을 느꼈다.

10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70m를 단번에 올라가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프로 다이버인 그라도 평소에 손님들을 상대할 때 들었다면 큰소리로 웃어 넘겼을 시간이 바로 10분인 것이다. 공기가 점점 희박해지고 있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검은 물 속에서 약하게 진동하는 끈만을 믿고 그는 올라가기 시작했다. 평소에 단련했던 이두가 그에게 실낱같은 희망을 안겨주는 듯했지만 얼마 안 가 위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끈 조각에 그는 생각을 또렷하게 할 수 없었다.

날카로운 이빨로 찢긴 검은 고무줄. 젠장맞을 상어. 검은 물. 간신히 파랗게 들어오는 야광 시계만이 수심을 알려주고 있었다. 로이는 발을 움직였다. 따분한 인생이라고 했지 이런 곳에서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연고 없는 죽음을 맞이하기에는 그의 삶은 아직 부족했다. 초침이 움직이고 있었다. 더불어 산소통의 산소도 연노란색을 넘어 주황색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로이는 생각해야 했다. 점점 가팔라지는 그의 숨소리 위인지 아래인지 알 수 없는 깊은 바다 아래, 카르스트 지형으로 생겨나 벽면을 원형으로 둘러싼 대리석 석주들의 속삭임 속에서 그는 정신을 차려야 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검푸른 물. 위, 아래, 동서남북,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맹인의 거짓된 울음소리, 안돼, 빨라지는 숨소리, 가팔라지는 심장, 염소의 비탄의 노래, 비극, 트라고디아(Tragodia), 나 여기 있노니. 꺼져가는 불빛, 점멸, 무지개!


로이 윌리엄 하퍼 주니어. 그 자신. 자신의 이름. 호랑이의 죽음과 가죽.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말라비틀어진 다이버 수트 아래에서의 작은 숨결. 마지막의 흐느낌과 공포 아래 그의 눈가에 차오르는 실핏줄은 그에게 무엇을 선물할 것인가. 썩 좋지 않은 곳을 스쳐 지나가는 불행한 생각들이 그의 분홍색 젤리 덩어리에 구멍을 뚫고 있었다.

89... 90...92...93.

분명히 위로 올라가려 힘차게 흔들던 발길질은 사실 아래로 곤두박질 치고 있는 것이었다. 너절한 몸뚱아리. 참을 수 없는 공포. 그러나 침착함. 로이는 차분해졌다. 그의 심장은 다르게 말했지만, 뇌가 제 기능을 하기엔 그의 뇌는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뇌수를 따라 흐르고 있는지도 몰랐다.

절망.

절망이었다.

참을 수 없는 가려움증처럼 가슴을 긁어버리는 그럼 절망에 로이는 웃음이 나왔다.

킥킥거리며 그는 웃었다. 즐거웠다. 사실 즐겁지 않았다. 우스웠다고 보는 게 옳은 표현일 것이다. 우습지 않은가. 유리병 속의 마리모처럼 떠다니는 그는 위를 향해 올라갈 힘을 잃었다. 오로지 할 수 있는 건 꺼져가는 생명 속에서 낙하하는 것 뿐이다. 이카루스. 오, 불쌍한 바보. 밀랍으로 얼기설기 이어 붙인 조잡한 날개로는 하늘을 횡단할 수 없다. 그의 깃털은 이미 곤두박질 치고 있었다. 목을 꺾어버린 닭처럼 붉은 벼슬이 내려간 불행한 놈. 그것이 바로 자신이었다.

관조적 입장에서 볼 때 로이는 자신에게 박수갈채를 쳐줄 수 있었다. 하나의 서커스 속에서 사자 아가리로 들어가는 생닭처럼 그가 그것과 같음을 부정할 수 없음에 로이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진녹색의 눈이 뿌옇게 반짝였다.

삶의 종착역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깊은 블루 홀이라니, 나쁘지 않았다.











사람은 죽음을 눈앞에 두면 차분해진다. 이제 영혼이 껍데기를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맹신론자들은 말한다. 인간은 물 속에서 떠다니다가 물 속에서 죽는다. 올리와 함께 숱하게 죽을 고비를 넘었던 그였지만 이번은 정말이었다. 초연함이 그를 좀먹는 중이었다. 산소통의 바늘이 붉은색을 가리켰다. 빨강은 위험. 위험, 조심, 아픔, 죽음. 나는 빨강. 빨갛게 물드는 시야. 아.

그는 눈을 감았다. 사실, 감겼다고 보는 게 맞겠지만. 어쨌든 거기서 거기 아닌가. 찬란하고 볼품없는 마지막, 심장을 타고 오르는 마지막 숨의 절규, 검은 장막 안에서의 소리 없는 비명이 블루 홀을 가득 채웠다.











눈을 떴다.










코를 타고 오는 비릿한 아픔이 그를 강타했다. 눈구멍이 경고하듯 울렸다. 붉게 인중을 향해 미끄러지며 모랫바닥을 적시는 방울들. 적응하지 못한-무지개의 파편처럼 반짝거리며 깨지는 시야. 작은 유리 조각들이 빛을 반사하는 것마냥 보이는 바다의 윤슬에 로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주인을 잃었던 카누만이 햇빛에 몸을 말리고 있었다. 로이는 급하게 스노클을 벗어던졌다. 입을 타고 짠물과 모래가 튀어나왔다. 위를 세척한 것처럼 그는 계속해서 물을 뱉었다.



그는 알 수 없었다. 이 상황에 대해 도무지 설명할 수 없었다. 이 세상은 논리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부정되는 순간이었다. 자신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손목에 매인 깨진 시계만이 수심의 길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150m. 

로이는 다이버 수트의 지퍼를 내렸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코피를 흘리며 짠물을 뱉어내는 빨간 사람. 적갈색의 머리카락은 겹겹이 소금 결정이 맺혀 꼭 스프링클을 뿌려놓은 듯했다. 이곳에서 파란 건 저 멀리 보이는 물구멍과 바다 뿐이었다.

그는 무신론자지만 신을 믿어야 할까 고민했다. 다이버 수트의 지퍼를 내려 드러낸 맨가슴엔 그의 작은 화살 펜던트가 심장 자리에 작은 자국을 만들어 낸 것을 볼 수 있었다. 오늘의 다이빙은 끝이었다. 어쩌면 앞으로의 다이빙도. 



그러나 인간은 호기심으로 이루어진 동물이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지만 그는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가벼운 티셔츠와 반바지로 태양 아래서 갈아입고는 그는 근처의 펍으로 트럭을 몰았다. 중간중간 어지러워 휘청였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도로에서는 그 혼자였다. 달려오는 차들도 없이 도로를 달리는 무법자(outlaw). 

펍에서 로이는 맥주 한잔을 주문했다. 지나가던 아이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는 지쳤지만 지저귀는 아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꼭 그의 딸을 생각나게 했기 때문이다. 리안, 그의 작고 소중한 아기 공주님. 신에게 감사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화살 펜던트를 손톱으로 긁으며 로이는 흥얼거렸다. 처음 들어보는 노래였다.


루스카, 루스카. 어디로 가나요? 나 여기 있어요.

검은 물 아래로 당신은 손을 뻗었죠.

그러나 아무도 당신을 보지 않아.

부끄럼쟁이 루스카. 상어와 문어와 물고기의 친구

루스카, 루스카. 뭘 하고 있나요? 나 여기 있어요.

푸른 물 위로 당신은 손을 뻗었죠.

그러나 아무도 당신을 원치 않아.

부끄럼쟁이 루스카, 수면 아래로 가야 하는 외톨이.


로이는 아이를 멈춰 세웠다. 그는 어린애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잘 알았다. 주인장에게 손가락을 흔들며 오렌지 주스를 주문했다. 아이는 얼른 그의 옆에 앉았다.


"꼬마야, 그 노래가 뭐야? 루스카는 뭐고?"

꼬마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엄마가 낯선 사람이랑 얘기하지 말랬어요. 아저씨는 여기 안 살죠? 종코 삼촌도 모르잖아요. "

"그래서 준비한 게 약소한 주스 컵이잖아. 어때, 신사. 기회를 좀 주지 그래."


꼬마는 주스를 한 모금 들이켰다. 작열하는 태양은 역시 아이에게 갈증을 선물해주고 있었다. 그럴 때 액체가 목구멍을 적시는 것을 마다할 인간은 그리 없음을 알고 있기에 로이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목울대가 세차게 꿀렁이자 얼마 되지 않아 주스 컵이 바닥을 드러냈다. 아이는 입을 닦고 말했다.


"아빠는 받은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어요. 좋아요. 어쩔 수 없죠. 루스카는 바다 괴물이에요. 심해에 살아요. 아주아주 몸집이 커다랗고 이빨이 뾰족뾰족해요. 빛을 못 받아 온몸이 하얗고 반짝인데요. 머리카락만 검고 저기 저 바다에 함부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잡아먹는다고 했어요."

"그럼 종코삼촌은 누구야?"

"종코삼촌은 종코삼촌이죠. 루스카랑 조금 친했데요. 근데 바다에 너무 깊게 다가가서 루스카에게 잡아먹혔어요. 그래서 몸도 못 찾았데요. 그래서 루스카는 친구가 없데요. 저도 본 적 없어요. 그런데 혹시 주스 한 컵만 사주실 건 아니죠? 여기 화이트 초코칩 쿠키가 진짜 맛있는데..."

"영악한 꼬마, 하나 먹으렴."

"고마워요! 아저씨도 루스카 조심하세요. 다이버 같은 데 너무 깊게 들어가면 루스카한테 먹힐걸요?"

"루스카가 어떻게 생겼길래. 그렇게 큰가?"


아이가 멈칫하다가 비웃었다. 로이는 기분이 조금 상하는 걸 느꼈다.


"장난하는 거에요? 한 100m는 넘을걸요?!"

"...그렇게나?"

"어... 적어도 20m는 넘을 거예요. 엄마아빠가 그랬어요."

"그래, 고맙다, 꼬마. "


로이는 뛰어가는 아이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몸의 소금 결정을 털었다. 주인장이 기겁하는 눈으로 로이를 째려보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루스카. 루스카. 로이는 흥얼거리며 목의 펜던트를 만졌다.











루스카, 심해괴물. 블루 홀 죽음의 안내자. 미친 소리 같겠지만 그는 그것을 보고 싶었다. 조금 미친 게 맞을지도 모른다. 아직 자신의 심장은 블루 홀 밑에 내던지고 온 것일지도 모른다. 초연한 얼굴로 로이는 얼굴을 문질렀다. 계속해서 문지르자 그는 노을을 볼 수 있었다. 새빨갛다. 붉은 해가 땅 아래로 낙하하고 새롭게 검푸른 밤이 찾아온다. 그는 홀린 듯이 달을 보며 운전대를 잡았다. 

"루스카, 루스카... 어디 있나요...루스카."

멜로디를 읊조리며 그는 밤의 도로를 달렸다. 낡은 트럭이 오늘 밤만은 조용했다. 세포가 숨을 쉬는 느낌이었다. 속도를 즐기며 하늘을 수놓는 하얀 별 가루들이 로이가 가는 길을 이정표처럼 가리켰다. 그는 가야 했다. 어디로. 어디론가로. 그의 심장의 고동이 멈출 곳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밤에 반짝이는 모래사장. 흰 별 가루를 빻아서 물 위에 펼쳐놓은 모래사장에서 로이는 누웠다. 장비는 있었다. 그러나 쓰기 싫었다. 언제 그 준비를 다시 한단 말인가. 술을 그리 마시지도 않았는데 그의 간의 크기는 몸집을 세게 불렸다. 스트레이트로 몸을 데웠던 데킬라와 라임, 그리고 약간의 소금이 그의 심장에 속삭였다. 가보라고. 로이 하퍼. 앞으로 가.


티셔츠와 반바지, 붉은 머리 로이 하퍼는 카누의 끈을 당겼다. 아무것도. 그 외에 다이빙 장비를 걸치지 않은 이 작은 망나니는 눈 깜짝할 사이에 블루 홀 위에 당도했다. 밤의 블루 홀은 황홀했다. 바다는 밤바다가 언제나 더 아름답다. 바다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하얀 달이 수다스럽게 그를 재촉했다. 

-들어가, 나바호의 바람. 화살처럼 과녁의 정중앙을 향해. 파고들어라, 붉은 빛.


로이는 끈을 자른 꼭두각시처럼 바다로 힘없이 몸을 넣었다. 잔물결이 그를 삼켰다.


.

.

.





얼마 되지 않아 물에 천천히 가라앉는 그의 몸뚱아리가 세차게 바다 위로 들어 올려졌다. 로이는 본인이 공중에 떠 있음을 실감했다. 엄청난 기침과 함께 로이는 귀를 막았다. 산을 울릴듯한 큰 목소리가-



"미-쳤--냐---인간---!!"



로이는 눈을 찡그리며 귀를 막았다. 뻑뻑한 고막이 터져버릴지도 몰랐다. 로이는 아래를 보았다. 하얗고 검고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그의 몸을 받치고 있었다. 그는 그를 감싸는 그림자에 위를 보았다. 그리고 말을 잃었다.


그것은, 그것은 아름다웠다. 그가 블루 홀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그것의 검고 기다란 촉수였다. 오팔처럼 달빛을 반사하는 색조가 옅은 피부, 오밀조밀 생긴 얼굴, 청록색으로 위험하게 반짝이는 인간의 것이 아닌 눈동자. 밤하늘을 떼어 붙여놓은 것 같은 머리카락. 작고 뾰족하고 가지런히 나 있는 하얀 이빨들, 당황한 것처럼 모으고 있는 손, 족히 50m는 될 것 같은 몸의 크기.


로이는 중얼거렸다.


"...루스카."


요정이 흥얼거리다가 성대를 긁어버린 것 같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그것은 말했다.


"그래--! 이 등신아!! 꼭 너 같은 놈들이 호기롭게 와서 지랄을--아, 목소리가 좀 크나--? 미안, 인간."



젠장, 젠장. 목소리하고 성격까지 젠장 맞게 그의 취향이었다. 로이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는 머리를 감쌌다. 아, 진짜 로이 윌리엄 하퍼 주니어의 인생은 오랜만에 비속어를 첨가해-그의 표현을 빌려 이야기 하자면, 좆됐다.



그의 취향은 심해 괴물이었다. 명쾌했다. 사실 심해 괴물이 그의 취향의 스트라이크존을 때려 부순 거지만. 로이는 눈물을 흘리며 배꼽 빠지게 웃었다. 

그를 보고 그것은 즉, 루스카는 오랜만의 정신병 걸린 인간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이 연약한 인간을 잘못 으깨서 또 불구를 만들 수 없었기에 조심스럽게 카누에 태웠다. 그 동안까지도 그 작은 빨간 인간은 낄낄대고 있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인간들은 심약했다. 불쌍한 상어들과 문어들보다도 몸이 약한 애석한 존재들이기에 루스카는 아량을 베풀기로 했다. 코까지 바다에 몸을 담그고 그는 작은 인간이 담긴 카누를 물치로 밀었다. 또 다른 인간들에게 발견되는 건 더 이상 사절이었다. 검고 거대한 촉수가 부드럽게 물살을 갈랐다.



얼마 되지 않아 카누는 모래사장에 턱 하니 놓였다. 루스카는 조금 짜증이 났다. 이 빨간 인간에게서 어제 구한 다이버 놈과 같은 냄새가 났다. 

'이놈은 자살희망자인가. '

짜증에 목의 아가미가 퍼덕거렸다. 붉고 검은 비늘들이 달빛에 반짝였다. 일단 이 얼빠진 인간 놈을 진정시켜야 했다. 저번에 살려준 그놈처럼 내버려 뒀다간 또 인간들이 찾아와 귀찮게 숨어 있어야 했다. 그는 몸의 크기를 줄였다. 이 인간과 엇비슷할 정도로 크기를 줄였다. 인간이 또 목소리의 크기 때문에 기절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인간은 언제나 귀찮은 존재였다. 그런데 이 빨간 인간은 그의 머리카락색마냥 얼굴도 새빨개졌다. 심해의 야광 오징어 트루디를 떠올리게 했다. 그 인간은 웅얼거리며 무언가 말을 하려 했다. 루스카는 얼굴을 디밀었다.


"뭐?"

"ㅇ름이...."

"뭐라고?"

"이...ㄹ이..."

"뭐-라고-?"

"이름이 뭐예요?"


루스카는 웃었다. 어이없음에서 나오는 웃음이었다. 지금까지 그의 이름을 물었던 놈이 있었던가. 그가 머리를 물었던 놈이 더 많았다. 혹은 놀라 뒤로 나자빠지거나 제 혼자 물 속에 머리를 집어넣던 놈들이 더 많았다. 루스카는 상어 이빨 같은 이들을 벌리며 미소 지었다. 인간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그게 왜 궁금하지, 인간?"

"어....름ㄷ우니까ㅇ."

"크게 말하는 게 네 손속에 이로울 것 같다만."

"청혼할 사람에 대해 이름을 묻는 게 예의일 것 같아서요."

"...뭐?"



진심으로, 루스카는 인간이 그 짧은 사이에 바닷물을 너무 많이 먹은 것은 아닐지 걱정했다. 심해를 닮은 촉수가 인간의 이마의 열을 쟀다. 조금 뜨거웠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인간의 체온은 언제나 뜨거웠기에 별로 문제 되지 않았다. 정말 머리가 돌아버린 걸까? 루스카는 고민했다. 이 인간의 머리를 쳐서 기억을 없애자니 이미 정신이 온전치 않아 보여 안타까웠다. 허리에서부터 시작되는 검고 반투명한 촉수들이 주인의 생각에 동조하듯 끄덕였다.








로이는 미치고 팔짝 튈 노릇이었다.


"전 정신이상자가 아닙니다만. 그냥 당신의 이름이 궁금해요. 어제 날 구한 것도 당신이죠? 루스카가 당신의 진짜 이름이 아니잖아요. 작은 인간이 고맙다는 말을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어요. 우리들은 본명을 알아야 진심으로 감사를 표현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부디 당신의 이름을 알려줘요."


로이는 혀는 기름장에 찍은 소고기마냥 현란하게 움직였다. 이 아름다운 괴물이 속아주기만 하면 됐다. 개탄스러운 인간의 호기심에 로이는 졌다. 급했다. 이름을 알고 싶은 마음이 인간의 생존본능을 굳건히 누르고 있었다. 그의 희뿌옇던 녹색의 눈은 어느새 밤바다의 빛을 반사하는 연녹빛으로 반짝거렸다. 열망, 환희, 황홀, 경탄스러움. 이 모든 긍정적 감정이 그의 앞에 서 있는 괴물에게 쏟아져 내렸다.


루스카는 부담스러웠다. 반짝이는 인간의 눈을 마주해본 적이 없었다. 보통은, 그러니까 일반적인 경우엔 말이다.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지 않나? 지금까지 모든 인간은 도와줘도 도망, 안 도와줘도 도망, 암초에서 쉴 때도 도망, 숨어있어도 도망, 전부 도망이었다. 그는 흥미가 생겼다.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제이슨 피터 토드. 그게 내 이름이다, 인간."


몇 십년 만에 혀에 올리는 그의 본명이었다. 자신이 어렸을 적 바다에 대고 속삭이던 어떤 어부의 이름이었겠지만 이젠 자신의 것이었다. 그건 분명했다. 그 스스로의 근원. 제이슨 토드. 그러니까 제이슨은 청록색의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로이는 어지러웠다. 지독하게 취향인 미모의 괴물이 자기 이름을 밝히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는 입안의 볼살을 세게 깨물었다. 비릿한 쇠의 맛이 이게 현실임을 상기시켰다. 젠장 로이 하퍼. 젠장.



"나는 로이 윌리엄 하퍼 주니어, 그러니까 로이에요. 기억해둬요."

"기억해둬요?"

"로이, 이 두글자도 못 외우진 않겠죠?"

"무례한 인간. 마음에는 드네."



젠장할, 젠장. 로이는 심장이 아팠다. 화살 모양의 펜던트가 계속해서 그의 가슴에 표식을 남겼다. 그는 사랑에 빠졌다.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것도 인간이 아닌 괴물과. 작은 입이 이를 보이며 휘어지는 모습에 로이는 심장을 조금 눌렀다. 귀까지 울리는 이 고동이 제이슨에게 닿기를 원했다.

얼굴이 붉게 물들어갔다. 면피로 향하는 혈류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은 적은 없었다. 그의 전 연인과도 가랑비에 옷 젖듯이 빠져들었는데, 지금은 누군가 머리를 종으로 때리는 기분이었다. 불쌍한 로이 하퍼. 사랑에 빠지면 귓가에 종이 울린다고 했던가. 그는 그것을 여실히 느끼는 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이의 다이버 샵은 한 달 동안 문을 닫기로 했다. 스타시티의 다이버들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지만 늘어지는 전화음과 메시지를 남겨달라는 가벼운 사장의 목소리가 발랄하게 마침표를 장식했다.

그러니까 사장은 오늘도 벨리즈에 출석하고 있는 중 이다. 블루 홀 위로 카누를 향하며 검은 촉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햇빛이 반짝이며 그의 코에 주근깨를 심고 있었다. 그가 사랑하는 이는 작은 돌섬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촉수는 늘어져 흐느적거리고 야행성인 그의 취향의 집합체는 미간이 풀린 채 누워있었다. 로이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오밀조밀한 얼굴에 눈을 감고 있는 그의 괴물. 로이는 입꼬리를 올렸다. 조심스럽게 그 이마에 입술을 대는데, 눈이 마주쳤다.

로이는 눈을 휘며 행복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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